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가지 소원은 꼭 들어 준다는 관봉 갓바위 부처님

  경산 팔공산 관봉 석조여래좌상(慶山 八公山 冠峰 石造如來坐像, 보물 제431호)은 팔공산 남쪽 관봉(冠峰)의 정상에 병풍처럼 둘러 쳐진 암벽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통일 신라 시대 석좌불상이다. 관봉(冠峰)의 우리말이 ‘갓바위’여서 ‘갓바위 부처님’ 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것은 이 불상의 머리에 마치 갓을 쓴 듯한 넓적한 돌이 올려 있어서 유래한 것이다. 소원을 빌면 꼭 한 가지는 들어 준다고 하여 찾는 사람이 많고 바라보는 방향이 경남, 울산, 부산 지역을 바라보게 되어 있어 이 지역 사람들의 왕래가 더욱 잦단다.

  석불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육계)가 뚜렸하다. 얼굴은 둥글고 풍만하며 탄력이 있지만, 눈꼬리가 약간 치켜 올라가 있고 귀는 어깨까지 길게 내려오고 굵고 짧은 목에는 3줄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표시되어 있다. 다소 올라간 어깨는 넓고 반듯해서 당당하고 건장하지만 가슴은 평판적이고 신체의 형태는 둔중해진 듯하다. 투박하지만 정교한 두 손은 무릎 위에 올려놓았는데, 오른손 끝이 땅을 향한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과 유사한 손모양은 석굴암의 본존불과 닮았으나 불상의 왼손바닥 안에 조그만 약합을 들고 있는 것이 확실해서 약사여래불을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불상이 앉아 있는 대좌(臺座)는 4각형인데 앞면과 옆면으로 옷자락이 내려와 대좌를 덮고 있다. 불상의 뒷면에 병풍처럼 둘러쳐진 암벽이 광배의 구실을 하고 있으나, 뒷면의 바위하고는 떨어져 따로 존재하고 있다. 풍만하지만 경직된 얼굴, 형식화된 옷주름, 평판적인 신체는 탄력성이 배제되어 8세기의 불상과는 구별되는 9세기 불상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경북 경산시 와촌면 갓바위로81길 176-64, 선본사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photo/storyView.do?categoryType=4&contentsSeq=10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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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뭄의 고통을 백성들과 함께한 정조에 창덕궁 측우대

  창덕궁 측우대(昌德宮 測雨臺, 보물 제844호)는 조선시대에 강우량을 측정하는 측우기를 올려 놓았던 대석(臺石)이다. 높이 30.3㎝, 가로 45.3, 세로 45.5㎝의 대리석으로 만든 이 측우대는 정조 6년(1782) 6월부터 7월 사이에 계속되는 가뭄에 비오기를 바라는 간절한 뜻을 하늘에 알리고 비를 기다리는 의식적인 의의를 담고 있다. 측우기는 한국전쟁 때 없어지고 현재 측우대만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측우대 대석의 4면에 새겨진 글에는 측우기의 제작 경위와 그 뜻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말하고 있어 조선 기상학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측우기와 측우대는 영조 때 전국적인 정비 이후에도 필요에 따라 중앙이나 지방에서 제작되었다. 남아 있는 유물은 1782년에 제작한 측우대와 1811년의 측우대, 그리고 1837년의 측우기가 있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효자로 12, 국립고궁박물관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photo/view.do?categoryType=1&contentsSeq=105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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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비구 제작 동종-서울 화계사 동종(보물 제11-5호)

  사인비구 제작 동종-서울 화계사 동종(思印比丘製作 銅鍾-서울 華溪寺 銅鍾, 보물 제11-5호)은 조선 숙종 때 경기도와 경상도 지역에서 활동한 승려인 사인비구에 의해서 조선시대 숙종 9년, 1683년에 제작되었다. 사인비구는 18세기 뛰어난 승려이자 장인으로 전통적인 신라 종의 제조기법에 독창성을 합친 종을 만들었다. 현재 그의 작품 8구가 서로 다른 특징을 보이며 전해지고 있다.

  사인비구 제작 동종은 종을 매다는 고리 부분에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한 것이 특징이다. 종의 어깨 부분과 입구 부분에 넓은 띠를 두르고 있으며, 몸통에는 사각형의 유곽과 위패 모양을 균형있게 배치하여 안정감을 준다. 동종의 정상부는 음통(音筒) 없이 종을 매다는 고리 부분인 용뉴(龍鈕)만 표현되었는데, 천판(天板) 위에 당당하고 사실적으로 표현된 두 마리의 용을 조각하였다. 그 아래 종의 어깨 부분에 있는 상대(上帶)는 2단으로 처리하여 ‘六字大明王眞言’과 破地獄眞言’이라 쓴 글자를 새겼다. 상대 아래에는 유곽(遊廓) 4좌가 있는데, 각각 사각형이며 6엽(葉)의 연화좌를 마련하고 여기에 유두(乳頭) 9개씩을 배치하였다. 유곽 사이에는 위패(位牌) 4좌를 새기고 그 안에 ‘宗面磬石’, ‘王道 隆’, ‘惠日長明’, ‘法周沙界’라는 글씨를 각각 새겼는데, 안성 청룡사동종에도 이와 똑같은 글씨가 있다. 종신(鐘身)은 어깨에서 곡선을 그리며 둥그스름하게 내려오다 종복(鐘腹) 부분에서 종구(鐘口)에 이르기까지 수직선을 이루며 내려온다. 이처럼 종구 부분이 오므라들지 않고 수직선을 보이는 것은 중국 원(元) 동종의 특징으로, 조선시대에서 17세기 이후에 보편화된 형식이었다. 그리고 종신 아래 하대는 상대와 마찬가지로 화문이 새겨져 있는데, 넝쿨 사이로 활짝 핀 꽃무늬가 어우러져 있어 화사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종신 표면에는 보살상 등 그 밖의 다른 문양 장식은 없고, 명문을 양각으로 새겨 넣었을 뿐이다. 명문은 전부 200자 가까이 되며 동종의 제작 시기, 봉안 사찰, 무게 등과 더불어 동종 제작에 참여했던 시주자와 장인(匠人)의 이름이 나열되어 있다.

  사실성과 화사함이 돋보이는 수작일 뿐 아니라, 승려가 공명첩을 가지게 되었다는 당시의 사회상을 알려주는 명문이 남아있어, 종 연구와 더불어 사료로서 가치가 크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삼각산 화계사 동종 바로 옆의 작은 동종이 사인비구 제작 동종, 아래쪽 이미지는 문화재청 문화유산 정보임 -

* 문화재 소재지: 서울 강북구 인수봉로47길 117, 화계사 (수유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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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 제1호 서울 흥인지문과 건축 실명제로 쌓은 서울 한양도성

  서울 흥인지문(서울 興仁之門. 보물 제1호)은 옛날 중요한 국가시설이 있는 한성부를 보호하기 위해 만든 서울 성곽 도성(都城) 성곽 8개의 문 가운데 동쪽에 있는 문이다. ‘인(仁)을 북돋우는 문’이라는 뜻의 흥인지문은 다른 문보다 한 글자가 많아 현판도 세로 두 줄로 쓰였다. 좌청룡인 낙산과 흥인문이 있는 곳이 지세가 낮아 이를 보완할 목적으로 지(之)자를 넣었다고 전한다. 흔히 동대문이라고도 부르는데, 조선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가 단종 원년(1453)에 고쳐지었고, 지금 있는 문은 고종 6년(1869)에 새로 지은 것이다.

  흥인지문의 규모는 앞면 5칸·옆면 2칸의 2층 건물로,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모양을 한 우진각 지붕이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만든 공포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인데, 그 형태가 가늘고 약하며 지나치게 장식한 부분이 많아 조선 후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고 있다. 또한 바깥쪽으로는 외부의 침략을 받기 쉬운 지형을 보충하기 이해 성 밖에서 성문이 보이지 않도록 반원 모양의 옹성(甕城)을 쌓았는데, 이는 성문을 보호하고 튼튼히 지키기 위함이며 적을 공격하기에도 합리적으로 계획된 시설이라 할 수 있다.

  흥인지문은 도성의 8개 성문 중 유일하게 옹성을 갖추고 있으며, 조선 후기 건축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종로 288 (종로6가)

  서울 한양도성(서울 漢陽都城. 사적 제10호)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조선 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과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숭례문, 흥인지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파괴된 도성은 숙종 때 대대적으로 보수하면서 공사에 참여한 감독과 기술자의 실명은 성벽에 기록했다. 한양도성 낙산 구간의 끝자락, 동대문성곽공원 바깥 성벽에는 1706년(숙종 32)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돌에 글자를 새긴 각자성석이 있다. 낙산공원 일대의 한양도성을 축성 할 때 축성시기, 공사를 맡은 구간, 공사 책임자의 직책과 이름, 공사 일자 등이 적혀 있어 축성의 비밀을 여는 열쇠가 된다. 공사는 철저하게 구간별 책임제로 진행되었고 성벽이 무너질 경우에도 이를 책임지게 했다. 각 구간을 어느 지역에서 쌓았는지는 고스란히 남겨놓았다. 지금도 낙산 성곽 길을 걷다 보면 음성, 황간, 영동 등 충청도 지명이, 낙산 정상에서 흥인지문(동대문) 사이에는 무안, 김제, 정읍 등 전라도 지명이 보인다. 

  태조 때 축조된 성곽은 규격이 일정하지 않고 다양한 크기의 깬 돌을 사용했다. 세종 때는 아래쪽은 크고 위로 올라가면서 돌이 작아진다.

  한양도성의 길이는 1만8627km로 약 70% 구간만 원형으로 남아 있다. 성터가 높고 험한 곳은 석성을, 평탄한 곳은 토성을 쌓았다. 성 둘레 5만9500척(尺)을 600척씩 97개 공구로 나누고 천자문 순서대로 일련번호를 매겨 책임을 맡겼다. 백악산을 기준으로 첫 글자인 천(天)자로 시작해 시계방향으로 돌아 97번째 글자 조(弔)자로 끝난다. 천(天)자부터 일(日)자까지 1∼9공구는 동북면(평안도 황해도), 10∼17공구는 강원도, 18∼58공구는 경상도, 59∼73공구는 전라도, 74∼97공구는 서북면(함경도)이 축성을 하였고 1421년(세종 3년) 12월부터 이듬해 2월 23일까지 전국에서 백성 32만2400명과 기술자 2211명, 수령과 인솔자 115명을 불러들려 전 구간을 석성으로 고쳐 쌓았다.  (문화재청과 서울특별시 관광정책과 문화유산 정보,) - 커피나무, coffee tree -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누상동 산1-3번지 외

 

이영일/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press157

고앵자/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press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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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계천 광통교에 신덕왕후의 정릉 병풍석이 왜?

  서울 청계천 유적 중 광통교지(廣通橋址, 사적 제461호)의 광통교는 조선시대 광통방에 위치하고 있어 광통교 혹은 광교라고 불렀고, 소광통교와 구분하여 대광통교로도 불렀으며, 일명 큰광교・큰광통교로도 불렀다. ‘세종실록’ 지리지에는 북광통교(北廣通橋)로, ‘승정원일기’에는 광충교(廣沖橋)로도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 도성 내에서 가장 큰 다리로 길이 약 12m, 폭 15m로 길이보다 폭이 넓은 다리였다. 경복궁-육조거리-종루-숭례문으로 이어지는 남북대로를 연결하는 도성 안 중심통로였으며, 주변에 시전이 위치하고 있어 도성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왕래하던 다리였다.

  광통교는 조선 초 도성건설 때 놓인 것으로 보이며 처음에는 토교(土橋)였다가 태종 10년(1410)에 큰 비로 다리가 유실되어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貞陵) 옛 터의 병풍석 등 석물을 사용하여 석교(石橋)로 놓이게 되었으며, 이때 신장석을 다리 교대석으로 사용하였는데 그 중 일부가 거꾸로 놓여 있다. 이 신장석은 세련된 당초문양과 구름문양이 새겨져 고려 말 조선 초기 전통문양의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아름다운 문양석이 거꾸로 놓여있는 것은 조선 초기 왕권장악에 있어 신덕왕후와 정적관계에 있던 태종 이방원의 의도적인 복수심의 산물이 아니겠느냐는 추측을 낳고 있다고 한다.

  경진준천(庚辰濬川)을 1760년에 한 지 2년 후인 영조 38년(1762) 다리의 기초 부분 개축과 난간을 보수하였다. 이후 1899년 종로에서 남대문 구간의 전차가 가설되면서 광통교 동쪽에 전차선로가 놓이게 되어 일부 훼손되었고, 1910년 8월에는 광통교 동쪽에 놓여 있던 전차선로를 복선화하면서 광통교 위로 전차가 다니게 되어 철근콘크리트교로 확장됨에 따라 다리 본체는 도로 밑에 묻히게 되었다. 1923년 청계천 암거공사 때 정릉의 신장석으로 이루어진 광통교 북측 교대 한가운데에 콘크리트 하수관을 박아 하수를 배출하였다. 1958년에는 청계천 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광통교의 난간만 창경궁・창덕궁 등으로 이전되었고 다리 본체는 그대로 다시 묻히게 되었다. 이후 2005년 청계천이 복원되면서 옛 모습 그대로 복원되었다. 교각은 고가도로 아래 묻혔었는데 청계천을 복원하면서 발굴되어 다시 복원하였다. 신덕왕후의 능침을 지켜야할 신장석이 육백여년 가까이 묻혀 있다가 청계천 복원공사로 인해 햇볕을 보게 된 것이다. 물길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저항력을 최소화 하도록 교각을 마름모꼴로 세웠다. 광통교에 사용한 신장석과 우석(隅石)은 조선시대 최고의 석공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서 예술적 가치가 높다고 한다.

  서울 청계천 유적 – 광통교지, 수표교지와 오간수문지(서울 淸溪川 遺蹟 -廣通橋地, 水標橋址와 五間水門址, 사적 제461호)는 청계천은 개천(開川, 인공적으로 물길을 만든 하천)으로서, 도성을 둘러싼 목멱산, 인왕산, 북악산, 낙산 등에서 발원하여 도성 중심부를 서에서 동으로 흘러 중랑천에서 합류하며, 그 길이는 11Km에 달한다.

  청계천에는 모전교(毛廛橋), 광통교(廣通橋), 장통교(長通橋), 수표교(手標橋), 하랑교(河浪橋), 효경교(孝經橋), 마전교(馬廛橋), 오간수문(五間水門 – 도성 개축 시에 물길을 고려하여 청계천에 놓은 성벽의 하부구조물로 동대문에서 광희문으로 연결되는 부분에 축조되어 있었다고 한다. 다섯 칸의 홍예문이 있었으며, 상부에 성벽이 축조되어 있었던 사진이 전하고 있다.), 영도교(永渡橋) 등 많은 다리와 수문이 설치되었으며 그 변화상은 도성의 변화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이들 다리 관련 유구들은 조선시대 토목기술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설치 및 변천과정의 연구를 통해 도시기능의 확대 및 도성관리체계의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관철동 270-1번지 외, 중구 남대문로 9 외

* 서울 정릉이야기: http://blog.donga.com/yil2078/archives/14711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photo/storyView.do?categoryType=4&contentsSeq=10559

 

정보: chA 이영일/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사진: chA 고앵자/ 채널A 보도제작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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