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백 매봉산 바람에 언덕과 귀네미 마을 고랭지배추밭

  태백 매봉산 고랭지배추밭(太白 梅峰山 高冷地白菜田)은 50만평의 드넓은 배추밭이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면 마치 푸른 초원을 연상하게 하는 배추밭 풍경이다. 8월인데도 거센 바람에 추위를 느끼는 산 정상 바람에 언덕 능선에는 풍력발전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고랭지 배추밭으로 30만평의 귀네미 마을과 함께 새벽 일출과 함께 사진가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곳이다.

  매봉산(梅峰山)은 원도 원주시 신림면과 영월군 수주면의 경계에 있는 산이다. 높이는 1,095m로, 치악산국립공원의 동남쪽 끝자락에 솟아 있는데, 남대봉 싸리재를 타고 내려온 능선에 솟은 봉우리이다. ‘매봉산’이라는 명칭은 산 정상에서 매로 꿩과 토끼 등을 사냥했다고 해서 붙여진 것이다. 태백산맥(太白山脈)의 여맥인 중앙산맥(中央山脈) 중의 한 산으로, 서북쪽에 대덕산(大德山, 1,307m), 서남쪽에 함백산(咸白山, 1,573m), 동쪽에 육백산(六百山, 1,244m) 등이 솟아 있다. 산정 부근에서 북쪽 사면의 1,000∼1,250m 사이에는 고위평탄면이 넓게 나타나는데, 이곳까지 도로가 가설되어 있으며 고랭지채소의 재배가 대규모로 행하여지고 있다.

  귀네미마을고랭지배추밭(태백시 하사미동)은 삼척시 하장면에 광동댐이 생기면서 수몰지역에 살던 37가구가 집단으로 이주하여 1988년에 마을이 형성 되였다. 척박한 산비탈 땅을 개간하여 돌을 치우고 일궈서 경사도가 높은 비탈이라 경운기로 농사를 경작 할 수 없어 소로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사람의 노동력으로만 일을 해야 하는 어려움이 열한 농가가 떠나고 현재는 28가구만 남아 고랭지 배추밭을 일궈가고 있다. 귀네미마을은 귀래미(貴來美)라는 뜻에서 유래된 말로 귀하고 아름다운 무엇인가 오리라는 기대로 끊임없이 배추 농사를 이어 가고 있다. 원래는 우이곡(牛耳曲)이라 하여 소의 귀처럼 생긴 골이라고 했으나 지금은 귀네미로 불리고 있으며 행정구역으로는 태백시 이지만 삼척의 환선굴의 위에 자리한 해발 1000m의 산촌지역으로 옛 고서인 정감록에도 피난처로 기록이 되여 있을 정도로 깊은 산골이다.

  금년에는 예년에 없던 가뭄이 이어 졌는데도 빈 곳이 없이 심어졌고 포기도 팔월 말과 9월 초를 기다리며 알알이 포기도 커 가고 있었다. (자료출처: 두산백과 문화유산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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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일/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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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실 혼례 때 동뢰연(同牢宴)에 사용한 깔개(交拜席)와 동자상(童子像)

  조선(朝鮮) 왕실(王室) 혼례(婚禮) 때 동뢰연(同牢宴)에 사용한 깔개(交拜席)는 부부가 몸과 마음을 같게 하라는 의미의 예식인 동뇌연(同牢宴) 때 사용된 교배석(交拜席)이다.

  본래 ‘두 성씨(姓氏)가 합하여 만복(萬福)의 근원이 된다’는 의미의 ‘이성지합만록지원(二姓之合萬祿之源)’이라는 글자가 직조되어 있었을 것이나, ‘이二’자의 윗부분과 ‘록祿’자 이하 부분은 잘려나갔다.

  동뇌연(同牢宴-부부가 되어 몸과 마음을 하나로 하다)은 왕과 왕비가 술과 음식을 함께 먹고 부부가 되는 의식으로 오늘날의 결혼식에 해당한다. ‘동뇌(同牢)’란 ‘제사 때 바치는 짐승인 희생(犧牲)을 부부가 합해 먹는다’는 뜻이며 부부의 존비(尊卑)를 같게 한다는 상징성이 있다. 동뇌연은 주로 왕비와 대비가 생활했던 창경궁 통명전, 경희궁 광명전, 창덕궁 대조전 등에서 거행되었다. 왕과 왕비는 교배석(交拜席)의 자리로 나아가 왕은 양陽인 동쪽에 앉고 왕비는 음陰인 서쪽에 마주보고 앉았다. 그리고 반으로 쪼갠 두 개의 표주박에 술을 따라 마시는 합근례(合巹禮)를 행함으로써 부부간의 화합과 결합을 나타냈다.

  왕실 혼례 때 동뇌연(同牢宴)에 사용한 동자상(童子像)은 작은 신장(身長)에 비해 얼굴이 크고, 눈과 입은 작게, 코는 크고 뭉툭하게 표현되었으며, 표면에 채색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다.

  19세기 왕의 혼례과정을 기록한「가례도감의궤」(왕비와의 혼례)와「가례청등록」(후궁과의 혼례)에는 각각「동뇌연도(同牢宴圖」와「동뇌연배설도同牢宴排設圖」가 그려져 있어, 당시 동뇌연 때에 쓰였던 각종 기물들의 배설을 알 수 있다. (자료출처: 국립고궁박물관)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효자로 12 국립고궁박물관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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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서울 地藏庵 木造毘盧遮那佛坐像)

  서울 지장암 목조비로자나불좌상(서울 地藏庵 木造毘盧遮那佛坐像, 보물 제1621호)은 지장암 대웅전의 삼신불상(三身佛像) 중 중앙에 있는 불상으로 1924년 강재희(姜在喜) 거사가 지장암을 중창하면서 이곳에 모셨다고 전한다. 앉은 높이가 117.5cm에 달하는 중형의 목조불상으로 보존 상태가 양호하다.

  이 불상에서는 푸른 명주바탕에 붉은 글씨로 쓴 조성발원문(造成發願文)이 발견 되었다. 그 발원문에서 이 불상의 원 봉안처는 조선시대 왕실의 부녀자들이 출가(出家) 수행(修行)하던 자인수양사(慈仁壽兩寺)이며, 광해군(光海君) 정비(正妃) 장열왕비(章烈王妃, 文城郡夫人 廢妃 柳氏/ 1576~1623)가 광해군과 세자, 세자빈, 본인 및 작고한 친정부모, 작고한 대군과 공주의 천도를 위해 모두 11존의 불상과 불화를 동시에 조성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상은 11존상 중 하나이며, 현재까지 밝혀진 유일한 예다.

  불상은 당대 최고의 고승 벽암 각성(碧巖 覺性)의 감수 아래 현진(玄眞), 응원(應元), 수연(守衍), 옥명(玉明), 법령(法玲), 명은(明訔), 청허(淸虛), 성인(性仁), 보희(普熙), 인균(印均), 경현(敬玄), 지수(志修), 태감(太鑑) 등 13명의 조상화원(造像畵員)과 성옥(性玉), 승일(勝一), 밀연(密衍), 의인(義仁) 등 4명의 치장(治匠)이 참여하였다. 이들은 17세기 각기 하나의 유파를 형성하며 시대를 풍미했던 조각승들로 당시 자인수양사(慈仁壽兩寺) 불사(佛事)의 중요성을 짐작할 수 있다.

  지장암 비로자나불상(地藏庵 毘盧遮那佛像)은 당당한 불신표현에 얼굴의 표정은 순박하면서도 위엄이 있다. 몸체는 등에서 약간 앞으로 굽었고 법의의 옷 주름 표현이 부드러우며 볼륨감이 있고 자연스러우며 생동감이 넘친다. 이러한 얼굴표현은 현진과 수연이 으뜸 조각승(首畵員)으로 참여한 불상들과 비교되며, 신체와 옷 주름의 표현은 응원과 인균이 만든 유파의 불상들과 양식적으로 상통한다. 비로자나불의 지권인(智拳印) 수인(手印)은 오른손으로 주먹 쥔 왼손을 덮은 모습인데, 이러한 수인은 전대에는 찾아 볼 수 없고 17세기 이후에 새롭게 대두된 것이다.

  불상은 광해군의 정비인 장열왕비가 직접 발원하여 조성한 왕실발원 불사라는 역사적인 가치와 17세기 전국에 걸쳐 활약한 대표적인 조각승들이 참여하여 공동작업으로 이룩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큰 의의가 있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창신2동 626-3번지 (지장암)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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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일. 고앵자/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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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소에 채찍을……,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仁穆王后御筆 七言詩)

  인목왕후 어필 칠언시(仁穆王后御筆 七言詩, 보물 제1220호)는 선조(宣祖)의 계비(繼妃)인 인목왕후(仁穆王后, 1584~1632)가 서궁(西宮)에 유폐(幽閉)되었을 때 쓴 칠언절구(七言絶句)의 한시(漢詩)이다.

  대북파(大北派)의 위세에 시달리던 자신을 늙은 소에 비유하고, 광해군(光海君)을 그 늙은 소에 채찍을 가하는 주인에 비유했다. 왼쪽 하단에 숙종(肅宗)이 남긴 발문이 있다.

  “老牛用力 已多年 늙은 소 힘쓴 지 이미 여러해/

領破皮穿 只愛眠 목 부러지고 가죽 헐었어도 잠만 잘 수 있다면 좋겠다./

犁耙已休 春雨足 쟁기질, 써레질 이미 끝나고 봄비도 충분한데/

主人何苦 又加鞭 주인은 어찌하여 괴롭게도 또 채찍을 가하네”

  칠언절구(七言絶句) 28자를 3행으로 배열하고(각행 10자) 글자 사이를 조절하였다. 조선시대 열성(列聖)의 어필(御筆)이 많이 모각되었는데, 이처럼 모각된 어필의 원적(原蹟)이 남아 있는 예는 매우 드물다. 특히 왕후의 글씨는 간찰체제로 자필 또는 서사상궁의 필치로는 전하고 있지만 한자 대자(大字)는 명성왕후의 예필을 빼면 현재로서는 ‘인목왕후 칠언시(仁穆王后 七言詩)’외에 사례가 발견 되지 않고 있다. 인목왕후의 글씨는 선조어필과 비슷하며 그의 딸 정명공주(貞明公主)가 따라 썼다.

  인목황후(仁穆王后)의 본관은 연안(延安). 연흥부원군(延興府院君) 김제남(金悌男)의 딸이다. 1602년(선조 35)에 왕비에 책봉되었으며, 1606년에 영창대군(永昌大君)을 낳았다. 이때 광해군이 세자의 지위에 있었는데 당시 실권자인 유영경(柳永慶)은 적통론(嫡統論)에 입각하여 적출인 영창대군을 세자로 추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선조가 급사하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유영경 일파는 몰락하고 대북정권이 들어섰는데 이들은 왕통의 취약성을 은폐하기 위하여 선조의 첫째 왕자인 임해군(臨海君)을 제거하고 이어서 영창대군을 폐서인시킨 뒤 살해하고, 대군의 외조부 김제남을 사사시키고, 인목왕후를 폐비시킨 다음 서궁(西宮)에 유폐시켰다. 이러한 패륜행위는 결국 정변의 구실을 주게 되어 인조반정이 일어났으며 이에 따라 인목왕후는 복호되어 대왕대비가 되었다.

  인조의 왕통을 승인한 왕실의 장(長)의 위치에 처하면서 가끔 국정에 관심을 표하여 한글로 하교를 내리기도 하였다. 금강산유점사(楡岾寺)에 친필로 쓴『보문경(普門經)』의 일부가 전하고, 인목왕후필적(仁穆王后筆跡) 첩(帖)이 남아 있다. 시호는 소성정의명렬광숙장정인목왕후(昭聖貞懿明烈光淑莊定仁穆王后)이고, 능호는 목릉(穆陵)이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강원도 강릉시 율곡로 3139번길 24 오죽헌시립박물관(죽헌동)

* 조선왕릉 구리 동구릉의 목릉: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13458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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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일/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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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의 한중록과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

  한중록閑中錄(朝鮮, 연세대학교 학술정보원)은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가 남긴 일종의 회고록인 통칭 한중록閑(恨)中錄의 20여종의 이본 중 하나이다. 한글 필사본으로, ‘고종실록高宗實錄’에는 한중록閑中錄이 읍혈록泣血錄과 한중만록閑中漫錄으로 언급되어 있는데 이와 동일한 명칭의 필사본이다. 여성 특유의 섬세한 필치로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묘사함으로써 조선시대 궁중문학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책으로 그 시대의 치열했던 당쟁의 현장이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어 사료적 가치를 더한다.

  한중록閑中錄은 크게 두 차례의 집필 과정을 거쳐 완성되었다. 첫 번째 시기는 아들 정조가 조선 최대의 원행인 을묘원행을 통해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 전배를 마치고 화성행궁華城行宮에서 회갑연까지 벌여주었던 1795년(정조 19년)경이었다. ‘내가 언제 이렇듯 인생을 한가하게 즐길 때가 있었던가.’ 당시 혜경궁 홍씨는 이처럼 기꺼운 마음으로 환갑을 맞이하면서 지난날을 돌이켜보며 붓을 들었다. 그러기에 이 책의 최초의 제목은 ‘한가한 가운데 썼다.’라는 뜻의 ‘한중록閒中錄’이었다. 여기에서 혜경궁 홍씨는 임오화변壬午禍變이 비정상적인 성격을 보이던 영조와 그로 인해 정신질환에 걸린 사도세자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라고 설명하면서, 그로 인해 야기된 모든 갈등은 바로 영조의 손자이자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만이 풀어낼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그렇지만 당시 아내로서 남편을 적극적으로 구명하는 태도를 보이지 않았고, 아울러 사위의 죽음을 방관한 친정아버지 홍봉한을 비호함으로써 최근 일부 역사가들에 의해 심약한 궁중 여인이 아니라 냉혹하고 권력지향적인 정치인으로 규정되기도 한다. 두 번째 집필은 정조가 죽은 지 1년 후인 1801년(순조 1년), 정순왕후에 의해 그녀의 동기인 홍낙임이 죽고 많은 친척들이 유배형에 처해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그 무렵 기대했던 가문의 신원은 고사하고 오히려 핍박이 가중되자 혜경궁은 피를 토하는 듯 한 비통한 심정이 되어 붓을 들어서 제목이 읍혈록泣血錄이다. 그러므로 한중록恨中錄은 1795년의 한중록閒中錄과 1801년의 읍혈록泣血錄이 합쳐진 책이다.

  그녀는 죽기 전에 이 책을 순조의 생모인 가순궁 박씨에게 맡겼다. 훗날 순조가 친히 정사를 관장하게 되면 정순왕후 김씨 일파를 몰아내고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의 억울함을 풀어주기를 바랐던 것이다.

  혜경궁 홍씨 한시惠慶宮 洪氏 漢詩(朝鮮, 홍기원 소장)는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가 희수喜壽인 77세에 지은 친필親筆 칠언칠구七言七句 한시漢詩로 사도세자思悼世子에 대한 그리움을 담고 있다. 시詩의 처음과 끝에 ‘희수喜壽’ 낙관落款과 ‘혜경궁惠慶宮’이라고 명시된 궁호宮號 낙관落款이 각각 찍혀 있다.

  ‘사악한 이야기는 어찌 군자의 귀에 머물겠는가/ 한가한 시름은 달인의 눈썹에 미치기 어려워라/ 고인(사도세자)은 지금 누구와 한 통 술을 마시는가/ 지난 일은 이미 외로운 베개 밑의 꿈이 되었네

  시詩에 나타난 혜경궁의 마음은 남편 사도세자에 대한 그리움과 살아남은 이의 허망함이었다. 28세에 청상과부가 되어 50년을 구중궁궐에 혼자 살아온 여인의 그 처절한 삶을 견디게 한 것은 오직 아들 정조를 지키는 일이었다.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는 1795년 을묘년, 혜빈 홍씨는 봄빛이 화창한 윤2월 9일 아침, 창덕궁 돈화문을 나와 남편 사도세자가 묻혀있는 화성으로 향했다. 정조는 새로 축조한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인 현륭원 참배와 함께 그해 61세가 된 어머니 혜빈惠嬪 홍씨洪氏의 회갑연回甲宴을 준비했다. 그것은 등극과 동시에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일성을 내뱉었던 그가 영조 이래 강력한 신권을 휘두르며 자신의 입지를 뒤흔들던 노론 세력을 억누르고 진정한 군주로서의 위용을 과시하는 매우 특별한 이벤트였다. 이윽고 화성의 현륭원에 당도한 그녀는 28세의 나이로 비명에 죽은 남편 사도세자의 묘소를 어루만지며 오랜 세월 삼켜왔던 눈물을 마음껏 쏟아냈다.

  정조正祖는 이런 어머니를 위로하기 위해 화성행궁에서 회갑연을 열어주고 혜빈惠嬪이었던 그녀의 궁호宮號를 혜경궁惠慶宮으로 올려주었다. 아울러 아버지 사도세자思悼世子에게 장헌莊獻이라는 시호를 바쳤다. 홍씨가 젊은 날 비정한 정치놀음의 희생양으로 남편을 잃은 뒤 수많은 정적들의 위협 속에서 아들 정조를 지켜내기 위해 살아온 30여 년 간의 고행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혜경궁 홍씨 황후 추봉 옥보惠慶宮 洪氏 皇后 追封 玉寶(大韓帝國, 1899, 광무 3)는 혜경궁 홍씨를 의황후懿皇后로 추봉追封하면서 만든 어보御寶이다. 고종이 직계 5위의 왕과 왕비를 황후로 추봉할 때 혜경궁 홍씨도 황후로 추봉 되었다. (자료출처: 국립고궁박물관, 이상각 작가) - 봉수당 진찬도(奉壽堂 進饌圖,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66호), 화성행행도 華城行幸圖 -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효자로 12 국립고궁박물관(세종로 1-57)

* 수원화성 행궁: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15969

* 화성 융건릉: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6965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photo/storyView.do?categoryType=4&contentsSeq=12026


이영일/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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