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콜라이 교회>
독일 라이프치히에는 두 개의 중요한 교회가 있다. 바흐가 합창단을 지휘했던 성 토마스 교회와 성 니콜라이 교회이다. 상업도시 라이프치히에서 상인의 수호신인 ”니콜라”에게 바쳐진 니콜라이 교회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커다란 물꼬를 튼 교회다.
이 교회의 제단 위를 보면 ”평화의 천사” 그림이 그려있고, 교회의 기둥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장식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이러한 ”평화”의 전당에서 ”평화의 기도회”가 열렸고, 이 기도회는 독일 경찰도 말릴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이 됐다.
이 교회의 역사를 설명하는 안내문 중에는 한국어로 된 것도 있었다. 교회 의자에 앉아 감명깊에 읽었다.
특히 평화를 가져온 ”촛불”과 ”기도”에 대한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
"촛불을 들려면 두 손이 필요했습니다.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한 손으로 가려야 하기 때문이죠. 촛불을 쥔 손으로는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 수 없었습니다."

<니콜라이 교회 근처의 상점의 전시대. 독일어는 잘 모르지만 ”tolerant und offen”은 ”관용과 개방”이란 뜻같다.>
1989년 가을의 경험
"니콜라이 교회-모든 사람에게 문을 연다"는 1989년 가을에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마침내 구 동독 전 지역의 사람들을 하나로 통일시켰던 것이었습니다. 외국에 출국을 요청하는 사람, 호기심을 가진 사람, 반정부 분자, 비밀경찰들, 교회관계자, 공산 당원들,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 이들 모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벌려진 팔 아래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1949년~1989년 사이에 정치적 현실을 감안한다면 상상도 못했던 것이 이제 현실이 되었던 것입니다.
라이프치히에 종교개혁이 행해진 바로 450년, 라이프치히 회전에서 176년 후 다시 이 도시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1989년 이후 니콜라이 교회에 통하는 거리는 경찰에 의해서 규제되고 봉쇄됐습니다. 이 후에는 라이프치히에 통하는 간선도로와 고속도로의 출구는 광범위하게 경찰의 통제하에 있었으며 또한 평화의 기도 시간에도 통행이 금지되었습니다. 동독 정부관리들은 평화의 기도를 중지시키기 위해 적어도 니콜라이 교회에서 교외로 옮기도록 우리들에게 압력을 강화했습니다. 매주 월요일에 평회 기도회와 관련된 체포 또는 임의동행이 행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2000석이 꽉차도록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운명의 10월9일이 다가왔습니다. 잊을 수 없는 날이 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폭력에 의한 진압이 군대, 전투요원, 경찰 그리고 사복경찰들에 의해서 획책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10월7일, 동독의 건국 40주년 기념의 날, 동독 역사에서 국민 애도의 날로 모든 행사가 벌써 시작이 된 것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이 날에 10시간 동안 유니폼을 입은 경찰들이 무저항, 무방비 상태의 사람들을 공격했으며, 트럭으로 이들을 날랐습니다. 이 중에 수백 명은 마르크클레베르크의 마굿 간에 감금했습니다.
바로 이 때에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됐습니다. -만약 필요하면 무력을 갖고, 결국은 이 ”반동 혁명”을 끝내야 하며, 진압해야 한다- 그래서 10월9일은 험악했습니다. 약 1000여 명의 공산당원이 니콜라이 교회에 가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벌써 오후 2시경에는 교회의 중간에 약 600명이 교회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임무는 규칙적으로 기도에 수 없이 참석한 비밀경찰의 임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아무 것도 계획되지 않았으며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이들도 동시에 교회의 이야기, 복음의 말씀과 그 영향권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나는 수 많은 비밀경찰들이 월요일마다 와서 산상수훈에 행복론을 듣는데 대해 항상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어느 곳에서 이것을 들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전혀 관련이 없는 모르는 교회에서 예수의 복음을 공산당원을 포함해 모두가 듣게 됐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고 말했지 "돈을 가진 자가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았고,
그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말했지 "적대자를 말살하라"고 하지 않았으며,
그는 "첫째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지 "모든 오래된 것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 자는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지, 조심 걱정하라고 하지 않았고,
그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하셨지, "너희는 크림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평화의 기도는 믿지 못할 정도의 정숙과 집중적인 분위기로 진행되어 나갔습니다. 예배가 끝나기 전에 즉 주교의 축도가 있기 전에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지휘자 마스어 교수의 호소문을 낭독했습니다. 즉 비폭력을 위해 우리들의 호소를 지지한 것입니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 중에서 쌍방의 공통점, 교회와 예술, 음악과 복음간의 연대는 대단히 중요시 되었습니다. 이렇게 평화의 기도회는 주교의 축도와 인상깊은 비폭력의 요구로 끝이 났습니다. 예배 후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교회 밖으로 나오자(나는 이 광경을 일생 잊을 수가 없는) 광장에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손과 손에 촛불을 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있을 때는 두 손이 필요했습니다. 촛불이 꺼지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두 손이 필요합니다. 촛불을 들고 동시에 돌과 몽둥이를 손에 쥘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비폭력주의의 예수님 정신은 대중을 사로 잡아 실재적이고 평화적인 힘으로 변했습니다. 군인, 전투부대, 경찰들은 군중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철수하였습니다.
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에는 승자와 패자가 없었으며, 아무도 상대편에 대해서 우월감을 갖지 않았으며 아무도 자존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단지 거대한 기부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비폭력의 운동은 단지 몇 주 밖에 유지되지 지, 당의 독재와 지배적인 세계관을 붕괴시켰습니다. 예수님은 권력자를 왕좌에서 넘어뜨리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높이십니다. "군대와 권력으로 아니고 주의 영으로 이루어지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시의 중심부와 거리에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어도 진열장의 유리 한 장도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비폭력의 안에서 우리들은 믿을 수 없는 멋진 경험을 하였습니다. 동독정부 중앙위원회에 속한 진더만은 죽음 직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들은 모든 것을 계획했다. 우리들은 모든 것에 대해 준비했다. 단지 촛불과 기도 외에는."
평화를 위한 기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니콜라이 교회에 실업문제 대책 이니시아티브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니콜라이 교회는 전에 있었던 것과 같이 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집,
희망의 집,
피난처와 출발의 장소로
- 퓌러 목사(Pfarre C. Fuhrer)

<니콜라이 교회 천정에 있는 ”평화의 천사” 그림>
니콜라이교회의 평화기도
우리들은 제단 위에 평화의 천사를 그리고, 평화의 상징으로서 교회의 중간과 천정을 지탱하는 기둥에 평화의 종려나무로 장식한 선조들은 평화의 기도가 우리 시대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도 10년 전만해도 보잘 것 없는 시작이 언젠가 이러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1980년대 초 매년 11월에 평화를 위한 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10일간 특히 젊은이들이 기도를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서독에서는 점차 증가하는 군비확장에 반대는 큰 데모가 일어났던 반면,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만 긴급한 문제를 고찰하는 가능성만 남아 있었습니다. 동시에 우리들에게도 군비확장의 문제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 기도회를 주마다 지속하고자 한 것은 라이프치히 동부에 있는 젊은 교인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평화 기도회는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정기적으로 열리게 됐습니다.
후에는 전의 군인들의 평화단체, 증대하는 물과 공기의 오염을 염려해서 넓게 세론에 호소한 환경보호 단체와 빈부 차이가 격심해 갈등이 심화되는 세계의 남북관계(북쪽에 위치한 부유한 나라들과 점점 가난해지는 남반구에 위치한 나라)를 걱정해 양심을 깨우고 가난한 나라들을 위한 자원활동을 개최하려는 젊은이들에 의해서 지속되었다.
동독이 외부에 대해서 여러 인권침해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자 자국의 정의와 인권준수를 위해서 요구한 단체들이 결국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평화 기도회는 한 때 단지 소수의 신도들에 의해서 진행됐지만 현실의 동기가 있을 때마다 체제에 저항하는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모였습니다. 동독에서 출국을 신청하는 시민의 수가 증가하자 특별한 압력이 가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들(거의 교인이 아닌데도)은 다른 방법이 없어 우리 교회에 모여서 서로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한편으로 집회를 교회의 성격 안에만 두는 것은 항상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다른 면으로는 우리들은 성서의 복음(특히 구약의 예언 구절이나 예수님의 산상수훈) 안에서 시국성을 발견했습니다. 긴급으로 요하며 사회의 곤궁상황에 대한 토론, 문제, 숙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 등 이런 것이 서로 긴밀한 하나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매주 월요일 니콜라이 교회 마당은 "불법 모임"을 제거하기 위하여 경찰들로 포위되자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 9월에 일부는 "밖으로 나가자"라고 외치고, 또 다른 일부는 "여기에 있자"라고 주장하고 있을 때도 사람들은 계속 체포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의해 점점 많은 라이프치히 사람들이 이 모임에 참가했습니다. 낮에는 교회의 창문에 꽃이 장식되었고 매일 저녁에 출발의 신호로 많은 촛불이 켜졌습니다.
그러나 큰 선물은 평화를 사랑하는 정신과 비폭력의 정신(우리가 매주일 산상수훈의 8복의 말씀을 근거해서 구한 것처럼)이 모든 활동에 영향을 끼친 것이었습니다.
이 자세는 평화의 기도를 위해서 교회에 모인 수 백 명의 사람들의 마음가 10월초에 광장과 거리에 모인 수천 명에게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우리들의 평화의 기도는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회의 여러가지 문제, 실업자에 대한 지원, 기차에서 폭력 당해 떨어진 사람들, 불구자와 고령자, 또 외국인 편입문제도 오늘날 시급한 문제입니다. 또한 항상 새로운 전쟁과 분쟁이 펼쳐 지는 위험지역, 착취와 기근으로 고생하고 있는 나라들, 증대되는 자연 파괴에 직면한 지구상의 생명의 보호를 위해서 우리의 기도와 노력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정의의 실천은 늘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 교구감독 마리기우스

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교회
성 니콜라이 교회는 1165년에 창설되었다. 동서유럽과 남북유럽을 연결하는 2개의 주요한 통상로의 교차점에 건설됐으며, 중세에 있어서 상인들의 수호신인 니콜라이에게 봉헌됐다.
지금도 이 교회는 시내 중심의 상가에 놓여 있으며, 전 세계에서 오는 보행자들에게 개방돼 있다.
원래 니콜라이 교회는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이었으며, 서편의 외관은 지금도 그 모습을 남기고 있다. 16세기 초에는 후기 고딕양식의 홀식교회로 증축이 됐으며, 현재에도 교회 외관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교회의 3개의 탑은 173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바뀌었다.
&nsp; 특히 내부는 아주 매력적이며, 그것은 건축사도트에 의해서 프랑스 양식을 모방한 의고주의적 양식으로 1784년에서 1797년에 걸쳐서 완전히 개장됐다. 라이프치히의 시민들은 자신의 문화의 고귀서을 세계에 보여주기를 원했다. 특히 종려나 양으로 만들얼진 기둥은 아주 인상적이며, 천정과 2층 의자에 마련된 풍부한 장식이 주의할 만하다.

당시의 화가 외서(A.F Oeser)는 교회를 위해 30점의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들은 교회의 현관과 제단에 있다. 제단 위에 있는 평화의 천사 모티브는 대단히 진귀하다.
1539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종교개혁이 행해진 이후 이 교회는 개혁교회로 변해 예배를 보게됐다. 1723년~1750년에 걸쳐서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이 교회에서 지휘자로서 교회음악의 활동을 한 때가 절정기를 이루었으며 바흐의 주요한 작품들이 여기서 초연이됐다. 1858년~1862년에 걸쳐서 바이센펠스 출신의 라데가스트가 오르간을 제작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오르간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며 20세기에 공기순환의 전통화로 현대화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