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謹    賀    新    年

 

丁酉年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 安眠島 꽃지 할미 할아비 바위(명승 제69호)의 아름다운 해넘이와

Nepal Annapurna의 萬年雪과 찬란한 아침 - 

 

* 네팔 안나푸르나 만년설의 아침 영상:

http://tvpot.daum.net/v/v64d7Sv6SXvBQ7HQd6dkRkv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拜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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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문화와 예학의 자취, 논산 돈암서원(論山 遯巖書院)

  논산 돈암서원(論山 遯巖書院, 사적 제383호)은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 덕을 기리기 위해 인조 12년(1634)에 창건되었고, 1660년(현종 원년)에 현종이 ‘돈암(遯巖)’이라는 현판을 내려주어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으며, 김집(金集)·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을 추가로 모시었다. 원래 김장생의 아버지 김계휘가 경회당(景晦堂)을 세워 학문연구에 힘쓰고 이후 김장생이 양성당(養性堂)을 세워 후진양성을 하였다. 후세에 이 경회당과 양성당을 중심으로 서원을 세우고 김장생을 추모하여 후학에 힘쓴 서원이다. 서원은 훌륭한 분들의 제사를 지내고 후학을 양성하던 지방교육기관이다.

  돈암서원(遯巖書院)의 입지환경(立地環境)은 고정산 줄기가 이어지는 중간쯤에 위치하고 있다. 동쪽을 향해 앞으로 들판을 가로질러 연산천이 흐르고 뒤로는 고정산줄기가 배산을 형성하는 배산임수 형태를 하고 있다. 전면 좌측에는 대둔산을 끼고 있다. 돈암(遯巖)은 서원이 창건 되었던 논산시 연하면 하임리 숲말 산기슭에 있는 바위 이름으로, 현재 서원의 자리에서 약 1.5km 떨어진 곳에 있다.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1548∼1631)은조선 예학(禮學)의 태두로, 예학파의 주류를 형성하였으며, 서인을 중심으로 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이뤄 조선 유학계의 영남학파(嶺南學派)와 쌍벽을 이룬 인물이다. 율곡 이이(栗谷 李珥)에서 성리학(性理學을 배웠으며 예론을 깊이 연구한 대가로,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을 쏟은 인물이다. 문하에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이유태(李惟泰)·유계(兪棨) 등 4백여 유학자를 배출하였다.

  서원(書院)의 경내배치는 평지에 전학후묘식(全學後廟式)으로 배치하였으나 전면에 위치한 강당이 중심축에 놓여 있지 않고 약간 서쪽으로 비켜 직각 배치하고 있다. 전면 좌측에 강학공간인 응도당과 전면에 보이는 양성당, 그 뒤로 사당인 숭례사가 위치하고 있다. 양성당(養性堂) 앞에 돈암서원 원정비, 양성당 뒤편 서쪽에 장판각 등 문화유산이 배치되어 있다.

  논산 돈암서원 응도당(論山 遯岩書院 凝道堂, 보물 제1569호)은 돈암서원의 학문을 갈고 닦던 강당으로 서원 옛 터에 남아있던 것을 1971년 지금 있는 곳으로 옮겼다. 강학공간 전면에 직각방향으로 틀에서 배치되어 있다. 건물을 옮길 때 기와(起臥)에 적힌 기록을 발견하면서 오래된 건물임을 알게 되었다. 규모는 앞면 5칸·옆면 3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과 비슷한 맞배지붕이다. 대들보는 크고 웅장하며, 생동감 있는 비늘 무늬는 살아있는 용이 꿈틀대는 듯 익공의 화려함과 화반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건물이다. 창방위에 놓인 화반형 조각은 기둥사이마다 1개씩 얹었다.

  조선 중기 이후 서원 성격 중 강당으로는 보기 드물게 큰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서원 건축양식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독특한 양 옆면에 하나를 덧댄 가첨지붕(눈썹처마) 구조와 지붕형태를 가지고 있다. 옛 양식을 잘 따르고 있는 건물로 강당 건축 연구에 좋은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brd/board/277/L/menu/260?brdType=R&thisPage=1&bbIdx=12816&searchField=&searchText=

  돈암서원 숭례사(遯岩書院 崇禮祠,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55호)는 주향(主享)인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 우암 송시열(尤菴 宋時烈),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해마다 2월과 8월 중정일(中丁日)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유경사(惟敬祠)는 인조 12년(1634)에 세웠다. 제사를 지내고 학문을 이어받고자 설립한 조선시대 사립교육기관이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앞쪽 열은 툇간이다. 실내에는 우물마루를 깔았으며, 전퇴는 벽돌바닥이다. 주간의 앞면에만 사분합 띠살문을 달고, 옆면은 회벽을 쳤다. 공포는 이익공 외출목집과 동일한 수법으로 짜 올렸다. 내부의 양봉은 전통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숭례사에 제향을 지내기 위해 출입하는 내삼문(內三門)은 사당 앞의 어칸과 양협칸을 별도로 하나씩 세우고 문과 문 사이에는 담장이 쳐져 있다. 담장에는 “지부해함(地負海涵)-땅이 온갖 것을 지고 바다가 모든 물을 받아주듯 포용하라./ 박문약례(博文約禮)-지식은 넓히고, 행동은 예의에 맞게 하라./ 서일화풍(瑞日和風)-좋은 날씨 상서로운 구름, 부드러운 바람과 단비 즉,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해주고, 웃는 얼굴로 대하라.” 계 김장생과 그의 후손들의 예학정신(禮學精神)을 가장 잘 보여주는 12개의 글자를 새겨 놓았다.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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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암서원 원정비(遯巖書院 院庭碑,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366호)는 서원 내에 자리하고 있는 비로, 서원을 세우게 된 배경과 위패를 모신 조선시대 문인 사계 김장생(1548∼1631) 선생의 행적 및 사원의 구조 등에 관해 적고 있다. 비는 높직한 사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지붕돌을 올린 모습으로, 조선 현종 10년(1699)에 세운 것이다. 송시열이 비문을 짓고, 송준길이 글씨를 썼으며, 비몸 앞면에 전서체로 새긴 비의 제목은 김만기의 글씨이다.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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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돈암서원 장판각(遯岩書院 藏板閣), 논산시 향토유적 제9호)은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우물마루를 깔았다. 장판각에는 김장생의 부친 김계휘 당시의 사실을 기록한『황강실기(黃岡實記)』·김장생의 문집인 사계전서(沙溪全書)』· 김집의 문집인『신독재전서(愼獨齋全書)』등과『경서변의(經書辨疑)』·『가례집람(家禮輯覽)』·『상례비요(喪禮備要)』등의 목판이 보존되어 있다. 김장생, 깁집, 김계휘의 문집과 왕실의 하사품인 벼루, 전적등과 책판이 보존되어 있다.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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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회당(靜會堂)은 고요하게 몸소 실천하며 수행한다는 뜻으로 사계 선생의 부친인 황공께서 강학하던 건물이며 대덕산자락의 고운사 터에서 1954년에 옮겨온 정면 4칸, 측면 2칸으로 후면 열 가운데 2칸은 마루방을 두고 우물마루를 깔았다.

  서원에는 홍살문(紅箭門)과 하마비(下馬碑), 산앙루(山仰樓), 입덕문(入德門), 김장생의 부친 황강 김계휘선생 정회당 사적비(黃岡 金繼輝先生 靜會堂 事蹟碑), 동재 거경재(東齋·居敬齋-우러르고 받드는 마음으로 삼가고 조심하는 태도를 가짐), 서재 정의재(西齋·精義齋-자세한 의의),전사청(典祀廳) 등 최근 복원한 건물들도 있다.

  돈암서원(遯巖書院)은 고종 8년(1871)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 이후에도 남아 보존된 47개의 서원중의 하나로,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했던 전통있는 곳이다. 돈암서원을 비롯한 9개 서원은 현재 유네스코(UNESCO)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해 준비 중에 있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문화유산자료 )

* 문화재 소재지: 충남 논산시 연암면 임3길 24-4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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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영시, 한국관광협동조합 회원사 초청 관광팸투어 실시

  통영시(시장 김동진)는 한국관광협동조합(이사장 이정환, (주)한국드림관광 회장) 조합원 및 언론사 기자 등 37명을 초청하여 26일(월)부터 27일(화)까지 1박 2일간 통영시의 관광자원을 소개하고 동양의 나폴리 통영의 관광 상품개발을 위한 팸투어를 실시하였다.

  이번 팸투어는 통영 삼도수군통제영(統營 三道水軍統制營, 사적 제402호) 답사, 통제사(統制使)는 충청·전라·경상도의 삼도수군을 통할하는 통제사가 있는 본진을 말하는 것으로, 삼도수군통제영을 줄여서 표현한 것이다.

  선조 26년(1593) 임진왜란(壬辰倭亂) 당시 이순신(李舜臣)의 한산진영(閑山陣營)이 최초의 통제영이다. 지금의 통영시 관내에 통제영을 짓기 시작한 것은 선조 36년(1603) 때의 일이다. 제6대 이경준(李慶濬) 통제사가 이곳에 터를 닦고 2년 뒤인 선조 38년(1605)에 세병관(洗兵館), 백화당(白和樺堂), 정해정 등을 세웠다. 이곳은 고종 32년 895) 각 도의 병영과 수영이 없어질 때까지 292년간 그대로 유지하다가 일제시대 민족정기 말살정책에 의해 세병관을 제외한 많은 건물이 사라졌다. 

  당시 건물 중 세병관(洗兵館) 현존했으나, 최근 관공서와 주택이 있던 통제영지(統制營址) 일부를 정비하고 운주당(運籌堂), 중영(中營), 관아(官衙), 12공방(工房), 주전소(鑄錢所) 등을 복원하였다. 

  통영 세병관(統營 洗兵館, 국보 제305호)은 경남 통영시 세병로 27(문화동)에 위치하며 ‘세병(洗兵)’은 ‘만하세병(挽河洗兵)’에서 따 온 말로 ‘은하수를 끌어와 병기를 씻는다’는 뜻이다. 현판은 제137대 통제사인 서유대(徐有大)의 글씨이다. 1963년 10월 24일 해체수리 시 종도리의 홈 속에서 발견된 세병관중수상량문(洗兵館重修上樑文)에 을사년(서기 1605년) 1월에 짓기 시작하여 그해 가을 7월 14일에 상량했다고 기록되어 있는 통제영의 중심건물이다. 이 건물은 창건 후 약 290년 동안 3도(경상·전라·충청도)의 수군을 총 지휘했던 곳으로 그 후 몇 차례의 보수를 거치긴 했지만 아직도 멀리 남해를 바라보며 당시의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건물 중 최고의 건물이다. 

  세병관(洗兵館)은 앞면 9칸·옆면 5칸 규모의 웅장한 건물로, 지붕은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건물 내부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는데, 중앙 뒷면에 약 45㎝ 정도 높은 단을 설치하여 궐패(闕牌)를 모시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그리고 그 위로 홍살을 세웠고, 후면 내진주열 중방 하부에는 머름을 설치하여 분합문을 달고 중방 위로는 판벽으로 마감하여 무인도(武人圖)를 그렸으며 천장은 소란반자를 설치하였다. 

  세병관은 17세기초에 건립된 목조단층 건물로 경복궁 경회루(景福宮 慶會樓, 국보 제224호), 여수 진남관(麗水 鎭南館, 국보 제304호)과 더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규모가 큰 건물에 속하고, 여수 진남관과 더불어 그 역사성과 학술적·예술적 가치가 충분하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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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피랑 벽화마을, 담벼락 곳곳에 다양하고 아름다움 벽화가 장식된 아름다운 야외미술관을 느림으로 걷기, 동피랑은 ‘동쪽’과 ‘비랑’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생긴 이름이다. 비랑은 비탈의 통영 사투리이다. 통영 시가지 동쪽에 동호동과 정량동, 태평동의 경계를 이루는 이루는 산의 바위 피랑지대에서 유래한 토박이 지명이다. 옛 통영성의 동포루가 산 정상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에서 유래했다는 설도 있다.

  통영 동백 유자 체험교실에서 천연화장품 동백꽃물과 동백골드세럼 만들기체험

  한려수도(閑麗水道) 조망 케이블카, 도남관광지부터 1,975m 선로로 미륵산까지 오르면 한산대첩의 역사적인 현장과 한려수도의 비경을 한눈으로 관망,

  박경리기념관(朴景利紀念館), 한국 현대문학의 어머니 박경리(1926-2008) 선생의 묘소가 있는 기념관에서 유품과 그의 대표하는 작품「김약국의 딸들」·「토지」친필 원고 등 문학세계를 이해하고, 문학공원에서 아름다운 통영 앞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풍광을 조망 한다.

  거북선과 조선군선, 거북선은 세계 해군 역사상 유례가 없는 획기적이고 독창적인 발명품이다. 전라좌수영거북선, 통제영거북선, 한강거북선, 판옥선 등 조선군선이 전시된 천연의 요새였던 항구인 강구안에 위치한 열린 문화공간 관람으로 행복한 통영시의 팸투어를 마무리 하였다.

  팸투어단의 숙소를 편안함과 쾌적함이 있는 통영갤러리관광호텔(055-645-3773, 도남로 257-27) 이였고 통영시가 추천하는 맛집으로는 대성회식당(055-646-8170, 무전동 1017-15)의 쑤기미탕, 토영명가(055-649-0533, 동피랑길 6)의 굴코스요리, 영빈관(055-646-8028, 도남로 282)의 해물요리 전문점 해물탕, 자연채한정식(055-645-3839, 봉평동 373)의 자연채정식의 시식이 있었다.

 

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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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백년 선비의 집, 논산 명재고택(論山 明齋古宅)

  논산 명재고택(論山 明齋古宅, 중요민속문화재 제190호)은 ‘구 윤증 선생의 고택(舊 尹拯 先生故宅)으로 조선 숙종 때의 학자인 윤증(尹拯, 1629∼1714)이 1709년에 지었다고 전하는 집이다. 후대에 수리가 있었던 듯 하며 그 세부기법은 조선 중기 호서지방의 양반가옥 건축양식을 보이고 있다. 안채를 중심으로 광채와 사랑채의 기능적 배치는 논산 명재고택에서만 볼 수 있는 우리 옛 선조들의 건축적 지혜다. 특히 수납공간인 광채를 안채와 비켜서 배치함으로써 비, 바람, 햇빛 등 자연현상에 대비한 것은 주생활 공간의 세련된 지혜다. 이와 함께 남쪽 바깥공간에는 네모진 연못이 있는데,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연못의 기법을 볼 수 있다. 노성산성이 있는 이 산의 산자락에 노성향교와 나란히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명재 윤증(明齋 尹拯, 1629~1714)은 조선 후기의 학자, 정치인, 사상가이다. 호는 명재(明齋)이며, 본관은 파평인(坡平人)이다. 김집(金集), 유계(俞棨), 송시열(宋時烈) 등 고명한 학자들에게 수학하였으나 부친 노서 윤선거(魯西 尹宣擧)처럼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성리학을 공부했으며, 특히 예학(禮學)이 밝았다. 학문과 덕을 쌓는 것에 전념해서 모든 선비의 흠모의 대상이 되어 ‘백의정승(白衣政丞)’이라 불리웠다.

  윤증(尹拯)은 1682년(숙종 8년)에 호조 참의, 1684년 대사헌(大司憲), 1695년 우참찬(右參贊)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자 1709년(숙종 35년)에 임금이 “내 평생 얼굴을 보지 못했으나 경의 생각은 잠시도 잊지 않았거늘 경은 어찌 내 마음을 알지 못하는가”하며 우의정에 임명하고 사관을 보내 임명장을 전했지만, 14번의 상소를 올리고 끝내 사양했다. 1714년(숙종 40) 병이 위독해지자 자손 및 제자들이 모인 가운데 “내가 죽은 후 선비의 예절로써 장사 지내고 명정(銘旌)에는 내 관직을 쓰지 말고 작은 선비라 쓰라”고 엄히 당부했다.

  사랑채는 바깥주인의 공적 공간 그리고 휴식처로 전면의 농토와 정원을 바라볼 수 있는 위치에 높은 기단 위에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었고, 왼쪽 1칸 뒤로 ‘一’ 자로 중문간채가 자리잡고 있다. 평면이 대문채의 동쪽과 북쪽을 연결해 안채 마당을 통과하도록 되어 있다. 사랑채 공간역시 공적인 공간으로서 독립성을 주면서도 안채와 자연스럽게 연결되어 있는데, 이는 명재고택의 지혜이면서 멋이다.

  온돌방인 큰 사랑채 중심으로 서복쪽에 작은방이 있고, 동남서면은 마루로 돌려져 있다. 사랑채의 한편에는 2칸 누마루가 있고 2칸의 방이 있으며, 방의 앞과 옆으로 마루가 달려 있다. 누마루의 창문은 4분합 들문으로 문을 들어 천정의 걸쇠에 걸면 창틀의 규격이 이상적인 황금비율에 가까운 것이 특징이다. 또한, 사랑채 큰방과 작은방으로 연결되는 미닫이와 여닫이를 겸할 수 있는 방문은 다른 가옥에서는 볼 수 없는 독창성이 뛰어난 작품이다.

  일영표준(日影表準)이라 새긴 글귀가 사랑채 디딤돌 앞에 있는 댓돌 자리는 해시계를 관찰하는 영점 자리이고 이곳에 막대를 꽂아 해시계로 사용했다고 한다.

  안채는 안살림의 편리성을 갖춘 독립공간으로 중문간채가 있어 안채가 바로 보이지 않도록 1칸 돌아 들어가게 중문을 내었다. 중문간채와 함께 튼 ‘ㅁ’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중문을 지나 안채 마당으로 들어서면 ‘ㄷ’자 모양의 공간이 형성되어 있고, 다시 여섯 칸의 대청과 퇴가 마루로 연결되어 좌우 공간의 독립성을 확보했다. 안채에서 넓게 자리잡은 대청은 제사를 위한 제청 및 초례청과 가족모임 장소가 되기도 한다.

  명재고택의 안채는 충청지방 특색인 평면을 따르면서 독창성을 가지고 있다. ‘ㅡ’자형의 대문에서 안채가 보이지 않도록 두 번째 칸에 내외벽을 배치함으로써 외부사람의 접근과 내부사람의 독립성을 고려한 완충적 공간으로 지었다.

  집 앞에는 넓은 바깥마당이 있고 그 앞에 인공연못을 파고 가운데에 원형의 섬을 만들어 정원을 꾸몄다. 또한 안채 뒷쪽에는 완만한 경사지를 이용하여 독특한 뒤뜰을 가꾸어, 우리나라 살림집의 아름다운 공간구조를 보이고 있다. 모든 건축부재의 마감이 치밀하면서 구조가 간결하고 보존상태도 양호한 조선의 양반주택으로 중요하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충남 논산시 노성면 노성산성길 50 (교촌리)

* 백의로 조선을 경영한 정승, 명재 윤증: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30463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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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일∙고앵자/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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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읍내동 당간지주(牙山 邑內洞 幢竿支柱, 보물 제537호)

  아산 읍내동 당간지주(牙山 邑內洞 幢竿支柱, 보물 제537호)는 온양시내에서 송악면 쪽으로 3㎞정도 떨어진 곳에 세워져있다. 당간지주(幢竿支柱)는 절에 행사가 있을 때 절 입구에 당(幢)이라는 깃발을 달아두는데, 이 깃발을 달아두는 장대를 당간(幢竿)이라 하며, 당간을 양쪽에서 지탱해 주는 두 개의 돌기둥이다.

  이 당간지주(幢竿支柱)의 재질은 화강암(花崗岩)으로 받침부분인 기단(基壇)이 땅 속에 묻혀 있어 마주 세워진 두 기둥만 드러나 있다. 기둥머리는 완만한 곡선을 이루고 안쪽에는 깃대를 단단히 고정시키기 위한 네모난 홈이 파여져 있다. 표면이 심하게 닳아 다른 조각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수가 없으며, 기둥 바깥쪽 두 모서리를 깎아내어 마치 세로줄무늬를 새긴 것 같은 효과를 냈다. 위·아래 기둥의 굵기가 별 차이없이 다듬어져 전체적으로 세련미를 보이고 있다.

  당간지주(幢竿支柱)가 자리하고 있는 지금의 위치가 본래의 자리로 여겨지며,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전체적인 양식들로 보아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사진제공: 허수영 사진작가)

* 문화재 소재지: 충남 아산시 읍내동 255-5, 255-1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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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일/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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