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扶餘 窺岩里 金銅觀音菩薩立像, 국보 제293호)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扶餘 窺岩里 金銅觀音菩薩立像, 국보 제293호)은 1970년에 충남 부여군 규암면의 절터에 묻혀 있던 무쇠솥에서 다른 하나의 관음보살입상과 함께 발견된 보살상으로 높이는 21.1㎝이다.

  입상 머리에는 작은 부처가 새겨진 관(冠)을 쓰고 있으며, 크고 둥근 얼굴에는 부드러운 미소를 띠고 있다. 목에는 가느다란 목걸이를 걸치고 있고, 가슴에 대각선으로 둘러진 옷은 2줄의 선으로 표시되었다. 양 어깨에서부터 늘어진 구슬 장식은 허리 부분에서 자그마한 연꽃조각을 중심으로 X자로 교차되고 있다. 치마는 허리에서 한번 접힌 뒤 발등까지 길게 내려와 있는데 양 다리에서 가는 선으로 주름을 표현하고 있다. 오른손은 엄지 손가락과 검지 손가락으로 작은 구슬을 살짝 잡고 있고, 왼손은 아래로 내려져 옷자락을 잡고 있다. 보살이 서 있는 대좌(臺座)는 2중의 둥근 받침에 연꽃무늬가 새겨진 형태로 소박한 느낌을 준다.

  입상 얼굴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미소와 비례에 맞는 몸의 형태, 부드럽고 생기있는 조각수법을 통해 7세기 초 백제시대의 불상임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국립부여박물관 (동남리)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photo/view.do?categoryType=1&contentsSeq=11466

 

이영일/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고앵자/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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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리석탑(東南里石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4호)

  동남리석탑(東南里石塔,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04호)은 국립부여박물관 앞마당에 자리하고 있는 탑으로, 석목리 논절부락의 고려시대 옛 절터에 있던 것을 이곳으로 옮겨 세웠다.

  전체의 무게를 지탱해주는 기단(基壇)을 2층으로 마련하고, 그 위로 5층의 탑신(塔身)을 올려놓고 있는데, 아래층 기단은 일부만 남아있고, 탑신의 4층 몸돌은 없어진 상태이다. 위층 기단의 맨윗돌은 탑신의 1층 몸돌을 괴어주는 부분 주위로 넓게 테두리를 두른 뒤 연꽃무늬를 새겨 장식하였다. 탑신의 각 몸돌은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으며, 2층 몸돌부터 갑자기 높이가 줄어들어 1층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두텁고 무거워 보이는 지붕돌은 밑면에 3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윗면은 거의 수평을 이루고 있으며, 네 귀퉁이는 희미하게 들려 있다.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을 받쳐주던 받침돌만 남아있다.

  돌을 짜놓은 수법이 소박하고 다듬은 솜씨가 서투르나, 고려시대 후기 당시의 석탑양식을 잘 간직하고 있어 양식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관북리 36-1번지 국립부여박물관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photo/view.do?categoryType=1&contentsSeq=11460

 

이영일/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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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 국보 제288호)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 국보 제288호)은 백제 때 사리를 보관하는 용기로, 능산리 절터의 중앙부에 자리한 목탑터의 심초석(心礎石) 위에서 발견되었다.

  석조사리감 출토 당시 이미 사리감은 폐기된 상태였으므로 사리 용기는 없었다. 사리감은 위쪽은 원형, 아래쪽은 판판한 높이 74㎝, 가로·세로 50㎝인 터널형이다. 감실(龕室) 내부의 크기는 높이 45㎝ 정도로 파내어 턱을 마련하였는데 내부에 사리 장치를 놓고 문을 설치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조사리감실의 좌·우 양 쪽에 각각 중국 남북조 시대의 서체인 예서(隸書)풍의 글자가 10자씩 새겨져 있는데, 명문(銘文)의 내용은 성왕(聖王)의 아들로 554년 왕위에 오른 창왕(昌王)[위덕왕(威德王)]에 의해 567년 만들어 졌으며, 성왕(聖王)의 따님이자 창왕(昌王)의 여자 형제인 공주가 사리를 공양하였다는 내용이다.

  감실의 입구 양쪽에는 세로쓰기[縱書] 방식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를 새겨놓았는데 ‘백제 창왕[위덕왕] 13년(567)에 공주가 사리를 공양했다’라는 내용으로 성왕(聖王)의 위업을 기려 만든 것으로 추정된다.

  이 사리감은 백제 역사 연구에 새로운 금석문 자료로서 백제와 중국과의 문화교류의 일면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이며, 사리를 봉안한 연대와 공양자가 분명하고, 백제 절터로서는 절의 창건연대가 당시의 유물에 의해 최초로 밝혀진 작품이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국립부여박물관 (동남리)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photo/view.do?categoryType=1&contentsSeq=11454

 

이영일/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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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동 정지원 명 석가여래삼존입상(金銅 鄭智遠 銘 釋迦如來三尊立像)

  금동 정지원 명 석가여래삼존입상(金銅鄭智遠銘釋迦如來三尊立像, 보물 제196호)은 하나의 광배에 불상·보살상을 함께 주조한 삼존불(三尊佛)로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광배(光背)의 뒷면에는 정지원(鄭智遠)이라는 사람이 죽은 아내를 위하여 금으로 불상을 만들어 저승길을 잘 가게 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있다.

  본존불의 얼굴은 갸름하면서 살이 오른 모습으로 눈·코·입의 윤곽이 큼직해서 시원해 보인다. 양 어깨를 감싼 옷은 U자형의 주름을 지으면서 묵중하게 흘러내렸는데, 양 팔에 걸친 옷자락은 새의 날개깃처럼 양 옆으로 길게 뻗쳐있다. 손은 손바닥이 정면을 향하고 손끝은 아래로 향하고 있다. 부처의 몸 전체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의 양쪽 끝에는 합장하고 있는 두 협시보살이 있다. 오른쪽 협시보살은 본존불과 동일한 수법이며 길게 날리고 있는 옷자락은 광배의 가장자리를 이루고 있다. 왼쪽 협시보살은 얼굴만 남아 있고 신체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머리광배 위에는 연꽃 속에 앉아 공양하고 있는 모습의 작은 부처 1구가 새겨져 있다.

  이 불상은 조각양식이나 표현 수법이 고구려의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金銅延嘉七年銘如來立像, 국보 제119호)과 같은 계통으로 중국 북위시대에 유행한 불상양식을 수용한 것이다. 금동계미명삼존불(국보 제72호)이나 금동신묘명삼존불(국보 제85호)과 같은 양식에 속하지만 그보다 조각수법이 약간 떨어지고 무늬가 간략화 되었으며 조형적인 탄력도 많이 감소되었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국립부여박물관 (동남리)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photo/view.do?categoryType=1&contentsSeq=11447

 

이영일/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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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扶餘 唐 劉仁願 紀功碑, 보물 제21호)

  부여 당 유인원 기공비(扶餘 唐 劉仁願 紀功碑, 보물 제21호)는 당나라 장수 유인원(劉仁願)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비(碑)이다. 부소산에 세 조각으로 깨진 채 흩어져 있던 것을, 그 자리에 비각을 세워 복원해두었다가 해방 후 국립부여박물관으로 옮겨 놓았다. 비는 비몸돌의 앞면이 조금 깨어져 나갔고, 머릿돌도 부분적으로 깨어져 있으며, 비문은 몸돌 앞·뒷면에 새겨져 있으나 심하게 닳아 있어서 알아보기가 힘들다.

  비 몸돌과 머릿돌은 하나의 돌로 이루어져 있는데, 머리 부분은 각이 없이 둥글다. 특히 머릿돌은 여섯 마리의 용 조각이 매우 사실적인데, 좌우 양 쪽에서 세 마리씩의 용이 올라가 서로의 몸을 휘감고 중앙에 있는 여의주를 서로 다투고 있다. 이는 당나라 전기의 화려한 수법을 보여주는 부분이기도 하다.

  비문은 유인원의 가문과 생애 두 부분으로 되어 있는데, 그의 생애에 대한 부분은 주로 그가 당나라 태종에 의해 발탁된 이후의 활동상을 적고 있다. 그는 645년 당 태종이 고구려를 공격할 때 뛰어난 공을 세웠으며, 660년에 소정방과 더불어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킨 뒤 백제 유민들의 부흥운동도 평정하였다. 그 이후의 행적은 비문이 지워져 더 이상 알 수 없다.『대동금석서(大東金石書)』에서는 이 비문을 유인원이 썼다고 하고 있으나, 이 설은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비가 세워진 시기는 통일신라 문무왕 3년(663)으로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국보 제9호)에 비문을 새긴지 3년 후이다. 비록 당나라 장수의 공적비이지만 비문 중에 의자왕과 태자 및 신하 700여 명이 당나라로 압송되었던 사실과 부흥운동의 중요내용, 폐허가 된 도성의 모습 등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상황을 아는데 도움이 되고 있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금성로 5, 국립부여박물관 (동남리)

* 부여 정림사지 오층석탑: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17010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photo/storyView.do?categoryType=4&contentsSeq=11443 

 

이영일/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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