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드는 오디오의 참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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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연장의 생생한 소리를 자기 방 안에 재현하는 것. 오디오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궁극의 로망’이다. 많은 사람이 끊임없이 스피커와 앰프, 턴테이블, 심지어 연결 케이블까지 바꿔가며 이상의 음향을 찾아간다. 그래서 이들은 ‘오디오를 듣는다’는 말 대신 ‘오디오를 한다’고 말한다. 수천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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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는 다문화의 고속도로

  전승훈 문화부 차장   알제리계 이민 세대인 축구선수 지네딘 지단의 고향은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의 도시 마르세유다. 그의 환상적인 드리블은 ‘마르세유 턴’이라고 불렸다. 프랑스 제2의 도시인 마르세유는 이탈리아, 동유럽, 북아프리카에서 온 이민자들이 많은 항구도시이다. 프랑스 최고의 인기드라마인 ‘인생은 아름다워(Plu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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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타운의 파리공연과 K-pop의 세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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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가을, 파리로 연수온지 몇 달 안됐을 때다. 휴일이라 집 창문을 열어놓고 청소를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음악소리가 들리는 것이었다. 익숙한 멜로디… 딸 아이가 ‘소녀시대’ 노래인 것 같다고 했다. 옆집 아파트 3층에서 창문을 통해 들리는 음악을 잘 들어보니 모두 한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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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 이민정과 함께 걸은 프랑스 파리 마레지구

화창한 봄날, 파리엔 한국의 배우들이 자주 찾아옵니다.

잡지 화보 촬영, 패션쇼 등이 줄을 잇기 때문이지요.

수많은 인종들 속에서 ‘익명성’이 보장되는 파리에서는

한국의 유명 배우들도 맘놓고 활보하며 걸어다니는 것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최근 정우성 이지아 씨도 명품매장이 즐비한 생토노레 거리에서 목격되기도 했지요.

 

얼마전 드라마 ‘꽃보다 남자’에서 구준표의 약혼녀로 나왔던 배우 이민정씨가

잡지 화보 촬영차 파리에 들렀습니다. 드라마 ‘마이더스’를 끝내고 새 영화 촬영을 앞두고

휴식기간에 파리를 선택한 것이지요.

 

 

 

배우 이민정 씨와 함께 파리의 숨은 보석들이 가득한 ‘마레 지구’를 걸었습니다.

마레지구는 센 강변의 늪지(marais)에 건설된 곳으로 17세기에는 화려하고 아름다운 저택으로 즐비했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대혁명 기간 중에 급격한 퇴락을 경험했지요.

 

1960년대 문화부 장관이었던 앙드레 말로는 마레 지구의 본격적인 재건에 나섰습니다.

현재 마레지구에는 ‘수비즈 저택’(Hôtel de Soubise), ‘카르나발레 저택’(Hôtel de Carnavalet), ‘살레 택’(Hôtel Salé) 등 쇠락한 대저택을 복원한 건물에 수많은 박물관이 들어서 있습니다.

 

마레지구 아르쉬브 거리에 있는 한 저택의 미술 전시장에서.

 

프랑수아-미롱 거리에 44번지에 있는 대저택 메종 두르샹(Maison d’Ourscamp)에는 중세시대 고딕 양식의 지하저장고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이 곳은 또한 파리의 역사적 건물을 보호, 보존하는 기관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곳을 지키고 계신 한 할머니는 마레지구를 걷고 있는 젊은이들을 안으로 끌어들여 이것저것 설명해주시느라 정성을 다하고 계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우리는 마레지구의 옛 저택을 보존하고 안내해주는 자원봉사단체”라고 소개하셨습니다.   

 

마레지구 생 제르베-생 프로테성당의 내부. 한 수녀님이 엄숙하게 기도를 하고 계신 모습이 마치 석고상처럼 보였다. 이 성당은 18세기 오르간 연주자이자 작곡가인 프랑수아 쿠프랭과 가족이 대를 이어 연주했던 파이프 오르간이 남아 있다.

 이외에도 마레지구는 세련된 카페와 레스토랑, 유행을 선도하는 패션상점, 수제품 장신구, 골동품 점이 골목마다 가득해 걸을 때마다 보물찾기를 하는 듯한 즐거움을 주는 곳이었습니다. 

 

마레지구의 카페에서.

 

이민정 씨는 서글서글한 외모만큼이나 시원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가끔 만나는 한국인 팬들에게도 밝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더군요. 훌륭한 모델과 그림같은 배경이 어우러지니 아마추어가 찍어도 그대로 ‘화보 사진’이 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13세기 유대인 커뮤니티의 중심지였던 개성넘치는 마레지구의 로졔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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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돕기, 꼭 돈으로 해야하나

"지진 피해를 입은 일본인들에게 연대감을 표현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꼭 돈을 모금해주는 방식일 필요는 없다고 본다." (베르나르 피노
가톨릭 기아대책위원회-CCFD 대표)

 

프랑스의 르몽드지가 19일 전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있는 일본 지진피해
돕기 성금운동을 꼬집고 나섰다.

‘세계 3위의 경제대국’을 돕기 위해 곳곳에서 성금이 답지하는 전례없는 현상에
대해 인도주의 구호사업을 벌이는 NGO 단체들이 고민에 빠졌다는 것이다. 보통의
경우 NGO들의 지원대상은 긴급구호를 할 수단도, 사회를 재건할 능력도 없는
가난한 나라에 닥친 재난 피해자를 돕기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는 일본 정부는
지난 1주일동안 경제침체를 막기 위해 중앙은행이 3300억 유로를 쏟아부을 정도로
능력이 있는 나라이며, 국제사회에 도움은 필요없다고 밝힌 상태다.

그런데 미디어를 통해 전해지는 일본의 참상은 세계인들의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처참한 폐허, 고철더미, 구조된 사람들의 비탄의 눈물, 눈보라와 추위가 몰아닥친
대피소…. 르몽드는 "지진피해 지역의 참상이 일본과 아이티를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시청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분석했다.

미국에서는 1주일만에 8700만 달러의 일본돕기 성금이 걷혔다고 한다. 이 액수는
아이티 지진 당시(1주일에 2억1000만 달러보다는 적은 것이지만, 역대로 미국인들이
자연재해를 입은 국가를 위해 걷은 성금 중 3번째로 많은 액수다. 1위는 2005년 카트리나
허리케인 피해이고, 2위는 아이티 대지진이다.

세계최대 NGO 중의 하나인 옥스팜은 3월15일부터 일본 북동부 지진피해지역의
아기들과 엄마들을 돕는 모금운동을 벌이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가톨릭 기아대책 위원회(CCFD)는 일본돕기 운동을 벌이지 않기로
했다. 베르나르 피노 대표는 "국제적인 연대는 가장 필요한 국가들에 우선적으로
지원돼야 한다"며 "최근 우리 단체의 우선지원 대상은 코트디부아르와
리비아의 주민들을 돕는 것"이라고 말했다.

기아대책행동(ACF)는 일본 긴급구조 운동을 벌이지 않고 있다. 프랑스와 다니엘
사무총장은 "일본의 지진 피해지역의 대피소의 모습은 물론 저개발국에서
볼 수있는 모습과 다르지 않다. 그러나 우리의 임무는 가장 불우하고, 취약한 나라를
우선적으로 돕는

일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웃나라 일본의 아픔은 한국인의 마음도 크게 움직이게 했습니다. 그러나 르몽드와
NGO들의 걱정은 경제대국 일본에 대한 전세계적인 관심의 쏠림현상이 정작 도움이
필요한 제3세계의 취약한 국가들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지 않을까하는 것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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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 사진이 똑같은 프랑스 잡지

"충격의 파도"(누벨 옵세르바퇴르) "거인의 추락"(르
푸앵)  "일본의 비탄"(페를랭)

이번 주 프랑스의 길거리 가판대를 장식하는 잡지들의 커버스토리는 단연 일본
대지진이었습니다.

 

그런데 재밌는 점은 누벨 옵세르바퇴르, 르 푸앵, 파리 마치, 페를랭 등 4개
잡지의 표지사진이 똑같다는 점입니다.

젊은 여성이 지진과 쓰나미로 휩쓸려간 폐허 위에서 담요를 걸친채 공포에 질린 표정을
짓고 있는데요,  

13일 일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에서 찍은 사진입니다.

 

 

프랑스의 4개의 주간지 모두가 똑같은 사진을 표지에 장식하는 것은 여간해선 보기드문
‘우연의 일치’입니다.  더군다나 이번 일본 대재난을 한 눈에 보여줄 수 있는
엄청난 사진들이 수없이 많았을텐데, 이 여성의 사진이 선택된 배경은 무엇일까요?

 

프랑스의 라디오방송인 France Info는 "왜냐하면 이번 일본 대지진과 관련해
이런 종류의 사진이 거의 없기 때문"이라는 해석을 내놓았습니다. 서구 언론들은
재난보도에서 구조된 사람들의 모습에 관심이 많은데, 일본 언론을 통해 흘러나오는
사진에는 피해자, 구조자들의 얼굴이 거의 안 보인다는 점입니다. ‘파리 마치’의
편집장인 올리비에 루야양 씨는 "이 사진은 이번 대재난의 충격을 상징하는
아이콘이 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일본에서 촬영된 사진 원본에서 여성은 원거리에서 폐허의 한 부분으로 보이도록
찍힌 것과 달리,

프랑스 잡지들은 이 사진을 표지사진으로 올리면서 주변의 사물을 거의 다 편집해버리고
인물에 집중합니다.

특히 르 푸앵지는 여성의 얼굴을 극도로 클로즈업하고 있습니다.

일본 언론들이 대재난의 고통에 처한 일본인들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다루고
있다면,

서구 언론들은 지진과 쓰나미, 방사능 누출 공포에 처한 사람들의 모습에 더 다가가기
위해 ‘거리’를 줄인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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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린 파리 몽소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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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파리에 많은 눈이 내렸습니다.

파리에는 눈이 와도 곧 녹기 때문에, 잘 쌓이지 않는 편인데…

오늘은 날도 춥고 함박눈이 내려 온통 흰세상이 됐습니다.

 

아이를 몽소공원에 있는 학교에서 집으로 데려오는 길에 몽소공원 풍경을
찍어보았습니다.

몽소공원은 18~19세기 프랑스 르네상스기의 유산인 대저택을 배경으로 세워진
공원입니다.

몽소공원은 쇼팽, 모파상, 구노 등 수많은 예술가들의 동상과 그리스 신전 스타일의
기둥으로 둘러싸인 연못 등으로

파리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원 중의 하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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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기 드 모파상의 동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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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내리는 개선문을 샹젤리제 거리에서 바라본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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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국제기구(1)-뮤에트성의 OE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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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와 유네스코(UNESCO) 등 수많은 국제기구가 본부를 두고 있는 글로벌 도시다. 비록 유럽연합(EU) 본부가 벨기에 브뤼셀에 있지만 파리는 유럽통합의 중심역할을 자부해왔다.

  최근 OECD에서 일하는 선배의 소개로 OECD 본부의 구석구석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OECD건물이 유서깊은 프랑스의 성에 자리잡고 있다는 점도 놀랐고, 2000여 명이 넘는 사무국에 정년을 보장받은 국제공무원 신분으로서의 한국인 직원은 1,2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에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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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왕의 애인들의 성(城)에서 세계 경제협력의 관제탑으로

  OECD 본부는 블로뉴숲 인근에 있는 ‘뮤에트성’(Château de la Muette)이다. 블로뉴숲 인근에 있는 뮤에트성은 역대 프랑스 왕들과 깊은 관계를 맺어오던 성이다. ‘뮤에트’라는 이름은 중세시절 프랑스 왕들이 숲에서 사슴사냥을 하던 곳에서 유래했다. 처음엔 왕의 사냥터 숙소였으나 이후 앙리 4세의 부인이자 ‘여왕 마고’로 유명한 마르게리트 드발루아를 위한 작은 성으로 변모했다. 루이 15세는 자신이 총애했던 정부 퐁파두르 후작부인와 뒤바리 백작부인 등 자신의 애인을 즐겁게 하기 위한 성으로도 사용됐다.

  루이 16세는 뮤에트성에서 자신의 젊은 왕비인 마리 앙뜨와네트와 함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기를 보냈다. 그 당시는 왕비 뿐 아니라 국민들과와도 허니문 기간이었다. 루이 16세는 왕실세를 폐지했으며, 블로뉴숲을 대중들에게 개방했다. 그는 성에 귀족이나 평민이나 똑같이 받아들였다. 전기 작가는 “왕 만세”라는 외침이 오전 6시부터 해질녘까지 좀처럼 끊어지지 않았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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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성은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전쟁 지휘소로 사용되다가 프랑스 해방 이후에는 미군이 인수인계했다. 종전 후 미국이 유럽재건을 위한 마셜플랜을 추진하면서 1949년 이 성은 OEEC(유럽경제협의회)의 본부로 사용됐다. OEEC는 미국의 막대한 대유럽 원조금을 배분하기 위한 역할을 담당하던 기구다. OEEC가 1961년 서방 자본주의 산업화 국가들의 경제정책과 사회정책을 조율하는 기구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로 개편되면서 OECD 본부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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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 뮤에트성 옆에는 현대적인 부속건물이 지어져 대형 회의실과 수많은 크고작은 국제회의실로 사용되고 있다. 그 중 뮤에트성 본관에 있는 유서깊은 ‘로저 오크렌트룸’은 원래 대형연회실이었는데 현재는 OECD 상임대표부 회의가 열리는 방으로 사용되고 있다. 이 방에서는 각국의 장관급 인사들이 참석하는 고위급 회담이 열린다. 이 방은 오크장식과 화려한 타피스트리로 장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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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제무대에서
다자주의에 약한 한국

 

  OECD는 30개의 회원국들의 대표부와 사무국으로 구성돼 있다. 사무국에는 이사회(회원국의 대사와 OECD사무총장이 참석하는 최고의결기관)와 200여개의 위원회, 경제국 통계국 무역국 등 10여개의 실무팀으로 구성돼 있다. 뮤에트성에 있는 사무국에는 2000명이 넘는 직원들이 근무하고 있다.  

  한국의 국내총생산(GDP)규모는 30개 OECD 회원국 중 9위에 이르고 있으며, 분담금 규모도 9번째이지만, OECD 주관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영향력은 미미하다. 특히 OECD 사무국의 정규직에 진출한 한국인은 손가락으로 꼽을 만하다. 그 중 정년을 보장받은 국제공무원 신분은 1,2명에 불과하다. 

  이것은
한국의 OECD 대표부를 비롯한 국제기구에 파견된 인력들이 주로 재경부, 총리실 등
중앙부처 공무원들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대부분 3년 정도 파견임기만 때우고 한국으로
돌아간다. 한국에 돌아가면 개인적으로 ‘국제경력’을 쌓았다고 승승장구할 수 있지만,
실제로 국제기구에서 한국의 국익을 찾는 데는 도움은 되지 않는다. 반면
다른 나라의 OECD사무국 직원들은 국제기구 전문요원으로 선발돼 평생직장으로 일한다.
3년 후면 돌아갈 사람과 수십년간 일해온 다른 나라 사람들이 사무국에서 맞붙는다면
번번히 깨질 수 밖에 없다. 이것이 한국이 OECD에서 별다른 목소리를 낼 수
없는 구조적인 이유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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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ECD는 WTO나 IMF처럼 ‘구속력’이 아니라 ‘권고’를 할 뿐이다. 하지만 회원들의 의견이 ‘만장일치’로 결정되기 때문에 한 나라가 반대한다면 그 정책은 실현되지 못한다. 다수결로 이뤄지는 국제기구와 달리 이러한 까다로운 규정하에 회의가 이뤄지기 때문에 소수의 회원들로 이뤄진 OECD이지만, 그만큼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OECD에 근무하는 관계자는 “각 국의 대사나 장관이 참석하는 국제회의에서는 만장일치로 의견을 조율해내는 의장의 회의진행을 보면 예술적이란 말이 나올 정도”라고 말한다. 수십개의 나라의 대표가 모여 만장일치로 의견을 조율한다는 것은 웬만한 ‘multilateral’(다자적)한 감각이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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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나라는 이러한 국제관계에서의 ‘다자주의’에 아직 익숙해 있지 않은 상태다. 한-칠레 FTA부터 한-미, 한-EU FTA까지 “한국은 FTA의 역사를 새롭게 쓰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한편, UN이나 WTO, OECD, 6자회담 등 다자주의 협상에서는 주도권을 쥐거나 손해를 보지 않는 협상술이 부족한 느낌이다. 이것은 오랜 중국과의 관계, 분단상황이라는 한반도 특수상황 등 한국의 역사적 경험이 다자주의 보다는 1:1 관계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21세기는 멀티의 시대인 만큼, 국제무대에서 한 가지 사건이 1;1의 결말을 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중국의 부상이 한국에 손해만 입힐 수는 없으며, 동시에 기회이기도 하다. 중동,
남미에서 벌어진 작은 사건이 세계적으로 커다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시대다. OECD와 같은 국제무대의 다자주의 대화채널에 한국인의 도전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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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석은 평등하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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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일
남부 지방을 여행하다가 바이에른 주의 바이로이트로 차를 몰았다.  독일의
작곡가 리하르트 바그너(1813~1883)의 오페라만 상연하는 전용극장인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찾기 위해서였다. 내년에 100주년을 맞는 바이로이트 페스티벌(Bayreuther
Festspiele)은 전세계 ‘바그네리안’들의 성지다. 그러나 한정된 좌석티켓을 전세계인들에게
팔기 때문에 매년 8월에 열리는 축제기간 동안 표를 구하기란 하늘의 별따기이다.
8년간 티켓 구매 신청을 줄기차게 보내야 티켓을 구입해 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

  생전에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바그너의 오페라를 본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것.
독일 여행 도중 축제극장이라도 구경하고 싶었다. 뮌헨에서 바이로이트로 가는 길에
뉘른베르크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바그너가 작곡한 ‘뉘른베르크의 마이스터 징어(명가수)’의
무대가 됐던 곳이라 밤늦은 시각에 도착해서도 시내 곳곳을 돌아다녔다.

  

  객석은
평등하다!

 

   다음날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을 찾았다. ‘트리스탄 거리’를 지나니 한적한 시골 동네에 빨간색
벽돌로 지은 건물이 나온다. 바그너의 동상도 서 있다. 5유로를 내고 극장 투어를
시작했다. 바그너의 ‘축제극장’은 기존의 오페라 극장의 개념을 송두리째 바꾼 혁신적인
극장이었다.

   바그너가
이 극장에서 ‘니벨룽의 반지 4부작’으로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을 처음 연 것은 1876년
8월13일이었다. 축제극장은 무대 장치만 현대화 됐을 뿐, 객석은 바그너가 설계한
당시와 거의 변하지 않았다. 독일식 실용주의 탓일까. 소박하기 그지 없는 로비,
카페트도 깔려 있지 않은 마룻바닥, 딱딱한 나무의자 객석도 그대로였다.
화려한 장식과 천장화, 로열석, 박스석, 샹들리에로 꾸며진 프랑스 오스트리아 등의
오래된 궁정 오페라 극장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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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렇다면
당시의 다른 오페라 극장은 어떠했을까? 오페라 관객들은 공연 도중에 자유롭게 먹고
마실 수가 있었다. 웃고 떠들 수도 있었다. 객석의 가스등은 서곡이 끝날 때만 단
한 번 꺼질 뿐, 공연 내내 켜져 있었다. 관객들은 모든 장면이 끝날 때마다 박수를
쳐댔다. 로열석, 박스석은 왕족, 귀족들의 사교장이었다.

  오페라가
아닌 ‘음악극’을 선언했던 리하르트 바그너에겐 참을 수 없는 객석 매너였다. 바그너는
‘축제극장’은 박스석과 로열석의 위계질서를 갖춘 궁정극장의 전통을 과감하게 깨부쉈다.
대신 넓은 아래층에 1974개의 좌석을 고대 원형극장처럼 일렬로 배치했다. 좌석은
아무런 장식 없이 절단된 벽으로 둘러 싸여 있다. 이로써 관객들은 어느 자리에 앉든지
아무런 방해 요수 없이 무대 전체를 볼 수 있는 전망을 보장받게 됐다. 나무로 된
천장은 천막을 연상케 했으며, 섬세한 디자인 덕택으로 최상의 음향효과를 자아낸다.

  무대와 아래층 좌석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오케스트라가 자리잡고 있다. 오케스트라는 바그너가 ‘현실세계’(객석)와 ‘이상세계’(무대)를 분리하는 ‘신비의 수렁(mystical chasm)’이라고 불렀던 깊은 오케스트라 피트에 숨겨져 있다. 바그너에게 모든 이러한 극장 건축 디자인은 음향효과를 개선시키고 관객들이 무대 위의 음악극에 집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리고 초대손님들의 권위를 높여주기 위한 장치는 모두 없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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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그너의
축제극장은 단순히 건물 구조만 바꾼 것이 아니었다. 바그너는 서곡이 연주되는
동안 객석의 불을 완전히 꺼버렸다. 무대의 막이 올라가 있는 동안에는 객석에 입장하는
것을 금지했다. 한번 문이 닫히면 어떠한 귀한 초대 손님이라도 입장을 불허했다.
실제로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좌석은 객석 사이가 좁고, 통로가 없어 도중에
화장실을 가거나, 중간 입장을 하려면 수십명이 다 일어나야 하는 불편함이 있다.
때문에 극이 시작된 후에 좌석에서 이동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바그너는
막이 끝날 때마다, 가수의 노래가 끝날 때마다 박수를 쳐대는 것을 금지시켰다. 또한
바그너는 축제극장을 개관하면서 혁신적인 무대장치를 선보였다. 상하, 좌우에서
무대 커튼이 동시에 열리고 닫히는 일명 ‘바그너 막’, 스팀 기계를 이용한 안개,
무대 배경의 회전식 이동장치 등이었다, 이러한 혁신은 당시에는 과격하고 눈에 띄는
것이었지만, 현재는 오페라 무대의 표준으로 자리잡았다.

신비의
수렁-오케스트라 피트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신비의 수렁’으로 불리는 오케스트라 피트다.
일반 오페라 극장의 오케스트라 피트는 그리 깊지 않아 지휘자의 머리를 볼 수 있거나,
2층 좌석에서는 오케스트라 전체의 연주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러나 바그너는 오케스트라의
연주모습이 무대 위의 연기를 감상하는 데 방해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엄청난
오케스트라의 음량과 무대 위 가수들의 목소리를 조화시키기 위해 오케스트라 피트를
그야말로 ‘깊은 계곡’ 속에 만들어놓았다.

오케스트라 피트는
계단식으로 돼 있었으며, 140㎡의 넓이로 124명이 앉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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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은
오케스트라 피트는 오케스트라의 사운드와 무대 위의 솔로이스트들과 합창단들의 목소리와 잘 섞인 뒤 객석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한다. 이러한 음향적 장치는 바이로이트 극장만의 독특한 사운드를 가능하게 해준다. 반향(잔향)음은 1.5초에 이른다. 이 때문에 솔로이스트들과 가수들은 오케스트라와는 별도로 지휘돼야만 한다. 객석에서 연주자들은 보이지 않는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한 여름의 높은 기온 때문에 티셔츠와 반바지를 입고 연주할 수 있다.

  제일 상단부와 중간에 현악기와 목관악기가 위치한다. 양쪽에는 하프가 있고, 낮은 지역에는 금관악기와 팀파니 연주자가 앉는다. 연주 도중에 어떤 부분에서는 ‘귀 보호개’가 사용되기도 한다. 음향효과를 위해 악기의 배열이 일반적인 다른 극장과 다르다.

  축제극장의 지휘자 석에 앉았던 마에스트로 중에는 한스 리히터, 빌헬름 푸르트뱅글러, 아르튀르 토스카니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한스 크나퍼츠부쉬,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 볼프강 자발리쉬, 칼 뵘, 콜린 데이비스, 다니엘 바렌보임, 제임스 레바인, 쥬세페 시노폴리, 크리스티안 틸레만, 피에르 불레즈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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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각 시즌마다 전세계 유명 오케스트라에서 초청된 200명의 연주자들이 바이로이트 페스티벌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한다. 오케스트라 연주자들은 시즌마다 새롭게 초청되지만, 많은 수의 연주자들이 수년간 여름 휴가를
이 곳에서 보낸다. ‘페스티벌 코러스’도 마찬가지다. 전세계에서 초청된 약 140명의 가수들이 시즌에 참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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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의 역사

 

  1813년에 라이프치히에서 태어난 리하르트 바그너는 1850년에 처음으로
자신만의 ‘페스티벌’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그는 1851년 시작한 ‘니벨룽의 반지’ 4부작을
무대에 올리고 싶어했다. ‘니벨룽의 반지’의 대본이 출판된 1862년. 바그너는 본격적인
페스티벌 계획을 짰다. 그러나 전용 축제극장을 짓는 비용은 엄청났다. 왕이나 개인
후원자에 기대야 했다. 그는 출간된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의 서문’에 이렇게 자문했다. “과연 왕자는 나타날 것인가?”

  왕자는 1864년에 나타났다. 바바리아의 왕 루드비히 2세가 리하르트 바그너를 뮌헨으로 초청했다. 바그너의
오페라에 심취했던 루드비히 2세는 바그너에게 이자르 강가의 초원지대에 축제 극장을 세우라고
말했다. 드레스덴 오페라하우스를 건축했던 고트 프리트 젬퍼가 그 극장을 디자인하도록 위임받았다. 그러나
바그너는 이 극장의 설계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리하르트 바그너는 1871년 처음으로 바이로이트를 방문했다. 그는 바이로이트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게 됐고 바이로이트도 바그너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시 공의회에서는 바그너에게 축제극장을 건설하는데 필요한 땅을 무상으로 사용할 수 있게 해주었다. 1872년 곧바로
기초석이 놓여졌고, 1873년 상량식이 거행됐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건축작업은 자금난에 봉착해 중단됐다. 다시
한번 루드비히 2세 왕이 재정적 도움을 주었고, 대출을 받은 자금으로 첫 번째 바이로이트 페스티벌이 열렸다. 이 극장은 1876년 8월13일 오페라 ‘니벨룽의 반지’와 함께 개관했다.

  바이로이트
축제극장은 축제 예산의 60% 이상을 자체 수익과 ‘바이로이트 악우협회’의 기부금으로 충당한다. 나머지 약 3분의1의 자금은 1953년 창설된 축제위원회로부터 지원받는다. 축제위원회는 △독일 연방 정부 △바바리아주 정부 △바이로이트시와 바이로이트 악우협회 등으로 구성돼 있다.

  

  축제 극장의 첫 번째 예술감독은 리하르트 바그너였다. 그의 사후에는 바그너의 부인이었던 코지마 바그너, 아들이었던 지그프리트 바그너, 위니프리트 바그너가 맡았고, 전후에는 손자인 빌란트와 볼프강 바그너가 맡았고, 1966년 빌란트 바그너가 죽은 후 볼프강 바그너가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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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
동상.

카테고리 : 유럽 음악여행 댓글 남기기

파리에 남아 있는 쇼팽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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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30일은 ‘피아노의 시인’으로 불리는 작곡가 쇼팽의 장례식이
열린 날이다. 1849년 쇼팽의 장례식이 열렸던 파리의 마들렌 성당에서는 10월30일
쇼팽의 장례미사 당시 연주됐던 모차르트 ’레퀴엠’을 재현하는 음악회가
열릴 예정이라는 포스터가 붙어 있다. 당시 장례식과 관련해서는 이러한 에피소드가
전해진다.

 

   "마들렌 성당에서 열리게 된 장례식에는 쇼팽의 유언에
따라 모차르트의 ‘레퀴엠’을 연주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파리 대주교는 여성
성악가(모차르트 ‘레퀴엠’에서 여성 성악가의 역할은 중요하다)는 성당 관례상
노래를 부를 수 없다고 하여, 장례식은 2주나 연기된다. 이에 쇼팽의 친구이자 팬이었던
드게리 보좌 신부가 대주교를 설득하고, 결국 대주교가 양보해 1849년 10월30일 아침
11시에 장례식이 치러졌다. 검은 색 옷을 입은 군중 300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장례식에는
쇼팽 자신이 지은 ‘장송행진곡’과 ‘전주곡 4번’이 울리고, 모차르트의 ‘레퀴엠’이
연주됐다. 이날 ‘레퀴엠’에는 쇼팽의 오랜 친구이자 폭넓은 음역을 가진 여성 성악가인
폴린느 비아르도가 노래해 쇼팽의 영혼의 안식을 빌었다." (파리시청 홈페이지,
‘쇼팽과 낭만적인 파리 발라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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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에 있는 성당 중에 유일하게 그리스 신전(파르테논)의 모양을
하고 있는 마들렌 성당. 마들렌 성당은 예수가 돌아가실 때 십자가 밑에서 성모님과
함께 있던 여성이고, 부활도 성모 마리아와 함께 처음 목격한 인물이다. 이 때문에
마들렌 성당 앞에는 늘 꽃으로 장식돼 있다.>

 

  올해  탄생 200주년을 맞은 쇼팽을 추모하는 행사는 올해
고국인 폴란드 뿐 아니라 전 세계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 프랑스도 올해를 ‘쇼팽의
해’로 선포하고 각종 기념 음악회와 행사를 벌이고 있다.

  쇼팽은 바르샤바에서 서쪽으로 50km 떨어진 작은 도시 젤라조바 볼라에서
1남3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인 니콜라 쇼팽은 프랑스인이었고, 어머니는
폴란드 사람이었다. ‘쇼팽과 낭만적인 파리 발라드’를 소개하는 파리시청 인터넷
사이트는 “쇼팽의 국적이 ‘속지주의’에 따르면 폴란드이지만, ‘속인주의’에
따르면 프랑스인”이라고 말한다.

 

  7세 때 쇼팽은 이미 두 개의 폴로네이즈를 작곡하고, 그의 천재성이
바르샤바에 알려지면서 귀족들의 관심을 끌었다. 11세에는 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 앞에서 연주를 하는 등 일찍이 천재성을 나타내며 모차르트에 비견된다. 그가
20세 되던 해 폴란드는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프러시아에 의해 분할됐다. 쇼팽은
1830년 11월2일 주변 사람들의 권유로 음악여행을 목적으로 고국을 떠난다. 1831년
8월 쇼팽은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 폴란드 독립을 위해 1년간 싸워왔던 ‘11월 봉기’가
실패하고, 바르샤바는 러시아에 의해 점령됐다는 비보를 듣는다. 이 때의 처절한
울부짖음과 피아노를 부술 듯 쓰여진 격렬한 분노와 절망을 담은 곳이 바로 ‘혁명
에튀드’(Etudes Op.10, No 12)이다.

  1931년 가을, 스무살의 쇼팽은 파리에 도착한다. 이 당시 파리는
세상의 모든 음악가, 화가, 작가 등 예술가들을 위한 장소였다. 파리에서 쇼팽은
세기의 예술가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교류하며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 때부터
39세로 죽을 때까지 쇼팽은 18년간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파리를 무대로 활동했다.
그에게 ‘작곡가 쇼팽’으로서의 제2의 고향은 파리였던 셈이다. 파리 곳곳에는 쇼팽의
체취가 남아 있다. 파리시의 명물인 공공임대 자전거 ‘벨리브’를 타고 쇼팽의 흔적을
뒤쫓아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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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소공원

  1836년 10월 쇼팽은 리스트의 애인이었던 다구 부인의 살롱에서 처음
조르주 상드를 소개받았다. 당시 쇼팽은 26세, 상드는 32세였다. 상드는 스페인의
마요르카, 프랑스 노앙 등지를 돌며 폐병에 걸린 쇼팽을 어머니처럼 헌신적으로 돌보며
쇼팽의 음악을 살려놓았다. 노앙에서 요양 당시 여름날 저녁 식사가 끝나면 쇼팽은
작곡을 하다가 상드를 위해 즉흥 연주를 했다고 한다. 쇼팽은 건강 때문에 일찍 잤고
상드는 그 때부터 새벽 5시까지 글을 썼다. 상드는 ‘내 생애의 역사’에서 쇼팽의
창작과정에 대해 자세히 기록했다.

  “그의 음악은 찾는 것이 아니라 절로 솟아나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그것을 써낼 때는 너무 고심을 했다. 그는 종일 방 안에 갇혀 울기도 하고 걷기도
하고 펜대를 꺾기도 했다. 한 소절을 몇 번이나 고쳐 썼고, 한 페이지를 쓰는 데
6주간이 걸린 적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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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의 몽소공원에는 피아노를 치는 쇼팽과 그 앞에 누워 있는 조르주
상드의 동상이 서 있다. 쇼팽이 상드와 함께 지냈던 9년간 쇼팽은 폴로네즈, 발라드,
녹턴, 마주르카 등 자신의 대표작을 작곡했다. 쇼팽의 음악은 상드와 굳게 묶여 있었고,
상드와 헤어진 후 쇼팽은 죽음으로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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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리 ‘살 플레엘’(Salle Pleyel)

  쇼팽이 파리에 도착할 당시, 파리는 ‘음악의 수도’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또한 ‘피아노 제작자들의 수도’이기도 했다. 당시 적어도 300여 개의 피아노
제작사들이 파리에 정착했으며, 이 가운데 플레이엘(Pleyel), 에라르(Erard), 파프(Pape)
등 최고의 피아노 제작사들이 서로 테크닉을 발전시키며 경쟁을 하고 있었다. 쇼팽은
까미유 플레이엘(Camille pleyel)을 만나게 되고, 1832년 2월25일 ‘플레이엘 살롱’(Salons
Pleyel)에서 연주를 한 계기로 이후 플레이엘 피아노를 꾸준히 사용하게 된다.

  “내가 상태가 좋지 않을 때는(….), 이미 기성 음이 쉽게 발견되는
에라르 피아노를 사용한다. 그러나 영감으로 가득차고, 내 자신의 음을 찾아 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히 강건한 상태라면, 나에게 플레이엘 피아노가 필요하다”라고
쇼팽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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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팽이 사용했다는 플레옐 피아노>

 

  아이러니하게도 쇼팽은 많은 대중 앞에서 연주하는 것을 싫어했다.
그는 발자크, 들라크루와, 하이네 등 친구들과 귀부인들 앞에서 즉흥 연주를 즐겼다.
기막힌 피아노 연주 솜씨를 가졌지만 병약했던 쇼팽의 이러한 ‘신비주의 전략’은
귀부인들을 광적인 팬으로 만들었다. 연인이었던 조르주 상드는 그의 서신에서 쇼팽의
이런 성격을 유머스럽게 표현하고 있다.

  “쇼팽은 자신의 연주회에 대해 광고하는 것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도 싫어하고, 하물며 관중이 있는 것 조차 원하지 않아요. 그래서 저는 피아노도
아예 소리나지 않는 무음 피아노를 사용하자고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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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팽의 마지막 집 ‘방돔광장 12번지’

   1847년 쇼팽과 상드의 9년간의 세기적인 사랑이 피날레를 맞고,
쇼팽의 건강은 더욱 악화된다. 1849년 그는 방돔 광장 12번지에 있는 햇빛이 충분히
들어오는 남향의 안락한 아파트로 이사한다. 그의 마지막 거처가 된 이 집에서 그는
미완성 작품들을 하나하나 완성시킨 후 마주르카와 녹턴에만 전념한다. 그의 마지막
곡은 폴란드를 그리워하며 작곡한 마주르카 바단조(Mazurka Op.68, No.4)이다. 죽음이
다가오는 병상에서 음악을 듣고 싶어하는 쇼팽에게 한 연주자가 쇼팽이 작곡한 음악을
연주해주겠다고 하자, 그는 “내 것 말고 더 순수한 음악, 내가 존경하는 모차르트의
곡을 쳐주시오”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1849년 10월17일 새벽 2시경, 쇼팽은 “마토카! 모이아 비엔나 마토카!”(어머니
불쌍한 나의 어머니!)라고 말하며, 어머니의 나라 폴란드의 애달픈 운명과 그리움을
마지막으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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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파리의 오페라 극장에서 가까운 방돔 광장은 나폴레옹의
아우스테를리츠 전승을 기념하는 높이 44m의 청동색 기둥이 서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루이 14세 때 건축가 쥘 아르두앵 망사르(1646~1708)가 설계한 방돔 광장은 향기로운
향수점으로 가득차 있다. 광장을 둘러싼 17세기 건물들은 현재 불가리, 에르메스,
크리스티앙 디오르 등 고급 부티크와 명품 보석 매장들이 차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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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쇼팽이 살던 당시에도 방돔 광장은 고급 주거지였다. 햇빛 잘 드는
곳을 찾아 이곳으로 이사온 쇼팽은 5개월의 투병 끝에 숨을 거둔다. 서른 아홉의
젊은 나이였다. 쇼팽이 운명한 방돔 광장 12번지는 지금 명품 시계 브랜드인 ‘쇼메’의
사무실이 되어 있었다. 1층에는 쇼메의 숍이 있고, 2층은 사무실인데 공개를 하지
않고 있다. 1층과 2층의 사이의 벽에 ‘1810년 2월22일 폴란드에서 태어난 프레데리크
프랑수와 쇼팽이 1849년 10월17일 이 집에서 사망했다’는 명판이 붙어 있다. 건물을
지키는 수위에게 부탁을 하니 집 안의 정원과 계단 일부를 찍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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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폴란드 도서관의 ‘살롱 드 쇼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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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쇼팽의 마지막 거처인 ‘방돔광장 12번지’의 집은 다른 곳에 복원돼
있었다. 세느 강변에 있는 ‘폴란드 도서관(Bibliotheque Polonaise)’의 ‘살롱
드 쇼팽’이다. 이 곳에는 쇼팽이 마지막으로 살던 집 내부에 놓여 있던 피아노와
의자, 집기, 사진, 영세 증명서, 편지 등이 전시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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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쇼팽의 데드 마스크와 손을 석고로 본 뜬 모형, 쇼팽의 금발 머리카락도
유리창 안에 놓여 있어 눈길을 끈다. 쇼팽의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은 금방이라도
건반 위를 거닐 며 아름다운 음악을 들려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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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페르 라셰즈 공동묘지

  마들렌느 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마친 후 쇼팽의 운구는 페르 라 쉐즈로
옮겨져 안장됐다. 이 무덤에 매장될 때 쇼팽이 바르샤바를 떠나던 날 친구들이 기념으로
준 폴란드의 한 줌의 흙이 그의 시신 위에 뿌려졌다. 그래서 쇼팽의 유체는 파리의
페르 라쉐즈에 묻혀 있지만, “그는 폴란드 땅 아래 묻혀 있다”고 한다. 유해는
여기에 묻혔으나 쇼팽의 심장은 그의 유언대로 고국에 보내져 바르샤바의 성 십자가
교회에 있는 황금 단지 속에 안치됐다.  AP07DAA1406253D8026.JPG

 

  쇼팽의 무덤에는 쇼팽의 얼굴이 새겨진 메달과 하얀 대리석 뮤즈
조각상으로 꾸며져 있어 화사한 느낌을 준다. 대리석 뮤즈상은 조르주 상드의 딸
솔랑즈의 남편이던 클레상제의 작품이다. 쇼팽의 무덤 앞에는 찬미자들이 갖다 놓는
꽃이 한 시도 떨어지지 않는다. 이 무덤은 사랑하는 연인들끼리의 우편함으로도 이용되어
서로의 연락 메모를 묘비 뒤에 숨겨놓기도 한다. 탄생 200주년을 맞은 올해 쇼팽의
무덤은 폴란드 국기를 상징하는 흰색, 빨간색 장미가 수북히 놓여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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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팔레 루아얄 아케이드

  팔레 루아얄 아케이드에는 최고의 의복을 재단하고 장신구를 파는
고급 상점들이 있었다. 이 곳에서 쇼팽은 하얀 장갑, 모자 등 필요한 물품들을 구입했는데,
이 상점들은 쇼팽의 신체 사이즈를 지니고 있었다. 쇼팽은 비서인 줄리앙 퐁타나에게
자신이 필요한 품목을 이야기만 하면, 주문한 것들이 만들어져 쇼팽의 집으로 배달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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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튈르리 공원

  튈르리 공원은 쇼팽이 즐겨 산책하던 장소 중의 하나였다. 1838년
쇼팽은 루이 필립 1세에게 첫 초청을 받아 연주했으며, 감사의 표시로 왕과 황후의
얼굴이 새겨진 찾잔으로 차를 대접 받았다. 1841년 그가 두 번째로 초청을 받아 연주를
한 후에는 금 100프랑을 사례로 받았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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