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을 찾아가는 조지훈 시인의 영양 주실(英陽 主室)마을

  영양 주실(英陽 主室)마을은 한양 조씨(漢陽 趙氏)가 한양을 떠나 이곳에 집성촌을 이룬 곳이다. 산 아래 고즈넉하게 자리 잡은 고택(古宅)들이 전통적인 유교문화의 숨결을 느끼게 해준다. 마을 입구에서 보면 마을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울창한 일명 ‘주실쑤’라는 숲이 있는데 장승을 뜻하는 사투리를 섞어 ‘수구막이 숲’이라고도 하였다. 수령 100년의 소나무와 250여 년의 아름드리 느티나무, 느릅나무 등이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지금은 시인의 숲이라 불리고 있다.

  주실마을은 붓을 닮은 문필봉(文筆峰)이 마을 앞에 있어 옛부터 문필가나 학자가 많이 나오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호은종택(壺隱宗宅)도 정면으로 문필봉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터를 잡고 있는 고택이다. 이곳 작은 시골 주실마을은 청록파(靑鹿派) 시인이자 지조론(志操論)의 학자였던 조지훈을 비롯하여 한국 인문학의 대가 조동걸(역사), 조동원(금석학), 조동일(문학)교수 등 우리나라 역사에 남을 14명의 박사와 인재가 나왔다. 현재 약 50여 가구가 남아 주로 고추 농사 등을 지으며 생활 하고 있으며, 조지훈 선생의 생가 외에 옥천종택(경상북도 민속자료 제42호), 지훈문학관, 또한 조지훈 선생이 수학한 월록서당(月麓書堂,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 172호), 만곡 조술도(晩谷 趙述道)선생의 만곡정사(晩谷精舍) 등의 문화 유적이 있다. 호은종택과 조지훈문학관 사이의 길에 조지훈의 시 20여 편을 돌에 새긴 시(詩)공원은 방문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조지훈(趙芝薰, 1920∼1968년)은 오대산 월정사에서 불교전문강원 강사를 지내며 불경과 당시(唐詩)를 탐독, 조선어학회 ‘큰사전’ 편찬위원, 고려대학교 교수, 6·25 때는 종군작가, 승무의 동작과 분위기가 융합된 고전적인 경지를 노래한 승무(僧舞), 주권 상실의 슬픔과 민족의 역사적 연속성이 중단됨을 고지(告知)한 봉황수(鳳凰愁) 등의 대표적인 시가 있고 민족적 전통이 담긴 시작(詩作)과 지조론(志操論) 등의 평론(評論)을 남겼다. 박목월(朴木月), 박두진(朴斗鎭)과 더불어 공동으로 간행한 청록집(靑鹿集)의 시편들에서는 주로 민족의 역사적 맥락과 고전적인 전아한 미의 세계에 대한 찬양과 아울러 ‘선취(禪趣)’의 세계를 노래하였다.

  승무(僧舞) “얇은 사(沙)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르라니 깎은머리/ 박사(薄沙) 고깔에 감추오고/ 두 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빈 대(臺)에 황촉(黃燭) 불이 말없이 녹는밤에/ 오동(梧桐)잎 잎세마다 달이 지는데.// 소메는 길어서 하늘은 넓고/ 돌아설 듯 날아가며 사뿐히 접어올린 외씨버선이여 !// 까만 눈동자 살포시 들어/ 먼 하늘 한 개 별빛에 모두오고// 복사꽃 고운 뺨에 아롱질듯 두 방울이야/ 세사(世事)에 시달려도 번뇌(煩惱)는 별빛이라.// 휘어져 감기우고 다시 접어 뻗는 손이/ 깊은 마음속 거룩한 합장(合掌) 인양하고// 이밤사 귀또리도 지새우는 삼경(三更)인데/ 얇은 사(沙)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봉황수(鳳凰愁) “벌레 먹은 두리기둥, 빛 낡은 단청(丹靑)/ 풍경 소리 날아간 추녀 끝에는/ 산새도 비둘기도 둥주리를 마구 쳤다./ 큰 나라 섬기다 거미줄 친 옥좌(玉座) 위엔/ 여의주(如意珠) 희롱하는 쌍룡(雙龍) 대신에/ 두 마리 봉황새를 틀어 올렸다./ 어느 땐들 봉황이 울었으랴만 푸르른 하늘 밑 추석(甃石)을/ 밟고 가는 나의 그림자./ 패옥(佩玉) 소리도 없었다./ 품석(品石) 옆에서 정일품(正一品), 종구품(從九品)/ 어느 줄에도 나의 몸 둘 곳은 바이 없었다./ 눈물이 속된 줄을 모를 양이면/ 봉황새야 구천(九天)에 호곡(號哭)하리라.”

  지훈문학관(芝薰文學館)은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 조지훈선생을 기리기 위해 건립한 문학관이다. 전시실과 시청각실이 갖춰져 있으며, 주요 전시물로는 살아생전 지훈선생의 유품과 육성녹음테이프, 시낭송테이프 등 다수가 전시되어 그의 사상과 철학, 문학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 현판(懸板)은 부인 김난희(金蘭姬) 여사가 직접 썼다.

  조지훈생가(趙芝薰生家, 경상북도기념물 제78호)는 청록파 시인의 한 사람으로 근대의 대표적인 시인이자 국문학자였던 조지훈이 태어난 곳이다. 조선 중기인 1629년(인조 7년)에 영양군 주실마을에 처음 들어온 호은 조전(壺隱 趙佺)이 살았던 곳이며 둘째 아들 조정형(趙廷珩)이 현재의 집을 지었다. 조전은 한양조씨로 선대가 서울을 근거지로 살았는데 1519년 조광조가 연루된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멸문의 화를 면하기 위해 전국 각지로 흩어지게 되었다. 당시 호은공은 주실마을로 피신하여 살게되었다. 집터를 잡을 때 매방산에서 매를 날려 매가 앉은 자리에 집을 지었다고 전해진다.

  면적은 1,365㎡으로, 영남지방 주택의 전형적인 형태인 ㅁ자집이며 안채인 정침(正寢)과 관리사로 나뉘어 있다. 안채는 정면 7칸, 측면 7칸의 팔작지붕 목조기와집이다. 정면의 사랑채는 정자 형식이며, 서쪽에 조지훈의 태실이 있는데, 한말 의병장 조승기(趙承基), 6·25전쟁 때 자결한 조지훈의 조부 조황석(趙黃錫) 등이 태어난 곳이다. 대문과 중문에는 한말부터 태극기를 조각·채색하여 끼워두고 있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63년에 복구하였고, 1994년 안채와 문간채, 곳간채 등을 보수하였다.

  호은종택(壺隱宗宅)에 사는 조씨를 가리켜 칼날 같은 남인(南人)집안이라 하여 검남(劍南)이라 불렀는데, 이 집안의 체통을 지키기 위해 호은(壺隱) 때부터 370년 동안 전해져 오는 가훈(家訓)은 삼불차(三不借)인데 재물(財不借)과 사람(人不借, 양자) 그리고 문장(文不借)을 빌리지 않는다. 한마디로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지 말고 살자는 정신이다.

  주실(主室)마을에는 옥천종택(玉川宗宅) 에만 우물이 하나 있는데 온 마을 사람들이 이 우물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마을이 하늘에서 내려다본 전경이 배 모양이라 하여 살공 등짝이 서로 맞닿아 이루어진 마을이라 하여 주실(主室) 또는 주곡(主谷)이라고 부른다. 배 형상의 마을이라 우물을 파면 배에 구멍이 생겨 가라앉는다는 풍수설에 따라 마을 사람들이 옥천종택의 우물을 길어다 먹는 불편함을 감수하고 살았다고 한다. 지금도 우물은 이것 하나뿐이라고 한다. 대신 50여리 떨어진 곳에 수도파이프를 연결하여 식수를 해결 하고 있다고 한다. (자료출처: 두산백과, 영양군청 문화관광과: http://tour.yyg.go.kr)

* 문화재 소재지: 경상북도 영양군 일월면 주실길 27(주곡리 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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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일/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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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 만든 아름다운 정원 영양 서석지(英陽 瑞石池)

  영양 서석지(英陽 瑞石池, 중요민속문화재 제108호)는 광해군 5년(1613) 성균관 진사를 지낸 석문 정영방(石門 鄭榮邦, 1577-1650)이 조성한 조선시대 민가(民家) 연못의 대표적인 가로 13.4m 세로 11.2m 깊이 1.3∼1.7m의 연못이다. 자양산(紫陽山)의 남쪽 완만한 기슭에 위치한 연못을 중심으로 경정(敬亭)·주일재(主一齋)·수직사(守直舍)·남문(南門) 등의 건물들이 자리하고 있다.

  경정(敬亭, 중요민속문화재 제108-1호: 지당을 내려다보며 인품을 수양하는 정자)은 정면4칸, 측면2칸, 팔작 기와지붕으로 지당을 내려다보며 인품을 수양하는 정자로 넓은 대청과 방 2개로 되어있는 큰 정자이다. 방지(方池)의 북단에 있는 3칸의 사우단(四友壇)에 접한 서재(書齋) 주일재(主一齋)는 운서헌(雲棲軒)이라고 쓴 현판이 걸려있다. 주일재 한 쪽에 있는 노을이 깃든 마루 서하헌(棲霞軒)이 있다.

  주일재(主一齋) 앞에는 연못쪽으로 돌출한 석단(石壇)에는 생물경관(生物景觀)인 사우단(四友壇)을 만들고 소나무·대나무·매화·국화(松·竹·梅·菊)를 심어 선비의 지조를 상징하였다. 공자를 받들어 정문 앞에 심은 은행나무 단(杏亶)이 있다. 4백 년 된 이 은행나무가 현재까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고 있다. 특히 못 가운데는 연을 심어 연꽃 향기를 품고 있다. 연꽃은 진흙탕에서도 때 묻지 않은 청정의 빛으로 태어난다. 어지러운 세상에서도 고고한 이상적인 군자의 모습에 투영이라 본다. 정자 마루 위에는 정기(亭記), 중수기(重修記) 경정운(敬亭韻) 등 당시의 대명절의(大明節義)로 이름난 명사들의 시가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사회상과 선비들의 생활상 및 주변에 가꾸었던 식물에 관한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경정의 경(敬)은 유학자들의 학문을 이루는 처음이자 끝이었다.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해 무엇에도 흔들리지 않는 경지가 곧 경(敬)이다. 선생은 자신의 정원에 은거하며 평생 경(敬)을 추구했다고 한다.

  연못은 사우단을 감싸는 ‘U’자형의 모양을 하고 있다. 연못의 동북쪽 귀퉁이에는 산에서 물을 끌어들이는 도랑을 만들었고, 반대편의 서남쪽 귀퉁이에는 물이 흘러나가는 도랑을 만들었다. 각양각색의 형태로 솟아있는 연못 안의 크고 작은 돌을 ‘서석군(瑞石群)’이라 하는데, 이 연못의 이름이 여기에서 유래하였다. 돌 하나하나에 모두 이름이 있어 선생의 학문과 인생관은 물론, 은거생활의 이상적 경지와 자연의 오묘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심취하는 심성을 잘 알 수 있게 해준다.

  서석지(瑞石池)는 상서(祥瑞)로운 돌이 가득한 지당(池塘)이란 뜻으로 주어진 환경을 잘 살린 품격(品格)있는 정원이다. 연못 바닥을 형성하는 크고 작은 암반들이 각양각색의 형태로 놓여있는 돌 하나하나에 모두 명칭이 붙어 있다. 연못 수면에 침수된 돌이 30여 개, 수면 밖으로 드러난 60여 개의 상운석(祥雲石) 등 90여 개의 돌이 물속에 잠기기도 하고 드러나기도 하여 전통 정원 조경미의 오묘한 정취를 느끼게 한다.

  자연석은 모양에 따라 생물과 자연현상, 신선 세계의 기원, 주인의 의지에 반영 등을 나타냈다. 봉운석(封雲石: 학의 머리를 두른 구름돌), 상운석(祥雲石: 상서로운 구름 돌), 조천촉(調天燭: 하광채를 뿜는 촛대 돌), 낙성석(落星石: 별에서 떨어진 돌), 화예석(花蘂石: 꽃과 꽃술을 감상하는 돌), 희접암(戱蝶巖: 나비가 노는 돌), 옥성대(玉成臺: 옥을 쌓아 만든 대), 옥계석(玉界石: 옥으로 만든 자 돌), 관락석(觀瀾石: 물결을 처다 보는 돌), 와룡암(臥龍巖: 못 속에 웅크린 용), 어상석(漁狀石: 물고기 돌), 토예거(吐穢渠: 더러운 물을 쏟는 돌), 선유석(仙遊石: 신선이 노는 돌), 상경석(尙絅石: 높이 존경받는 돌), 란가암(爛可岩: 문드러진 도끼자루 돌), 분수석(分水石: 둘로 갈라져 물이 떨어지는 돌), 쇄설강(灑雪矼: 눈 흩날리는 징검다리), 기평석(碁枰石: 바둑 두는 돌), 영귀제(咏歸堤: 귀향을 노래하는 언덕), 통진교(通眞橋: 선계(仙界)로 건너는 다리 돌), 수륜석(垂綸石: 낚싯줄 드리우는 돌), 탁영반(濯纓盤: 갓끈 씻는 바위) 등이 소우주를 형성하면서 흩어져 있다. 꽃과 돌에게 하나하나의 상징적 의미를 부여 하였다, 특히 여기서 탁영(濯纓)이란 갓끈을 씻고 신선이 되고 싶다는 뜻이다. 세상이 바를 때는 나가서 벼슬을 하고, 어지러울 때는 운둔 한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선비에게 있어 시를 짓고 그림을 그리는 것은 일상 이였다. 서석지 정원을 따라 거닐면서 아흔 개의 이름을 붙이는 것은 시를 짓는 일이였고 그 자체가 그림 이였다. 평범한 자연 속에 시와 그림을 넣는 시정(詩情)의 흐름이 있는 독특한 조원방식(造園方式)은 정원 품속에서 살아왔던 꿈꾼 사람의 이상향 이였다.

  정원(庭園)은 내원(內園)과 외원(外園)으로 구분되어 있는데, 내원은 정관·사고·독서 등 사생활을 위한 인공적인 공간으로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외원은 병풍바위로 되어 있어 수려한 천혜의 선경을 이루고 있다 내원과 외원의 공간 비는 1:3으로 공간미의 아름다움을 강조했고, 화려한 꽃보다는 청초한 식물을 가꾸었다 외부와의 시계를 차단하지 않도록 배려하였으며, 정원 마당에는 잔디를 심었다.

  담양 소쇄원, 완도의 세연정과 더불어 조선시대 3대 민가의 연못으로 손꼽히는 대표적인 정원이 바로 영양의 서석지다. 이곳에는 못 가운데 연꽃을 심고 못 전체에는 마을 주변에서 나는 아흔 개의 크고 작은 암석을 배치했다. 서석지는 자연을 끌여들여 오래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변함없이 자연의 정취를 듬뿍 느끼게 한다. 석문 선생은 이 연못에 유난히 흰 빛의 암석을 배치하고 상서로운 돌이라는 뜻으로 서석 이라고 불렀다. 이름 없는 돌 하나하나에도 이름을 지어 주었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영양군청 문화관광과)

* 문화재 소재지: 경북 영양군 입암면 서석지 1길 10 (연당리)

 영양 남이포(英陽 南怡浦)의 입석(立石, 선바위, 신선바위)과 자금병(紫錦屛), 집승정(集勝亭)에 석문 정연방 선생의 시에 담긴 서석지 외원의 정취:

. 입석(立石, 선바위, 신선바위)은 서석지 내원 연당마을 입구에 있다. 안동에서 동쪽인 동사티에 있는 영등산에서 시작된 산맥과 일월산에서 시작된 산맥이 만나고 청기천의 맥이 서로 만나서 갈래의 氣가 응집되는 형상으로 서석지 외원의 중앙 중심에 있다. 서석지 연못안에 조천촉 돌과 뜻을 같이 한다. 태극의 꼭지점에 선바위가 위치함으로 신선바위로서 소원을 발원하면 들어준단다. 해와 달, 사람의 정기를 모아 하늘에 올리는 신선바위로 알려져 있다. 

  “매우 큰 (여섯 길) 거북뼈가 썩지 아니하고, 다섯길 층계위에 기둥 되어 버티는 양, 杞 땅의 과부같이 어리석게 울부짖나, 하늘 혹시 무너질까 헛되이 근심하네.”    

. 자금병(紫錦屛)은 자양산 남쪽 남애의 좌.우측 절벽이다. 안으로 깍아지른 것 같고 위를 향해 빙빙돌아 마을을 안온하게 품은듯하니 병풍을 둘러친 것 같은 연고로 이름을 자금병이라 하였다. 

 ”자줏빛 덧 씌운 북쪽 붉은 병풍은, 부용봉 절벽에 동쪽달이 걸리니, 사람들이 일컫는 기이한 절경지는, 모두가 한 짝 병풍 그 속에 있네.” 

. 집승정(集勝亭)은 자양산 남쪽 남애위. 약봉 서성선생이 수신하던 정자다. 광해군 5년 계축옥사에 연루된 藥奉 徐渻선생이 귀양와서 7년간 살면서 석문 정영방 선생과 함께 詩를 읊던 곳이다.  

 ”고기잡이배를 기다리기 위해, 밤 새도록 험준한 사립의 빗장을 걸지않고, 달 밝은 밤 수풀아래 돌이켜보니, 달빛이 집승정에 가득찼도다.”  (자료출처: 임권잡제 임천산수기) – 여주, 박과. 꽃말: 열정, 정열 -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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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일/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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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체험 아카데미’ 영양군 팸투어

  2015 음식디미방체험 아카데미 제6기 팸투어를 영양군(군수 권영택)이 한국관광클럽(회장 이충숙) 회원사와 언론사 기자단을 9일과 10일(1박2일) 초청하여 실시하였다.

  이번 팸투어는 두들마을 여중군자 장계향 관련 유적지 탐방을 시작으로 석계고택. 석천서당. 원리 주곡고택. 유우당. 남악정. 광록정 둘러보기, 북카페 두들책사랑과 광산문학연구소 방문(소설가 이문열과 광산문학관), 음식디미방 전통주제조체험(칠일주), 음식디미방 설명 및 체험(음식디미방보존회장 재령 이씨 석계공파 제13대 종부 조귀분), 장계향의 삶과 음식디미방 관련 강연(재령 이씨 석계공파 제13대 종손 이돈 선생, 여중군자 장계향 예절관), 두들마을 고택체험, 석류탕 만들기 체험(음식디미방보존회), 주실마을 역사와 문화유적지 및 관광지 탐방(지훈문학관, 조지훈 생가 방문), 선바위 탐방, 영양 서석지(중요민속문화재 제108호) 탐방, 영양 산해리 오층모전석탑(국보 제187호), 음식디미방체험 아카데미 수료증 전달식 등 우리의 전통문화와 문학의 향기가 넘치는 고장에서 관광의 또 다른 멋을 선사하는 기회가 주어질 것으로 기대 된다.

  두들마을은 1640년 (인조 18년)에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 선생이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이곳에 들어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이시명 선생은 1674년 안동으로 옮겨 갔으나, 그의 사후 넷째아들인 이숭일이 다시 고향인 이곳에 돌아와 살게 되었고 후손들이 계속 더해져 재령이씨(載寧 李氏)의 집성촌 마을이 되었다. 조선 고종때 국립병원인 광제원()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에 ‘원두들’이라 불리웠다가, ‘원리리’로 변경 되었다고 한다. ‘두들’은 ‘두드러지다’ 혹은 ‘돋다’에서 갈라져나온 ‘둔덕’의 순 우리말로 이는 ‘언덕 위의 마을’이라는 뜻의 이름이 붙여졌다. 마을 뒤로는 두들산이 있고 앞에는 화매천(花梅川)이 있어 동고서저(東高西低)의 지형때문에 주위의 계곡에서 흘러내려 온 산골물이 이곳에서 합류하여 흘러가는 배산임수(背山臨水)지형이다.

  마을옆 둔덕에 석계 이시명 선생이 지은 석천서당(川書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9호)과 석계고택()이 남아 있고, 마을앞을 흐르는 화매천가에는 이시명 선생의 넷째아들인 이숭일이 새겼다고하는 동대(東臺), 서대(西臺), 낙기대(樂飢臺), 세심대(洗心臺) 등의 글씨가 새겨진 암석(巖石)들이 남아 있다.

  여중군자 장계향(女中君子 張桂香)은 두들마을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로 이시명 선생의 정부인(貞夫人) 안동 장씨()이다. 최초의 한글요리책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의 저자(著者)이다.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이란 ‘좋은 음식맛을 내는 방문’이란 뜻으로 정부인 장씨가 일흔이 넘어서 1600년대의 경상도 양반가의 음식 조리법과, 저장, 발효 식품 등 146가지의 음식 조리법을 소개하고 있는 요리책이다. 정부인 장씨는 시(詩)·서(書)·화(畵)와 성리학(性理學)에 능하여 조선시대 여인 중 유일하게 여중군자(女中君子)라 불렸다고 알려져 있다.

  마을에서는 정부인 장씨예절관과, 전통음식 체험관을 운영하고 있는데, 실제 ‘음식디미방’에 나오는 조리법대로 약 40여가지의 음식을 복원하여 상차림을 내고 있다. 채소와 해산물을 주재료로 찌거나 구워 재료 고유의 향과 맛이 살아 있는 담백한 맛이 특징이다. 전통주 체험관에서는 음식디미방의 전통주를 복원하여 그 우수성을 보전하고 단순히 술을 빚는 공간이 아니라 그 안에 깃든 우리민족의 생활양식과 문화를 체험하는 교육장이다.

  석계고택(石溪古宅,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91호)은 마을의 대표적인 전통 가옥으로 인조와 현종 시대의 학자인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 1590∼1674)과 부인 안동 장씨가 살았던 집이다. 선생은 안동에서 세상을 떠났으나, 정부인은 이곳에서 죽을 때까지 살았다.

  사랑채는 一자형으로 안채를 흙담으로 막아 허실감을 메우고 뜰집과 같은 느낌이 들도록 하였다. 사랑채에는 대문을 중심으로 사랑방과 사랑마루를 두었으며, 왼쪽에는 마구간과 창고방을 시설하였다. 기존 종가집과 달리 지붕 끝에 세우는 기와(망와, 望瓦)가 없고 사랑채 지붕이 팔작지붕이 아닌 맞배지붕으로 되어 있다. 또한 이 집에는 곳간채가 없고 주변으로 토석담장이 둘러져 있어 간결하고 검소한 양반가옥의 전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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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천서당(石川書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79호)은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 1590∼1674)이 1640년(인조 18)에 네 아들과 같이 석보에 이주하여 낙기대(樂飢臺)에 터를 잡고 그 거소를 석계초당이라 하고 14년 동안 이곳에서 살았다. 이곳을 자연지형을 본따 아호를 석계(石溪)라 하였다.

  석계(石溪)선생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재령 이씨(載寧 李氏), 영해(寧海)출신으로 현감 함(涵)의 아들이며, 이조판서 현일(玄逸)의 아버지이다. 퇴계 이황(退溪 李滉)의 학통을 이은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의 제자 경당 장흥효(敬堂 張興孝)의 문인으로 1612년(광해군 4) 생원진사시(司馬試)에 급제하였으나 1636년 병자호란의 치욕을 당하고 국정이 혼란스러워 벼슬길을 포기하고 은거하면서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선생의 사후에 1676년(숙종 2) 상을 마친 넷째아들 이항재(李恒濟)가 돌아와 선업을 이었는데 이항제가 죽은 뒤 그 유적지를 그대로 둘 수 없어 자손들과 유림(儒林)들이 초당(草堂)을 중건하고 석천서당을 창건하였다. 1770년(영조 46)에 기공하여 1771년에 준공하였다. 그뒤 1891년(고종 28)에 중수하면서 2칸을 더 지었다. 

  석천서당(石川書堂)에는 수산수진수창(首山粹辰酬唱) 석계기(石溪記), 과석계유허유감(過石溪遺墟有感), 갈암차운(葛菴次韻) 석천서당 중수기(石川書堂 重修記) 등이 있다. 또한 서당고(書堂庫)에는 안릉세전(安陵世典), 석계선생문집(石溪先生文集), 정부인안동장씨실기(貞夫人安東張氏實記), 정묵제선생문집, 항제선생문집, 영천집 등 목판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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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우당(惟于堂,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285호)은 이상도(李相度, 1773∼1835)선생이 지은 살림집이다. 원래는 조선(朝鮮) 순조(純祖) 33년(1833) 석보면(石保面) 주남리(做南里)에 세운 것을 선생의 후손인 이돈호(李墩浩, 1869∼1942)가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건물 이름(堂號)은 이상도(李相度)선생의 첫째 아들(長子)인 기찬(箕燦)의 호를 따 유우당(惟于堂)이라 하였다. 

  이돈호(李墩浩)는 3.1운동 때 독립운동에 가담한 바 있으며, 유림대표(儒林代表)로 파리(巴里) 장서사건(長書事件)에 가담하였다. 이돈호(李墩浩)의 조카인 이병각(李秉珏)은 조지훈(趙芝薰), 오일도(吳一島), 조세림(趙世林)과 함께 항일(抗日) 애국시인(愛國詩人)으로 활약하였다. 

  건물은 정침(正寢)과 사당(祠堂)으로 2채로 구성되어 있는데, 정침은 이 지방 민가 건물의 전형(典型)이라 할 수 있는 ㅁ자형(口字形)의 평면형태를 취하고 있으며 정침의 우측에 있는 사당은 단칸(單間)규모의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기와집이다.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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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리 주곡고택(院里 做谷古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14호)은 조선(朝鮮) 중기 유학자(儒學者)인 주곡 이도(做谷 李櫂, 1636∼1712)가 석보면(石保面) 주남리(做南里)에 건립하였던 것을 후손들이 순조(純祖) 30년(1830)에 이곳 두들마을의 북서쪽에 있는 광려산(廣麗山)을 배산하여 아늑한 산자락에 남향하여 옮겨 지은(移建) 것이다. 

  경상북도(慶尙北道) 북부지역 민가(民家) 건물의 전형(典型)인 뜰집형(□字形) 구조로 정침은 정면4간 측면 4간 반 규모이다. 사랑방의 편리를 위하여 다양한 구성으로 꾸며진 물치장(物置欌)이라 불리는 벽장(壁欌)과 감실방(監室房) 벽감 아래의 끌어낼 수 있는 널로 된 제사상(祭祀床)이 돋보인다. 또한 부엌에 물을 길어 담아 두고 쓰는 큰 독인 물두멍도 묻어놓았다. 지금은 남아있는 예가 드문 옛 생활문화의 흔적에 중요한 자료이다. 

  이도(李櫂)선생은 우계 이시형(愚溪 李時亨)의 손자이고 본(本)은 재령(載零)이다. 영해(寧海)에서 출생하였으나 당대의 집안 석학 퇴계 이황(退溪 李滉), 학봉 김성일(鶴峰 金誠一)등 영남학파(嶺南學派)의 학통을 이은 갈암 이현일(葛庵 李玄逸)의 문하생(門下生)으로 수학코자 주사동(做士洞, 현 주남리)으로 이주하였다. 시예(詩藝)와 문장이 뛰어나 말년에는 후학 교육에 힘쓴 학자이다.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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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양 석간고택(英陽 石澗古宅,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03호)은 항재 이승일(恒齋 李嵩逸, 1631∼1699)의 살립집이다. 고택은 이수영의 5세손인 소설가 이문열(李文烈)이 유년시절을 보냈던 곳이기도 한데, 한국전쟁이 끝난 후 인척인 석간 이철호(石澗 李哲浩, 1901∼1985)가 매입 하였다. 

   정침(正寢)은 정면4칸, 측면5칸 반 규모의 ㅁ자형 건물인데, 정침 좌측 전면에는 정면3칸, 측면1칸 규모의 강학(講學)을 위한 독서실(讀書室) 석간정사(石澗精舍)가 자리자고 있으며 우측에는 ㅡ자형 광이 있는 집채인 고방채가 배치되어 있다. 

  19세기 후반에 학문소인 정사를 가옥 내에 별동으로 지은 흔치 않은 예로 정침은 생활기본시설을 설치하기 위하여 일부 변용하였지만, 전체적으로는 건립 당시의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을 뿐 아니라 정침은 건립 당시보다 앞선 시기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소설가 이문열이 유년 시절을 보낸 곳으로 지역의 역사문화 환경적인 측면에서도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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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록정(廣麓亭)은 1676년(숙종 2) 항재 이숭일(恒齎 李嵩逸) 선생이 숙형 갈암(叔兄 葛庵) 선생과 함께 태정부인(太貞夫人)을 모시고 석계 이시명(石溪 李時明) 선생이 있던 터에 집을 짓고 행인이 묵을 수 있는 광제원(光濟院)을 지었다. 1698년(숙종 28)에 유와공(兪窩公)이 집을 수리하며 광록초당이라 이름을 바꾸고 정자를 세웠다.《광록초당추건기(廣麓草堂追建記)》,《중수기》,《광록초당운(廣麓草堂韻)》과 산택재(山澤齎)선생의 시가 있다.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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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마을에는 약 30여 채의 전통가옥이 남아 있으며 이들은 새롭게 들어선 한옥 건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보릿고개로 힘든 주민들을 위해 구휼식당을 배급하던 낙기대(樂飢臺)도 남아있다.

  이문열(烈, 1948 5. 18.-) 작가의 문학산실인 두들마을 북카페 ‘두들책사랑’은 마을 출신 문인들의 작품과 역사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며, 광산문학연구소(광산서원)는 현대문학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문학도를 양성하기 위하여 설립된 문학연구소다. 이곳 두들마을은 이문열 작가의 선택의 직접적인 배경장소이며 그해겨울,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 금시조, 황제를 위하여, 리투아니아의 여인 등 많은 작품 속 인물들의 삶의 역정이 펼쳐지던 무대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수시로 문학강연과 문학토론회 등이 개최되며 작가와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한국관광공사, 두산백과 문화유산정보) - 동아, wax gourd, 박과, chinese watermelon이라고도 함 - 

* 주소지: 경북 영양군 석보면 두들마을길 77 (원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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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아름다운 담양 메타세쿼이아 길

  담양 메타세쿼이아 길은 꿈의 드라이브 가로수길 코스이다. 영화 ‘역린’과 ‘협녀’ 촬영세트장이 있고, ‘와니와 준하’에서 와니가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지나가는 장면이 촬영된 곳이 바로 순창에서 담양으로 이어지는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다. 원래는 24번 국도였는데 이 국도 바로 옆으로 새롭게 국도가 뚫리면서 이 길은 산책을 하거나 자전거를 탈 수 있는 도로로 조성되었다.

  담양 메타세쿼이아 가로수 길의 총 길이는 약 8km로 도로를 사이에 두고 양쪽 길가에 심어져 있다. 이 길이 조성된 시기는 1970년대 초반으로 전국적인 가로수 조성사업 때 담양군이 3~4년생 메타세쿼이아 묘목을 심은 것이 현재는 수령 40년생, 수고 27m, 흉고 85cm 내외의 487본 메타세쿼이아 나무가 아름답고 울창한 가로수 터널길이 되었다.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뽑힌 곳으로 이 길을 가다보면 이국적인 풍경에 심취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남도의 길목으로 빠져들고 만다. 초록빛 동굴을 통과하다보면 이곳을 왜 ‘꿈의 드라이브코스’라 부르는지 실감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아름다움으로 인해 산림청과 ‘생명의 숲 가꾸기운동본부’ 등에서 주관한 ‘2002 아름다운 거리숲’ 대상(大賞)을 수상했고, 2006년 건설교통부 선정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의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메타세쿼이아 길 주변에는 메타프로방스 마을을 조성하여 팬션, 가족호텔, 푸드타운, 쿠키월드, 패션아울렛단지, 상가 등이 있고, 장승공원, 기후변화 체험관, 영화 역린과 협녀 촬영세트장, 대나무분재, 테지움테마파크도 조성되어 있어 느림으로 쉬어 갈 수 있고, 고려시대의 문화유산인 담양 남산리 오층석탑(潭陽 南山里 五層石塔, 보물 제506호)과 담양 객사리 석당간(潭陽 客舍里 石幢竿, 보물 제505호)도 만날 수 있다.

  메타세쿼이아(Metasequoia)는 낙우송과의 나무로 은행나무와 함께 화석나무로 유명하다. 북미대륙에 큰 나무로 자라는 세쿼이아(sequoia)를 닮은 나무로 학계에서는 멸종된 나무로 보고됐으나 1941년 중국 후베이성과 쓰촨성의 경계지역을 흐르는 양쯔강 상류 지류인 마타오치(磨刀溪) 옆의 한 마을(지금의 湖北省 利川市)을 순찰하던 왕전(王戰)이라는 산림공무원은 물가 부근에서 자라는 거대한 메타세쿼이아를 처음 발견 하였다. 키 35미터, 직경이 2.3미터나 되는 이 큰 나무는 약 4천여 그루가 마타오치 연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1946년《중국지질학회지》에 ‘살아 있는 메타세쿼이아’로 세상에 확정 보고되었다. 이후 미국의 아놀드식물원에서 본격적인 연구와 번식이 시작 되었으며, 우리나라는 1956년 현신규 박사에 의해 들여와 주로 가로수와 조경수로 식재되었다. 아득한 옛날 공룡과 함께 살아온 ‘화석나무’가 지금은 번화한 도시의 한복판에서 온갖 공해를 이겨가며 우리와 함께 산다고 생각하니 무척 대견스럽다. ‘물가에서 잘 자라는 삼나무’란 의미로 중국 이름은 ‘수삼(水杉)’이며, 북한 이름도 ‘수삼나무’다. 철자도 어려운 메타세쿼이아라는 영어식 긴 이름보다 간편하고 생태도 쉽게 짐작이 가는 수삼나무가 훨씬 마음에 든다.

  나무 모양은 자연 그대로 긴 원뿔형을 이루어 깔끔하고 단정하다. 적갈색의 가을 단풍도 매력적이다. 담양 메타스쿼이아 숲길에서 맑고 깨끗한 산소와 피톤치드로 힐링과 삼림욕을 즐기면서 추억을 만들 수 있는 이야기 길이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한국관광공사, 담양 문화관광과) - 담양호 담양 용마루길 -

* 문화재 소재지: 전남 담양군 담양읍 메타세쿼이아로 12(학동리 58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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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일/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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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 창평(潭陽 昌平) 슬로시티 삼지내 마을 달팽이 걸음으로 걷기

  담양 창평(潭陽 昌平) 슬로시티 삼지내 마을은 백제 시대에 형성된 마을로 동편의 월봉산과 남쪽의 국수봉이 마치 봉황이 날개를 펼쳐 감싸안은 형국으로 월봉천과 운암천, 유천이 마을 아래에서 모인다하여 삼지내라고 하며 전통가옥과 아름다운 옛 돌담장이 마을 전체를 굽이굽이 감싸고 있어 고택과 아늑한 돌담길을 걷다보면 시간마저 쉬어 가는 듯 한다.

  마을안 보물로는 남극루(南極樓, 향토유형문화유산 제3호,조선시대), 돌담(牆, 등록문화재 제265호, 조선시대), 고재선 가옥(전남민속자료 제5호, 1912∼현재), 고정주 가옥(전남민속자료 제42호, 1863), 고광표(고재환)가옥(전남민속자료 제37호, 일제강점기), 고재욱 가옥(민속자료), 상월정(上月亭), 포의사(襃義祠), 창평오일장(창평전통시장) 등이 있다.

  삼지내 마을(http://www.slowcp.com)에서는 민박, 밥상교실, 다양한 체험교실 등을 운영하고 있다.

  슬로시티(Slowcity)는 1999년 이탈리아의 몇몇 시장들이 모여 위협받는 la dolce vita 즉, 달콤한 인생의 미래를 염려하여 슬로시티운동을 출범시켰다. 공식 명칭은 치타슬로(Cittaslow), 유유자적한 도시, 풍요로운 마을이라는 의미의 이탈리아어다. Slowcity의 출발은 느리게 먹기 +느리게 살기 운동으로 시작된 것이다. 2010년 6월말 현재 전 세계 20개국 135 개 도시가 슬로시티에 가입되어있습니다. 빠르게 변화하며 살아가는 도시인의 삶에 반대되는 개념으로 자연환경 속에서 자연을 느끼며 그 지역의 먹을거리와 지역의 독특한 문화를 경험하고 살아가는 삶을 표방한다. 마을을 등에 지고 가는 달팽이가 상징이다. 슬로시티 운동의 목적은, 인간사회의 진정한 발전과 오래갈 미래를 위한 두 가지는 자연과 전통문화를 잘 보호하면서 경제 살리기를 통해 진짜 사람이 사는 따뜻한 사회,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 것입니다. (자료출처: 담양 창평 슬로시티 문화유산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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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담양 삼지천마을 옛 담장(潭陽 昌平 三支川 牆, 등록문화재 제265호)은 돌과 흙을 사용한 토석담으로 비교적 모나지 않은 화강석 계통의 둥근 돌을 사용하였고, 돌과 흙을 번갈아 쌓아 줄눈이 생긴 담장과 막쌓기 형식의 담장이 혼재되어 있다. 아래쪽에는 큰 돌을 쌓고 위로 올라갈수록 중간 크기와 작은 돌을 사용하였다. 총 길이 3600m의 마을 담장을 S자형으로 자연스럽게 굽어진 마을 안길을 따라 형성된 담장은 고가들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삼지천마을은 역사가 약 500년 된 마을 내의 ‘담양 고재선가옥’ 등 여러 채의 전통 한옥과 조화를 이룬다. 담장은 300여 년 전의 원형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어 역사적·문화적 가치가 있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두산백과 문화유산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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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창평 춘강 고정주고택(昌平 春崗 高鼎柱古宅, 전라남도 민속문화재 제42호)은 한국의 전통적인 양반집으로 안채와 2동의 사랑채, 곡간채, 사당, 내외의 문간채등으로 구성되어 나름대로 격식을 잘 갖춘 주택임. 남서측에서 솟을3문을 통과하여 출입하면 안사랑채와 바깥사랑채가 나란히 위치하고 그 뒤로 안채와 곡간채가 직교하여 위치하고 있으며, 안사랑채 사당이 경역을 달리하여 동편에 자리하고 있다.

  안채는 남향으로 자리하는데 전라도지방에서는 보기드믄 ㄷ자형 평면의 건물로 뼈대가 굵고 간살이가 넓은 건실한 한옥이며, 낮은 두벌대의 기단위에 상부를 다듬은 돌 덤벙주초를 놓고 네모기둥인 방주를 세웠으며 가구형식은 2고주 5량가로 구성하였고 안채 상량기록은 <崇禎紀元後五癸丑二月十六日癸卯亥時竪柱>로 확인되어 1913년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육효당이라는 당호가 있는 바깥사랑채는 4칸집인데 전후엔 퇴가 있다. 좌우에는 퇴칸이 없고 전면에 툇마루만 설치되어 있으며 두벌대의 기단위에 사다리꼴로 다듬은 초석을 놓고 네모진 방주를 세웠으며 가구구조는 2고주 5량집이고, 안사랑채는 4칸의 전후좌우 퇴집으로 팔작지붕집이다.

  춘강 고정주(1863-1933) 고택은 부농형 양반가이며 특히 양반가가 갖추어야 할 구성요소를 두루 잘 갖추고 있고 있다. 고택이며, 창평지역 근대교육의 효시인 영학숙(英學塾)과 창흥의숙(昌興義塾)의 모태인 한말 민족운동의 근원지라는 점으로 보아도 현대사적 의미가 있다. (자료출처: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후투티 hoopoe -

 

* 문화재 소재지: 전라남도 담양군 창평면 돌담길 56-24 (삼천리 411)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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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일/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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