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 초탈자

동아일보 2009년 4월

 

세계적 럭셔리 브랜드들이 공격적인 마케팅을 한 건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한국에서도 2000년대 들어서야 ‘명품 열풍’이 본격적으로
불기 시작했죠. ‘쇼퍼홀릭, ‘신상녀’란 말도 나름 ‘신상(신상품)’인 셈입니다.고백하건대, 저도 한때 쇼퍼홀릭이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유행이 한물간 크리스찬 디오르의 핸드백을 유명 스타들이 들고 다니는 사진을 보면 가슴이 뛰었습니다. 길거리를 걸을 때도,
잠자리에 들 때도 그 가방 생각뿐이었죠. 상상이 잘 안 되는 남자 독자들이라면 골프에 처음 맛들일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다고 보면 됩니다.
패션 잡지를 보면 이것도 사야겠고, 저것도 사야겠다고 머릿속이 분주해졌습니다. 고려시대 문인 이조년이 ‘다정도 병인 양’이라더니, 제게 쇼핑은
일종의 병이었습니다.쇼퍼홀릭에도 단계가 있습니다. 무조건 신상품에 열광하는 게 초보 단계라면, 자기만의 스타일을 갖춰 나가는 게
2단계입니다. 저는 2단계에 들어서는 백화점 할인 행사장에 ‘누워 있는’ 세일 물건들을 하이에나처럼 찾아 다녔습니다. 과거 영화롭게 걸려 있던
그 옷들은 패션의 유효기간을 넘기고 애통하게 대접받고 있었기에 잘 골라내면 스타일을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제 3단계로
접어들었습니다. ‘쇼퍼홀릭’이란 말과 작별해야겠습니다. 3단계는 ‘쇼핑 초탈자’니까요. 이젠 신상품이 나와도, 세일 정보를 접해도
무심해졌습니다. 값싼 물건부터 럭셔리 제품까지 넘쳐나는 요즘엔 패션 세상을 평정할 ‘독보적인’ 히트 제품도 없습니다. 지난해부터 ‘클래식’
바람이 불면서 샤넬 2.55백의 매출이 올라갔지만, 너도나도 들고 다니는 그 가방이 과연 나의 이미지를 얼마나 품격 있게 높여줄지 의문입니다.
뭔가를 샀다는 심리적 효용보다 ‘괜한 돈 썼다’는 죄책감이 더 큽니다.요즘엔 사은행사로 받는 천 장바구니도, 명동 길거리에서 파는
값싼 손 자수 지갑도 다 예뻐 보입니다. 얼마나 내 몸과 정신을 평온하게 해 줄 수 있는지가 쇼핑의 주요 기준이 됐습니다. 실은 트렌드를 버려야
스타일을 얻습니다. 잘 안 신던 구두 여러 켤레를 수선해 신었더니, ‘또박또박’ 구두 소리가 문득 반갑기까지 합니다.국내
패션업계의 ‘쇼퍼홀릭’들은 한결같이 “이젠 내 스타일에 맞는 물건만 신중하게 산다”고 입을 모읍니다. 명품이라면 무조건 사족을 못 쓰던 여성들도
그 브랜드가 자신의 ‘패션 정체성’과 얼마나 잘 맞는지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럭셔리 업계가 이제 공략할 대상은 바로 ‘쇼핑 초탈자’가 아닐까요.
지금까지 승승장구했던 럭셔리 업계가 어쩌면 가장 힘든 도전을 맞게 된 시점인 듯합니다.김선미 산업부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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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델란드 암스테르담 로이드호텔

나는 몇 년 전 크리스마스를 감옥에서 보냈다.

감옥이라니, 이 얼마나 해괴망측한 소리인가.

내가 머문 암스테르담의 로이드 호텔은 1920년대에 지어진 뒤 1940∼1989년 감옥으로 사용됐던 건물이다.

이후 1999년까지 10년간 이 건물은 예술가 건축가 디자이너들을 위한 작업 공간으로 암스테르담 시가 대여했다.

이 건물은 2004년 8월 네덜란드의 세계적인 건축회사인 MVRDV가 호텔로 개축했다. 이 호텔은 116개의 객실 디자인이 모두 달라
‘디자인 호텔’로도 불린다.

10명 이상이 함께 잠을 잘 수 있는 대형 침대가 있는 방, 연주회를 앞둔 음악인이 호텔에 머물며 연습할 수 있도록 방음 시설을 갖추고
그랜드 피아노를 둔 방, 은밀한 로맨스를 위해 침대 바로 옆에 욕조를 둔 방….

호텔 복도는 예전 감옥의 골조를 그대로 남겨 두었다.

객실 크기와 인테리어에 따라 1등급에서 5등급으로 나뉘기 때문에 하루 숙박 요금이 80∼295유로다.

호텔 디자인에 대한 고정관념을 뒤엎는 이 호텔의 고객은 디자인 관련 일을 하고 있는 예술가들.

이 호텔의 모든 방에는 리처드 휴튼, 마르셀 반더스, 헬라 융게리우스 등 네덜란드 유명 디자이너들의 가구 조명 식기가 있다. 희귀한
예술서적도 비치돼 있다.

네덜란드 디자이너들의 작품을 온전히 ‘나만의 세계’로 끌어 들여 느끼고 싶으면 암스테르담의 로이드 호텔로 가보라고 권하고 싶다. 운이
좋으면 그들 중 한 사람과 호텔 식당에서 우연히 마주쳐 아침 식사를 함께할 수도 있다.

 

암스테르담=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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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게이친구

동아일보 2005년 5월.

 

불과 몇 년만 해도 이 기사는 파격이었다.

재미있다, 허구 같다, 쓰레기 같다는 여러 반응이 있었다.

물론 기사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실재하는 논픽션이며,

요 밑의 사진도 그들이 사는 곳에 가서 사진기자가 촬영한 사진이다.

사진 속 인물들은 실제 주인공이다.

여기에 등장하는 게이 ‘기욤’(가명)은 지금도 왕성한 사회활동을 하면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나와도 친하다.

단, 그의 친구 ‘미셸’(가명)은 당시 사귀던 남자와 헤어진 후 다른 남자와 만나고
사귀어 결혼을 했다.

 

 

 

나도 게이 친구가 있었으면….’성 담론이 다양해지는 요즘, 여성들 사이에서 게이 친구 예찬론이 나오고 있다.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하면서 섹스를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게 게이 친구의 장점이다.또 게이 친구는 섬세하고
감성적인 데다 가부장적 가치관에서 벗어나 있어 쿨하다는 주장도 있다.과연 여성과 게이 친구의 실제 관계는 어떨까.10년째 ‘우정’을 쌓는 30대
중반의 동갑내기 여성과 게이 친구를 인터뷰했다. 여성은 이성애자다.이 남성은 친한 이들에게는 성적 취향을 숨기지 않지만, 사회적으로 커밍
아웃하지 않았다.그래서 인터뷰는 여성은 미셸, 남성은 기욤이라는 가명으로 진행됐다.미셸은 자신의 직장과 이름을
공개해도 된다고 했으나 게이 친구가 말렸다.올해 말에 결혼을 앞둔 그녀에게 혹시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
우려해서다.○신체 접촉 없는 정서 교감패션업계에 종사하는 기욤은 패션감각과 외국어 구사력, 세련된
화술을 지니고 있다. 12일 오전 기욤의 14평 아파트를 찾아갔을 때, 미셸은 헤어 드라이어로 머리카락을 말리고 있었다.
미셸은 키가 170cm나 됐다. 기욤은 커피를 내오며 “일찍 인터뷰 온다기에 미셸에게 어젯밤 여기서 자라고 했다”고 말했다.
미셸은 기욤의 집에서 자주 잔다. 그녀는 부모에게 기욤의 집에서 잔다고 문자 메시지를 보낸다고
한다.놀라운 것은 그 사실을 올해 말에 결혼할 미셸의 남자 친구도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녀와 결혼을 앞둔 남자는 처음에는
황당해했으나 기욤을 만난 뒤 두 사람의 우정을 이해했다.게이라 해도 육체적으론 남성. 그런데도 신체 접촉없이 한 침대에 들
수 있을까. “하하. 여자 친구와 함께 자면서 서로 만지나요? 그런 생각이 전혀 안 들어요. 우린 가장 마음이 잘 통하는
친구일 뿐인걸요.”(미셸)○“동성 친구의 변종이 아니다”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0년 전이다.
업무상 만났는데 좋아하는 음식, 옷, 음악, 영화, 전자오락, 만화책이 딱 맞았다. 당시 오피스텔에 혼자 살던 미셸의 집에 기욤이 거의 매일
드나들면서 우정을 쌓았다.퇴근 후 만나 침대 위에서 뒹굴며 함께 얼굴 팩을 하고 밤늦게 만화책을 읽는 것이 이들의
일상이다. 기욤의 화장대 겸 식탁 위에는 ‘프레시’ 로즈메리 골드 토닉 워터, ‘skⅱ’ 페이셜 트리트먼트 팩, ‘겔랑’ 이시마 세럼 등 그가
쓰는 고급 여성용 화장품이 갖춰져 있다.미셸은 생리 중일 때 기욤의 집에 찾아와 김치를 젓가락에 말아서 먹어 치운다. 그럴
때면 기욤은 “내가 그토록 아끼는 김치를…”이라고 눈흘기면서도 “내가 그 고통을 모르니 어쩌겠어”라고 이해한다. 기욤과 미셸은 ‘생리 리조트’란
그들만의 신조어를 쓰며 깔깔 웃는다. 둘은 이따금 “우린 중성인가봐”란 말도 나눴다고 한다. 섬세한 감성의 기욤과 달리
미셸은 시원시원하다. 기욤에 따르면 게이들은 글래머 타입보다 미셸처럼 시크(chic)한 여성에게 끌린다. 언젠가 “우리 관계가 동성 친구의
변종인가”라는 주제로 대화한 적 있는데, 결론은 “아니다”였다. 친밀한 ‘새로운 관계’일 뿐 ‘변이된 관계’는 아니라는
것이다.○게이 친구가 좋은 이유미셸은 남자 친구를 일주일에 한 번 만나는데 기욤을 만나는 횟수도
같다. “남자 친구와의 관계와는 다르죠. 기욤에게서는 애틋한 감정 대신 가족같은 유대감을
느끼죠.”이들은 서로 연애 상담도 한다. 특히 기욤이 새 남자와 사귀려 할 때 미셸은 조언자가 된다.
미셸에게 물었다. 게이 친구가 좋은 가장 큰 이유에 대하여. “상황에 따라 정서적으로 남자도 되고
여자도 되는 것이죠. 또 무거운 짐을 들 때 기욤은 남자다운 근력을 보여주지요. 애인이 없을 때 파티에 파트너로 데려가면 외모 등에서
돋보입니다. 그러면서도 기욤에게는 남성 특유의 무심함이 약간 있어 여자 친구처럼 예민하게 행동하는 일이 없어요.” 게이
친구를 둔 여성은 허심탄회하게 이성에 대한 문제를 의논한다. 늦은 밤 남자와 술을 마시고 싶지만 끈적거리는 관계를 원하지 않을 때도 게이 친구가
좋다.이 대목에서 기욤이 대화에 합류한다.“결혼이 의무가 아니라 선택이 된 요즘 여성들이 게이
친구에게서 구속없는 안식을 얻는 것 같아요. 게이와 스트레이트(이성애자) 여성 간의 우정은 있어도 스트레이트 남성과 레즈비언이 우정을 맺는다는
사례는 들은 적이 없어요. 아마 여성은 정서적인 관계를 중시하는 데 반해 남성은 여성과의 관계에서 늘 섹스를 생각하기
때문이겠죠.”김선미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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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엔 정숙한 레이디가 되세요!

동아일보 2009년 10월.

 

발단은 사소했다. 옷장 속에 꼬불쳐놨던 꽃무늬 망사 스타킹을 찾는 일이었다. 일은 커졌다. 내친 김에 주말을 다 바쳐 ‘옷장 속 재구성’에
나섰다. 결과물을 본 남편은 “그다지 달라진 것 같지 않은데…”라고 했으나 눈에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다. 여자에게 있어 옷장 정리는
성스러운 자기 성찰 의식에 가깝기에.여간해선 옛날 옷을 잘 버리지 않는 내게 옷장은 추억과 시대의 아카이브(창고)다. 대학 시절
온 동네 바닥을 휩쓸던 통 넓은 바지, 한껏 싱싱한 몸매를 자랑하던 랩 원피스…. 태산까진 아니어도 꽤 높은 구릉을 이루며 쌓인 옛날 옷들은
그렇게 가만히 말을 걸어온다. 비록 1년에 한 번 내 손에 간택될까 말까한 슬픈 운명일지라도.옷장 정리는 결국 옷의 재배열이다.
유행과 심리 상태, 체형 변화에 따른.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아나운서 차림의 정장을 고수하던 난 최근 몇 년 동안 옷의 긴장감을 덜어내는 데
지나치게 심취했었다(실은 당시엔 이런 풍조가 멋 꽤나 낸다는 남녀에게 최첨단 유행이기도 했다). 몸을 자유롭게 하는 옷을 입겠다며 재킷 대신
니트를 걸쳤다. 증상은 심해졌다. 심신의 평화를 찾겠다며 콘택트 렌즈를 빼고 눈이 팽팽 돌아가는 안경을 꼈더니, 화장도 생략하고 ‘몸뻬’
치마까지 입게 됐다. 눈높이도 한 뼘이나 추락했다. 이런 차림새에 하이힐이 가당키나 하단 말인가.긴장이 없는 삶은 나태를
가져온다. 나태한 옷차림에 몸의 긴장감도 어느 순간 사라져버렸다. 이번 시즌 패션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꽃무늬 스타킹을 찾아 나섰던 건 일종의
자기 경고음이었으리라. 더는 내 삶의 무긴장 상태를 방치할 수 없다는…. 핑계가 없지는 않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이 땅의 엄마의 삶은, 비록
엄마가 패션에 무한 애정이 있다 해도 녹록지 않다. 초등학생 딸을 둔 한 호텔리어는 자신을 대신해 방과 후 아이를 돌볼 당번 표를 매주 시댁과
친정에 보내는 애달픈 수고까지 하고 있었다.이번 옷장 정리의 콘셉트는 ‘참한 여자’였다. 몇 년 전 ‘믹스 앤 매치’와
‘드레스다운’이 휩쓸고 간 자리를 당당하게 꿰찬 클래식 패션은 자신의 삶을 잘 관리하는 정숙한 여인의 모습이다. 단정한 스커트와 실크 블라우스,
질감 좋은 캐멀 코트. 꽃무늬 망사 스타킹은 왠지 설레는 날 꺼내 신어야겠다. ‘옷은 곧 사람’이란 명제는 아주 많은 경우에 들어맞는다. 행여나
내가 만사가 귀찮은 옷차림을 하고 나타난다면 누군가 내 손을 꼭 잡고 말려줬으면 좋겠다.김선미 산업부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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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내가 좋아하는 색감의 사진.

한국영화 ‘지금 당신은 사랑하는 사람과 살고 있습니까’ 중에서.

 

당신이 고급스런 패션을 구사하고 싶걸랑

이 사진에서처럼

매우 옅은 민트색과 살구색,

하늘색과 베이지색의 궁합을 눈여겨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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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은 사람을 닮았다

음악가 노영심 씨와 알고 지낸지 꽤 됐다.

자주는 못 만나지만 인연은 이어진다.

나보다 연배가 많은 영심 씨를

난 그녀의 저서 ‘노영심의 선물’을 통해 먼저 만났었다.

이후 그녀와 간간이 만나게 되면서

그녀의 글이 정말로 그녀 자신과 꼭 닮았다는 생각을 참 많이 했다.

그녀의 마음, 그녀의 말투, 그녀의 표정…

 

몇 년 전 내가 인생에서 넘어졌을 때,

우연히 교보문고 앞에서 그녀를 마주쳤다.

크리스마스 무렵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별 일 아니란 듯이 무심하게 시련을 얘기하는 내 손을 이끌고

그녀는 다시 교보문고로 들어가 ‘러브 액츄얼리’ ost cd 음반을
사서 안겼다. 그 때 내 마음 속에선 둥그런
물수제비가 떠올랐다.

 

그로부터 몇 년 후 크리스마스 이브.

난 만삭의 몸을 이끌고 호암아트홀 연습실로 찾아가 공연을 마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환하게 웃으며 내 손을 잡아주었다.

출산 후엔 부암동의 한 커피집에서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해남 땅끝마을에서 연주한 자신의 음반과 젖은 냅킨으로 소중하게 싸 온 시소
잎을 건넸다.

"직접 마당에서 키웠는데, 향이 너무 좋아요."

난 이날로부터 향긋한 시소잎의 열렬한 팬이 됐다.

그리고 선물은 정말로 사람을 꼭 닮는다는 걸 믿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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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에르메스!

추운 겨울날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소년원 아이들의 얼굴을 떠올려 보셨나요. 프랑스 명품 브랜드 ‘에르메스’가 한국의 소외계층 아이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었습니다. 에르메스가 지난해 사회공헌 목적으로 설립한 ‘에르메스 재단’이 최근 교육단체 후원 사업을 시작하면서 각국의 지원을 제치고 가장 먼저 한국의 두 교육단체를 후원한 겁니다. 이달 부산의 사회복지시설인 소년의 집과 강원 삼척 도계고등학교에 각각 7만 유로와 2만 유로 등 모두 9만 유로(약 1억5300만 원)를 지급했습니다.

 

마리아수녀회가 운영하는 소년의 집은 1969년 설립돼 결손가정 아이들을 거둬왔습니다. ‘알로이시오’란 이름의 초등학교, 중학교, 전자 기계고를 세워 배움의 기쁨도 줬죠. 지금까지 이 곳을 졸업한 5000여 명 중엔 ‘스타 골키퍼’ 김병지 선수도 있습니다. 에르메스는 이번에 알로이시오 전자 기계고의 로봇 동아리인 ‘로봇 클럽’을 지원했습니다. 지난해 국제로봇올림피아드 세계대회 창작부문 금메달을 딴 실력파입니다. 이 곳의 소피아 수녀는 “창작로봇 연구에 필요한 영어 공부를 지원금으로 더 시킬 수 있어 감사하다”고 했습니다.

 

탄광촌에 있는 도계고 뮤지컬단 ‘뺀지와 철조망’ 학생들도 에르메스 덕분에 내년 첫 서울 나들이 공연을 꿈꾸게 됐습니다. 폐광이 잇따르는 열악한 지역 경제, 늘어나는 결손가정으로 우울했던 학생들의 표정이 밝아졌답니다.

 

에르메스가 중국과 인도 등 신흥 명품 소비시장을 제치고 한국에서 가장 먼저 교육단체 후원 사업을 시작한 데는 전형선 에르메스 코리아 사장의 노력이 컸다고 합니다. 지인들과 TV 프로그램을 통해 딱한 아이들 사정을 접하고 프랑스 에르메스 본사에 다른 나라들보다 가장 일찍 지원서를 냈습니다. “한국 아이들의 가능성을 지켜봐주십시오.”

 

소년의 집이나 도계고 학생들이나 값비싼 에르메스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합니다. 선생님들로부터 “프랑스에서 질 좋은 가죽 가방 만드는 회사”란 설명을 들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철없이 까불던 학생들은 숙연해지면서 말했답니다. “참 고마운 회사네요. 선생님들이 오갈 곳 없는 저희를 보살펴주셨던 것처럼.” 에르메스는 어쩌면 베푼 돈보다 더 큰 열매를 거뒀는지 모릅니다. 그것은 ‘미래를 위한 투자’입니다.

 

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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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화법

[동아일보] 2004년 10월

 

 

단어들이 섬처럼 떠다닌다.지적인 소수
컬트 팬의 열렬한 지지 속에 얼마 전 종영한 드라마 ‘아일랜드’의 화법은 그래서 반짝반짝 빛났다.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
받고 상처 받아 “먼지처럼 살겠다”는 주인공들은 이런 식으로 이야기한다.

 

“안 뺏긴다, 너. 좋아해,
내가.”“환상을 버려야 해. 그거 버려지던데. 점층적으로.”“내가 옳지 않더라도 내가 책임질래. 내
인생.”“이젠 가족 놀이 안 할래요.”“나 이제 불쌍해하지 마라. 경호 받는 행복
느꼈다.”“혼자 사는 사람이 어디 있냐. 내 몸 속에 사람들이 산다. 어떤 사람은 머릿속에, 눈에, 손과 발에, 심장에,
뱃속에. 내 몸이 지구인가봐.” 불편하고 낯선 화법이다. 문장을 해체하면 영미 문법처럼 목적어가 동사
다음에 배치된다. 주어 역시 문장의 끝에 올 때가 많다. 철저히 동사 중심이다. ‘좋아하다’, ‘아프다’, ‘미안하다’, ‘고맙다’,
‘존경하다’ 등의 상투적 동사들은 그래서 그 의미가 낯설고 새롭게 다가온다. 텍스트의 중심에 우뚝 서 ‘사람’을 외치는 동사는 생소하게 역동성을
지닌다.가볍다. 가능한 한 조사를 배제하고 ‘∼다’로 문장을 끝내기 때문에 절대적 질량이 가볍다.
짧은 낱말 하나하나가 섬 같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거리를 두고 떨어져 연민 때문에 서로를 끌어당기지만, 뜻한 대로 되지 않아도 상관없다는
정서처럼. 입양아인 여주인공(이나영)이 혈육을 찾는 행위조차 ‘가족 놀이’라는 유희로 바꾸었다.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이 처음
사용한 ‘낯설게 하기’라는 용어는 우리의 지각이나 인식의 틀을 깨고 사물의 모습을 낯설게 해 사물 본래의 모습을 찾으려 한다. 지식은 텍스트
안에서 구성되고 축적되지만, 감성은 오히려 서커스 광대처럼 텍스트를 자유롭게 뛰어 넘나들며 풍성해진다. ‘아일랜드 화법’은
인간과 인간의 부딪침, 감성과 감성의 소통에 대해 한번쯤 생각하게 한다. 도치와 생략의 화법엔 보이지 않는 고독이 있다. 아마도 ‘낯섦’ 때문인
듯싶다.김선미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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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션 레이디, 브루니

동아일보 2008년10월.

 

 

 

제가 요즘 살짝 관심을 갖는 여인이 있는데, 바로 프랑스의 퍼스트레이디인 카를라 브루니(41)입니다. 그는 모델 출신답게 빼어난 패션 감각을
선보이고, 오페라 작곡가인 아버지와 피아니스트인 어머니의 피를 이어 받아 꾸준히 음반을 내는 작곡가 겸 가수이기도 합니다.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과 뜨거운 애정 관계를 과시하며 최근 국정 간섭 논란도 빚고 있기는 합니다만 그를 향한 세간의 관심은 식을 줄 모릅니다.
프랑스 잡지들이 워낙 그를 자주 다루다보니 ‘프랑스에 타블로이드 시대가 열렸다’는 얘기까지 있습니다.그러고 보면 브루니는 좀
특별합니다.첫째, 21세기 새로운 ‘퍼스트레이디 상’을 창조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무심한 듯 머리를 늘어뜨린 ‘프렌치 스타일’과는
정반대로 그는 자신의 이미지를 철저하게 계산적으로 구축하고 있는 듯합니다. 나오미 캠벨과 함께 슈퍼모델 1세대를 이끌었던 그는 예전에 입던
섹시한 옷은 내던졌지요. 그 대신 얌전한 플랫슈즈와 점잖은 토트백으로 ‘뉴 퍼스트레이디 룩’을 이끌고 있습니다.그는 미국 패션지
‘베너티 페어’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작곡가로서 ‘나는 일부다처제가 좋다’고 말할 때는 기사화돼도 문제가 없었죠. 하지만
대통령 부인이 된 지금 ‘나는 코카콜라 라이트가 좋다’고 말하면 큰 파장을 불러올 겁니다. 그래서 모든 세세한 것에 주의를
기울이죠.”둘째, 남자를 내조(內助)하면서도 자신의 세계를 버리지 않는 당당함입니다. 요즘 영국, 독일, 프랑스의 토크쇼에 그가
나와 기타 치며 노래하는 모습이 종종 눈에 띕니다. 최근에는 자신의 앨범 ‘마치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에 ‘당신은 나의 것’이란 영어 노래도
넣었죠. 자국(自國) 언어 사랑이 각별한 프랑스에서….‘나일강의 피라미드를 볼 때나, 열대 해변의 해돋이를 볼 때에도 그냥
기억해줘요. 당신은 나의 것이라는 걸.’-‘당신은 나의 것’ 중에서지난해 11월 처음 만나 올해 2월 결혼한 사르코지 대통령을
영영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을지…. 사르코지 대통령이 “몸과 매력, 지혜에 반했다”던 브루니의 앞으로 행보가 궁금해집니다. 이미지
메이킹에 능하면서도 처세 역시 신중해 보이는 그를 보면서 말 바꾸고, 막말하는 요즘 한국 공직자들의 행태가 떠오르는 건
왜일까요.김선미 산업부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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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찌 쇼핑

동아일보 2009년11월.

 

“혹여 시간 나면 모찌 하나 사다주시면 좋겠네요. 바쁜 일정에 무리하진 마시고….”가끔 e메일로 안부를 주고받는 ‘문통
지인’의 이 작은
부탁을 받았을 땐 미처 몰랐습니다. 짧은 도쿄행에서 모찌 하나를 사는 게 얼마나 고민되는 일인지를. 그도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가볍게 모찌를
지목했을 겁니다. 하지만 일본엔 모찌 말고도 장인 정신에 탄복하게 되는 디저트가 넘쳐났습니다. 정작 모찌를 사야 하는데, 다른 디저트들이 어찌나
달콤하게 유혹을 해 오던지요. 일본 전통과자(와가시·和菓子)를 파는 ‘도라야’(虎屋)는 768년 전통의 장수기업입니다. 도쿄
미드타운의 매장은 문 대신 커다란 붓글씨로 ‘호’(虎)라고 쓴 휘장을 내려 신비로웠죠. 일본 전통 그릇, 보자기와 함께 놓인 양갱과 모나카는
마치 루이뷔통 매장의 패션소품 같았습니다. 과자가게가 장수기업이 된 저력일 겁니다. 그뿐인가요. 세계적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지은 복합쇼핑몰
오모테산도힐스 내 ‘델 레이’는 매일 벨기에에서 수제 초콜릿을 비행기로 공수해 팝니다. 역시 초콜릿이 보석처럼 진열돼 있습니다. 국민들의 못
말리는 디저트 사랑 덕분에 일본은 ‘코스모폴리탄 디저트 천국’이 됐습니다.‘나의 달콤한 도쿄’란 책을 쓴 요리연구가 박현신 씨는
“일본인은 예로부터 차를 즐겨 서민들도 디저트를 먹는 호사를 부린다”고 말했습니다. 달콤한 디저트는 피로한 삶에 행복한 엔도르핀을 줍니다.
서울의 유명 백화점과 호텔들도 뒤늦게나마 디저트 코너를 늘리고 있습니다. 교동한과가 올해 천연 발효과자인 ‘고시볼’을 형형색색 현대적 감각으로
내놓고 있는 것도 반가운 소식입니다.이래저래 엉뚱한 디저트만 잔뜩 눈요기하다, 어쩌다 숙제가 돼버린 모찌 쇼핑은 나리타공항
면세점에서 했습니다. 그곳 역시 제품 포장조차 얄밉게 예쁜 ‘모찌 박람회장’이었죠.“혹여 시간 나면….” 외국인들은 한국을
방문하는 지인들에게 어떤 디저트를 사다 달라고 부탁할까요. 일본인들이 열광하는 김은 디저트가 아니죠. 고급 한식당에서 나오는 얼린 홍시는 좀 더
세련된 상품화를 고민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한국의 한과와 떡? ‘달콤한 한국’이란 이미지를 각인시킬, 국가대표급 디저트가 언뜻 떠오르지
않습니다. 크기가 작은 디저트는 맛과 멋의 집결체입니다. 맛있는 게 많아 찾고 싶은 나라, 예술품처럼 귀하게 곁에 두고 싶은 디저트가 있는
나라, 그곳이 대한민국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도쿄에서김선미 산업부 기자 kimsunm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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