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거래에 쏟아진 찬사에 대한 반론

 

 

부당거래(2010)

 

류승완 감독

류승범, 황정민, 유해진, 그리고 천호진 주연

 

 

개봉 일주일만에 60만 관객 돌파

(류승완 감독으로선 상상하기 힘든)

평론가며 대중도 ‘재밌다’고 극찬

(정말 류승완의 변신 성공?)

 

 

부당거래는 말그대로

하나의 ‘딜(deal)’로 시작해,

결국 파멸에 이르는,

그럼에도 가장 강한 놈(권력이 가장 센 놈)은 살아남는,

대한민국 인간사를 그렸다.

 

 

 

 

이 영화는 쉽다.

모든 것을 그냥 보여준다.

심지어는 ‘이것 좀 보세요’라고 말하는 것 같다.

 

사적 욕망에 사로잡힌 두 인간이 대화할 때,

배경은 ‘조선일보’ 사옥이다.

 

아직 때묻지 않은 한 집단이,

진실을 찾아 떠날 때,

그들이 들고 있는 건 ‘한겨레’와 ‘경향신문’이다.

 

잘못된 돈 거래를 하는 곳은 늘 ‘건설회사’이고,

허세를 떠는 인간은 ‘검찰’에 있고,

학벌 컴플렉스에 사로잡힌 인간은 자주 ‘보스의 방’을 바라본다.

 

권력투쟁의 콩고물을 받아 먹으려,

머리를 조아리는 언론인은

이름조차 없는 무명씨 ‘김기자’다.

(기자의 생명은 이름이다. 기사는 늘 ‘이름을 걸고’ 쓰기 때문이다.)

 

 

이렇다보니

이제 현실의 풍자 수준에서 벗어나

패러디가 되어 버린다.

 

개그콘서트 남하당과 여당당의 의원들이

구구절절 현실 속 ‘보수꼴통’과 ‘페미니스트’의 말을 흉내낸다.

‘두분토론’의 애당초 목표는 ‘웃음’이기에 

‘흉내’에서 끝나도 상관없다.

그 ‘흉내’가 재밌으면 그만이다.

 

그런데 ‘부당거래’의 목표가 폭소는 아니었을 거다.

그러다보니 영화는 갈 길을 잃어

결국 한 놈만 빼고

다 죽어버리는

‘그/냥/파/멸/’로 끝이나 버린다.

 

이 영화는 쉽게 시작해 쉽게 끝난다.

그리고,

현실을 현실적으로 그려내는 게

얼마나 어려운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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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이상관람가, 무삭제개봉

 

몽상가들 The Dreamers
(2003)

 

 

젊을 땐 나이가 크게 다가온다.

스무살인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스물 셋인지 스물 다섯인지도 중요하다.

 

그런데 엄마 아빠를 보면,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면,

마흔 넷인지 마흔 여섯인지는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심지어 일흔과 여든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비슷하다.

 

그렇다.

청춘의 유희와 이상, 그리고 좌절을 그리는 이 영화는

스무살 먹은 세 남녀의 이야기다.

그들이 스무살이라는 사실 자체가 이 영화의 큰 구성요소 중 하나다.

아마, 그들이 열여덟살이라거나 스물세살이었다면

불완전한 그들의 심리를 따라가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래, 스무살엔….’이라며 관객들이 마음을 놓고 나서야

짜릿하게 감상할 수 있는 영화라는 뜻이다.

 

 

영화는 도발적이다.

근친을 연상시키는 성적 묘사,

남녀 둘이 아닌 셋(!)이 함께 발가벗고 있는 모습까지.

 

그런데 자세히 살펴 보면,

<몽상가들>은 여느 영화보다

청춘의 불완전한 상태를

세심하게 그려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영화의 본질은 도발이 아니다.

 

① 성인의 모습을 한 남매는 발가벗은 채 자고 있다.

정말 잠만 자고 있다.

행위는 없다.

이 대목에서 영화는 관객들의 불순한 상상을 깨뜨린다.

 

② 세 남녀가 함께 목욕을 한다.

한 욕조에 있지만 각각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세 개로 나눠진 거울이 그들을 비춘다.

연결된 듯 하지만, 결국 개인일 수밖에 없는 그들.

 

③ 여자가 말로의 비너스를 흉내낸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기에 막막하고 답답한 이들은

늘상 영화며 유명한 상징물을 빌려와 자신을 담아낸다.

그 순간조차 자기자신을 드러내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힌다.

 

 

 

68혁명을 배경으로 한 청춘들의 이상과 욕망을 그린 영화.

<몽상가들>.

 

시대와 개인.

 

혁명과 쾌락.

 

어느 것 하나 온전히 취하지 못했던

당신의 스무살을 떠올려보라.

 

불완전해서 안타깝고,

아름답지만 완벽하지 않은,

<몽상가들>을 감상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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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퍼스타K보다 절실한… 엘 시스테마!

 

‘엘 시스테마’라는
낯선 스페인어를 처음 들은 건 지난해 겨울이었다. 지상파 뉴스에서였다. 남미 어느
국가에서 음악 교육을 통해 빈곤층의 삶을 개선하고 있다는 요지의 보도였다. ‘음악으로
사회를 변화시키는, 그런 나라가 정말 있다니. 완전 부럽다.’ 대충 이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리고 드디어, 말그대로
‘기적’같은, 먼나라 이야기로만 생각했던 ‘엘 시스테마’가 영화로 나왔다. 상업 영화가
아니기에 개봉관은 적었다. 홍대에 있는 KT&G상상마당 극장에서 오늘 저녁 영화를
보고 왔다. 홍대앞 상상마당엔
처음 가봤다. 영화관은 지하 4층, 객석은 70석. 이날 관객은 10명이 채 안 돼 집중하며
볼 수 있었다. 이 영화를 많은 사람들이 봐줬으면 하는 바람으로, 리뷰 밑에 상영관을 소개하겠다.

 

엘 시스테마가 무엇인지를
다시 소개하자면, 어린이부터 청소년까지를 대상으로 하는 베네수엘라의 음악 교육프로그램을
가리킨다. 전국에 있는 각각의 엘 시스테마 센터들은 돈벌이에 목적을 둔 회사도
아니고, 소위 음악영재를 발굴해내는 것이 목표인 기관도 아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단 하나. 빈곤과 폭력, 그리고 아동 포르노의 위협으로부터 아이들이 벗어나
음악을 통해 소통하고, 사회성을 길러나가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엘 시스테마가
1975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그리고 우리가 대표적인 복지국가라고 알고
있는 북유럽이 아닌 남미의 빈민층에서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영화 ‘엘 시스테마’는
엘 시스테마의 창립부터 현재까지를 호들갑스럽지 않은, 그러나 단호한 어조로 그려내고
있다. 사실 영화를 보기 전 감동적인 음악 영화를 상상했던 나는 ‘어거스트 러쉬’와
같은 드라마 구조를 예상했었다. 기대는 영화 시작 후 오래지 않아 깨졌다. 혹자는
이 영화가 조금 더 ‘영화’라는 틀에 잘 담겨졌으면 좋겠다고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그런데 난 반대의 생각이다. 오히려 생각할 여지가 커서 좋았다. 이는 예컨대 특정
아이의 개과천선 스토리나 여타 클라이막스가 없는 덕이라고 본다.

 

엘 시스테마의 교육방식을
보며 요새 유행하는 프로그램인 슈퍼스타K가 떠올랐다. 앞서 말했듯 엘 시스테마는
영재 한명을 발굴하는 것보다 많은 아이들이 음악을 즐기도록 만드는 것이 우선인
단체다. 그래서 영화 속에서도 엘 시스테마의 ‘스타’는 없었다. (현실속엔 물론 스타가
존재할지도 모르겠으나) 영화가 중점을 둔 것은 아이들이 스스로 느끼는 느끼는 변화,
그리고 선생님들의 애정어린 지도였다. 스타시스템에 너무도 익숙해져 버린 우리에겐
생경한 풍경이다.

 

아마, 우리나라에서
이런 운동이 있었다면, 어떻게든 영재 하나를 발굴해 언론에 홍보하고 야단법석을
떨지 않았을까? 그리고 다음과 같은 광고 문구가 붙겠지… "우리가 원하는
것은 단 한명의 실력자 입니다. 지금 도전하세요’라고 말이다. 물론 상업적인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슈퍼스타K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무리긴 하다. 그럼에도 엘 시스테마의
‘나눔’을 지향한 ‘음악’을 보자니 아메리칸 아이돌이나, 브리티시 갓 탤런트, 슈퍼스타K까지,
스타시스템에 의존해 ‘음악’의 상업성을 극대화한 것이 안 좋아보이는 것도 당연했다.

 

그리고 눈길을 끈
부분 하나. 엘 시스테마 운영의 90%는 정부가 지원한다는 사실이었다. 관계자들은
정부의 관료와 정치인들을 만나 설득했다고 한다. 물론 베네수엘라는 사회주의 모델의
국가다. 무상교육이나 무상급식 등으로 나라가 휘청거린다는 말도 나온다. 그런데
세상을 긍정적으로 바꿀 정도의 사회적 지원이라면 자본주의 국가들도 배울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개인적으로 무상급식
관련 예산을 ‘밥 잘 먹는’ 아이들에게까지 혜택을 주는 게 아닌, 나머지 아이들에게
‘밥’과 ‘음악’을 같이 주는 데 쓰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물론 교육의 일부로서의
무상급식이 먼저 해결돼야 한다는 주장도 있을 수 있지만, 어디까지나 한정된 예산을
가지고 우선순위를 정하자면 말이다. 여러가지 안이 있을 수 있는데, 우리는 너무
무상급식 vs 포퓰리즘의 프레임 안에서만 싸웠던 건 아닐까…

 

아름다웠던 장면은
농인들이 수화로 합창을 하는 모습이었다. 이전에 ‘당신은 장애를 아는가’라는 책에서
읽은 기억에, 농인들은 수화를 하나의 언어로 생각한다고 한다. 예를 들면 한국인인
우리가 영어를 배우듯이 그들도 ‘수화’라는 또 다른 언어를 배운 것에 불과하다는
거다. 그렇기 때문에 농아라는 것은 ‘사회적 장애’일 수밖에 없다. 수화를 할 줄
아는 농인들만 모여 있는 사회에서 그들은 소통에 아무런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의 의사소통 장애는 우리가 수화를 할 줄 모르기 때문, 혹은 그들이 우리말을
할 줄 모르는 탓이다.

 

이를 완벽히 증명하는
사례 중 하나가, 우리가 미국으로 이민을 갔는데 영어를 한마디도 할 줄 모른다고
하면, 우리에게 장애인 복지금이 나온다고 한다. 의사소통에 ‘장애’가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영화 자막에서 ‘농아’라는 단어가 쓰였는데, 이는 엄밀히 말하면 잘못된
표현이다. 농아(聾啞)는 귀머러기 농(聾)자와 벙어리 아(啞)자가 합쳐 생긴 말인데,
그들은 수화를 할 줄 알기 때문에 벙어리라고 부르는 것은 타당치 않다.)

 

잠깐 얘기가 샜는데,
농인들이 손짓으로 아베마리아를 부르는 장면에선 가슴 한쪽이 따뜻해졌다. 소리가
없이도 노래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것 같다. 이 장면은 영화를
보신 분들만 이해하실 듯 ^^ 언젠가 수화를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마지막으로, 아직
‘엘 시스테마’를 보지 않은 분께 영화를 추천하며 하고 싶은 말.

"이 영화의 배경이
빈민층이라고 해도 스토리는 당신이 상상하는 역경극복의 드라마는 아닙니다. ‘음악’이
주요 소재이지만 원스나 어거스트 러쉬와 같이 ‘음악성’이 부각된 영화도 아닙니다.
‘엘 시스테마’는 당신이 잘 모르는 어느 나라에서, 실제로 일어난 아름다운 사람들의
물결을 그립니다. 그 물결에 함께 빠지느냐 마냐는 이제 당신의 선택입니다."

 

 

 


시스테마
El Sistema‘ 개봉관 (2010년 08월 19일
기준)

서울

하이퍼텍나다(대학로)
/ 씨네큐브 광화문 /아트하우스 모모(이화여대) / 시네마상상마당(홍익대앞)
/ CGV 상암 / CGV 압구정 / CGV 강변 / 아리랑 시네센터

 

서울
외 지역

(성남)
CGV 오리 / (파주) 씨너스 이채 / (광주) 광주극장 / (대구) 동성아트홀
/ (부산) 국도&가람 예술관

‘엘
시스테마’ 블로그 참조 (http://blog.naver.com/elsistem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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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판 콩글리시(칭글리시)를 무시하기엔…

공종식 님의 블로그에서
재미있는 포스트를 봤다.

(/kingjs1999/29426)

 

중국의 엉터리 영문
표지판과 관련한 내용이었다.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지만, 도통 무슨 소리인지 모를 말 투성이다.

언어의 제1 역할이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라 할 때,

엉터리 영어 표현들은
없어져야 할 존재임에 분명하다.

그런데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


세계 영어 사용
인구 중 3분의 1만이 영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나머지 3분의 2는 우리나라 중국, 인도와 같이 제2외국어로 영어를 구사하는
인구다.

그래서
종종 제2외국어 인구의 ‘엉터리(?) 영어’가 옥스포드 잉글리시를 역전하는 일도 일어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Long
time no see.

 

‘오랫만이야’라는
뜻의 이 영어 표현은, 실제로 중국식 영어(칭글리시,chinglish)에서 유래한 말이다.

 

好久不見.

 

[하오
지오우 부 찌앤]이라고 읽는 이 말은 ‘오랫만이야’라는 뜻으로, 중국에서 가장 흔히
쓰이는 표현 중 하나다.


뜻인 ‘오랜 기간 동안 만나지 못했다’는 이 말을 영어로 그대로 옮겨 long time
no see가 탄생했다.

처음
오역됐을 땐 아마도 엉터리 영어라며 웃음을 샀을 표현이다.

그런데
이내  ’I haven’t seen you for a long time’이라는 말대신,

훨씬
간단한 ‘long time no see’를 많은 사람이 즐겨 쓰게 된 것이다.

 

개인적으로
이런 현상이 아마 중국어 문자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중국어의
한자는 뜻글자인 동시에 음글자이기도 하다.


글자 한 글자가 뜻을 담고 있어 축약적인 표현이 가능하다.

이렇다보니
비록 칭글리시(chinise + english)가 문법엔 어긋나더라도,

본래의
영어보다 더 ’간명하게’ 의미를 드러내주는 역현상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중국인이 영어를 잘 하고 못하고와는 완전히 별개의 문제로써,


하나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웹에서도
이런 움직임이 포착되고 있다.

이미지
공유 사이트인 플리커에 칭글리시만 모은 그룹도 있다.

(http://www.flickr.com/groups/chinglish/pool)

이곳에
들어가면 정말 다양한(?) 엉터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영어 사용자들이 이를 재미있는 놀이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영어적인(?) 표현인 칭글리시(chinglish)라고 하지 않고,

쭝궈리시(zhongguolish)라는
중국식 영어적인(?) 표현을 쓰기도 한다.

 

한 가지만
소개하자면,

 

 

사진
올린 사람의 설명을 보면, "중국인들이 극적으로 축약한 번역이 좋다"고
얘기한다.

 

경고문의
본 뜻은,

<경고>1급
방화구역, 원내 흡연 금지
.

 

이것을
그냥

No
burning
이라고 해버렸다.

 

칭글리시의
매력(?)에 푹 빠진 어떤 사람은 직접 웹사이트를 만들기도 했다.

(http://www.chinglish.de)

 


Clover signs라는 이름의 영국 회사 블로그에서는

‘칭글리시
표지판이 너무 좋다(I love chinglish signs)’라는 블로그가 올라오기도 한다.

(http://cloversignsblog.com/2007/08/chinglish-signs)

 

 

 

물론
이런 현상을 긍정적이라고 하기만은 어렵다.

앞서
설명했듯 언어로서의 기본적인 역할인 의사소통조차 불가능하게 하는 상황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최근들어 영미권에서 칭글리시(chinglish)나 힝글리시(인도식 영어, hinglish)를
배우는 모습까지 포착된다고 하니,

옥스포드
잉글리시가 지배하는 언어의 세계에도 변화가 나타나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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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하지 않았다고?

▲ 영국의 대표 모더니즘
작가, 버지니아 울프

 

‘버지니아 울프는
자살하지 않았다’는 제목의 포스트를 보았다.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blogId=84317&logId=4690748)

사회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간 것이다,, 라는 내용이 있으려니 하는 추측 반

정말 내가 몰랐던
비밀이 이제와 밝혀지기라도 한 것인가? 하는 기대 반으로 포스트를 클릭했다.

 

안타깝게도(?) 결과는
전자였다.

버지니아 울프는
자살한 게 맞았다.

블로거 김세린 님의
주장은

성추행이라는
사회악이 그를 자살로 몰고 간 것, 버지니아 울프는 사회악에 의해 타살된 것
이라는
내용이었다.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팬으로서 동의할 수 없는 주장이다.

 

예순 살의 자살은
단순히 어린 시절 겪은 성추행의 상처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가 유서 말미에
썼듯이,

세계2차 대전을 목도하면서
느끼는 무력감, 폭력에의 혐오 등이

작가로서의 삶 마저
끊게 만들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 나의 ‘매우 조심스런’ 추측이다.

 

 

▲ 니콜키드만이 연기한 버지니아 울프

 

우선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에 대해 잘 모르시는 분들을 위해 설명을 덧붙인다.

버지니아 울프는
흔히 페미니스트 작가라 불리고, 소설을 쓸 때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즐겨 사용하는
작가다.

그의 삶과 작품을
영화화한 <디 아워스(The Hours)>에서 니콜키드만이 그를 연기하기도 했다.
(<디 아더스>가 아니다)

그는 당대, 그리고
지금까지 인기를 끈 소설가이기도 하지만,

스스로를 노동자라
부를만큼 평생 동안 많은 양의 책을 쓰고, 고된 출판일을 했다.

수 차례 자살시도
경력이 있으며, 60세에 강물에 투신 자살해 생을 마감한다.

남편은 울프에게
굉장히 자상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고,

아니, 자상한 것
이상으로 울프가 원하는 모든 것을 들어줄 정도로 헌신적이었다고 한다.

버지니아 울프와의
결혼 조건이 섹스를 하지 않고, 공무원 삶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이었는데

이 모두를 수용할정도였으니
말이다.

울프는 유서에서
남편에게 미안함을 토로하고,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비밀인즉슨, 자신이
여섯살 때부터 십대시절까지 의붓오빠들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는 사실이었다.

 

자살과 함께 비밀을
털어 놓는 버지니아 울프의 계획은 그의 작품 세계를 통해서 드러난다.

<유산(legacy)>이란
작품에서 여주인공은 차도로 뛰어들어 자살하기 전 남편에게 유산으로 일기장을 남긴다.
그 일기장엔 남편이 몰랐던 아내의 외도 사실이 적혀있다. 일기장을 읽어 나가면서
착하기만 했던 아내의 두 얼굴을 알게 된 남편은 점점 충격에 빠지고, 소설은 끝을
맺는다.

 

사건의 내용은 다르지만,
전개 방식이 버지니아 울프가 유서를 통해 ‘진실’을 말해주는 것이 꼭 닮았다.

선후관계는 알 수
없지만 버지니아 울프는 자살을 통해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을 생각을 하고 있었던
셈이다.

그런 소설을 쓰면서
그런 결심을 하게 됐는지, 그런 결심을 안고 살다 <유산>을 쓰게 됐는지는
알 수 없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은 (적어도 스스로에겐) 예견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의 자살은
예순 살에, 남편과의 삼십여 년간의 결혼생활 끝에, 전쟁을 목격하며 내린 결론이다.

이같은 사실은 그의
자살이 단순히 비밀을 밝히기 위해서 였다고는 말할 수 없게 한다.

김세린 님이 주장한
것처럼 성추행-우울증-자살로 이어지는 단순한 인과관계는 아니라는 얘기다.

 

버지니아 울프는
남편과 결혼할 때, 섹스를 하지 않겠다고 했다.

이것을 나는 그가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으로 감히 해석한다.

그리고 수십 년간의
작품 활동을 통해서조차 스스로 상처를 극복할 수 없는,

혹은 자신의 작품으로
‘남성주의’ 사회를 극복할 수 없다는 판단 하에,

‘작가’로서의 삶까지
끝내려 한 것은 아니었을까.

 

 

현재까지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 원인은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으며,

그가 자살 전 환청
등에 시달렸다는 보고만 남아있는 상태다.

 

▲ 셰익스피어 작품
<햄릿>에서 강물에 투신자살한 오필리아. 아버지와 오빠라는 ‘남성’에게 억압되야만
했던 오필리아의 이미지는 종종 버지니아 울프의 자살과 연관지어지기도 한다.

 

 

버지니아 울프의
유서 전문

 

흐르는 저 강물을
바라보며 당신의 이름을 목놓아 불러 봅니다. 레너드 울프. 제 처녀 때의 이름 버지니아
스티븐이 당신과 결혼하면서 버지니아 울프가 된 것을 저는 한 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습니다. 제 나이 예순, 인생의 황혼기이긴 하지만 아직 더 많은 일을 할수 있는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할 생각입니다. 제 자살이 성공한다면 세상 사람들은 우리
부부 사이에 무슨 문제가 있었을 거라고 입방아를 찧을지도 모르겠어요. 아이도 없는
터에 남편의 이해부족, 애정 결핍 등 이런저런 얘기가 나올까 솔직히 두렵습니다.
이 유서는 당신이 엉뚱한 구설수에 휩싸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쓰는 것이랍니다.

 

1912년 결혼한 이래
30년 동안 제가 진정으로 사랑하였고, 저를 진정으로 아껴 주었던 레너드 그 동안
차마 얘기하지 못했던 제 생애의 비밀을 이 유서에서 당신께 말하려 합니다. 저의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은 첫 번째 아내가 정신질환에 시달리다 죽자 변호사 허버트
덕워스의 미망인 줄리아와 재혼을 합니다. 속된 말로 홀아비와 과부의 결혼이었던
거지요. 제 어머니 줄리아는 이미 네 명의 자식이 있는 상태였고, 아버지는 전처
소생의 딸이 하나 있었습니다. 재혼한 두 사람 사이에서 오빠 토비와 언니 바네사,
저 그리고 동생 애드리안이 줄줄이 태어났지요. 그리 넓지도 않은 집에서 아홉 명
아이와 두 어른이 아옹다옹하며 살아가게 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봉사정신이
무척 강한 분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병구완하러 다니느라 정작 집에 있는 아이들은
제대로 보살피지 못하셨지요. 큰애가 작은애를 알아서 잘 돌보겠지 하고 낙관적으로
생각하셨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제 생애의 불행은 여섯 살 때부터
시작됩니다. 큰 의붓오빠인 제럴드 덕워스가 어머니 없는 틈을 타 저한테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자기와는 신체 구조가 다른 저를 세밀히 관찰하고 만지고. 그 시절부터
저는 몸에 대한 혐오감과 수치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나아가 성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조건 배격하는 마음도 갖게 되었지요.

 

불행은 설상가상으로
몰아 닥쳤죠. 어머니는 이웃사람을 간병하다 그만 전염이 되어 제가 열 세 살 되던
해에 돌아가셨습니다. 저를 잘 이해해 주던 이복언니 스텔라도 2년 뒤에 죽었는데
바로 그때 아버지마저 암에 걸려 몸져눕고 말았습니다. 저와 언니 바네사가 신경질이
나날이 심해지시는 아버지의 병간호를 맡아서 하는 것이야 뭐 그래도 힘든 일이라
생각하지 않고 감당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사춘기를 막 넘긴 작은 의붓오빠
조지 덕워스가 저한테 갖은 못된 짓을 하는 것이었어요. 그렇지 않아도 의지할 데
없어 심리적으로 불안했던 저는 무방비 상태에서 그런 일을 수시로 당하고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 당시 집에 책이
없었더라면 전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버지의 전처처럼 죽지 않았을까요? 아버지는
총 65권에 달하는 대영전기사전의 책임 집필자여서 집에 책이 엄청나게 많았고, 저는
현실의 불행에서 도피하기 위해 책에 파묻혀 지냈습니다. 저는 당신과 결혼하기 전까지만
해도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을 너무나 무서워했고, 사춘기 시절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했습니다.

 

당신이 청혼했을
때 저는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보통 사람 같은 부부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작가의 길을 가려는 나를 위해 공무원 생활을 포기해 달라는 것. 세상에 이런 요구를
하는 여자에게 자신의 성적 욕망을 버리고 사회적 지위를 팽개치고 오겠다는 사람은
레너드, 당신 이외엔 없을 거예요. 고통스런 과거를 끊임없이 반추하며 제가 작품을
쓰는 동안 당신은 출판사를 차려 묵묵히 제 후원자 노릇을 해 주셨지요.

 

저는 지난 30년 동안
남성중심의 이 사회와 부단히 싸웠습니다. 오로지 글로써. 유럽이 세계 대전의 회오리바람
속으로 빨려들 때 모든 남성이 전쟁을 옹호하였고, 당신마저도 참전론자가 되었죠.
저는 생명을 잉태해 본 적은 없지만 모성적 부드러움으로 이 전쟁에 반대했습니다.
지금 온 세계가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제 작가로서의 역할은 여기서 중단되어야
할 것입니다. 추행과 폭력이 없는 세상, 성차별이 없는 세상에 대한 꿈을 간직한
채 저는 지금 저 강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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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많이 버는 이름의 주한 중국대사

 

장신썬 주한 중국대사 (사진출처=http://www.fmprc.gov.cn/chn/pds/wjdt/zwbd/t431731.htm)

 

 

장신썬() 주한 중국대사 내정자가 17일 오전 중국 상하이(上海)
푸둥공항에 도착한 유명환 외교통상부 장관을 기내에서 영접했다.

-동아일보 2010
3
18일 목요일 A8

 

 

 

그의 이름 한자를 보면 가운데에 특이한 글자가 눈에 띈다.

 

img1.gif

 

(네이버 한자사전 검색)

쇠 금()
세 개가 합해 만들어진 글자다.

 

 

한국인에게는 비교적 낯선
한자다
.

상용한자에 포함되지 않는지 ie에서 해당 한자어가 입력조차 안 된다.

 

img3.gif

 

△’을 한자로 변환하려고 했더니, 공경할 흠, ▶하품 흠,
받을 흠만 뜬다.

 

 

 

그런데 중국에서는 이 한자 정말 많이 봤다.

특히 음식점 등 가게 간판에 단골로 등장하는 한자였다.

 

 

 

중국의 유명 식당 체인점 중 하나인華府‘ (사진출처=http://www.bestechsoft.cn/ShowInfo.asp?ShowId=590&ClassName=%C6%F3%D2%B5%B6%AF%CC%AC)

 

 

 

 입력도
안 되는 한자어, 어떻게 표기해야 할까?

 

img6.gif

 

한국 언론들도자를 제각각 표기하고 있었다.

제대로 한자를 쓴 곳도 있고, 그냥 한글로 흠이라고 쓴 곳도 있고, < 3>라고 친절히(?) 설명을
단 곳도 있다
.

 

 

 

이번엔,
중국의 구글 겪인 바이두에서
자를 검색해 보았다.

검색 결과 = 상호
및 이름에 많이 쓰인다고 한다
. 돈이 많고 흥성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고 한다.

글자 그대로다. [] 3개나 있으니 말이다.

 

img4.gif

 

바이두 백과사전 (주소=http://baike.baidu.com/view/23096.htm?fr=ala0_1)

 

 

 

중국인들은 드러내놓고 돈을 좋아하고 섬기는 듯하다.

돈을 번다는 뜻의 중국어인發財의 發이 숫자 8()과 소리가 비슷하다 하여,

숫자 8을 행운의
숫자로 여기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의 개막일시 또한 (현지시각)8 8 8 8분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장신썬
주한 중국대사의 이름은 돈[金]도 많고,

거기에다가
이름 끝글자는 빽빽하다는 뜻의 수풀 삼(森) 자 다.

 

img2.gif

 


나무 목(木) 자가 세 개 합쳐진 수풀 삼(森) 자. 무성하다는 뜻을 나타냄.

 

 

 

장신썬()

 

 

한국인이
보기에 참 재미있는 이름이 아닐 수 없다.

 

 

 

(본
포스트는 작명에 관한 식견이 제로에 가까운 사람이 쓴 것임을 알려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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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원과 소지섭

영화
‘의형제’를 바라보는 지극히 편향된 시선

 

 


의형제(2010), 감독 장훈, 주연 송강호 강동원

 

장훈 감독의 신작
‘의형제’는 여성용 영화다.

페미니스트들이 들으면
발끈할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여자들의 91%는 강동원의 눈코입과 실루엣에 넋을 놓았다.

그 감상용 대가로
8000원을 지불하는 게 아깝지 않을만큼

강동원의 미모가 지배하는
영화였던 것.

 

 

그의 전작 ‘영화는
영화다’도 마찬가지였다.

영화의 코드는, 쌈박질에
피흘리는, 다분히 남성적이었지만,

영화를 보고나서
한참이나

‘소지섭 너어어무
멋있어’를 반복하게 할만큼

여성용 영화였던
것.

 

 

 

 ▲
영화는 영화다(2008), 감독 장훈 주연 소지섭 강지환

 

 

몇몇
영화평론가들은

‘의형제’를
두고 간첩얘기를 하기도 했고,

탈이데올로기를
얘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핵심은 그게 아니다.

장훈
감독이 의도했든 안했든,

송강호가
얼마나 죽여주는 연기를했든,


모든 것에 상관없이

강동원의
잠든 옆얼굴을 비추는 화면이 멈췄으면 하는,


작은 욕망으로

많은
여성들이

영화를
지켜봤다.

5,000,000이
가까워졌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나는 영화는 영화다가 의형제보다 훨씬 좋았다.


이유는 파리한 남자 강동원보다

터프한
남자 소지섭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다.

 

 

 

결국
장훈 감독의 두 영화를 비교평가하는 기준은

연출과
연기력이 아닌

소지섭이냐
강동원이냐를 선택하는 개인적 취향의 문제일지도 모른다.

 

 

더 재미있는 건,

주변의 ‘남자’들은 ‘의형제’에 별 감흥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

 

장훈 감독의 두 영화는

男性스러운 구석이 많았지만,

-소지섭과 강동원-

이 두 캐릭터들은 정확히 女心을 꿰뚫고 있었다.

 

그게 감독의 재량이었는지

소 씨와 강 씨의 타고난 매력이었는지는

또 다음 작품을 통해 판가름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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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중동'을 어떻게 읽을까

어느 텔레비전 토크쇼에서
한 연예인이 루머 기사(記事) 때문에 맘 고생한 얘기를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러자
다른 패널이 그녀를 위로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해줬다.

자신의 은사님이
해준 얘기라며, “신문에 사실은 있을지 몰라도 진실은 없다”고 했다.

다른 연예인들이
박수를 치며 공감했다. 그러고는 그의 말이 마치 ‘명언’이라도 된다는 듯이 그를
치켜세웠다.

사람들이 신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였다.

 

과연 그럴까.

신문에는 정말 진실이
없는 걸까.

 

 

손석춘의 ‘신문
읽기의 혁명2’를 읽었다. 지난 11월 출간됐다.

 신문 읽기의
혁명2, 손석춘 지음, 개마고원, 12000원

 

대학 2학년 때 1편을
읽었고, 그것은 내 생각의 틀을 많이 바꿔준 책이었다.

어느 정도의 과장이나
편향성이 있다하더라도, 신문 읽기 자체를 새롭게 하도록 했기에 의의가 큰 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때 쓴 리뷰는
이렇게 적고 있다.

 

    그동안
    신문을 열심히 읽어 왔던 사람도

    그동안
    신문이라면 거들떠도 안 봤던 사람도

    신문의
    기사를 자주 인용하고 잘 믿었던 사람 모두

    표지가
    촌스럽더라도 이 책을 읽어야 합니다.

     

    정말
    혁명적이네…ㅎㅎ

 

꽤나 감명적이긴
했나보다.

 

1권이 주로 신문의
기사들이 편집·재배치됨으로써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탄생될 수 있다는 사실을
전달하는 데 주력했다면,

2권은 저자의 말대로
사회·정치 분야와 경제 분야의 기사를 어떻게 읽어나가야 할 것인지를 얘기하고
있다.

이는 요즘 들어 내가
의식하며 읽는 분야이기도해서 흥미를 갖고 읽을 수 있었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언론을 대하는 태도를 분석한 것은 후대정권 누구라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부분이지 싶다.

노무현 대통령이
소위 ‘조중동’과 싸울 때 유시민이 이를 거들면서(?)
언론의 기능을 악화시켰다.

반면, 강준만은 ‘노빠’로부터
외면당하면서까지 노무현에게 쓴소리를 했었다.

물론 노무현은 유시민의
손을 잡았다.

‘내부비판’은 쉬이
허용되지 않았던 것.

이제는 달라졌으면
한다. 내부비판이 늘어났으면 한다.

꼭 누군가가 ‘고인(故人)’이
되고나서가 아니라 말이다.

 

손석춘의 말처럼
적어도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언론을 비판하는 일은 없어야 했다.

대통령의 자리는
이미 제1권력으로, 언론의 비판을 당해야 하는 자리이지, 비판을 하는 자리는 아닌
것이다.

아직 노 대통령 서거
1주년이 채 안 됐다.

그럼에도 이런 쓴소리가
등장했다는 것을 우리나라 진보정치의 희망으로 해석하고 싶다.

 

다음으로 책에서
거론되는 것이,

한나라당과 ‘조중동’의
관계다.

우리나라 대표 보수
정당과 보수 언론의 관계.

(중앙일보는 ‘삼성’과
더 관련이 깊긴 하지만, 일반적으로 ‘조중동’이라 통칭하므로 이렇게 쓰겠다.)

 

손석춘은 정권교체
10년 동안에도 현재의 여당인 한나라당이 세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로 보수언론의
힘을 든다. 본인 또한 한 한나라당 당직자로부터 “‘조중동’은 뭐 우리 기관지나
마찬가지니까……”라는 말을 직접 들은 적이 있다. 기자들이 들으면 자존심에
스크래치가 상당할 말이다. ‘조중동’ 스스로 어떻게 생각하든, 한나라당이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긍정적으로 해석될 수 없다.

저자가 예를 드는
것 중 하나는 ‘조중동의 고의적인 영남 지역감정 조장’이다.

일견 수긍이 가는
대목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저자가 고의로 혹은 모르고 간과한 사실이 있다.

진보언론과 진보정당의
관계.

이들은 모두 ‘진짜
혹은 선한’ 가치를 추구하고 있기 때문에 유착돼도 상관이 없는걸까?

한나라당이든 민주당이든
정권을 잡겠다는 목적은 동일할 텐데 말이다.

실제로 지난 정권
10년 간은 한겨레 및 경향에 대한 정부 광고가 대폭 늘어났었다. (출처 =이름을 밝히지
않은 기자)

손석춘이 그 부분을
짚고 넘어가기가 곤란했던지 정말로 문제의식이 없었던지 둘 중 하나일 것이다.

한국 언론의 문제를
‘조중동’의 문제로 축소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태도라는 생각이 든다.

 

 

다음은 신문사와
자본의 관계.

동아일보에서 인턴기자를
할 때 일이다.

일과가 끝나고 동기들끼리
“오늘 재밌었어?”라고 물으면,

“신문 보는 법 배웠어”라고
대답하는 동기들이 적지 않았다.

여기서 ‘신문 보는
법’이란 광고를 본다는 것을 뜻했다.

평소에는 눈여겨보지
않는 광고를 신문사주의 입장이 돼서 보는 것이다.

인턴기자를 하며
좋았던 점 중 하나가 이런 눈을 키우게 된 것인데,

손석춘도 이에 대해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한 단계 더 나아가
신문이 성스러운 존재만은 아니라고 얘기한 부분은 특히 읽어볼 만하다.

신문이 상업적일
수밖에 없었던 연원을 얘기한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읽어 보고 판단하시길^^

 

 

다음은 사회·정치와
경제 분야의 기사. 이 책의 부제이기도 한 -경제를 읽어야 정치가 보인다-.

신문을 읽는 사람이라면
다 느끼겠지만, 둘은 스타일도 내용도 완전히 다르다.

이 부분은 강준만의
‘대중 문화의 겉과 속1’과 비교해 매체만 달라졌을 뿐, 내용은 비슷했다.

요컨대 9시 뉴스에서는
경제가 어렵다, 어렵다 얘기하고선,

이어지는 VJ특공대에서는
전국의 불티나는 음식점 등을 소개하는 식이다.

 

경제(사회 정치적인
의미가 포함된)뉴스와 생활경제의 분리다.

 

이는 신문 지면에도
똑같이 드러난다.

사모펀드 실적이
붕괴돼 가는데,

새로운 펀드상품을
소개하는 식이다.

 

여기에 해당되는
대표 예들에도 ‘조중동’이 소개된다.

저자는 자세히 썼다.

그런데 한겨레 경향이라고
덜 그럴까?

 

책에는 등장하지
않는 한겨레의 사례를 하나 소개할까 한다.

 

며칠 전 출간된 한겨레21
제 798호에는

백화점 점원들의
목소리가 실렸다. AK백화점 직원들이 거리로 나왔다.

휴식 시간과 휴일이
보장 안 되는 노동 현실을 고발한 것이다.

백화점의 ‘화려함’
뒤에 감춰진 ‘어두운’ 노동현실을 비판했다.

시도 때도 없는 연장
영업과, 휴일에도 쉬지 않는 백화점의 운영 방침.

 

그런데 바로 2월
11일 한겨레 경제면에는

‘명절연휴 나들이
쇼핑몰로 가볼까’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다.

기사는 “일부 백화점들은
휴무를 설날 당일로 축소했고, 복합쇼핑몰들은 설날 당일만 쉬거나 당일에도 영업을
하면서 명절 편의 서비스나 이벤트를 쏟아내고 있다”며, “에이케이플라자 4개 점포도
모두 설날 당일만 쉬고 영업을 계속한다”고 말한다.

 

이 기사를 끝까지
읽어봐도 AK백화점의 점원의 노동 환경에 대한 얘기는 찾아볼 수 없다.

철저히 ‘고객(=소비자,
독자)의 편리함’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경제섹션의 기사
또는 정보성 기사만을 읽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주장하는 ‘신문 깊이 읽기의 세 지층’에 대한 얘기를 하고 포스트를 마칠까한다.
이 부분에 대해선 논란이 있을 것 같다.

나는 서로 다른 가치관을
신봉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저자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가치관을 중심으로 신문을 읽을 것을 당부하고 있다.

물론 그렇게 읽는
것이 ‘비판적 신문 읽기’에는 어느 정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감히 말하건대,
틀을 미리 정하는 것은 오히려 독이 될 수도 있다.

 

 

 

 

신문을 어떻게 읽어야
할까.

특히 요새같이 인터넷으로
많은 기사를 접하는 시대에는 어떤 방식이 적합할까.

한 가지 방법으로
나는 네이버캐스트 실시간 언론사 헤드라인을 추천한다.

http://news.naver.com/main/presscenter/category.nhn

 

img1.gif

 

홈페이지로 네이버캐스트를
정해 놓고,

자신이 원하는 언론사를
선택하는 것이다.

조선일보 중앙일보
동아일보

혹은

한겨레 경향신문

이렇게만 보지말고,

한 번에 여러 매체의
헤드라인을 볼 수 있도록 해 두는 것이다.

 

한 신문에 갇히는
것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이다.

물론 이를 방해하는
것 중 하나는 언론사들의 자극적 뉴스캐스트 편집.

이것 또한 점점 시정되길
기대해본다.

 

 

 

 

 

신문에는 사실의
나열만 있는 것이 아니다.

깨어있는 독자가
있을 때, 신문에도 진실이 있다.

손석춘도 그런 희망을
갖고 이 책을 썼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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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만원 세대의 대학 졸업식

어제는 나의 가장 친한 고교동창의 대학 졸업식 날이었다.

그런데 꽃다발도, 학사모도, 졸업‘식’도 없었다.

나의 친구가 졸업식을 가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수도권 소재의 한 사립대학을 나왔다.

(이런 표현이 정말 싫지만) 대한민국 학벌사회에서 소위 ‘이름 없는 대학’을 나온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대학에서 우등생이었다.

아무리 학점 인플레가 있기로서니 나는 한 번도 받아보지 못한 4.5만점에 4.5를 찍기도 했으며,

1학년 때부터 성적우수장학금도 곧잘 탔다.

뿐만 아니다.

단과대 학생회장도 맡으며 리더십도 길렀던 것으로 기억한다.

한마디로 대학생활에 충실한 학생이었단 뜻이다.

 

그럼에도 졸업을
앞둔 그녀는 현재 한 달에 80만원을 버는 아르바이트생 신분이다.

그런고로 졸업식엔 불참하기로 한 것.

졸업과 동시에 ‘사실상 백수’가 되는 것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자리에 부모님과 함께 있을 용기가 없어서였을 것이다.

 

졸업식에 가지 않는 대학생이 증가하고 있다.

한 인터넷 취업 사이트가 졸업예정자를 대상으로 졸업식 참석 여부를 설문조사했다.

미취업 졸업예정자 중 46.5%가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거나 하지 않겠다’고 답했다고 한다.

(출처 = http://www.newshankuk.com/news/news_view.asp?articleno=k2010021009560946593)

 

졸업식에 가는 대신 나와 그녀와 또 다른 친구 이렇게 셋은 함께 만나 점심을 먹었다.

서울엔 눈이 내리다 쌓이지 않고 녹아버렸다.

취업재수를 하고 있는 나 역시 그녀에게 거창한 선물은 못 하고,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 손편지를 건넸다.

 

지금 우리에게 닥친 현실이 우리가 청춘에 게을렀기 때문인지 구조적인 문제인지 나는 솔직히 모르겠다.

아무리 언론보도에서 취업률이 낮다는 통계가 나와도

결국 개인에게는 취업에 ‘성공했냐 실패했냐’는 문제로 귀결되기 때문에

또, ‘이렇게 하면 취업에 성공한다’는 류의 성공담이 넘쳐나면서,

88만원 세대로 추락했다는 것이 내가 ‘남들보다 더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답이 없는
것 같다.

사회, 아니 회사에서 요구하는 ‘토익점수’, ‘자격증’ 등의 스펙 올리기에 목을 매는 것밖에.

혹은
묻지마지원을 늘려 확률의 수를 높일 수밖에.

이제 와서 대학생활을 다시 시작할 수도 없는 노릇이니까 말이다.

 

 

내일부터
명절인데,


역시 같은 이유로,

즐겁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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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아지 당장 내쫓아."

 

 

"강아지 당장
내쫓아."

아빠가 말했다. 나의 강아지(사진)가
이렇게 착한 얼굴을 하고선 계속 사람을 물었다.

사건 당일. 아빠는
출근길 현관에서 손가락을 물렸고, 피가 한참이나 멈추지 않았던 것이다.

 

아빠가 퇴근하고
돌아와서 우리집에선 실랑이가 벌어졌다.

워낙 개를 기르는
것에 반대하던 아빠. 상황이 이렇게까지 되니 도저히 키우고 싶지 않으시단다.

 

그에 엄마는 담담하게
말했다.

"저 놈도 다
우리집이랑 인연이 있어 이렇게 온 것이다."

 

강아지 한 마리를
두고 ’인연’이란 말이 오갔다.

인연이란 人의 緣인
것인데 말이다.

 

인연이 뭐길래.

이 강아지는 아직
우리집에서 잘 살고 있다.

 

 

 

인연을 믿기 시작하는
순간, 일상의 개별 사건들이 심상치 않게 느껴진다.

작은 일들이 왠지
모르게 운명같고, 마치 "그렇게 하기로 예정돼 있었던" 일처럼 다가오는
것이다.

그런 느낌들에 저항하기란
어렵다.

 

 

그리고 며칠 후 우리집엔
최인호의 ‘인연’이라는 책이 배달돼 왔다.

뜻밖의 선물이었다.

 

 

최인호,
인연, 랜덤하우스 출판, 12000원

표지가
사람을 차분하게 한다.

 

 

나의 두뇌가 최인호라는
단어를 인식하자, ‘글 참 잘쓰던 작가’라는 검색결과를 내놓았다.

‘타인의 방’이 실려있는
단편집은 제대로 완독하지 못했었지만,

책을 한 쪽만 읽어도
‘문장 하나는 잘 쓰는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작가였던 것 같다.

 

 

 

이 책은 짧은 글을
많이 모은 에세이집이다.

그리고 내용들은
각기 개성이 있고 의미도 있어, 잠언으로 모셔도 될 만한 수준이다.

책을 받자마자 ‘인연’,
‘운명’ 등을 거론하며 호들갑을 떨었던 것을 부끄럽게 느껴졌다.

최인호의 ‘인연’은
운명론적 드라마가 아닌, 조용한 어조로 인생을 얘기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의 직업에 관한
그의 생각을 엿보자.

그는 고기먹는 스님과
술을 고래처럼 마시는 신부님들이 자기(최인호 자신)보다는 모두 훌륭한 사람이라고
믿는단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의
조그만 거짓말, 조그만 욕망을 부끄러워하고 슬퍼하고 미안해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창피해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누군가’의
사소한 도덕적 결함을 욕하는데는 바쁘지만,

스스로의 욕망은
당연시하며 부끄러워조차 하지 않았는지,

최인호는 묻는다.

 

잠시 숙연해진다.

 

 

 

 

 

삭막한 밤. 최인호의
‘인연’을 읽으면서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길. 나는 감히 그대에게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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