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의 비밀? 오바마 배우기

 

화제의 지면이다.

전세계가 받아쓴 특종인가보다.

농구광 오바마가 웃통 벗어붙이고

하와이를 즐기고 있다.

신선한 사진이다.

2008년 8월인가?

대선의 와중, 그는 자신만만한 모습을 드러냈다.

 

그때도 화제가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드러난 건장한 상체는

대통령의 은밀한 부위이다.

대통령의 건강상태는 국가기밀 아니던가?

역대 대통령들은 자신들이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노력했다.

달리기로 걷기로 수영으로 축구로….

 

이렇게 자연스럽게 우연스럽게

사진 한두장을 통해 그것을 보여주는 것은 대단한 효과다.

가끔 푸틴이 훌떡 벗고 사냥을 하면서

몸매를 드러내곤 하는데

지적으로 보이는 미국의 젊은 대통령(당선자)가 이런 모습을 보이면

미국의 이미지 업에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이런 것이 품위있는 홍보의 기술이다.

의도적으로 공개된 것이라면 실력있는 작업이고

신문사의 자발적 특종이라면 대단한 센스다.

 

국익과 회사의 이익, 언론의 사명을 일치시키는 방식은

다양할 것이다.

지금 여러가지면에서 미운털이 박힌 미국의 이미지를

씻어내는데 이만한 효과 있는 작업이 어디 흔하겠는가.

 

신문, 공부할 게 정말 많은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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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디자인은 위대하다

 

신문디자인은 위대하다.

 

디자인 경영,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공공디자인….

엄청나게 많은 디자인이 이제 사회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제품의 품질경쟁 시대는 끝났다고 한다.

디자인에 의해 성패가 결정된다는 의미다.

 

회의 때 CEO의 옆에 디자이너를 앉히라는 질타는 오래전에 터져나온 경구이고

디자인하든지 리자인하라는 경구도 심심찮게 인용된다.

세상은 온통 디자인 열풍이다.

 

그런데 많은 디자이너들이 신문디자인 알기를 우습게 안다.

 

유명한 디자이너들 모셔다 디자인 강의를 듣는데,

“나는 신문을 잘 안보지만…” 뭐 이런 말로 강의를 시작하는 건 예사다.

그러면서 신문의 디자인을 비판한다.

 

나는 아주 아주 다르게 생각한다.

 

인간의 많은 능력 중 신에 근접한 능력인

창조의 능력을 가지고 있는 디자이너는 대단하다.

본능적인 감각을 가지고 있고, 이론으로 갑옷을 입었으며

체계적인 교육과 오랜 현장실습을 통해 일을 확실하게 수행할 능력까지 지녔으면

폼을 잡고 다른 이들을 무시할 만하다.

 

나는 또하나의 능력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빠른 판단과 실행능력이다.

이 부분은 대부분의 예술가들이 무시하는 부분이다.

그러나 디자이너는 무시하면 안되는 부분이라고 믿는다.

 

오래전 신문을 편집할 때,

동아일보가 석간신문이고 납활자를 이용해 신문을 만들던 시절,

우리는 11시쯤 마감된 원고지 뭉치를 들고,

30분간 레이아웃과 제목만들기 작업을 마치고,

30분간 조판자와 씨름하면서 실제 지면을 엮었다.

그리고 그것이 잠시후면 윤전기에 옮겨져 200만부의 신문으로 부화됐다.

 

그 과정부터 디자인의 개념이 있었다.

지금, 컴퓨터로 거의 모든 작업이 진행되는 지금,

그때보다는 조금 긴 시간이지만, 상대적으로 보면 대단치 않은 긴 시간에

디자인 작업을 한다.

 

몇장되지 않는 기사와 몇개의 사진이 당랑 주어지고,

디자이너가 머리를 쥐어짜, 지면을 구성한다.

그리고 그 구상이 통과되면

그때부터 몇시간의 작업을 통해 디자인 작품을 탄생시켜야 한다.

 

그 결과물은 수백만명의 독자가 본다.

그들의 눈을 만족시켜야 하며,

그들 중 일부 냉철한 눈을 가진 자들에게 거슬리지 않아야 한다.

 

보편성.

디자인의 파괴적 성향을 유지하면서

수많은 독자를 만족시키는 유니크한 보편성….(?)

그런 작업이 신문 디자인이다.

 

그리고 더 어려운 것은 내일 또 그 작업을 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다음날도…..

 

그래서 신문디자인은 위대하다.

그리고 신문디자이너는 자신의 작업의 위대성을 철저히 인식해야 한다.

그 위대성을 만족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이 위대한 성전의 전사임을 자랑스러워해야 한다.

긴 시간, 좋은 여건의 작업을 부러워말고,

척박한 여건을 개선해야 한다고 외치기에 앞서,

이 성전의 특이성을 이해하고, 자발적으로 성전의 도구가 되어야 한다.

그래야

위대한 신문디자인을 이야기할 자격이 생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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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소식을 전하는 신문, 나눔바이러스…

 

연말이면 온통 사회가 시끌해진다.

나눔의 소리로.

세상이 어수선하고 시끌시끌하기 때문에

시끄러운 것은 더이상 싫지만, 싫지 않은 소리도 있는 법.

나눔과 사랑의 소리가 그렇다.

 

신문에도 그런것들이 있다.

세상에 좋은 소식을 전하는 신문은 없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이 좋다고 말하면 꾸중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면서 신문은 부정적이라고 또 욕하기도 한다.

 

세상, 다 그런 거다.

모두들 자기입장에서 생각하니까, 자기 취향 자기 입맛이 세상 최고의 척도다.

 

그래도 즐거운 마음으로 “세상이 좋다”고 말하고

그렇게 신문을 만들 수 있는 일이 있다.

그것이 바로  기부와 나눔에 관한 지면을 만드는 일이다.

 

기업이 하는 많은 일 중 하나ㅡ, 사회공헌이다.

사실, 기업 자체가 사회공헌적 측면이 많지만

원론적인 이야기 말고, 실제로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아름다움을 가진 기업들을 전하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세상에 자기돈 아깝지 않은 사람은 없다.

그래서 소중한 것을 나누는 사람의 마음은

어떠한 형태, 어떠한 이유에서든 아름답고 고귀하다.

 

동아일보의 ‘희망&나눔’섹션을 편집-디자인하면서

우리는 비록 나눔에 동참하지 못하지만

희망을 나누는 기업의 이야기를 전한다는 사실에 가슴 뿌듯하다.

이 삭막한 고독의 바다에

남을 생각하면서 사는 사람들이 있음은 얼마나 대단한 일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악을 쓰며

핏대 올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세상에서

세상의 차가운 시선도 아랑곳않고 묵묵히 변명하지 않고

옳고 착한 일을 하는 사람들이 있음이 신기하고 놀랍다.

 

며칠전 만난 어느 기업의 사장하시는 선배,

망년회를 간단히 점심으로 떼우고

추산 비용 차액을 불우이웃돕기에 쓰기로 했단다.

그 분, 존경스럽다.

내 탐욕이 부끄럽다.

 

그나마, 우리가 만든 이 섹션이 있어

이 겨울 굳어있는 내 양심을 조금 씻어내린다.

‘나눔바이러스’를 퍼뜨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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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정수 조각전-phantom REAL / 유령처럼, 조용히 그러나 끈질기게 움직이기

                                   <위를 향해 걷는 발/ 부분>

 

사진이 조각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문득 든다.

조각은 고정되어있다.

순간을 잡아 영원히 살아가도록 고정시킨다.

 

그런데, 바로 그런 특성 때문에 영원히 움직인다.

조각은 살아있다.

영원한 움직임을 갖고 있다.

 

심정수.

1942년 서울생. 중앙고등학교 서울대학교를 나온 조각가.

많은 상을 받았고, 많은 전시회를 열었다.

그는 늘 움직임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일민미술관.

서울 도심 한복판에 자리잡은 오래된 동아일보 건물에 있는

실험적인 미술공간이다.

조금 어렵다, 쉽게 다가서기.

신문사의 오래된 건물인데다, 실험적인 전시들이 많기 때문.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곳 카페에서 차와 와플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공간이 되었다.

그래서 아마도 요즘엔 보통사람들도 많이 찾는 미술관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이래저래 움직임이 있는 공간이다.

 

햇살 비쳐드는 미술관의 유리벽을 넘어서면 바로 커다란 전시물과 마주서게 된다.

너무나 잘 융화된 전시물이어서

그냥 원래있는 건가보다 하고 지나치기 십상.

그래도 걱정하지 말고 전시실로 들어서자.

맨나중에 봐도 걱정할 것 없으니까.

 

1층 전시실.

어둡다. 그 공간의 첫 만남은 커다란 브론즈다.

맨 위의 사진. 작가도, 전시기획자도 강조해 마지 않는 움직임의 포착이다.

전신상의 발부분만을 담은 사진이 홈페이지에 올라있다.

그리고 그 부분을 주시해 주길 기대하고 있다.

그것을 모르더라도 그 자리에 서면 거기, 발끝에 시선이 사로잡힌다.

 

여기에 모든 것이 담겨있는지 모르겠다.

조각은 가만히 서있는 예술작품이다.

그런데 조각은 영원한 움직임을 꿈꾼다.

도약의 순간.

이 포즈로 서있는 작품은 지금 이 순간 뛰어오르고있다.

긴장감이 조각의 주변에 흐른다.

에너지의 응축, 바로 그 폭발의 순간이기 때문이다.

 

                                                             <바람>                      <그날>

 

바람은, 그래서 작가에게 좋은 소재인지 모르겠다.

끊임없는 자연의 호흡, 바람.

설령 인식하지 못하는 순간에도 항상 움직이는 바람.

작가 심정수는 바람조차 사로잡았다.

그리고 그 영원한 움직임을 조각에 담아냈다.

 

그리고 그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을 응시하는 시선,

긴장의 흐름도 함께 표현해내다.

1980년대와 60년대, 20년의 시간의 흐름을 담고 있는

위의 두 작품 사이에서 끊이지 않고 등장하는 것이

움직임을 표현하고 하는 욕망이다.

 

                                           <사슬을 끊고/ 부분>

 

액션과 의지는 또다른 움직임이다.

매우 정적으로 보이는 이 작품에 다가서면

용을 쓰고 있는 표정이 드러난다. 그리고 고리(혹은 사슬)를 끊으려고 힘쓰는

손과 팔이 드러난다. 앙상하게 드러난 뼈대.

그래도 에너지의 응축이 보인다. 힘이 별로 없을 것 같지만

그에게 의지가 넘침을 느낄 수 있다.

 

1층 2층 3층…

서로 다른 느낌의 조각들, 전시공간들….

모든 것이 잘 짜여진 느낌을 주는 동선의 공간과 물체.

거기서 움직임을 강조해 느끼는 것은

감정의 과장일까.

 

                                                                                            <그림자>

 

온 몸을 던지는 액션의 절정.

역설적이게도 그 순간 작가가 포착하고 싶었던 것은 그림자?

그림자의 바람같은 움직임?

움직이는 것에는 항상 파장이 있다?

확 달려드는 그 순간, 우리는 한발 뒤에서

유령같이 스며들어 바람처럼 움직이는

무엇인가를 본다.

 

그래서 이 전시회의 제목이 Phantom REAL인가?</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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맨U, 인재발탁의 법칙을 다시 생각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꿈의 구단이다.

최고의 실력이어서가 아니라,

최고의 활력과 아름다움을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기에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

명성의 함정에 빠진 것 아닌가 싶기도 하다.

 

오늘 새벽, 맨U는 선더랜드와 프리미어리그 15라운드 경기를 치렀다.

엄청난 공격, 그러나 뚫리지 않는 골.

최근의 난조를 그대로 드러냈다.

루니는 엄청 힘이 들어가서 쾅쾅 대포를 쏘아댔고

호나우두는 곁에서 춤을 춘다.

새로 들어온 베르바토프는 맥없이 머리만 다듬고 있으니

정교한 공격이 이뤄지기 어렵다.

 

열심히 뛰는 공격수는 박지성뿐인 것처럼 보인다.

 

나는 박지성 팬이 아니다. 맨U 팬이다.

그런데 요즘 맨U다운 맨U맨은 박지성 뿐인 것 같다.

그래서 박지성 팬이 되고 있다.

힘겨운 승리. 수비수가 골을 넣어주었다.

 

박지성은 후반에 테베즈와 교체되어 나갔다.

뛰다보면 나갈 수도 있고 쉴 수도 있다.

그런데 잘 뛰는 사람과 못뛰는 사람이 헷갈리는 것은 용납될 수 없다.

명성에서 훨씬 앞서있지만, 움직임이 별로인 베르바토프는 붙박이 출전이다.

퇴장도 당하는 호나우두도, 골 못넣는 킬러 루니도 붙박이지만

열심히 뛰는 테베즈 박지성 안데르손은 조커다.

 

나는 축구전문가가 아니다. 무슨 사정이 있을 것이고

더 깊은 계산이 있을 것이라는 것쯤은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세상에서, 우리 주변에서, 회사를 경영하면서, 회사에 다니면서…

우리는 실력에 의한 발탁을 경시하면 안된다는 점만은 확실히 배우고 있다.

 

열심히 하고 잘하는 사람을 존중해야 한다.

그 사람이 어떤 형국이든 관계없이 그를 존중해야 한다.

그래야 그가 더 잘 할 수 있게되고, 다른 사람도 그렇게 하고 싶어지고

조직 전체가 활발하게 긍정적으로 움직일 수 있다.

 

부정의 말,

남 탓, 조건 탓에 익숙해 지지 말자.

또 그런 사람에게 현혹되지 말자.

조용히 자신의 일을 하는 사람을 존중하자.

열심히 하고자하는 사람을 더욱 존중하자.

가능하다면 현실적 여건을 바꿔서라도 그를 중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활력을 잃을지도 모른다. 영영~

 

맨U의 활력.

힘과 우아함. 내가 동경해 마지않는 요소들.

요즘 경기를 보면서 그것이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갖게된다.

세상에 난공불락의 요새는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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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어드는 남자- 절망의 끝, 그냥 주저앉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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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편집22-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말자

신문편집22-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말자

 

신문에는 많은 시각물들이 등장한다.

주요하고 많은 것은 사진.

사진에는 자연의 오묘한 진실들이 실려있다.

그런데, 그 사진을 활용해 그래픽을 만들 때

가끔 아주 엉뚱한 문제가 생긴다.

 

그리고 그런 문제는 그림이나 일러스트레이션 등 다양한 시각물에서

동일하게 발생하곤 한다.

 

 

얼마전 미국신문의 자동차 관련 박스를 본 바 있다.

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

이번엔 우리 섹션이다.

기획되지 않고 따로 찍힌 석장의 사진.

그것을 가지고 만들어야 한다.

각각 다른 앵글.

바로 앞에서 본 자동차와

조금 위에서 본 놈, 아주 많이 위에서 본 놈…..

 

그 사진들을 가지고 우리는 어떻게 활용해야 하는가.

당연히 아래위로 나열할 수밖에 없다.

 

자연법칙에 따르지 않으면 어색해진다.

아무리 잘 만들어 놓은 지면이라고 해도

자연법칙에 위배되는 시각물이 있으면 안된다.

 

가령, 아래로 떨어지는 물건의 가벼운 부분이 아래쪽으로 놓여있다든지

손가락이 4개인게 확실하게 보인다든지

실제로 더 큰 것과 작은 것이 시각물 속에 뒤바뀌어 있다든지

물위에 떠 있어야 할 것이 가라앉아 있다든지….

 

이런 것은 사소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아니다.

중요한 것이다. 뭔지 모르지만 이상해~라고 독자가 생각하게 만드는 단초다.

그렇게 되면 모든 것이 의심스러워진다.

 

손가락 4개면 어떻냐고?

가령 다리가 5개인 강아지를 그렸다면 어떨까.

그래도 손가락 4개 그림이 괜찮다고 말할까.

(물론, 장애를 가진 손일 수도 있지만, 이건 특수한 상황을 위한 설정이다.

장애라고 그리면서 온전하게 그린 것이 그 반대 예다)

 

뭔 신문사에서 이런 것도 모르냐!!!!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쾌감을 주는 일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시각물을 다룰 때 주의해야 한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말자.

 

위의 자동차 사진을 가로로 나열해 놓으면 이상해진다.

어색함의 근원이 무엇인지 모를 어색함.

그래서 우리는 수평적 배열이 훨씬 편했을 터임에도 불구하고

세로배열을 선택했다.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지 말자.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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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허- 갇힌 자의 선택은 절망뿐인가

 

세상은 변한다.

그리고 개인도 변하고, 총체적으로 인간도 변한다.

변하는 세상에서 우리는 무엇을 보는가.

어려워진 환경 탓을 하면서

점점 어려워지고만 있는 요즘의 경제현실을 보면서

나는 리처드 매드슨의 ‘줄어드는 남자’에 박수를 보낸다.

 

줄어드는 남자/ the incredible shrinking man

리처드 매드슨/ 조영학 옮김/ 황금가지

 

 

어느날 안개에 휩싸이는 경험을 한다. 피부가 따갑다.

그렇게 지나간 시간. 잠깐 섬뜩했지만, 뭐 대수롭기야 하겠나….

시간이 흐르면서 변화를 느끼기 시작했다.

조금씩 줄어든다. 그냥 어느 기능이 퇴화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비율을 맞춰 하루에 0.36cm씩 줄어든다.

 

처음엔 병원에서 조사하고 검사하고 언론에서 쓰고, 난리가 났다.

그렇지만 점점 시들해진다. 줄어드는 남자 그 자신이 말이다.

 

사람의 존엄은 그 크기에서 나오는가.

작아지니까 아내도 딸도 자신을 우습게 여기는 것 같다.

고양이가 우습게 보더니, 나중엔 지하실의 거미가 가장 무서운 괴물이 되었다.

 

그냥 쉽게 보이던 사물들이 자신을 위협하는 존재가 되고

작은 소리도 고막을 뒤흔드는 굉음이 된다.

동물은 물론, 식물도 전혀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사랑도 달라진 것 같다. 아니 의미를 잃은 것 같다.

괴팍해진 성격과 더 강해진 성욕….

아, 도대체 왜 나는 이런 질병에 빠져버렸는가.

 

마침내 내일 눈을 뜨면 0cm, 즉 존재가 소멸된다.

거미와의 사투를 승리로 끝내고, 잠이 든다. 

도망다니던 삶도 이젠 끝이리라. 

 

다음날 눈을 떴다. 그래도 나는 살아있다. 새로운 세상에.

 

——————–

리처드 매드슨은 1926년 생이다.

저 유명한 ‘나는 전설이다’를 1954년에 썼다. 세계적인 스타탄생.

그 이후 수많은 SF 공포물들이 그 내용을 변용해 만들어졌다.

이 소설 ‘줄어드는 남자’는 1956년 작이라고 한다.

놀랍다.

그때, 아직 내가 태어나지도 않았을 때, 이 놀랍고 재미있는 소설이 쓰여졌다.

장면장면의 생생함, 생동감,

그리고 특수한 한정된 공간에서 벌어짐으로 인한 시간적 흐름의 무의미함.

이런 것들이 지금의 감각으로도 지루할 틈없는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전설’이 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

 

줄어드는 남자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붕괴되어가는 인간성을 보여준다.

가족에 대한 화, 세상에 대한 화, 사물에 대한 화,

그리고 자기 자신에 대한 분노로 얼룩진 인생이 된다.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 도망다니는 삶을 살게 된다.

삶이라기보다는 ‘괴멸의 과정’이라고 해야 하나.

 

어쨌든 그렇게 소극성으로 일관하던 삶에 변화가 온다.

모두가 떠났다는 깨달음, 완전한 고독의 상황에서

그는 자신을 위협하던 괴물과의 목숨건 투쟁을 선택한다.

그리고 승리.

그 승리의 환희 속에서 평온한 잠이 들고

새로운 세계에서 눈 뜨는 놀라움을 경험한다.

 

황당하다고?

그렇지 않다. 작가에게 이렇게 놀라운 세계관이 있었기 때문에

이 놀라운 소설 ‘줄어드는 남자’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오늘도 차가운 날씨만큼 차가운 세상의 불평을 들으면서

신념의 사내를 그리워한다.

죽더라도 시도해 볼 수 있는 신념을 지닌 사내.

그에게, 그를 창조한 작가에게

깊고깊은 갈채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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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로이트 프리 프레스, 자동차를 이야기하다

디트로이트.

자동차 왕국. 수십년전 학교에서 배운 이야기다.

여전히 자동차 왕국인가보다.

 

전세계 경제가 얼어붙고, 미국의 자동차 회사들이

생사의 기로에 서있다고 한다.

아니 최근의 몇몇 조치로 회생의 단계로 들어섰다고 해야 하나…

 

포인트는 그게 아니고, 지면이다.

우리도 자동차 섹션들이 많이 있다.

신문사마다 다른 형태의 섹션들이 있는데,

프리프레스라는 힘찬 이름의 이 신문이 톱으로 다룬

자동차이야기는,

역시 기로에 서있는 신문들이 어떤 방향으로 가야하는지에 대한 생각과

자동차 섹션에서 어떤 효과를 낼 수 있는지를 엿보기를 할 수 있다.

 

오늘의 세계 신문들을 훑어보다가

눈에 띄길래 의미를 새겨보았다.</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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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편집21- 틀리지 말자, 틀리면 배우자

신문편집21- 틀리지 말자, 틀리면 배우자

 

신문을 만들다 보면 오류가 생기게 마련이다.

무슨 일인들 그렇지 않으랴만,

활자의 마법이라는 말이 있듯

잘 정리해 놓은 제목은 슬쩍 훑어만 봐도 의미가 파악되기 때문에

자기가 맞게 써놓은 것인지 아닌지 헷갈릴 때가 많다.

제대로 읽고 의미를 파악한 것인지

제대로 읽지 않고 의미를 추정한 것인지….

 

오류의 유형은 무수히 많다.

너무 많아서 도대체 미리 준비할 수가 없다.

그럼 어쩌지?

틀리고 나면, 배워야 한다. 안틀리면 최고다.

그렇지만, 틀리고 나서 배우는 것 또한 무척 중요한 일이다.

 

1. 오류의 유형

(1) 무지형

진짜 몰라서 틀리는 경우다. 순수한 무식으로 인한 경우와

시사 흐름을 쫓아가지 않아서 생긴 오류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신문을 만드는 사람은 많이 알아야 한다.

아무리 허접한 지식이라도 알면 모르는 것보다 좋다.

잘못알고 있어서 추정해 달아놓은 제목이 틀리거나

너무나 유명한 사람인데 나만 모르고 있다가 사진을 잘못 사용하거나

한자를 썼는데 본문에 있다고 그냥 옮겨놓았다가 둘 다 틀리게 된다든가

상식적 오류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감하게 제목을 다는 등등.

 

가령, “어떤 제품의 부가세가 5%다”라는 기사의 제목을

“부가세 5%나 부과”라고 달면 틀린 제목이 된다.

부가가치세의 기본이 10%이니까, 기사가 상식이라고 생각한 부분은 빼고 다뤘을 때

제목을 잘못 붙일 수도 있다는 뜻. 뭐 이런 경우야 있으랴만….

게다가 의미까지 용감하게 붙이면 더 우스워질 수 있다.

“부가세 5%… 국민은 봉인가?”라고 한다면….

 

위의 경우는 순수한 무지의 영역이고

뉴스를 쫓아가지 않아서 생기는 오류도 많다.

예를 들 필요도 없다. 바로 어제 나온 제목을 똑같이 쓰거나

처음 나왔다는 의미까지 붙여 다는 제목들….

 

신문에는 무수히 많은 사실들이 있다.

신문을 읽자. 틀리지 않기 위해서도 그렇고 상식을 넓히기 위해서도 그렇다.

게다가 혹시 틀렸을 경우, 빨리 발견하기 위해서 더욱 그렇다.

 

(2) 무성의형

일이 많다보면 대충 넘어가야 하는 부분이 있다.

모든 것을 다 챙기면 시간이 부족하고

할 수 없이 부분적으로 중요한 것부터 챙겨야 한다.

이는 출세하는 방법에 대한 글에서도 흔히 보이는 것으로

우선순위를 정하고 그에 따라 행동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그러다 보면, 허망된 자신감이 생긴다.

나는 빨리 쉽게 일 처리를 잘한다.

그렇기 때문에 대충 봐도 된다. 중요한 것은 이미 챙겼다….

뭐 이러다 보면, 실수가 생긴다.

중요하지 않은 부분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중요한 부분에서 생긴다.

 

큰 제목의 오자.

신문을 만들다보면 많은 사람들이 경험하게 된다.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큰 글자를 틀릴 수 있지?

편집자 조판자 디자이너 차장 부장 부국장 국장까지 다 본 제목인데

주먹만한 글자여서 지나가던 사람도 알아볼 수 있는 것인데

오자는 생긴다.

 

꼼꼼 또 꼼꼼.

한글자 한글자 확인하면서 읽고 또 읽어야 한다.

이왕이면 소리 내어 읽고 또 읽자.

한글자씩 줄을 그으며 읽는 사람도 있고

글자마다 체크하면서 읽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 완벽할까? 그렇다고는 말 못하지만 최소화할 수는 있다.

그리고 당당하게 나는 최선을 다했는데

해결 못했다고 말할 수라도 있다.

 

사소한 부분에 대한 무성의는

대형 참사를 부른다. 조직을 위험에 빠뜨리는 대형 참사.

아무것도 믿지말자.

확인 또 확인 밖에는 길이 없다.

 

2. 오류에의 대처법

(1) 일단 수정하자

오류를 발견하면 최우선 조치는 수정이다.

몇부를 찍더라도 일단 수정해서 제대로 찍고 보는게 최고다.

그래야 독자에 대한 의무를 하는 것이고

상사에 대해 변명할 거리를 만드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멍청한 짓을 한 자신에 대한 징계가 된다.

 

오류를 발견하면 당황해서 어찌할 바를 모르거나

무슨 일이 발생했는지 경위 파악부터 하면서

빠져나갈 길 찾기부터 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건 옳은 길이 아니라고 본다.

자신의 책임, 혹은 타인의 책임을 규명하는 것은 중요하지만

일단 최초의 수습은 수정이다.

가능하면 빨리 고쳐 가능하면 많이 찍어야 한다.

 

그리고 나면 명확히 수습에 나서야 한다.

무슨일이 벌어졌는지 파악을 하고

증거를 수집하고

다시는 그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한다.

 

자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라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스스로 조치를 해야 하고

타인이 빚은 실수라면 명확히 전달하고 인식시켜야 한다.

그러면 전체로서의 오류가 훨씬 줄어들게 될 것이다.

 

(2) 내탓이로소이다

정직하게 따져보자.

내가 잘못했는가. 잘못한 것이 있다면 무조건 내탓이오,라고 자복해야 한다.

내가 조금 잘못했지만 남도 잘못했는가. 그렇다면 그에게 가서 내가 잘못했다고 말하자.

내가 부리고 있는 사람이 잘못했는가. 그렇다면 내가 관리를 잘못했다고 말하자.

 

혹시, 혹시라도 내 잘못이 전혀 없고 누군가 다른 사람이 잘못했는가.

그렇다면 정당하고 명쾌하게 지적해도 된다.

 

오류를 최소화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오류의 후유증을 최소화하는 것이 그 다음으로 중요하다.

그것은 그 오류를 대하는 본인의 태도에서 출발한다.

저 사람은 자신의 오류에 대해 정직하고 책임을 미루지 않는다,는 평판은 중요하다.

물론 맨날 그러다가 쟤는 맨날 사고치고도 당당하다는 평가를 들으면 안되지만

더 완벽해지려는 노력을 하는 모습으로 보일 수만 있다면

아예 사고 안치고 덤덤하게 살아가는 사람보다 나을 수도 있다.

 

억울할 수도 있다.

남들은 놀며놀며 조금만 일하니까 큰 사고 안친다.

나는 일도 잘하고 빨리 하니까 많이 하고, 중요한 것을 하다보니

내가 친 사고가 눈에 잘 띈다. 억울하다.

 

그렇지만, 억울해 하지 말자.

그것은 자신이 평소에 얻은 파워 혹은 수익에 대한 대가일 수 있다.

프로스포츠 선수가 자기를 씹은 언론에 대고 그악한 욕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건 아니다. 자신이 젊은 나이에 그만한 부와 권력을 누리는 것은

그만한 대가를 치를 수도 있다고 자신을 내놓는 비용을 지불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편집자로서 많은 대가를 받고 있다면

사고로 인한 자신의 부담도 짊어질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큰 편집자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제목에만 오류가 있는 것은 아니다.

본문의 오타, 기사 팩트의 오류, 사진 사용 오류, 그래프 숫자 오류, 지도 지점 오류,

시스템 상의 오류, 시간 못대는 오류…..

이 모든 오류들이 우리의 삶의 일부이다.

그러나 친숙해질 벗은 아니다.

한번 만나면 다시는 만나지 않도록 명쾌하게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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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테고리 : 신문편집 이론 실제 댓글 남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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갇힌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사물을 다시 본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일까.

우리 주변에 있는 것들이 사실은 무서운 칼을 벼리고 있다면 어떠할까.

모두가 적인 세상에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

그런 것들에 대한 대답은 아니지만,

생각의 실마리를 끝없이 제공하는 소설을 보았다.

 

폐허

스콧 스미스/ 남문희 옮김/ 비채

 

 

멕시코의 휴양지.

미국의 대학생 커플이 심심해 몸을 비비꼰다.

퇴폐.

이런 상황을 퇴폐라고 부른다.

모험심이 반짝이는 것도 아니고 뭔가 해보겠다는 의욕도 없고

쉬는 것조차 의미없어 몸을 함부로 굴리는 것밖에 없는 상황.

문학에서든 생활에서든….

 

뒤얽혀든 사람들과 함께 그들은 멕시코 정글로 초대를 받는다.

퇴폐로부터의 탈출? 그렇다기보다는 될대로 돼라에 가깝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은 결정이다. 이 ‘폐허’라는 놀라운 상상력의 세계에서

당위성을 갖지 못한 유일한 설정이지만

그 나름대로 책속에서 역할이 있는 설정이다.

“난 오고싶지 않았어, 니들 때문이야”

이런 말을 해야하는 상황을 위한 설정.

 

마야의 유적, 어느 공터에서 그들은 그들이 찾는 사람을 발견한다.

유골만. 살점 하나 없는 유골.

부패해서가 아니라 누군가가 일부러 살점을 모두 없애버린 것 같은 유골.

 

그들 앞에 놓인 상황은 바로 그것이다.

세상에!

이제 남은 것은 구조를 기다리는 것과

죽음을 기다리는 것뿐.

어느 것이 먼저올까의 문제만 남아있다.

퇴로는 없다. 마야인들이 총과 활을 겨누고 감시하고 있다.

떠나지 마라, 떠나면 죽는다.

 

이제 잡아먹겠다고 덤비는 덩쿨과

굶주림과 마야인의 덫에서 벗어날 길은 과연 없는 것일까.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식량이 떨어지는데 그럼 어떡하지.

다리를 자르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동료는 어떡하지.

오줌이라도 증류해 먹어야 한다는데 난 마실 수 있을까.

 

——————-

사람들은 항상 조금은 늦게 결정한다.

나도 그렇고 남도 그렇다.

그래서 시간을 놓치고 후회한다.

그때 했어야 하는데….

그래서 요즘 나는 하고 싶을 때 하자, 말할게 있으면 그때 하자…

뭐 이런 생각을 하면서 사는 편이다.

물론 실제로 실천하면서 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훨씬 낫다. 과거처럼 말 못하면서 속 태우는 것과는 다르다.

회사를 경영하자면 꼭 필요하다.

타이밍에 따른 결단. 그리고 할 말을 하는 태도.

물론 기다림의 철학도 타이밍의 다른 이름이다.

이 둘을 잘 조화시키는 것은 정말 정말

지혜의 영역이다.

내가 지혜롭기를, 정녕 지혜로와 내 개인적 삶과

회사 모두에 큰 덕이 될 수 있기를….

——————–

 

다시 멕시코의 유적.

갇혀있는 우리는 타인의 죽음을 보면서도 깨닫지 못한다.

우리가 얼마나 어리석은지.

현실을 가장 빨리 직시하고 그것에 적합한 대책을 세우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그래서 옆에서 죽어가는 동료를 보면서 아무것도 하지못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어떤 조치도 취하지 못한다.

그래서 결국 너무나 뻔하게 우리 모두에게 던져진 죽음을 벗어나지 못한다.

 

소설 ‘폐허’는 많은 이야기를 한다.

캠프파이어를 하면서 이야기하기 좋은 이야기. 이 긴 장편을 내놓은 스콧 스미스는

위기에 놓인 인간 군상의 이야길를 이렇게 단순한 ‘심플 플롯’안에서 풀어놓았다.

‘심플 플랜’의 작가가 제시한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미덕이 모자란다.

투쟁.

생존을 위한 소극적 투쟁이 아니라

승리를 위한 적극적 투쟁.

이것은 소시민적 삶을 살아온 퇴폐적 대학생들에게서 얻기 어려운 미덕임이 틀림없지만

스콧 스미스가 지니지 않은 미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된다.

 

무지막지하게 강한 상대를 앞에 놓으면

우리가 할 수 있는 선택은 생존에 대해 연구하는 것뿐이다.

그렇지만, 뭔가 아쉽다.

그렇더라도 뭔가 해야하는 게 아닌가 하는 희망을 놓기 싫다.

그래서 나는 늘 궁금해했다.

 

고3때 시험이 끝나고 아메리카의 흑인노예 소설을 읽으며

저 힘있고 덩치좋은 노예들이 왜 몇 안되는 지주들에게 생명을 내놓는 상황을 수용할까.

그런 의문이 들었었고,

아우슈비츠의 상황을 읽으면서, 왜 저들은 그냥 순순히 가스실로 걸어들어갈까.

희망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일까.

어치피 죽을 것, 적을 공포스럽게라도 만들면 좋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가졌었다.

아직 풀리지 않은 것이다.

희망 때문이라고 한다. 파괴로 이끄는 희망. 

극단의 상황에서 턱없는 낙천주의자들이 먼저 죽게된다는 이야기처럼.

 

‘폐허’의 주인공들이

그들의 적과 싸우는 쪽을 택한다면, 적들의 전략이 바뀔 것이다.

적어도 적들이 희생물을 비웃지는 않을 것이다.

이런 생각은 들지만, 나라면 그럴 수 있을지는 자신이 없다.

그래서 문든 생각난다.

이 책의 진짜 주인공은

‘폐허’ 그 자체다. 아니면 ‘덩쿨’이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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