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군통제사 이순신장군.

 

16C 조선이 낳은 위대한 해군제독 이순신장군!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한국인들은 충무공의 어록을 자주인용
한다.임진왜란이란 사상 초유의 7년 국란을 당한 조선국은 임금자질이라곤 조금도 없는 선조와 국운이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도
당파싸움에 여념 없어 당쟁으로 날을 지새는 조정대신들 모습이 오늘날 정치현실을 보는것 같아 당시 역사현장에 있었던 중요한 인물들을 복원하여
보는것도 조국을 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하는 한 방법은 아닐까?

어리석은 소견에서 수군통제사 이순신장군과 임진왜란 7년을 재조명해 보기로 한다. 사이코 패스의
임금선조와 왜란대비10만 양병설을 주장한 유성룡. 조선통신사 사절단 부사로 일본에 건너가 1년을 체류하며 조선 침략전쟁 준비를 보았을 터에도
국란 위급함과는 정반대의 보고를 조정에 올려 왜국의 침략 방어준비마저 소홀케 한 동인 김성일. 아마추어 수군통제사 원균. 안하 무인 명나라 장군
진린. 등의 인간 됨됨이와 국가 전란시 조선조정의 대처를 살피며 수군통제사 이순신장군의 위대한 업적을 기리고자 하는
것이다.이순신.(1545~1598)자는 여해 을사년(음)3.8일 인종1년 어머니 초계변씨.아버지는 정으로 서울 건천동 덕수이씨
사형제중 셋째로 태어났다. 임진왜란 발발직전 이순신을 천거하여 전라좌수사로 임명해 조선을 왜적의 침략에서 구한
재상유성룡(1542-1607)과는 3살 터로 어렸을 때 순신과 한동네서 자랐다. 유성룡은 이순신에게 일본의 간사함을 말하고 경계를 늦추지 말것을
주문했다.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에는 조선백성들은 열에 여덜,아홉은 비겁하다 기록했다.용감한 사람이 간혹 있다고는 했으나 거의다
비겁자로 본것은 이순신장군이 조선백성의 성품을 제대로 본 것이다. 비겁하다는 것은 용기없다는 말이며 판단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뜻이 된다.한국인은 판단력이 없어 잘속고 사기잘 당하는 기질로 무엇이 바른 것이지 몰라 갈팡질팡 하는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옛부터 그랬다는
것을 난중일기에서 말한다. 좌파 정권10년 동안 좌파 향우회 조직의 감시와 탄압을 받으며 한국인의 속성?이 무엇인지 알 수없는
회의적 생각이 든 것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이순신은 그런 조선백성을 불쌍히 여겼다.자비라는 박애정신으로 인류를 한차원 높은 곳으로
이끈 세기의 현자.성현들과 조금도 다름없는 고결한 품성을 가졌던 것이다. 인류를 좋은 방향으로 이끈 인물들은 존경 받아야 하며 조국을 배반한
반역자는 척결의 대상이 되어야 비로서 나라가 바로 서는바 난중일기를 보며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순신 장군의 인품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역사를 통해 배우는 것은 악인이 득세하여 아무도 바른소리하는 사람이 나타나지 않을 때 그 나라의 종말이란
것이다.순신이 어렸을 때 가세가 기울어 충남아산 지금 현충사자리로 이사했다.21세에 보성군수지낸 방진의 딸과 혼인, 22세부터
사서오경과 병법서를 읽고 무예를 연마했다.문무겸전하나 시운을 얻지못해 그 당시로는 좀 늦은 나이인 32세로 무과에 4등으로
급제했다.이순신은 헛소문과 적의 간계를 본능적으로 간파하는 능력을 갖이고 있었다. 일상생활에서는 명상과 사색으로 고독하게 지냈으며
연결사고하는 능력과 통찰력이 대단한 천재였다. 이순신장군이야 말로 어느시대 어떤분야,에서도 성공할 열성과 자질이 있는 인물이었다.
이순신은 왜놈은 간사해 그 말을 믿을 수 없다고 난중일기에 여러번 기술했다. 이순신은 활을 자주연습하여 활 솜씨가 명궁이었다.
난중일기에 오열. 몸살이 자주와 병고에 시달리니 나이40 넘어 무예를 과하게 단련하면 안쓰는 근육을 건드려 몸이 아플 수밖에 없었다.
해전에서 활의 역할은 대단히 중요했다. 왜군 조총거리는50M.조선수군 활 유효사정 거리는 70M, 조선수군의 대포
사정거리는400M다. 조총보다 해전에서는 활이 더 위력 있어 부하들과 혹은혼자 시간나는 데로, 거의 매일 연습했다.안하무인 명나라
장군진린도 무장의 예와 전투력으로 승복시켰다.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진린과 서로 돕고 합심하여 불리한 여건에서 왜선을 격파하여
대승리로 이끌었으니 세계해전사에 유일무일한 일이다.당시 남해 쪽은 산림이 울창하여 노루와 사슴이 많았고 물고기도 많이 잡혔다.
특히 청어가 많이 잡혔다. 조정에서 군량미, 보급품이 오질않아 조선수군은 농민이었으니 군사들이 농사짓고 고기잡아 자급자족했다.
[난중일기]AD1595. 나라의 정세가 아침이슬 처럼 위태로울 때 정책을 결정하는 기둥같은 인재는 없고 나라를 바로세울 주추돌
같은 인물이 없다. 을미년 7월초.이순신의 난중일기에 밤에 함선이동을“달빛을 타고 갔다!”라고 표현했다.남해바다 만월의 달이
휘엉청 뜬밤, 잔잔한 파도위를 군선을 타고 바닷물을 헤치고 나가면 정말 달빛을 타고 가는것 같았을 것이다.이순신의 정서와 문장에 새삼 감탄 할
수밖에 없다. 당시 배로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에 항해 할 수없었다. 이순신가문에서 후세에 걸출한 인재가 많이 배출됐고 역대 임금과 황후제삿날은
쉬는 날이었고 제삿날에는 고기를 먹지 않았다. 동서양 막론하여 수많은 위인과 영웅들을 역사 속에서 보았으나 조선시대 어려운 악조건서 이런걸출한
인물,위대한 영웅의 탄생은 이는진정 우리의 복이요! 행운이다.영남우수사 이억기.(1561-1597)순신의 수하 용감한
장수.(칠천량 해전전사)AD.1596.2.30. 영남우수사 이억기의 마음가짐이 흩으러 진것을 보고 우수사수하들을 곤장으로 치리한뒤 3일 후
사람을 보내 미안하다 전하여 부하장군의 마음을 풀어줬다. 5일후 우수사이억기에게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설명하자 이억기는 자세를 가다듬고 마음으로
승복했다. 임진왜란의 원인과 배경을 살피면AD.1590 일본의 장수 도요토미 히데요시(풍신수길1536-1598년)가 나이 55세에
일본 최초 자국 통일을 이룩했다. 2년뒤1592년(선조25년)명나라 정벌을 명분으로
내세워 조선을 침공, 임진왜란을 일으켰다.
당시 일본측 사정은 전국 시대의 내전에서 통일 이룩하나 경제 공황이었다. 평시도 화산으로 생성된 섬나라 일본국토는
농경사회로의 어려움이 많았던 터에 백년 내전으로 더욱 황폐해져 민간의 생활은 말이 아니었다. 내전서 살아 돌아온 수십만의 무사들은 일본
전국을 휩쓸고 다녔고. 무사계급도 기근으로 굶어 죽는 사태가 비일비재했다. 그 당시 민간에선 나이들어 노동력이 없어진
노인은 후손이 산속에 갔다 버리는 풍습이 있었을 정도다.식사로 조밥에 메실 장아찌 정도를 먹었다. 당시
일본인은 제대로 먹지 못해 발육이 정지했다. 서남해로 노략질 오는 왜구 왜자는 작은 왜자로 조선인보다 평균 키가20~30CM작았다.
그러나 무사도가 창궐해 창. 검술은 숙련되고 무사 계급이 되는 것만이 출세의
통로었다. 포르투갈서 조총이란 신무기가
들어와 그 사용법을 익혀 전쟁에 활용하자 국력 크기와 상관없이 명나라도 정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다. 당시 명나라 황제는 제13대
신종이다.당시 조선은 14대 임금 선조로. 덕흥 대원군 3째아들이었다. 서출 계통의 혈통인 후궁 자식이 낳은 아들로
적통을 이은 첫번째 임금이다. 도량이 좁고 편협하여 국정을 원칙에 의해 처리하지 않고 감정에 따라 결정, 통치자 자질이 없는
임금이었다. 강직하고 청렴한 성품의 이순신과는 맞지않아 당파 싸움질하는 소인배들의 중상과 모략을 끊임없이 받아 그들의 참소에
귀 기울인 선조로 인해 우리 민족사상 가장 위대한 수군제독을 힘들게 했다.1587년 규슈정벌에 성공한 히데요시는 내전으로 단련된
수십만의 군사를 1590 쓰시마로 집결시킨다. 쓰시마는(대마도)한반도와 일본 규슈사이의 바다에 있는 섬. 6개 유인도. 70개의 무인도로
이루어져 있다. 자국내 혼란을 외부로 발산하지 않으면 해결할 수 없었던 왜의 사정이 조선을 침략하여 임진왜란을 일으킨
원인과 배경이다. 국가는 기강이 허물어 지면 망하기 때문이다. 왜국은 명을 칠테니 길을 빌려달라 조선에 사신을 보냈다.
조선 조정은 동인과 서인의 당파 싸움으로 정신없는 중에 서인 황윤길을 정사로 동인 김성일을 부사로 통신사를 일본에 보냈다.
일본서 1년 만에 돌아온 사절단부사 동인 김성일은 장차 조선이 당할 엄청난 재난은 생각지 않고 당쟁 시각에서 사실과 다른
거짓 보고를 조정에 제출, 조선이 아무 방비없이 임진왜란을 겪게 했다. 다행이 천운으로 임진왜란 14개월 전 재상유성룡의 천거로 이순신은 정3품 전라좌수사로 임명됐다. 부임즉시 왜의
침략을 예상해 조선수군의 주력함 판옥선을 건조했고 군관나대용을 시켜
거북선을 만들어 왜의 침략에 대비했다. 거북선은 문헌에 고려 때 부터 있었다하나 인재란 없는 것을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것 중에 아무도 관심 두지 않는 것에 창안하여 국가 백년 대계 초석을 세우는 것이다.거북선:
거북선은 판옥선에 한층
더 얹어 지붕 역할하는 뚜껑을 만들었다. 앞엔 용두를 달아 아가리 속에 대포를 장착하고 등에 쇠못을 꼽아 크기는 판옥선과 같았다(어떤
문헌은 거북선은 길이 35.M 너비10.6M. 높이6,6M 노의수각8~10개 돛2개 승원110~`130-명 기록). 상갑판
밑 중 간판에 좌우 각6문의 대표를 설치. 정원160명에 100명이 노젖는 격군 24명이 포수.10명이 화포장.18명이 활쏘는 사수다.
거북선은 3층 선으로 왜적이 부산포 도착 이틀 전에 완성됐다. 2개의 돛대는 세웠다 눕혔다 했으며 장거리 항해시 순풍 때는
돛대를 사용하는 범선이나 전투시는 돛을 접고 격군이 노를 젓는 켈리선이다. 당시 조선은 의무 병역제로 노젓은 격군을 일이 힘들고
봉급은 없어 툭하면 도망쳤다 잡히면 본보기로 효수됐다. 거북선은 돌격선으로 해전 초기에 적의 선단 복판에 침투하여 왜선과
충돌, 격침 시키고 각종 대포를 발사 기선을 제압 아군의 사기를 북돋아 해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판옥선과 거북선은 소나무
통나무 골조로 두께 13CM판재로 건조돼 나무 홈을파 끼워 맞추기식 공법을 사용하여 나무가 물에 젖어 팽창하면 더욱 단단히 결합됐다. 수군
선단 맨 앞서 좌충우돌로 적선을 돌진, 파괴하는 돌격선 역활을 했다. 일본전함 아다케부네(안택선).세케부네. 고바야 는 격군이
없고 대형전함 아다케 부네는 전투원만 300명의 주력 전함이다. 삼나무두께 9CM판재로 만들어 조선판옥선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하고 간판 높이도 낮아 왜병들이 조선주력함 판옥선에 기어오르지 못했다. 왜선은 병력을 수송하는 수송선과 연락선이 주임무로
만들어져 돛으로 항해하는 범선이었다.범선이 해전을 치르자면 풍상의 위치를 점해야 했다. 풍상의 위치란 배의 돛 뒤서
바람을 받는 위치를 말한다. 풍하의 위치에 서게되면 돛의 정면으로 바람을 받아 전진할 수없어 공격의 적당한 시기를 얻지못해 범선 해전은
풍상의 위치를 점하는 쪽이 승리 확율 30% 을 더 잡았다. 그 만치 풍상의 위치는 중요했다. 그러나 조선수군 주력함은
배중창에서 격군이 노젓는 켈리선이라 배에 동력을 단것이나 마찬가지로 바람에 의지해 움직이는 왜선과는 절대적으로 비교할 수 없어 해전서
유리했다. 전라좌수사는 현 여수시 오동도다. 이순신은 출전에 앞서 철저한 정보수집으로 적의 태세가 완벽하면 승리 할 수있는
장소로 유하여 적을 공격하고 백전백승했다.임진왜란 7년 전쟁은 선조 25년(1592년)임진년4.14일 규슈 나고야 대본영서
왜군 군대는 1~ 16조로 편성하여 병력 28만 6천명. 총대장은 우키다 히데이로 왜란 7년 전쟁이 시작됐다.
1592.3.13 나고야서 출정. 중간기착지 쓰시마로 집결하고 4.13일 아침 6시 쓰시마에서 출발, 오후6시 부산포앞
바다에 도착했다.동래 경상 좌수사 방흥은 왜군의 엄청난 군세에 놀라 조정에 파발마를 띄우고 도망치나 군인으로서 자존심을 잃어
그이듬해 병들어 죽었다. 삼천포수영의 경상우수사 원균은 왜군의 대병력 침입소문에 전선100척. 대포. 군기을 파괴하고 바다에
버려 수군 일만명을 무너지게 하고 판옥선3.4척을 몰아 도망쳤다. 경상우병사 동인김성일은 조정에 보고 하기를 왜구가 적선
400척에 한 배에 수십명씩 타 병력 일만밖에 안 된다고 통신사 부사 때의 허위보고 버릇을 못버려 거짖보고를 조정에 올리고 수하병사들에게
재주껏 알아서 도망치라 이른후 3.4일 뒤 병사들 몰래 도성을 빠져나가 도망쳤다.이순신은 왜군이 부산포에 상륙했다는 첩보를
입수하여 산하 장수들을 좌수영에 소집하고 탈영하다 잡힌 황옥천을 효수한 뒤 참모회의를 열었다. 녹도만호 정운은“적군을
치는데 전라도. 경상도가 어디 이느냐 !”일갈. 전라 좌수영 수군의 참전을 주장했다. 이순신은 첩보의 중요성을 아는
장군이었다. 즉시 염탄꾼을 적진에 보네 적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다.제 1차 출정 1592.5.4일 오전2시
출발.1.옥포해전 5월7일 2.함포 해전. 적진포해전서 왜적 함대를 격파. 왜적의 수급을 베고 승리했다. 이순신은
작전해역의 사정과 적진을 정확히 파악하고 자신이 원하는 곳으로 적을 유하여 철저한 공격으로 왜함을 파괴하는 전략을 썼다
제2차 출정. 당포해전. 사천해전. 당항포 해전에서 승리했다- 거북선이 처음 출동한 율포해전서 적을 섬멸했다. 이순신은
해전중에도 백성을 불쌍히 여겨 쌀과 포목 등을 나눠주고 함선에 태워 후방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임진왜란 3 대첩 하나인 한산해전에서
승리했다. 웅포해전 앞서 경상우도 순찰사 동인 김성일 도망쳤다. 한편 육지에선 이광의 군사 5만은 왜군1.600백을 이끌고
기습공격한 적장 자카야스하루에 의해 패배당해 각지로 흩어졌다.화포장인 이장손이 비격진천뢰를 발명하다. 이순신이 만든
거북선과 함께 임진왜란의 양대 신무기가 됐다. 이여송이 12월25일 명군 4만 2천 명을 이끌고
참전했다.1593.계사년.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비격진천뢰와 조선 군2.300으로 왜군3만 대군을
격파했다.1593.2월 이순신 함대의 제5차 출동1594년 갑오 년 기근으로 백성들의 참상이 극심해 서로가 사이를
잡아먹었단 기록이 나온다. 인육 먹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게 됐다.선조1597.3월 왜군14만 대군으로 증원하여 재침한 것이
정유재란이다.아마추어 수군통제사 경상우수사 원균. 원균은 몸통이 비대해 한끼 식사로 밥 한말과 생선 다섯 묶음에
닭이나 꿩 서.너마리를 먹었다. 배가 무거워 도망도 잘 못했다(조경남의 난증잡록)1594 임진왜란 3년. 선조 27년.3월6일
당항해전 격전의 공을 원균이 가로챘다 .서인 대신들에 뇌물을 보내 이순신을 모함하고 선조는 원균의 참소에 동조했다. 원균의 활 솜씨는 형편
없었다.재목이 못되는 인재는 평상시는 그럭저럭 때우나 전쟁과 같은 국가 위급시는 그 자질이 여실히 들어날 수 밖에 없다.
뇌물로 재상들을 매수한 원균은 재물로 수군 통제사 자리를 차지하나 옆에서 볼 때는 쉽게 보여 바다로 나가기만 하면 승리 할 것
같았던 왜군과의 전투는 아마추어 수군장수 원균으로는 감당키 어려웠다. 이순신이 해전서 연전연승할 때는 그만한 작전,
전투력으로 승리를 점했으나, 원균은 삼군 통제사가 되자 유능한 장수들은 갈아 치우고 맹종하는 부하로 채워 주색 잡기로 하세월 보내, 이순신과는
정 반대의 치세로 파멸했다. 삼군 통제사 직분을 맡아 4개월이 채 지나지 않아 조선 수군 함대를 전멸시키고 자신도 왜병에 목베임 당해 죽었다.
이순신 옆에 가만 있었으면 그냥 왜란진압 일등 공신으로 남았을 터인데 헛된 공명심에 임진 왜란사를 보는 후세들로 하여금 이순신의
위대함에 비한 정반대 명성으로 만고 역적 원균으로 기억되게 했다. 출세 한다고 다가 아니라 실력 부족으로 국난해결의 열쇠를
열지 못하면 아니함만 못한 것이다. 명나라서 불로 적을 공격하는 소이탄 1.530개를 보냈는데 원균이 흉계를 꾸며 독차지했다.2차 당항포
해전에서 원균은 언어를 제어 못하고 함부로 무리한 말을 했다. 원균이 서리의 처를 간통하려 했으나 그 처가 악을 써 불발에 그
쳤다는 소문이 수군들 사이에 퍼졌다. 권율 도원수에게 원균이 전투거부 항명으로 곤장을 맞고 칠천량 해전에서 패해 도망치다
왜병6.7인에 포위 당해 칼에 맞고 죽었다. 칠천량 해전서 군선256척과 수천명의 조선수군을 죽음에 몰아 넣었다. 원균의
모함에 걸려 의금부에 갇혔다 방면된 이순신이 권율장군 밑에서 백의종군했다. 도 수군 통제사로 임명된 원군이 칠천량 전투에서
대패해 선조는 이순신에게 다시 삼도 수군 통제사로 재임명했다. 그 첫 해전이 명량 해전이다. 원군의 패전으로 조선 수군은 거의 괴멸되다 시피되어
남은 배가 판옥선 한척과 중선11척. 어선 한척이 조선수군의 전 함대였다.선조.1552-1608 조선 제 14대
임금.중종의 후궁 창빈 이씨의 아들 덕흥부원군의 셋째로 1567년 명종이 후사 없이 죽자 후궁의 소생으로 첫 번째 임금이 됐다.
군주자질이 안되는 선조는 국정을 깽판치는 치세로 보내다 말년 임종 뒤에 독살설이 있는 것으로 보아 제명에 못죽은 것으로
보인다.의병장 곽재우는 벼슬을 사양 한다고 귀양 보낸 선조의 행적은 공신선정 과정도 일괄성이 없어 선무공신 무관18명.
문관 86명. 곽 재우(1552~1617).고경명 김천일 김덕룡. 등 의병장들의 빛나는 전공들은 다빼고 반면 내시24명이 피난길에 동행했다 하여
공신에 넣었다. 선조는“원균의 패전은 하늘이 그렇게 만든 것이라”비호하며 조선수군을 괴멸시킨 원균에게 1등 공신을
하사했다. 정통성이 부족한 임금 선조는 비겁한 자만이 자기의 경쟁 상대자가 될 수 없다 판단했던 것 같았다.(1597
유성룡의 정비록)명량해전 승리의 첩보가 조정에 날아들자 선조가 “이순신은 사소한 적을 잡은데 불과하다. 자신의 직무를 이행했을뿐 큰공을 세운
것은 아니다 며 이순신에게 벼슬을 올려주지 않았다.다른 방법으로 상을 주는 것을 강구하랴.말했다. 선조는 상식을 무시한 이상성격의
소유자로 이순신이 노량 해전서 죽기 전까지 수많은 해전에서 승리하고 3 번이나 적탄을 맞고 분투 했으나 선조는“이 순신을 반드시 죽여 없애야
하다”며 공로가 클수록 용납하질 못했다. 인재 확보를 위해 조정의 허락을 받고 과거를 보는등. 이순신의 치적은 한이
없었다. 광해군(1575년-1641)은 왜란 중에 지방을 돌며 군대를 모집하는등 구국의 공로가 많았으나 선조의 업보를 받았다 밖에
볼 수 없어 광해군은 조선제15대왕으로 등극하나 인조반정으로 실각하여 귀양가 죽었다. 옥포해전1592. 5월7일 사천해전
1592-5.29 당포해전1592.6.1 당항 포 해전1592년6.5 을포해전1592.6.7일 한산도 해전. 이 모든 해전에서 이순신은
왜병선단을 격파하고 승리했다.1592.7.5 한산도해전. 헐버트(hul bevt. he)는 이 해전은 조선의 살라미스
해전이다. 라고 평했다. 살라미스는 그리스만 서쪽 섬으로 기원전480년 그리스 해군이 페르시아 해군을 극적으로 격파한 전설적 해전이다.
세계의 많은 해군사관 학교에서 세계4대 해전으로 살라미스 해전. 칼레 해전. 드라팔가 해전. 한산도 해전을 꼽았다.
하루 뒤 이순신의 조선 수군은 안골포해전. 부산포 해전에서 승리했다.1596년 10.12.30 이순신 체포하다.
1597년 1.1일~ 3.30일까지 원균의 모함으로 하옥되고 4월에 사면되다 그 동안 이순신의 처리 문제로 어전회의가 7차나
열렸다.7.21일 칠천량 해전에서 원균이 대패하고 백의 종군하던 이순신은 삼군 통제사로 재임명되다.
1597.9월16일 명량해전.9월15일 조수를 타고 해남군 문내면 우수영으로 진을 옮겨 전라우수사 김
억추에게 수중철색을 치게했다. 울돌목은 다른 말로 명량이다.우수영쪽 해안과 진도해안 양쪽 서.남해안 전체에서 물살이
가장센(유속10노트)좁은(폭300메타)해협에 비스듬히 수중철색을 걸어 왜적들의 배가 서로 부딪쳐 깨지도록 조류를 이용한 전략을 세웠다.
좁고 빠른 유속의 흐름 밑에 쇠줄(수중 막개장치)을 설치 왜선들이 걸려 서로 부딪쳐 침몰했다. 풀어놓은
염탐선을 통해 왜선들이 공격해온다는 정보를 입수하여 대해전이 벌어질 전 날밤 수군장병들을 모아놓고 이순신은“병법에 이르기를 전쟁에 임해 살고자
하면 죽고 죽을 각오를 하고 싸우면 반드시 산다”는 훈시로 군령을 세우며 내일의 전투에서 유감없이 싸울 것을
명령했다. 왜군133척이 명량 앞 바다 울돌목에 쳐들어오자 이순신은 조선수군13척을 이끌고 해전에 임했다. 명량해협의 지형과
조류를 사전에 연구하여 왜함선을 향해 죽을 각오로 돌격하니 조선수군 배가 뒤따르질 않았다. 왜적함대의 군세에 비해
조선수군의 병력은 너무나 미약하여 두려움으로 기회만 되면 도망치려고 거리를 두고 있었다. 가장 가까운 거리의 거제현령 안위를
이순신은 초요기(군령 전하는 깃발)로 불러 배위에 서서 소리 높여 거제현령 안위에게“네가 군법에 죽고 싶으냐! 여기서 싸우지 않고 도망친다고
살것 같으냐”질타하며 뒤따라 도착한 중군장 김응한 에도 그리했다.거제현령 안위와 중군장 김응한이 죽을 각오로 왜선을 향해
돌격하자 왜군 사령선과 적선두척서 왜병들이 개미떼처럼 두 배로 달라붙었다. 이순신의 판옥선이 다가가 대포와 화살을 쏘며 왜병들을
사살하고 그들을 구했다. 곧이어 녹도 만호 송여립과 평산도 대장 정응두가 달려와 전선에 힘을 합치니 조선수군들이 사기 백배하여 전력을 다해
용감히 싸웠다.적장 마다시가 이순신 장군의 화살을 맞고 바다에 빠지니 갈고리로 걸어 올려 목을베 돛대에 메달자 왜병들의
사기가 저하됐다. 왜선들은 수없이 파괴되고 적병들은 물에 빠져죽어 패색이 짙어지자 나머지 왜선은 도망쳤다. 명량대첩은 13척의
전선으로 왜군의 적함 332척을 쳐부순 세계 해전사상 유래가 없는 작은 병력으로 많은 적군을 쳐부순 위대한 해전사다. 1598년
무술년11.18일~19일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 해전 노량해전.남해 노량앞 바다 겨울철 북서풍 차가운 날씨에 550척의 왜선과 200척의 조. 명 연합군
함선이 마지막으로 도주하는 왜적을 섬멸하고자 해전을 벌렸다.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이순신 장군은 명의 장군 진린과 서로 돕고
도우면서 왜선을 격파 적의 함 선 삼분의 이를 노량해협에 수장시켰다. 이순신 장군은 왜적과의 관음포 격전의 와중에서 손수 북을치며
수군들을 독려하다 날아오는 총알을 겨드랑에 맞고 쓸어 졌다.유언으로“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말라” 맏아들 회와
조카완이 임종을 지켰다. 이순신이란 위대한 조선의 별은 관음포서 떨어지나 공의 구국충정의 혼은 한국인 가슴에 영원하게 살아있다
관음포: 경남 남해군 고현면 차현지 이락사에 이순신장군 사당과 유품이 있다. 천하는 임자가 없고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없다. 권력을 차지하는 데는 수단과 방법이 있을 수 없으나 일단 통치자로 권력을 잡으면 선정을 베푸는 것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가뭄이 극심하여 기우제를 지내면서 죽은 태종은 죽으면서“어떻게 하던지 죽어 비를 내리겠다” 말하고 죽었다, 그 후
태종이 죽은 날엔 어김없이 비가 온다고해 태우 라고들 했다. 위대한 통치자는 국가의 위상을 세우는 것을 목적하나 반역자는 그 반대로
움직였다..임진왜란에서 조선을 구한 구국의 인물들:  서산대사. 사명당. 정문부. 권율. 김천일. 조헌. 김덕룡.
김시민. 송상헌. 곽재우. 김연. 그 외 다수.

                                                                                                                            2008.6.6 현충일 아침.

카테고리 : 기본게시판
태그 : | 댓글 남기기

낙엽.

  낙엽.                               곽 정 부       낙엽이 떨어져 쌓인 도시의 보도를 걷는다.   낙엽은 지난날 푸른 영화를 간직한 채       미련 없이 가지를 떠나, 빛바랜 잎 새로 바람에 날려   도시의 보도 위를 뒹굴다 버려진다.   [...]

More Galleries | 댓글 남기기

오월동주(吳越同舟).

BC 4C 손무의 손자병법 구지
편에 수록되어[원수끼리 한배에 타고 있다]는 뜻인 오월동주(吳越同舟)는 오(吳)나라와 월(越)나라 당시상황이 한반도 오늘의 현실과 비슷해 그
시대를 다시 조명하여 교훈을 삼을 필요가 있다.

 

춘추시대 100여 도시국가 군소제후들이 420여 년간 천하를 놓고
자웅을 결하던 시대에 양자강 하류에 국경을 맞댄 오와 월나라는 견원지간으로 월의 국왕 윤상이 죽자 오국 왕 합려는 월국을 침공했다. 월의
신왕구천은 초나라와 동맹을 맺어 연합군으로 오국과 전투를 벌여 패배시켰다. 그
전투에서 오국 왕 합려는 월 국 병사의 삼지창에 발등을 찍혀 그 상처가 덧나 위독하자 아들 부차에게 원수 갚을 것을 유언하고(BC496)
죽었다.

 

패전한 오나라의 재기를 위해 부차는 편안한 침상을 버리고 장작더미
잠을 자며 복수의 칼을 갈아 3년 만에 당대 최고명장 오자서를 앞 세워 월을 공격, 월나라 수도 근처 회계산서 월왕 구천의 항복강화 사절을
맞는다.

 

전투서 패한 월국 구천의 항복 투항에 오의 장군 오자서의 반대로
구천의 목숨 조차 보존하지 못하게 되자 막대한 양의 금은 보화로 오국 태재(국무총리)백비를 구워삶았다.

 

오왕 부차의 면전에서 능력 있는 간신 태제(국무총리)백비는
주장했다."패장을 살려줘 인의를 베풀면 천하가 승복해 온다는 지론이다. 구천을 살려 두는 것이 오나라 국익에 부합 된다고 부차를 설득했다. 
목숨을 구걸한 구천은 오왕 부차의노비가 되어 오국 마구간 청소부로 7년을 지낸다.

 

재상의 위치에서 뇌물 받는 행위는  용서 받지 못하는 범죄지만,
적국 월나라로 부터 뇌물을 받고 중요 정책을 변경시킨 백비의 다음 수순은 오국을 배반해 반역자의 길을 걷게 되는 것은 불 보듯 빤 한 결말이다.

 

국가의 미래를 위해 죽여야한 자, 죽이지 못하면 결국 놓여난 적의
손에 죽게 되고 국가는 망하게 되는 것이 필연의 이치다. 태재 백비에게 뇌물로
연통의 길을 튼 구천은 오국 노비로 있으면서 어려운 일이 부딪치면 항시 백비에게 청탁하여 곤경을 벗어나나 나중 재기하여 오왕 부차와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제일 먼저 한일은 자신을 수 없이 곤경에서 구해준 간신 백비를 죽이는 일이었다. 이것이 조국 오를 망친 반역자 백비의 최후였다.
인류의 큰 전쟁사에 승자가 패자를 죽일 때와 살릴 경우가 수 없이 나오나
언제나 원측은 있었으니 그 대표적인 사례가.

 

BC 54 로마의 율리우스 카이사르 "갈리아 원정기" 전투기록을
보면 카이사르는 전쟁의 신이다. 케르만 종족과의 8년 정벌 전쟁에서 갈리아 족(게르만족)을 상대로 수백 번의 전투에 백전백승했다.

 

갈리아 종족 레미 족. 세콰이 족. 트레베리 족 벨기에 족.네르비
족. 헬베티 족을 상대로 무릅 꿇렸다.

 

지금의 프랑스. 독일. 벨기에. 스위스. 이베리아반도의 현
스페인이다. 2차 정벌은 영국과 중동의 이집트까지 로마제국의 패권 정벌전쟁이 이어지나 전쟁에 패배하고 항복하는 이민족을 항상 너그럽게 대했다.

 

당시 로마제국의 법령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제국에 반역한 자는 용서가
없었으나 정벌 전쟁에 진 적병과 적장은 관대히 대했다. 그러나 아르베르니아 족장 베르킨 케토릭스만은 예외로
살려주질 않았다.

 

베르킨 케토릭스는 후대 사가들이
로마제국의 압제에서 벗어나 게르만 민족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 영웅으로 재평가하나 로마제국 입장에선 이 갈리아 젊은이가 자신의 종족선동에 영향력
큰 자로 인정돼 전쟁의 신 카이사르도 비록 케토릭스가 항복했다지만 살려두기에는 너무도 위험하여 로마로 압송. 사형시켰다.

 

오와의 전쟁에서 패해 속국이 된 월은 문신 문종에게 행정이 맡겨지고
참모 범여와 함께 구천은 7년을 오나라 노비로 갖은 고생을 다했다. 나중 중국 대표적인 미녀 서시를 찾아내 부차에게 바쳐 충성을 인정 받아 백비
도움으로 조국으로 돌아온 구천은 하루한번 쓸개를 핥으며 전쟁준비를 강행하여 은밀히 오나라 침공을 준비했다.

 

성군(현명 통치자)과 암군(우둔통치자)의 차이는 가치관의 차이.
오왕 부차는 거만하여 중신들의 간연은 듣지 않고 자신의 견해가 가장 올바르다 생각하여 신하들은 딸랑이 역할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오국 멸망의 가장 큰 원인은 간신 백비의 잘못이라 사가들은 말하나
당시 오왕 부차는 국가의 장래를 내다보는 오자서 보다 매끄럽게 자신의 뜻을 반영하며 수단 방법을 다해 달랑이 노릇하는 얼굴마담의 국무총리가
필요했던 것이다.

 

백비의 경력은 화려해 요즘 말하자면 자격증도 여럿 소지하고 백성들
보기에도 흠 잡을 때가 없는 재사였다. 과거의 승리에 취해 거만이 가득한 부차는 절세 미녀 서시를 맞이하고 꿈 같은 세월을 잠깐 보내다[절세
미녀를 소유한자가 천하의 패자가 돼야 마땅하다]는 야무진 꿈으로 . 중국 천하통일 정복 전쟁의 길을 나선다.

 

상장군 오자서가 만류하나 명품 선호 취향에 눈 멀고 서시의 부추김과
태제 백비의 아첨이 주효하여 우선 가장약국인 초를 공략한 뒤 진나라와 승부를 벌여 천하통일 기반을 닦는다는 이상론을 폈다.

 

국가의 중대한 정책은 다각도로 신중한 검토가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개인적 취향과 환관들의 지지만으로 중요 정책을 결행하는 통치자의 장래는 항상 보장 받을 수 없게 된다.

 

명장 오자서는 배척하고 문신 백비를 대동하여 전장으로 나가는 부차는
자신도 천하영웅 자질이 다분하여 오자서 없이도 잘 할 수 있다는 야무진 자신감에 차있었다. 약소국 초는 손 쉽게 정벌하나 강국 진과의 전투가
여의치 않아 공성기일이 차일피일 미뤄졌다.

 

이 틈을 타 배후의 월나라 구천이 군사를 일으켜 숙원의 오국침공에
나섰다. 수도를 지키던 오국 태자를 죽인 비보에 접하고 정벌전장에서 허겁지겁 수천리 길을 달려온 부차는 패퇴 당하고 3차 오월전투에서 월의
구천은 승리했다.

 

자신의 전철을 밟지 않으려고 구명을 호소하는 부차를
확실히 제거하기로 작정하자 부차는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구천은 전략가 범여를
중용하여 그에게 군사를 맡겨 오와의 전쟁에 승리하나 대장군 범여는 오국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이기자 소리 없이 자취를 감춰 명리에 구애 받지 않는
현자의 모습은 보이니 오나라 백비와는 여러모로 비교과 돼 오와 월의 전쟁은 시작부터 승패가 결정이 났다고 보면 좋은 것이다.

 

사람은 떠날 때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국회의원직도 삼진 제를
만들어 같은 지역구에 세 번 연달아 출마 못하게 법제정이 돼야 하며 3 번을 끝으로 의원직 말고 다른 방면에서 국가에 봉사도록 해야 할 것이다.

 

국회 의원직이 벽에 똥칠하도록 해 먹는 종신직이란 인상을 줘서는
국민에게 좋은 이미지를 주지 못한다.

 

충신 오자서가 오왕 부차에게 총애하는 미녀서시를 내치라고 계속
간연해 미움 받자 간신 백비는 오자서가 외아들을 제나라로 망명시킨 것은 고자질해 이를 빌미로 부차는 오자서를 자살하도록 명했다.

 

부차가 왕자시절 선왕 합려는"선하지도 총명하지도 않은" 부차에게
왕위를 물려주는 것에 영 마음에 내키질 않아 심사숙고 하는 중에 낌새를 눈치 챈 부차가 오자서를 찾아와 통사정하며 부귀영화를 함께 하자는 약속을
내걸어 오자서 도움으로 왕위를 이어 받았으나 아둔한 성품은 끝낸 명장을 죽이고 오국도 망쳤다.

 

부차는 죽으면서 마지막 말이[오자서에게 미안하다는
말이었다]고 사가는 기록했다
.

국가가 과도기라면 충성된 마음 가진 지사들은"악한
자를 돕는 것은 머리 위에 재앙을 쌓는 것과 다름없다"
는 고사를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정치인과 유명인을 대가 없이 도와준다고 나서면 그들은 고마워하지도
않을 뿐더러 도와준다고 설치다 모든 일에는 상대가 있어 그 상대에게 해를 당하는 수가 있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춘추정국시대와 같은 오늘의 현실에 성군을 만나면 국정에 대해 민감한
사안을 약간만 건드려도 즉시 정책에 반영되나 암군의 시대에는 오자서 같은  명장도 국가의 미래를 위해 간연하다 죽임을 당한 고사가 있다는 사실을
필히 알아야 할 것이다.

카테고리 : 기본게시판
태그 : | 댓글 남기기

종북조직원이 된 남해 프랜드.

한반도 남쪽에서 가장 아름다운 풍광을 가지고 있는 한려해상 國立公園. 경상남도 남해. 오래前에 紀行文작가 지인에게서 南海를 소개 받고 그 곳에 여행가 남해섬을 한바퀴 돌아볼 기회가 생겼다.       남해는 南쪽 바다의 신비한 마력이 도처에 산재해 한번 가면 결코 잊지 못 [...]

More Galleries | 댓글 남기기

판초빌라.

모 당의 경선후보 HC을 보면 왠지 멕시코의 산적두목 판초빌라가 연상된다. 둥그런 챙의 넓은 모자를 쓰고 양어깨에 실탄
띠를 X자로 걸친형국이면 영락없이 산적, 혁명아 판초빌라와 필이 맞아 떨어진다. 정확한 용어로는 판초비아지만 그냥 판초빌라라 부르기로 하자. 그가 영의정에 임관
되자 신촌 K 교수는 그의 마스크는 사기꾼 범죄형이라 혹평하여 듣는 이들은 웃고 말았으나 그에 대한 관상평가는 의견을 달리해 볼
수있다.사극에 출연하면 임꺽정이 제격이란 이도 있을지 모르지만 그의턱.귀에는 관운이 있어 어느시대에 태여나도 덕장은 못될지라도 맹장벼슬은 했을것이다. 여기서 관상예기가 나온
것은 그가 그쪽 동네 사람들에게는 보기드믄 파격적인 행동을 하는 개성을 소유했다는데 이유가
있다.그에게서 왜 판초빌라의 impression을 받았을까?
판초빌라가 19살 때 빛대신 누이를 데려 가겠다는 고리대금업자를 쏴죽이고 산속으로 피신해 산적이 되나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여
압제받는 농민을 위해 싸웠다. 정의를 위해 투쟁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적을 쏘아 죽인뒤 십자가 성호를 그었다는 20C
초의 터프한 인간, 도적떼 두목서 혁명아로 변신해 멕시코 독립을 위해 농민의 권익을 위해 투쟁하여 멕시코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전설적인 인물이
판초빌라다.지난 10년 동안 이 나라에는 거짓말을 밥 먹듯이한 철면피들과 안면불사의 깽판으로
날을 지새운 N, 선과 악 두테마에서 골라잡으라면 악의
편에서서 개성적인 연기로 이나라를 골병들게 하고 동포들 등골을 빼먹었다.이런 판국에 판초빌라 같은 터프한 인간이 이나라에는
나타날 수는 없을까? HC
그에게서 인간적인 면목을 본것은 자기 형의 부동산 문제인가 뭔가로 담당공무원을 불러 주먹질을 해댔다는 데에 있다.동교동의 DJ
처럼 향우회를 시켜 왕따를 만들어 자기삶을 포기도록 하는 방식도 아닌, 형의 비리를 감춘다고 생방송에 상대를 비난하여 자살케한 수법도 아닌,한 주먹
날려 상대를 굴복시키는 한국판 판죠빌라 HC. 기고만장한 좌파라면 반대자를 고소 고발하기 보다 한주먹에
때려 눕히는 편이 더인간적인 면모가 아닐까.상대를 피흘리지 않고 허리베는 수법이나, 헌법을 위배
한바 없는데도 좌파를 비평한다고 연금아닌 연금으로 탄압 가하는 이런좌파 정권에 정의검을 빼드는 산적같은 혁명아는 어디
없을까?어느 장기수가 감옥에서 소설을써 베스트셀라
작품을 여러권 냈다 문단에 공헌한 점을 인정 받아 감형 받고 사회로 복귀하자 기자가 인터뷰 하려 그 작가집을 방문했다. 초인종을 누르니 철대문에 작은 구멍이 열리면서 신분확인정차를
마친뒤 문을 열어 주는데 간수
복장 한사람이 나타나 안내하는 집안으로 따라들어가자 겹겹이 몇개의 철문을 통과하고 쇠창살 달린 방에 얼룩무늬 유니폼을 입은 죄수복장 작가와 만나게
됐다는 것이다. “자택을 왜 감옥구조로 했느냐 ?”는 질문에“이런 분위기가 아니면 글을 쓸 수없다”고 대답해 인터뷰
기자는 인간은 환경에 적응하는 동물이다, 라고 말 하는
것을 어느 글에선가 읽었다. 인간뿐 아니라 모든 동식물은 환경이 중요하며 환경이 우선한다. 자유를 억압하며 탄압한 뒤 경제
성장 운운하는 것은 허위며 사기다. 인간은 자유로운 환경에서만 생산의욕이 넘치며 유통과 거래가 늘어 자연스럽게 경제가
살아나는 것이다, 세금폭탄 때려 경제살린 다는 것은 국민 기만하는 이벤트다.방송과 언론 동원하여 국민을 세뇌시켜 노예로 만드는 정치에서, 농민 권익을 위해 투쟁한 판초빌라의 정의감이
필요하다. 한국판 판초빌라가 며칠전 지방시찰갔다 그곳 터주대감인
YS을 찾아보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는 주변의 권고에“그런XX를 뭣하려 찾아보냐!” 했다는 대목에서는 가히 뒤로 자빠질수 밖에
없는 원색적인 표현이 놀라웠다.  지난 과거사를 재생시킨다면 그 터주대감은 어는 편으론 인간 무능력자로도 생각 할수
있다. HC의 개성과 몰상식한 터프함이 빛을 말하는 순간이었다. 말과 행동이 다른 인간들 중에서 선전하는 그가 기회찾아 유랑하는 철새
떼와수단방식 안가리고 살아온 후보 중에서 선택해야 한다면 본능에 충실하고 이중성격 쓰지 않는 판초빌라 같은 그가 차라리 나을 것
같기도하다. 현재로는 그의 진가를 알아주지 않은 깽판에 의해 대권은 물건너간 것으로
보이나. 모든 것을 한방에 끝낸다는 그의 기개가 석양 속에 사라진다고 생각할 때 결코 그렇게 사라지지
말고 혁명아로 소생해 달라 부탁하고 싶다. 산적에서 농민 권익을 위해, 혁명아로 변신한 판죠빌라 처럼 HC
도 정의로운 구국의 터프가이는 될 수 없을까? 사바타와 함께 두명의 전설적인 인물을 갖은 멕시코들은 행복하다. 이땅에 이런 영웅들이 나타나 위기에
찬 조국을 구할 수는 없을까? 멕시코 판초빌라여 영원하라! Adios Amigo 아디오스 아미고 !

 

 

카테고리 : 기본게시판
태그 : , | 댓글 남기기

우파정당은 왜 없나?

지난 좌파정권10년은 자유를 사랑하는 우익지사들이 빨갱이 정권을 상대로 극력 저항하는 시대였다. 무명의 보통 사람들 조차 생명을 아끼지 않고 저항하다 저들 탄압에 어떤 이는 사고를 가장하여 살해되고 어떤이는 감옥을 제집드나드시 드나들었으나 나의 경 운 때론 생명의 위협도 받아 감시 당하며 홍어 특유의 [...]

More Galleries | 댓글 남기기

동로마 제국의 멸망 (Constantinople of collapse)

서기1453. 5.29일 .천년의 영화를 누린 비잔티 제국(콘스탄티노플)의 문명이 야만인 투르크 족(오스만 터키)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한 제국이 멸망을 초래하게 까지는 외부의 적과 내부의 적들이 작당하여 나라를 망친 것은 어느 시대나 비슷비슷 했다.   콘스탄티노플이 멸망 할 때는 무슨 일이 있어나 ? 종말이 가까우면 [...]

More Galleries | 댓글 남기기

중국의 패권주의가 세계경제에 끼친 악영향.

미국의 금융大亂에 세계가 요동치고 있다. 거기다 중국의 멜라닌 공포까지 가담해 지구상의 모든 나라들은 지금 제정신이 아니다. 이런 와중에 부시는 北韓을 테러지원국서 해제했다.

 

전 세계를 패닉으로 몰아넣은 두 사건의 동기는 무엇인가? 금융대란 根源地 미국은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초강대국이며 멜라닌 식품파동을 일으킨 중국 역시 世界 5대 강국이다.

 

미국의 금융대란은 비우량 住宅割賦모기지가 시발이고 중국은 식품에 첨가한 멜라닌이 주범으로 이 전혀 다른 世紀的인 두 사건의 파장은 묘하게도 하나의 共通點을 있다. 인간을 믿지 못하는 불신과 불안조성을 한다는 점에 똑 같다.

 

不信과 불안은 사람의 이성. 가치관을 흔들어 판단력을 마비시킨다.

인간을 극도로 불신하게 만드는 이 두 사건의 보이지 않은 쪽의 또 다른 동기가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 일까?

 

세계최강의 미국은 지금 대통령 선거 기간이다. 경제공황으로 世界를 몰고 가는 금융대란과 인류의 식탁을 오염시킨 멜라닌 파동이 미국大통령후보 두 사람 공화당 존 메 케인. 민주당 버락 오바마를 연결하는 것은 우리의 지난 1997년 대선. 2002년 대선을 리바이벌하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비록 여러 곳이 업그레이드 된 감은 있지만.

 

1997년 한국 대선直前 갑자기IMF 라는 국가적 經濟 混亂이 닥쳤다. 이로서 사상의 不透明성을 의심받던 후보가 대통령이 됐다. 2002년 대선에서는 미 장갑차 사고를 내세운 언론방송 여론조작에 통치자자질이 부족한 후보가 당선 됐다.

 

이 좌파인물들은 한국에서 자유민주주의를 패퇴시키고 한국경제를 현 상태로 퇴보시켰다. 친북정책을 강행했고 공산주의 大國 중국을 宗主國으로 삼았다.

 

한반도에서 벌어진 지난 10년간의 여러 의문스런 사건들은 중국의 覇權主義를 충분히 설명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며 이 사건들은 共産주의 확대정책에서 나온 중국의 전략 싱크탱크에서 나온 것으로 짐작한다.

 

작년 西海 상선충돌 사건이나 태안반도 기름 유출사건 등이 그 端的인 예다. 모두가 중국선적들이 고의로 해상충돌 하는 사고를 냈다. 중국의 동북국경 담당 여진역할의 북한을 돕기 위한 남한 길들이 기다.

 

중국 공산패권은 세계와 함께 가 아니라 제로 솜 게임을 뜻한다. 금융대란과 멜라닌 공포로 중국 패권주의가 범세계적인 깽판세력을 앞세워 초강대국 미국에 좌파정권 定着을 위한 전략이라면 세계의 未來는 어떻게 될 까?

 

베이징의 나비 한마리가 일으킨 날개 짓이 大機 흐름을 변화시켜 월가에 토네이도를 발생케 한 것과 같지 않을까.

 

중국 공산주의가 전술적으로 내 놓은 一次상품이 한반도의 깽판권력 정착이다. 북한은 이미 屬國 化 됐고 한국은 좌파가 권력의 상당부분을 실질적으로 행사한다.

 

한국의 지난 두 정권을 좌파로 하여 二중隊의 충실한 모습에서 중국은 종주국으로 戰略的인 희열을 느꼈을 공산은 크다.

 

超强大國 미국에 좌파정권을 세운다면 중국과 러시아 공산패권주의 자들 實益은 무엇일까?

 

미국 공화당 대통령후보 존 매케인은 미 해군 전통을 지키는 선과 악에 대한 신념이 확고한 인물이다. 미국을 미국답게 하는 그런 메케인 우파정책에 위기감을 느낀 자들이 범세계적으로 糾合 미 대선서 양편의 힘이 팽팽할 때 한쪽에 약간만 밀어도 승패가 뒤집힐 수 있는 民主主義의 허점을 이용하는 것으로 분석하면 간단하다.

 

민주당 대통령후보 오바마 정책은 左派에 가깝다. 그의 정책에서 자유민주주의 신념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 그의 향후 미국 국정 방향은 알 수 없게 한다.

 

세계의 모든 문제를 안고 있는 纛祭國家와 직접대화를 하겠다는 그의 선거공약은 정치적인 경험부족이라고 생각된다. 만약 그가 당선된 뒤 제3 제국 기치를 들어 유색인종의 지위향상을 내세워 깽판의 길로 간다면 세계는 어떤 방향으로 나가게 될까?

 

깽판은 어떤 것인가? 고대한국 통념으론 판 [뒤집어 업는 것]이다. 현대 언어개념으로도 크게 틀린 해석은 아니다. 기존사회의 흐름을 뒤집는 逆發想 판세를 만든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여기 깽판권력이란 패거리 움직여 객관적 의견은 받아 들릴 여지가 없는 빨갱이 권력을 말한다. 公私를 막론하여 詐欺와 훔치는 것으로 생존수단을 삼는 것을 지적한다.

 

1.여론조작은 기본이다. 언론방송을 買收해 자기편으로 심어 거짓으로 사람들을 기만한다. 여론조작은 開票造作으로 이어진다. 그러면서 이들 주장은 새로운 변화 .平和 .대화다.

 

"끼리"의 단골 메뉴다. 그런 다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차기권력을 만들어 부정 비리, 권력의 치부를 감추기 위해 후임을 준비한다.

 

부시정권 對北政策은 깽판세력 로비에 걸려 힘 있는 나라의 정치지도자가 명예를 物質로 바꾼 전형적인 케이스다. 공산 패권주의 이중 대에 코 꿰인 상태서 줄 것 다주면서 끌려 다녀 북한 핵보유를 인정하는 발판을 마련해 줬다.

 

정상적인 미국 정치상황에선 오바마 당선 가능성은 稀薄하다. 그런 그가 미국 經濟大亂에 힘입어 당선 우세가 된 것은 한국의1997년IMF와 같은 경제混亂에 중국 패권주의 확대전략에 힘입은 거나 동일한 것이다.

 

미국인들도 오바마의 정치적 신념이 무엇이지 모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부시정권 실정과 무능으로 변화해야 된다는 그의 주장은 먹히고 있다. 어디서 오는지 모르는 풍부한 선거자금도 중요 변수다. 부통령을 조지프 바이튼 상원의원(65세 6선)이란 노련한 정치인 러닝메이트로 지명은 自身은 미국 국정을 책임질 충분한 준비부족을 말해주는 거나 같다.

 

미국 흑인은 긴 세월 동안 백인들에게 당한 고통을 잠재의식 속에 감추고 있다. 이들을 깽판세력이 적당히 부추기면 한국의 라도 화 좀비 화 시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미국 같은 선진사회에 당치 않은 소리라 말할지 모르지만 통일교 같은 사교가 미국에서 뿌리내리고 급성장한 걸 봐서 모든 미국인이 다 현명한 것은 아니다.

 

오마하의 정치관록(46)으로 북한과 직접대화로 핵문제를 풀어 나간다는 소리도 믿기지 않는 주장이다. 우리가 걱정하는 문제가 그렇지 않다는 정치적 신념을 오바마에 겐 찾을 수 없다. 거기에다 러시아 같은 공산 패권주의 국가들이 적극 가담해 나쁜 전략을 제공하게 된다면 인류는 또다시 커다란 함정에 빠져 허우적거리게 될 것이다.

 

 

 

카테고리 : 기본게시판
태그 : | 댓글 남기기

청계천과 운하이야기.

(1)청계천의 변천사는 곧 우리의 역사며 문화다. 6.25 전쟁이 끝난 수도 서울의 폐허 속에 가난한 서민들의 삶과 복구하며 성장하는 변화 과정의 시대를 청계천 변천사가 그대로 보여 준다.   1950년대 후반의 청계천은 지금의 동대문시장 주차장 자리가 기동차 종점으로 사람들 왕래가 가장 빈번했다. [...]

More Galleries | 댓글 4개

트로이의 목마.

인류의 역사는 먹고 살 수 없는 곳에서 먹고 살 수 있는 곳으로의 이동이라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유목시대에서 농경사회를 거쳐 상공무역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동의 다른 방법으로 이웃나라를 침략해 노략질과 약탈로 생활환경을 개선하려는 부류들에 의해 세계는 피 흘리는 전쟁이 끝이질 않았다. 기원전 12세기경 지중해 연안의 군소 도시국가들이 자리다툼하던 서양 문명의 초기에 에게해 동쪽의 트로이가 지리적 요건과 상공업의 발달로 번창하여 부유해지자 바다건너의 호전적인 그리스국가들이 침략과 약탈의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트로이의 왕 프리아모스는 이런 국외정세를 의식해 왕자 파리스와 조카 아이네아스을 사절단으로 보내 그리스의 여러 국가로부터 외교로 평화를 수립하려 했다.평화란 외교나 돈으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군대의 힘으로 지켜진다는 사실을 트로이 왕은 몰랐던 것이다.그리스에서 가장 강한 미케네의 왕 아가메논의 영토에 사절단 파리스왕자 일행이 도착하고 푸짐한 선물로 우선은 환영을 받는다.
아가메논 왕의 궁전에서 열린 트로이 사절단 환영만찬에서 파리스 왕자는 그리스의 절세 미녀헬레네를 만나 첫눈에 사랑에 빠진다. 그녀는 아가멤논 왕의 동생 메넬라오스의 왕비였고 남편은 마침 국외로 출장중이였다.트로이의 외교사절단이 목적을 이룰 수 없었던 것은 살찐 돼지를 먹고싶은 늑대의 야욕을 품은 그리스 왕들과 평화조약이란 애초 맺어질 수 없는 현실이었다. 아가메논의 궁정에서 지지부진 세월만 보내다 사랑에 눈먼 파리스는 외교 사절의 중요한 임무를 망각하고 헬레네와 함께 야밤 도주해 트로이로 돌아온다.
젊은 왕자의 무분별한 사랑의 행각이 트로이를 멸망시킨 전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트로이 10년 전쟁에서 영웅들의 위대한 전투무용담이 전설로 전해 내려오다 300년 후인 기원전 9세기에 호메로스의 대서사시 일리아드에 수록되나 독일의 고고학자 슈리번이 1871년 트로이 유적 발굴로 역사가 되었다.트로이의 왕자와 헬레네의 사랑의 도피행각은 곧 그리스 전역에 알려지게  되여 응징이라는 대의 명분으로 그리스의 도시국가들이 연합하여 1000척의 함선에 병사들을 태우고 트로이 원정은 시작되었다.에게해의 해변과 트로이 성 사이의 벌판에서 격돌한 수십 번의 전투에서 쌍방 영웅들과 수많은 병사들이 지옥의 땅 하데스 Hades를 밟게 된다. 트로이는 난공불락의 견고한 성채로 둘러져 있고 군민이 일심동체로 저항하여 간단하게 정복될 수 없었다. 전투가 치열해지며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가 그리스의 용사 파트로클로스를 전장에서 죽이는 것을 시작으로 그리스의 영웅 아킬레우스가 헥토르를 결투로 죽이고 전설의 여인국 아마존의 여왕 용맹스런 펜테실리아도 죽인다. 한국의6.25 전란에도 참전한 이디오피아의 왕 멤논도 아킬레우스의 적수가 안 되 전투에서 죽임을 당했다.당대 최고의 전사 아킬레우스는 창술의 명인으로 그와 결투해서 이긴 용사는 없었다. 그러나 불사신의 아킬레우스도 명사수 파리스가 쏜 화살을 발뒤꿈치 힘줄에 맞고 죽는다. 그 후부터 발뒤꿈치에 아킬레우스 건이란 의학용어가 생기게 되였다.전쟁의 장본인 파리스도 전투에서 죽어 오랜 세월 죽고 죽이는 전쟁은 증오와 살육 피의 제전으로 이어졌다.트로이 전쟁 마지막 해에 그리스 군대의 전략가 오디세우스가 꾀를 내여 공병대장 에페이오스를 시켜 속이 빈 커다란 목마를 만들게 한다.재능을 인정받아 임명으로 승승장구 출세한 관료형 책상물림은 최후 승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최근에 우리는 보았다. 한 두 가지 약점에 두 손드는 것은 합방에는 관료형보다 인기몰이형의 인물이 적합하다 여긴 때문이다. 조작의 원천기술을 발휘하는 상대를 만나면 상당한 통찰력이 없으면 백패 할 수박에 없는 것이 관료 형 지도자는 선경지명을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그리스 군대는 퇴각하기 전 몇 번의 전투에서 거짓 패배로 트로이에 승리의 우월감을 심어준 후 속이 빈 목마 속에 정예 병사를 숨겨놓고 진지를 불태운 뒤 함선에 올라 고국으로 돌아하는 시나리오를 결행했다.단 한번의 책략으로 천하대세의 승패를 갈라놓은 일은 역사에 수없이 있었다.그리스 함대가 해안에서 보이질 안차 오랜 전쟁에 시달린 트로이 사람들은 승리의 환성과 함께 성에서 나와 바닷가에 남겨놓은 커다란 목마를 발견하게 된다.
목마에는[이 목마를 전쟁의 신 아테네에 바칩니다] 라고 쓰여 있었다.디모에페스란 트로이 인이 나서 전리품으로 목마를 성안으로 끌고 가자고 주장했다.나라가 망할 때가 되면 어김없이 사리분별과는 반대되는 주장을 내세우는 다혈질의 인간이 나타나는 것이다.목마를 불태우자는 주장도 나왔지만 그리스 군대가 목마와 함께 시논이란 그리스인스파이를 근처 숲 속에 남겨두었었다.오늘날 상대의 측근을 매수. 자기편으로 심고 상대를 지지하는 언론도 조건부 부분적 매수하는 작태는 이미 3200년 전에 적진에 스파이를 보내 교란시키던 전술을 보면 새로운 것도 아니다. 이때 근처 숲 속에 숨어있던 그리스인 시논이 나타난다.
자기는 “그리스 군대가 퇴각하며 함대가 무사히 바다를 건너 귀향하는 제물로 선택한 회생 양이나 도망쳤다”고 거짓말로 둘러댔다. “목마가 거대한 것은 성안으로 끌고 들어 갈 수 없도록 만든 것으로 목마가 성안에 들어가면 그리스 함대는 바다에 침몰한다는 신탁이 있었다”며 트로이 인들의 희망사항을 심리적으로 이용해 교묘히 설득했다.사람들은 자기가 바라는 방향으로 현실을 볼 수밖에 없다는 율리어스 카이사르의 말대로 목마는 성안으로 끌고 들어갔다. 승리의 축제에 트로이 인들은 먹고 마시며 춤추고 노래하다 쓰러져 잠든다.
한밤중에 목마에서 그리스병사들이 나와 트로이 성문을 열어 제처 그리스 군대가 입성하자 일방적인 살육이 벌어 졌다.트로이왕 프리아모스는 아킬레우스 아들 네오프톨레모스의 복수심과 증오에 찬칼에 난자당해 죽고 왕의 손자 6살은 후환을 없애려고 성벽 위에서 내던져 진다.
왕의 두 딸. 폴리제나 공주는 승리의 제물로 신전에서 목 베여지고 언니 카산드라 공주는 노예로 끌려가 그리스에서 죽는다.
모든 트로이 인들은 학살당하고 재물은 약탈당한다. 그러나 승자도 마냥 행복한 것만은 아니었다. 원정에 참가한 장군들은 하나같이 재앙을 당했다.트로이 원정군 사령관인 아가멤논은 전리품을 산같이 배에 싫고 귀향하지만 왕비 클리타임네스트라에게 살해당한다. 트로이 원정 출발당시 연합군이 아우리스항구에 집결하나 항해에 좋은 풍향이 불지 않았다.당시 그리스 군함은 바이킹(서기8세기~11세기)영화에 나오는 병사들이 노를 젓는 겔리 선이 아니라 사각 돛을 펴고 항해하는 범선으로 바람이 불지 않으면 운행이 되지 않았다.겔리선은 항해술이 발달한 해양왕국 카르타고가 기원전 10세기에 조선기술의 발달로 함선으로 만들어 졌다. 100일이 지나도 바람이 불지 않자 사령관 아가메논은 외동딸 이피게네이아를 희생의 제물로 바쳐 항해의 바람을 얻는다. 이때의 딸을 죽인 원한으로 아가메논 왕은 왕비로부터 죽임을 당하고 왕비 역시 자기가 낳은 아들로부터 아비의복수로 살해당한다.트로이의 파괴와 멸망 가운데 아이네아스 왕자만이 가족을 데리고 탈출하여  지중해를 떠돌며 방랑 끝에 훗날 로마건국의 시조가 된다.
승리는 자질과 능력이 우수한 것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자질과 능력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에 있다는 것을 역사는 보여준다.
카테고리 : 기본게시판
태그 : , | 댓글 남기기
페이지 48 의 49« 처음...102030|45|46|47|48|4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