객석은 평등하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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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남부 지방을 여행하다가 바이에른 주의 바이로이트로 차를 몰았다.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오페라만 상연하는 전용극장인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내년에 100주년을 맞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Bayreuther
Festspiele)은 전세계 ‘바그네리안’들의 성지다. 그러나 한정된 좌석티켓을 전세계인들에게
팔기 때문에 매년 8월에 열리는 축제기간 동안 표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이다.
8년간 티켓 구매 신청을 줄기차게 보내야 티켓을 구입해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생전에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바그너의 오페라를 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
독일 여행 도중 축제극장이라도 구경하고 싶었다. 뮌헨에서 바이로이트로 가는 길에
뉘른베르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바그너가 작곡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 징어(명가수)’의
무대가 됐던 곳이라 밤늦은 시각에 도착해서도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객석은
평등하다!

 

   다음날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찾았다. ‘트리스탄 거리’를 지나니 한적한 시골 동네에 빨간색
벽돌로 지은 건물이 나온다. 바그너의 동상도 서 있다. 5유로를 내고 극장 투어를
시작했다. 바그너의 ‘축제극장’은 기존의 오페라 극장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꾼 혁신적인
극장이었다.

   바그너가
이 극장에서 ‘니벨룽의 반지 4부작’으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처음 연 것은 1876년
8월13일이었다. 축제극장은 무대 장치만 현대화 됐을 뿐, 객석은 바그너가 설계한
당시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독일식 실용주의 탓일까. 소박하기 그지 없는 로비,
카페트도 깔려 있지 않은 마룻바닥, 딱딱한 나무의자 객석도 그대로였다.
화려한 장식과 천장화, 로열석, 박스석, 샹들리에로 꾸며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의
오래된 궁정 오페라 극장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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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당시의 다른 오페라 극장은 어떠했을까? 오페라 관객들은 공연 도중에 자유롭게 먹고
마실 수가 있었다. 웃고 떠들 수도 있었다. 객석의 가스등은 서곡이 끝날 때만 단
한 번 꺼질 뿐, 공연 내내 켜져 있었다. 관객들은 모든 장면이 끝날 때마다 박수를
쳐댔다. 로열석, 박스석은 왕족, 귀족들의 사교장이었다.

  오페라가
아닌 ‘음악극’을 선언했던 리하르트 바그너에겐 참을 수 없는 객석 매너였다. 바그너는
‘축제극장’은 박스석과 로열석의 위계질서를 갖춘 궁정극장의 전통을 과감하게 깨부쉈다.
대신 넓은 아래층에 1974개의 좌석을 고대 원형극장처럼 일렬로 배치했다. 좌석은
아무런 장식 없이 절단된 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이로써 관객들은 어느 자리에 앉든지
아무런 방해 요수 없이 무대 전체를 볼 수 있는 전망을 보장받게 됐다. 나무로 된
천장은 천막을 연상케 했으며, 섬세한 디자인 덕택으로 최상의 음향효과를 자아낸다.

  무대와 아래층 좌석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오케스트라가 자리잡고 있다. 오케스트라는 바그너가 ‘현실세계’(객석)와 ‘이상세계’(무대)를 분리하는 ‘신비의 수렁(mystical chasm)’이라고 불렀던 깊은 오케스트라 피트에 숨겨져 있다. 바그너에게 모든 이러한 극장 건축 디자인은 음향효과를 개선시키고 관객들이 무대 위의 음악극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초대손님들의 권위를 높여주기 위한 장치는 모두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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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그너의
축제극장은 단순히 건물 구조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바그너는 서곡이 연주되는
동안 객석의 불을 완전히 꺼버렸다. 무대의 막이 올라가 있는 동안에는 객석에 입장하는
것을 금지했다. 한번 문이 닫히면 어떠한 귀한 초대 손님이라도 입장을 불허했다.
실제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좌석은 객석 사이가 좁고, 통로가 없어 도중에
화장실을 가거나, 중간 입장을 하려면 수십명이 다 일어나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때문에 극이 시작된 후에 좌석에서 이동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바그너는
막이 끝날 때마다, 가수의 노래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쳐대는 것을 금지시켰다. 또한
바그너는 축제극장을 개관하면서 혁신적인 무대장치를 선보였다. 상하, 좌우에서
무대 커튼이 동시에 열리고 닫히는 일명 ‘바그너 막’, 스팀 기계를 이용한 안개,
무대 배경의 회전식 이동장치 등이었다, 이러한 혁신은 당시에는 과격하고 눈에 띄는
것이었지만, 현재는 오페라 무대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신비의
수렁-오케스트라 피트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비의 수렁’으로 불리는 오케스트라 피트다.
일반 오페라 극장의 오케스트라 피트는 그리 깊지 않아 지휘자의 머리를 볼 수 있거나,
2층 좌석에서는 오케스트라 전체의 연주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그너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모습이 무대 위의 연기를 감상하는 데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엄청난
오케스트라의 음량과 무대 위 가수들의 목소리를 조화시키기 위해 오케스트라 피트를
그야말로 ‘깊은 계곡’ 속에 만들어놓았다.

오케스트라 피트는
계단식으로 돼 있었으며, 140㎡의 넓이로 124명이 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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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오케스트라 피트는 오케스트라의 사운드와 무대 위의 솔로이스트들과 합창단들의 목소리와 잘 섞인 뒤 객석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음향적 장치는 바이로이트 극장만의 독특한 사운드를 가능하게 해준다. 반향(잔향)음은 1.5초에 이른다. 이 때문에 솔로이스트들과 가수들은 오케스트라와는 별도로 지휘돼야만 한다. 객석에서 연주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한 여름의 높은 기온 때문에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연주할 수 있다.

  제일 상단부와 중간에 현악기와 목관악기가 위치한다. 양쪽에는 하프가 있고, 낮은 지역에는 금관악기와 팀파니 연주자가 앉는다. 연주 도중에 어떤 부분에서는 ‘귀 보호개’가 사용되기도 한다. 음향효과를 위해 악기의 배열이 일반적인 다른 극장과 다르다.

  축제극장의 지휘자 석에 앉았던 마에스트로 중에는 한스 리히터,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아르튀르 토스카니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한스 크나퍼츠부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볼프강 자발리쉬, 칼 뵘, 콜린 데이비스, 다니엘 바렌보임, 제임스 레바인, 쥬세페 시노폴리, 크리스티안 틸레만, 피에르 불레즈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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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시즌마다 전세계 유명 오케스트라에서 초청된 200명의 연주자들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한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은 시즌마다 새롭게 초청되지만, 많은 수의 연주자들이 수년간 여름 휴가를
이 곳에서 보낸다. ‘페스티벌 코러스’도 마찬가지다. 전세계에서 초청된 약 140명의 가수들이 시즌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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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역사

 

  1813년에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리하르트 바그너는 1850년에 처음으로
자신만의 ‘페스티벌’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1851년 시작한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무대에 올리고 싶어했다. ‘니벨룽의 반지’의 대본이 출판된 1862년. 바그너는 본격적인
페스티벌 계획을 짰다. 그러나 전용 축제극장을 짓는 비용은 엄청났다. 왕이나 개인
후원자에 기대야 했다. 그는 출간된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의 서문’에 이렇게 자문했다. “과연 왕자는 나타날 것인가?”

  왕자는 1864년에 나타났다. 바바리아의 왕 루드비히 2세가 리하르트 바그너를 뮌헨으로 초청했다. 바그너의
오페라에 심취했던 루드비히 2세는 바그너에게 이자르 강가의 초원지대에 축제 극장을 세우라고
말했다. 드레스덴 오페라하우스를 건축했던 고트 프리트 젬퍼가 그 극장을 디자인하도록 위임받았다. 그러나
바그너는 이 극장의 설계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1871년 처음으로 바이로이트를 방문했다. 그는 바이로이트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게 됐고 바이로이트도 바그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시 공의회에서는 바그너에게 축제극장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땅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1872년 곧바로
기초석이 놓여졌고, 1873년 상량식이 거행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건축작업은 자금난에 봉착해 중단됐다. 다시
한번 루드비히 2세 왕이 재정적 도움을 주었고, 대출을 받은 자금으로 첫 번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열렸다. 이 극장은 1876년 8월13일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와 함께 개관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축제 예산의 60% 이상을 자체 수익과 ‘바이로이트 악우협회’의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나머지 약 3분의1의 자금은 1953년 창설된 축제위원회로부터 지원받는다. 축제위원회는 △독일 연방 정부 △바바리아주 정부 △바이로이트시와 바이로이트 악우협회 등으로 구성돼 있다.

  

  축제 극장의 첫 번째 예술감독은 리하르트 바그너였다. 그의 사후에는 바그너의 부인이었던 코지마 바그너, 아들이었던 지그프리트 바그너, 위니프리트 바그너가 맡았고, 전후에는 손자인 빌란트와 볼프강 바그너가 맡았고, 1966년 빌란트 바그너가 죽은 후 볼프강 바그너가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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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동상.

카테고리 : 유럽 음악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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