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북한노동당 비서와 ‘신라의 달밤’을?

<북한 노동당 비서 김기남과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불렀던 신라의 달밤>
 지금은 열리지 않고 있지만 김대중-노무현 대통령 시절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치러진 남북간 행사중에 8.15 민족대축전이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2000년 6.15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치러진 뒤 남북이 화해협력의 정신을 계승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행사였고 민간차원에서 치러진 남북간 행사중에는 아마 최대 규모였을 것입니다. 처음에는 민간이 하던 행사였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당국간에도 6.15 정신을 계승하자는 주장이 나왔고 남북 당국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행사로 발전했습니다. 
 필자 기억에는 2005년 서울 8.15 민족대축전은 가장 성대하게 치러진 행사 중 하나였습니다. 해방 60주년 기념이라는 상징성도 있었던 지라 북한에서도 초호화 대표단을 서울에 보냈습니다. 당국대표단장으로는 김기남 노동당 비서가 왔고 임동옥 통일전선부 제1부부장, 안경호 조평통 서기국장, 최성익 적십자회 중앙위 부위원장, 최창식 보건건 부상, 최창일 문화성 부상 등이 대거 남한을 찾았습니다. 
  당시 북한 대표단(182명)은 한국 최초의 6성급 호텔인 W호텔에 묵었습니다. 북한 대표단은 호텔을 거의 전세 내다 시피 했는데 이 호텔 스위트 룸은 하루 숙박비가 450만원이고 대부분의 스탠더드 룸 역시 40만원이나 하는 최고급 호텔이었죠. 당시 기자들 사이엔 노동당 비서인 김기남 할아버지(당시 79세)에게 가장 자본주의적인 호텔을 경험하게 하려는 ‘특별배려’라는 말들이 나왔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W호텔은 한국에서도 20, 30대를 겨냥한 젊은 감각의 인테리어와 시설을 갖춰 웬만한 한국 사람도 좀 부담스럽게 느끼는 분위기였습니다. 객실에 들어가면 욕실이 환히 들여다 보일 수 있도록 전체를 투명유리로 디자인 했고 침대도 ‘러브호텔’을 연상할 수 있는 빨간 튤립모양의 전위적(?)인 모습입니다. 카드키를 꽂고 해당 층을 눌러야 엘리베이터가 작동하고 호텔내 사우나나 수영장을 가려면 옷을 다 벗고 객실에 비치된 가운을 입어야 하는 등 ‘주체사상’과 우리식 사회주의로 무장한 북한 인사들에게는 도통 적응이 안 되는 분위기였죠. 
 사족이 길어졌지만 김기남 비서는 14일 서울에 도착하면서 17일 북한으로 돌아갈 때까지 파격적인 행보를 거듭합니다. 북한 당국자로는 처음으로 국립현충원을 방문해 헌화 분향을 했고 당시 병원에 입원해 있던 김대중 전대통령을 문병했습니다. 16일에는 국회를 처음으로 방문하기도 했고 북한에 돌아가기 전에는 청와대로 노무현 대통령을 예방했습니다.
 제 개인적으로는 김기남의 경주 방문이 하이라이트 였다고 봅니다. 16일 밤 고양종합운동장에서 열린 민족대축전 폐막식에 참석한 김기남은 정동영 당시 통일부 장관 등의 안내를 받아 밤 8시40분 경 경주를 1박 2일로 찾았습니다. 김기남이 신라의 천년고도를 꼭 보고 싶다고 해 이뤄진 행사였죠. 당시 필자는 통일부 출입기자를 대표해 김기남의 경주 1박 2일을 가까이서 취재 했습니다. 
 경주에서 으뜸가는 한정식 집에서 진수성찬을 먹고 거나하게 반주를 걸친 일행은 밤 11시경부터 신라시대 연못인 안압지(雁鴨池)와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인 국보 제31호 첨성대, 고분인 천마총(天馬塚) 등을 둘러봤습니다. 북한 최고위급 손님을 안내한 사람은 국보급 해설가 유홍준 문화재 청장이었습니다. 
 북한 사람들을 맞은 유 청장은 확성기를 뒤로 맨 뒤 특유의 입담으로 경주의 비밀을 구수하게 풀어 냈습니다. 역시 분위기를 잡는데는 노래가 최고였습니다. 유 청장은 ‘신라의 달밤’을 선창했고 김기남도 흥에 겨웠는지 노래를 흥엉 거리면서 신라고도의 멋에 한껏 빠져 들었습니다. 정동영-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정세현 전 통일부 장관도 신라의 이야기 속에서 밤이 깊어가는 줄 모르고 놀았습니다. 취재가 목적인 필자는 김기남 등에게 이런저런 소감을 물었고 김기남은 “경주 참관에 300% 만족한다”며 흡족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특히 불국사를 비롯한 신라 유적을 보면서 조상의 슬기로움을 다시 느꼈다. 자는 시간을 조금 줄였을 뿐인데 많은 것을 보고 배웠다”고 즐거워했습니다. 경주 김씨로 알려진 김기남은 일행을 알아보고 악수를 청한 여성들에겐 “고우십니다. 천년 전 신라 미인들이 부활한 것 같습니다”라고 답례하기도 했습니다.
 17일 새벽에는 석굴암에 올랐습니다. 석굴암 석불은 보존을 위해 일반인의 근접 관광을 허용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날 석굴암측은 김기남 일행을 위해 유리문을 열어 가까이서 신라의 신비를 볼 수 있게 해줬습니다. 졸지에 필자도 석굴암 부처님의 인자한 숨결을 가까이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김기남 비서는 수많은 북한 인사들을 취재했던 필자에게 작은 감동을 안겨주고 떠났습니다. 좀 웃기는 이야기 일지 모르지만 북한을 대표해 나온 사람들은 대부분 매너가 경직돼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남북장관급 회담 북측 대표단장을 맡았던 전금철이 그랬고 권호웅이 그랬고 심지어는 인도적 현안을 다루는 적십자 회담에 대표로 나왔던 장재언 최성익도 마차가지였습니다. 하지만 김기남은 좀 다른 느낌을 줬습니다. 서울 일정을 모두 마치고 북한으로 떠나기 위해 호텔을 나서던 김기남은 일부러 한국기자 대표를 찾았습니다. 김기남은 “서울에 머무는 동안 극진한 환대를 해 준 남측 주민들에게 감사 드립니다. 특히 많은 기자분들이 질문을 했는데 일일이 답하지 못한 부분에 대해 사과 드립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차에 오를 때도 기자의 손을 꼭 쥐면서 다음 번 행사 때 만날 때까지 건강하시라는 당부의 말도 잊지 않았습니다. 
 한없이 인자하기만해 보였던 김기남은 이제 85세를 넘기고 있습니다. 김정일 사망 후에도 여전히 김정은의 곁을 지키고 있더군요. 다시 활발해진 남북관계의 현장에서 김기남을 볼 수 있는 날이 올까요.<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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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 유홍준 전 문화재청장이 북한노동당 비서와 ‘신라의 달밤’을?

  1. yh says:

    인상적이네요.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남북이 더 가까워지고, 기자분께서 다시 김기남씨를 만나는 날이 오면 좋겠어요.

  2. fqngegu s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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