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물 제1호 서울 흥인지문과 건축 실명제로 쌓은 서울 한양도성

  서울 흥인지문(서울 興仁之門. 보물 제1호)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서울 성곽 도성(都城)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인(仁)을 북돋우는 문’이라는 뜻의 흥인지문은 다른 문보다 한 글자가 많아 현판도 세로 두 줄로 쓰였다. 좌청룡인 낙산과 흥인문이 있는 곳이 지세가 낮아 이를 보완할 목적으로 지(之)자를 넣었다고 전한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흥인지문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외부의 침략을 받기 쉬운 지형을 보충하기 이해 성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도록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함이며 적을 공격하기에도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종로 288 (종로6가)

  서울 한양도성(서울 漢陽都城. 사적 제10호)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조선 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과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숭례문, 흥인지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파괴된 도성은 숙종 때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공사에 참여한 감독과 기술자의 실명은 성벽에 기록했다. 한양도성 낙산 구간의 끝자락, 동대문성곽공원 바깥 성벽에는 1706년(숙종 32)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돌에 글자를 새긴 각자성석이 있다. 낙산공원 일대의 한양도성을 축성 할 때 축성시기, 공사를 맡은 구간,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 공사 일자 등이 적혀 있어 축성의 비밀을 여는 열쇠가 된다. 공사는 철저하게 구간별 책임제로 진행되었고 성벽이 무너질 경우에도 이를 책임지게 했다. 각 구간을 어느 지역에서 쌓았는지는 고스란히 남겨놓았다. 지금도 낙산 성곽 길을 걷다 보면 음성, 황간, 영동 등 충청도 지명이, 낙산 정상에서 흥인지문(동대문) 사이에는 무안, 김제, 정읍 등 전라도 지명이 보인다. 

  태조 때 축조된 성곽은 규격이 일정하지 않고 다양한 크기의 깬 돌을 사용했다. 세종 때는 아래쪽은 크고 위로 올라가면서 돌이 작아진다.

  한양도성의 길이는 1만8627km로 약 70% 구간만 원형으로 남아 있다. 성터가 높고 험한 곳은 석성을, 평탄한 곳은 토성을 쌓았다. 성 둘레 5만9500척(尺)을 600척씩 97개 공구로 나누고 천자문 순서대로 일련번호를 매겨 책임을 맡겼다. 백악산을 기준으로 첫 글자인 천(天)자로 시작해 시계방향으로 돌아 97번째 글자 조(弔)자로 끝난다. 천(天)자부터 일(日)자까지 1∼9공구는 동북면(평안도 황해도), 10∼17공구는 강원도, 18∼58공구는 경상도, 59∼73공구는 전라도, 74∼97공구는 서북면(함경도)이 축성을 하였고 1421년(세종 3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 23일까지 전국에서 백성 32만2400명과 기술자 2211명, 수령과 인솔자 115명을 불러들려 전 구간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문화재청과 서울특별시 관광정책과 문화유산 정보,) - 커피나무, coffee tree -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누상동 산1-3번지 외

 

이영일/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press157

고앵자/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press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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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광통교에 신덕왕후의 정릉 병풍석이 왜?

  서울 청계천 유적 중 광통교지(廣通橋址, 사적 제461호)의 광통교는 조선시대 광통방에 위치하고 있어 광통교 혹은 광교라고 불렀고, 소광통교와 구분하여 대광통교로도 불렀으며, 일명 큰광교・큰광통교로도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북광통교(北廣通橋)로, ‘승정원일기’에는 광충교(廣沖橋)로도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도성 내에서 가장 큰 다리로 길이 약 12m, 폭 15m로 길이보다 폭이 넓은 다리였다. 경복궁-육조거리-종루-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남북대로를 연결하는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였다.

  광통교는 조선 초 도성건설 때 놓인 것으로 보이며 처음에는 토교(土橋)였다가 태종 10년(1410)에 큰 비로 다리가 유실되어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 옛 터의 병풍석 등 석물을 사용하여 석교(石橋)로 놓이게 되었으며, 이때 신장석을 다리 교대석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중 일부가 거꾸로 놓여 있다. 이 신장석은 세련된 당초문양과 구름문양이 새겨져 고려 말 조선 초기 전통문양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아름다운 문양석이 거꾸로 놓여있는 것은 조선 초기 왕권장악에 있어 신덕왕후와 정적관계에 있던 태종 이방원의 의도적인 복수심의 산물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을 낳고 있다고 한다.

  경진준천(庚辰濬川)을 1760년에 한 지 2년 후인 영조 38년(1762) 다리의 기초 부분 개축과 난간을 보수하였다. 이후 1899년 종로에서 남대문 구간의 전차가 가설되면서 광통교 동쪽에 전차선로가 놓이게 되어 일부 훼손되었고, 1910년 8월에는 광통교 동쪽에 놓여 있던 전차선로를 복선화하면서 광통교 위로 전차가 다니게 되어 철근콘크리트교로 확장됨에 따라 다리 본체는 도로 밑에 묻히게 되었다. 1923년 청계천 암거공사 때 정릉의 신장석으로 이루어진 광통교 북측 교대 한가운데에 콘크리트 하수관을 박아 하수를 배출하였다. 1958년에는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광통교의 난간만 창경궁・창덕궁 등으로 이전되었고 다리 본체는 그대로 다시 묻히게 되었다. 이후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교각은 고가도로 아래 묻혔었는데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발굴되어 다시 복원하였다. 신덕왕후의 능침을 지켜야할 신장석이 육백여년 가까이 묻혀 있다가 청계천 복원공사로 인해 햇볕을 보게 된 것이다. 물길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저항력을 최소화 하도록 교각을 마름모꼴로 세웠다. 광통교에 사용한 신장석과 우석(隅石)은 조선시대 최고의 석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서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서울 청계천 유적 – 광통교지, 수표교지와 오간수문지(서울 淸溪川 遺蹟 -廣通橋地, 水標橋址와 五間水門址, 사적 제461호)는 청계천은 개천(開川, 인공적으로 물길을 만든 하천)으로서, 도성을 둘러싼 목멱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등에서 발원하여 도성 중심부를 서에서 동으로 흘러 중랑천에서 합류하며, 그 길이는 11Km에 달한다.

  청계천에는 모전교(毛廛橋), 광통교(廣通橋), 장통교(長通橋), 수표교(手標橋), 하랑교(河浪橋), 효경교(孝經橋), 마전교(馬廛橋), 오간수문(五間水門 – 도성 개축 시에 물길을 고려하여 청계천에 놓은 성벽의 하부구조물로 동대문에서 광희문으로 연결되는 부분에 축조되어 있었다고 한다. 다섯 칸의 홍예문이 있었으며, 상부에 성벽이 축조되어 있었던 사진이 전하고 있다.), 영도교(永渡橋) 등 많은 다리와 수문이 설치되었으며 그 변화상은 도성의 변화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들 다리 관련 유구들은 조선시대 토목기술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설치 및 변천과정의 연구를 통해 도시기능의 확대 및 도성관리체계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관철동 270-1번지 외, 중구 남대문로 9 외

* 서울 정릉이야기: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14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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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영휘원 산사나무(서울 永徽園 산사나무. 천연기념물 제506호)

  서울 영휘원 산사나무(서울 永徽園 산사나무. 천연기념물 제506호)는 높이 9.0m, 가슴높이 둘레 2.0m에 나이는 150년으로 추정되는 노거수(老巨樹)이다. 한 아름이 훨씬 넘는 큰 규모에 줄기의 골 모습도 특징적이고 수형 또한 아름다워 우리나라 산사나무를 대표하며, 엄귀비의 무덤 앞에 위치하는 문화적 가치도 있다.

  산사나무(Large Chinese Hawthorn, 꽃말: 유일한 사랑) 장미과(薔薇科 Rosaceae)에 속하는 낙엽교목으로 키는 6m 정도 자라고 가지에 뾰족한 가시가 있다. 잎은 어긋나고 잎가장자리가 깊게 갈라져 깃털 같고 턱잎이 있다. 흰색의 꽃은 5월 무렵 가지 끝의 산방(繖房)꽃차례로 무리져 핀다. 꽃은 5장의 꽃받침잎과 꽃잎으로 되어 있으며, 수술과 암술의 수가 많다. 아가위라고도 부르는 열매(아기사과모양)는 공처럼 생긴 핵과(核果)로 10월에 붉게 익는다. 가을에 열매로 화채를 만들어 먹거나 날것으로 먹으며, 햇볕에 말린 열매를 산사자(山査子)라고 하여 한방에서 치습제·평사제로 사용하며, 고기를 먹은 후에 소화제로 먹기도 한다. 가지가 많이 달리고 흰색 꽃과 붉은색 열매가 달려 정원이나 공원에 많이 심는다. 양지바른 기름진 토양에서 잘 자라며 내한성(耐寒性)은 있으나 옮겨 심으면 잘 자라지 않으므로 옮겨 심을 때 유의해야 한다. 흔히 정원에 심고 있는 미국산사나무(C. scabrida)는 분홍색 꽃이 핀다. 늦봄에 피는 하얀 꽃과 가을에 익는 아기사과 모양의 빨간 열매가 특징으로 열매는 산사자(山査子)라 하여 해열제로 쓰인 기록이 조선왕조실록에 있고 산사주(山査酒)를 담가 약술로 먹기도 한 전통나무이다. 그러나 현재는 산사나무 중 이 나무만큼 크게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을 정도로 드물게 되었다.

  문화재 노거수는 크기가 큰 은행나무·소나무·느티나무 등 당산목 위주로 보존되고 있는 반면, 민속생활과 함께 해온 다양한 종류의 전통나무들이 생활양식의 변화로 이용이 줄면서 방치되거나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영휘원 산사나무는 생활문화와 깊은 관련이 있는 전통나무 중 수종을 대표할만한 우수한 자원으로 확인되었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205번지 (영휘원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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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슬픈 역사를 간직한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

  서울 영휘원과 숭인원(서울 永徽園과 崇仁園. 사적 제361호)의 영휘원(永徽園. 사적 제361호)은 조선 제26대 고종황제(高宗皇帝)의 후궁(後宮)인 순헌황귀비(順獻凰貴妃, 1854∼1911) 엄씨의 원(園, 무덤)이고, 숭인원(崇仁園)은 조선 마지막 황태자인 의민황태자(懿愍皇太子) 영왕(英王, 영친왕이라고도 함)의 큰아들 이진(李晉, 1921∼1922)의 원이다. 원(園)이란? 왕의 사친(私親) 또는 왕세자와 그 빈(嬪)의 무덤이다.

  서울 영휘원(서울 永徽園. 사적 제361호)의 순헌귀비 엄씨는 엄진삼의 장녀로 파란만장한 삶을 산 여인이다. 8살에 입궐하여 명성황후의 시위상궁이 되었다가 32세 때 고종의 승은을 입었다. 이로 인해 명성황후의 진노를 사 궁 밖으로 내쫓겼다가 1895년 명성황후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 지 5일 만에 환궁하여 고종황제의 총애를 받았다. 1897년 아들 은을 낳아 귀인이 된 후 순헌황귀비 칭호를 받고 경선궁에 살았다. 궁에 다시 들어온 귀비 엄씨는 일본의 압박에 시달리던 고종과 왕세자를 비밀리에 러시아 공사관으로 탈출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사건이 바로 아관파천으로 러일전쟁의 원인이 되었으며, 고종이 일본의 강압에 의해 물러나고 순종이 즉위하게 된다. 귀비 엄씨는 마흔이 넘은 나이에 영친왕(1897~1970)을 낳았다. 그 후 여성들의 신교육을 위해 1905년 양정의숙과 1906년 진명여학교을 설립하였고, 명신여학교(현 숙명여자대학교)가 재정난을 겪자 200만평 땅을 기증하여 근대 사학 발전에 크게 공헌을 하였다.

  순헌귀비는 의민황태자 영왕의 어머니로 일본이 고종황제를 태왕으로, 순종황제는 조선왕으로, 순종황제의 이복동생인 의민황태자를 영친왕으로 강등시킨 시기를 보냈으며, 조선총독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 황태자로 책봉된 의민황태자가 1907년 교육이라는 명목으로 일본에 인질로 일본에 강제로 잡혀간 후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훈련받는 모습과 활동사진으로 보게 된다. 나라를 잃은 슬픔과 아들에 대한 그리움에 사무쳐 지내다 1911년 7월 20일, 춘추 58세에 서거하여, 순헌(純獻)의 시호가 내려지고, 8월에 양주 천수산(天秀山)에 무덤을 만들고, 원호를 영휘라 하였다. 신위는 청와대 경내 칠궁에 있는 덕안궁에 모셔져 있다. 의민황태자는 1963년 귀국 하였으나 1970년 병으로 돌아가셨다.

  봉분에는 곡장이 둘러지고, 석물은 석양(石羊), 석호(石虎), 상석(床石), 혼유석(魂遊石)과 망주석(望柱石), 장명등(長明燈), 문인석(文人石), 석마(石馬) 등이 배치되어 있다. 부속 건물로는 정자각(丁字閣), 홍살문(紅箭門), 비각(碑閣) 등이 있다.

  서울 숭인원(서울 崇仁園. 사적 제361호)의 이진은 1921년 8월 일본에서 태어나 부모(고종의 넷째아들의 의민황태자 영왕, 이방자여사)와 일시 귀국하였으나, 이듬해 5월, 생후 9개월 만에 세상을 떠났다. 당시의 풍습은 자식이 부모보다 먼저 죽으면 장례를 치룰 수가 없었으나, 순종황제가 이진의 죽음을 애석하게 여겨 어른의 장례와 같게 치르도록 하고 원호를 숭인(崇仁)으로 내리고, 할머니인 순헌귀비 엄씨의 영휘원 남측에 조영하였다.

  숭인원의 상설(象設)은 돌도 채 되지 않은 어린 원자의 무덤이지만 원의 형식을 갖췄지만 사초지가 낮고 봉분이나 석물들이 작게 만들어져 있으나 영휘원과 비슷하다.

  조선 황실의 후손을 끊으려는 일본의 정략: 영친왕은 형인 순종이 즉위하면서 황태자가 되었으나 11세에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다. 원래 약혼녀가 있었으나 일제에 의해 강제로 파혼하고, 1920년 일본 왕실의 나시모토 마사코(이방자)와 정략결혼을 하였다. 조선 황실의 후손을 끊어놓으려는 일본의 노력에고 불구하고 1921년 아들 진을 얻었으나 9개월의 짧은 생을 살고 눈을 감았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204-2

정보: chA 이영일/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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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 영릉 석물(舊 英陵 石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호)

  구 영릉 석물(舊 英陵 石物.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42호)은 조선 4대 세종(世宗, 1397~1450, 재위: 1418~1450)과 그의 비 소헌왕후(昭憲王后, 1395~1446) 심씨의 릉으로 태종 헌릉(獻陵)의 서쪽 산등성이, 즉 오늘날의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산13번지 일대에 자리하고 있었다. 세종 28년(1446) 소헌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조성되기 시작 하였는데, 세종 32년(1450) 세종이 서실에 합장되고 문종 2년(1452) 세종대왕신도비가 건립되면서 그 공역(工役)이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 그런데 예종 원년(1469)에 구 영릉의 위치가 풍수지리상 길지가 되지 못한다는 논의가 있어 영릉은 현재의 여주 영릉으로 천장(遷葬)하게 되었다.

  구 영릉은『국조오례의』의 치장제도에 따라 조성된 마지막 능이자 조선 초기 왕릉을 대표하는 능이었다. 구 영릉은 동분이실(同墳異室)의 석실을 채택하였고, 이실의 예에 따라 문관석인상과 무관석인상을 각각 2기, 석양과 석마, 석호를 각각 4기씩 제작하였다. 석실 내부에는 고구려 계통의 고분에서 보이는 사신도, 일월성신도를 그렸으며 봉분은 십이지신상이 조각된 병풍석으로 둘렀고, 그 바깥쪽으로 다시 외박석(外薄石)과 난간주석을 설치하였다. 아울러 구 영릉에는 세조의 광릉부터는 보이지 않는 신도비도 세워졌다. 이와 같은 대규모의 장대한 왕릉제도는 구 영릉 이후 최초로 조성된 문종의 현릉과 세조의 광릉부터는 적용되지 않게 된다. 또한 같은 세종의 릉이라도 현재의 영릉은 예종 때 조성된 것이기 때문에 구 영릉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처럼 조선 초기의 대표적인 왕릉인 구 영릉을 구성하는 ‘구 영릉 석물’들은 구 영릉 조성과 시기를 같이 하여 세워진 것으로 영릉이 여주로 천장될 때 운반상의 어려움 때문에 땅에 묻혔다가 1973∼1974년 발굴당시의 품목과 수량이 다 남아 있지는 않다. 각각 4기씩 조성되었을 석양상과 석마상은 현재 각기 2기씩 남아 있고, 2기였던 망주석은 현재 1기 중 일부만이 남아 있다. 장명등과 석인상은 다 갖추어져 있으나 장명등의 경우 개석이 망실되어 있다. 세종대왕신도비는 이수와 비신만 남고 귀부가 망실된 채 발굴되었다. 혼유석은 동측 부분이 절단된 상태이고 원래 4기였을 고석(鼓石)은 1기만 남아 있다. 병풍석은 발견되지 않았다. 난간주석은 일반적으로 하나의 릉에서는 크기가 일정한 양상을 보이는데, 세종대왕기념관내에 있는 7기의 난간주석은 2기가 나머지 5기와 크기와 제작기법 면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는 바, 어느 것이 구 영릉의 난간주석인지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석호상은 1974년 발굴 이후 2기가 현재의 영릉으로 이전되어 갔고, 나머지 2기는 발굴 전 도굴 되었다가 회수되어 단국대박물관에 옮겨졌다 하나 역시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죽석(竹石)으로 추정되는 석물이 세종대왕기념관 내에 있으나 발굴 당시 구 영릉 봉분 터 주위에서 죽석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기록이 있는바 죽석에 대해서도 추가 확인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번에 지정되는 석물은 추후 확인이 필요한 것과 서울 지역 외 석물들을 제외한 총 13기이다.

  이와 같이 조성 당시의 석물의 품목과 수량이 다 남아 있지는 않지만, 구 영릉 석물들은 조선 초기 왕릉의 규모, 석물 배치방식과 제작수법 등을 알 수 있게 하고, 당시의 양전척, 주척 등을 환산할 수 있게 하며, 나아가 세종 시대의 국력과 문화발달 정도를 추정할 수 있게 한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 56, 세종대왕기념관 경내 (청량리동)

 

정보: chA 이영일/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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