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
비화
파로호의
미 해군 어뢰 공격
군사무기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독자 분을 위해서 먼저 어뢰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고 시작하자.
어뢰는
문자 그대로 물속에서 달리는 폭탄이다.
현대의
유도탄이 공기 속을 날지만 어뢰는 물속에서 적함으로 돌진한다.
생긴
것도 물고기처럼 길고 날렵하게 생겼다.
뒤에
배에 있는 스크류가 붙어있고 추진 제공체로서 전기나 압축공기나 산소 또는 화학
연소제등이 이용된다.
적의
함선에 명중하면 그 곳은 장갑이 얇고 수면 아래이기 때문에
큰
피해를 줄 수 있다.

어뢰
항공기에서도
적함을 향하여 수면에 투하하기도 한다.
제
2차 세계 대전때 어뢰는 각 해전에서 대활약을 했었다.
태평양
전쟁의 막을 연 것은 1941년 12월 8일 일본 기동함대에서
발진하여
하와이에 내습한 153기의 최선봉으로 진주만의
진입한
일본 해군의 97식 함상 공격기가 발사한 어뢰였다.
(조종사
모리 지조는 단 18세였지만 800시간이상의 비행시간을 가진
베테랑
조종사였다.)
그리고
어뢰가 무수히 발사된 산호해 해전, 미드웨이 해전,
레이테
해전을 거쳐 1945년 4월 오키나와 근해에서 일본 해군이 자살 공격으로 내보낸 세계 최대 전함 야마토의 격침에 어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어뢰로 연 태평양 전쟁의 막을 내렸다.
반대편
대서양에서 어뢰로 끊임없이 연합군 상선단을 괴롭힌 U-boat의 활약은
너무 잘 알려진 것이다.
이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어뢰를 다시 쓸 해전의 기회는 없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의 육해공군은 한반도의 전쟁에 개입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에 미 해군은 어뢰를 사용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적국인
북한이나 중국의 해군력이 너무 빈약해서 어뢰를 발사해서
격침
시킬 전투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951년 한반도 전쟁에서 어뢰를 사용할 기회가 찾아왔다.
무대는
바다가 아니라 한반도 육지 깊숙이 있는 파로호에서였다.
목표
역시 적의 함선이 아닌 파로호에 물을 가두어 놓은 수문이었다.
미
해군 조종사의 뛰어난 실력과 동원된 스카이레이더의 우수한 성능 때문이었다.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야기의 흥미를 더하기
위해서
파로호에서 어뢰를 발사한 미 해군의 공격기
스카이레이더(skyraider)에
대해서 잠깐 설명하고 넘어가자

스카이레이더이
공격기는 미 해군이 태평양 전쟁의 여러 해전에서 사용하던
급강하
폭격기 SBD와 뇌격기 TBF를 후속기로 개발해서 1945년
실전
배치한 것이다.
그
때까지의 두 명 이상이 타던 함상 뇌격기나 함상 폭격기 같지 않게
단
한사람이 조종하는 혁신적인 디자인이었다.
단발기로서
대형이었으며 엔진 마력만 3,000마력이었다.
유명
전투기인 P-51 무스탕기가 1,600마력 일본의 제로 전투기가
1,200마력인
것과 비교하면 비행기의 크기가 짐작된다.
따라서
폭탄 적재량도 엄청나게 컸다.
스카이레이더를
만든 더글라스 항공기 제작회사 홍보자료는 4발 폭격기 B-17의
적재량과 맞먹는 폭탄을 실을 수가 있다고 했다.
스카이
레이더의 체공 시간이나 항속 거리도 대단히 우수했다.
여기에
더해서 스카이레이더는 대공 포화에도 내구성이 아주 좋았다.
스카이레이더는
그 여러 특성 때문에 갖은 궂은 일을 다했다.
대지,
대함등의 공격에 대 활약을 했는데 한국 전쟁동안
동해안에서
작전하는 미국 항공모함에서 출격하여 북한의
지상
목표들을 공격했다.
유명한
수풍 발전소의 폭격에서 진가를 발휘하기도 했다.
이미
제트기가 실용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스카이레이더는 한 5년 써
먹으면 퇴역시킬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써보니 일찍 은퇴시키기에 그 성능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그 아들 격인 제트 폭격기 A-4 스카이호크와 함께 같은
항모에서
같이 근무(?)하기도 했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쌩쌩한 현역으로서 월남전까지 대활약을 했다.
위험한
월맹 폭격은 물론 월남 미군 지원을 위한 대지 공격과 조종사 구출 작전시의 믿음직한 호위기로 다양한 역할을 했다.
이
공격기는 프로펠러기로서 믿기 어려운 세월인 30년 가까이 미 해군과 공군을 위해서 봉사하고 1972년 은퇴했다.
파로호
공격에 이 스카이레이더와 콜세어 기들이 동원된다.

함상의
스카이레이더- 날개를 접을 수가 있다.1951년 4월22일 팽덕회가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미군과
한국군을 서울 지역에서 쫓아내고
한강
이남까지 석권하기 위해서 유명한 일차 춘계 공세를 벌린다.
그러나
청천강 이북에서 미군을 기습해서 재미를 봤던 팽 덕회는
자신이
큰 자만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
미군은
질서 있게 퇴각하면서 중공군에 화력을 퍼부어 막대한
출혈을
보게 했다.
더해서
미군은 중공군이 가지고 있던 치명적인 보급의
약점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중국군은
병참시스템이 무척 빈약해서 개인 병사들이 총탄과 식량을
가지고
전투에 돌입해서 5,6일 뒤 이것들을 다 소비해 버리면 후퇴해야 했다.
미군은
닷새간 질서 있게 후퇴하다가 중공군이 공세가 한계에 달했을 때 공세로
나와 중공군을 무섭게 몰아붙였다.
공격을
먼저 시작했던 중공군은 볼품없는 패주를 거듭했다.
이
와중에 경춘 가도의 중간 지점 한강을 넘어서 진격했던 중공군
제
180사단은 앞에서는 한국군이 공격해오고 뒤에서는 미군에 의해
퇴로를
차단하여 거의 전멸해버렸다.
그러나
패주하던 중공군들은 파로호 일대에서 방어선을 치고 저항을 했다.
그들은
파로호의 수문을 모두 닫고 물을 저장하기 시작했다.
물이
최고의 수위에 달하면 수문을 열어 한강을 건너는 미군들을 수공(水攻)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한강을
건너 북방에 보급을 해야 하는 미군으로서 이것은 별로
반갑지가
않았다. 힘들게 설치한 부교가 떠내려 가 버릴 수도 있고 주정(舟艇)들의 유실도 있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 오래 계속되면 북쪽에 진출한 미군들에 대한 보급이 힘들어지고 이는 작전 차질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었다
공중
정찰로 중공군의 의도를 파악한 미군은 B-29폭격기를 동원해서
댐의
파괴를 시도해봤지만 아무런 전과가 없었다.
육군이
댐의 탈취를 위해서 특별 공격대까지 구성해서 공격했으나
중공군의
저항이 기대 이상으로 강했다.
더해서
중공군은 댐 파괴의 항공 공격에 대비해서 댐 위에
큰
돌들을 대량으로 깔아서 보강까지 했다.
고민하던
미 8 군은 이 댐의 파괴를 해군 항공대에게 요청했다.
동해에서
작전하던 미 해군 77기동 부대는 미 8 군으로부터 전문을 받자마자 상황의 심각함을 깨닫고 출격을 서둘렀다.
14;20에
출격 요청을 받았는데 두 시간도 안 된 16;00,
항공모함
프린스턴은 바람머리로 함수를 돌리고 2,000파운드의 대형 폭탄 두 개씩을 가슴에 품은 공격기 스카이레이더 6기와 호위기 콜세어
5 기가 한 번도 가보지도 않은 첩첩 산중 화천의 호수를향하여 이륙하였다.

해군
콜세어 전투기콜세어 기의 임무는 파로호 주변 산악에 빈대처럼 붙어있는
중공군
대공 포대 제압이었다.
대공
포대 파괴 임무를 띈 콜세어 기는 100파운드와 500파운드
폭탄들을
장비했다.
스카이레이더
공격대 지휘관은 해럴드 구스타프 칼슨 중령,
호위대
콜세어 기의 지휘관은 E.A.파커였다.
파로호의
상공에 도착한 스카이레이더 부대는 목표를 확인하고
이미
짝을 지은 두기씩 짝을 지어 댐으로 급강하했다.
주변의
산악과 중공군의 대공 사격으로 공격 비행은 대단히 어려웠다.
대장
칼슨 중령이 다른 동료기와 선두에서 공격을 선도했다.
댐에
접근해가자 주변 산들은 대 공포화로 휩싸였다.
콜세어는
즉각 확인된 대공 포대들을 폭격해서 삽시간에 침묵시켰다.
스카이레이더기들이
어렵게 공격을 했지만 전과는 실망스러웠다.
댐의
한 복판에 커다란 구덩이를 한 개 만들어놨을 뿐, 정작 파괴 되었어야 했던 수문은 전혀 파괴되지 않았다.
단지
여러 사람이 자살 공격이 될 것이라고 까지 걱정했던 이번 힘든 출격에서 여러 기가 피탄 되었지만 기체 손실이 없었던 것이 큰
수확이었다.
출격
했던 공격대가 귀환 한 뒤 함내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육군이 힘든 전투를 하고 있는 전황에서 해군에게
특별히
요청한 이 댐의 파괴는 기필코 달성해야만 했었다.
공격
후 열린 브리핑과 회의에서 댐의 파괴를 위한 열 띈 토론이 나왔다.
여러
의견과 검토가 있었지만 마땅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바다에서
사용하는 어뢰로 파로호의 수문을 파괴해보자는
의견이었다.
그
것은 정말 괜찮아 보이는 아이디어였다.
어뢰라면
수문을 파괴할 정확성과 파괴력을 가진 것이었다.
항공모함
프린스턴이 미국 태평양 시애틀 부근
브레머튼
군항에서 출항하기 전 푸젯 사운드의 해군 공창에서
이차세계
대전 때 쓰던 Mk-13어뢰 재고품 여덟 발을 넘겨받아
적재하고
한국 동해로 왔었다.
어뢰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는 1943년 영국 공군이 독일 루르 공업지대의
전력을
공급하던 저수지 댐들을 랭카스터 폭격기 19기를 동원해서
어뢰보다
더 기발한 폭탄, 물 위를 돌로 수제비 뜨듯이 징검다리처럼
뛰어서
댐에 부딪혀 폭발하게 하는 대형 폭탄을 투하하여 파괴한 전사가 있었던 만큼 모두 찬성했다.
그날
밤새도록 항모의 함상 정비 근무자들은 스카이레이더와 콜세어들의 대공 포화로 파괴된 부분을 수리하느라고 바빴다.
수리가
끝난 공격기들에게는 무기고의 맨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여덟
발의 어뢰가 운반 되어 와 장착되었다.
항모
프린스턴이 한국에 배치되기 전 조종사들은 대함(對艦)
어뢰
공격을 높은 강도로 훈련했었다.
공격
편대의 스카이레이더 조종사중 세 명이 그 훈련을 받았었다.
그런
조종사중 한 명이었던 로버트 베닛 중위는 훗날 훈련을
강하게
받아서 어뢰 공격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공격대의 나머지 다섯 명은 그런 훈련을 받은 일이 없었기에 어뢰라는
것은 상당히 생소한 물건이었다.
어뢰
공격에 자신 있었다는 로버트 베닛 중위도 사실은 최초로 본 어뢰는 그날 무기고에서 꺼내어온 어뢰였다.
함장은
심사숙고 끝에 이미 어뢰 공격 교육을 받은 다른 편대의 조종사
세
명이 이번 어뢰 공격에 참가시키기로 하였다.
아더
크랩 대위, 프랭크 멧저 대위, 에디슨 잉글리쉬 대위 등이다.
어뢰
공격에도 다른 공격기들이 상공에서 선회하며 대기하고 두 기가
수평
편대를 만들어 공격하는 전날을 방법을 택하기로 하였다.
파로호
댐에 대한 어뢰 공격은 무척 힘든 과제였다.
댐을
둘러싼 해발 천 미터에 가까운 산들이 큰 장애물이었다.
어뢰를
투하하는 각도와 속도도 중요했다.
더구나
진입로에서 탈출로 주변에 산악에 즐비하게 대기하고 있는
중공군
대공 포대들도 문제였다.
어뢰
발사가 성공하려면 이런 요소에 더해서 파로호의
좁은
수면과 얕은 수심도 또 다른 제한요소였다.
이런
한계점을 극복하고 어뢰가 제대로 작동하게 투하하는 것은
강한
정신력과 기술을 요하는 것이었다.
공격에
참가했던 로버트 배닛은 만년에 찾아 간 기자에게 이렇게 회고 했다.
“어뢰는
참 민감한 물건이었지요. 너무 높은 고도에서 발사하면 물속으로 머리를 박고 해저로 수직 돌진 해 버리고 너무 낮은 고도에서 투하하면
수면에서
튀어 버리기도 했었고—-.
그리고
조준도 중요하고 어뢰를 발사하는 항공기의 속도를 최대한 줄이는 것도 중요했어요.” ‘
항모가
가진 어뢰는 여덟 발이 전부였다.
1951년
아침 일찍 새로운 지휘관인 메릭 대령이 인도하여 11기의 스카이레이더와 호위기인 11기의 콜세어가 프린스턴을 이륙했다.
동해
바다를 지나서 한반도 백두대간을 가로질러서 파로호에
도착
한 시각이 오전 11시 30분이었다.
뜻밖에도
중공군의 대공 포화는 없었다.
선두
두 기의 스카이레이더들은 한 치의 주저도 없이 그대로
코스를
잡고 공격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중공군의 대공 포화가 늦장 포문을 열었다.
중공군은
미 해군기가 그렇게 빨리 돌아 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콜세어들이
대공 포대를 찾아내서 폭격을 하는 동안 스카이레이더들은 두기씩 짝을 이루어 호수 면을 스칠 듯이 낮게 고도를 잡고
스피드를
낮추었다.

해군 콜세어 전투기 공격기의 속도가 발사될 어뢰의 속도보다 빠르면 안 되었다.
그런
낮은 고도에 낮은 속도로 비행하는 것은 무척 힘든 노릇이었다.
더구나
콜세어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마구 쏟아지는 대공 포화 아래서
위와
같이 위험한 비행을 하는 것은 강철 같은 신경을 필요로 했다.
선도기의
크랩 대위와 잉글리쉬 대위가 발사한 어뢰들은 투하된 뒤중간쯤 달리다가 방향을 바꾸어서 엉뚱한 곳으로 돌진해서
폭파하고말았다
다행이도
나머지 여섯 개의 어뢰를 잘 작동이 되었다.
투하된
어뢰들은 잠시 수면 아래로 잠깐 모습을 감추었다가 곧 다시나타나 긴 항적(航跡)을 끌고 댐의 수문을 향하여 돌진했다.
수면에
바짝 붙어서 어뢰를 발사한 공격기들은 금방 바로 조종사 시야를 꽉
채우고 나타난 댐을 기어오르듯이 급상승해서 이탈했다.
어뢰들은
목표에 명중했다
주변의
산들을 뒤흔드는 거대한 폭음이
화천호를
뒤 덮었고 폭발이 만든 충격은 호수 면에 커다란 파도를
일으켜
호수 전체가 일렁이게 했다.
중앙
수문은 완전히 파괴되어 두 쪽이 나버렸다.
두
번째 수문은 직경이 3미터가 넘는 구멍을 만들었다.
더
해서 수문을 달고 있던 시멘트 지주 하나가
어뢰에
맞아서 완전하게 파괴되었다.
폭격을
끝낸 조종사들은 어마어마한 물줄기가 부서진 수문에서
흘러나와
댐 아래 계류를 넘치며 흘러 내려가는 장관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항모 프린스턴으로 돌아와서 오래 간만에 편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중공군은
파로호를 미군과의 전투에서 이용해 볼 계획을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세월이
흘렀다.
두어
달 전 나는 파로에 가보았다.
댐의
상류지점에 있는 민물 생선 매운탕 전문 식당들이 몰려있는 화천 호반에서 멀리 보이는 화천 수문과 댐,그리고 주변을 병풍처럼 첩첩히 둘러싼 지형을
보니 57년 전 이곳에서 어뢰 공격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그 곳은 마치 큰 찻잔 속 같았다.
찻잔의
가장자리에서 찻잔의 벽을 타고 내려가 좁은 찻잔 바닥에서
어뢰를
발사하고 다시 반대편 찻잔의 벽을 타고 올라가는 것과 같았다.

파로호
지형 -안개로 댐의 촬영은 실패했고 파로호 공격 지점의 2-3키로 상류쪽임 . 묘사한대로 수면이
찻잔 바닥 과 같이 보인다.북한강은 유유히 흘러오다가 오른 쪽으로 구비 친 곳을
댐으로 막았다.
그래서
어뢰를 투하하기 위해서 공격기가 수면을 달려야 할 직선 거리는 극히
짧았다.
더구나
공격기는 매운탕 촌 뒤의 산을 타고
내려오다시피
해서 수면에 붙고 불과 몇 초안에 그 까다로운 어뢰를 위한 고도와
속도 각도 등을 계산해서 어뢰를 투하한 뒤 댐 위에서 급상승해야 했다.
나는
어뢰라는 것은 적 함대를 공격할 때 저공으로 수 십 킬로를 전방부터 수면에 완전히 붙은 저공으로 접근해서 어뢰를 투하하고 역시 저공으로
탈출하는
것으로 알았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단 이틀 뒤 말레이 해역에서 영국 전함 프린스 어브 웨일스와 리펄스를 공격한 일본 해군 항공대의 쌍발 폭격기대도
이렇게
해면에 붙어서 접근했었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항모부대에 저공으로 접근하다가 일본 제로기와 대공 포화로 전멸해버린 미 해군TBD 뇌격기 부대도 이렇게
해면을
달려서 접근했었다.
그러나
화천댐 공격대는 그런 전형적인 바다의 어뢰 공격
방법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독일
급강하 폭격기 스투카가 하듯이 어뢰를 투하 하고
다시
급상승했던 것이다.
해전
사에 보기 힘든 특이한 어뢰 공격이었다.
나는
화천의 현장을 보고나서야 소문난 미군 해군의 조종 솜씨를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화천
발전소하지만 이 기이한 어뢰 공격을 성공시킨 배후에는 미 해군 조종사의
솜씨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급강하와
급상승이 자유롭고 어뢰 발사 속도에 맞추어서
저공
저속으로 비행할 수 있는 해군 공격기로 디자인 된 스카이레이더의 뛰어난
성능이 덧 붙여져서 이런 대단한 전과를 가져 왔던 것이다.
한국전쟁동안
어뢰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파로호에서
사용된 어뢰 공격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이 공격은 세계 전사에 어뢰가 육지에서 사용된 진기록을 남긴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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