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복궁의 국정이 행해지던 사정전 일원

  경복궁(景福宮. 사적 제117호)의 사정전(思政殿. 보물 제1759호)은 왕의 공식적 집무실인 편전(便殿)으로, 그 이름에는 왕이 정사에 임할 때 깊이 생각해서 옳고 그름을 가려야 한다는 뜻이 담겨있다. 매일 아침 업무보고와 회의, 국정 세미나인 경연 등이 이곳에서 벌어졌다. 사정전 좌우에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은 온돌방을 갖추어 사계절 이용이 가능한 보조 편전이다. 조선 초기에 이 건물들은 복도로 연결되었으나, 고종 때에는 독립된 건물로 만들어졌다.

  만춘전은 한국정쟁으로 불타 없어진 것을 1988년에 복원했다. 만춘전(萬春殿)은 사정전의 부속 건물로 임금이 나랏일을 의논하거나, 연회를 베풀던 편전 가운데 하나로 사정전 동쪽에 위치하여 춘(春)은 봄을 의미한다. 천추전(千秋殿)은 사정전 서쪽에 위치한 건물로 왕과 신하가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추(秋)는 가을을 의미하며 온돌이 설치되어 주로 가을과 겨울에 이용했다고 한다. 세자 시절부터 과중한 일과 업무에 시달리다 문종이 이곳에서 승하 하셨다고 한다. 사정전 앞의 행각은 재물을 보관하는 내탕고(內帑庫)로 이용했다.

  세종대왕은 사정전에서 매일 새벽 3시부터 5시 사이에 ‘상참(常參)이라는 어전회의가 열렸다. 세종은 과중한 업무에도 불구하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상참에 참석 했다고 한다. 어 느날 우의정 류관이 “주상께서 매일 회의를 참석하시느라 피곤하실 터이니 하루걸러 참석하시는 것이 어떠하온지요?”라고 여쭈었더니 세종은 “우의정께서 매일 입궐하기 힘드신가 본데 앞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기 위해 오시려거든 미리 다른 사람을 시켜서 알리도록 하오’라며 거절했다고 한다. 연산군대에 상참과 경연이 잠시 폐지되기도 하였다.

  조선 제일의 법궁인 경복궁은 유교적 질서와 풍수적 건축 사상을 융합한 건축물이다. 궁 안의 주요 전각과 문들은 남북 직선 축에 맞추어 배치되었으며 각각의 공간을 행각이 감싸도록 했다. 또한 주요 정전과 침전 등을 남향으로 하여 좌우 대칭으로 배치했고, ‘전조후침’이라 하여 정사를 보는 조정은 앞에 두고 일상생활을 하는 침전은 뒤에 두어 내전, 외전 영역을 나누었다. 조선왕조 제일의 법궁이자 궁궐 건축의 모범으로 원칙과 절차를 엄수해 지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사직로 161번지 (경복궁)

 

자료: 이영일/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press157@donga.com

사진: 고앵자/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press25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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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양도성 광희문(서울 漢陽都城 光熙門. 사적 제10호)

  서울 한양도성 광희문(서울 漢陽都城 光熙門. 사적 제10호)은 도성의 남동방향에 자리한 사소문 가운데 하나이다. 서울 한양도성이 축성된 1396년에 지어 졌으며,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하였는데, 청계천의 수구에 가깝고 남산 북동쪽 일대의 물이 이 문 부근을 통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또, 이 문으로 시체(喪輿, 상여)가 많이 나갔다고 하여 시구문(屍口門)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시대에는 도성 안에 무덤을 쓸 수 없었다. 성안의 시신은 소의문과 광희문으로 나갔다.

  광희문의 돌가루는 한때 만병통치약으로 통해서 지방 사람들이 한양에 간다고 하면 “시구문 돌가루를 긁어 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속칭 남소문이라고도 한다. 광희문은 1711년에 개축하였으며, 성문 위 문루는 1719년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광희문이라는 편액은 이때 써 붙였다. 그 후 6.25 전쟁으로 문루와 서문 위 여장은 파괴되어 홍예문과 석축만 남아있던 것을 1976년에 고증을 거쳐 지금의 광희문은 도로를 개통하면서 원래 위치에서 약간 남쪽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문의 남쪽으로 서울 한양도성 성벽과 이어져있다.

  서울 한양도성(서울 漢陽都城)은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조선 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숭례문 ·흥인지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한양도성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문화재청과 서울특별시 관광정책과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종로구 누상동 산1-3외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photo/view.do?categoryType=1&contentsSeq=10142 

 

자료: 이영일/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press157

사진: 고앵자/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press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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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청계천 수표교와 수표(서울 淸溪川 水標橋. 水標)

  수표교(水標橋.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18호)는 장충단 공원 입구에 놓여있는 청계천을 가로질러 쌓은 돌다리로, 수표교지(水標橋址)의 수표교는 세종 2년(1420)에 마전교라는 이름으로 축조되어 세종 23년(1441)에 서편 상류에 인접하여 박석을 깔고 수심을 측정하기 위한 수표(水標)를 세운 이후 수표교라 이름 하였다 한다. 한양 도심을 흐르는 개천(開川, 지금의 청계천)의 다리는 조선 초에 토교(土橋)나 목교(木橋)로 지었다. 하지만 태종 연간부터 석교(石橋)로 교체했는데, 수표교도 태종부터 세종 재위 기간에 돌로 개조했다. 원래는 청계천 2가에 있었으나 1959년 청계천 복개공사를 하면서 장충단공원 지금의 자리로 옮겨 복원하였다. 

  수표교는 길이 27.6m, 폭 7.5m, 최대높이 3.4m로 실측되었고, 재료는 모두 화강암을 짜맞추어 만들어 놓은 것으로, 아래의 돌기둥이 특이하게도 2단을 이루고 있다. 그 중 윗단의 돌은 모서리를 물의 흐름과 마주하게 마름모꼴로 만들어 물의 저항을 덜 받도록 하였다. 

  다리의 기둥 위에 얹혀진 귀틀석의 중앙 부분을 자세히 살펴보면 한쪽에는 ‘정해개축(丁亥改築)’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고, 옆에는 ‘영개조(營改造)’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1935년경 사진에는 ‘무자금영개조(戊子禁營改造: 무자년에 금영(금위영)에서 개조했다)’라고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으므로 1959년 다리 이전 때에 ‘무자영(戊子禁)’ 부분이 훼손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 글씨와 관련 기록들을 종합해 볼 때 수표교는 영조 44년(戊子年, 1768년)과 순조 27년(丁亥年, 1827년)에 수리를 거쳤던 것으로 보입니다. 조각이 아름다운 수표교의 난간석은 고종 19년(1882년)에 새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연꽃 봉오리, 연잎 등이 아주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어 당시의 미적 감각도 엿볼 수 있다. 이처럼 수표교는 개천에 개설된 다리들 가운데 광통교와 함께 난간석까지 완전히 갖춘 것은 조선시대 임금의 어가행렬이 지나가던 주요 다리였기 때문이다. 수표교는 조선시대 임금이 사랑을 꽃피운 장소로 또한 유명하다. 숙종이 영희전을 참배하고 수표교를 건너 돌아오다가 우연히 문밖으로 왕의 행차를 지켜보던 아리따운 소녀를 보게 되고, 얼마 후에 숙종은 그 여자를 궁으로 불러들여 사랑의 결실을 보게 되었다. 그 여자가 오늘날까지도 많은 사람들로부터 회자되고 있는 장희빈이다. 

  경진년(1760년, 영조 36년)에 개천의 범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영조는 큰 힘을 쏟아 개천의 바닥을 파내고 다리들을 보수하였다. 이때 준설 작업의 본보기로 삼기 위하여 교각에 ‘庚辰地平(경진지평)’이라는 글씨를 새겼다. 이는 하천에 토사가 쌓여 이 글자가 안 보이게 되면 이 글자가 보이도록 준설공사를 시행하게 하는 기준으로 활용한 것이다. 

  조선 세종 2년(1420)에 세운 다리로, 당시에는 이곳에 소시장이 있었다 하여 ‘마전교’라 불리웠다. 세종 23년(1441) 수표(보물 제838호)를 만들어 이 다리 옆에 세우고 청계천의 물높이를 재어 홍수에 대비하도록 하였고, 영조 36년(1760) 다리를 수리하면서 돌기둥에 ‘경(庚) ·진(辰) ·지(地) ·평(平)’이라는 글씨를 새겨두어 4단계의 물높이를 측정하도록 하였다. 이 때부터 수중주석표(水中柱石標)라는 말이 생겨나 ‘수표교 ’라 부르게 되었다. 

  물길을 건너는 통로로서 뿐만 아니라 홍수의 조절을 위해 수량을 재는 역할을 했던 중요한 다리로, 조선조 500여년 동안 여러 차례의 보수를 거쳐 왔다. 다리 옆에 서 있던 수표는 다리를 이곳으로 옮길 때 함께 옮겨왔다가 1973년 세종대왕 기념관(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 회기로 56, 세종대왕기념관(청량리동)으로 옮겨 보관하고 있다.

* 수표교 문화재 소재지: 서울 중구 장충동2가 197-1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photo/view.do?categoryType=1&contentsSeq=10624

  서울 청계천 수표(서울 淸溪川 水標. 보물 제838호)는 조선 세종대왕 때 강우량을 측정하기 위해 측우기를 만들고, 이 방법으로 하천의 수위를 측정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한강변과 청계천 2곳에 설치하였는데 한강변의 것은 바윗돌에 직접 눈금을 새긴 것이고, 청계천의 것은 낮은 돌기둥 위에 나무기둥을 세운 형태였다. 

  그 중 지금까지 남아 있는 청계천의 수표는 성종(재위 1469∼1494) 때 돌기둥으로 개량한 것으로 높이 3m, 폭 20㎝의 화강암 사각기둥으로 만들었다. 위에는 연꽃무늬가 새겨진 삿갓 모양의 머릿돌이 올려져 있고, 밑에는 직육면체의 초석이 땅 속 깊이 박혀있다. 돌기둥 양면에는 1척(21㎝)마다 1척에서 10척까지 눈금을 새기고 3·6·9척에는 O표시를 하여 각각 갈수(渴水)·평수(平水)·대수(大水)라고 표시하였다. 6척 안팎의 물이 흐를 때가 보통수위이고, 9척이 넘으면 위험 수위로 하천의 범람을 예고하였다. 

  세종대왕 때 나무 수표와 비교하면 촌·푼까지 정확하게 측정할 수 없는 점이 아쉽지만, 가뭄과 홍수를 미리 예견할 수 있어 실생활에 직접 이용된 한층 더 발전된 것이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수표 문화재 소재지: 서울 동대문구 회기로 56 세종대왕기념관 (청량리동)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photo/view.do?categoryType=1&contentsSeq=10625

 

자료: 이영일/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press157

사진: 고앵자/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press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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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조선왕릉 – 광릉(光陵. 사적 제197호)

  세계유산 조선왕릉- 광릉(光陵. 사적 제197호)은 조선 제7대 세조(世祖, 1417~1468, 재위: 1455~1468)와 정희왕후(貞熹王后, 1418~1483) 윤씨의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다.

  광릉의 구성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봉안하고 두 능의 중간 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으로서,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는 최초로 조영되었다. 좌측 능선의 봉분이 세조의 능이며 오른쪽의 봉분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광릉은 다른 왕릉에 비해 간소하게 조영되었다. 세조는 “내가 죽으면 속히 썩어야 하니 석실과 석곽을 사용하지 말 것이며, 병풍석을 세우지 말라.”는 유언을 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세조의 유언에 따라 이전까지 석실로 되어 있던 능을 회격(灰隔)으로 바꾸어 부역 인원을 반으로 줄이고 비용을 절감하였다. 또한 봉분 주위에 둘렀던 병풍석을 없애면서 병풍석에 새겼던 십이지신상은 난간의 동자석주에 옮겨 새기는 등의 상설 제도를 개혁하였다. 능하구역에는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르는 참도가 생략되어 있다. 이렇게 간소하게 개혁된 상설제도는 이후의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다. 하마비가 조선왕릉 유일하게 광릉 초입에 남아 있다. 선왕선비를 모시는 제사를 주관하기 위해 친행을 한 왕조차도 이곳 하마비에서부터 말이나 가마에서 내려야 했다.

  광릉의 역사: 서울로부터 다소 떨어지고 골이 깊은 광릉자리는 원래 다른 이의 묘의 자리였으나 풍수상 길지라 하여 묘의 자리 주인이 세조에게 바쳤다고 전해지며 일부 풍수가들은 세조의 광릉 자리가 좋아 조선 500여 년을 세조의 후손들이 통치하였다고 전하기도 한다. 1468년(예종 즉위) 11월 28일 주엽산 아래 세조를 예장하고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483년(성종 14) 3월 30일 정희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6월 12일 광릉 동쪽 언덕에 예장하였다.

  세조의 생애이야기: 세종과 소헌왕후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1417년(태종 17) 9월 29일 태어났다. 타고난 자질이 영특하고 명민하여 학문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무예에도 뛰어났다고 전한다. 대군 시절, 세종의 명을 받아 불교 서적 번역을 관장하고, 향악의 악보 정리에도 힘을 쏟았으며, 1452년(문종 2) 관습도감 도제조에 임명되어 국가의 실무를 맡아보기도 했다. 문종이 승하하고 나이어린 조카 단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는 측근인 권람, 한명회 등과 결탁하여 1453년(단종 1) 10월 계유정난을 일으켜 권력을 잡고 1455년 조카 단종이 상왕으로 물러나자 조선 7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왕권의 강화를 위하여 의정부 서사제를 폐지하고 전제왕권제에 가까운 육조직계제를 단행했으며, 집현전을 폐지하고 경연을 없앴다. 왕명 출납 기능이 있는 승정원을 강화시키고, 호패법을 복원하였으며, 군제 정비에도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세조는 이와 같은 많은 치적을 세워 조선 초기 왕권 확립에 크게 공헌했다. 그러나 사육신으로 불리는 집현전 학사 출신 관료들이 단종 복위를 계획한 사건이 발각되자 이들을 모두 살해하였을 뿐 아니라 선왕이자 조카인 단종을 유배지에서 죽이는 등 수많은 정적의 피를 보았다.

  세조의 일화: 계유정난은 1453년(단종 1) 단종 보위 세력의 정치 주도에 불만을 품은 수양대군이 일으킨 쿠데타였다. 1453년 10월 10일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홍달손을 집으로 불러 자신이 직접 반대파 세력인 김종서를 제거할 것임을 알렸다. 그리고는 미리 권람을 시켜 김종서의 집을 엿보게 한 후 향정, 유소, 종 임운과 함께 바로 김종서의 집으로 향하였고, 수양대군의 명을 받은 임운은 철퇴를 내리쳐 김종서를 살해하였다. 다음날 새벽, 수양대군은 단종이 있는 시좌소로 가서 환관을 통해 현재의 상황에 대하여 단종에게 형식적인 보고를 하였다. 그리고 궐 안이 좁다는 이유를 내세워 재상들이 시종을 두고 혼자 들어오게 하여 그들을 순서대로 죽이는 방법으로 미리 작성된 살생부에 오른 인물들에 대한 살육을 시작하였다. 수양대군은 이러한 절차를 거쳐 영의정, 이조판서, 병조판서, 내외병마도통사 등을 겸임하며 실제 정권과 군권을 행사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455년 6월 2일 단종으로부터 옥새를 건네받고 6월 11일 7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정희왕후의 생애이야기: 정희왕후는 판중추원사 윤번의 딸로 1418년(태종 18) 충청도 홍주에서 태어났다. 1428년(세종 10) 수양대군과 혼인하여 낙랑부대부인에 봉해졌으며, 세조가 즉위하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남편인 세조가 먼저 승하한 뒤 그녀의 둘째 아들인 예종이 즉위하였는데, 선천적으로 병약하였던지라 재위 1년 2개월만에 예종 역시 승하하였다. 당시 선왕이 누구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할 것인가를 정하지 않고 승하하게 되면, 그 권한은 대비에게 주어졌다. 정희왕후는 이 권한을 통해, 젊은 나이에 요절한 자신의 첫째 아들 의경세자의 둘째 아들인 자산군을 왕으로 지목하여 대통을 잇게 했다. 그리고는 예종대의 섭정을 이어 7년이라는 기간 동안 수렴청정을 행하게 되었다. 이는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이었다. 1483년(성종 14) 3월 30일 66세의 나이로 온양행궁에서 승하하여 같은 해 6월 12일 광릉 동쪽 언덕에 예장되었다.

  정희왕후의 일화: 조선 선조 때의 이조판서 이기가 쓴 글들을 모은 문집『송와잡설(松窩雜說)』에는 정희왕후 윤씨가 수양대군의 부인이 된 일화가 수록되어 있다. 왕실의 혼사를 알아보던 중, 궁궐의 감찰 상궁과 보모상궁이 윤씨 집안에 수양대군에게 적합한 배후자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찾아갔는데, 사실 이때 후보자는 정희왕후의 언니였다고 한다. 그런데 궁중에서 사람이 나왔다는 말에 정희왕후가 어머니 이씨 뒤에 숨어서 어른들 이야기를 듣다가 감찰상궁의 눈에 띄고 만 것이다. 언니보다 정희왕후의 자태가 더 비범하다고 대궐에 알려지면서 그녀는 언니 대신 왕실에서 가례를 올리고 낙랑부대부인으로 봉해졌다. 그 후 그녀는 계유정난 당시 사전 정보가 누설되어 수양대군이 거사를 망설이자 손수 갑옷을 입혀 그에게 용병을 결행하게 할 만큼 결단력이 강한 여장부였다. 1468년 그의 아들 예종이 19세에 왕위에 오르자 조선 최초의 수렴청정을 하고, 이후 손자 성종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섭정을 하기도 하였다. 광릉 제향일은 매년 양력 10월 2일이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 산100-1

 

정보: chA 이영일/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press157@donga.com

사진: chA 고앵자/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press258@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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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숲 속에서 반짝- 반짝- 반딧불이 축제가

- 수안산생태원에서 자연의 신비를 느껴요-

  김포 수안산생태원(원장 김영숙)에서는 온가족이 함께하는 신비의 반딧불이축제가 열린다.

1. 기간: 6월 4일(수)부터 6월 8일(일)까지

2. 시간: 매일 오전 11시부터 입장하여 오후 1시부터 시작

3. 장소: 김포시 대곳면 율생리 251번지 ‘수안산생태원’

4. 축제에서 만나는 신기한 자연과학 체험학습 내용:

- 3D 곤충이야기 상영, 보고 만지는 곤충관, 황금반딧불이찾기, 반딧불이 초코렛만들기, 모내기와 우렁이잡기, 먹거리 코너, 야간 반딧불이 탑사, 올챙이잡기, 염소와 닭 등 가축과 친구가 되기, 썰매타기 등 다양한 생물들을 직접보고 잡고 만지며 가슴으로 느끼는 체험학습은 축제의 잊을 수 없는 추억 꺼리들이며 특히 생태원 주변의 숲 속에서 밤 11시부터 수십에서 백여 마리가 넘는 반딧불이가 반짝- 반짝- 거리는 모습을 숨죽이며 만나는 자연의 신비는 평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자연과의 만남이 있는 축제이다.

5. 문의: 031-989-4547/8 (www.suansan.com)

 

* 채널A 스마트리포터 갤러리 오늘의 영상:

 

 

사진: 이영일/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press157

영상: 고앵자/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press2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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