스릴과 전율의 포레스트 스파밸리 & 포레스트12

  포레스트 스파밸리 & 포레스트12는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가창로 891에 있는 스릴과 전율이 느껴지는 사계절 이용이 가능한 야외물놀이 시설과 스파를 보유하고 있으며, 전 세계 희귀 나무들로 구성된 포레스트12는 호텔과 캠핑장에서 숙박이 가능하며, 야간에는 별빛축제를 열고 있다. 이용문의는 053-608-5000(http://www.spavlley.co.kr) (대구 달성군 한방‘휴(休)’사업단정보)

* 포레스트 스파밸리, 포레스트12: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가창로 891

 

이영일/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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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진 유람선 달성호 출항! 빨리오이소∼!!

  달성군(군수 김문오)은 피아노장승과 느림의 우체통이 있는 사문진나루터에서 사문진주막촌 대박 신화에 이어 낙동강 최초의 유람선 “달성호” 운항을 시작했다.

  사문진나루터는 과거 최대의 물류 집산지로서 한국 최초 피아노가 1900년 3월 26일 대구지역 교회로 부임했던 미국인 선교사 사이드보탑(1874∼1908) 부부가 낙동강 배편으로 실어와 이곳 사문진 나루터로 들여왔고 대구 종로(지금의 약전골목)에 있던 자신의 숙소까지 운반하였다. 이 때 피아노를 운반했던 마을 사람들은 피아노를 귀신통으로 불렀다. 그로부터 1년 뒤 파커 선교사가 다시 한 대의 피아노를 들여와 대구 신명학교에 기증하였다.

  일제 강점기 한국영화 ‘임자 없는 나룻배’의 촬영지로 추정되는 등 역사적 의미가 큰 장소이다. 현재는 도심형 수변공원으로서 사문진주막촌은 맛있기로 소문난 주막촌 소고기국밥과 부추전에 막걸리가 유명하다,

  12인승 나룻배로 주막촌에서 출발하여 흑두루미와 맹꽁이 서식지인 자연생태계의 보고 달성습지를 보고 다시 주막촌으로 왕복 2km에 약 20분, 24톤 규모의 72명 정원 유람선은 주막촌∼달성습지∼ 세계적인 건축가 하니 라시드(Hani Rashid)가 설계한 디아크(The ARC)와 전국의 강보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강정보 수변 정경∼옥포신당리∼주막촌에 이르는 약 18km에 1시간 운항한다.

  사문진 주막촌과 유람선의 백미는 천지를 붉게 물들이는 낙조이다. 석양이 하늘과 낙동강을 붉은 빛으로 물들이면 함께 이 곳을 찾은 연인과 가족들은 자연스레 감탄사를 연발하며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게 되는 대구시민의 명품휴식 공간이다. 이용 문의는 사문진주막촌: 053-632-3338, 달성군시설관리공단: 635-7461 (달성군 2014년 10월 군정보지)

* 사문진 주막촌과 나루터: 대구광역시 달성군 화원읍 사문진로1길 42-1

 

이영일/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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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고 오래된 청도 석빙고(淸道 石氷庫, 보물 제323호)

  청도 석빙고(淸道 石氷庫, 보물 제323호)는 겨울철에 자연 얼음을 저장하였다가 봄과 여름에 사용하기 위한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땅을 파고 만들어둔 창고로 양쪽 벽을 이어주던 반원아치 형태의 홍예(虹霓)가 4군데 남아있을 뿐 천장은 완전히 무너져 불완전한 상태이다.

  석빙고의 빙실 바닥은 길이 14.75m, 폭 5m의 동·서로 뻗은 긴 장방형 구조로, 서쪽에 문을 두었으며 계단을 따라 바닥 안으로 들어갈수록 점차 경사졌고 가운데에는 물이 빠지는 길(배수구)을 두고 동쪽에 구멍을 만들어, 석빙고 밖의 작은 개울로 물이 빠지도록 하였다. 다듬은 돌로 윗 부분을 반원형 홍예(虹霓)로 들어 올리고 잡석으로 벽을 쌓았다. 환기 구멍을 뚫어 놓았던 것으로 예상되지만 현재는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다.

  석빙고의 입구 왼쪽에는 동왕 39년(1713)에 석비(石碑)가 서 있는데, 앞면에는 공사에 동원된 인원수, 쓰인 자료, 비용 등을 기록해 놓았고, 뒷면에는 비를 세운 날짜와 함께 관계된 사람들의 이름을 적어놓았다. 그 중에 ‘계사(癸巳)년’이라는 기록이 있어 조선 숙종(肅宗) 39년(1713)에 만들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전국적으로 석빙고 6기(基)의 국가지정 문화재가 있으며 지금까지 남아있는 경주 석빙고(보물 제66호) 다음으로 큰 규모이고 쌓은 연대도 가장 오래된 것이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경북 청도군 화양읍 동교길 7 (동천리)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photo/storyView.do?categoryType=4&contentsSeq=10821

 

이영일/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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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도읍성(淸道邑城,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

  청도읍성(淸道邑城, 경상북도 기념물 제103호)은 처음 축성된 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 때부터 있었으며, 당시에는 돌과 흙을 섞어 쌓은 것이었는데, 현재의 규모는 조선 선조 23년(1590)에 돌로 고쳐쌓아 선조 25년(1592)에 왜의 침략에 대비하기 위하여 동래에서 서울로 향하는 주요 도로변에 성을 수축하였는데 청도군수 이은휘(李殷輝)가 완성하였다고 한다. 읍성은 지방관아가 소재한 고을의 군이나 현의 주민을 보호하고, 군사적·행정적인 기능을 함께 하는 축성을 말한다.

  청도읍성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은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지은 성으로, 산성과 평지성의 중간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읍지』의 기록에 따르면 성의 둘레는 1570보(1.88km)이고, 높이는 5자 5촌(1.7m)이며 동문, 서문, 북문이 있었고 성의 평면형은 사각형에 가깝다. 임진왜란과 여러 번의 화재로 소실되기도 하였지만 수 차례 개축하여 읍성을 유지해 왔고, 고종 7년(1870) 남문을 건립하여 4문을 갖추게 되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읍성 철거정책에 따라 도시화와 도로개설로 문루는 대부분이 헐리었고, 지금은 성벽의 바닥과 일부와 동·서·북쪽에 문터가 남아 있었다. 문화재적 가치를 인정받아 1995년 경상북도 기념물 지정하고 성의 기저부가 전역에 걸쳐 남아있고, 각종 지리지와 고지도에 자세한 기록이 있어 발굴조사와 고문헌 고증을 거쳐 북문 공북루(北門 拱北樓)을 중심으로 성벽과 옹성 등 성곽을 복원해 나가고 있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경북 청도군 화양읍 교촌리, 동삼리, 동천리 일원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photo/storyView.do?categoryType=4&contentsSeq=10814

 

이영일/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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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역사가 된 명나라 장수 두사충(杜師忠)의 모명재(慕明齋) 이야기

  모명재(慕明齋)는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 장수로서 우리나라에 원군으로 왔던 두사충(杜師忠)이 귀화한 후에 그 후손들이 1912년에 세운 재실(齋室)로 그의 호인 ‘그리워할 모(慕)’, ‘명나라 이름 명(明)’자를 써서 ‘명나라를 그리워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두사충(杜師忠)은 시성(詩聖) 두보의 후손으로 1592년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군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조선에 원군으로 와서 지세를 살펴서 진지에 적합한 장소를 만들도록 터를 잡아 주는 임무인 수륙지획주사(水陸地劃主事)였다. 그는 명나라 최고의 풍수지리가였고 조선 팔도를 유람하며 풍수이론을 갈고 다듬어 두사충결(杜師忠訣)이란 풍수서를 펴내었다. 지금도 풍수를 배우는 사람이라면 한번쯤 봐야하는 책이라고 한다. 1598년, 이순신 장군이 전사하고 7년간의 전쟁도 끝나고, 일본의 침략으로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한 조선을 보면서 직감할 수 있었는데 바람 앞의 등불은 ‘조선’이 아닌 바로 ‘명나라’였다. 명(明)이 기울고 청(靑)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두사충은 청의 신하가 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어서 조선 사람이 될지언정 오랑캐 백성이 될 수는 없다 생각하고 조선에 귀화하여 대구에 터를 잡았다. 조선의 산세와 지세를 훤히 꿰뚫고 있던 두사충은 오래 전부터 대구를 마음에 둔 터여서 처음 정착한 곳은 지금의 경상감영공원자리다. 그자리는 ‘하루에 천냥이 나오는 명당’으로 오늘날 대구의 상업중심지가 되었으니 그의 풍수가 신통방통하게 들어맞은 셈이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곳이 경상감영(경상도를 관할하던 관청) 부지로 결정되자 두사충은 나라를 위해 그 땅을 흔쾌히 내어 놓는다. 그의 갸륵한 마음에 감동한 조정은 지금의 계산동 땅을 하사하였으나 이 땅마저도 추위에 떠는 백성들의 의복을 해결하기 위해 뽕나무를 심고 가꾸게 했다. 계산동 일대를 뽕나무 골목으로 불리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경상감영공원, 계산동 뽕나무 골목 이외에도 두사충은 대구 곳곳의 역사와 이야기가 되어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두사충(杜師忠)의 묘(墓)는 모명재에서 오른쪽으로 5분여 정도만 올라가면 있다. 두 번의 전쟁을 치른 장수답게 늠름한 ‘무인석’과 작지만 기품이 느껴지는 ‘문인석’이 묘 양쪽을 지키고 있다. 그리고 묘지목으로 ‘배롱나무’를 볼 수 있는데, 꽃말은 ‘떠나는 벗을 그리워하다’로 고인을 먼 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하는 묘지에 잘 어울리는 나무다. 또한 나무껍질이 얇아 속이 비치는 것처럼 보이는데 삿된 생각을 하지 않고 청렴하게 살겠다는 선비들의 삶을 상징한다고 하여 향교나 서원에 심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에서 보는 배롱나무가 더욱 아린 이유가 무엇일까? 배롱나무는 원래 중국이 원산지로 비록 그는 이 땅에 흙이 되었지만 중국에 뿌리를 둔 배롱나무가 그를 한껏 끌어안으며 고국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주고 있다.

   모명재(慕明齋) 건물은 경산 객사가 헐리자 그 재목을 사가지고 와 두사충의 묘소 앞에 지은 것인데 1966년 건물을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모명재는 네모반듯한 대지 위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대문을 통해 들어가면 모명재가 앞쪽에 있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겹처마 팔작 기와집으로 지어졌으며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들이고 앞쪽에는 반칸 규모의 퇴칸을 두고 있다. 1966년 노후로 인하여 중수가 있었지만 그 규모와 구조는 당시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 20세기 초, 대구지역 재실 건축양식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재실은 네모반듯한 대지에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정면 4칸, 측면 3칸 규모에 좌우 1칸 온돌방, 중앙 대청 2칸, 전면 툇마루, ‘一’자형 평면을 이루고 있다. 가구(架構, 목조건축 짜임새 전체를 일컫는 말)는 무고주(無高柱, 외부 기둥 외에 내부 기둥이 없는 것) 5량가(도리개수를 말함)의 견실한 구조로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로 만들어졌다. 가운데 대청 2칸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설치하고, 각 방마다 다른 편액이 걸려있는데, 왼쪽 방의 ‘경모당(敬慕堂)’은 후손들이 두사충(모명)을 공경한다는 뜻이 담겨있고, 오른쪽 방의 ‘숭정유루(崇禎遺樓)’는 숭정이 남긴 누각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여기서 ‘숭정(崇禎)’은 명나라 마지막 황제를 말한다. 대청에 붙은 ‘형봉재(兄峰齋)’는 두사충의 유언에 따라 ‘형제봉’에 묘를 썼기에 붙여졌며, ‘이락헌(二樂軒)’에서 ‘이락(二樂)’은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 가운데 두번째 즐거움에 해당하는 것으로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이락헌’은 하늘과 땅에 한 점 부끄럼이 없는 당당한 삶을 누리는 집이란 뜻이다. 거연천석(居然泉石)은 자연에서 편안하게 사는 모습을 의미한다. 이렇듯 모명재 편액에는 후손들이 지향해야하는 삶의 자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명정각(命旌閣)은 모명재의 부속건물로 두사충의 7대손인 두한필의 효행을 알리기 위해 세운 효자각이다. 두한필은 순조 23년(1823)에 태어나 고종 30년(1893)에 생을 마감하였는데 부모에 대한 효성이 지극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런 효행을 알리기 위해 지어진 건물이 명정각이라고 한다.

   모명재(慕明齋)의 대문에 만동문(萬東門) 현판(懸板)과 안의 다양한 편액(扁額)들이 걸려 있다. 대문에 달려있는 만동문은 ‘백천유수 필지동(百川流水必之東)’라는 말에서 따온 것인데 모든 하천은 동쪽으로 흘러간다는 말로 ‘그 근본을 잊지 않겠다’는 뜻이고 명을 그리워하여 호를 ‘모명’이라 바꾼 두사충을 모시기 위해 지어진 모명재(慕明齋)도 ‘그리움’이라는 하나의 맥락에서부터 점철(點綴)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명재(慕明齋) 기둥에 붙은 주련(柱聯)은 이순신이 두사충에게 쓴 시로 두 사람의 각별한 우정을 느낄 수 있다. 봉정두복야(奉呈杜僕射); 두보야에게 드리는 시 – 북거동감고(北去同甘苦); 북으로 가서는 고락을 같이 했고/ 동래공사생(東來共死生); 동으로 와서는 생사를 함께 했네/ 성남타야월(城南他夜月); 성곽 남쪽 타향의 달밤 아래에서/ 금일일배정(今日一杯情); 오늘은 한 잔 술로 정을 나누세 - ‘복야’는 당시 두사충의 벼슬 이름이다. 모명재의 비석은 두사충의 묘소 앞 비문을 다시 새겨서 신도비(神道碑)로 세웠는데 이 비문을 이순신 장군의 7대손인 삼도수군통제사 이인수가 지어 주었으니 나라의 경계를 넘어선 아름다운 교우(交友)가 세대 간의 우정인 세교(世交)로 이어진 흔적이라 할 수 있다. (대구광역시 문화유산정보) -임진왜란 당시 조선과 명나라 연합군이 평양성을 탈환하는 장면을 그린 병풍, 이순신 장군 영정. 1952년 장우성 그림 아산 현충사 -  

* 문화재 소재지: 대구광역시 수성구 달구벌대로 525길 14-21(만촌동 715-1)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photo/storyView.do?categoryType=4&contentsSeq=10810

 

이영일/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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