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민정음(訓民正音)은 세종의 민족자주정신과 민본주의 결정체

  훈민정음(訓民正音, 국보 제70호)은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을 세종의 명령으로 정인지 등 집현전 학사들이 중심이 되어 세종 28년(1446)에 만든 한문해설서(漢文解說書)이다. 책이름을 글자 이름인 훈민정음과 똑같이 ‘훈민정음(訓民正音)’이라고도 하고, 해례(解例)가 붙어 있어서 ‘훈민정음 해례본(訓民正音 解例本)’ 또는 ‘훈민정음 원본(訓民正音 元本)’이라고도 한다. 전권 33장 1책의 목판본이다.

  책의 구성(構成)은 총 33장 3부로 나누어, 제1부는 훈민정음(訓民正音)의 본문(本文)은 세종(世宗)이 지은 서문(序文) 4장 7면으로 하여 면마다 7행 11자씩, 제2부는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인 해석(解釋)과 쓰임법인 용례(用例) 26장 51면 3행으로 하여 면마다 8행 13자씩, 제3부는 정인지(鄭麟趾)의 해례(解例) 서문(序文)으로 3장 6면에 1자 내려싣고, 그 끝에 ‘정통(正統) 11년’(1446)이라 명시하고 있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 의하면 훈민정음은 세종 25년(1443)에 왕이 직접 만들었으며, 세종 28년(1446)에 반포(頒布)한 것으로 되어있는데, 이 책에서 서문과 함께 정인지가 근작(謹作)하였다는 해례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또한 한글의 제작원리도 확연하게 드러났다. 간송미술관(澗松美術館) 소장 복제품으로 국립중앙박물관 2015년 현재 전시하고 있는 책이다. 아래 연작이 간송미술관이 소장한 원본이다. 유네스코가 지정한 세계기록문화유산이다. (문화재청 문화유산정보)

  한글은 1443년(세종 25) 음력 12월에 창제되어 1446년(세종 28) 음력 9월에 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반포되었다. 처음 한글 낱자는 닿소리 17자와 홀소리 11자로 총 28자였다. 현재 소실자(消失字)는 닿소리 ㅿ(반시옷), ㆁ(옛이응), ㆆ(여린히읗)과 홀소리 ㆍ(아래아)의 네 글자로 현재는 24자로서 닿소리 14자와 홀소리 10자이다.

  한글의 창제 동기는 세종의 주도하에 집현전 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만들었으며 ‘훈민정음’의 서문에 잘 나타나 있다. 첫째, 우리말이 중국말과 다른 데도 중국글자를 쓰므로 불편한 점이 많아 우리말에 맞는 새 글자를 만든다. 둘째, 어리석은 백성이 쉽게 글자를 배워 문자생활을 편하게 하기 위해 만든다고 했으니 세종의 민족자주정신과 민본주의를 읽을 수 있다.

  한글의 특성은 표음문자(表音文字)로 한국어의 음소(音素)를 적는 데 가장 합리적인 체제를 갖고 있다. 한글은 음절(音節)을 닿소리와 홀소리로 나누고, 받침은 닿소리가 다시 쓰이게 함으로써 가장 경제적인 문자로 구성되어 있다. 문자의 구성요소 역시 체계적으로 이루어져 세계 언어학자들 사이에서 찬탄의 대상이 되고 있다. 더구나 어느 한 시기에 창제되어 일시에 반포·사용된 이후 약 600년 가까이 지속적으로 사용되는 문자는 세계에서 오직 한글밖에 없다. (자료출처: 브리태니커)

  간송(澗松) 전형필(全鎣弼, 1906~1962)선생과 훈민정음 해례본에 관한 일화: 1942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소재되어있던 훈민정음 해례본은 원래 광산 김씨 종가의 긍구당 서고에 보관되어 오던 광산김씨 문중의 가보였다고 한다. 세종이 광산김씨 문중에 여진정벌의 공로를 치하하는 의미로 내린 서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이 집안의 사위였던 이용준이 매월당집 등을 비롯하여 훈민정음해례본을 몰래 빼돌려 안동의 자택에서 보관하고 있다가 김태준을 통해 전형필 선생에게 훈민정음 해례본만 만원에 판매하였다. 최초 판매가로 천원을 제시하였으나 원래 문화재의 가치를 정확히 치르는 것으로 유명했던 전형필은 금액이 너무 적다고 생각하여 거간 노릇을 한 김태준에게 천원을, 그리고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격으로 만원을 치렀다. 당시 천원이면 좋은 기와집 한채를 살 수 있었다고 한다. 거간 노릇은 한 김태준과 이용준은 사회주의자로, 판매한 돈을 사회주의 운동에 사용했다고 전해지며 광복 후 김태준은 일련의 사건으로 체포되어 사형되었고, 이용준은 월북하였다고 한다.

  훈민정음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학계의 학자들 사이에 논란이 일었던 한글 창제 원리가 밝혀졌다. 1997년 10월에 대한민국의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자료출처: 위키백과) - 꽃치자나무, 한없는 즐거움 –

* 문화재 소재지: 서울 성북구 성북로 102-11, 간송미술관 (성북동, 간송미술관)

* 동아닷컴[한글]: http://news.donga.com/3/all/20151014/74155695/1 

* 한국문화재재단 문화유산채널:

http://www.k-heritage.tv/hp/hpContents/photo/view.do?categoryType=1&contentsSeq=11757


이영일.고앵자/ 채널A 보도본부 스마트리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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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훈민정음(訓民正音)은 세종의 민족자주정신과 민본주의 결정체

  1. 367487672 says:

    긍구당이 원 소유주라고 하는 주장은 근거가 없고 지인들이 쓴 소설에 불과합니다.
    진실은 기존에 알려진 바와 같이 아래와 같습니다.

    훈민정음 해례본 (세종28년 1446년 간행) 간송본은 안동의 진성이씨 주촌(두루) 대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던 것을 간송 전형필씨가 종택의 작은집 이한걸로부터 아들인 이용준을 통하여 구입하였으며,
    일부 긍구당 지인들이 긍구당이 원 소유주라고 하는 주장은 소장의 근거도 증거도 없는 추측 및 왜곡일 뿐이고 주장한 내용도 추측으로 일관되어 있습니다.
    첫 번째로 해례본을 긍구당에서 소장한 기록과 입수한 근거가 전혀 없고 이에 대한 설명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해명도 없습니다. 즉 허구이지요.
    또한 긍구당의 역사는 유일재 김언기 (金彦璣 1520~1588)로부터 시작되며 世宗임금(1397~1450) 사후 70여년 지나서 태어나신 분입니다.
    더구나 65여년동안 일체의 언급이 없다가 관련자들이 다 돌아가시고 마지막에 남은 가장 중요한 당사자 이용준이 작고한 다음해 억지 주장을 하는 건 진실을 왜곡하자는 의도로 보입니다.

    진실은 기존에 알려진 바와 같이 아래와 같습니다.
    1940년까지 경상북도 안동군 와룡면(臥龍面) 주하동(周下洞) 이한걸 가(李漢杰 家)에 소장되었던 해례본은 (국보70호) 그의 선조 이정(李禎: 退溪 李滉 선생님의 증조부 임) 약산성을 쌓고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동국정운(국보71호)과 함께 세종으로부터 직접 하사 받은 서책 중 하나로 가보로 보관 하다가 우연하게 간송 전형필선생님에게 입수가 되어 비싼 가격으로 매입해 두권 모두 세상에 나오게 되었지요!
    1943년 6월. 한남서림에 앉아있던 간송이 고서 중개인 [이순황]으로부터 경상북도 안동에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타났는데, 책 주인이 1000원을 부르기에 돈을 구하러 가는 길이라는 것이다. 간송은 거간인 이순황을 통해 책 주인에게 사례비와 구입비용을 주겠다 약속하고서 일련의 모든 상황이 정리된 후 경북 안동을 내려가게 된다.
    안동으로 내려가 이용준으로부터 세종임금 시절에 이용준의 선조인 이정(李禎) 공이 여진토벌의 공로로 훈민정음 해례본과 (국보70호) 동국정운 (국보71호)을 하사 받은 책으로 가보로 보관하고 있었고 진성이씨 주촌 대종택에서 보관하고 있었고 종가의 작은집 李漢杰의 아들 이용준이라는 분이 갖고 있음을 듣고 확인해보니 귀중한 책인 ‘훈민정음 원본’이었습니다. 즉, 여태껏 이용준이라는 분의 종가에서 대대로 가보로 보관을 해온 것이고 해례본과 동국정운이 함께 간송 미술관으로 가면서 세상에 알려진 것입니다.
    발견 당시 예의본의 앞부분 두 장이 낙장되어 있었던 것을 영남의 대유학자인 이한걸 (李漢杰)의 셋째 아들 용준(容準)의 글씨로 보완하였다. 이용준은 학자로서 안평대군체(安平大君體)에 조예가 깊었으며, 선전(鮮展)에 입선한 서예가였다.

    추가로 기존에 알려진 내용에 추가로 설명을 드리면
    이한걸 가(李漢杰 家): 이한걸(李漢杰)은 호가 율재(慄齋)로 영남의 대유학자이자 1927년 사비로 민족고유의 문화가 사라지는 것을 안타깝게 여겨 덕전강사(德田講社)를 운영하고 女子小學을 편찬하여 우리문화와 한글을 가르치시던 분으로 진성이씨 안동 周村(두루) 대종가의 작은집이 바로 이한걸 가 입니다.
    진성이씨 안동 주촌 종가는 고려 말에 시작된 600년 전통의 대종가로 세종 조에 4대 조 이정(李禎: 退溪 李滉선생님의 증조부 임)공이 영변판관을 거쳐 최윤덕 장군을 따라 북쪽 여진족을 토벌한 공이 있어 한산부사․선산 도호부사를 역임하셨던 분으로 양가의 관계를 살펴보면 이한걸의 고조부께서 주촌 종가로 양자를 가셨고 증조부는 양자를 오셨으며 다시 백부가 종가로 양자를 가셨습니다. 특히 백부 이긍연(李兢淵)은 지금은 고인이 되셨지만 독립운동을 하셨던 분으로 주촌(두루) 대종가 종손이셨습니다. (사후 독립유공자로 인정되어 건국포장을 추서 받음)
    따라서 소장 당시에 양가는 작은집과 큰집 사이였기에 서고의 책은 물론 재산의 개념도 분리되지 않았고 주촌 종가 집 서고는 진성이씨 지손들 에게는 언제나 열려있었으며 이한걸이 주촌 종가로부터 동국정운과 한글교육을 위하여 해례본을 가지고 와서 교육을 하였고 아들인 이용준을 통하여 간송에게 넘긴 것입니다.

    * 유일재 김언기(金彦璣): 김언기는 (1520~1588) 자(字)가 중온(仲溫), 호는 유일재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으로, 1567년(명종 22) 과거에 급제하였으나 벼슬하지 않고 평생 후진양성에만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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