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내린 파리 몽소공원

AP07DAC080F22C1011.JPG

 

오늘 파리에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파리에는 눈이 와도 곧 녹기 때문에, 잘 쌓이지 않는 편인데…

오늘은 날도 춥고 함박눈이 내려 온통 흰세상이 됐습니다.

 

아이를 몽소공원에 있는 학교에서 집으로 데려오는 길에 몽소공원 풍경을
찍어보았습니다.

몽소공원은 18~19세기 프랑스 르네상스기의 유산인 대저택을 배경으로 세워진
공원입니다.

몽소공원은 쇼팽, 모파상, 구노 등 수많은 예술가들의 동상과 그리스 신전 스타일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연못 등으로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 중의 하나입니다.

 

AP07DAC080F1D209000.JPG

 

AP07DAC080F1E1E9001.JPG

 

AP07DAC080F1E82002.JPG

 

AP07DAC080F1E1BB003.JPG

 

AP07DAC080F1E72004.JPG

 

AP07DAC080F1FD0005.JPG

소설가 기 드 모파상의 동상.

 

AP07DAC080F1F228006.JPG

 

AP07DAC080F20303007.JPG

 

AP07DAC080F201E9008.JPG

 

AP07DAC080F213AF009.JPG

 

AP07DAC080F2153010.JPG

 

AP07DAC080F222C4012.JPG

눈 내리는 개선문을 샹젤리제 거리에서 바라본 모습.

 

 

 

 

 

카테고리 : Bonsoir! 샹젤리제! 댓글 3개

파리의 국제기구(1)-뮤에트성의 OECD

 AP07DAC07010831C019.JPG

 

 

  파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유네스코(UNESCO) 등 수많은 국제기구가 본부를 두고 있는 글로벌 도시다. 비록 유럽연합(EU) 본부가 벨기에 브뤼셀에 있지만 파리는 유럽통합의 중심역할을 자부해왔다.

  최근 OECD에서 일하는 선배의 소개로 OECD 본부의 구석구석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OECD건물이 유서깊은 프랑스의 성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도 놀랐고, 2000여 명이 넘는 사무국에 정년을 보장받은 국제공무원 신분으로서의 한국인 직원은 1,2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AP07DAC0701087D020.JPG

 

 

  ● 왕의 애인들의 성(城)에서 세계 경제협력의 관제탑으로

  OECD 본부는 블로뉴숲 인근에 있는 ‘뮤에트성’(Château de la Muette)이다. 블로뉴숲 인근에 있는 뮤에트성은 역대 프랑스 왕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오던 성이다. ‘뮤에트’라는 이름은 중세시절 프랑스 왕들이 숲에서 사슴사냥을 하던 곳에서 유래했다. 처음엔 왕의 사냥터 숙소였으나 이후 앙리 4세의 부인이자 ‘여왕 마고’로 유명한 마르게리트 드발루아를 위한 작은 성으로 변모했다. 루이 15세는 자신이 총애했던 정부 퐁파두르 후작부인와 뒤바리 백작부인 등 자신의 애인을 즐겁게 하기 위한 성으로도 사용됐다.

  루이 16세는 뮤에트성에서 자신의 젊은 왕비인 마리 앙뜨와네트와 함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를 보냈다. 그 당시는 왕비 뿐 아니라 국민들과와도 허니문 기간이었다. 루이 16세는 왕실세를 폐지했으며, 블로뉴숲을 대중들에게 개방했다. 그는 성에 귀족이나 평민이나 똑같이 받아들였다. 전기 작가는 “왕 만세”라는 외침이 오전 6시부터 해질녘까지 좀처럼 끊어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AP07DAC07010936B021.JPG

 

   이 성은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전쟁 지휘소로 사용되다가 프랑스 해방 이후에는 미군이 인수인계했다. 종전 후 미국이 유럽재건을 위한 마셜플랜을 추진하면서 1949년 이 성은 OEEC(유럽경제협의회)의 본부로 사용됐다. OEEC는 미국의 막대한 대유럽 원조금을 배분하기 위한 역할을 담당하던 기구다. OEEC가 1961년 서방 자본주의 산업화 국가들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조율하는 기구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로 개편되면서 OECD 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AP07DAC0701095D022.JPG

 

AP07DAC070109DA023.JPG

 

  현재 뮤에트성 옆에는 현대적인 부속건물이 지어져 대형 회의실과 수많은 크고작은 국제회의실로 사용되고 있다. 그 중 뮤에트성 본관에 있는 유서깊은 ‘로저 오크렌트룸’은 원래 대형연회실이었는데 현재는 OECD 상임대표부 회의가 열리는 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방에서는 각국의 장관급 인사들이 참석하는 고위급 회담이 열린다. 이 방은 오크장식과 화려한 타피스트리로 장식돼 있다.

AP07DAC07010D128026.JPG

 

  ● 국제무대에서
다자주의에 약한 한국

 

  OECD는 30개의 회원국들의 대표부와 사무국으로 구성돼 있다. 사무국에는 이사회(회원국의 대사와 OECD사무총장이 참석하는 최고의결기관)와 200여개의 위원회, 경제국 통계국 무역국 등 10여개의 실무팀으로 구성돼 있다. 뮤에트성에 있는 사무국에는 2000명이 넘는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규모는 30개 OECD 회원국 중 9위에 이르고 있으며, 분담금 규모도 9번째이지만, OECD 주관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영향력은 미미하다. 특히 OECD 사무국의 정규직에 진출한 한국인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하다. 그 중 정년을 보장받은 국제공무원 신분은 1,2명에 불과하다. 

  이것은
한국의 OECD 대표부를 비롯한 국제기구에 파견된 인력들이 주로 재경부, 총리실 등
중앙부처 공무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3년 정도 파견임기만 때우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한국에 돌아가면 개인적으로 ‘국제경력’을 쌓았다고 승승장구할 수 있지만,
실제로 국제기구에서 한국의 국익을 찾는 데는 도움은 되지 않는다. 반면
다른 나라의 OECD사무국 직원들은 국제기구 전문요원으로 선발돼 평생직장으로 일한다.
3년 후면 돌아갈 사람과 수십년간 일해온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사무국에서 맞붙는다면
번번히 깨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이 한국이 OECD에서 별다른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구조적인 이유가 되고 있다.

 

AP07DAC07010D1A5027.JPG

 

  OECD는 WTO나 IMF처럼 ‘구속력’이 아니라 ‘권고’를 할 뿐이다. 하지만 회원들의 의견이 ‘만장일치’로 결정되기 때문에 한 나라가 반대한다면 그 정책은 실현되지 못한다. 다수결로 이뤄지는 국제기구와 달리 이러한 까다로운 규정하에 회의가 이뤄지기 때문에 소수의 회원들로 이뤄진 OECD이지만, 그만큼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OECD에 근무하는 관계자는 “각 국의 대사나 장관이 참석하는 국제회의에서는 만장일치로 의견을 조율해내는 의장의 회의진행을 보면 예술적이란 말이 나올 정도”라고 말한다. 수십개의 나라의 대표가 모여 만장일치로 의견을 조율한다는 것은 웬만한 ‘multilateral’(다자적)한 감각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AP07DAC07010C3B9025.JPG

 

  우리나라는 이러한 국제관계에서의 ‘다자주의’에 아직 익숙해 있지 않은 상태다. 한-칠레 FTA부터 한-미, 한-EU FTA까지 “한국은 FTA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한편, UN이나 WTO, OECD, 6자회담 등 다자주의 협상에서는 주도권을 쥐거나 손해를 보지 않는 협상술이 부족한 느낌이다. 이것은 오랜 중국과의 관계, 분단상황이라는 한반도 특수상황 등 한국의 역사적 경험이 다자주의 보다는 1:1 관계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는 멀티의 시대인 만큼, 국제무대에서 한 가지 사건이 1;1의 결말을 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중국의 부상이 한국에 손해만 입힐 수는 없으며,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중동,
남미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이 세계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대다. OECD와 같은 국제무대의 다자주의 대화채널에 한국인의 도전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AP07DAC07010DEA028.JPG

카테고리 : Bonsoir! 샹젤리제! 댓글 남기기

객석은 평등하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AP07DAB161415232000.JPG

 

 독일
남부 지방을 여행하다가 바이에른 주의 바이로이트로 차를 몰았다.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오페라만 상연하는 전용극장인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내년에 100주년을 맞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Bayreuther
Festspiele)은 전세계 ‘바그네리안’들의 성지다. 그러나 한정된 좌석티켓을 전세계인들에게
팔기 때문에 매년 8월에 열리는 축제기간 동안 표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이다.
8년간 티켓 구매 신청을 줄기차게 보내야 티켓을 구입해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생전에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바그너의 오페라를 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
독일 여행 도중 축제극장이라도 구경하고 싶었다. 뮌헨에서 바이로이트로 가는 길에
뉘른베르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바그너가 작곡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 징어(명가수)’의
무대가 됐던 곳이라 밤늦은 시각에 도착해서도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객석은
평등하다!

 

   다음날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찾았다. ‘트리스탄 거리’를 지나니 한적한 시골 동네에 빨간색
벽돌로 지은 건물이 나온다. 바그너의 동상도 서 있다. 5유로를 내고 극장 투어를
시작했다. 바그너의 ‘축제극장’은 기존의 오페라 극장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꾼 혁신적인
극장이었다.

   바그너가
이 극장에서 ‘니벨룽의 반지 4부작’으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처음 연 것은 1876년
8월13일이었다. 축제극장은 무대 장치만 현대화 됐을 뿐, 객석은 바그너가 설계한
당시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독일식 실용주의 탓일까. 소박하기 그지 없는 로비,
카페트도 깔려 있지 않은 마룻바닥, 딱딱한 나무의자 객석도 그대로였다.
화려한 장식과 천장화, 로열석, 박스석, 샹들리에로 꾸며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의
오래된 궁정 오페라 극장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AP07DAB16142C31C002.JPG

  

  그렇다면
당시의 다른 오페라 극장은 어떠했을까? 오페라 관객들은 공연 도중에 자유롭게 먹고
마실 수가 있었다. 웃고 떠들 수도 있었다. 객석의 가스등은 서곡이 끝날 때만 단
한 번 꺼질 뿐, 공연 내내 켜져 있었다. 관객들은 모든 장면이 끝날 때마다 박수를
쳐댔다. 로열석, 박스석은 왕족, 귀족들의 사교장이었다.

  오페라가
아닌 ‘음악극’을 선언했던 리하르트 바그너에겐 참을 수 없는 객석 매너였다. 바그너는
‘축제극장’은 박스석과 로열석의 위계질서를 갖춘 궁정극장의 전통을 과감하게 깨부쉈다.
대신 넓은 아래층에 1974개의 좌석을 고대 원형극장처럼 일렬로 배치했다. 좌석은
아무런 장식 없이 절단된 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이로써 관객들은 어느 자리에 앉든지
아무런 방해 요수 없이 무대 전체를 볼 수 있는 전망을 보장받게 됐다. 나무로 된
천장은 천막을 연상케 했으며, 섬세한 디자인 덕택으로 최상의 음향효과를 자아낸다.

  무대와 아래층 좌석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오케스트라가 자리잡고 있다. 오케스트라는 바그너가 ‘현실세계’(객석)와 ‘이상세계’(무대)를 분리하는 ‘신비의 수렁(mystical chasm)’이라고 불렀던 깊은 오케스트라 피트에 숨겨져 있다. 바그너에게 모든 이러한 극장 건축 디자인은 음향효과를 개선시키고 관객들이 무대 위의 음악극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초대손님들의 권위를 높여주기 위한 장치는 모두 없앴다.

 

AP07DAB16142E1E4006.JPG

 

  바그너의
축제극장은 단순히 건물 구조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바그너는 서곡이 연주되는
동안 객석의 불을 완전히 꺼버렸다. 무대의 막이 올라가 있는 동안에는 객석에 입장하는
것을 금지했다. 한번 문이 닫히면 어떠한 귀한 초대 손님이라도 입장을 불허했다.
실제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좌석은 객석 사이가 좁고, 통로가 없어 도중에
화장실을 가거나, 중간 입장을 하려면 수십명이 다 일어나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때문에 극이 시작된 후에 좌석에서 이동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바그너는
막이 끝날 때마다, 가수의 노래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쳐대는 것을 금지시켰다. 또한
바그너는 축제극장을 개관하면서 혁신적인 무대장치를 선보였다. 상하, 좌우에서
무대 커튼이 동시에 열리고 닫히는 일명 ‘바그너 막’, 스팀 기계를 이용한 안개,
무대 배경의 회전식 이동장치 등이었다, 이러한 혁신은 당시에는 과격하고 눈에 띄는
것이었지만, 현재는 오페라 무대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신비의
수렁-오케스트라 피트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비의 수렁’으로 불리는 오케스트라 피트다.
일반 오페라 극장의 오케스트라 피트는 그리 깊지 않아 지휘자의 머리를 볼 수 있거나,
2층 좌석에서는 오케스트라 전체의 연주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그너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모습이 무대 위의 연기를 감상하는 데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엄청난
오케스트라의 음량과 무대 위 가수들의 목소리를 조화시키기 위해 오케스트라 피트를
그야말로 ‘깊은 계곡’ 속에 만들어놓았다.

오케스트라 피트는
계단식으로 돼 있었으며, 140㎡의 넓이로 124명이 앉을 수 있다.

 

AP07DAB161430290010.JPG

 

  깊은
오케스트라 피트는 오케스트라의 사운드와 무대 위의 솔로이스트들과 합창단들의 목소리와 잘 섞인 뒤 객석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음향적 장치는 바이로이트 극장만의 독특한 사운드를 가능하게 해준다. 반향(잔향)음은 1.5초에 이른다. 이 때문에 솔로이스트들과 가수들은 오케스트라와는 별도로 지휘돼야만 한다. 객석에서 연주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한 여름의 높은 기온 때문에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연주할 수 있다.

  제일 상단부와 중간에 현악기와 목관악기가 위치한다. 양쪽에는 하프가 있고, 낮은 지역에는 금관악기와 팀파니 연주자가 앉는다. 연주 도중에 어떤 부분에서는 ‘귀 보호개’가 사용되기도 한다. 음향효과를 위해 악기의 배열이 일반적인 다른 극장과 다르다.

  축제극장의 지휘자 석에 앉았던 마에스트로 중에는 한스 리히터,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아르튀르 토스카니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한스 크나퍼츠부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볼프강 자발리쉬, 칼 뵘, 콜린 데이비스, 다니엘 바렌보임, 제임스 레바인, 쥬세페 시노폴리, 크리스티안 틸레만, 피에르 불레즈 등이다.

 


AP07DAB1614302FD011.JPG

 

  각 시즌마다 전세계 유명 오케스트라에서 초청된 200명의 연주자들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한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은 시즌마다 새롭게 초청되지만, 많은 수의 연주자들이 수년간 여름 휴가를
이 곳에서 보낸다. ‘페스티벌 코러스’도 마찬가지다. 전세계에서 초청된 약 140명의 가수들이 시즌에 참여한다.

 

AP07DAB16142F222009.JPG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역사

 

  1813년에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리하르트 바그너는 1850년에 처음으로
자신만의 ‘페스티벌’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1851년 시작한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무대에 올리고 싶어했다. ‘니벨룽의 반지’의 대본이 출판된 1862년. 바그너는 본격적인
페스티벌 계획을 짰다. 그러나 전용 축제극장을 짓는 비용은 엄청났다. 왕이나 개인
후원자에 기대야 했다. 그는 출간된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의 서문’에 이렇게 자문했다. “과연 왕자는 나타날 것인가?”

  왕자는 1864년에 나타났다. 바바리아의 왕 루드비히 2세가 리하르트 바그너를 뮌헨으로 초청했다. 바그너의
오페라에 심취했던 루드비히 2세는 바그너에게 이자르 강가의 초원지대에 축제 극장을 세우라고
말했다. 드레스덴 오페라하우스를 건축했던 고트 프리트 젬퍼가 그 극장을 디자인하도록 위임받았다. 그러나
바그너는 이 극장의 설계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1871년 처음으로 바이로이트를 방문했다. 그는 바이로이트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게 됐고 바이로이트도 바그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시 공의회에서는 바그너에게 축제극장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땅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1872년 곧바로
기초석이 놓여졌고, 1873년 상량식이 거행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건축작업은 자금난에 봉착해 중단됐다. 다시
한번 루드비히 2세 왕이 재정적 도움을 주었고, 대출을 받은 자금으로 첫 번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열렸다. 이 극장은 1876년 8월13일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와 함께 개관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축제 예산의 60% 이상을 자체 수익과 ‘바이로이트 악우협회’의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나머지 약 3분의1의 자금은 1953년 창설된 축제위원회로부터 지원받는다. 축제위원회는 △독일 연방 정부 △바바리아주 정부 △바이로이트시와 바이로이트 악우협회 등으로 구성돼 있다.

  

  축제 극장의 첫 번째 예술감독은 리하르트 바그너였다. 그의 사후에는 바그너의 부인이었던 코지마 바그너, 아들이었던 지그프리트 바그너, 위니프리트 바그너가 맡았고, 전후에는 손자인 빌란트와 볼프강 바그너가 맡았고, 1966년 빌란트 바그너가 죽은 후 볼프강 바그너가 맡고 있다.


 

AP07DAB161432196013.JPG

바그너
동상.

카테고리 : 유럽 음악여행 댓글 남기기

파리에 남아 있는 쇼팽의 추억

AP07DAA14061D3E002.JPG

 

  10월30일은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리는 작곡가 쇼팽의 장례식이
열린 날이다. 1849년 쇼팽의 장례식이 열렸던 파리의 마들렌 성당에서는 10월30일
쇼팽의 장례미사 당시 연주됐던 모차르트 ’레퀴엠’을 재현하는 음악회가
열릴 예정이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당시 장례식과 관련해서는 이러한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마들렌 성당에서 열리게 된 장례식에는 쇼팽의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파리 대주교는 여성
성악가(모차르트 ‘레퀴엠’에서 여성 성악가의 역할은 중요하다)는 성당 관례상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하여, 장례식은 2주나 연기된다. 이에 쇼팽의 친구이자 팬이었던
드게리 보좌 신부가 대주교를 설득하고, 결국 대주교가 양보해 1849년 10월30일 아침
11시에 장례식이 치러졌다. 검은 색 옷을 입은 군중 3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에는
쇼팽 자신이 지은 ‘장송행진곡’과 ‘전주곡 4번’이 울리고,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됐다. 이날 ‘레퀴엠’에는 쇼팽의 오랜 친구이자 폭넓은 음역을 가진 여성 성악가인
폴린느 비아르도가 노래해 쇼팽의 영혼의 안식을 빌었다." (파리시청 홈페이지,
‘쇼팽과 낭만적인 파리 발라드’)

  

  AP07DAA14061D2AF003.JPG

  <파리에 있는 성당 중에 유일하게 그리스 신전(파르테논)의 모양을
하고 있는 마들렌 성당. 마들렌 성당은 예수가 돌아가실 때 십자가 밑에서 성모님과
함께 있던 여성이고, 부활도 성모 마리아와 함께 처음 목격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마들렌 성당 앞에는 늘 꽃으로 장식돼 있다.>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은 쇼팽을 추모하는 행사는 올해
고국인 폴란드 뿐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프랑스도 올해를 ‘쇼팽의
해’로 선포하고 각종 기념 음악회와 행사를 벌이고 있다.

  쇼팽은 바르샤바에서 서쪽으로 50km 떨어진 작은 도시 젤라조바 볼라에서
1남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니콜라 쇼팽은 프랑스인이었고, 어머니는
폴란드 사람이었다. ‘쇼팽과 낭만적인 파리 발라드’를 소개하는 파리시청 인터넷
사이트는 “쇼팽의 국적이 ‘속지주의’에 따르면 폴란드이지만, ‘속인주의’에
따르면 프랑스인”이라고 말한다.

 

  7세 때 쇼팽은 이미 두 개의 폴로네이즈를 작곡하고, 그의 천재성이
바르샤바에 알려지면서 귀족들의 관심을 끌었다. 11세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앞에서 연주를 하는 등 일찍이 천재성을 나타내며 모차르트에 비견된다. 그가
20세 되던 해 폴란드는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프러시아에 의해 분할됐다. 쇼팽은
1830년 11월2일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음악여행을 목적으로 고국을 떠난다. 1831년
8월 쇼팽은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폴란드 독립을 위해 1년간 싸워왔던 ‘11월 봉기’가
실패하고, 바르샤바는 러시아에 의해 점령됐다는 비보를 듣는다. 이 때의 처절한
울부짖음과 피아노를 부술 듯 쓰여진 격렬한 분노와 절망을 담은 곳이 바로 ‘혁명
에튀드’(Etudes Op.10, No 12)이다.

  1931년 가을, 스무살의 쇼팽은 파리에 도착한다. 이 당시 파리는
세상의 모든 음악가, 화가, 작가 등 예술가들을 위한 장소였다. 파리에서 쇼팽은
세기의 예술가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교류하며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 때부터
39세로 죽을 때까지 쇼팽은 18년간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파리를 무대로 활동했다.
그에게 ‘작곡가 쇼팽’으로서의 제2의 고향은 파리였던 셈이다. 파리 곳곳에는 쇼팽의
체취가 남아 있다. 파리시의 명물인 공공임대 자전거 ‘벨리브’를 타고 쇼팽의 흔적을
뒤쫓아가 봤다.

 

AP07DAA14061D222004.JPG

 

◆몽소공원

  1836년 10월 쇼팽은 리스트의 애인이었던 다구 부인의 살롱에서 처음
조르주 상드를 소개받았다. 당시 쇼팽은 26세, 상드는 32세였다. 상드는 스페인의
마요르카, 프랑스 노앙 등지를 돌며 폐병에 걸린 쇼팽을 어머니처럼 헌신적으로 돌보며
쇼팽의 음악을 살려놓았다. 노앙에서 요양 당시 여름날 저녁 식사가 끝나면 쇼팽은
작곡을 하다가 상드를 위해 즉흥 연주를 했다고 한다. 쇼팽은 건강 때문에 일찍 잤고
상드는 그 때부터 새벽 5시까지 글을 썼다. 상드는 ‘내 생애의 역사’에서 쇼팽의
창작과정에 대해 자세히 기록했다.

  “그의 음악은 찾는 것이 아니라 절로 솟아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써낼 때는 너무 고심을 했다. 그는 종일 방 안에 갇혀 울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펜대를 꺾기도 했다. 한 소절을 몇 번이나 고쳐 썼고, 한 페이지를 쓰는 데
6주간이 걸린 적도 있었다.”

 

AP07DAA14061E36B005.JPG

 

  파리의 몽소공원에는 피아노를 치는 쇼팽과 그 앞에 누워 있는 조르주
상드의 동상이 서 있다. 쇼팽이 상드와 함께 지냈던 9년간 쇼팽은 폴로네즈, 발라드,
녹턴, 마주르카 등 자신의 대표작을 작곡했다. 쇼팽의 음악은 상드와 굳게 묶여 있었고,
상드와 헤어진 후 쇼팽은 죽음으로 치달았다.

 

AP07DAA14061E6D006.JPG

 

 

◆ 파리 ‘살 플레엘’(Salle Pleyel)

  쇼팽이 파리에 도착할 당시, 파리는 ‘음악의 수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피아노 제작자들의 수도’이기도 했다. 당시 적어도 300여 개의 피아노
제작사들이 파리에 정착했으며, 이 가운데 플레이엘(Pleyel), 에라르(Erard), 파프(Pape)
등 최고의 피아노 제작사들이 서로 테크닉을 발전시키며 경쟁을 하고 있었다. 쇼팽은
까미유 플레이엘(Camille pleyel)을 만나게 되고, 1832년 2월25일 ‘플레이엘 살롱’(Salons
Pleyel)에서 연주를 한 계기로 이후 플레이엘 피아노를 꾸준히 사용하게 된다.

  “내가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이미 기성 음이 쉽게 발견되는
에라르 피아노를 사용한다. 그러나 영감으로 가득차고, 내 자신의 음을 찾아 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건한 상태라면, 나에게 플레이엘 피아노가 필요하다”라고
쇼팽은 말했다.

 

AP07DAA14061F8C009.JPG

 

AP07DAA14061E177008.JPG

<쇼팽이 사용했다는 플레옐 피아노>

 

  아이러니하게도 쇼팽은 많은 대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발자크, 들라크루와, 하이네 등 친구들과 귀부인들 앞에서 즉흥 연주를 즐겼다.
기막힌 피아노 연주 솜씨를 가졌지만 병약했던 쇼팽의 이러한 ‘신비주의 전략’은
귀부인들을 광적인 팬으로 만들었다. 연인이었던 조르주 상드는 그의 서신에서 쇼팽의
이런 성격을 유머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쇼팽은 자신의 연주회에 대해 광고하는 것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도 싫어하고, 하물며 관중이 있는 것 조차 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피아노도
아예 소리나지 않는 무음 피아노를 사용하자고 했지요.”

 

AP07DAA14061E148007.JPG

 

◆ 쇼팽의 마지막 집 ‘방돔광장 12번지’

   1847년 쇼팽과 상드의 9년간의 세기적인 사랑이 피날레를 맞고,
쇼팽의 건강은 더욱 악화된다. 1849년 그는 방돔 광장 12번지에 있는 햇빛이 충분히
들어오는 남향의 안락한 아파트로 이사한다. 그의 마지막 거처가 된 이 집에서 그는
미완성 작품들을 하나하나 완성시킨 후 마주르카와 녹턴에만 전념한다. 그의 마지막
곡은 폴란드를 그리워하며 작곡한 마주르카 바단조(Mazurka Op.68, No.4)이다. 죽음이
다가오는 병상에서 음악을 듣고 싶어하는 쇼팽에게 한 연주자가 쇼팽이 작곡한 음악을
연주해주겠다고 하자, 그는 “내 것 말고 더 순수한 음악, 내가 존경하는 모차르트의
곡을 쳐주시오”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1849년 10월17일 새벽 2시경, 쇼팽은 “마토카! 모이아 비엔나 마토카!”(어머니
불쌍한 나의 어머니!)라고 말하며, 어머니의 나라 폴란드의 애달픈 운명과 그리움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었다.  

 

AP07DAA1406207D013.JPG

 

  -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가까운 방돔 광장은 나폴레옹의
아우스테를리츠 전승을 기념하는 높이 44m의 청동색 기둥이 서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루이 14세 때 건축가 쥘 아르두앵 망사르(1646~1708)가 설계한 방돔 광장은 향기로운
향수점으로 가득차 있다. 광장을 둘러싼 17세기 건물들은 현재 불가리, 에르메스,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 고급 부티크와 명품 보석 매장들이 차지하고 있다.

 

AP07DAA1406201C5015.JPG

 

  - 쇼팽이 살던 당시에도 방돔 광장은 고급 주거지였다. 햇빛 잘 드는
곳을 찾아 이곳으로 이사온 쇼팽은 5개월의 투병 끝에 숨을 거둔다. 서른 아홉의
젊은 나이였다. 쇼팽이 운명한 방돔 광장 12번지는 지금 명품 시계 브랜드인 ‘쇼메’의
사무실이 되어 있었다. 1층에는 쇼메의 숍이 있고, 2층은 사무실인데 공개를 하지
않고 있다. 1층과 2층의 사이의 벽에 ‘1810년 2월22일 폴란드에서 태어난 프레데리크
프랑수와 쇼팽이 1849년 10월17일 이 집에서 사망했다’는 명판이 붙어 있다. 건물을
지키는 수위에게 부탁을 하니 집 안의 정원과 계단 일부를 찍을 수 있었다.

 

AP07DAA1406211F4016.JPG

 

AP07DAA140707119033.JPG

 

◆ 폴란드 도서관의 ‘살롱 드 쇼팽’

 

AP07DAA140624128023.JPG

 

  쇼팽의 마지막 거처인 ‘방돔광장 12번지’의 집은 다른 곳에 복원돼
있었다. 세느 강변에 있는 ‘폴란드 도서관(Bibliotheque Polonaise)’의 ‘살롱
드 쇼팽’이다. 이 곳에는 쇼팽이 마지막으로 살던 집 내부에 놓여 있던 피아노와
의자, 집기, 사진, 영세 증명서, 편지 등이 전시돼 있다.

 

AP07DAA140622203019.JPG

 

특히 쇼팽의 데드 마스크와 손을 석고로 본 뜬 모형, 쇼팽의 금발 머리카락도
유리창 안에 놓여 있어 눈길을 끈다. 쇼팽의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은 금방이라도
건반 위를 거닐 며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줄 듯하다.

 

AP07DAA140623271021.JPG

 

 

◆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

  마들렌느 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마친 후 쇼팽의 운구는 페르 라 쉐즈로
옮겨져 안장됐다. 이 무덤에 매장될 때 쇼팽이 바르샤바를 떠나던 날 친구들이 기념으로
준 폴란드의 한 줌의 흙이 그의 시신 위에 뿌려졌다. 그래서 쇼팽의 유체는 파리의
페르 라쉐즈에 묻혀 있지만, “그는 폴란드 땅 아래 묻혀 있다”고 한다. 유해는
여기에 묻혔으나 쇼팽의 심장은 그의 유언대로 고국에 보내져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교회에 있는 황금 단지 속에 안치됐다.  AP07DAA1406253D8026.JPG

 

  쇼팽의 무덤에는 쇼팽의 얼굴이 새겨진 메달과 하얀 대리석 뮤즈
조각상으로 꾸며져 있어 화사한 느낌을 준다. 대리석 뮤즈상은 조르주 상드의 딸
솔랑즈의 남편이던 클레상제의 작품이다. 쇼팽의 무덤 앞에는 찬미자들이 갖다 놓는
꽃이 한 시도 떨어지지 않는다. 이 무덤은 사랑하는 연인들끼리의 우편함으로도 이용되어
서로의 연락 메모를 묘비 뒤에 숨겨놓기도 한다. 탄생 200주년을 맞은 올해 쇼팽의
무덤은 폴란드 국기를 상징하는 흰색, 빨간색 장미가 수북히 놓여져 있었다.  

 

AP07DAA14062433C024.JPG

 

◆팔레 루아얄 아케이드

  팔레 루아얄 아케이드에는 최고의 의복을 재단하고 장신구를 파는
고급 상점들이 있었다. 이 곳에서 쇼팽은 하얀 장갑, 모자 등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했는데,
이 상점들은 쇼팽의 신체 사이즈를 지니고 있었다. 쇼팽은 비서인 줄리앙 퐁타나에게
자신이 필요한 품목을 이야기만 하면, 주문한 것들이 만들어져 쇼팽의 집으로 배달됐다고
한다.

 

AP07DAA14061F6D012.JPG

 

◆튈르리 공원

  튈르리 공원은 쇼팽이 즐겨 산책하던 장소 중의 하나였다. 1838년
쇼팽은 루이 필립 1세에게 첫 초청을 받아 연주했으며, 감사의 표시로 왕과 황후의
얼굴이 새겨진 찾잔으로 차를 대접 받았다. 1841년 그가 두 번째로 초청을 받아 연주를
한 후에는 금 100프랑을 사례로 받았다고 한다.

AP07DAA14061F242011.JPG

 

 

카테고리 : Bonsoir! 샹젤리제!
태그 : , , , , | 댓글 3개

몽마르뜨르에서 열린 포도 축제

"프랑스를 상징하는 음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방(Vin)’이고, 하나는
‘빵(Pain)’이다."

 

AP07DAA0B162B8C002.JPG

<몽마르뜨르에 있는 포도밭>

 

10월 독일에서는 맥주 축제인 ‘옥토버 페스트(October Fest)’가 열리고,
  

프랑스에서는 지역마다 ‘포도 수확 축제’(La Fete des Vendanges)가 성대하게
펼쳐진다.  

 

포도 수확축제는 와인산지로 유명한 보르도나 부르고뉴, 샹파뉴 등에서만 열리는
것이 아니다.

파리 18구의 도심 한 가운데에 있는 몽마르뜨르의 포도밭에서도 1934년 이후로
매년 10월에 포도 수확 축제가 열린다.

올해 77회째를 맞은 올해에는 3일부터 12일까지 열흘간 열렸다.

 

해발 130m 지대의 몽마르뜨는 원래 포도밭과 풍차가 어우러진 전원지대였다.

가난한 예술가들이 비싼 파리 집값에서 벗어나 창작열을 불태우기엔 안성맞춤이었다.

그러나 1900년 초 이 곳이 유명해지면서 대부분의 포도밭은 상가와 건물로 변했지만,

파리시는 포도밭의 일부를 사들여 현재까지 ‘시영 포도농장’으로 운영 중이다.

 

포도축제의 하이라이트는 토요일인 9일 1만5000명이 참가해 몽마르뜨 일대를 들썩이게
한 행렬.

파리 시내의 각 단체들이 참여해 악기를 연주하고, 고기를 굽고, 포도주를 나누고,
춤을 추면서 몽마르뜨를 거대한 축제의 장으로 변모시켰다. 이날 밤 9시에는 사크레
쾨르 성당 앞에서 화려한 불꽃놀이도 펼쳐졌다.

 

우리나라 같으면 도심의 포도밭은 흔적도 없이 다 밀어버렸을텐데,

‘아주 조금’이나마 사들여, 시가 직접 포도농장을 운영하는 파리시의 혜안이 놀랍다.

몽마르뜨에서 생산되는 와인은 ‘Clos Monmartre’라는 라벨을 달아 판매가 된다.

이번 축제기간에는 1500병이 특별 공급됐다.

줄을 서서 한잔을 사서 맛 본 몽마르뜨르 와인의 맛은 시큼하고, 떨떠름했다(한
마디로 별 맛은 없었다).

그러나 도심 포도밭에서 재배된 포도로 만든 와인이라는 특별한 기분에 사람들은
와인 맛을 보려 기다란 줄을 섰다.

 

역사와 스토리만 있다고 축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현재도 살아 숨쉬며 이어져 오는 현장이 있어야 축제도 흥겨워지는 법이다.

 

AP07DAA0B162E109010.JPG

 

AP07DAA0B162C2CE006.JPG

 

AP07DAA0B1630203012.JPG

 

AP07DAA0B162A30D001.JPG

몽마르뜨 와인을 마셔보기 위해 줄을 선 사람들…

 

 

 http://youtu.be/PWnZYv2eVCA

카테고리 : Bonsoir! 샹젤리제!
태그 : , , , | 댓글 1개

오줌싸는 소녀를 해방시켜라

  AP07DAA05160B167003.JPG

 

  벨기에 브뤼셀 그랑 플라스 광장 주변에는 유명한 ‘오줌싸는
소년 동상’(Manneken Pis)이 있다. 1619년 조각가 제롬 뒤케누아가 제작한 오줌싸개
동상은 ‘꼬마 줄리앙’이라고도 부른다. 이 동상은 프랑스가 약탈해 갔다가 루이 15세가
약탈을 사죄하는 뜻으로 화려한 프랑스 후작의 의상을 입혀서 돌려보낸 뒤 유명해졌다.
그 후 네덜란드 국왕 등 많은 국가의 국빈들이 방문할 때 줄리앙의 옷을 가져와 입히는
것이 관례가 됐다고 한다. 현재 오줌싸는 꼬마 줄리앙의 옷은 600벌이나 된다고 한다.
그 중 각국에서 보내온 화려한 옷 300벌은 그랑 플라스 광장에 있는 ‘왕의 집’에서
전시하고 있다. 불과 60cm도 안되는 크기의 ‘줄리앙’ 동상은 세계 각국의 관광객들을
끌어모으는 벨기에의 1등 공신이다. 브뤼셀에는 오줌싸는 소년의 동상이 초콜릿,
와인따개, 크레페 가게 모델 등으로 곳곳에 널려 있다.

 

AP07DAA05160B1F004.JPG

오줌싸는 소년 상품점.

AP07DAA05160F261006.JPGAP07DAA05160F261007.JPGAP07DAA05160F186008.JPGAP07DAA05160FBB009.JPGAP07DAA051610BB010.JPGAP07DAA051610FA011.JPGAP07DAA0516102AF012.JPGAP07DAA0516181A5016.JPGAP07DAA05161831C017.JPGAP07DAA0516182BF018.JPGAP07DAA05161800020.JPG

각 국의 정상들이 방문할 때 소년의 동상에 옷을 입힌 사진 (구글 이미지)

 

  그러나 벨기에에 ’오줌 싸는 소녀 동상’(Jeanneke Pis)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다. ‘오줌싸는 소년’ 동상이 그랑 플라스
주변에 눈에 잘 띄는 길거리에 있는 것과 달리 ‘소녀’의 동상은 그랑 플라스 옆의
먹자골목인 부셰 거리의 혼잡한 곳에 있기 때문이다. 브뤼셀의 유명한 홍합요리 전문점
‘Chez Leon’에서 골목을 따라가니 한 막다른 골목에 사람들이 몇 명 모여 있다. ‘오줌
싸는 소녀’의 동상 앞이었다. 그런데 웬일인가. 소녀는 자물쇠로 잠긴 철조망 안에
갇혀 있었다.

 

 

AP07DAA051609109000.JPG

 

  "오줌 누는 소녀상인 잔네케피스는 1985년에 암과 에이즈 퇴치
모금을 위해 제작했다고 하는데, 앉아서 일을 보는 소녀의 모습이 물의를 일으키고
있다."(‘자신만만 세계여행 EUROPE-벨기에’, 삼성출판사)

 

  철조망 너머로 ’오줌 싸는 소녀상’을 본 여행객들 사이에선
킥킥대는 웃음이 나왔다. 외국인들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인가 보다. 어린아이가 고추를
내놓고 오줌 싸는 동상은 귀엽기만 한데, 어린 소녀가 앉아서 볼일을 보는 동상은
왜 ‘물의를 일으키는 것’이 되는 것일까. 어째서 ‘마네킨 피스’는 국가정상 외교에도
등장할 정도로 당당한 데, ‘잔네케 피스’는 어두운 뒷골목 창살 아래서 비웃음의
대상이 돼야 하는 것일까.

 

  AP07DAA05162037A023.JPG

 

  벨기에에 내려오는 ’꼬마 줄리앙’의 전설에 따르면 줄리앙은
전쟁터에 나간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한참 전투가 진행되는 전장터에서 꼬마 줄리앙은
갑자기 오줌이 마려워진다. 피비린내 전쟁터 한 복판에서 아이가 오줌을 싸는 모습을
보고 일순간 총성이 멈춘다. 양편의 병사들 사이에서 갑자기 웃음이 터져나온다.
그리고 전쟁은 그친다. 그래서 오줌싸는 소년 줄리앙은 ‘평화의 상징’이다. 그런데,
만약 전쟁터 한 가운데서 오줌을 싼 아이가 소녀였다면 이런 칭송을 받았을까? 각국의
정상들은 왜 ‘오줌싸는 소녀’에겐 자기 나라를 상징하는 옷을 입히지 않는 것일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터부(금기)’라는 것은 오랜 기억 속에 자리잡고
있는 듯하다. 구글로 검색해보니 오줌싸는 소녀상은 대부분 잠겨 있는 철조망 너머로
찍은 사진들이다. 별로 인기도 없는 데다, 훔쳐갈까봐 날마다 잠겨 있는 듯하다.
과연 ’오줌싸는 소녀’는 해방될 수 있을까.  

 

 

서서 
오줌 누고 싶다

 


규 리

 

여섯
살 때 남자친구, 소꿉놀이하다가 쭈르르 달려가 함석판 위로 기세 좋게 갈기던 오줌발에서 예쁜 타악기 소리가 났다
셈여림이 있고 박자가 있고 늘임표까지 있던, 그 소리가 좋아, 그 소릴 내고 싶어 그 아이 것 빤히
들여다보며 흉내 냈지만 어떤 방법, 어떤 자세로도 불가능했던 나의 서서 오줌 누기는 목내의를 다섯 번 적시고 난 뒤

축축하고
허망하게 끝났다 도구나 장애를 한 번 거쳐야 가능한 앉아서 오줌 누기는 몸에 난 길이 서로 다른 때문이라 해도
젖은 사타구니처럼 녹녹한 열등 스며 있었을까


아득한 날의 타악기 소리 지금도 간혹 함석지붕에 떨어지는 빗소리로 듣지만 비는 오줌보다 따습지 않다 서서 오줌 누는
사람들 뒷모습 구부정하고 텅 비어 있지만, 서서 오줌 누고 싶다 선득한 한 방울까지 탈탈 털고 싶다

 

-
작가세계 2003 봄호.

 

 

카테고리 : Bonsoir! 샹젤리제! 댓글 5개

대통령의 전용차의 국산화는 언제쯤

AP07DA91E082C30D017.JPG

CITROEN D.S 21 LIMOUSINE, 1968   (길이 6.53m, 넓이 2.13m, 무게 2260kg) 

 

 19일 유럽 문화유산의 날을 맞아 프랑스 대통령 관저인 엘리제 궁이 일반 시민들에게 공개됐습니다.

  이날 엘리제궁 뒤뜰에는 역대 프랑스 대통령들의 전용차가 전시됐습니다. 니콜라 사르코지 현 대통령이 타고 다니는 ‘푸조 607
PALADINE’에서부터 샤를 드골, 조르주 퐁피두, 프랑수와 미테랑, 자크 시라크 대통령 등이 타고 다녔던 차량이 전시됐습니다.

  1920년대의 클래식 카는 물론 길이 6미터, 무게가 2톤이 넘는 대형 리무진, 카퍼레이드를 할 때 쓰는 무개차, 군 작전용 트럭까지
다양한 대통령 전용카들이 선보였습니다.

 

AP07DA91E08294E007.JPG

SIMCA VEDETTE DECAPOTABLE.  (길이 4.99m, 무게 1547 kg)

 

AP07DA91E082A0F009.JPG

CITROEN S.M. DECAPOTABLE (1972)   길이 5.6m, 무게 1780kg 

 

AP07DA91E082A1C5010.JPG

 

AP07DA91E082B157011.JPG

VOISINE, type C7, coupe-chaffeur, 1925

 

AP07DA91E082B2AF012.JPG

RENAULT FREGATE LIMOUSINE

 

AP07DA91E082B35B014.JPG

 

AP07DA91E082B148013.JPG

RENAULT 40 CV Type MC, 1924

 

AP07DA91E082C8C015.JPG

CITROEN D.S 23

 

AP07DA91E082C148016.JPG

 

 

AP07DA91E0829271005.JPG

CITROEN D.S 21 LIMOUSINE, 1968   (길이 6.53m, 넓이 2.13m, 무게 2260kg) 

 

AP07DA91E082E3A9019.JPG

Peugeot 607 PALADINE

 

AP07DA91E083900021.JPG

RENAULT VEL SATIS, 2007

 

AP07DA91E082A3C8008.JPG

ACMAT 군 작전 지휘차량(VEHICULE DE COMMANDEMENT)

 

  자존심 강한 프랑스 대통령은 국산차를 애용하다 봅니다. 대통령
전용차는 르노, 시트로엥, 푸조 등 프랑스의 3대 자동차 메이커들의 차량이
대부분입니다. 독일, 미국제 차량은 보이지 않더군요. 미국의 오바마 대통령이 타는
전용차는 제너럴모터스(GM)이 제작하는 ‘캐딜락 원’입니다.

 

  반면 한국의 역대 대통령들의 경우 주로 독일 벤츠, BMW사의 차량이
전용차량으로 많이 이용됐더군요. 이명박 대통령은 취임식 때 독일 Mercedes-Benz
S600 Guard Pullman Limousine을 탔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3가지의 대통령
전용차량을 갖고 있었습니다. 독일 BMW Security 760Li, 독일 메르세데스 벤츠사의
S600 Amoured, 현대자동차 그랜저였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제2차 남북정상회담
당시 방탄용 철갑과 특수유리로 무장된 무게 3.8t짜리 BMW 760Li를 타고 갔습니다.

 

AP07DA91E08227D000.JPG

이명박 대통령의 전용차  Mercedes-Benz S600 Guard Pullman Limousine

 

AP07DA91E082534B002.JPG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전용 캐딜락 ‘더 비스트’.

 

 <대통령이 타는 방탄차량은 그 자체가 요새다. 방탄판으로 이뤄진 차체는 중기관총인 캐러버50의 탄환을 막아낼 수
있고, 차량 밑바닥은 수류탄과 지뢰가 터져도 끄떡없다. 차체 표면엔 화염병 투척에 대비한 방염 처리를 했고 폭발물 탐지 기능도 갖추고 있다.
총탄을 튕겨낼 수 있는 방탄유리의 두께는 75mm 이상이다. 15mm 두께의 특수 섬유유리를 겹겹이 붙이는데, 여기엔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유리창이 전화번호부책과 맞먹을 정도로 두꺼우니, 아무리 투명도를 유지하려 해도 일반 차량처럼 바깥을 깨끗하게 볼 수 없고 형상이 항상 일그러져
보인다. 이 때문에 1979년 10·26 사건 직후 대통령직을 승계한 최규하 대통령은 전용차량을 잘 타지 않으려 했단다. 나이가 많았던 김대중
대통령도 방탄차량을 탈 때 눈의 피로를 호소했지만 별 뾰족한 수가 없었다.

화학가스 공격에 대비한 산소공급기와, 연료탱크의 폭발을 막기 위해 특수 폼(foam)으로 이뤄진 연료탱크
보호장치도 장착돼 있다. 이렇게 방탄 기능을 갖춘 대통령 전용차량의 무게는 보통 3~4t에 이른다. 도어 하나의 무게만도 100kg을 넘는다.
보잉 여객기의 도어 무게와 비슷하다.>(한겨레21, 2009년 3월21일자)

 

  현대, 기아 자동차가 세계적인 자동차 메이커인데도
한국의 대통령들이 전용차로 애용하지 못하는 이유는 뭘까요? 아직 특수 방탄용 차량을
제작할 만한 기술이 없어서 일 수도 있겠습니다. 그러나 한국의 자존심을 걸고, 한국의
대통령도 국산차를 타고 국내외를 다니는 모습이 세계에 널리 알려졌으면 좋겠습니다.

 

 

 

 

 

카테고리 : Bonsoir! 샹젤리제!
태그 : , , , , | 댓글 4개

엘리제궁 프랑스 대통령 집무실엔 삼성TV가

AP07DA91E001C1A5000.JPG

엘리제궁의 대연회장.

 

  18일, 19일은올해로 26회째를 맞는 ’유럽 문화유산의 날’(Journées européennes du Patrimoine)이었다.

  개선문, 베르사유 궁전, 프티 팔레, 샹젤리제 리도쇼 극장 등 프랑스 전역에 있는 주요 유적지에서는 무료 관람을 하거나 특별한 행사가
열렸다. 그러나 이날 행사의 백미는 뭐니뭐니 해도 프랑스 대통령의 집무실인 ‘엘리제궁(Palais de l’Eyseé)’였다. 엘리제궁은
나폴레옹 시대부터 왕궁 소유의 건물이 된 문화유산이었지만, 대통령의 집무실인 탓에 1년에 단 한 번 이 날만 일반에 개방하기 때문이었다.    

 

AP07DA91E001E8C007.JPG

 

베르사유, 루브르, 퐁텐블로 등 루이 16세, 나폴레옹 3세, 마리 앙뜨와네뜨 등이 직접 사용했던  궁전과 집기들을 봤지만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그저 과거 속의 묻힌 인물들이 쓰던 박제된 박물관일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1874년부터 프랑스 대통령의 관저로
사용돼 온 엘리제궁은 현재의 ‘살아 있는 권력’이 사용하고 있는 궁전(문화유산)이라는 점에서 관람객들에겐 흥분과 열정이 느껴졌다. 

 이 때문일까 이른 아침부터 길게 늘어선 줄은 콩코드 광장을 빙돌아 2-3km에 달했다. 엘리제궁은 오전 8시반부터 오후 8시까지
개방됐는데 엘리제궁 앞에는 이른 새벽부터 기다란 줄이 만들어졌다. 일간 ‘파리지앵’지에 따르면 18일 가장 먼저 엘리제궁을 관람한 사람은
폴란드에서 온 커플로 새벽 3시부터 줄을 섰다고 한다.

 

AP07DA91E001D148001.JPG

 

  나도 일찍 보고 오후에는 다른 곳에 가봐야 겠다는 심산에 오전 8시40분 경 아침도 안 먹고 일찍 집을 나섰다. 그러나 아뿔싸. 벌써
줄이 콩코드광장을 빙돌아 약 2km 넘게 생긴 것이 아닌가. 내 뒤로도 계속 줄이 생겨 인파는 샹젤리제 거리 입구까지 길게 늘어섰다. 한 시간,
두 시간… 기다리다보니 오기가 생겼다. 그래 끝까지 가보자. 아침 점심은 크레페와 샌드위치, 커피로 떼우며 기다린 보람 끝에 오후 3시가
되어서야 엘리제 궁 앞에 당도했다. 무려 6시간 넘게 기다린 성과였다.

 프랑스를 상징하는 수탉 문양이 새겨진 엘리제궁의 정문(La grille du Coq)를 통과하니 과연 오랜 기다림의 보람이 있었다.
삼엄한 짐수색을 끝내고 들어서니 2헥타르 규모에 이르는 엘리제궁의 정원이 나왔다. 해마다 7월14일 프랑스 대혁명 기념일에는 커다란 가든 파티가
열리는 곳이다. 

 

AP07DA91E001D3C8002.JPG

 

  한국에서 청와대 관람은 해본 경험은 없지만, 과연 이 정도로 개방할까 할 정도로 ‘엘리제궁’은 속살까지 화끈하게 개방했다. 나폴레옹이
황제 퇴위 각서를 쓴 방부터 외국 정상 응접실, 대사들에게 임명장을 주는 방, 매주 수요일 아침 대통령과 총리, 장관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는
국무회의실, 대통령의 도서관, 대통령 취임식 파티가 열리는 대연회장까지…. 

AP07DA91E001F290013.JPG

국무회의가 열리는 ‘살롱 무라(Sallon Murat)’.

 

AP07DA91E0027261017.JPG

엘리제궁의 도서관.

 

  가장 눈길을 끈 것은 현 니콜라 사르코지 대통령의 집무실이었다. ’황금의 방’이란 뜻의 ’살롱 도레’(Salon Doré)는 제5공화국
샤를 드골 대통령 이후 대통령 집무실로 사용한 방이다. 2008년 7월25일에는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사르코지 대통령이 이 곳에서 단독 회의를
갖기도 했다. 황금빛 도금과 크리스탈로 장식된 천정의 샹들리에는 물론 테이블 위에 놓은 서류뭉치에 놓여 있는 흰 코뿔소까지 눈길을 끌었다. 또한
왼쪽에는 TV가 놓여 있었는데, ‘SAMSUNG’ 로고가 확연했다. 프랑스의 대통령도 한국의 TV를 통해 세상을 보고 있는 셈이었다.

 

AP07DA91E001D242004.JPG

 

AP07DA91E001E232008.JPG

니콜라 사르코지의 집무실. 오른쪽 구석에 삼성TV가 놓여 있다.

 

AP07DA91E001F271011.JPG

 

AP07DA91E001FAB010.JPG

 

  화려한 샹들리에와 촛대, 붉은 색 카펫으로 장식된 ‘대연회장’(Salle des fetes)은 해마다 연말이면 엘리제궁의 파티가 열리는
곳이다. 이곳에는 특히 엘리제궁에서 근무하는 요리사, 정원사, 경비병, 경찰, 행정직원 등이 자연스럽게 찍은 사진을 전시해 놓아 눈길을 끌었다.
문화유산의 날에 건물 뿐 아니라 그 곳에서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까지 자연스럽게 소개하는 모습은 아직까지 권력의 이미지가 강한 청와대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AP07DA91E001F34B012.JPG

 

  엘리제궁의 후원에는 역대 대통령들이 탔던 대통령 전용차량들이 전시됐다. 길이가 6미터가 넘는 리무진들은 흥미로웠다. 보안상의 문제로
일반에 잘 공개하지 않을 만한 차량의 모습이었지만, 과감하게게 공개하는 프랑스의 모습이 부러웠다.  

 엘리제궁의 공식 웹사이트(www.elysee.fr)에 따르면 18, 19일 이틀간 엘리제궁을 다녀간 사람들은 모두 2만1017명.
지난해에는 2만912명 보다도 늘어난 숫자다. 엘리제궁측은 본관 앞에서 관람객들을 위해 기념사진까지 찍어주는 서비스를 보여주었다. 이 사진은
엘리제궁 홈페이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한 관람객은 "집무실이 아니라 화려한 성(chateau)인 것 같다"고 탄성을 질렀다.  

  프랑스의 주도로 생긴 ‘유럽 문화유산의 날’은 1999년부터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다. 지난해에는 유럽 40여 개국 1만5000여개의
문화유산에서 열린 행사에 약 1200만 명의 관람객들이 몰려들었다.

 

카테고리 : Bonsoir! 샹젤리제!
태그 : , , , | 댓글 1개

자유로운 프랑스식 주말농장 '갈리'

AP07DA91C0A0F177000.JPG

 

유럽의 대평원에 자리잡은 프랑스의 들판을 바라보면 ‘축복받은 땅’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파리같은 대도시에서도 마치 숲속에나 있을만한 거목들이 우거져 있고, 교외의 들판엔 비옥한 농토가 즐비합니다. 프랑스의 제1 수출품도
농산물입니다.

 

지난 주, 파리시내에서 자동차로 한시간쯤 떨어진 베르사유 주변에 있는 ‘갈리 농장’(Gally Ferme)에 다녀왔습니다. 프랑스식
‘주말농장’인데요, 우리나라와 좀 개념이 다릅니다. 봄에 한두평의 땅을 분양받아 직접 가꾸고 따먹는 우리나라와 달리, "자연을
나누자(Partageon la nature)"는 모토처럼 이곳은 50헥타르에 이르는 농장 전체가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는 것이
특징입니다.

 

가족 단위로 온 사람들은 드넓은 밭에 들어가서 딸기, 사과, 산딸기, 자두 등을 자유롭게 따 먹습니다. 농약을 치지 않는 자연농법으로
재배했기 때문에 씻지도 않고 먹는 모습이 곳곳에서 보입니다. 어떤 프랑스 가족들은 산딸기와 딸기, 자두를 바구니째 담아 나무 그늘에 앉아 먹으며
피크닉을 즐기더군요. 집에 가져가는 과일, 채소를 제외하고 현장에서 따먹는 것은 공짜입니다.

 

AP07DA91C0A0FEA001.JPG

 

 AP07DA91C0A0FDA003.JPG

 

사람들은 과일 외에도 감자, 시금치, 강낭콩, 호박, 당근, 오이, 토마토, 파 등 직접 밭에서 딴 싱싱한 채소를 바구니에 담아 나옵니다.
그리고 계산대에서 계산을 한 후 집으로 가져가는 거죠. OECD에서 13년째 근무하며 프랑스에서 13년째 살고 있는 한 교민은 "갈리 농장의
햇감자는 때깔부터 다르다"고 맛과 향을 극찬하더군요.

 

갈리 농장은 8명의 농부가 씨를 뿌리고 재배한다고 합니다. 이 곳에는 48종의 튤립, 15종의 토마토, 7종의 감자, 15종의 사과 등
다양한 품종의 채소와 과일, 꽃이 심어져 있기 때문에 방문객들은 각자의 취향에 맞는 농산물을 수확할 수 있습니다. 또한 품종별로
시기별로 농산물이 잘 익은 밭만 개방하기 때문에 방문객들은 4월부터 11월까지 계절에 맞는 농산물을 언제라도 딸 수가 있다고 합니다.

 

 AP07DA91C0A0F167002.JPG

 

 

어찌보면 인건비가 비싼 프랑스에 적합한 주말농장이라고 볼 수가 있겠씁니다. 단 8명의 농부가 밭을 관리하면, 관람객들이 알아서 수확하고
사가는 시스템이지요. 판매와 운송비용을 절감할 수 있어서 농장측으로서도 괜찮은 사업임에 틀림없습니다. 갈리농장에는 아이들에게 과일잼과 치즈
만드는 체험교육을 해주기도 하고, 각종 농산품 판매샵도 있고, 계절마다 다양한 축제도 열립니다.

 

 

AP07DA91C0A0F5D004.JPG

 

저의 부친도 도봉산에서 수년째 주말농장을 해오고 있습니다. 봄에 한두평의 땅을 분양받아 여름내내 상추, 깻잎, 무, 배추, 고추 등을 심어
직접 따 먹는 거죠. 그러나 시간이 없는 도시민들은 한여름에 물을 제때 주지 않아 밭이 황폐화된 곳이 많습니다. 그리고 등산객들이 주말농장
밭에서 몰래 채소를 캐가기 때문에 울타리를 치는 등 ‘폐쇄적’인 농장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프랑스의 ‘갈리농장’은 마치 축제의 현장처럼 즐거워 보였습니다. 사람들은 대자연의 풍요로운 선물 앞에서 함박 웃음을 지었습니다. 저희
아이들도 딸기와 산딸기를 맘껏 먹으면서, 나뭇잎 속에 감춰진 커다란 달팽이를 잡으면서 하루를 보냈습니다. 프랑스 TV의 아침방송
프로그램인 ’텔레마탕’에서도 이곳을 집중 소개하더군요. "갈리 농장에는 자유가 있다"는 말이 실제로 와 닿았습니다.

 

우리나라에서도 경기도 양평같은 곳에 이렇게 자유로운 농장이 있으면 어떨까요?
물론 무한대로 풍부한 농토와 공짜는 적당히(?) 따먹는 시민의식이 우선돼야 하겠지만요…ㅎㅎ

 

 

<갈리 농장 주소>

www.ferme.gally.com/_cueillette-libre-service-fruits-fleurs-legumes-gally
Ferme de Saint-Cyr-l’EcoleRoute de Bailly à Saint-Cyr-l’Ecole
(CD7)78210 Saint-Cyr-l’EcoleFerme de SartrouvilleRue de
Chatou78500 Sartrouville

카테고리 : Bonsoir! 샹젤리제!
태그 : , , | 댓글 남기기

모네 정원 지베르니의 '일류'(日流)

AP07DA91A1734138005.JPG

 

인상파 화가 클로드 모네의 정원 ‘지베르니’는 모네의 ‘수련’ 연작의 무대가 됐던 곳이다.

모네는 지베르니에서 아흔살 너머까지 살면서 두 명의 부인에게 낳은 아이들 8명과 함께 살았다.

모네는 스스로 ‘화가이자 정원사’라고 말할 만큼 평생 정원 가꾸기에 공을 들였다.

 

지금도 꽃과 나무가 만발한 모네의 ‘지베르니’ 정원을 보는 것은 모네의 그림 만큼이나 아름다웠다. 특히 오랑주리 미술관이나 오르세
미술관에서 보았던 모네의 ‘수련’ 그림과 똑같은 배경이 됐던 장면을 발견했을 때는 탄성이 절로 나왔다. 

 

AP07DA91A17342CE007.JPG

 

인상파 화가로서의 모네는 ‘물’의 화가라고 말할 수 있다.

그가 그린 ‘수련’ 연작은 자세히 관찰해보니 사실 연꽃을 그린 것이 아니라 물의
모습을 그린 것이다. 그는 연못에 비친 하늘과 구름, 나무 그림자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화폭에 담았다. 인상파 화가로써 그는 계절과 날씨, 시간에 따라 변화하는 물빛을 탐구하는 데 평생을 보냈다. 인상파라는 이름이 유래한 ‘해 뜨는
인상’이란 그림도 새벽 여명무렵 물빛의 오묘한 색채가 관람객들의 시선을 끈다.

 

그러나 지베르니에는 유감스럽게도 모네의 그림은 한 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베르니의 모네의 집에 걸려 있는 모네의 명작들은
모두 복사판이었다. 프랑스에서 ‘원화’ 감상에 익숙해진 나는 붓터치가 보이지 않는 복제 그림에는 아무런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AP07DA91A17352E009.JPG

 

대신 모네가 살았던 집의 침실, 거실, 식당에는 모네가 생전에 수집했던 수많은 일본의
풍속화, 판화인 우키요에 화가들의 그림들이 걸려 있었다. 물론 모네가
이렇게 침대 위에다 일본 그림을 그려놓았을리 없었겠지만, 모네는 생전에 일본 우키요에 화가들의 그림들을 엄청나게 수집했던 것은 사실이다. 모네
뿐 아니라 고흐, 세잔 등도 일본 그림을 수없이 수집했었다. 화려한 색채의 강렬한 대비, 과감한 붓터치가 특징인 일본화는 인상파 화가들에게 영감과
자극을 주었던 것 만큼은 틀림없다. 1888년 반 고흐는 "일본인들에게 있어서는 모든 것이 간결하고 명료하다는 점에서 그들을 부러워한다. 그들은
잘 선택한 몇 개의 선으로 숨 쉬듯 간단하게 인물화를 그려낸다"고 편지에 썼다.

 

AP07DA91A173533C011.JPG

 

이 때문일까. 지베르니 정원에는 유달리 일본 관광객들이 많았다. 연못가 주변에는 일본의 기업체가 후원한 단체에서 세운 기념식수와 기념비도
있었다. 모네의 침실에 걸린 기모노를 입은 여인, 유카타를 입은 남성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일본인 관광객들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마치
"우리는 ‘경제 동물’이 아니야. 문화적으로도 서양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구"라며 의기양양해하는 것 같았다.

 

AP07DA91A1735399013.JPG

 

19세기 말 일찌기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던 일본의 풍속화가 서양으로 대량으로 전해져 유럽에서 ‘자포니즘’을
불러일으켰다. 우키키요에 화가들의 그림은 사실 일본 주류의 화단에서는 인정받지
못하던 그림들이었다. 그런데 이것이 관습화된 서양미술의 아카데미즘 전통을 깨고 혁신적인 인상파 미술의 탄생에 시초가 됐다는 점은 ’나비효과’와
같은 우연이 만들어내는 역사의 한 장면이다. 사실 동남아를 넘어 세계를 휩쓸어가는
‘한류(韓流)’도 시초는 국내에서는 아이돌 가수그룹, TV드라마에서 시작됐다. 모두들
문화계 주류의 인정을 받지 못하던 통속적 대중문화였던 것이다.

 

오늘날 프랑스인들은 일본을 무척 좋아한다. 센 강이 바라다보이는 현대 미술관의
이름은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이고, 올림픽에서 김연아와 아사다
마오가 피겨 스케이팅 경기를 할 때 TV아나운서와 해설자는 목청껏 아사다 마오를
응원했던 나라다. 프랑스인들이 일본을 좋아하고, 배우려고까지 하는 것은 단순히 돈 잘버는 경제대국만이 아니라
오래된 문화적 배경이 있기
때문이리라.

 

AP07DA91A1736128015.JPG

<모네, ‘기모노를 입은 카미유’, 제작년도 1875~1876>

 

AP07DA91A17362CE017.JPG 

<반고흐 ‘기생’, 제작년도 1887년>

 

근대사 이후로 아시아가 서양문화를 수입하기만 했다는 것이 통념인데, 서양미술사가 일본의 그림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고무적이다. 만일 한국이 일찌기 서양과 교류에 나섰다면 또다른 예술사조가 탄생하는 창조적인 밑거름이 됐을지도 모른다.  

며칠 전 샹젤리제 거리에 있는 발자크 영화관의 대형 걸게 그림에 한국영화 ‘시’와 ‘하녀’ 두 편이 나란히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파리
최고 번화가의 극장인 데 마치 충무로 영화관을 보는 듯했다. 특히 이창동 감독의 영화 ‘시’는 르몽드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삶을 성찰하게
하는 수준 높은 영화’로 평가받으며 롱런하고 있다.  

 

경제적인 파워에 앞서는 문화적 파워. 진정으로 한 나라를 존경하고 좋아하게 하는 힘인 것 같다.  

 

AP07DA91A17375D019.JPG

 

 

<모네가 지베르니에서 그린 ‘수련’>

AP07DA91A173700021.JPG

 

AP07DA91A1737222022.JPG

모네의 정원에 있는 일본식 다리를 그린 그림.

카테고리 : Bonsoir! 샹젤리제! 댓글 남기기
페이지 2 의 6|1|2|3|4|5|...마지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