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주 적상산성(茂朱 赤裳山城, 사적 제146호)

  무주 적상산성(茂朱 赤裳山城, 사적 제146호)은 절벽으로 이루어진 산 위의 분지를 에워싼 대표적인 방어산성이다.

  고려 후기 거란이 침입한 후 최영은 이곳에 산성을 쌓게 하고 창고 짓기를 건의했으며, 조선 세종 때의 체찰사 최윤덕도 반드시 보존할 곳이라고 건의한 바 있다. 고려 때 거란과 왜구의 침입에 이미 산성을 이용하여 인근 여러 고을의 백성이 피난한 사실에서 이 산성은 고려 후기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조선 광해군 2년(1610) 이곳에 조선시대 5개의 역사책보관소 중의 하나인 적상산사고를 설치하고『조선왕조실록』과『왕실족보』를 보관하였다. 실록전, 사각(史閣), 선원각, 군기고, 대별관, 호국사를 세웠고 임진왜란 이후 진(鎭)을 두어 산성을 수축하고 운영했다.

  현재 성벽은 무너져 숲 사이에서 겨우 그 모습을 찾을 수 있고, 사각과 기타의 건물들도 그 터만이 남아 있다. 최근에 성 안에 적상산 양수발전소 저수지를 만들어 놓았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전북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산119번지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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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실록 적상산 사고지 유구(朝鮮王朝實錄 赤裳山 史庫址 遺構)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적상산사고지유구(赤裳山史庫址遺構, 전라북도 기념물 제88호)는 전라북도 무주군 적상면 적상산에 있는 사고를 보관한 곳으로 사고(史庫)는 조선 왕조의 역사에 관한 기록이나 중요한 서적을 보관하던 곳을 말한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 때 서울의 춘추관을 비롯한 전국의 사고가 불에 탄 후, 정족산·태백산·오대산 등 5곳에 새로운 사고를 설치하였다. 그러나 이중 묘향산 사고가 북방 후금의 위협으로 관리가 어렵게 되자 광해군 6년(1614)에 천연 요새인 적상산에 실록을 옮겨 보존하였다. 인조 19년(1641)에는 선원각(璿源閣)을 세우고 왕실의 족보인『선원록(璿源錄)』을 소장하면서 완전한 사고의 역할을 하게되었다. 총 5,515책이 보관되어 있었으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실록은 없어졌다.

  조선왕조실록 편찬(朝鮮王朝實錄 編纂): 조선왕조실록은 국왕이 죽은 후 임시관청인 실록청을 설치하여 편찬.간행하였다. 춘추관에서 시정을 정리한「춘추관시정기」, 승지들이 그날그날의 일을 기록한「승정원일기」, 전임사관들이 각자 보관하고 있던「가장사초」등이 기본자료로 이용된다. 실록편찬은 초초(初草).중초(中草).정초(正草) 세 단계를 거쳐 이루어졌다.

  조선왕조실록 봉안(朝鮮王朝實錄 奉安): 조선 초에는 실록을 4질 간행하여 4대사고에 봉안하였으며, 임진왜란 후에는 실록을 5질 간행하여 5대사고에 봉안하였다. 이는 실록이 멸실되는 것을 막기 위한 방책 이였다. 춘추관 사고 봉안식은 실록청의 총재관(總裁官) 이하 모든 관리들이 나와 거행하였다. 외사고 봉안식은 중앙에서 파견된 봉안사와 사관이 주관하였다.

  실록 포쇄(實錄 暴曬): 포쇄는 책의 습기를 제거하고, 충해를 막기 위한 것으로 바람을 쐬고 햇빛에 말리는 것이다. 이 때 사고 건물, 실록의 보관 상태 등도 점검하고 보수 하였다. 중앙에서 파견된 사관 주관 하에 3년에 한번 정도 포쇄가 행해졌다. 포쇄에 필요한 인원은 차출하였다.

  사고 수호(史庫 守護): 사고 수호는 사찰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적상산 사고에는 안국사와 호국사를 두어 승려들이 군사와 함께 사고를 수호하였다. 사고의 전반적인 관리는 참봉(參奉)이 하였다. 화재를 방지하기 위해 사고에 방화벽인 돌담장을 설치하였으며, 방습시설을 갖추었다.

  조선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 조선 전기에는 춘추관과 충주·전주·성주 등 4곳에 사고( 史庫)가 있었는데 임진왜란으로 전주 사고를 제외한 모든 사고가 불에 타버렸으며, 1603년(선조 36)에서 1606년까지 전주 사고본 실록을 근거로 태조에서 명종까지 13대에 걸친《실록》을 다시 4부씩 인쇄하였다. 춘추관· 묘향산· 태백산· 오대산·강화도 마리산에 새로 사고를 설치하여《실록》을 보관하였는데, 춘추관실록은 이괄(李 适)의 난(1624)으로 모두 소실되었다. 마리산 사고의 실록은 1636년 병자호란의 피해를 입어 현종 때 보수하여 1678년(숙종 4)에 가까운 정족산(鼎足山) 사고로 옮겨졌으며, 묘향산 사고본은 1633년에 전라도 적상산(赤裳山) 사고로 옮겨졌다. 이후 각 사고의 모든실록은 조선 말까지 완전히 보관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들어 다시 큰 변화를 겪었다. 일제는 정족산·태백산 사고의 실록을 조선총독부로 이관하였다가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으로 이장하였고, 적상산 사고본은 장서각으로 옮겼으며, 오대산 사고본은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하였는데 1923년의 간토대지진 때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 장서각 소장의 적상산본은 1950년 6·25전쟁 때 북한으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태백산본은 서울대학 규장각에 소장되었다가 정부기록보존소에 이관되었고, 정족산본은 서울대학 규장각에 보관 중이다. 1929~1932년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1/4축쇄판(縮刷版) 888책 한장본(漢裝本)으로 30절(折)을 영인(影印) 출간하였으며, 1958년에는 역시 태백산본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다시 1/8축쇄판(A4판) 48책 양장본으로 간행, 보급하였다. 북한에서는 1980년대에 조선왕조실록 번역을 완료하였으며, 남한에서도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1972년부터 분담하여 국역작업을 시작하여 1994년 4월에 마무리지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왕실 중심의 서술방식과 명분론적 시각, 당론(黨論)에 의한 곡필(曲筆)의 문제 등이 한계로 지적될 수 있으나 조선시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다방면에 걸친 역사적 사실을 망라하여 수록하고 있는, 세계적으로 귀중한 문화유산임은 물론, 조선시대를 이해하는 데 있어 가장 기본적인 사료이다.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적상산 사고는 1910년 일본에 의해 폐쇄(倂呑)되기 전까지 300여 년간 국가의 귀중한 국사를 보존했던 우리나라 5대 사고 중 하나이다. 사고가 있던 본래의 자리도 1992년 (양수발전소상부)댐 축조로 물에 잠기게 되어 현재의 위치로 유구가 옮겨졌으며, 1997년 선원각 복원을 시작으로 1998년 실록각 등이 각각 복원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전북 무주군 적상면 북창리 117-5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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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궁궐 104년만에 부활한 덕수궁 석조전 정원과 서관 Ⅴ

  덕수궁(德壽宮, 사적 제124호) 석조전정원(石造殿庭園, 테라스)은 1910년 준공 당시에는 외국 나무를 들여와 석조전 바로크 양식(Baroque style)으로 꾸몄으나 얼마 가지 못해 외국 나무들 대부분이 말라 죽었다.

  당시 정원 감독은 데이비슨이 맡았으며, 공사 예산은 5만 원이였다. 이 후 1920년대에는 사각형 연못을 조성하고 중앙에 거북 모양 조각상을 배치하였다. 그리고 1938년 덕수궁 석조전 서관(현, 덕수궁미술관)을 건립하면서 현재의 물개 모양 조각상을 설치한 분수대를 계획 하였다. 그러나 분수대는 1938년 6월 서관 개관에 맞춰 완성되지 못하고 같은 해 9월에 완성되어 현재 석조전 앞 물개 모양 분수대가 있는 정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영친왕(英親王)과 연친왕비(英親王妃): 영친왕은 고종과 순헌황귀비의 아들로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태자이다. 1897년 경운궁현 덕수궁(에서 태어낫으나 유학을 빌미로 강제로 일본을 이주당하여 대부분의 생애를 일본에서 보냈다. 영친왕은 1911년 어머니 순헌황구비의 장례에 참석하기 위해 잠시 귀국하였는데, 이 때 석조전을 임시 거처로 삼았다. 이후 1918년과 1919년 귀국햇을 때 그리고 1922년 부인과 함께 귀국했을 때에도 석조전에 머물렀다., 영친왕은 1920년 일본 왕족의 딸 마사코(方子)와 혼례를 올렸다. 해방 이후에도 귀국하지 못하고 일본에 머물다가 1962년 국적을 되찾고 이듬해인 1963년 부인과 함께 귀국하여 여생을 한국에서 보냇다. 영친왕은 오랫동안 혈육과 모국를 그리워하며, 일본에서 UN군을 위해 ‘한국어길잡이 First Book Korean’ 책을 발간하였다. 이 책에는 한글과 아리랑에 대한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고종의 근대적 개혁(高宗 近代的 改革):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이후 구본신참(舊本新參: 옛것을 근본으로 새것을 참고한다)의 이념을 바탕으로 근대적인 내정 개혁을 추진하였다. 이를 광무개혁(光武改革)일 한다. 특히 군제 개혁과 ‘대한제국제’의 반포를 통하여 대한제국이 자주적 독립국임을 밝히고 강력한 황제권을 확립하였다. 경제적으로는 근대적 토지제도의 확립과 조세 징수의 근거 마련을 위해 광무양안(光武量案: 토지대장)과 지계(地契: 등기부)를 발급하였고, 경제생활의 기준이 되는 도량형(度量衡)을 통일하고 서양의 미터법을 도입하였다. 이 밖에 새로운 기술 수용과 실업교육을 통해 근대적 기술자로 양성하고자 우편학당(郵便學堂), 전무학당(電務學堂), 상공인 양성을 위한 상공학교(商工學校), 의사 양성을 위한 경성의학교(京城醫學校), 광산 기술자 양성을 위한 광무학교(鑛務學校) 등을 설립하였다. 또한 은행을 세워 상공업의 근대화를 추진하였고, 외국 여행을 허가하는 여권(旅券)을 발급하여 세계화에 발맞추어 대한제국의 위상을 높이고자 하였다.

  관람방법으로 지층은 예약 없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으며, 1층과 2층은 인터넷 예약 (덕수궁 홈페이지: www.deoksugung.go.kr)로 1회당 20명, 인터넷 예약 15명, 만 65세 이상 어르신과 외국인은 매회 선착순 5명까지 현장에서 예약 없이 입장 할 수 있다. 해당 시간마다 인원을 제한하고,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할 수 있다. (문화재청 대한제국역사관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덕수궁)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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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궁궐 104년만에 부활한 덕수궁 석조전 황제의 생활공간 Ⅳ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石造殿 大韓帝國歷史館) 황제 서재(皇帝 書齋)는 황제가 책을 보거나 가까운 손님을 맞이하는 방으로 전통적 개념의 사랑방과 같은 공간이다. 1911년과 1918년에 촬영한 황제 서재 사진을 검토하여 책상과 2층 책장, 원탁 등을 배치하였다. 배치된 가구 중 책장과 원탁에는 ‘EMPRESS’S LIBRARY 엠프레시스 라이브러리’라는 문구가 찍혀있다. 벽난로 소품도 고증 사진에 등장하는 양식으로 20세기 초 영국 앤틱 제품을 구매하여 배치하였다.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石造殿 大韓帝國歷史館) 황제 침실(皇帝 寢室)은 석조전 계획 당시에는 고종의 침실로 계획되었으나 고종은 덕수궁 함녕전(咸寧殿)에 계속 머물러 실제로는 사용하지 않았다. 1907년 유학을 빌미로 일본으로 끌려갔던 영친왕(英親王)이 1911년 생모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훙거(薨去) 시 귀국하여 석조전을 임시 거처로 사용할 때 이용하였다. 이층의 커튼 색상은 황제의 공간은 황금색으로, 황후의 공간에는 자주색으로 재현하였다. 커튼 문양은 고증 사진에서 보이는 문양을 분석하여 직조하였다.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石造殿 大韓帝國歷史館) 황후 거실(皇后 居室)은 황후가 책을 보거나 내빈을 접대하는 방으로 계획되었다. 중앙의 타원형 탁자와 책상에는‘EMPRESS’S BOUDOIR 엠프레시스 부드와르’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는데, ‘BOUDOIR’는 전통적 개념의 안방, 규방과 같은 뜻이다.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石造殿 大韓帝國歷史館) 황후 침실(皇后 寢室)은 석조전 준공 당시에는 순헌황귀비의 침실로 계획되었으나, 준공 직후 1911년 황귀비가 별세하여 사용하지 못하였다. 192년 일본에서 영친왕과 혼인한 영친왕비가 1922년 영친왕과 함께 입국했을 때 잠시 사용하였다. 황제 침실과 마찬가지로 고증 사진이아 기록이 남아 있지 않은데, 석조전 전래 가구 중 ‘empress’s bedroom 엠프레시스 베드룸’이라는 문구가 남아 있어 침실을 재현 할 수 있었다. 황제 침실과 대칭적으로 재현하였으며, 영국 메이풀사 카탈로그를 참고하여 가구를 배치하였다.

  명성황후(明成皇后)와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고종의 비인 명성황후와 순헌황귀비는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고종의 조력자로서 외교 활동을 돕거나 여성 교육 확산에 기여하는 등 다양한 활약을 펼쳤다. 명성황후는 4남 1녀를 낳았고, 둘째 아들이 순종이 된다. 1895년 8월 명성황후는 경복궁 건청궁에서 시해당한 후, 1897년 대한제국을 하면서 황후로 높여졌다. 순헌황귀비는 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성의 근대 교육을 확산하였다.

  고종의 강제 퇴위(高宗 强制 退位):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일제가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탈취하자 고종은 을사늑약의 부당함을 해외에 알리기 위하여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열린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대한제국 황제 고종을 강제로 퇴위 시켰고, 황태자 순종을 황제로 즉위하도록 하였다. 황제 자리에서 물러난 고종은 1919년 덕수궁 함녕전에서 훙거했다. 고종 인산일(因山日, 장례식)에는 일제에 저항하는 3.1만세운동이 일어나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관람방법으로 지층은 예약 없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으며, 1층과 2층은 인터넷 예약 (덕수궁 홈페이지: www.deoksugung.go.kr)로 1회당 20명, 인터넷 예약 15명, 만 65세 이상 어르신과 외국인은 매회 선착순 5명까지 현장에서 예약 없이 입장 할 수 있다. 해당 시간마다 인원을 제한하고,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할 수 있다. (문화재청 대한제국역사관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덕수궁)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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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궁궐 덕수궁 석조전 104년만에 부활한 황실의 식당 Ⅲ

  덕수궁(德壽宮, 사적 제124호)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石造殿 大韓帝國歷史館) 소식당(小食堂)은 석조전의 다른 방들과는 달리 벽면을 영국산 오크로 장식하였다. 이 방은 1933년 석조전이 ‘덕수궁미술관’으로 사용될 때에도 중앙홀, 접견실과 함께 원래의 실내 장식 그대로 귀빈실로 사용되었다. 가구는 장식이 절제되고 위엄 있는 신고전주의 양식이다.

  덕수궁(德壽宮, 사적 제124호)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石造殿 大韓帝國歷史館) 대식당(大食堂)은 공식적인 행사 후 만찬을 베푸는 공간으로 1918년 대식당 사진을 참고하여 복원하였다. 대한제국 시기 외국인이 참석하는 연회는 대부분 서양식 코스 요리가 제공되었다. 식탁 위에도 서양식 만찬 장면을 제현 하였다. 대한제국 의례서 ‘대한예전’의 연향도(宴響圖) 그림을 기준으로 하여 12인석 연회자리를 마련하였고, 식기는 대한제국 이화문 백자를 참고 하였으며, 식탁 장식과 배치 등은 영국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재현 하였다.

  덕수궁 석조전 대한제국역사관 건축구조를 살펴 볼 수 있도록 대식당 남쪽의 창호 한 칸은 마감을 하지 않고 노출시켜 석조전 건물의 구조를 알 수 있도록 하였다. 석조전은 바깥벽은 화강암, 안벽은 적벽돌을 쌓아 올렸으며, 천장은 철골Ⅰ자형 빔과 아치형 빔으로 구성되었다. 

  대한제국의 외교: 1876년 조선은 일본과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를 맺은 이후 미국, 영국, 독일 등 서양 각국과도 조약을 체결하여 자주국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고자 하였다. 여러 나라와 수교를 맺으면서 우리나라를 방문하는 외교관이 늘어났으며, 대한제국에서도 해외로 외교사절 및 외교관을 파견하여 국제 관계를 공고히 하였다. 국내에 파견된 외국 외교관들은 정동 주변에 공사관을 마련하였기에 정동은 외교의 중심이 되었다. 외국 외교관들은 조선의 풍속과 문화를 기록, 책으로 출판하여 국외에 대한제국을 알리기도 하였다. 고종은 이러한 공로가 인정되는 외국 외교관에게 훈장을 수여하였다. 국외에 파견된 대한제국 외교관으로는 대표적으로 민영환, 이범진, 이한응이 있다. 이들은 유럽과 미국 등 각지에 파견되어 대한제국의 자주적 외교에 힘썻으나,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으로 대한제국의 외교권이 박탈당했을 때와 1910년 국권이 피탈되었을 때 모두 자결하였다. 

  관람방법으로 지층은 예약 없이 자유롭게 관람할 수 있으며, 1층과 2층은 인터넷 예약 (덕수궁 홈페이지: www.deoksugung.go.kr)로 1회당 20명, 인터넷 예약 15명, 만 65세 이상 어르신과 외국인은 매회 선착순 5명까지 현장에서 예약 없이 입장 할 수 있다. 해당 시간마다 인원을 제한하고,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관람할 수 있다. (문화재청 대한제국역사관 문화유산정보)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중구 세종대로 99 (덕수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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