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명훈은 차이콥스키 상금을 어떻게 썼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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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에스트로 정명훈(서울시향 예술감독)은 1974년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피아노 부문에서 공동 2위를 했다.

  당시 4위가 안드라스 쉬프였으니 대단한 성적이었다. 정명훈도 피아노를 계속 했으면 분명 세계적인 피아니스트가 됐을 것이다.

  김수환 추기경에 대한 기사를 쓰기 위해 옛 동아일보를 찾아보던 중 정명훈 씨가 차이콥스키 콩쿠르 우승할 당시에 실린 재밌는 기사를 발견할 수 있었다. 1974년 7월11일자 동아일보 사회면. 정명훈 군이 2000루블의 상금을 받았지만, 달러로 교환하거나 외부 반출이 안돼 소련에서 돈을 다 쓰고 가야 했는데, 상점이 텅텅 비어 있어서 살 게 없었다는 이야기였다.

 

 

"정명훈 군 상금 처분에 골치"

 

”2천루블 달러 교환, 반출도 안돼. 살 물건없어 몽땅 蘇 비행기 표 사”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경연대회에서 2위를 차지한 정명훈 군(21)은 상금으로 받은 2000루블(2680달러)을 귀국에 앞서 처분하는데 10일 오전 내내 어려움을 겼었다.

  명훈 군은 소련돈으로 받은 상금은 ”모스크바”와 주요산물상점에서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들은 서방통화로만 거래하기 때문이었다. 소련당국은 루블화를 달러화로 교환해주지도 않았으며 루블화의 해외반출도 허용하지 않았다.

  ”모스카바” 시내에 "살만한 물건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안 명훈 군은 소련제 화병 1개와 약간의 레코드판을 사고난 나머지 1800루블을 모두 비행기표로 바꾸어 가지고 귀국길에 올랐다.

  비행기표는 어디에 쓰겠느냐는 질문에 정군은 "앞으로 많은 여행을 하기 위해서"라고 기자들에게 답변했다.

  명훈 군은 "애초에 이곳 ”차이코프스키” 경연대회에는 참가하지 않을 예정이었다"고 말하고 "너무 이르다고 생각했고 좀 더 공부를 하고 싶어어요. 그런데 가족과 친구들이 1978년 대회까지 기다릴 수 없지 않느냐고 권하는 바람에…."라고 말했다.

  그는 ”차이코프스키” 대회가 "스포츠와 다름없었다"고 술회했다. "관객은 그들이 좋아하는 연주자에게는 열광적인 갈채를 보내지요. 그렇지만 다른 재능있는 연주자들이 낙방하는 것을 보면 우울해져요. 음악은 그런 것이어서는 안되며 누구든 무언가 개성적인 것을 제시해주니까요."

  명훈 군은 이어 "제 동료들의 얼굴을 보기만해도 다시는 그런 대회에 나가고 싶지 않다"고 덧붙였다.

 (1974년 7월11일자 동아일보 사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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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이코프스키 콩쿠르 2위는 당시 한국에서는 엄청난 사건이었다. 적대국가였던 소련에서 받은 상이었으니 더욱 그렇다.

 정명훈은 당시 김포공항에서 서울시청까지 카퍼레이드를 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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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크 음악과 재즈는 통한다?

어제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즉흥연주의 즐거움을 맛본 날이었다.

오전에는 모차르트의 즉흥연주의 대가인 로버트 레빈(하버드대) 교수의 강연을 한양대에서 들었고,

오후에는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카르미뇰라와 베니스바로크 오케스트라의 비발디 공연을 보았다.

바로크 음악은 원래 즉흥연주와 장식음이 많기로 유명하지만 모차르트, 베토벤시대 초기까지도

즉흥연주가 연주회에서는 필수적이었다는 사실은 무척 흥미로웠다.

또한 카르미뇰라는 멋진 몸매와 유쾌한 제스처로 시종일관 동료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쳄발로나 콘트라베이스 같은 바소 콘티누오(통주 저음)에 기반을 둔 채 자유롭게 즉흥으로 연주하며 즐기는 모습에 "아, 이탈리아 음악이란 저런 것이구나"하는 느낌이 절로 들었다. 류트의 소리도 참 아름다웠다.

고전음악은 이처험 현대의 재즈음악과 통하는 맛이 있다. 재즈음악이 콘트라베이스나 베이스 기타가 화음을 깔아주면 그 위에서 멜로디 악기들이 맘껏 즉흥과 기교를 부리며 자유롭게 변화하듯이 바로크 이전 시대의 음악도 통주저음 악기 위에서 다른 악기들이 자유롭게 즉흥을 즐기는 것이다. 연주자도 관객도 함께 즐기는 살롱음악이 바로크 음악이자, 재즈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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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에서 연주하면서 강의하는 로버트 레빈>

 

  “아름다운(beautiful) 것은 예쁜(pretty) 것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닙니다. 만일 조르지오 아르마니, 루이 뷔통, 프라다 같은 명품으로 치장한 여자친구가 있다고 칩시다. 처음엔 아름다울 수 있겠지만 이런 여자친구가 석달 뒤에도 좋을까요?”

  모차르트 연주의 세계적인 권위자인 피아니스트 로버트 레빈 교수(하버드대)가 29일 오전 11시 한양대 백남음악관을 찾아 강연회를 열었다. 그는 강의와 피아노 연주를 번갈아가며 “모차르트라고 한없이 아름답고 우아해야만 한다면 얼마나 지루하겠는가”라며 도발적 질문을 던져댔다.  

  “모차르트가 남긴 악보를 과연 그대로 쳐야 한다고 생각하나요?”

  레빈 교수는 피아노에 앉아 실제 모차르트가 남긴 피아노협주곡 22번의 자필악보를 커다란 스크린에 띄워놓고 연주했다. 악보는 한 눈에 봐도 듬성듬성했다. 악보에 있는 음표를 그대로 연주하니 단조롭기 그지 없었다. 그는 “이 악보는 모차르트 자신만을 위한 악보였다”며 “모차르트는 실제로 공연장에서 자신의 머릿 속에서 그때그때 떠오르는 수많은 음표들을 꺼내 연주했다”고 설명했다.  

  ○ 실시간 즉흥연주 콘서트

  이날 강연회는 31일 호암아트홀에서 첫 내한독주회를 갖는 레빈 교수를 초청해 이뤄진 강연회다. 음악학자인 레빈은 사이먼 래틀, 로저 노링턴, 존 엘리엇 가디너 등의 지휘자와 함께 모차르트, 베토벤 시대의 즉흥연주와 카덴차(독주자의 기교를 자유롭게 보여주는 부분)를 복원하는 데 세계적인 명성을 갖고 있다.

  그는 이번 공연에서도 모차르트 즉흥연주의 진수를 보여준다. 1부에선 모차르트의 ‘반짝 반짝 작은 별’ 멜로디로 유명한 변주곡을 연주하며, 인터미션 시간에 관객들로부터 받은 즉석 주제를 모차르트 스타일로 만든 실시간 즉흥연주를 들려준다. 또한 모차르트의 미완성 곡(K400, K312)을 자신이 직접 완성한 복원연주를 들려준다.

  레빈 교수는 “현재 연주되고 있는 모차르트의 악보는 즉흥연주를 할 수 있었던 전문연주자들이 아닌 귀족층 여성들 같은 아마추어를 위해 후대에 정리한 것”이라며 “과거에는 살아 있는 언어로 연주하는 미학이 중요시됐지만, 점차적으로 확정된 텍스트를 외워서 완벽하게 재연하는 것을 추구하면서 즉흥연주가 사라지게 됐다”고 안타까워했다.

 

  ○우리도 실생활에서 즉흥연주

  “모차르트와 같은 천재의 작품에 감히 평범한 우리가 어떻게 즉흥적으로 장식음을 달 수있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러나 우리도 말을 할 때 즉흥으로 합니다. 연설을 할 때나 대화를 할 때 원고대로 한다면 얼마나 딱딱하겠어요. 음악도 언어(language)입니다. 연극에서 상대방이 총부리를 겨누는 데 상대방이 조용히 대사를 한다면 연기가 되겠습니까. 상황에 맞게 청중과 소통했던 모차르트의 즉흥언어를 배워야 합니다.”

  그는 우리가 영어, 프랑스어같은 외국어를 배우는 것처럼 연주자는 악보 연습만 할 것이 아니라 모차르트, 베토벤의 언어습관을 배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작곡가들이 평소에 어떤 스타일로 말하는 지를 면밀히 연구한다면, 악보가 비어있는 곳에 작곡가의 언어로 즉흥연주를 채워넣을 수 있다는 것.  

  그는 “모차르트에게 협주곡을 연주하는 일은 요즘처럼 신성한 걸작과 교감하는 ‘박물관스러운(museum-like)’ 의식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쇼-비즈니스’에 가까웠다”며 “오페라처럼 우아하고, 매력적이고, 장난스럽고, 대담하고, 비극적인 요소가 가득한 그의 드라마틱한 작품들은 틀림없이 미리 계획되지도 않고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요소로 가득차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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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에서 줄이 끊어진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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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19일 내한공연을 가졌던 LA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라벨의 ‘볼레로’, 스트라빈스키의 ‘불새’와 같은 무용곡을 무지개빛 색채감과 생동감 넘치는 연주로 객석을 사로잡았다.  

  금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다이내믹한 지휘를 선보인 에사 페카 살로넨의 카리스마 때문이었을까. 19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불새’ 공연 도중 피터 스톰프 첼로 수석의 현(絃)이 그만 ‘툭’하고 끊겼다. 첼로 수석은 옆자리에 앉은 부수석과 첼로를 바꿔서 연주했고, 부수석은 호주머니에서 여분의 줄을 꺼내 무대 위에서 긴급하게 줄을 교체했다.  

  오케스트라 공연 도중 협연자나 단원들의 악기의 줄이 끊어지는 해프닝은 심심찮게 일어난다. 바이올리니스트 양고운 씨는 “무대 중심에서 협연하는 솔리스트의 바이올린 줄이 끊어지면 악장의 바이올린을 빌리고, 악장은 부악장의 것을 빼앗아 연주하다 보면 솔리스트의 악기가 맨 뒷 줄 단원에게 가 있는 경우도 있다”고 소개했다.

  악기를 빌리는 것은 오케스트라 연주는 흐름이 생명이기 때문. 남의 악기로 연주하는 것은 쉽지 않지만, 세계적인 연주자는 어떤 상황에서도 제 실력을 발휘해야 한다.     

  일본인 바이올리니스트 고토 미도리는 15세 때 탱글우드 음악제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 지휘하는 보스턴 심포니와 공연도중 바이올린의 줄이 끊겼다. 미도리는 악장에게 빌려 연주하는데 바이올린의 줄이 또 끊어졌다. 이어 부악장의 악기를 또 빌리면서도 차분하게 연주를 마쳐 관객들에게 뜨거운 기립박수를 받았다. 다음날 뉴욕타임스는 1면 기사에서 “15세의 소녀가 3대의 바이올린으로 탱글우드를 정복했다”고 찬사를 보냈다.   

  선천성 소아마비로 앉아서 연주하는 바이올리니스트로 유명한 이작 펄만은 한 장애인 후원음악회에서 협연 도중 줄이 끊어지자 악기를 바꾸지 않고 3개의 현만으로 연주해 감동을 주었다. 당시 그는 “삶이란 뜻하지 않는 어려움의 연속이다. 모자라면 모자란대로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도 샌프란시스코 심포니와 연주도중 줄이 끊겼을 때 겪었던 재미난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악장에게 바이올린을 빌리려했는 데 거부했어요. 급한 마음에 악기를 힘으로 빼앗아 공연을 마쳤지요요. 나중에 악장이 사과하더군요. 알고보니 오케스트라의 후원자가 사준 그 바이올린은 계약서에 악장만 사용하도록 돼 있었어요. 그날 객석에 그 후원자가 와 있어서 난처했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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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통일의 물꼬를 튼 니콜라이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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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이 교회>

 

 독일 라이프치히에는 두 개의 중요한 교회가 있다. 바흐가 합창단을 지휘했던 성 토마스 교회와 성 니콜라이 교회이다. 상업도시 라이프치히에서 상인의 수호신인 ”니콜라”에게 바쳐진 니콜라이 교회는 1989년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 커다란 물꼬를 튼 교회다.

  이 교회의 제단 위를 보면 ”평화의 천사” 그림이 그려있고, 교회의 기둥에는 평화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장식이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이러한 ”평화”의 전당에서 ”평화의 기도회”가 열렸고, 이 기도회는 독일 경찰도 말릴 수 없는 거대한 물결이 됐다.

  이 교회의 역사를 설명하는 안내문 중에는 한국어로 된 것도 있었다. 교회 의자에 앉아 감명깊에 읽었다.

 

  특히 평화를 가져온 ”촛불”과 ”기도”에 대한 이야기가 눈에 띄었다.

  "촛불을 들려면 두 손이 필요했습니다. 촛불이 꺼지지 않도록 한 손으로 가려야 하기 때문이죠. 촛불을 쥔 손으로는 돌멩이와 몽둥이를 들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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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이 교회 근처의 상점의 전시대. 독일어는 잘 모르지만 ”tolerant und offen”은 ”관용과 개방”이란 뜻같다.>

 

 

 1989년 가을의 경험

 

  "니콜라이 교회-모든 사람에게 문을 연다"는 1989년 가을에 우리 모두를 놀라게 한 현실이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는 마침내 구 동독 전 지역의 사람들을 하나로 통일시켰던 것이었습니다. 외국에 출국을 요청하는 사람, 호기심을 가진 사람, 반정부 분자, 비밀경찰들, 교회관계자, 공산 당원들,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 이들 모두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벌려진 팔 아래서 하나가 되었습니다. 1949년~1989년 사이에 정치적 현실을 감안한다면 상상도 못했던 것이 이제 현실이 되었던 것입니다.

  라이프치히에 종교개혁이 행해진 바로 450년, 라이프치히 회전에서 176년 후 다시 이 도시는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1989년 이후 니콜라이 교회에 통하는 거리는 경찰에 의해서 규제되고 봉쇄됐습니다. 이 후에는 라이프치히에 통하는 간선도로와 고속도로의 출구는 광범위하게 경찰의 통제하에 있었으며 또한 평화의 기도 시간에도 통행이 금지되었습니다. 동독 정부관리들은 평화의 기도를 중지시키기 위해 적어도 니콜라이 교회에서 교외로 옮기도록 우리들에게 압력을 강화했습니다. 매주 월요일에 평회 기도회와 관련된 체포 또는 임의동행이 행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2000석이 꽉차도록 사람들은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운명의 10월9일이 다가왔습니다. 잊을 수 없는 날이 된 것입니다. 놀랍게도 폭력에 의한 진압이 군대, 전투요원, 경찰 그리고 사복경찰들에 의해서 획책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10월7일, 동독의 건국 40주년 기념의 날, 동독 역사에서 국민 애도의 날로 모든 행사가 벌써 시작이 된 것을 알리고 있었습니다.

  이 날에 10시간 동안 유니폼을 입은 경찰들이 무저항, 무방비 상태의 사람들을 공격했으며, 트럭으로 이들을 날랐습니다. 이 중에 수백 명은 마르크클레베르크의 마굿 간에 감금했습니다.

  바로 이 때에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게재됐습니다. -만약 필요하면 무력을 갖고, 결국은 이 ”반동 혁명”을 끝내야 하며, 진압해야 한다- 그래서 10월9일은 험악했습니다. 약 1000여 명의 공산당원이 니콜라이 교회에 가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벌써 오후 2시경에는 교회의 중간에 약 600명이 교회를 채우고 있었습니다. 이들의 임무는 규칙적으로 기도에 수 없이 참석한 비밀경찰의 임무와 같았습니다. 그러나 결국은 아무 것도 계획되지 않았으며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결국은 이들도 동시에 교회의 이야기, 복음의 말씀과 그 영향권에 놓이게 된 것입니다.

   나는 수 많은 비밀경찰들이 월요일마다 와서 산상수훈에 행복론을 듣는데 대해 항상 긍정적으로 보았습니다. 그들은 다른 어느 곳에서 이것을 들을 수가 있었겠습니까? 그들은 자기들이 전혀 관련이 없는 모르는 교회에서 예수의 복음을 공산당원을 포함해 모두가 듣게 됐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말했습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나니"라고 말했지 "돈을 가진 자가 행복하다"고 말하지 않았고,

  그는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라!"라고 말했지 "적대자를 말살하라"고 하지 않았으며,

  그는 "첫째가 마지막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지 "모든 오래된 것이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기의 생명을 버리는 자는 얻을 것이다"라고 하였지, 조심 걱정하라고 하지 않았고,

  그는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고 말하셨지, "너희는 크림이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평화의 기도는 믿지 못할 정도의 정숙과 집중적인 분위기로 진행되어 나갔습니다. 예배가 끝나기 전에 즉 주교의 축도가 있기 전에 게반트하우스 관현악단의 지휘자 마스어 교수의 호소문을 낭독했습니다. 즉 비폭력을 위해 우리들의 호소를 지지한 것입니다.

  이러한 긴박한 상황 중에서 쌍방의 공통점, 교회와 예술, 음악과 복음간의 연대는 대단히 중요시 되었습니다. 이렇게 평화의 기도회는 주교의 축도와 인상깊은 비폭력의 요구로 끝이 났습니다. 예배 후 2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교회 밖으로 나오자(나는 이 광경을 일생 잊을 수가 없는) 광장에 수천 명이 넘는 사람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손과 손에 촛불을 들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촛불을 들고 있을 때는 두 손이 필요했습니다. 촛불이 꺼지지 않게 보호하기 위해서는 두 손이 필요합니다. 촛불을 들고 동시에 돌과 몽둥이를 손에 쥘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적은 일어났습니다.

  비폭력주의의 예수님 정신은 대중을 사로 잡아 실재적이고 평화적인 힘으로 변했습니다. 군인, 전투부대, 경찰들은 군중들과 대화를 나누었고 철수하였습니다.

  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뜻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여기에는 승자와 패자가 없었으며, 아무도 상대편에 대해서 우월감을 갖지 않았으며 아무도 자존심을 잃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단지 거대한 기부만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이 비폭력의 운동은 단지 몇 주 밖에 유지되지 지, 당의 독재와 지배적인 세계관을 붕괴시켰습니다. 예수님은 권력자를 왕좌에서 넘어뜨리고 보잘 것 없는 사람들을 높이십니다. "군대와 권력으로 아니고 주의 영으로 이루어지리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시의 중심부와 거리에 수십만 명의 사람들이 모였어도 진열장의 유리 한 장도 깨어지지 않았습니다. 비폭력의 안에서 우리들은 믿을 수 없는 멋진 경험을 하였습니다. 동독정부 중앙위원회에 속한 진더만은 죽음 직전에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들은 모든 것을 계획했다. 우리들은 모든 것에 대해 준비했다. 단지 촛불과 기도 외에는."

   평화를 위한 기도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현재, 니콜라이 교회에 실업문제 대책 이니시아티브가 생겼습니다. 이렇게 니콜라이 교회는 전에 있었던 것과 같이 속 이어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집,

  희망의 집,

  피난처와 출발의 장소로

   -  퓌러 목사(Pfarre C. Fuhr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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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니콜라이 교회 천정에 있는 ”평화의 천사” 그림>

 

  

  니콜라이교회의 평화기도

 

  우리들은 제단 위에 평화의 천사를 그리고, 평화의 상징으로서 교회의 중간과 천정을 지탱하는 기둥에 평화의 종려나무로 장식한 선조들은 평화의 기도가 우리 시대에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될 것을 의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들도 10년 전만해도 보잘 것 없는 시작이 언젠가 이러한 큰 영향력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1980년대 초 매년 11월에 평화를 위한 집회가 시작되었습니다. 10일간 특히 젊은이들이 기도를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서독에서는 점차 증가하는 군비확장에 반대는 큰 데모가 일어났던 반면, 우리들은 교회 안에서만 긴급한 문제를 고찰하는 가능성만 남아 있었습니다. 동시에 우리들에게도 군비확장의 문제가 계속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 평화 기도회를 주마다 지속하고자 한 것은 라이프치히 동부에 있는 젊은 교인들이었습니다. 이렇게 평화 기도회는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정기적으로 열리게 됐습니다.

  후에는 전의 군인들의 평화단체, 증대하는 물과 공기의 오염을 염려해서 넓게 세론에 호소한 환경보호 단체와 빈부 차이가 격심해 갈등이 심화되는 세계의 남북관계(북쪽에 위치한 부유한 나라들과 점점 가난해지는 남반구에 위치한 나라)를 걱정해 양심을 깨우고 가난한 나라들을 위한 자원활동을 개최하려는 젊은이들에 의해서 지속되었다.

  동독이 외부에 대해서 여러 인권침해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자 자국의 정의와 인권준수를 위해서 요구한 단체들이 결국 가담하게 되었습니다. 평화 기도회는 한 때 단지 소수의 신도들에 의해서 진행됐지만 현실의 동기가 있을 때마다 체제에 저항하는 많은 사람들이 여기에 모였습니다. 동독에서 출국을 신청하는 시민의 수가 증가하자 특별한 압력이 가해지게 되었습니다. 이들(거의 교인이 아닌데도)은 다른 방법이 없어 우리 교회에 모여서 서로 의견을 교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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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편으로 집회를 교회의 성격 안에만 두는 것은 항상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다른 면으로는 우리들은 성서의 복음(특히 구약의 예언 구절이나 예수님의 산상수훈) 안에서 시국성을 발견했습니다. 긴급으로 요하며 사회의 곤궁상황에 대한 토론, 문제, 숙고, 하나님 앞에서 기도 등 이런 것이 서로 긴밀한 하나의 관계에 있었습니다.

  매주 월요일 니콜라이 교회 마당은 "불법 모임"을 제거하기 위하여 경찰들로 포위되자 긴장감이 고조되기 시작했습니다.

  1989년 9월에 일부는 "밖으로 나가자"라고 외치고, 또 다른 일부는 "여기에 있자"라고 주장하고 있을 때도 사람들은 계속 체포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으로 의해 점점 많은 라이프치히 사람들이 이 모임에 참가했습니다. 낮에는 교회의 창문에 꽃이 장식되었고 매일 저녁에 출발의 신호로 많은 촛불이 켜졌습니다.

  그러나 큰 선물은 평화를 사랑하는 정신과 비폭력의 정신(우리가 매주일 산상수훈의 8복의 말씀을 근거해서 구한 것처럼)이 모든 활동에 영향을 끼친 것이었습니다.

  이 자세는 평화의 기도를 위해서 교회에 모인 수 백 명의 사람들의 마음가 10월초에 광장과 거리에 모인 수천 명에게 영향을 끼친 것입니다. 우리들의 평화의 기도는 계속 진행되고 있습니다. 사회의 여러가지 문제, 실업자에 대한 지원, 기차에서 폭력 당해 떨어진 사람들, 불구자와 고령자, 또 외국인 편입문제도 오늘날 시급한 문제입니다. 또한 항상 새로운 전쟁과 분쟁이 펼쳐 지는 위험지역, 착취와 기근으로 고생하고 있는 나라들, 증대되는 자연 파괴에 직면한 지구상의 생명의 보호를 위해서 우리의 기도와 노력이 요구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기도와 정의의 실천은 늘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습니다.

   - 교구감독 마리기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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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 성 니콜라이교회

 

  성 니콜라이 교회는 1165년에 창설되었다. 동서유럽과 남북유럽을 연결하는 2개의 주요한 통상로의 교차점에 건설됐으며, 중세에 있어서 상인들의 수호신인 니콜라이에게 봉헌됐다.

  지금도 이 교회는 시내 중심의 상가에 놓여 있으며, 전 세계에서 오는 보행자들에게 개방돼 있다.

  원래 니콜라이 교회는 로마네스크 건축 양식이었으며, 서편의 외관은 지금도 그 모습을 남기고 있다. 16세기 초에는 후기 고딕양식의 홀식교회로 증축이 됐으며, 현재에도 교회 외관에서 그것을 볼 수 있다. 교회의 3개의 탑은 173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바뀌었다.

&nsp; 특히 내부는 아주 매력적이며, 그것은 건축사도트에 의해서 프랑스 양식을 모방한 의고주의적 양식으로 1784년에서 1797년에 걸쳐서 완전히 개장됐다. 라이프치히의 시민들은 자신의 문화의 고귀서을 세계에 보여주기를 원했다. 특히 종려나 양으로 만들얼진 기둥은 아주 인상적이며, 천정과 2층 의자에 마련된 풍부한 장식이 주의할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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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의 화가 외서(A.F Oeser)는 교회를 위해 30점의 그림을 그렸다. 이 그림들은 교회의 현관과 제단에 있다. 제단 위에 있는 평화의 천사 모티브는 대단히 진귀하다.   

  1539년에 라이프치히에서 종교개혁이 행해진 이후 이 교회는 개혁교회로 변해 예배를 보게됐다. 1723년~1750년에 걸쳐서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이 교회에서 지휘자로서 교회음악의 활동을 한 때가 절정기를 이루었으며 바흐의 주요한 작품들이 여기서 초연이됐다. 1858년~1862년에 걸쳐서  바이센펠스 출신의 라데가스트가 오르간을 제작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오르간 중 가장 중요한 작품이며 20세기에 공기순환의 전통화로 현대화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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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이 된 바흐와 멘델스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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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라이프치히에 있는 성 토마스 교회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가 죽을 때까지 오르니스트 겸 칸토르(합창지휘자)로 봉직하면서 수많은 명곡들을 초연했던 유서깊은 교회다. 겉모양은 거의 가톨릭 성당과 흡사하다. 그러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할 때 루터교회로 변해서 개신교 교회가 됐다. 한국의 교회들은 거의 아무런 장식도, 십자가에 예수님이 매달린 고상도, 파이프 오르간도 없는 것이 보통이다. 미국식 개신교회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럽의 유서깊은 교회는 성당과 흡사하며, 음악도 파이프오르간에 맞춘 클래식 음악이 연주된다. 미국식 개신교회의 영향을 받은 한국의 교회처럼 마이크가 설치돼 있고, 드럼을 두들기고, 손벽을 치면서 몸을 흔들면서 부르는 찬송가는 없다. 성토마스 교회에는 매주 토요일 오후와 일요일 오전에는 어린이들로 구성된 성토마스 합창단(바흐가 지휘했던!)의 음악회가 지금도 열린다. 마침 갔을 때는 월요일이라 듣지 못해 아쉬웠다. 다음엔 주말을 이용해서 가리라!
  성 토마스 교회를 둘러보던 중 가장 인상깊은 것이 창문의 스테인드 글라스였다. 유럽이든 국내든 성당의 스태인드글라스에는 대부분 예수 그리스도나 성인들의 행적이 그려져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런데 성 토마스 교회에는 라이프치히의 가장 유명했던 두 음악가, 바흐와 멘델스존의 얼굴이 스테인드 글라스에 그려져 있었다. ”음악의 아버지” 바흐는 이곳에선 성인의 반열에 든 것이다. 인성과 신성의 오묘한 조합을 이뤄내는 바흐의 음악을 볼 때, 충분히 성스러운 대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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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교회 밖에 서 있는 바흐의 동상. 사진이나 영상물에서 늘 보여주던 이 동상이, 바로 성토마스 교회 앞에 서 있는 것이었다니! 내가 찍은 사진이지만 참 늠름하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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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교회의 합창단석. 12~19세의 아이와 청소년들로 구성된 성토마스 합창단이 예배를 볼 때 노래를 하는 곳이다. 그 밑바닥에는 바흐의 묘지가 있다. 아직도 그의 묘비석 위에는 늘 꽃들이 던져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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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스테인드 글라스에는 펠릭스 멘델스존이 그려져 있다. 라이프치히의 부유한 가문에서 태어난 멘델스존은 바흐가 죽은 지 100년 뒤에 바흐를 부활시킨 음악가로 인정받았다. 그에 의해 먼지만 쌓여 잊혀져 가던 바흐의 악보가 다시 연주되고, 살아난 것이었다. 그는 바흐의 ”마태수난곡”을 바흐 사후 처음으로 다시 연주했다. 이후로 바흐가 인류 역사에 길이 남을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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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오케스트라 홀에는 실내악홀의 이름이 ”멘델스존 잘”이었다. 로비엔 멘델스존의 동상도 서 있었다.  
내년은 멘델스존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 게반트하우스에선 10월4일 리카르도 샤이의 지휘로 ”멘델스존 200주년의 해” 오프닝 콘서트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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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치히 토마스 교회

 
  

예술품
  설화석고(雪花石膏)로 만들어진 세례대는 1614~15년에 되테버(Franz Doteber)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인데 여기에 성서의 장면이 묘사되고 있다. 성가대석에 있는 측랑(側廊) 제단은 15세기 무명의 거장에 의해서 만들어진 귀중한 작품인데 이것은 원래 1968년에 폭파해체된 파을린 교회(대학교회)에 있었던 것이다.
  라이프치히 시 교구감독의 역대 초상화는 성가대석에 설치되어 있다. 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1614년에 만들어진 것이다. 구리로 된 묘 표식판의 아래에는 1950년부터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유해가 안장돼 있다. 이 유해는 1894년에 요한니스 교회의 묘지에서 발견됐으며, 그후 1900년부터는 요한니스 교회에 매장돼 있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이 교회가 파괴되어, 1949년에 그의 유골이 토마스 교회로 옮겨졌다.
  설교단의 반대편에 있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은 뢰벨(Caspar Frierich Lobel)에 의해서 만들어졌는데, 바흐시대의 몇 개 남아 있지 않은 희소품 중에 하나이다. 주목할 가치가 있는 것은 묘 표식판의 숫자로, 최고(最古)의 것은 기사 하라(Hara, 1451년 몰)의 것이다. 이것은 측면의 왼편에 남쪽 2계석의 아래에 있다. 방형부 북측에는 1612년 시 참사회원 라이허를 위한 비명이 걸려 있다.
  원래 토마스 교회는 단순한 장식유리창으로 돼 있었는데, 1889년 이후 성가대석과 남측면에 색채의 유리창이 끼워졌다. 성가대석에 있는 창의 그림에는 그리스도의 탄생, 세례, 부활과 엠마오 제자가 그려져 있다. 2000년 5월에는 유일하게 전쟁에 파손된 성가대석의 창문이 슈톡크하우젠에 의해서 설계된 토마스 창으로 바뀌었다. 남측의 창에 묘사돼 있는 것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향해서) 제1차 세계대전의 전몰자 추도용의 창, 스웨덴 국왕 아돌프 구스타프 2세,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 작센 선후제 프리드리히 현제(賢帝)와 필림 멜란흐톤과 함께 한 마르틴 루터, 펠릭스 멘델스존 바르톨디(1997년 이후), 황제 빌헬름 1세이다.
  
  오르간과 악기
  바흐시대의 오르간은 남아 있지 않다. 서쪽 2층 성가대석에 설치돼 있는 오르간은 1889년에 자우어(Wilhelm Sauer)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이다. 이 로만틱 양식의 오르간은 원래 63음정으로 돼 있었는데 1908년에 88음으로 증가시킨 것이다. 1967년부터 홀의 북동쪽에 슈케(Alexander Schuke)의 오르간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이것은 1999년에 퓌르슈텐봘데에 있는 성 마리아 성당으로 옮겨졌다.
  바흐의 해 2000년에 성가대의 바흐 창문의 반대편에 새로운 바흐 오르간이 설치됐다. 이것은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오르간 곡을 연주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며, 마르브르크의 게랄트 뵐 오르간 제작소에 의해 만들어졌다. 4개의 마누알과 페달의 위에 설치되 61의 음정을 갖는 이 오르간의 음색은 18세기 중부독일의 오르간 구조에 맞추어 있다. 외부의 모양은 바흐가 연주한, 후에 파손된 라이프치히대학교 교회의 오르간에서 힌트를 얻은 것이다.   
  토마스교회의 성구실에는 교회 소유의 바흐시대의 악기가 진열돼 있다. 이 진열품에는 바이올린 2개, 비올라 1개, 콘트라바스 1개, 첼로 1개 그리고 팀파니 2개가 있다.

  토마스교회 소년합창단과 지휘자
  토마스교회 소년합창단에 대해서 최초의 문서기록은 1254년까지 소급되지만 합창단의 존재는 수도원과 같은 시기로 추정되고 있다. 바흐의 시대에는 54명의 단원으로 구성된 합창단은 지금은 약 100명의 학생으로 구성돼 있다. 이 합창단은 특히 매주에 연주되는 모테트와 칸타나 그리고 매주일에 행해지는 예배에서 바흐의 작품을 보존하는 것이 의무로 되어 있다. 그리고 매년 1회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움과 2개의 수난곡 중에 하나가 연주되고 있다.
  바흐 이전 시대에 주목되는 지휘자로는 칼뷔시우스(1594~1615), 샤인(1616~1630), 쿠우나우(1701~1722) 등이다.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토마스 교회의 지휘를 맡은 것은 1723년에서 1750년 7월28일, 즉 서거하는 날까지이다.
  바흐 이후에 유명한 지휘자로는 다음과 같다. 요한 아담 힐러(1789~1800)는 1763년에 소위 ”애호가 콘체르토”를 시작했으며 이것이 1781년에 ”게반트하우스 콘체르토”가 된다. 요한 고트프리트 봐인리크(1823~1842)는 리하르트 봐그너의 음악선생이기도 하다.
  20세기가 되어 토마스 교회 합창단의 이름을 세계로 넓히는 데 공헌한 지휘자들로서는 칼 슈트라우베(1918~1940), 귄터 라민(1940~1956), 쿠르트 토마스(1957~1961), 에르하르트 마우어스베르거(1962~1971), 한스 요아킴 롯취(1972~1991) 등이 있다. 1992년 이후 게오르그 크리스토프 빌러 교수가 지휘를 하고 있다.

  모테트와 오르간 연주
  금요일  18시
  토요일  15시 (칸타타 연주) 

 교회건물과 그 역사
 1160년경 마이센 왕국의 오토 변경백(邊境伯)은 성새(城塞)와 성 근처 마을 리브찌(Libzi)에 도시권(權)을 수여받았다. 토마스 교회의 성가대석과 중앙 방형부(方形部)를 발굴조사할 때 발견한 교회의 기초벽은 거의 같은 무렵에 된 것이다. 그 이상의 것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최초의 건물은 1212년에 디트리히 변경백에 의해서 만들어진 아구스티누스 수도원으로 시작이 되고 있다.
  1355년에는 성가대석이 로마네스크 양식에서 고딕양식으로 개조됐다. 성가대석의 북측에 있는 창, 탑의 아래층, 남북으로 넓힌 방형부 그리고 그 둥근 천정과 콘솔레(버팀대)는 1355년 전에 된 것이다. 15세기 말에 ”에르쯔게비르게(Erzgebirge)” 산지에 은이 발견됨으로 라이프치히는 부유한 경제도시가 된다. 이 결과로 라이프치히 교회들은 40년 이내에 개축과 증축이 된다. 1482년에 토마스 교회는 로마네스크 양식의 중랑(中廊)을 철거하고 새로운 후기 고딕양식의 홀형 교회가 개축되어 오늘날까지 이르고 있다. 1496년에 제막식이 이루어졌다. 그 후는 1702년의 탑이 완성되기까지 토마스교회의 건물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17세기에 된 예배당 증축부와 장당(長堂)의 북측 전체에 만들어진 2개의 층계실이 19세기말에 제거됐다.
  라이프치히는 무역으로 번영이 되었기에 교회의 장식은 때로는 그 시대의 취향에 맞게 되었다. 대수리가 행해진 것은 1884-89년의 것이다. 이 때에 바로크시대 특히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토마스교회에서 활동한 시대(1723~1750년)의 장식은 전부 제거됐다. 그 이후의 교회의 내부 장식은 신 고딕양식으로 변했다. 서측의 정문도 이 시대에 된 것이다. 1961~64년의 개축에는 후기 고딕의 홀형 교회로서 성격이 일층 강화되도록 노력했다.
  1990년에 동서독일이 통일되고서 100년 이상을 그대로 보존한 교회의 종합 대수리의 가능성이 열렸다. 이 계획은 폭넓게 지지를 받아서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의 몰후 250주년에 해당하는 2000년 7월28일까지 하기로 결정이 되었으며, 여기에 수반해서 새로운 바흐 오르간이 설치됐다. 이것이 실현된 것은 유럽연합, 독일연방공화국, 작센주, 라이프치히시에서 공공 조성금과 여기에 3년간에 천만마르크의 일반 기부금을 모은 ”토마스교회-바흐 2000년” 협회의 협찬사업이었다.
  교회의 전체 길이는 76미터, 중랑의 길이는 50미터, 그 폭과 높이는 25미터와 18미터이다. 지붕의 경사는 예외적으로 급한 63도다. 내부에는 7면으로 되어 있으며 용마루의 높이는 45미터, 탑의 높이는 68미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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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유와 환호로 가득한 독일 오페라 초연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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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일 베를린 슈타츠오퍼 프리미어 파티에 참석한 테너 롤란도 비야손,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왼쪽부터).
베를린=전승훈기자 raphy@dong.com>

    이번 독일 베를린 출장에서는 베를린 슈타츠오퍼의 프리미어 파티에 참석하는 특별한 경험을 했다. 베를린 슈타츠오퍼에서 27일 개막한 ‘예브게니 오네긴’의 공연이 끝난 후 무대 뒤로 갔던 테너 롤란도 비야손이 분장(광대처럼 눈가를 시커멓게 칠한)도 지우지 않은 채 지인들의 축하를 받고 있었다.

  프리미어 파티는 공연 후 베를린 슈타츠 오퍼의 옆 건물에서 열렸다. 말로는 ‘직원식당’이라고 하는 데, 내 눈에는 유서깊은 오페라극장의 카페처럼 보였다. 파티에 참석하러 가던 베이스 르네 파페는 “직원식당에서 프리미어 파티라니…”하며 툴툴거렸다. 이 파티에는 베를린 슈타츠 카펠레의 예술감독인 다니엘 바렌보임, 테너 롤란도 비야손,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 등 모든 출연진이 다 참석해 맥주를 마시며 즐겼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프리미어 파티에서도 단원들이 거장 연출가 아힘 프라이어를 앞에 두고 ‘야유’와 ‘브라보’를 동시에 외치고, 아힘 프라이어도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반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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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연 무대에서 ‘스캔들’이 없는 작품은 오래 갈 수 없습니다. 스캔들이란 그만큼 관객들이 상상해오던 것을 깨뜨리고 전복했다는 것이거든요.”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 오페라 극장에서의 초연날 풍경은 살벌하다. 연출가, 지휘자, 배우들도 관객들의 신랄한 반응을 피할 수 없다. 27일 오후 독일 베를린 도이치오퍼에서 다니엘 바렌보임의 지휘와 테너 롤란도 비야손이 주역을 맡은 차이콥스키 오페라 ‘예브게니 오네긴’의 초연날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막 중간 부분에 축제 분위기에서 갑자기 객석에서 큰 소리가 들렸다.

  “미스터 아힘 프라이어, 당신은 틀렸소! 열정을 보여줘야 하는 장면에서 왜 이렇게 지루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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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힘 프라이어(74)는 지난해 뮌헨 슈타츠오퍼에서 초연된 진은숙의 오페라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연출했던 거장 미술가이자 오페라 연출가. 동독에서 미술을 전공하던 대학생 시절 극작가 브레히트(1898~1956)의 제자로 연출과 무대미술을 배웠던 그는 50여 년간 150여 편이 넘는 오페라를 연출해왔다.  독일 건축 표현주의 미술가의 대표자였던 그의 무대에는 늘 신선하고 파격적인 이미지가 넘쳐났다.
  
공연이 끝난 후 수백여 명의 출연진은 슈타츠 오퍼의 옆 건물의 카페테리어에서 프리미어 파티를 열었다. 다니엘 바렌보임과 롤란도 비야손, 아힘 프라이어 등 출연진이 모두 참석해 맥주를 마시는 파티였다. 흥미로운 것은 파티에서 아힘이 소개되자 롤란도 비야손이 ‘브라보!’ ‘브라보!’를 열정적으로 외쳤는 데도, 뒤에서 일부 합창단원들은 야유를 보냈던 것. 아무리 독일 관객들이 공연에 신랄한 평을 보내는 것으로 유명하다고 하지만, 같은 출연진끼리도 야유를 보낸다는 것은 상상하기 힘든 풍경이었다.
   그러나 막상 아힘 프라이어는 오히려 밝은 표정이었다. 파티장에서 마이크를 잡은 그는 “삶이란 그토록 지루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축제를 그렇게 표현했다”며 “삶이란 누구나 지루한 일상인데 관객들이 그걸 무대에서 직시하게 되니 화가 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그는 “첫 공연 때 브라보와 야유가 공존하는 작품은 그만큼 이야기거리가 많다는 뜻으로, 수십년 동안 장기 공연되게 마련”이라며 “만하임 극장에서 초연된 ‘세빌리아의 이발사’와 모차르트의 ‘마술피리’처럼 30~40년이 넘도록 계속 공연되고 있는 내 작품들은 모두 초연 날에 야유와 환호가 뒤섞여 늘 스캔들이 벌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키치로 가득한 팝아트가 곧 바로 대중들에게 다가갈 수 있는 것은 삶의 진실이 아니라 거짓으로 꾸몄기 때문”이라며 “거짓은 오래 갈 수 없으며, 고통스럽더라도 삶의 진실을 이야기하는 작품이 롱런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100년 전에 창작된 ‘예브게니 오네긴’을 관례대로 똑같이 연출한다면 사람들은 ‘나는 오네긴을 알아’하면서 더 이상 극장에 오지 않을 것”이라며 “예술은 반복하는 순간 죽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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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힘 프라이어는 자택의 복도와 방 곳곳에 수천점의 자신의 미술작품과 평생 수집한 현대미술 작품을 보관하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집과 미술작품을 조만간 베를린 시에 박물관으로 기증할 예정이다.

  “지난해 뮌헨 오페라극장에서 초연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는 진은숙의 음악이 너무 아름다우 연출을 맡게 됐어요. 세계초연은 사람들에게 별다른 야유나 논란의 대상이 되지 않아요. 비교할 대상이 없기 때문이죠. 어떤 연출가는 나쁜 비평을 듣지 않기 위해 세계초연작품만 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기존 유명작품을 확 뒤집어서 스캔들을 일으킬 수 있는 작품이 더 재밌습니다.”  

  아힘 프라이어는 2년 후인 2009년부터 플라시도 도밍고가 극장장으로 있는 미국 LA오페라 우에서 2년 간 ‘링 사이클’의 연출을맡아 무대에 올릴 예정이다.

  그는 “그동안 공연된 ‘링’은 출가들이 ‘링’을 통해 자기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만 이야기했다”며 “내년에 LA에서 내가 연출하는 ‘링 사이클’은 과연 ‘링’이 어떤 작품인가라는 본질을 보여줄 것”이라고 기염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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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슈타츠오퍼 ”예브게니 오네긴” 프리미어 파티에서 테너 롤란도 비야손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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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필의 사이먼 래틀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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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6년 역사의 세계 최고의 원위를 자랑하는 베를린의 필하모니아 홀은 이른 아침부터 어린학생들로 붐볐다. 베를린 시내 6개 초중고등학교 12세부터 19세까지의 학생들로 구성된 스쿨연합오케스트라의 연습이 있기 때문이었다. 보조 지휘자의 오랜 연습이 끝나고 이윽고 사이먼 래틀 경이 무대 위로 등장하자 마치 학생 단원들은 물론 객석을 가득채운 학부모, 시민들은 마치 팝스타를 만난 듯 박수와 환호성을 질러댔다.

  2002년 역대 최연소의 나이에, 첫 영국 출신 지휘자로 베를린 필의 수장을 맡은 사이먼 래틀 경(53). 은빛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의 그는 입에 마이크를 낀 채 능숙한 독일어로 해설을 곁들이며 청소년 오케스트라를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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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월20, 21일 오후 8시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내한공연을 갖는 그를 29일 오후 유서깊은 베를린 필하모니아 홀 지휘자실에서 만났다. 그는 “젊은이들은 베를린 필의 미래”라며 “베를린 필의 위대한 전통은 어떤 진보도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2005년 베를린 필의 내한공연 때는 현대음악과 프랑스, 독일음악 등 다채로운 색깔을 보여주었다. 이번에는 이틀간 ‘브람스 교향곡 전곡(1~4번)’을 연주할 예정인데.

  “브람스 교향곡 사이클은 오케스트라의 역사에서 매우 중심이 되는 작품이다. 베를린 필은 브람스 교향곡 3번을 처음 연주하기도 했다. 이번엔 베를린 필이 연주하는 정통 독일 레퍼토리를 감상해달라. 우리는 한국에 가기 3주전부터 브람스 심포니 전곡을 연습하고 녹음을 할 계획이다.”

  -당신은 올해 4월 단원들의 중간평가에서 통과해 2012년까지 예술감독 지위가 보장됐다.혹시 카라얀처럼 종신 지휘자가 되는 것을 꿈꿔본 적은 없는가.

  “지휘자가 바뀐 후 첫 5년은 늘 거대한 변화의 시기다. 나와 오케스트라가 비로소 서로를 조금씩 알게 된 것 같다. 카라얀은 단원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했다. ‘나는 종신지휘자 계약을 맺었다. 당신들이 미워하든 말든 나를 제거할 수 없다’고. 지금은 다른 시대다. 종신지휘자는 내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단원들과의 협상이 필요하다. 나는 민주주의를 지지한다. 그러나 만일 내가 이곳을 떠나야 한다면? 어디로 갈 지는 상상할 수가 없다. 베를린 필의 연주를 한 번 들어본 사람은 이 말에 공감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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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명 ”카라얀 서커스”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베를린 필하모니아 홀. 5월에 지붕에 불이 났는 데도 신속하게 수리해
    9월부터 정기 시즌 연주가 제대로 열리고 있다.>

   그는 126년 역사를 지닌 베를린 필의 지휘자를 박물관의 큐레이터에 비유했다. 그는 “브람스같은 전통의 사운드를 보존하는 것은 쉽다. 문제는 어떻게 새로운 움직임을 보여줄 것이냐는 것”이라고 말했다.   

  - 베를린 필은 120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다. 베를린 필하모닉의 가장 위대한 전통은 무엇인가.  

  “첫번째 전통은 독립 정신이다(the idea of independence). ‘이것은 우리가 원하는 연주가 아니야, 이것은 우리가 살고 싶은 삶이 아니야’라고 말한다면, 그들은 다른 오케스트라가 되거나 산산이 흩어졌을 것이다. BPO는 시작부터 엑설런트했을 뿐 아니라 독립적인 전통을 갖고 출발했다. 또한 새로운 음악, 현재 거기에 있는 음악에 도전하는 진취적인 전통도 갖고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카라얀의 시대에는 그런 점은 미비했다. 그러나 초창기 시작부터 한스 폰 뷜로, 아르투르 니키슈, 푸르트 뱅글러 때는 그랬다. 새로움에 대한 열망은 오케스트라에게 매우 매우 중요했다. 내가 지키고 싶은 전통도 바로 그것이다.”

  - 세계 최고의 솔로이스트들로 구성된 베를린 필을 이끌고 가는 리더십은 무엇인가. ‘나는 마에스트로가 아니다’라고 말한 적도 있었는데.

  “내가 이 방에서 카라얀을 처음 만났을 때 카라얀은 ‘만일 당신이 이 오케스트라에게 25%를 준다면, 그들은 당신에게 75%를 되돌려 줄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것이 ‘위대한’ 오케스트라와 ‘좋은’ 오케스트라의 차이다. 위대한 지휘자가 베를린 필에 와서 끔찍한 트러블을 겪는 경우가 종종 있다. 단원들을 손에 쥐고 흔들려 하기 때문이다. 지휘자는 128명의 단원들이 스스로 가능성을 창조하고, 서로 듣고, 반응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마치 윔블던 테니스처럼 쇼트로 공격하면, 쇼트 백으로 되받아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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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 필 산하에는 ‘12첼리스트’ ‘베를린 바로크 솔리스텐’ 같은 수십개의 실내악 단체가 있다. 단원들의 실내악 연주에 자주 참석하는 래틀은 “오케스트라는 현악 4중주의 확장이다”며 “실내악이야말로 오케스트라를 강하게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설명했다.  
  - 취임 이후 10대들을 공연장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교육 사업에 심혈을 기울여 왔는데요.

  “이것은 ‘베를린 필의 미래’(Zukunft@berlin.phil)다. 지난 주에는 처음으로 베를린 필이 유치원에서 리허설을 하기도 했다. 이런 연주를 20분이든 30분이든 매주 할 계획이다. 그곳이 유치원이라는 사실을 잊을 정도로, 그들은 관객으로 완벽했다. 사람들이 음악에 노출되는 경험은 소중하다. 음악은 사람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준다. 누구나 음악에 접근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본다.”

   래틀 경은 불과 25세에 영국의 버밍엄 시립 교향악단을 맡았던 지휘계의 ‘분더킨트’(신동)이었다. 그는 1987년 32살의 나이로 베를린 필에서 말러 교향곡 6번을 처음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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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1년 전 베를린 필과의 첫 만남을 기억하는가.   

  “보통 해외에서 지휘자가 오면 공항에서부터 마중을 나가고, 여러 모로 챙겨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당시 나는 필하모니에 처음 와서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30분 동안 빌딩 주매 다녔다. 결국 나는 ”아무도 나를 도와주지 않는다. 내 스스로 길을 발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리허설을 시작했을 때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매우 관대했고, 개방적으로 나를 받아들였다. 그들은 말러 교향곡 6번을 매우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지휘봉을 흔들었을 때 내가 원하던 바로 그 소리가 나왔다. 마치 내 눈 앞에 촛불이 환하게 켜진 듯한 느낌을 받았고, 땅 속 깊은 심연에서 울려나오는 듯한 음향에 충격을 받았다.”
 

 - 요즘 전세계에는 20대 젊은 지휘자 붐이 불고 있다. 관심있게 보고 있는 차세대 지휘자는.   

  “구스타보 두다멜(27), 로빈 티치아티(25)와 같은 젊은이들은 환상적이다. 그들의 엄청난 열정과 테크닉을 볼 때면 흥분을 금할 수 없다. 그러나 서로간에 색깔은 확연히 다르다. 두다멜은 ‘굿 맨’이다. 티치아티는 젊은 시절의 콜린 데이비스 경을 연상시킨다. 이들보다 약간 나이는 많지만 런던 필하모닉에서 연주하는 블라디미르 유롭스키도 환상적인 뮤지션이다. 다니엘 하딩은 지난 주에 나와 미카엘 보더와 함께 3명이서 슈톡하우젠의 ‘그룹들(Grouppen)’을 연주했다. 나는 젊은 지휘자들의 열정과 뛰어난 테크닉을 볼 때마다 흥분된다. 앞으로 점점 더 많은 재능있는 지휘자가 나타날 것이다.”
    래틀 경은 이번 방한에 부인인 체코출신의 메조 소프라노 막달레나 코체나와 3개월 된 막내아들과 동행할 예정이다. 그는 “2005년에 한국에 왔을 때 용산 국립박물관 방문이 무척 인상 깊었다”며 “지난 번엔 두 시간 밖에 못봐 아쉬웠는데 이번엔 갓난 애가 있어서 걱정된다”며 웃었다. 7만~45만원. 6303-7700  
 베를린=전승훈기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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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베를린 필하모닉은 25~27일 필하모니아 홀에서 라벨의 ”어미거위”, ”어린이와 마법사”를 공연했다. 라벨의 오페라를
콘서트형식으로 공연한 ”어린이와 마법사”에서는 래틀의 부인인 막달레나 코체나가 주인공(어린이) 역을 맡아서 했다.
사진에서 맨 오른쪽에 서 있는 코체나는 금발의 머리를 싹둑 잘라 래틀처럼 뽀글파마를 해서 펑키헤어로 변신해 무척
귀여운 모습이었다. 무대에서 은발의 뽀글머리 래틀과 금발의 뽀글머리 코체나 부부가 옆에 나란히 서서 지휘하고 노래하는
장면도 무척 인상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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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쿨오케스트라 공연이 끝난 후 사이먼 래틀이 지휘하던 베를린 필하모니아 홀의 지휘대에 올라서 포즈. 지휘대에는
래틀이 방금 보면서 지휘했던 베를리오즈 환상교향곡 4악장 ”단두대로의 행진”의 악보가 놓여 있었고, 지휘봉도 있었다.
그래서 래틀의 지휘봉을 들고 사진 한번 찰칵.>  

▲영상취재 : 동아일보 전승훈기자

카테고리 : 유럽 음악여행 댓글 남기기

파리에서 만난 백건우 윤정희

  * 지난해 말, 피아니스트 백건우의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전곡 연주회를 앞두고 공연 팸플렛에 기고한 글.

  재불(在佛) 피아니스트 백건우 씨(61)는 파리 동남쪽 외곽의 뱅센느 숲 근처에 있는 5층짜리 아파트에 28년째 살고 있다. 그의 집에선 수십년 째 피아노 연습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는다. 주민들이 시끄럽다고 항의도 할 만한 터. 그러나 연주를 앞두고 밤새 피아노를 친 다음날 아침이면 문 앞에 꽃다발이 놓여 있곤 했다. 좋은 연주 감사하다는 메모와 함께.

  “아래 층에 할머니와 딸, 사위가 살던 집이 있었어요. 그런데 어느날 딸과 사위가 검은 옷을 입고 장례식을 가더군요. 갑자기 제게 감사할 일이 있다고 했어요. ‘어머니께서 평생 FM을 통해 클래식 음악을 즐겨들었는데, 돌아가시기 6개월 전부터 라디오도 꺼놓고 당신의 피아노 연주만 듣다가 가셨다’는 거예요. 너무 행복해하셨다면서 감사하다고….”

  그의 이웃집 아이는 그의 피아노 소리를 자장가 삼아 잠이 든다. 그가 한동안 집을 비우고 연주여행을 다녀올 때면 “당신 요즘 게으른가 보다. 왜 연습안하느냐”고 묻는 이웃도 있다고 한다. 윤정희 씨는 창 밖에 커다란 달이 뜨면 남편을 흔들어 깨운다. 백건우는 함박눈이 내리는 밤에 딸과 함께 우산을 쓰고 밤길을 걷고, 날씨가 좋으면 음식을 싸서 숲을 산책하기도 한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문득 영화 ‘카핑 베토벤’이 생각났다. 베토벤이 작곡의 영감을 얻기 위해 숲과 호숫가로 산책을 떠났을 때 문 밖에서 이웃집 할머니 한 분이 바느질을 하면서 베토벤을 기다리고 있다. 누군가 그에게 묻는다. 저 괴팍하고 성질 고약한 늙은이가 옆 집에서 밤새 시끄럽게 하고 있는 데 왜 이사를 가지 않느냐고. 그 할머니는 “내가 왜 이사를 가느냐. 나는 이 집에서 베토벤의 7번, 8번 교향곡도, 수많은 피아노 소나타도 가장 먼저 들었다.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 들꽃같은 삶… 심플라이프

  지난 가을. 파리오케스트라(Orchestre de Paris)를 취재하기 위해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파리에서 백건우 씨를 만났다. 생각 같아서는 뱅센느 숲 근처의 백 선생의 집에 찾아가 오래된 연습실을 한 번 구경하고 싶었다. 그러나 음악가의 집이 함부로 공개될 수는 없을 터. 부인 윤정희 씨는 파리의 향취가 물씬 배여 있는 거리인 생제르망 데프레에서 만나자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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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날 저녁식사 약속을 한 카페는 1878년에 지어진 건물이 문화재로 보호되고 있는 곳. 두 분은 파리의 메트로(지하철)을 타고 약속장소에 나타났다. 역시, 자동차 없이 다니는 것은 여전하시구나. 지난 겨울 서울에서 만났을 때도 그랬다. 시내 한 호텔에서 저녁식사를 만나고 헤어지려는 데 두 분이 택시정류장 앞에 있는 긴 줄 뒤에 서는 것이었다. 한국 음악계의 대표적인 마에스트로인데도 누군가 운전해주는 사람도, 손수 운전할 차도 없었다. 다행히 앞에 있던 젊은 여성 두 명이 백 선생 부부를 알아보고 택시를 양보해줬다. 두 분은 극구 사양하다가 정말 미안한 표정으로 택시를 탔다.    

  “직장도 안 다니는 데 차가 필요없죠. 연주여행가면 주최측에서 마련해준 차량이 나오고, 없으면 택시를 타고 다니면 되죠. 파리에서는 늘 지하철을 타고 다녀요. 괜히 차를 갖고 있다가 고장이라도 나면 고쳐줄 사람도 없어 없지요.”

  두 사람은 평생 집에 컴퓨터도, 인터넷도, 자동차도 없이 그야말로 ‘심플라이프’를 즐겨왔다. 심지어 한국에서 피아니스트 백건우 관련 기사가 나와도 인터넷으로 볼 수가 없어 지인들이 복사한 신문을 팩스로 보내줘서 읽는다고 했다. “화려한 것보다는 들꽃같은 삶이 좋다”는 것이 윤정희 씨의 설명.  

  “얼마전 불란서 잡지에 수녀들의 생활에 대한 기사를 봤어요. 한 수녀의 재산이라는 것이 조그만 박스 속에 다 들어가더군요. 수녀복, 성경책, 묵주 등등…. 그런데 사실 산다는 것이 뭐 대단할까요. 삶에 필요한 것이 결국은 그 정도 밖에 안될 겁니다. 특히 추상적인 세계, 정신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에게 사실 필요한 게 무엇이 있겠나요. 어떤 면에서는 이기적인 설명이 될 수 있겠지만, 그런 삶을 위해서 이런 선택을 하는 것이지요.”(백건우)
 

  ○ 프랑스에서 만난 사랑   

  1960년대 은막의 스타였던 영화배우 윤정희. 그는 돌연 화려한 영화배우 생활을 그만두고 고독한 피아니스트의 아내가 됐다. 그리고 ‘건반 위의 구도자’로 불리는 남편의 순례 동반자로 함께 해왔다.   

  “원래 5년만 영화배우하고 유학을 가겠다는 마음이었어요. 그런데 하다보니까 7년이나 영화배우를 하게 된 거예요. 영화를 300편이나 찍었으면 충분하지 않나요? 배우로 활동할 될 때부터 미국으로 유학을 준비했지요. 그런데 71년에 파리에 들렀다가 파리에 푹 빠졌어요. 그래서 파리3대학에서 영화를 공부하게 됐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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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에게 영화배우를 포기한 게 아쉽지 않냐고 물었다.

   “결혼 초기에 리스트 전곡을 영국 위그모어홀에서 6주 동안 연주할 때는 집안의 좁은 방에 리스트 악보가 발 디딜 틈도 없이 가득차 있었어요. 라벨, 프로코피예프, 차이콥스키, 라흐마니노프, 쇼팽, 베토벤…. 작곡가의 전곡을 파고드는 남편과 함께 할 대마다 나도 그 작곡가의 세계에 완전히 들어갈 수 있었어요. 그 정도면 피아니스트의 아내도 무척 매력이 있는 것 아니겠어요?”

  백건우 씨는 “이 사람이 나보다 더 음악을 좋아한다면 믿겠어요?”라고 웃음을 지었다. 그렇다. 윤정희 씨는 남편보다 피아노를 더 좋아했고, 백건우 씨는 부인보다 영화를 더 좋아했다. 마침 우리가 만난 다음날엔 백건우 부부는 디나르 시로 떠나기로 약속한 날이었다. 디나르는 백건우 씨가 음악감독으로 있는 ‘디나르 페스티벌’이 열리는 곳. 디나르 시는 윤정희 씨를 디나르를 상징하는 ‘꽃의 대모’로 선정했다. 그 꽃은 장미였다.

  “지난해 ‘디나르 음악축제’의 주제가 ‘카르멘 마니아’였어요. 스페인과 프랑스가 서로 영향을 준 작품을 연주하는 프로그램이었지요. 마지막 앙코르 곡은 피아노로 치는 ‘볼레로’였어요. 지휘자와 예술감독인 백건우 씨가 함께 피아노에 앉아서 ‘포핸드’로 치는 ‘볼레로’였지요. 오케스트라도 몰랐던 서프라이즈 앙코르 곡이었어요.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라 기립박수를 쳤지요. 제가 ‘꽃의 대모’를 수락한 것은 디나르 시를 위해 뭔가 일하고 싶어서였지요.”(윤정희)

  미국 줄리아드 음악원을 졸업한 백건우 씨에게 왜 파리에 정착하게 됐느냐고 물었다. 그는 “미국의 캐피털리즘(자본주의)이 싫어서 미국을 떠났다. 변화가 필요했고, 음악회 기회가 많고 성공하고 마느냐는 것보다 더 중요했다. 내 음악이 살아 있으려면 새로운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는 “배운 것은 잊어버려야 한다. 에 와서 비로소 배운 것을 잊어 버린 것 같다”고 말했다.

  “미국의 자본주의 문화가 서유럽은 물론 동유럽, 러시아, 중국까지 다 퍼지고 있었어요. 정신세계보다 물질적인 세계를 중요시하는 시대였지요.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두가지예요. 과연 정신적으로 올라가느냐 내려가느냐. 우리가 좀더 높은 곳을 향해서 노력을 해야 하는데, 현 세대는 점점 밑으로 끌어내리고만 있단 말이죠. 음악이라는 것은 우리가 느끼지 못하는 것을 느끼게 해줘야 하는데, 현실은 오히려 추한 모습을 부추기게 마련이죠. 청중들은 혼돈을 합니다. 음악은 자신과 대화를 하면서 세계를 찾아가야 하는 것인데, 지금은 주어진 대로만 듣지요. 결국 음악도 마케팅의 노예가 돼버리고 말지요.”

  저녁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던 나도 모르게 백 선생의 말에 빠져들었다. 옆에 있던 부인 윤정희 씨도 “이 양반이 같이 살아보니 피아니스트보다 은근히 철학자인 것 같다”며 웃음을 지었다. 나도 비로소 왜 백건우가 ‘건반 위의 구도자’로 불리는 지 알게 됐다.

  

  ○ 내 인생의 베토벤은 이제부터가 시작

  “3년 동안 베토벤 32개 소나타를 녹음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매년 3~4곡이 담긴 CD한 장씩 낸다고 해도 9년이나 걸리는 대장정입니다. 제 나이가 60살이 넘었기 때문에 집중적으로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어요. 내 평생 한 작곡가의 세계에 이렇게 깊이 빠져든 것은 이번이 처음인 것 같아요.”

  두 사람은 베토벤 소나타 녹음을 하면서 수많은 연주여행을 다녔다. 독일 뮌헨, 오스트리아 잘츠부르크, 비엔나, 체코 프라하, 영국 웨일즈, 이탈리아 나폴리 등에서 베토벤을 연주했다. 또한 베토벤이 유서를 쓴 하일리겐 슈타트의 집, 테아트로 안 데어빈, 파스콸리티의 집, 에로이카 하우스, 함머클라비어를 작곡한 집, 베토벤의 무덤, 산책했던 비엔나 숲 등 곳곳을 여행했다. 이런 여정은 베토벤 전집에 DVD 다큐멘터리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다.

  “베토벤이 산책했던 빈의 숲을 걸어보면서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어 나무와 대화를 나누고, 위로를 받아야 했던 그의 지독한 고독이 느껴졌어요. 음악인은 항상 새로운 체험이 필요합니다. 제가 연주생활을 수십년 해왔지만 이렇게 한 세계에 집중해본 것은 처음인 것 같아요.”(백건우)    

  “함머클라비어 작곡한 집에 갔을 때 문이 닫혀 있었어요. 1주일에 한 번 문을 여는 집이었지요. 두 번째 갔을 때 밖에 앉아 있던 할아버지가 문을 열어 주셨지요. 이 집에서 ‘장엄미사’도 작곡했는데 방이 정말 좁았어요. 전원교향곡을 썼던 집에는 베토벤이 입었던 옷이 그대로 보관돼 있었지요.”(윤정희)

  그는 “베토벤 녹음을 마쳤지만 그걸로 끝나는 작업이 아니다”며 “내 인생의 베토벤의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말했다. 그는 12월 8~14일 서울 예술의전당 콘서트홀에서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32곡 전곡을 7일 동안 8회에 걸쳐 연주하는 음악회를 연다. 한달 또는 두 달에 걸쳐 전곡을 연주하는 사례는 있었지만, 일주일만에 완주하는 것은 기네스북 감이다.  

  “1주일에 한 곡씩, 한달에 한 곡씩 하게 되면 쉽지만, 음악이 끊기지요. 32곡을 한꺼번에 8일간 연주하는 이유는 한 작곡가의 세계에 완전히 들어갔다 나오고 싶어서입니다. 첫날의 흥분이 다음 날로 이어지고, 또 그 다음날로 이어져 첫날의 흥분에서 헤어나지 않았으면 합니다. 연주자와 청중이 처음부터 끝까지 베토벤과 함께 살다가 끝나는 것이 목적입니다. 이것은 예전부터 꿈꿔오던 것인데, 이것이 현실화된다는 것은 생각만해도 행복합니다.”

  백 씨는 “3년 동안 다른 작품은 거의 생각지 않고 베토벤에만 집중을 했다. 보통 그렇게 되면 내 음악세계가 좁아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반대로 오히려 무한하게 넓고 깊어진 느낌이 들었다. 그것은 삶 자체였다”고 소감을 밝혔다.  

 

  ○ “우리 행복하지 않아?” 

  저녁 식사를 마치고 생제르망 데프레의 뒷골목을 걸었다. 시원한 가을 날씨에 레스토랑 마다 야외 테라스에서 와인과 맥주, 에스프레소를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차다. 그들의 수다가 골목길을 울리고 있다. “이 곳이 아직까지 파리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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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의 뒷골목을 좋아하는 백건우 선생의 인도에 따라 골목길을 굽이굽이 돌았다. 갑자기 아늑한 조그만 공원이 나온다. 나무들로 둘러싼 둥그런 공원이다. 연인들이 소곤소곤 이야기하고, 노인이 앉아서 사색에 잠겨 있다. 사방이 건물로 둘러싼 아늑한 작은 공원에 나무들 사이에 서 있는 푸른 가로등이 마치 인상파 화가의 그림같다. 백건우 선생은 오른편 건물에 선다. “이 곳이 화가 들라 크르와 뮤지엄이예요. 그의 화실이 있었지요.” (백)
 “기적의 성당은 한 번 꼭 봐야 해요. 여기서 멀지 않아요. 파티마의 성모도 좋지만 여기도 좋아요. 성모님이 앉았다는 의자도 있어요. 우리 부부는 처음엔 십자가만 보고 기도했는 데, 그 설명을 듣고 부터는 의자 앞에서 기도했어요.” (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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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정희 씨는 장 폴 사르트르와 시몬 보봐르가 자주 찾았다는 ‘카페 드 플로라’와 ‘카페 뒤 마고’에 가보자고 한다. 어둡지만 따뜻한 조명이 내리쬐는 생제르망 데프레의 뒷골목을 지나다니며 ‘카페 드 플로라’와 ‘카페 뒤 마고’에 도착했다. 사진만 찍고 가려 했으나 윤정희 선생이 “커피라도 한 잔 마셔야 한다”고 주장해 안으로 들어갔다.

  윤 선생은 와인을 두잔이나 시켰다. 나는 맥주를 두 잔. 윤 선생은 많이 취했다. “정말 파리 좋지 않아요? 이렇게 예술인들이 사랑했던 역사적인 장소에 나도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것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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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장 폴 사르트르가 자주 앉았다는 자리에 앉아 취재수첩에 뭔가를 적었다. 백건우 선생이 나의 그런 모습을 찍어준다. 뒷 배경엔 사르트르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나는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사르트르가 된다. 내 앞에는 시몬 보봐르가 앉아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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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와인에 얼큰히 취한 채 파리의 뒷골목을 걷는다. 앞서 걷는 백선생은 윤정희 씨의 어깨를 감싼다. 쪼글쪼글해진 윤정희 씨의 몸이 커다란 체구의 백선생에게 안긴다. 두사람은 어깨를 감싸고 파리의 뒷골목을 걸어간다.
  “인생은 짧은 거야.멋게 살자” (윤)

  “그럼, 우리 지금 멋있게 살고 있지 않다는 거야?” (백)

  인생의 황혼기에 접어들 수록 점점 더 아름다워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이 무척 정겨웠다. 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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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팬티 사건

 

 “빨간 삼각팬티 입고는 도저히 못하겠다.”

  국립오페라단이 10월2~5일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하는 R.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살로메’가 공연을 불과 2주도 안 남은 상태에서 주역 가수 2명이 교체되는 소동이 벌어졌다. 더블 캐스팅으로 헤롯 왕 역을 맡은 테너 한 모, 김 모 씨가 연습도중 ‘빨간 삼각팬티’만 입고 무대에 서야 하는 의상을 소화할 수 없다며 중도 하차한 것.

  ‘살로메’는 헤롯 왕의 의붓딸 살로메가 추는 ‘일곱베일의 춤’과 세례자 요한의 목이 잘려지는 장면 때문에 해외에서도 늘 선정성 논란이 벌어지는 오페라. 독일의 신세대 연출가 카를로스 바그너가 2005년 프랑스 몽펠리에 오페라극장에서 초연한 이 작품은 현대적인 무대와 파격적이고 엽기적인 연출로 유명하다. ‘무대인들의 올림픽’으로 불리는 올해 프라하 ‘콰드레니얼’에 초청받은 작품이기도 하다.  

  국립오페라단은 18일 기자회견을 열고 두 사람 대신 프랑스에서 ‘살로메’에 출연한 경험이 있는 테너 게르하르트 지겔을 긴급히 섭외했다고 밝혔다. 국립오페라단은 이미 찍어놓은 포스터와 인터넷 예매사이트에서도 성악가의 프로필도 긴급히 교체하는 소동을 벌였다.

  연출가 바그너 씨는 “삼각팬티는 헤롯 왕의 유아적이고, 무례하고, 안하무인격인 성격을 보여주기 위한 의상이니 만큼 배우와 타협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테너 한 씨는 “연출가의 예술적인 취지는 잘 이해하겠지만, 아직까지 국내 오페라 무대에서 남자 성악가가 받아들이기에는 힘든 면이 있어 그만두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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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로스 바그너 연출의 ”살로메” 공연 장면. 무대전환은 없는 오페라지만 조명의 변화와 다양한 연출로 색다른 맛을 자아낸다. 파격적인 의상과 더불어 ”알카에다”의 인질 참수에서 이미지를 차용한 세례자 요한의 목이 잘리는 장면 등 엽기적인 연출도 소름을 끼치게 한다. 일반적으로 ”일곱베일의 춤”에서 살로메가 전신 누드가 되는 다른 작품과 달리 살로메는 하얀 드레스를 입고 춤을 춘다. 헤롯 왕이 빨간 수영복 같은 팬티를 입고 나오는 게 한국에서는 더욱 문제가 되는 듯하다. 16세의 철부지 소녀로 해석된 살로메는 섹시한 요부가 아닌 평범한 10대의 비극이라는 점에서 더욱 리얼하고 슬프다.>  

<사진출처 : 카를로스 바그너 홈페이지 http://carloswagn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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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의 국가는?

“왜 예정에 없던 곡 연주하지?”

앉은채 감상 본의 아닌 ‘결례’

18일 오후 7시 반 서울 여의도 KBS홀에서는 ‘대한민국-이스라엘 60년 음악회’가 열린다.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이스라엘 독립 60주년을 기념하는 친선음악회다. 이 음악회에서는 본 공연에 앞서 이스라엘 국가 ‘하티크바’(히브리어로 ‘희망’이란 뜻)가 애국가에 이어 연주된다. 올해 2월 평양 뉴욕필 공연에서 북한과 미국의 국가가 연주된 것처럼 친선을 위한 음악회에서는 양국의 국가가 연주되는 것이 관례다.

그런데 최근 서울 예술의 전당 콘서트홀에서 열린 블라디미르 아시케나지가 지휘한 유럽연합(EU) 유스오케스트라 내한공연에서 국가가 연주될 때 해프닝이 벌어졌다. 무대 위에 EU 소속의 각국 깃발이 장식된 가운데 애국가가 울려 퍼지자 관객들은 일제히 기립했다. 그 뒤를 이어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중 4악장 ‘환희송가’가 연주되자 관객들은 “왜 프로그램에 없는 곡을 연주할까”하고 의아해하며 모두 자리에 앉았다. 객석 중간에 10여 명의 EU 대표부 관계자들만 선 채로 연주를 끝까지 들었다.

독일의 문호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에 곡을 붙인 ‘환희의 송가’는 2003년 EU헌법의 초안을 만든 유럽미래회의에서 EU를 대표하는 국가(國歌)로 선정했다. “영웅이 승리의 길을 달리듯, 서로 손을 마주잡자, 형제여, 별이 가득한 하늘의 저편에 사랑하는 신이 계신다”는 ‘환희의 송가’는 인류의 화해와 희망을 그린 곡이다.

그런데 이날 연주회장에서는 프로그램 등을 통해 양국의 국가가 연주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한국 팬들이 EU의 국가가 연주되는 동안 본의 아니게 결례를 범하게 된 것이다. 18일 이스라엘 국가가 연주될 때는 관객들에게 그 사실이 미리 고지됐으면 한다.

<이스라엘 국가> 

 

하티크바(הַתִּקְוָה)는 ”희망”이라는 뜻의 이스라엘의 국가로써 나프탈리 헤르츠 임페르가 작사, 사무엘 코엔이 작곡했다. 1897년 제1차 시오니스트회의에서 찬가로 제정되었고 1948년에 국가로 제정되었다.

 


 

출처: science.co.il

As long as in the heart, within
A Jewish soul still yearns,
And towards the end of the East,
An eye still watches toward Zion
  
Our hope is not yet lost,
The hope of two thousand years,
To be a free nation in our land,
The land of Zion and Jerusa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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