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뒷동산, 여름 정원을 왕의 걸음으로……

  창덕궁(昌德宮. 사적 제122호)은 아름답고 넓은 후원 때문에 다른 궁궐보다 왕들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 후원은 임금과 신하들이 휴식공간으로 내전의 뒤쪽으로 울창한 숲과 연못의 자연지형을 그대로 살려 골짜기 마다 아름다운 크고 작은 연못과 정자를 만들었고 옥류천 주변에는 소요정, 청의정, 태극정 등 아담한 규모의 정자를 세워 인위적인 손질을 더해 자연을 더 아름답게 완성한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며 펼쳐진 점이 뛰어나다.

   또한 우리나라 옛 선현들이 정원을 조성한 방법 등을 잘 보여주고 있어 조선 시대의 역사적으로나 건축사적으로 귀중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160여 종의 나무들이 울창하게 숲을 이루며 300년이 넘는 오랜 나무들도 있다. 4개의 골짜기에 각각 부용지(芙蓉池), 애련지(愛蓮池), 관람지(觀覽池), 옥류천(玉流川) 영역으로 펼쳐진 후원 깊숙한 곳으로 들어갈수록 크고 개방된 곳에서 작고 깊숙한 곳으로, 인공적인 곳에서 자연적인 곳으로 점진적으로 변화하며 뒷산 응봉으로 이어지며 능선과 골짜기를 오르내리며 온몸으로 느끼는 여름 숲의 아름다움으로 장대한 경관이 펼쳐져있다.

  연경당은 안채와 사랑채를 둔 사대부 집처럼 지었으며, 궁궐의 전각이면서도 단청을 입히지 않은 소박한 모습으로 후원의 정취를 더한다.

  후원은 왕과 왕실 가족의 휴식을 위한 공간이지만, 왕이 주관하는 여러 가지 야외 행사가 열리는 장소이기도 했다. 조선 초기에는 왕이 참석하는 군사 훈련이 자주 실시되었고, 활쏘기 행사도 열렸으며, 대비를 모시는 잔치나 종친 또는 신하를 위로하는 잔치도 베풀어졌다. 또한 왕은 후원에 곡식을 심고 길러 농사의 어려움을 체험하고, 왕비는 친히 누에를 쳐서 양장을 장려하기도 하였다. 후원은 창덕궁 전체의 60%를 차지할 정도로 넓고, 가끔 호랑이가 나타나기도 했을 정도로 깊다. 게다가 절경들은 골짜기마다 숨어 한꺼번에 드러나지 않으므로, 궁궐의 뒷동산을 왕의 걸음으로 천천히 직접 걸으면서 골짜기의 연못과 정자들을 찾아다녀야만 후원의 진정한 아름다움의 참모습을 느낄 수 있다. (문화재청 문화유산 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 (와룡동)

 

자료: 이영일/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사진: 고앵자/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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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궐내각사(昌德宮 闕內各司, 사적 제122호)

  창덕궁 궐내각사(昌德宮 闕內各司, 사적 제122호)는 왕과 왕실을 보좌하는 궐내 관청이다. 관청은 대부분 궐 바깥에 있었지만, 왕을 가까이 보좌하기 위해 특별히 궁궐 안에 세운 관청들을 궐내각사라고 불렀다. 인정전 서쪽 지역에는 가운데로 흐르는 금천을 경계로 동편에 약방, 옥당(홍문과)이, 서편에 내각(규장각), 봉모당(奉謨堂), 대유재(大酉齋), 소유재 등이 자리하고 있다. 이들은 모두 왕을 가까이에서 보좌하는 근위 관청이며, 여러 부서가 밀집되어 미로와 같이 복잡하게 구성되었다. 일제강점기 때 규장각, 대유재, 소유재는 도선관으로 옮기면서 규장각과 봉모당 등 모든 전각들이 헐리고 도로와 잔디밭으로 변해 버렸다. 지금 있는 건물들은 2000∼2004년에 걸쳐 복원되었다.

. 내각(內閣)은 규장각(奎章閣)의 별칭이다. 이문원(?文院)이라고도 불렀으며 규장각 학사들이 근무하던 곳이다. ‘내각(內閣)’이라는 현판은 규장각 남문에 붙어 있는데 이는 최근에 규장각을 복원하고서 붙인 것이다. ‘내각(內閣)’은 ‘궁궐 내의 중앙 관서’라는 뜻이다. 이 용어는 오래 전부터 쓰여서 중국의 삼국 시대에는 비서각(秘書閣)을 가리켰으며 송나라 때는 태종(976~997년)이 세운 용도각(龍圖閣), 진종(眞宗, 968~1022년)이 세운 장서각인 천장각(天章閣), 인종(仁宗, 1010~1063년)이 세운 보문각(寶文閣) 등을 두루 내각이라고 불렀다. 명나라·청나라 때에는 재상의 관서(官署)를 가리켰다.

. 규장각(奎章閣)은 내각이라고도 하며 왕실 도서관과 같은 곳이다. 정조(正祖,1752~1800년)가 설치하여 역대 국왕의 시문, 친필(親筆)의 서화(書?), 고명(顧命), 유교(遺敎), 선보(璿譜: 王室世譜), 보감(寶鑑) 등을 보관·관리하는 일을 맡았다. 정조는 1776년 즉위하자 곧 창덕궁의 북원(北苑), 곧 지금의 주합루(宙合樓) 자리에 새로 집을 짓고 규장각이라고 명명(命名)했다. 규장각은 승정원·홍문관·예문관의 근시(近侍)기능을 흡수했으며, 과거 시험과 초계문신(抄啓文臣) 제도도 함께 주관하였다. 초계문신은 글 잘하는 신하들을 대상으로 매월 시험을 치른 후 상벌을 내려 재교육의 기회를 주는 제도였다. 1779년에는 규장각 외각에 검서관을 두고 서얼 출신들을 등용했다. 이런 조치들은 학문의 진작은 물론 정조의 친위(親衛) 세력 확대에 이바지하였다. 1781년에는 규장각 청사를 옛 도총부(都摠府) 청사로 옮겼다. 또 강화사고(江華史庫) 별고를 신축하여 강도외각(江都外閣)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훗날 병인양요(1866년)3) 때 프랑스에게 약탈당한 외규장각(外奎章閣)이다. 정조의 사후 규장각은 정치적 선도 기구로서의 기능을 점점 잃었다. 1868(고종 5)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주합루 자리에서 현재의 위치로 옮겨지고 소장 도서들도 이문원·경복궁의 집옥재(集玉齋)·시강원(侍講院) 등에 분산되었다. 국권을 빼앗기면서 이 도서는 1911년 조선 총독부 취조국(取調局)으로 넘어갔다. 그 후 주무 관청이 몇 차례 바뀌어 경성제국대학으로 이관되었다가, 광복 후 서울대학교에 남았다. 그 도서를 소장·관리하고 연구하는 기관이 ‘서울대학교 규장각’이다. ‘규장(奎章)’이란 ‘임금의 시문이나 글씨’라는 뜻이다. ‘규(奎)’는 천체(天體)의 대표적인 별자리인 28수(宿) 중의 하나로 문운(文運)을 주관한다고 알려져 있다. 여기에서 유래하여 ‘문장(文章)’을 상징하는 글자로 쓰이게 되었으며 특히 임금의 글이나 글씨를 미화하는 뜻을 가지게 되었다.

. 옥당(玉堂)은 홍문관(弘文館)의 별칭이다. 조선 시대에 궁중의 경서(經書)·사적(史籍)의 관리, 문한(文翰)의 처리 및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으로 옥서(玉署)·영각(瀛閣)·서서원(瑞書院)·청연각(淸燕閣)이라고도 불렀다. 학술적인 관부이면서 사헌부·사간원(司諫院)과 더불어 언론삼사(言論三司)의 하나로서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기능을 담당하였다. 홍문관직은 청요직(淸要職) 4)의 상징이었다. 일단 홍문관원이 되면 특별한 허물이 없는 한 출세가 기약되었다. 조선 시대의 정승이나 판서를 지낸 사람으로서 홍문관을 거치지 않은 경우는 거의 없다. 홍문관 관원이 되려면 교서(敎書) 등을 기초하는 지제교(知製敎) 5)가 될 만한 문장과 임금에게 경전을 강론하는 경연관(經筵官)이 될 만한 학문과 인격이 있어야 함은 물론 가문에 허물이 없어야 했다. 홍문관의 일은 본래 정종 때 설치한 집현전(集賢殿)에서 맡아 하였는데, 세조 초에 세조 집권에 반대한 사육신이 주로 집현전 학사들이었기 때문에 세조가 그 기구까지도 못마땅하게 여겨 폐지했다가 1463(세조 9)년에 홍문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설치한 것이다. 연산군 때 잠시 진독청(進讀廳)으로 고쳤다가1506(중종 1)년에 복구했다. 1894(고종 31)년에 경연청과 합하여 이듬해에 경연원(經筵院)이라 개칭했다가 1896년에 다시 홍문관으로 고쳤다. 건물은 일제에 의해 헐렸다가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옥당(玉堂)’은 ‘옥같이 귀한 집’이라는 뜻이다. 청요직의 상징으로서 출세가 보장되는 인재들이 모인 집, 또는 국가의 중요한 업무를 담당한 집이라는 뜻에서 부른 이름이다. 한편 옥당은 일반 명사로서 궁전의 미칭으로도 쓰이는데 한나라 때 궁전 이름으로 쓰인 적이 있다. 『한서(漢書)』이심전(李尋傳)의 주석에 “옥당전은 미앙궁에 있다.”라고 하였다. ‘옥당’은 중국에서는 송나라 이후로 한림원의 별칭으로 쓰였으나 우리 나라의 경우는 한림원(翰林院)의 기능을 ‘홍문관’과 ‘예문관’의 둘로 나누어 홍문관을 옥당이라고 하고 예문관은 한림이라고 불렀다.

. 예문관(藝文館)은 인정전 서쪽 행각의 숭범문과 향실 사이에 위치한 관청이다. 예문관의 출입문은 숭범문 바깥쪽에 이다. 예문관은 임금의 명령인 사명(辭命)을 짓고, 사초를 작성하여 실록 편찬의 자료로 보관하는 관청이다. 영조가 14년과 32년에 친히 행차하여 각각 ‘태공사필(太公史筆)’, ‘창수고풍(?守古風)’이란 글씨를 써서 걸었다고 한다. 1811(순조 11)년 화재로 사료와 서적이 모두 불에 탔다. 현재의 건물은 2005년에 복원한 것이다. 영조 어필 편액은 현재 전하지 않는다. ‘예문관(藝文館)’은 ‘예문을 담당하는 관서’란 의미이다. 예문은 육예(六藝: 禮·樂·射·御·書·數) 7)에 관련된 도서를 총칭하기도 하고 사장(辭章), 문예(文藝)만을 한정하기도 한다.

. 약방(藥房)은 내의원(內醫院)으로서 궁중의 의약을 담당했던 곳이다. 내국(內局)·내약방(內藥房)·약원(藥院) 등으로도 불렸다. 태종 때 내약방으로 설치되었다가 1443(세종 25)년부터 내의원이라고 했다. 약방은 인정전 서쪽 행각에 가까이 있는데 이는 임금의 병을 가까이에서 치료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내의원을 내의사(內醫司), 궁 밖에 있는 의료 기관인 전의감(典醫監)과 혜민서(惠民署)를 외의사(外醫司)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약방의 역할을 나타내는 ‘調和御藥(조화어약)’, ‘保護聖躬(보호성궁)’의 현판이 현재는 옛 성정각(誠正閣)의 남쪽 맞은편 건물에 붙어 있고 약절구도 그 마당에 있다. 그래서 지금은 일반적으로 성정각이 내의원으로 알려져 있다. 순종(純宗, 1874~1926년) 때 창덕궁이 개조되면서 내의원이 헐리고, 현판들과 의약 도구들이 옮겨졌다고 하는데, 단순히 도구들만을 옮긴 것이 아니라 이 때 성정각이 내의원의 기능을 맡게 된 듯하다. 현재의 건물은 최근에 복원된 것이다. ‘약방(藥房)’은 ‘약을 짓는 방’이라는 뜻이다.

. 양지당(養志堂)은 선원전과 인정전 사이에 있으며 임금이 선원전에서 제사를 모시기 전에 머물며 재계하던 집이다. ‘어재실(御齋室)’이라고도 했다. 임금의 초상화나 임금이 쓴 글씨를 궤에 담아 보관하기도 했다. 일제 강점기 때 없어졌으나 최근에 복원하였다. ‘양지(養志)’는 ‘고상한 뜻을 기른다’는 의미와 ‘부모님의 뜻을 받들어 그 마음을 즐겁게 한다’는 두 가지 뜻이 있다. 여기서는 건물의 기능으로 보아 선원전에 참배(參拜)하기 위해서 이 곳에 머물며 ‘고상하고 엄숙한 뜻을 배양한다’는 의미로 쓰인 것으로 보인다.

. 억석루(憶昔樓)는 선원전 남행각에 위치한다.『한경지략』에 의하면 영조가 신농씨(神農氏)의 위판(位版)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도록 내의원에 명하면서 ‘입심억석(入審憶昔)’이라는 네 글자를 써 주었다고 한다. 이로 보아 억석루는 내의원에 속하는 건물임을 알 수 있다. 고대 중국의 삼황(三皇) 가운데 한 사람인 신농씨는 각종 풀에 있는 약의 효능을 알아보기 위하여 온갖 풀들을 다 먹어 보았으며, 이를 통해 약초를 알아내어 질병을 치료했다고 한다. 일설에는‘자편(?鞭)’이라는 신기한 회초리를 가지고 여러 가지 식물들을 때려서 독성이 있는지 없는지, 효능이 어떠한지, 한성(寒性)인지 열성(熱性)인지를 판별했다고도 한다. 그는 나무로써 쟁기와 보습 등의 농기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또 약을 발명하여 사람들의 병을 치료했기 때문에 의약과 농업의 창시자로 추존된다. ‘억석(憶昔)’은 ‘옛날을 생각한다’는 뜻이다.영조가 써 준 ‘입심억석’에서 따 온 말이며, 『한경지략』의 기록에 따르면 약을 최초로 발명한 신농씨를 생각한다는 의미가 된다. 신농씨의 거룩한 마음을 생각하면서 질병을 치료하는 약을 잘 만들라는 의도를 담고 있는 듯하다.

. 운한문(雲漢門)은 내각 안에 있는 봉모당(奉謨堂)으로 들어가는 문이다. ‘운한(雲漢)’은 ‘은하수’라는 뜻이다.『시경(詩經)』의「대아(大雅)·역복(?樸)」편에 “크게 밝은 저 은하수여, 하늘에 아름다운 무늬가 되었도다.”「대아(大雅)·운한(雲漢)」편에 “크게 밝은 저 은하수여, 빛이 하늘을 따라 돌도다.” 라는 용례들이 보인다. ‘운한’에는 ‘하늘’, ‘임금의 아름다운 덕’이라는 뜻도 있으며, 특히 ‘제왕의 필묵’이라는 뜻도 있어 봉모당과 연관이 있어 보인다.

. 봉모당(奉謨堂)은 규장각의 역대 선왕의 유품을 보관하던 전각이다. 1776(정조 즉위)년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면서 중심 건물인 주합루에 정조 자신의 왕위에 관련된 어진(御眞)·어제(御製)·어필(御筆)·보책(譜冊)·인장(印章) 등을 보관하도록 했다. 이 때 본래 이 곳에 있었던 역대 선왕들의 유품들을 옛 열무정(閱武亭) 건물로 옮기고 이 곳을 봉모당이라고 이름지었다. 봉모당은 다시 1857(철종 8)년 1월에 규장각의 본부인 이문원의 부속 건물 대유재(大酉齋)로 옮겼다. 이는 정조가 죽은 뒤 규장각의 기능이 크게 약화되면서 가장 중요한 기능으로 남은 역대 왕들의 어제 관리를 수월하게 수행하기 위한 것이었다. 1908년 규장각의 기구가 새로 마련되면서 이 곳의 업무는 전모과(典謨課)에서 관할했다. 1911년 옛 이문원의 대유재와 소유재(小酉齋) 자리에 규장각 건물을 새로 지으면서 봉모당 건물도 일본식으로 지어 보첩류를 제외한 왕실 자료를 보관하였다. 지금의 봉모당은 소유재 자리에 들어선 것이다. 1969년7월 이 건물을 철거하고 장서를 창경궁 장서각(藏書閣)으로 옮겼으며, 1981년에 다시 한국정신문화연구원(지금의 한국학중앙연구원)으로 이관하였다. ‘봉모(奉謨)’는 ‘모훈(謀訓)의 자료를 받들어 간직한다’는 뜻이다. 모훈이란 ‘임금과 신하가 함께 국사를 논의하여 적은 글’ 또는 ‘임금이 백성을 가르치고 교화하기 위하여 지은 글’이라는 뜻이다.『서경(書經)』의「대우모(大禹謨)」, 「고요모(皐陶謨)」등의 편명에서 용례를 볼 수 있다.

. 책고(冊庫)는 봉모당 뒤쪽에 세 채가 있으며 책을 보관하던 곳이다. ‘책고(冊庫)’는 ‘책을 보관하는 창고’라는 뜻으로 ‘서고(書庫)’라는 말과 같다. 현재의 현판은 최근에 건물을 복원하면서 새롭게 붙인 것이다. <동궐도>에 ‘책고(冊庫)’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이는 건물의 기능 또는 용도를 기록한 것이지 현판이 곧 ‘책고’라고 쓰여 있었다는 의미는 아닐 것이다.

. 검서청(檢書廳)은 규장각의 검서(檢書)들이 입직(당직)을 서던 규장각의 부속 건물이다. 정조가 즉위하던 해인 1776년에 규장각을 처음 만들고 1779년에 규장각에 검서관 4명을 두었는데 이 검서들은 입직을 해야 했다. 이들은 번갈아서 임금의 갑작스런 하문에 대비하고자 밤을 세웠는데 처음에는 적당한 입직실이 없어 규장각의 구석방에서 대기하였다. 그러다가 1783년 여름 규장각의 왼편에 방 2칸, 마루 1칸의 부속채를 짓고 거기서 입직하게 했는데 이 곳이 검서청이다. 현재의 검서청은 규장각의 서쪽에 있으며 순종 때 대유재를 바꾸어 부른 것이다. ‘검서(檢書)’는 ‘서적을 점검한다’는 뜻이다. 서적을 검토하고 필사하는 일을 가리킨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 (와룡동)

 

자료: 이영일/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사진: 고앵자/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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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롭고 현명한 왕자 생산을 기원한 창덕궁 왕비의 거처 일원

  창덕궁 대조전(昌德宮 大造殿, 보물 제816호)은 왕비가 거처하는 정당(正堂)이다. 궁궐의 내전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중궁전(中宮殿)이라고도 불린다. ‘대조(大造)’는 ‘큰 공업(功業)을 이룬다’는 뜻이다. ‘지혜롭고 현명한 왕자의 생산을 의미한다’고 풀이하기도 하는데 이 곳에서 왕비가 거주했기 때문이다. 대조전은 용마루가 없는 무량각(無樑閣) 지붕을 하고 있는데 이와 같이 무량각을 구성한 이유는 대조전의 집채가 대지를 상징하는 곤전(坤殿)인 까닭에 하늘 높이 용마루가 솟지 않도록 하기 위한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이 건물에서 조선 제9대 왕인 성종(1494년)을 비롯하여 인조(1649년), 효종(1659년),철종(1863년), 그리고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순종(1926년)이 승하하였고, 순조의 세자로 뒤에 왕으로 추존된 익종이 태어나기도 하였다.

  대조전은 조선 1405(태종 5)년에 처음 지었는데 임진왜란 때를 비롯하여 그 뒤로도 여러 차례 불이 나서 다시 지어야 했다. 지금의 건물은 1917년에 또 화재를 당하여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경복궁에 있던 교태전을 헐어 이 곳에 옮겨지은 것이다. 경복궁에서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康寧殿)을 헐어다 희정당(熙政堂)을 지을 때 왕비의 침전이던 교태전(交泰殿)도 함께 옮겨다 대조전을 지었는데,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창덕궁에 적합하도록 그 구조는 새롭게 하였기에 건물 자체는 물론 주변의 부속 건물들도 많은 변화를 거쳤다. 헌종 연간에 발간된『궁궐지』에 의하면 당시 대조전 현판 글씨는 순조의 어필이었다고 한다. 대조전은 현재 36칸으로 앞면 9칸·옆면 4칸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이다. 건물 가운데 3칸은 거실로 삼았으며, 거실의 동·서쪽으로 왕과 왕비의 침실을 두었다. 각 침실의 옆면과 뒷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중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다. 건물 안쪽에는 서양식 쪽마루와 유리창, 가구 등을 구비하여 현대적인 실내 장식을 보이고 있다.

. 흥복헌(興福軒)은 대조전 동쪽에 붙어 있는 익각(翼閣)이다. 주로 임금이 친왕(親王)과 조정 대신들을 접견하던 장소로 쓰였다. 경술 한일합방(韓日合邦)이라는 국치를 가져온 어전회의가 열렸던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흥복(興福)’은 ‘복을 불러일으킨다’는 뜻이다.

. 선평문(宣平門)은 대조전의 남쪽에 있는 정문이다. 희정당(熙政堂)과 통한다. 높은 계단 위에 세워져 있는데 이는 왕비의 침전인 대조전을 함부로 볼 수 없게 하려는 의도를 담고 있다. ‘선평(宣平)’은 ‘화평(和平)을 세상에 펼친다’는 뜻이다.

. 요휘문(耀暉門)은 대조전 서쪽에 있는 문인데 남쪽을 향하고 있다. ‘요휘(耀暉)’는 ‘밝게 빛난다’는 뜻이다. ‘耀(요)’는 ‘曜(요)’와 통용자이고 ‘暉(휘)’는‘輝(휘)’와 통용자여서 여러 문헌에 서로 뒤섞여 나온다.『순종실록(純宗實錄)』에서는 ‘曜暉門(요휘문)’이라고 하였다.

  경극문(慶極門)은 대조전에서 서쪽으로 오가는 문이다. ‘경극(慶極)’은 ‘경사스러움이 지극하다’는 뜻이다.

. 경훈각(景薰閣)은 대조전 뒷마당의 서쪽에 있는 건물이다. 동쪽에는 집상전(集祥殿)이 있고 서쪽에는 경훈각이 있었는데 집상전은 화재로 소실된 후 복구되지 않아 지금은 남아 있지 않다. 경훈각은 원래 2층 건물로, 아래층을 경훈각이라 하고 위층은 징광루(澄光樓)라고 하였다. 1461(세조 7)년에 창덕궁 각 방의 이름을 붙일 때 누상을 징광루, 누하를 광세전(光世殿), 광연전(廣延殿)이라고 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경훈각은 광세전과 광연전이 후에 변한 것으로 여겨진다. ‘경훈(景薰)’은 일반 시문(詩文)에서 ‘춘화경명(春和景明)’처럼 주로‘경광(景光), 즉 경치가 훈훈하다’는 의미로 쓰인다. 위층의 누각 이름이 ‘징광(澄光: 맑은 풍광)’이었음을 상기하면 그런 뜻으로 보아도 될 듯하다. 그러나 이 건물의 용도를 고려해 본다면 ‘경(景)’은 ‘우러르다(仰也)’, ‘사모하다(慕也)’라는 뜻을 취하고 ‘훈(薰)’은 ‘훈도(薰陶)’8)의 뜻으로 보아 ‘훈도를 우러러 사모하다’는 풀이도 가능하다. 숙종의「경훈각시」에는 두 가지 뜻이 다 담겨 있다. ‘薰(훈)’은 ‘熏(훈)’의 통용자로 쓰인 듯하다. 왕조실록에 ‘景熏閣(경훈각)’이라고 한 용례가 보인다.

. 청향각(淸香閣)은 대조전 동쪽 뒤편에 있는 건물이다.『동궐도』에도 보이지 않고 남은 기록이 전혀 없다. 1917년 11월 대조전이 화재로 타버리자, 1920년에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 복구하였는데, 이때 딸려 온 것으로 추정된다. 자세한 용도는 알 수 없으나 집상전이 1667(현종 8)년에 효종비 인선왕후(仁宣王后,1618~1674년)를 위하여 경덕궁(慶德宮)의 집희전(集禧殿)을 헐어다 만든 것이고, 대조전 일대가 모두 왕후나 대비를 모시는 건물임을 고려한다면, 청향각은 집상전 혹은 대조전에 필요한 각종 물품을 보관하던 용도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청향(淸香)’은 ‘맑은 향기’또는 ‘맑고 향기롭다’는 의미이다. 오례통고(五禮通考)의「길례(吉禮)·배위작헌주보령지곡(配位酌獻奏保寧之曲)」조에 “술이 맑고 이에 향기로우며[酒淸斯香], 희생이 깨끗하고 이에 크도다.”라 하여 제수로 쓰이는 술의 맑고 향기로움을 표현하는 데 쓰였다. 또『오례통고』의「가례(嘉禮)·향음주례(鄕飮酒禮)」편에 “저 남쪽 언덕을 바라보니 철에 맞는 물건이 아름답도다. 샘물은 맑고 난초는 향기로우니[有泉淸?, 有蘭馨香], 아침에 마시려 길어오고 저녁 반찬에 맛보도다. 어머니의 얼굴이 기뻐하지 않아 내 마음이 허둥대도다.”라는 대목이 나온다. 아름다운 계절에 아침저녁으로 어머니를 봉양하나 기뻐하지 않으시니, 내 마음이 초조하다는 내용이다. 이를 종합하면 대조전과 집상전 일대가 여성의 공간이므로 어버이를 봉양하는 데 쓰이는 물품을 관리하는 곳이라는 장소의 의미와 통한다.

. 여춘문(麗春門)은 대조전과 희정당 동쪽 중간쯤에 남향으로 난 문이다. 본래 여춘문은 『동궐도』에 집상전의 동문으로 그려져 있으나, 1920년 경복궁의 교태전을 헐어다 지으며 집상전 자리로 물려 짓는 바람에 현재는 대조전에 속한다. 1772(영조 48)년 1월에 영조가 이 곳에서 승지에게 명하여 토지와 곡식의 신인 사직에게 제사를 지내는 사직제(社稷祭) 제관(祭官)의 거안(擧案) 10)을 읽게 한 일이 있다. ‘여춘(麗春)’은 ‘아름다운 봄’이라는 의미이다. 태양을 맞이하는 동쪽의 문[東門]으로서 그 의미가 잘 통한다. 경희궁 숭정전(崇政殿)의 동문 이름도 여춘문 이었다.『동궐도』에는 집상전 동쪽에 동서 방향으로 난 문으로 그려져 있어, 남향으로 난 현재의 문과는 방향이 전혀 다르다.

. 가정당(嘉靖堂)은 대조전 후원 담장 너머 넓은 공터에 있는 정자이다. 대조전 후원 중간쯤의 경사진 계단 끝의 천장문(天章門)을 나서면 북쪽의 넓은 뜰에 외따로 서 있다. 정면 5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가정(嘉靖)’이란 ‘아름답고 편안하다’는 뜻이다.『동궐도』에 보이지 않으므로 19세기 후반, 혹은 일제시대에 덕수궁의 가정당을 옮겨온 것으로 추정된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 (와룡동)

 

자료: 이영일/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사진: 고앵자/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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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평하고 즐거운 정치의 산실 창덕궁 희정당

  창덕궁 희정당(昌德宮 熙政堂, 보물 제815호)은 창덕궁의 침전인 대조전(大造殿)의 바로 앞 남쪽에 있으며 전각의 뒤쪽으로 난 선평문으로 대조전과 통한다. 대조전과 같은 높이의 기단(基壇) 위에 나란히 지었다. 앞마당에 석등(石燈)이 있다. 조선 후기에 국왕이 평상시에 거처하던 곳이고 본래 침전(寢殿)으로 사용하다가, 조선 후기부터 임금님의 집무실(便殿)로 사용하였다. 평상시에는 쉬면서 신하들을 만나는 곳이다.

  희정당은 협양문(協陽門) 안에 있으며 경연, 소대, 인견할 때에는 늘 성정각과 중희당 두 곳에 나아갔다. 인정전이 창덕궁의 상징적인 으뜸 적각이라면 희정당은 왕이 가장 많이 머물렀던 실질적인 중심 건물이라고 할 수 있다. ‘희정(熙政)’이란 ‘화평하고 즐거운 정치’를 의미한다. 정치를 잘하여 모든 일이 잘 되고 모든 백성이 화락하게[萬姓咸熙] 된다는 의미이다. 순조의「어제희정당명」은 그 이름의 뜻을 풀이하듯, “화락하고 느긋하며, 모든 일이 잘 다스려지고, 모든 관리가 잘 단속되며 만백성이 모두 기뻐하도다. 이당에 이름을 지음에 임금의 뜻이 담겨 있으니, 매양 이 편액을 볼 때마다 그 뜻을 어찌 범상하게 여기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홍석주는「중건상량문(重建上樑文)」에서, “엎드려 생각건대 별자리가 벌이어 북극성을 우러르니, 상원(上垣)은 명당의 자리를 표시하고, 하관(下管)에선 새 궁전의 송축을 연주하네. 백 개의 건물이 다시 일어나니, 모든 정사가 다 화락하리로다.”라고 하였다.

  건물을 지은 시기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연산군 2년(1496)에 수문당이라는 건물이 소실되어 이를 다시 지으면서 이름을 희정당이라 부르게 되었다. 그 후 몇 차례의 화재로 다시 지었는데 지금 있는 건물은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불에 탄 것을 1920년에 복구 하면서 경복궁의 침전인 강녕전을 헐어다 옮겨 지은 것이다. 동궐도에 그려진 원래의 희정당은 여러 개의 돌기둥 위에 세운 아담한 집이었고 마당에 연못도 있었다. 지금의 모습과는 안전히 다르고, 원래의 강녕전과도 다르다. 재건된 내부는 쪽마루와 카펫, 유리 창문, 천장에 샹들리에 등을 설치하여 의장(意匠)은 실내의 가구도 외국제이며, 방 안팎에 전기가 가설된 서양식으로 꾸며졌다. 본래 경복궁의 강녕전 건물을 옮겨 지은 것이므로 좌우의 합각벽에 ‘康(강)’, ‘寧(녕)’이란 무늬가 각각 남아 있다. 1920년 완공될 때 건물 안의 양쪽 벽 위에 해강(海崗) 김규진(金圭鎭, 1868~1933년)이 <총석정절경도(叢石亭絶景圖)>와 <금강산만물초승경도(金剛山萬物肖勝景圖)>를 그렸다.

  희정당 규모는 앞면 11칸·옆면 4칸으로 한식건물에 서양식 실내장식을 하고 있다.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기와지붕 익공(翼工)으로 꾸몄다. 앞면 9칸·옆면 3칸을 거실로 꾸며 좌우에 각각 한식 응접실과 양식 응접실로 나누었고 그 바깥둘레에 툇간으로 꾸며서 통로(복도)로 썼으며, 서쪽은 회의실로 꾸미고, 동쪽은 여러 개의 방으로 목욕탕 ·칸막이방 등을 마련하였다. 응접실에는 김규진의 금강산총석정절경도, 금강산 만물초승경도의 벽화가 걸려있다. 건물 앞쪽에는 전통 건물에서 볼 수 없는 현관이 생겼고 자동차가 들어설 수 있게 설비되었다. 이는 마차나 자동차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채택된 서양식 구조라 할 수 있다. 조선 후기와 대한제국시대에 왕의 사무실과 외국 사신 등을 접대하는 곳으로 사용하면서 한식과 서양식이 어우러진 건물로, 시대의 변천사를 엿볼 수 있는 건축이라 할 수 있다.

. 못 다 핀 개혁정치의 꿈, 효명세자: 희정당은 순조의 아들이며 헌종의 아버지인 효명세자(후일 익종(翼宗), 1809~1830)가 승하한 곳이기도 하다. 외모와 총명함은 물론이고 책을 좋아하는 모습까지 할아버지 정조를 빼 닮았다고 전해지는 효명세자, 순조의 명으로 19세에 대리청정을 시작한 효명세자는 안동 김씨 세력과 맞서 참신한 인재를 등용하고 개혁정치를 펼쳤다. 그러나 아버지의 희망, 할아버지의 이상, 그리고 조선 백성들의 염원을 채우지 못한 채 22세의 꽃다운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으니, 정사를 돌본 지 겨우 3년 3개월 만이였다. 효명세자는 후원에 작은 공부방 의두합을 짓고 독서를 즐겼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 (와룡동)

 

자료: 이영일/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사진: 고앵자/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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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 창덕궁 선정전과 그 일원

  창덕궁 선정전(昌德宮 宣政殿, 보물 제814호)은 인정전의 동편에 있는 임금의 편전(便殿)이다. 원래 이 곳의 이름은 아침마다 임금에게 정무를 아뢰던 청사(廳舍)라는 뜻의 조계청(朝啓廳)이었는데, 1461(세조 7)년 12월에 선정전(宣政殿)이라고 고쳐 불렀다. 편전에서는 왕이 신하들과 나라 일을 의논하거나 왕비와 함께 크고 작은 행사를 치렀다. 이 곳은 임금의 집무실이지만 때때로 왕비가 이용하기도 했다.

  조선왕조실록과『궁궐지』에 따르면 1471(성종 2)년 가을에 왕비가 이 곳에서 노인들을 위한 잔치를 열었고, 1477(성종 8)년과 1493(성종 24)년 봄에는 친잠례(親蠶禮)를 지냈다. 조선 후기에는 편전을 내전의 희정당(熙政堂)으로 옮겨 사용하였다. ‘선정(宣政)’이란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는 뜻이며, 편전(便殿)이란 임금과 신하가 정치를 논하고, 유교경전과 역사를 공부하는 곳을 말하며, 이곳에서 임금과 신하들이 정치를 논하는 것을 ‘상참(常參)’이라고 한다. 상참에 참여할 수 있는 신하는 3품의 당상관 이상 이다. 영조는 이 곳에서 신하들과『소학(小學)』을 토론하여 영조 20년에 『선정전훈의소학(宣政殿訓義小學)』을 간행하기도 했다.

  지금의 선정전(宣政殿)은 앞면 3칸·옆면 3칸으로 규모가 크지 않은 1층 건물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구조가 기둥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꾸몄다. 건물 안쪽은 탁 트여 있으며 바닥에는 붉은 색의 양탄자를 깔았고 천장에서 멋진 단청을 볼 수 있다. 선정전의 기와는 청색 유리기와인데, 강화에서 육연 스님이 굽던 계열의 기와로 임진왜란 이전에는 다른 건물에도 있었다. 상참 등 그 용도가 매우 중요해서인지 다른 전각들과 달리 지붕도 청색 유리기와로 덮은 청기와인데 이 기법은 중국에서 도입한 것으로 ‘회회청(回回靑)’이라는 비싼 안료를 외국에서 수입하여 청기와를 구웠다고 한다. 창덕궁에 남아 있는 건물 중 유일하게 청기와를 얹은 건물이고, 조선 중기 건축재료의 모습을 잘 남기고 있어 건축사 연구에 중요한 문화재이다. 임진왜란 때 불에 타 광해군 때 재건하였고 1623년 인조반정 때 또 불에 타 1647(인조 25)년에 광해군이 인왕산 아래에 세웠던 인경궁(仁慶宮)의 광정전을 헐어다가 중건한 조선중기의 대표적인 아름다운 목조건물이다. 1803(순조 3)년에 또 불에 타서 이듬해(1804년) 12월에 재건한 것이 지금까지 전한다.

  선정전에서 임금과 신하가 국사를 논할 때에는 사관이 임금의 좌우에서 회의내용을 기록했으며 이를 사초(史草)라고 한다. 사초를 토대로 선왕이 죽은 뒤 새로운 왕이 실록을 편찬하는데 이것이 현재의 조선왕조실록이며 473년간의 분량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어 유네스코에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선정문(宣政門)은 선정전으로 들어가는 남쪽 문이다. ‘선정(宣政)’은 정치와 가르침[政敎]을 널리 떨친다[宣揚]는 뜻이다. 영조는 직접 선정문에 나아가 궁궐에 물건들을 납품하던 공인(貢人)이나 시전 상인 등을 만나 폐단을 물어 보고 체납된 세금을 감해 준 적이 있다. 정조 역시 선정문에서 공인과 시전 상인들을 불러 모아 민심을 물었으며 그것을 바탕으로 백성들을 구제하는 정책을 폈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율곡로 99, 창덕궁 (와룡동)

 

자료: 이영일/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사진: 고앵자/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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