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효, 盧정부 때 이종석 보다 더 쎌까?

김태효 VS 이종석
 동아일보에는 1100자 짜리 ‘칼럼’ 횡설수설이 있습니다. 논설위원이 쓰는 글 중 한 가지 유형이죠. 사설(社說)은 실명을 밝히지 않은 채 쓰는 문자 그대로 동아일보의 생각이고 횡설수설은 생활주변의 이야기 거리 등을 시시콜콜 풀어내는 개인 칼럼입니다. 하지만 1100자에 모든 내용을 담아내는 게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전 이제부터 횡설수설에서 다 쓰지 못한 뒷이야기들을 블로그에서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해 보려고 합니다. 
 김태효와 이종석 이라는 주제로 횡설수설을 쓰게 된 계기는 김태효 대통령 대외전략비서관의 승진입니다. 15일자로 김태효 비서관은 대외전략기획관으로 승격됐습니다. 기획관은 1급과 수석사이에 위치하는 직책으로 청와대 내에선 .5급 이라고도 한다고 하네요. (참고: 동아일보에 실린 횡설수설 링크: http://news.donga.com/Column/3/04/20120115/43337607/1)
 사실 전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과 좀 더 오랜 인연을 갖고 만났습니다. 노무현 대통령 정부 시절 이 전 장관은 그야말로 실세 중 실세였죠. 지금은 존재하지 않지만 청와대의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사무처의 위세는 대단했습니다. 외교-국방-통일-정부 등 국가안보와 관련된 사안을 총괄조정하는 임무를 수행하는 NSC 사무처는 대한민국의 모든 외교안보통일 현안에 대한 주요 결정을 내리는 최고기관이었습니다. 물론 장관급으로 구성된 NSC 상임위원회가 최상위 의결기관이었지만 상시적으로 업무를 다루는 NSC 사무처의 힘이 더 컸을지도 모릅니다. 
 이른바 내재적 접근법으로 일가를 이룬 당대 최고의 북한전문가 이종석 사무차장은 노무현 정부에서 정말 열심히 일했습니다. 분당에 집이 있었지만 오전 7시 이전에 항상 출근해 모둔 서류를 꼼꼼히 챙긴 뒤 대통령에게 올라가는 보고서를 모두 스크린 했습니다. 그렇게 일하기를 매일 밤 11시까지 해서 직원들 사이에 ‘세븐 일레븐’이란 별명을 얻었죠. 직원들이 모두 혀를 내두를 정도의 대단한 체력이었습니다.
 이 차장이 사무차장으로 일하던 2003년부터 2006년 까지는 외교안보통일 관련 현안이 매우 많았습니다. 조지 W 부시 대통령 시절이었던 당시 미국은 미군의 재배치를 단행했습니다. 도널드 럼즈펠드 국방부 장관 주도로 이뤄진 이른바 ‘전략적 유연성’은 한반도에 배치된 붙박이 군 미군이 다른 지역의 분쟁에 차출될 수 있는 길을 열어뒀습니다. 한강이북에 배치된 주한미군의 한강이남 이전과 용산주한미군기지 이전을 위한 협상도 활발하게 이뤄졌습니다. 
 사석에서 만난 이 전 차장은 당시의 어려움을 ‘안보 쓰나미’로 소개한 적이 많습니다. 그만큼 큰 도전이었고 한반도의 운명을 좌우할 수도 있는 중요한 결정들이었죠. 하지만 문제는 노무현 정부와 부시 정부가 궁합이 맞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반미면 어떠냐”며 집권한 노 전 대통령은 한국이 역사의 새로운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며 동북아의 균형자 역할을 하겠다고 선언해 미국을 경악시킵니다. 당시 미첼 리스 국무부 정책실장은 참여정부의 고위인사에게 이메일을 보내 “한국이 정녕 동맹에서 탈퇴하려 하느냐”며 격앙된 반응을 보이기도 합니다. 미국은 한국이 한미동맹을 약화시키고 중국과 가까워지려 한다는 의혹을 강하게 가졌습니다.
 2006년 1월 1일 노 전 대통령은 이 전 차장을 통일부 장관에 지명하는 인사를 단행합니다. NSC 상임위원장을 겸하는 자리인 통일부 장관에 이종석을 앉힌 것은 당시로 봐서는 누가 봐도 이종석 원톱체제의 구축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생각했던 것처럼 풀려나가지 않았습니다. 6자 회담에서 2005년 9.19 공동성명을 내놓을 정도로 무르익는 듯 보였던 북핵문제 해결의 실마리를 2006년 들어가면서 꼬이기 시작했습니다. 북한은 2006년 7월 대포동 2호를 포함한 장거리 미사일을 동해안에 무더기로 쏘아 올린데 이어 그해 10월에는 급기야 핵실험까지 단행하는 초강수를 둡니다.
 7월 미사일 발사 이후 “어려울 때 일수록 남북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야 한다”며 부산 남북장관급회담을 밀어붙였던 이 전 장관으로서도 핵실험에까지 나선 북한을 더 이상을 감당할 수 없게 된 것입니다. 당시 통일부 출입기자였던 기자는 핵실험 당일 출근길에서 본 이 전 장관의 모습과 표정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전날 심한 배탈이 나 한잠도 자지 못했다는 이 전 장관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감돌고 있었습니다. 심한 배신감에서 오는 허탈감이랄까…. 당시 이 전 장관의 워딩은 아마 “드디어 올것이 오고야 말았다”는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 였지만 이 전 장관이 통일부 장관 청문회 인준을 마치고 청와대를 나서는 순간 이미 그는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났다는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차관급 NSC사무차장에서 장관중에서도 외교안보분야 책임장관의 반열에 올랐음에도 그의 실제 파워는 줄었다는 것이죠. 절대권력과의 거리와 실권은 밀접한 관계를 갖는다는 말이 실감납니다. 여하튼 이종석이 나간 자리는 박선원 대통령대외전략비서관이 힘의 공백을 메웁니다. 노무현 정부에서 열린 6자 회담에 모조리 참석한 인사는 박 비서관이 유일합니다. 그때 나눈 대화의 내용과 북한과 미국간의 논의는 모두 박선원 씨의 머릿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을 겁니다. 이른바 ‘386 탈레반’의 세력이 강한 시기였으며 그 중심에는 박선원 씨가 있었던 셈입니다.
 김태효 기획관은 2004년 이명박(MB) 대통령과 처음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MB캠프에서 정책을 자문했고 인수위원회에서도 실력을 발휘했습니다. 김병국-김성환-천영우 외교안보수석이 자리를 바꾸는 동안 김 비서관은 이 대통령의 통일·외교안보 라인에서 한자리를 지켰습니다. 2010년 10월 외교통상부 장관 지명자인 김성환 수석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 때는 김 지명자가 아니라 참고인으로 채택된 김 비서관에게 한국 외교안보 정책을 묻는 질문이 쏟아지는 촌극이 벌어졌습니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대통령의 뜻을 잘 이해하고 있으며 MB의 외교안보 전략을 거침없이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평가합니다. 관료들과 달리 하고 싶은 말을 똑똑 뿌러지게 하고 그 말들이 대부분 틀리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필자가 2008년부터 2011년까지 워싱턴 특파원으로 재임하는 동안 김태효 비서관은 여러차례 미국을 방문했습니다. 대부분의 관리들이 특파원 간담회를 갖고 배경설명을 자주 했지만 김태효 씨는 기자들과 마주 앉지 않았습니다. 본인이 1급 비서관인지라 기자들을 불어 모을 급이 안된다는 것이 이유였습니다. (좀 웃기는 이야기지만 기자간담회는 장관급이나 청와대 수석정도가 하는 것이 현재의 관행입니다.)
 필자 기억에 이종석-김태효 씨가 같이 있었던 자리는 2005년 2월 외교통상부 리트리트때입니다. 당시 이종석씨는 NSC 사무차장이었고 김태효씨는 외교안보연구원 교수였습니다. 당시 참석했던 김성한 외교안보연구원교수(현재 고려대교수)는 이종석 씨를 조용필에 비유했습니다. 그 정도로 이종석 씨는 외교안보 관련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독점하던 스타 중 스타였습니다. 그당시 필자는 김태효 씨가 오늘날 이렇게 대한민국의 외교안보정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거물’이 될지를 꿈에도 짐작하지 못했습니다. <終>   
카테고리 : 횡설수설
태그 , , ,

댓글(1) 김태효, 盧정부 때 이종석 보다 더 쎌까?

  1. Iqjlewue says:

    , Payday Loan UK, [url="http://hotellescolonnes2002.com"]Payday Loan UK[/url], http://hotellescolonnes2002.com Payday Loan UK, :-O,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