앙겔라 메르켈, 육체파 女총리?

 

앙겔라
메르켈, 육체파 女총리?

 

지금 이 시각 저녁 약9시경, 독일
사람들은 거의 미칠 지경으로 좋아하고 있습니다.

아시듯이 금방 아르헨티나와의 경기에서
4대 빵으로 대승하였기 때문이지요.

모두가 기쁨에 들떠 말도
잘못하더군요.

벌써 20번도 넘게 축포 쏘는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는군요.

 

 베를린

 

 베를린 반제호수

 

 함부르크 

 

거미손으로 알려진 천재 골키퍼 올리버
칸Kahn이 올해에는 남아공에서 축구해설을 맡았는데, 평소 별로 웃지 않는 그도 오늘만은 너무 기뻐서 만면에 웃음을 무제한 띄우며 믿을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흔들더라구요.

독일팀이 잘 하는건 알지만
‘젊은놈’(Jungs)들이 이렇게도 잘할 줄 몰랐다는 거예요.

 

얼마 전에는 축구 종주국 영국을 4대
1로 이겨서 이 나라는 죽는듯이 좋아하였어요.

소위 용호龍虎상박의 ‘축구 클래식’
경기를 감상하는 즐거움은

베를린 필하모닉에서 일등석에 앉아
클래식 음악감상하는 것 만큼 호사스럽고도 최상의 기분이었어요. 

 

 

근데 오늘은 그 조직과
기술에서’강하다’는 남미의 아르헨, 메시같은 수퍼스타가 포진해 있는 아르헨을

저토록 대파 할 줄을 꿈에도 생각
안했어요. 그런데 4대 빵으로 대파하다니!

이 나라 국민들이 거의 미쳐
날뛰네요. 어느 동굴에는 1000여명이(위 사진) 모여서 월드컵을 관람하고요, ㅎㅎ

 

한편 오늘 또 엄청 기뻐하며 환호하는
여자가 있었어요, 바로 메르켈 총리인데요.

독일 팀을 응원하기 위하여 남아공까지
날아갔어요.

그녀는 게임전에 2대 1로 이길거라고
장담하였어요.

말이사 그렇게 기대하지만 사실 걱정은
많았어요.

‘저 강팀 아르헨을 무슨 수로 이길수
있겠노…’하며.

조마조마 하였지요.

 

 

응원도 누구보다 크게 입벌려 큰소리로
했어요. 

그러다가 골이 들어 가니까 너무
기쁜거예요.

그녀는 덤벙덤벙 일어나서는 돌아
다니며 옆에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서는 악수를 청하거나,

포옹을 하며 그 환호를
드러내더라구요. 그 모습은 일국의 ‘총리’가 아니라 우리 동네 ‘아줌마’ 같았어요.

그리고 저는 보았어요. 그녀가 좀 더
뚱뚱해졌다는 사실을.

긴 빨간색 웃옷을 입었는데, 남아공은
덥지 않은 모양이지요. 이곳 베를린은 오늘 너무 더웠어요. ㅠㅠㅠ…

겨우 살아 남았어요.

 

그렇게 기뻐서 마구 날뛰는 메르켈
총리를 보니까 작년에 봐 둔 사진 두어장이 떠올랐어요.

총리의 멋진 ‘여성스런’ 모습을 담은
사진인데…

귀한 사진이예요, 저의 친절한 운
좋은 독자만 볼 수 있어요^^.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짓게
만드는데요…

그 ‘자유 분방함’(?)이
압권이지요?

 

 

바로
위의 사진은

메르켈
총리가 지난해 4월 노르웨이 오슬로 오페라하우스 개관식에 참석했을 때 찍은 것인데 평소 스타일에는 신경 쓰지 않던 메르켈 총리였던지라 야한
옷차림은 파격! 당시 영국 타블로이드판 신문 ‘데일리 메일’은
‘메르켈의
대량살상무기’
라는
유머러스한 제목을 달았답니다.

 

근데
저 사진을 눈치 빠르게 선거 벽보에 이용하였어요. 김세린이 말했듯, ‘대중의 주의를 끌기 위해서’지요. 그 사진을 내건 주인공은 베를린의 한
지역구에서 다선의 녹색당 의원에 도전하는 기민당(CDU)의 베라 렝스펠트 후보(57). 사진에는 메르켈 총리와 렝스펠트 후보가 앞가슴이 깊이 팬
이브닝드레스를 입고 나란히 서 있고 메르켈 총리 가슴 위로

‘우리는
줄 게 더 많은 사람들’이라는 글이 겹쳐 있었답니다.

 

렝스펠트
후보는 지역구 750여 곳에 저 벽보 사진을 게시했다. 그러나 렝스펠트 후보는 “메르켈 총리에게서 사진 사용을 사전에 허락받지는 않았다”고
하는군요. CDU 측은 당혹해서 CDU 여성위원회 마리아 뵈머 위원장은 “성을 파는 낡아빠진 캠페인”이라고 렝스펠트 후보를
비난했다고요.유권자들의 반응은 나뉘었다. 렝스펠트 후보 블로그에 글을 올린 ‘알렉스’라는 누리꾼은 “위트가 있다”고 했으나 ‘레나’라는 여자
네티즌은
“수치스럽다.
여성이 명석한 말과 생각으로 승부하지 못하고 가슴으로 주의를 끌어야 하다니 슬프다”

쏘아 부쳤답니다. 어느 쪽이 맞는지 모르겠군요, ㅎㅎ.

 

근데
저, 김세린의 눈으로 보면, 사진 속의 젊은 남자가 왜 웃는지 모르겠어요. @@

보니
메르켈 총리는 무언가 진지하게 설명하는데…웃을 일이 아닌 것 같은데…


남자가 입을 헤벌쭉 벌리고 좋아 웃는 건 아마도

메르켈
총리의 풍만한 가슴을 들여다 보고

속으로
너무 행복해서 그런 것 같아요^^

 


위의 저 사진은

2009년
4월 30일

베를린 유명 백화점에

걸렸던
100㎡ 크기의 대형 광고사진이예요.

메르켈은
2008년 2009년 연속,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 1위를 차지 했어요. 사진 속 메르켈

총리는
파란색 속옷 비키니만 입은 채 스타일을 뽐내며 몸매를 드러내고 있어 행인들을 깜짝 놀라게 했어요.

 


우스꽝스런 속옷 광고에 출연한 데는 남다른 사연이 있다. 그녀는 작년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중고차 현금 지급안’(자동차를 폐기하는 사람에게
현금을 주는 제도)에 필요한 돈을 모으기 위해 사회 각계가 펼치고 있는 캠페인에 참여한 것이다. 독일 유명 속옷브랜드 ‘Bruno Banani’
또한 이 캠페인에 참여하고 있는 기업으로, 입지 않는 오래된 속옷을 가져오면 새 속옷을 구매할 때 7달러를 할인해 주는 행사를 펼쳤다고요.
거기에 찬조출연하는거지요.

 

메르켈
총리가 속옷바람으로 등장한 이 광고가 베를린 거리 한가운데 걸리자마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기념사진’을 찍는 열풍이 불었답니다. 이를 접한
시민들의 반응은 대체로 긍정적이었는데 54세의 마이어(Meier)씨는 "독일의 경제상황에서 볼 때 매우 긍정적인 신호로 보인다."고 밝혔고
37세의 베베(Bebe)씨는 "매우 획기적이고 재미있는 광고라고 생각한다."고 하며 웃었다고요. 메르켈
총리의 이 광고에 대해 정부 관계자는 "우리는 총리의 이번 캠페인에 대해 어떤 언급도 하지 않을 것"이라며 차분하게 대응 했다나요.

 

아,
독일은 시민도, 정부도, 총리도 모두 정말 자유로워~~

 

세상은
이래저래 참 재미 있군요,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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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비린내 나는 가사들… 독립전쟁·혁명의 산물

월드컵 경기장에 울려퍼진 國歌들, 왜 그리 살벌한가 했더니

남아공 요하네스버그 사커시티 스타디움에 애국가가 울리자 한국 대표팀 선수들은 상기된 얼굴로 오른손을 가슴에 얹었다. 전국 352곳에 모인 150만여 시민도 대형
스크린을 통해 그 모습을 보며 애국가를 따라불렀다. 본지 6월 18일한국전은 물론 다른 팀 경기까지
TV 중계를 본 축구팬들에게 경기 말고도 관심을 끈 사실이 한 가지 있다. 경기 시작 전 양팀 국가가 울려 퍼질 때 TV 화면에 소개된 번역본
가사다.’동해 물과 백두산이~’로 시작해 ‘길이 보전하세’로 끝나는 서정적인 한국 애국가와 달리 다른 국가는 ‘피비린내나는’
가사를 갖고 있다. 남미 소국 우루과이부터 유럽의 맹주 프랑스까지 이들 나라 국가는 한국으로 치면 1980년대 운동가나 노동가에 버금갈 만큼 호전적이다.
왜?

우선 한국의 8강행을 좌절시킨 우루과이. 국가 제목은 ‘달라, 조국 아니면 죽음을’이다.
1845년 7월 FA피구에로아가 작사, F J 데발리가 작곡하고 3년 뒤 국가로 채택된 노래다.가사는 이렇다. ‘조국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자유가 아니면 영광스러운 희생을 하리라! 우리의 영혼이 쥐여 잡은 맹세일지니, 우리는 깨닫기 위해 용감하게 완수했도다!’ 이
비장한 노래의 주제는 ‘자유’와 ‘죽음’이다.우루과이는 남미에서 두 번째로 작은 나라다. 인구는 350만명 정도다. 원래
‘시스플라틴아 도 술’이라는 이름의 브라질 남부 주(州)였다. 1825년부터 3년간 전쟁을 벌여 독립을 얻어냈다. 그 독립을 기리는 노래가
국가로 채택됐다.흥미로운 건 우루과이 국가 작사·작곡가가 파라과이 국가도 만들었다는 점이다. 제목은 ‘파라과이, 공화국 아니면
죽음을’이며 후렴구도 우루과이와 비슷하다. ‘파라과이인에게 공화국이 아니면 죽음을 달라! 우리의 영혼은 자유를 주었도다. 화합과 평등이 다스리는
곳에서 압제자와 노예는 존재하지 않으리.’ 파라과이는 300년 가까이 스페인 식민 통치에 시달리다 1811년 독립했다.아르헨티나도 마찬가지다. 아르헨티나 국가 ‘조국 행진곡’은 V L 플라네스가 작사, B 파레라가 작곡했다.
이 노래는 5월혁명 3년 뒤인 1813년에 국가로 지정됐다. 스페인 이주자들이 늘어나자 아르헨티나는 1900년 노랫말을 좀 더 부드럽게 수정했다. ‘죽지 마라! 신성한
외침을 들어라. 자유여, 자유여, 자유여! 쇠사슬이 부서지는 소리를 들어라. 우수한 평등함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라. 남부 지역이여,
단결하라. 우리는 아르헨티나인으로 충성하리!’

프랑스 7월혁명 직후 외젠 들라크루아(Eugene Delacroix)가 그린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프랑스 국가 ‘마르세유의 노래’ 역시 이 그림 못지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 이끌리오 제공

남미 국가들만이
아니다. 피 냄새 하면 프랑스 국가도 만만찮다. 프랑스 국가 ‘마르세유의 노래’는 루제 드 릴이 프랑스혁명을 기념해 1792년 만들었는데, 왕조
부활 이후 금지곡이 됐다가 1879년에 다시 국가로 채택됐다. 가사 속에 포탄이 난무하고 야수 같은 병사들이 포효하며 아들 딸을 학살한다는
장면이 등장한다. ‘무기를 잡아라 시민들아, 전투 대형을 갖추어라, 진격하자, 진격하자! 더러운 피가 우리의 밭고랑에 흐르게
하자.’그렇다면 16~17세기 식민 통치로 위세를 떨친 스페인 국가는 얼마나 거칠까? 의외로 스페인 국가는 가사가 없다.
1770년 카를로스 3세는 군악곡 편곡집의 ‘척탄병 행진곡’을 ‘왕의 행진’이라고 개명해 국가로 제정했다. 스페인은 1930년대 혹독한 경제
공황을 겪으면서 잠시 진취적인 가사를 넣은 ‘리에고의 노래’를 국가로 불렀다가 1947년 왕정 복고로 다시 ‘왕의 행진’을
채택했다.혁명이 아니라 대놓고 왕과 권력에 충성을 다하겠다는 국가도 물론 있다. 영국일본이 대표적이다. 잉글랜드 왕국의 가사는 ‘신이시여, 우리들의 자비로우신 여왕 폐하를 지켜주시고’로
시작된다. 이들은 노래를 부를 현재 시점에 맞춰 재위하는 왕실 지도자의 성별에 따라 ‘여왕’ 또는 ‘왕’으로 바꾸어 부른다.이번
TV 중계에서 일본 국가 ‘기미가요’는 가사를 자막으로 처리하지 않았다. 천황과 제국주의가 영원하라는 노골적인 내용이기 때문이다. ‘천황의
세상이 천 대로 팔천 대로 작은 조약돌이 큰 바위가 되어서 이끼가 낄 때까지.’ 기미가요는 일본의 2차 세계대전 패망 후 폐지됐다가 1999년
공식 부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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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유산 조선왕릉에 가다

 

조선왕릉 개관(槪觀)

 

    2009년 6월 27일 조선왕릉 40기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됐다. 조선왕릉은 조선의 역대 왕과

왕비의 무덤으로 모두42기가 있는데, 북한에 2기가 있고 남한에는 40기가 있다.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것은

남한의 40기가 여러 곳에 흩어져 있으나 일괄 등재된 것이다.

    조선왕릉이 세계유산으로 선정된 까닭은 이 유산이 잘 관리돼 왔을 뿐만 아니라 유교적. 풍수적 전통을 근간으로  한 독특한 양식이라는
점과 약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제례의식이 전승돼 온다는 무형적 요소가 융합된

보편적 가치와 진정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 조선왕릉의 전형적 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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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릉 소재 왕릉전시관 모형

 

   조선왕릉은 조선의 역사와 건축양식, 미의식, 생태관, 철학이 담긴 결정체로 자연지형을 최대한 활용한

경관때문에 "신의 정원"이라 불린다. 그뿐만 아니라 조선왕릉 40기 전체에서 매년 제례가 올려져 왕릉이 박제된

옛 유산이 아니라 현재에 살아 숨쉬고 있는 곳이란 점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또한 왕릉의 조성과정과 관리일지가 고스란히 남아 있어 조선의 수준높은 기록문화도 볼 수 있다.

특히 도심 속의 각종 개발압력에도 불구하고 녹지로 잘 보전되어 있어 현대인들의 휴식처이자 역사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조선왕릉 능제

 

-영여(왕의 상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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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릉 전시관

 

- 능침의 내부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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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왕릉 전시관

 

- 석곽을 만들어 재궁(왕의 관)을 안치한 후 문을 닫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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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병풍석을 두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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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간석을 둘러 완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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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릉의 구조와 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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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왕릉의 분포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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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구릉(東九陵 : 사적 제
193호)

위치: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의1

 

도성의 동쪽에있는 아홉 능이란 의미로 불리는 동구릉은 우리나라 최대규모의 왕릉군을 이루고 있다. 이곳에는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으로부터 경릉(제24대 헌종, 비 효현왕후 김씨, 계비 효정왕후 홍씨)까지 9릉
17위의

왕과 왕후 릉이 조영되어 있다.

 

- 동구릉의 배치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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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살문(紅箭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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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살문은 왕릉의 들머리임을 알려주는 건축적 장치로 이곳을 지날 때는 몸과 마음을 엄숙히 하고

여기에 모셔진 분들에게 경건한 예를 갖추라는 뜻으로 세워진 것이다. 혹은 홍전문(紅箭門)이라고도 한다.

동구릉에는 능역 초입에 커다란 홍살문이 서 있고 안쪽에 아홉곳의 능마다 약간 작은 규모의 홍살문이

설치되어 산릉의 참배나 제례가 시작되는 곳을 다시 한번 알려 주고있다.

 

- 재 실( 겸 관리사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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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실은 왕이나 제주와 관계자들이 제례를 지내기 위해 머물면서 제사를 준비하던 곳이다.

 

1. 건원릉(健元陵)

     조선 태조 이성계의 능이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후 1392년 7월 17일 개성 수창궁에서 왕위에
올랐다.

이듬해 2월에는 국호를 조선이라하고 1394년 10월 도읍을 한양으로 옮겼다.

태종8년(1408) 5월24일 창덕궁에서 8남 5녀를 남기고 춘추 74세로 승하하여 같은 해 9월9일 이곳에
모셔졌다.

 

-건원릉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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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일하게 태조의 능인 건원(健元)릉 만이 두자(字)의 묘호이고 기타 능들은 예외없이 외자의 이름이다.

 홍살문 옆에는 박석이나 전돌을 깔아 만든 배위(임금이 능행시 업드려 절하는 곳)가 있고

오른편에 수복방, 정자각 뒤에 비각이 있고 그 뒤로 능침이 있다.

 

- 비각 안의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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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태조고황제건원릉 이 전서체로 오석에 음각되어있다.

왕릉 비석의 비문체는 능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현대의 기계의 힘을 빌려 각자한 것 보다 더 정교하다.

 

- 건원릉 봉분의 억새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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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건원릉의 봉분은 높고 웅장한 위용을 자랑하나, 다른 왕릉의 봉분은 푸른잔디로 덮혀있는데 건원릉은

억새가 덮혀있다. 이는 고향인 함경도 영흥에 묻어 달라는 태조의 유언이 있었지만 한양에서 너무 멀어

고향 영흥땅의 억새풀로 봉분을 덮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필자의 추측으로는 영흥의 흙을 가져다 봉분을 덮었을 가능성은 있고

이 때 억새풀이 옮아 왔을것으로 추정된다.

 

 

2. 수 릉(綏陵)

 수릉은 조선 제23대 순조(純祖)의 맏아들인 문조(文祖)와 그 비 신정황후(神貞皇后) 조(趙)씨의 능이다.

문조는 22세로 승하하고 아들 헌종(憲宗)이 왕위에 오르자 익종(翼宗)이라 추존하였다.

 광무3년(1899)에는 다시 문조익황제로 추존하였다.

신정황후(神貞皇后 : 1808~1890)는 83세로 승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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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릉은 왕과 비의 합장릉이다.

 

- 비 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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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자각 오른편 비각 안에는 두 개의 비석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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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각속에는 두개의 비석이 나란히 서 있는데,

한개에는 "익종대왕 수릉" "신정왕후 부좌" 라고 기록되어 있어 문조 추존시 비석임을 알 수 있고

위의 사진은 "문조익황제수릉" "신정익황후부좌"로되어 있어 황제추존 후의 비 임을 알 수 있다.

 

3. 현 릉(顯陵)

현릉은 제5대 문종과 그의 비 현덕왕후 권씨의 능이다.

현릉은 동원이강(同原異岡)의 양식으로 조영되어있다. 같은 능의 이름 아래 같은 능역에 있지만

왕과 왕비의 능을 각각 다른(異) 언덕(岡) 위에 단릉(單陵)처럼 만든 것이 동원이강이다.

 

- 현릉(동원이강릉) 조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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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각에서 바라보아 왼편에 보이는 문종의 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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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가각 오른편으로 보이는 현덕왕후의 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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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목 릉(穆陵) 

목릉은 제14대 선조와 그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와 계비인목왕후 김씨의 능이다.

목릉도 동원이강의 형식으로 3기의 능이 조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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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각 뒤로보이는 능이 선조의 능이고 그 오른편이 의인왕후의 능이다.

인목왕후의 능은 정자각으로부터 4시방향에 위치하고있다.

 

- 선조의 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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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인왕후 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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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목왕후 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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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후의 능엔 병풍석이 없고 봉분이 흘러내려 수리하고있다

 

- 비 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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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국 선조대왕 목릉

 의인왕후부중강,

인목왕후부좌강

이라고 쓰여있어 정비 의인왕후는 가운데에,

계비 인목왕후는 왼쪽에,

모셨다는것을 알 수있다.

 

- 목릉 자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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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건원릉 가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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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릉으로부터 건원릉 가는 호젓한 길인데 능역은 어느 곳이나 자연이 잘 보존되어있다. 

 

 5.휘 릉(徽陵)

휘릉은 제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조씨의 단릉(單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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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원 릉(元陵)

원릉은 제21대 영조와 그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의 쌍릉이다.

 

-원릉(쌍릉) 조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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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경 릉(景陵)

경릉은 제24대 헌종과 그의 비 효현왕후 김씨 및 계비 효정왕후 홍씨의 능으로

한 언덕에 3연릉으로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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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혜 릉(惠陵)

제 20대 경종의 정비 단의왕후 심씨의 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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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숭 릉(崇陵)

 숭릉은 제 18대 현종과 그의 비 명성왕후 김씨의 쌍능이다. 

 

-숭릉 조감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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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숭릉 가는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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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차 답사시엔 들어가지도 못하고, 2차답사시에 어거지로 들어가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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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머지 왕릉은 특징중심으로 간략히 소개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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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화유산 조선 왕능에 가다 #2 /서5능,서3능,파주3능

- 왕릉 분포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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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양의 서북쪽에는 세개의 왕릉군이 있다. 서5릉, 서3릉 과 파주3릉이 그것이다.

 

서 5 릉

 

- 서5릉의 배치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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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만9700 여 평방m(약 555만평)에 이르는 광대한 면적의 이곳에는 경릉을 비롯하여 창릉, 명릉,

익릉, 및 홍릉이 있어 서5릉이라 부른다. 그 밖에 순창원, 수경원, 대빈묘가 주변에 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475-95(사적 198호)

 

1. 
릉(明陵)

 제19대 숙종과 그의 첫째 계비 인현왕후 민씨, 둘째 계비 인원왕후 김씨의 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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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자각 바로 뒷쪽에 쌍릉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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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자각 뒤로 보이는 쌍릉이 숙종과 인현왕후 능이다. 왼쪽에 보이는 단릉은 인원왕후능이다.

좌상 우하의 능제에 따르지않고 왕후의 능이 왕릉보다 높은 위치에 조영된것이 명릉의 특징이다.

 

- 인원왕후 능에서 바라본 숙종과 인현왕후의 쌍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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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숙종은 첫 왕비로 인경왕후를 맞았으나 일찍 사별하고 인현왕후(仁顯王后)를 첫째 계비로 맞았다.

그러나 인현왕후는 희빈 장씨의 모함으로 폐위되었다가 갑술환국 때 복위되었으나 35세에 원인 모를 병으로

소생없이 세상을 떠난다. 다음 해 숙종은 인원왕후를 둘째 계비로 맞는다.

 

수경원(綏慶園) 

 수경원은 조선 제21대 영조의 후궁인 영빈(暎嬪) 이씨의 묘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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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빈 이씨는 영조 11년 사도세자를 낳았으며 69세로 별세한다. 수경원은 원래 서울 서대문구 신촌에

있었으나 1968년 6월에 현재의 장소로 이장되었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현재의 세브란스병원 자리에 수경원이

위치하고 있었으며 연희동을 50년대까지 동네의 원로들은 ‘연희궁’ 또는 ‘연비’ 라고 불렀으며

‘궁골’이라는 동네가 현재의 외국인학교 부근이었기로 과거 역사에 기록되지 않은 후궁이나 왕족이 거주했던

동네로 추정된다. 현재는 이곳에 전직 대통령 두 명이 거주하고 있는데 우연의 일치일까?

 

 2.익릉(翼陵)

숙종의 정비 인경(仁敬)왕후 김씨의 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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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경왕후는 11세에 세자빈으로 책봉되었다가 3년 후 숙종이 즉위하면서 왕비가 되었으나 20세에

천연두를 앓다가 공주만 둘을 두고 세상을 떴다.

 

 순창원(順昌園)

순창원은 13대 명종의 맏아들 순회(順懷)세자와 공회빈(恭懷濱) 윤씨의
묘소이다.

순회세자는 13세에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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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陵)과 원(園)은 상설에 많은 차이가 있다.

 

3. 경릉(敬陵)

 경릉은 의경세자(懿敬세자)와 그의 비 소혜왕후 한씨의 능이다.

 

- 덕종의 능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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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7대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추존 덕종)는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즉위하기전 20세로 별세하자,

대군묘 형식으로 장례를 치루었으나 그의 둘째아들(성종)이 즉위하면서 덕종으로 높여졌다.

정자각 오른편에 위치한 덕종의 능은 그의 비 보다 간소하다. 

 

- 소혜왕후(昭惠王后) 한씨의 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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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혜왕후는 아들 성종을 낳은지 두 달 만에 남편 덕종이 죽고 아들 성종이 즉위하자 대왕대비가 되었다.

소혜왕후 한씨는 성품이 총명하고 학식이 깊어 부녀자들의 예의범절을 가르치는 "내훈內訓"을 책으로 펴내고

한문 불경을 한글로 풀어 쓰기도 했다. 생모 윤씨가 사약을 받은 것을 안 연산군이 패륜을 저지르자

이를 꾸짖다가 연산군의 머리에 받혔고 얼마 후 68세로 세상을 떴다.

 

경릉은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다.

첫째, 우상좌하의 원칙에서 벗어나 왕후가 왕보다 높은 자리인 우측에 위치하고 있다.

그것은 소혜왕후는 대왕대비로 승하했기 때문이다.

             둘째, 덕종이 왕으로 높여졌음에도 대군묘 형태이다.

 

대 빈 묘

 

- 유명조선국옥산부대빈장씨지묘(有明朝鮮國玉山府大嬪張氏之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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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명조선국옥산부대빈장씨지묘" 가 장명등과  비석만 한 개 서 있는 장희빈 묘의 비명이다.

오랫동안 아들이 없던 숙종이 궁녀 장소의(張昭儀)에게서 왕자 윤(경종)을 얻는다. 이듬해 윤을 세자로

책봉하고 장소의에게 희빈이라는 품계를 내렸다. 그 후 인현왕후 민씨를 폐비하고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하였으나 숙종은 곧 이를 후회하고 인현왕후를 복위하고 장희빈에게 사약을 내렸다.

대빈묘는 경기도 광주에서 1969년 9월 이곳으로 이장되었다.

 

 4. 홍 릉(弘陵)

제21대 영조의 원비 정성왕후(貞聖王后) 서씨의 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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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조의 글을 보면 정성왕후는 궁궐생활 43년 동안 늘 미소 띤 얼굴로 영조를 맞고 집안의 어른들을 극진히

모시고 게으른 빛이 없었으며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의 신위를 모시는데 정성을 기우렸다고 한다.

정성왕후는 자녀를 두지 못하고 66세에 세상을 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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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후릉의 오른쪽은 영조의 능지로 하고자 공간을 남겨 두었지만 영조는 동구릉의 원릉에 묻혔다.

 

5.창 릉(昌陵)

제8대 예종과 계비 안순왕후의 동원이강(同原異岡)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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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자각 왼편이 예종릉이고 오른편이 안순왕후의 능이다.

예종은 세조의 둘째 아들로 세자었던 현(의경세자 덕종)이 갑자기 죽자 19세에 왕위에 올랐으나

그 또한 즉위한지 불과 14개월만에 숨을 거둔다.

안순왕후는 예종의 원비 장순왕후가 인성대군을 낳고 산후병으로 숨을 거두자 세자빈이 되었고

예종이 즉위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 경비원과 문화재 보호구역 무단침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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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능침까지는 무단으로 올라 갈 수 없는 곳이기에 경비원이 달려왔다.(무단침입자는 도굴범으로 몰릴
수도…) 

 

서 3 릉

 

 -서3릉의 배치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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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3만479평방m(약 69만 8천평)에 이르는 이곳에는 희릉(熙陵), 예릉(睿陵), 효릉(孝陵) 등 3기의
능이 있어

서3릉이라 부른다. 그 밖에 의령원, 효창원, 소경원, 태실 등이 있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7-1(사적 제200호)

 

 1.희 릉(禧陵)

제 11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의 능이다.

 

- 전 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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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경왕후 희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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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경왕후는 중종의 후궁인 숙의(淑儀)로 책봉되었으나 원비인 단경왕후(端敬王后)가 아버지 신수근의 문제로

폐위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그 후 세자인 인종을 낳았으나 산후병으로 7일만에 세상을 떴다.

 

2.예 릉(睿陵) 

제25대 철종과 그의 비 철인왕후(哲仁王后) 심씨의 능이다.

 

- 전 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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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화도령"이라 불리는 철종은 사도세자의 증손자로 강화도에서 농사 지으며 살고 있었다.

헌종이 후사가 없이 세상을 떠나자 대왕대비의 명으로 왕이 되었다.

 

- 난간석으로 연결된 동원쌍봉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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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왕후 김씨는 원자를 낳았으나 일찍 세상을 떠났고 왕후는 그 후 소생없이 41세로 별세한다.

 

효창원(孝昌園) 과 의령원(懿寧園) 

 

-효창원과 의령원 앞에 일자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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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자각 뒷편 묘역에는 상하로 나란히 두기의 묘가 있다.

 

 - 효창원과 의령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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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효창원 : 앞쪽의 묘역이 효창원이다. 효창원은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묘소이다.

             문효세자는 제22대 정조의 큰아들이며 의빈(宜嬪) 성(成)씨의 소생으로 5세에 세상을
떠났다.

          2. 의령원 : 뒷쪽의 작은 묘역이 의령원이다. 의령원은 의소세손(懿昭世孫)의 묘소이다.

             의소세손은 영조의 세손이자 장조(莊祖,사도세자)의 첫째 아들이다. 3세로 세상을 떴다.

 

3.효 릉(孝陵)

제12대 인종과 그의 비 인성왕후(仁聖王后) 박씨의 능이다.

 

- 펜스로 둘러쳐지고 자물쇠로 잠겨있는 효릉(공개제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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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종의 맏아들인 인종은 조선 역대 왕 중에서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9개월만에 30세로 승하한다.

희릉과 예릉이 같은 능역내에 있으나 효릉은 이들 두 능과 동떨어진 서쪽에 홀로 위치하고있다.

 

- 동원쌍봉릉(同原雙峰陵) 효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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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종은 생모 장경왕후가 7일만에 승하하여 문정왕후 윤씨의 손에 자랐으며, 성품이 조용하고

효심이 깊었다고 한다. 능호를 효릉으로 명명한 이유일것 같다.

왕후의 능은 병풍석이 생략되어 간소하고 난간석으로 두 봉분을 연결한 동원쌍봉릉이다.

 

태실(胎室)

왕실에서는 출산이 있을 때 그 출생아의 태(胎)를  태호(胎壺)에 담아 전국의 길지에 석실을 만들고

그 안에 넣어 묻었다. 이를 태실이라 한다. 일제는 태실을 집중관리한다는 미명 아래

태조의 태실등 22기와 왕자와 공주의 태실 등 32기를 서3능 능역에 옮겨 와 공동묘지처럼 만들어 놓았다. 

 

 - 태실 안치 구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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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대 왕들의 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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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석의 앞면에는 예를 들어 "世宗大王 胎室"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어디에서 이봉했다는 것과

 년,월이 기록되어 있다. 사진의 앞에 보이는 비석에는 전북 금산에서 옮겨 왔다는

 " 自 全北錦山郡秋富面 移封 " 과 오른편에 정으로 쪼아서 지운 부분과 다음 "X X  年 五月" 이 보인다.

분명 일제치하에서 기록했던 일왕 히로히또의 "昭和 X X " 년이란 일제 년호를 광복 후에 지워버린 것이다.

 

- 왕자 공주들의 태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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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요즈음 신문 서적 광고란에 자주 실리는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의 비석도 오른편에 보인다.

 

- 창경궁 후원에 남아 있는 성종의 태실 과 비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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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태실의 본래 모습은 그림처럼 아름다운것이었다.(2009. 4.4 필자 촬영) 

일제가 연구용으로 성종의 태실만 창경궁 후원에 옮겨놓은 것이 원형으로 남아 있는 유일한 것이다.

 일제가 전국에 산재한 태실을 서3릉으로 옮긴 이유는 조선의 500년 정통성을 단절시키고

 태호와 석물들을 약탈 해가기 위해서 였다고 한다.

 

46 묘(墓)

 조선시대의 왕실의 무덤은 능(陵), 원(園), 묘(墓)로 구분한다. 능은 왕과 왕비의 무덤을 말하고,

원은 왕의 사친(私親) 및 세자와 세자빈 세손과 세손빈의 무덤, 그리고 묘는 대군, 군, 공주,

옹주 와 후궁의 무덤을 일컫는다. 

일제는 서울과 경기 일원에 산재한 후궁. 왕자, 공주 등의 분묘를 집장(集葬)관리 한다는 명목으로

서3릉 능역에 집장지를 선정하고 이곳으로 옮겨왔다.

 

- 대군. 군 묘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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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주 묘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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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궁 묘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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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곡장 밖에서 본 후궁 묘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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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 묘(懷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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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회묘는 후궁묘역 옆에 위치하고 있다. 회묘는 성종의 비였으나 폐비되어 사가로 쫓겨났다가

사약을 받고 죽은 연산군의 생모 폐비 윤씨의 묘이다. 회묘는 경기도 양주군 천장산 아래 민묘(民墓)로

있었으나 연산군이 왕위에 오른 후 윤씨의 묘를 왕릉으로 꾸미고 회릉이란 능호를 올렸다.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실각하자 폐비 윤씨의 왕비릉은 다시 묘로 격하되었지만,

왕릉으로 조성한 능 상설등은 그대로 두어 실제 모습은 당당한 왕릉의 모습을 하고 있다.

 

파주3릉

 

 - 파주 3릉 배치 조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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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32만 3천여 평방m (40만평)의 능역 안에는 공릉, 순릉, 영릉 3기의 능이 있다.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산 4-1(사적 205호)

 

-영릉(永陵) 입구의 금천교(禁川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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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영릉(永陵)

영릉은 영조의 맏아들 진종(眞宗)과 그의 빈 조씨의 동원쌍봉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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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1대 영조의 맏아들 진종(眞宗)은 왕세자였으나 10세에 세상을 떴다. 영조는 그 후
진종(효장세자)의

이복동생 사도세자를 왕세자로 삼았으나 사도세자는 당쟁에 휩싸여 영조의 명으로 뒤주에 갇혀 죽고

그의 아들 정조가 세손이 되어 왕위를 이었다. 정조가 즉위함에 따라 효장세자는 양부로서

진종으로 추존되었다. 진종의 비 효순왕후(孝純王后) 趙씨는 37세에 세상을 떴다.

 

2. 공릉 

제8대 예종의 비 장순왕후(章順王后) 한씨의 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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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순왕후는 한명회의 딸로 세자빈으로 책봉된 후 아들 인성대군을 낳고 이듬해 16세로 세상을 떠난다.

성종 3년에 왕후로 추존된다. 참도가 ㄱ 자 형태로 되어있는것이 특징이다.

 

3.순릉(順陵)

제9대 성종의 비 공혜왕후(恭惠王后) 한씨의 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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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혜왕후는 18세에 소생없이 세상을 떠난다.한명회는 셋째 딸을 예종에게, 넷째 딸을 성종에게

시집 보냈는데  이 두 딸은 자매이자 시숙모와 조카며느리가 되는 기묘한 관계가 된다.

한명회의 권력욕은 왕실을 농락하고 묘한 친인척관계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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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밀레종의 전설

어느 날, 신라의 제35대 경덕왕은 봉덕사에다 큰 종을 만들라고 명령했습니다."부왕이신 성덕 대왕을
기릴 수 있도록 신라에서 가장 큰 종을 만들도록 하시오. 그리고 종을 치면 그 여운이 멀리까지 퍼지도록 만들도록 하시오."신하들은
종을 잘 만들기로 이름난 일전이라는 사람을 찾아가서 그 일을 부탁했습니다. 일전은 공들여 종을 만들고 용이 구름을 타고 나는 무늬도 그려
넣었습니다.드디어 종이 완성되자 경덕왕은 몸소 종을 보러 나왔고 봉덕사의 스님 한 분이 힘껏 종을 쳤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종에서 소리가 나질 않았습니다.경덕왕이 직접 종을 쳐 보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아무래도 정성이 부족하여 부처님께서 노하신 것 같소. 그러니 경들은 다시
시주를 거두어서 더욱 정성을 들여만들도록 하시오."봉덕사의 스님들은 전국을 다니며 시주를 받기에 바빴습니다. 그러는 동안 경덕왕은
세상을 떴지만 종 만드는 일은 계속되었습니다. 하루는 봉덕사 주지 스님이 꿈 속에서 이상한 소리를 들었습니다."며칠 전에 시주를
받으러 갔다가 그냥 돌아온 집의 아이를 데려오너라. 그 아이가 들어가야 되느니라."잠에서 깬 주지 스님은 잠시 생각에 잠겼습니다. ‘그 아이라면…… 시주할
게 아무것도 없다던 그 집 아이를 말하는 것이구나. 부처님의 뜻이니 서둘러야겠다.’날이 밝자 스님은 그 집으로 찾아가서 꿈 얘기를
했습니다."스님의 뜻은 잘 알겠습니다. 하지만 어떻게 내 속으로 낳은 자식을 끓는 물에 넣도록 둘 수
있겠습니까?"아기의 어머니는 눈물을 흘리며 넋두리를 했습니다.그러다 결국 그녀는 아기를 내놓고 말았습니다. 주지 스님이
데려온 아기는 펄펄 끓는 쇳물 속에 넣어지고 종은 다시 만들어졌습니다.이번에도 왕이 보는 앞에서 주지 스님은 힘껏 종을
쳤습니다.그런데 맑은 종소리 속에서 ‘에밀레’ 하는 아기의 울음소리가 섞여 나왔습니다.그 소리는 마치 아기가 자신의 어머니를
애타게 찾는 듯한 소리였습니다.그래서 이 종을 ‘에밀레종’ 이라고 불렀습니다 .
에밀레종의 원래 이름은 성덕대왕 신종이야. 봉덕사 종이라고도 하지. 이 종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종이면서 세계적인 예술품이기도 하다.국보 29호인 이 종은 신라 전성기의 최대의 걸작으로 혜공왕
6년(770년)에 완성되었으며, 높이 333㎝, 구경 227㎝, 둘레 709㎝이다.이 종은 성덕대왕을 위하여 지은 봉덕사에 두었던
것인데 그 후 이 절이 수재를 만나 없어지자 영묘사에 옮겨졌으나 이 영묘사가 또 폐사되자 경주 남문 밖에 두고서 조석으로 치다가 경주박물관이
건립되자 이곳으로 옮겨져 현재까지 보존되고 있다.이 전설의 사실 여부는 세인의 오랜 관심이었는데 아래 기사는 이 문제와 관련해 참고가 된다.1200년 전
12만근의 구리로 빚어낸 신라인들의 염원이자 신의 소리인
성덕대왕신종은 고대 범종
역사를 새로 쓴 걸작이다. 에밀레종의 조성 동기와 주종작업에 참여한 사람들을 새긴 종명에는 성덕대왕, 경덕왕, 혜공왕에 대한 찬사와 특이하게
혜공왕의 어머니인 만월부인에 대한 찬사가 두드러진다. 또 ‘원구’라는 인물의 권력이 강력했음을 나타내는 기록이 있다.신종은 8살에
왕위에 오른 혜공왕이 15살 되던 해에 완성됐다. 당시 신라는 혜공왕의 어머니 만월부인이 섭정하며 친정오빠인 김옹과 함께 국정을 좌지우지하고
있었다. 종명에 나오는 원구는 혜공왕의 외삼촌인 김옹이다.어린 혜공왕은 재위기간 내내 허수아비 왕으로 지내며 반란에 시달리다
김지정의 난 때 22살 젊은 나이로 비극적인 죽음을 맞는다. 종 만들기의 거듭되는 실패와 어린아이의 희생이라는 에밀레종 설화에 혜공왕,
만월부인, 김옹 세 사람을 대입하면 혜공왕대의 정치사와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다.어머니를 부르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종소리에서 아련히 들려 일명
‘에밀레종’으로도 불리는 이 종에 정말 아이를 넣었을까?. 성덕 대왕 신종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아름다운 예술품이다.그런데
그 종에 얽힌 얘기는 그다지 아름답지 않습니다. 그런데 성덕 대왕 신종에는 왜 이처럼 슬픈 전설이 담겨 있을까?에밀레종의 전설
속에는 백성들의 고통이 숨겨져 있다.통일 신라 시대의 백성들은 나라에 큰 일이
있을 때마다 큰 공사에 참여해야 했고, 또 집집마다 시주라는 이름으로 물건을 내놓아야 했으며 이야기에서 처럼 내놓을 것이 없을 땐 아기라도
내놓아야 할 정도였던 것이다.성덕 대왕 신종이 만들어진 경덕왕과 혜공왕 시절은 나라가 안정된 때였다.하지만 경덕왕 말기에
이르러 귀족들은 왕권에 반발하기 시작했으며 고민 끝에 경덕왕은 불교의 힘을 빌려 그 위기를 극복하려고 했기에  석굴암, 불국사를 지었고, 또
성덕 대왕 신종까지 만들게 된 것이다.무게가 49만 근에 달했다는 황룡사 종이며, 당나라 황제가 감탄했다는 1만 개의
불상을 모신 만불상도 모두 경덕왕 때에 만들어졌다.이렇게 겉만 보면 경덕왕 때는 신라의 문화 예술이 한창 꽃피던 시기였으며 당시 신라의
경주는 지붕을 전부 기와로 덮을 정도로 생활이 풍족했지만  이러한 부귀영화는 어디까지나 귀족들에게 해당하는 것이었기에 일반 백성들의 삶은 오히려
너무나 비참했다. 어쩌다 한 번 흉년이 들기라도 하면 먹을 것이 없어 자식을 팔거나 그도 안되면 꼼짝없이 굶어 죽어야 할
지경이되었다.아버지가 굶어 오랫동안 굶주여 죽게 되자 자신의 허벅지 살을 베어 대접 했다는 이야기도 다 그때에 나온
것이다. 그렇다면 에밀레종의 전설은 진실일까? 거짓일까? 직접 그 당시에 본
사람도 없고 보았다 하더라도 살아 있는 사람도 없고문헌상의 정확한 기록도 없다.어디까지나 전설은 전설일 뿐….진위여부는 알기가
힘이들것이다.그러나 그러한 전설을 유추해보면 종을 만드는 데 아기를 넣었다는 것이 어디까지나 백성들의 고통을 상징하고 있을
것이라는 설과 다른 편에서는 실제로 아기를 넣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포항산업과학연구원이 국립경주박물관의 의뢰로 최근 실시 한 종
성분분석에 따르면 에밀레종에는 뼈의 주성분을 이루는 인이 검출되지 않았다.포항산업과학연구원 신형기 박사는 13 일 "종 12군데에서 샘플을 채취, 분석시료 안에 1천만분의
1% 이상 들어있는 성분도 조사 가능한 ‘극미량원소분석기’로 분석 한 결과 인은 검출되지 않았다"고 밝혔다.전설처럼 어린아이 를
넣었다는 증거는 나타나지 않은 셈이다. 종의 85%는 구리였으며, 주석이 14%를 차지했다. 신 박사는 그러나 이번 분석결과로 전설이
무조건 근거가 없다고 얘기해서는 곤란하다는 단서도 달았다.  (국립경주박물관에 있는 성덕대왕신종은 남문인 징례문에 걸려있어 매일 시각을
알려주었다)

어린 아기 하나에 들어 있는 인의 성분이 12만
근이나 되는 큰 종에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까?사람의 비중이 구리보다 가벼워서, 사람을 넣었다면 위로 떠서 타기 때문에 ‘쇠찌꺼기’처럼
남는다.만약 제작 당시 이것을 ‘불순물’로 봐 제거했다면, 인이 검출되지 않을 수도 있지 않느냐는 것이다. 학계는 어린아이를
집어넣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데 대체로 의견을 모으고 있다.학자들은 그러나 "종을 만들기 위해 사람 을 집어 넣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당시 신라인들이 ‘피나는’ 노력을 들였다는 점, 그만큼 불심이 깊었다는 것을 반영한 것 아니겠느냐"는 반응이다.아이를 집어
넣었든지 넣지안았든 하여간 신라인들의 대단한 집념과 의지의 산물이라고 볼수 있을것이다.

오히려 에밀레종 전설의 핵심은 종 자체의 소리와 제조 기법의 신비가 아닐까 한다.왜냐하면 현대에
이르러 우리는 에밀레종의 복제품을 두 번이나 만든 적이 있지만, 에밀레종 원래의 그 신비하고 은은한 여운을 재현하는 데에는 완전히 실패했기
때문이다.지금 미국 로스앤젤레스 산 페드로에는 미국 독립 200주년을 기념 하기위해 우리나라가 1976년에
기증한 ‘우정의 종’이 한국식 보신각 건물과 함께 자리 잡고 있는데(영화 ‘유주얼 서스펙트’에 배경으로 잠시 등장하기도
한다),바로 이 종이 에밀레종을 그대로 본 따 만든 것이다. 그리고 현재 서울의 종로 보신각에 걸려있는 종 역시 에밀레종을 그대로
재현하려 한 것이지만, 이 종들은 둘 다 에밀레종이 지니고 있는 본래의 신비한 소리를 전혀 들려주지 못하고 있다.

종소리가 갖는 주파수와 화음 등등 여러 가지 항목을 수치화하여 100점 만점으로 점수를 매겨 보면
현재의 보신각종은 채 60점이 안 된다.(에밀레종의 문양의 탁본 위에 심응섭선생의 글 )하지만 에밀레종은 86점이 넘게
나온다. 이밖에 에밀레종과 마찬가지로 신라시대에 만들어진 상원사 동종은 65점이다. 흥미로운 것은 46톤이라는 어마어마한 크기로 유명한 중국의
영락대종은 40점 대에 머무를 뿐이라는 것이다.

왜 에밀레종의 소리를 재현하는 일은 어려운가?현대 과학은 합금의 성분비와 질량, 무게중심 등등
여러 가지 물리적 특성을 정확히 측정하고 계산해낼 수는 있지만 결국 그것을 그대로 복제해 내는 기술을 밝히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우리는 에밀레종에 바쳐진 20여 년의 세월과 아기 공양 전설까지 낳게 한 옛날 선인들의 정성을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풀어낼
수 있을까?그대 들리는가천년의 소리겨레 가슴으로 빚어세상을
깨우는무궁한 역사의 메아리자유와 정의와사랑으로인류평화를 위한영원한 울림동방의
소리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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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오병 요코이 하사의 28년만의 귀향

낙오병
요코이 하사의 28년만의 귀향

1972년
1월 괌 섬의 탈로포로라는 작은 강에 새우를 잡기위해서

통발을
설치했던 주민 지저스 두에플라스와 마누엘 가르시아는

통발에서
새우들이 없어지는 것을 자주 발견하였다.

괌섬의 탈로포포
강——————————-
그들은 감시하다가 통발에서 새우를 훔치는 괴한을
발견하고

그를
붙잡았다.

나이든
거지꼴의 그 새우 도둑은 저항하다가
상처를 입고 강에서 끌려나왔다.

요코이가 숨어 살던 땅굴- 관광 명소가 되었다.수직으로 1미터를 내려가 다시 2미터의 길이로 옆으로파여
있는 ㄴ자 동굴이다.—————————–
두 사람은 그가 현지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말도 못하고 알아듣지도 못하자 그대로 끌고

지방
경찰서에 데려가 인계했다.

그는
1944년 괌 섬이 미군에 의해 점령당한 후 밀림으로

도망가서
28년간이나 숨어 살던 일본군 하사 요코이

쇼이치[橫井
庄一]이었다.
그는 본국 일본에서 1965년 최종으로 전사처리가 된 사람이었다.

28년만의
컴잉아웃———————–

그와
같이 밀림으로 숨어 들어갔던 일본군은 열명이나

되었지만
다 흩어졌다.

그는
장기간 다른 두 명과 같이 살았지만 요쿄이는 이들과도헤어져 따로 살았다,요코이와
서로 왕래하면서 살던 다른 두 사람은 1964년경 은거지 땅굴에서 사망했다.굶어 죽은 것으로 추측되었다.두사람의
유골은 요코이 생환후에 탐색 조사에 나선괌 경찰이 발견하였다.

요코이만 
그의 끈질긴 생존능력으로 살아남았다.

요코이의 땅굴에서 발견된 살림살이 – 연기에 모두 검게그을려
있다.———————————————
그는 땅굴을 파고 숨어 살면서
밤에만 활동하고 낮에는 잠을 자는
부엉이
생활을 했다. 식량은 앞서 그가 붙잡힌 강에 통발로
잡은
작은 어류와 얻은 과일등으로 충당했다.
옷도 재단공이었던 요코이가 나무 껍질로 직접 짜입었다.그가 컴잉
아웃할때 어머니가 입대할때 만들어준무운장구를 비는 여러사람의 자수가 놓인 복대[센진 바리]와 함께 역시 군에 가지고 들어간
재봉가위가 발견되었다. 그는 이 가위로 옷도 만들고 이발도 했다.

요코이 하사의 옷, 직조, 재단, 재봉등을 자기가 직접했다.나무껍질을 땅에 묻어 썪혀서 줄기를 얻고
다시이를 다듬어 베를 짜기 까지 근 일년이
걸렸다.——————————————-
그런 빈약한 식량 조달로 그가
28년을 살았다는 것은 기적에 가깝다.

요코이의 핸드메이드 살림살이
———————————

그는 양복점을 경영하던 재단사로서 아버지도 재단사였다.

요코이는 1915년
생으로 1937년 군에 징집되어 2년간 수송병으로 군 생활을
하고 1939년 제대했었다.
요코이의 군복차림
———————–
고향에 돌아와 양복점을 개업하고 있다가전황이 급박해지자 1941년
다시 재소집되어


섬으로 보내졌다.
[그가 상병이니 일병이니 하는 글들이 많은데 재소집된 그는 종전시 계급이 오장, 즉 하사였다.나이가
서른이나 되는 재 소집병이 일병일리가 없다.] 

그는
1945년 일본이 항복한 뒤에도 계속 낙오병 역할을 하다가  70년대에 컴잉
아웃했던 세 명의 일본군 귀환자중 최초의 귀환자로서 일본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다른
사람은 1975년에 필리핀에서 귀국했던 오노다 히로오 소위

1980년에
인도네시아에서 발견된 나카무로 데루오등이 있다.

그러나
나카무라는 일본 식민지였던 대만인-원주민 아미족-으로 일본이 아니라 대만으로 귀환하였다.]

요코이는
귀환한 후 수많은 환영인파와 중계 TV를 지켜보는 일본인에게
눈물을
흘리며 살아 돌아와 부끄럽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고
낡은
99식 소총을 천황폐하에게 다시 반납한다는

보고를
해서 또 일본인들을 감동[?]시켰다 .
1972년 대대적인 환영속에 귀국하는 요코이
하사————————————–

그는
귀국 후 고향 아이치 현에 자리를 잡고 장가도 들고

내핍생활에
관한 전문가로 TV에도 자주 나왔었다.

비록
낙선했지만 1974년 참의원 의원 선거에도출마했었다.그가 인기몰이를 하자 그를 깎아내리는 소리들도 나왔었다. 탈영병이었다느니 너무
나댄다느니 하는 이야기지만 하여튼 그는 그런대로 인기를 누렸었다.귀국 뒤
요코이———————————-
그는 1997년 82세의 나이에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고향 나고야에 그의 부인이 지키는 요코이 기념관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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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호의 미 해군 어뢰 공격

한국전
비화

파로호의
미 해군 어뢰 공격

군사무기에
대해서 잘 모르시는 독자 분을 위해서 먼저 어뢰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하고 시작하자.

어뢰는
문자 그대로 물속에서 달리는 폭탄이다.

현대의
유도탄이 공기 속을 날지만 어뢰는 물속에서 적함으로 돌진한다.

생긴
것도 물고기처럼 길고 날렵하게 생겼다.

뒤에
배에 있는 스크류가 붙어있고 추진 제공체로서 전기나 압축공기나 산소 또는 화학
연소제등이 이용된다.

적의
함선에 명중하면 그 곳은 장갑이 얇고 수면 아래이기 때문에


피해를 줄 수 있다.

 어뢰

항공기에서도
적함을 향하여 수면에 투하하기도 한다.


2차 세계 대전때 어뢰는 각 해전에서 대활약을 했었다.

태평양
전쟁의 막을 연 것은 1941년 12월 8일 일본 기동함대에서

발진하여
하와이에 내습한 153기의 최선봉으로 진주만의

진입한
일본 해군의 97식 함상 공격기가 발사한 어뢰였다.

(조종사
모리 지조는 단 18세였지만 800시간이상의 비행시간을 가진

 베테랑
조종사였다.)

그리고
어뢰가 무수히 발사된 산호해 해전,  미드웨이 해전, 

레이테
해전을 거쳐 1945년 4월 오키나와 근해에서 일본 해군이 자살 공격으로 내보낸 세계 최대 전함 야마토의 격침에 어뢰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으로 어뢰로 연 태평양 전쟁의 막을 내렸다.

반대편
대서양에서 어뢰로 끊임없이 연합군 상선단을 괴롭힌 U-boat의
활약은
너무 잘 알려진 것이다.

이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어뢰를 다시 쓸 해전의 기회는 없었다.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미국의 육해공군은 한반도의 전쟁에 개입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중에 미 해군은 어뢰를 사용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적국인
북한이나 중국의 해군력이 너무 빈약해서 어뢰를 발사해서

격침
시킬 전투함이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1951년 한반도 전쟁에서 어뢰를 사용할 기회가 찾아왔다.

무대는
바다가 아니라 한반도 육지 깊숙이 있는 파로호에서였다.

목표
역시 적의 함선이 아닌 파로호에 물을 가두어 놓은 수문이었다.


해군 조종사의 뛰어난 실력과 동원된 스카이레이더의 우수한 성능 때문이었다.

이야기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야기의 흥미를 더하기

위해서
파로호에서 어뢰를 발사한 미 해군의 공격기

스카이레이더(skyraider)에
대해서 잠깐 설명하고 넘어가자

스카이레이더이
공격기는 미 해군이 태평양 전쟁의 여러 해전에서 사용하던

급강하
폭격기 SBD와 뇌격기 TBF를 후속기로 개발해서 1945년

실전
배치한 것이다.


때까지의 두 명 이상이 타던 함상 뇌격기나 함상 폭격기 같지 않게


한사람이 조종하는 혁신적인 디자인이었다.

단발기로서
대형이었으며 엔진 마력만 3,000마력이었다.

유명
전투기인 P-51 무스탕기가 1,600마력 일본의 제로 전투기가

1,200마력인
것과 비교하면 비행기의 크기가 짐작된다.

따라서
폭탄 적재량도 엄청나게 컸다.

스카이레이더를
만든 더글라스 항공기 제작회사 홍보자료는 4발 폭격기
B-17의
적재량과 맞먹는 폭탄을 실을 수가 있다고 했다.

스카이
레이더의 체공 시간이나 항속 거리도 대단히 우수했다.

여기에
더해서 스카이레이더는 대공 포화에도 내구성이 아주 좋았다.

스카이레이더는
그 여러 특성 때문에 갖은 궂은 일을 다했다.

대지,
대함등의 공격에 대 활약을 했는데 한국 전쟁동안

동해안에서
작전하는 미국 항공모함에서 출격하여 북한의

지상
목표들을 공격했다.

유명한
수풍 발전소의 폭격에서 진가를 발휘하기도 했다.

이미
제트기가 실용화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스카이레이더는 한 5년 써
먹으면 퇴역시킬 것으로 생각했었다.

그러나
써보니 일찍 은퇴시키기에 그 성능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그 아들 격인 제트 폭격기 A-4 스카이호크와 함께 같은

항모에서
같이 근무(?)하기도 했다..

한국
전쟁이 끝나고 쌩쌩한 현역으로서 월남전까지 대활약을 했다.

위험한
월맹 폭격은 물론 월남 미군 지원을 위한 대지 공격과  조종사 구출 작전시의 믿음직한 호위기로 다양한 역할을 했다.


공격기는 프로펠러기로서 믿기 어려운 세월인 30년 가까이 미 해군과 공군을 위해서 봉사하고 1972년 은퇴했다.

파로호
공격에 이 스카이레이더와 콜세어 기들이 동원된다.

함상의
스카이레이더- 날개를 접을 수가 있다.1951년 4월22일 팽덕회가 30만 대군을 동원하여

미군과
한국군을 서울 지역에서 쫓아내고

한강
이남까지 석권하기 위해서 유명한 일차 춘계 공세를 벌린다.

그러나
청천강 이북에서 미군을 기습해서 재미를 봤던 팽 덕회는

자신이
큰 자만에 빠져 있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아야 했다.

미군은
질서 있게 퇴각하면서 중공군에 화력을 퍼부어 막대한

출혈을
보게 했다.

더해서
미군은 중공군이 가지고 있던  치명적인 보급의

약점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중국군은
병참시스템이 무척 빈약해서 개인 병사들이 총탄과 식량을

가지고
전투에 돌입해서 5,6일 뒤 이것들을 다 소비해 버리면 후퇴해야 했다.

미군은
닷새간 질서 있게 후퇴하다가 중공군이 공세가 한계에 달했을 때 공세로
나와 중공군을 무섭게 몰아붙였다.

공격을
먼저 시작했던 중공군은 볼품없는 패주를 거듭했다.


와중에 경춘 가도의 중간 지점 한강을 넘어서 진격했던 중공군


180사단은 앞에서는 한국군이 공격해오고 뒤에서는 미군에 의해

퇴로를
차단하여 거의 전멸해버렸다.

그러나
패주하던 중공군들은 파로호 일대에서 방어선을 치고 저항을 했다.

그들은
파로호의 수문을 모두 닫고 물을 저장하기 시작했다.

물이
최고의 수위에 달하면 수문을 열어 한강을 건너는 미군들을 수공(水攻)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한강을
건너 북방에 보급을 해야 하는 미군으로서 이것은 별로

반갑지가
않았다. 힘들게 설치한 부교가 떠내려 가 버릴 수도 있고  주정(舟艇)들의 유실도 있을 수 있었다.

이런
상황이 오래 계속되면 북쪽에 진출한 미군들에 대한 보급이 힘들어지고 이는 작전 차질로 연결될 가능성이 있었다

공중
정찰로 중공군의 의도를 파악한 미군은 B-29폭격기를 동원해서

댐의
파괴를 시도해봤지만 아무런 전과가 없었다.

육군이
댐의 탈취를 위해서 특별 공격대까지 구성해서 공격했으나

중공군의
저항이 기대 이상으로 강했다.

더해서
중공군은 댐 파괴의 항공 공격에 대비해서 댐 위에


돌들을 대량으로 깔아서 보강까지 했다.

고민하던
미 8 군은 이 댐의 파괴를 해군 항공대에게 요청했다.

동해에서
작전하던 미 해군 77기동 부대는 미 8 군으로부터 전문을 받자마자 상황의 심각함을 깨닫고 출격을 서둘렀다.

14;20에
출격 요청을 받았는데 두 시간도 안 된 16;00,

항공모함
프린스턴은 바람머리로 함수를 돌리고 2,000파운드의 대형 폭탄 두 개씩을 가슴에 품은 공격기 스카이레이더 6기와 호위기 콜세어
5 기가 한 번도 가보지도 않은 첩첩 산중 화천의 호수를향하여 이륙하였다.

해군
콜세어 전투기콜세어 기의 임무는 파로호 주변 산악에 빈대처럼 붙어있는 

중공군
대공 포대 제압이었다.

대공
포대 파괴 임무를 띈 콜세어 기는 100파운드와 500파운드

폭탄들을
장비했다.

스카이레이더
공격대 지휘관은 해럴드 구스타프 칼슨 중령,

호위대
콜세어 기의 지휘관은 E.A.파커였다.

파로호의
상공에 도착한 스카이레이더 부대는 목표를 확인하고

이미
짝을 지은 두기씩 짝을 지어 댐으로 급강하했다.

주변의
산악과 중공군의 대공 사격으로 공격 비행은 대단히 어려웠다.

대장
칼슨 중령이 다른 동료기와 선두에서 공격을 선도했다.

댐에
접근해가자 주변 산들은 대 공포화로 휩싸였다.

콜세어는
즉각 확인된 대공 포대들을 폭격해서 삽시간에 침묵시켰다.

스카이레이더기들이
어렵게 공격을 했지만 전과는 실망스러웠다.

댐의
한 복판에 커다란 구덩이를 한 개 만들어놨을 뿐, 정작 파괴 되었어야 했던 수문은 전혀 파괴되지 않았다.

단지
여러 사람이 자살 공격이 될 것이라고 까지 걱정했던 이번 힘든 출격에서 여러 기가 피탄 되었지만 기체 손실이 없었던 것이 큰
수확이었다.

출격
했던 공격대가 귀환 한 뒤 함내는 무거운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러나
육군이 힘든 전투를 하고 있는 전황에서 해군에게

특별히
요청한 이 댐의 파괴는 기필코 달성해야만 했었다.

공격
후 열린 브리핑과 회의에서 댐의 파괴를 위한 열 띈 토론이 나왔다.

여러
의견과 검토가 있었지만 마땅한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기발한 아이디어를 제시했다.

바다에서
사용하는 어뢰로 파로호의 수문을  파괴해보자는

의견이었다.


것은 정말 괜찮아 보이는 아이디어였다.

어뢰라면
수문을 파괴할 정확성과 파괴력을 가진 것이었다.

항공모함
프린스턴이 미국 태평양 시애틀 부근

브레머튼
군항에서 출항하기 전 푸젯 사운드의 해군 공창에서

이차세계
대전 때 쓰던 Mk-13어뢰 재고품 여덟 발을 넘겨받아

적재하고
한국 동해로 왔었다.

어뢰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는 1943년 영국 공군이 독일 루르 공업지대의

전력을
공급하던 저수지 댐들을 랭카스터 폭격기 19기를 동원해서

어뢰보다
더 기발한 폭탄, 물 위를 돌로 수제비 뜨듯이 징검다리처럼

뛰어서
댐에 부딪혀 폭발하게 하는 대형 폭탄을 투하하여 파괴한 전사가 있었던 만큼 모두 찬성했다.

그날
밤새도록 항모의 함상 정비 근무자들은 스카이레이더와 콜세어들의  대공 포화로 파괴된 부분을 수리하느라고 바빴다.

수리가
끝난 공격기들에게는 무기고의 맨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 쓴

여덟
발의 어뢰가 운반 되어 와 장착되었다.

항모
프린스턴이 한국에 배치되기 전 조종사들은 대함(對艦)

어뢰
공격을 높은 강도로 훈련했었다.

공격
편대의 스카이레이더 조종사중 세 명이 그 훈련을 받았었다.

그런
조종사중 한 명이었던 로버트 베닛 중위는 훗날 훈련을

강하게
받아서 어뢰 공격에는 어느 정도 자신이 있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나
공격대의 나머지 다섯 명은 그런 훈련을 받은 일이 없었기에 어뢰라는
것은 상당히 생소한 물건이었다.

어뢰
공격에 자신 있었다는 로버트 베닛 중위도 사실은 최초로 본 어뢰는 그날 무기고에서 꺼내어온 어뢰였다.

함장은
심사숙고 끝에 이미 어뢰 공격 교육을 받은 다른 편대의 조종사


명이 이번 어뢰 공격에 참가시키기로 하였다.

아더
크랩 대위, 프랭크 멧저 대위, 에디슨 잉글리쉬 대위 등이다.

어뢰
공격에도 다른 공격기들이 상공에서 선회하며 대기하고 두 기가

수평
편대를 만들어 공격하는 전날을 방법을 택하기로 하였다.

파로호
댐에 대한 어뢰 공격은 무척 힘든 과제였다.

댐을
둘러싼 해발 천 미터에 가까운 산들이 큰 장애물이었다.

어뢰를
투하하는 각도와 속도도 중요했다.

더구나
진입로에서 탈출로 주변에 산악에 즐비하게 대기하고 있는

중공군
대공 포대들도 문제였다.

어뢰
발사가 성공하려면 이런 요소에 더해서 파로호의

좁은
수면과 얕은 수심도 또 다른 제한요소였다.

이런
한계점을 극복하고 어뢰가 제대로 작동하게 투하하는 것은

강한
정신력과 기술을 요하는 것이었다.

공격에
참가했던 로버트 배닛은 만년에 찾아 간 기자에게 이렇게 회고 했다.

“어뢰는
참 민감한 물건이었지요. 너무 높은 고도에서 발사하면 물속으로 머리를 박고 해저로 수직 돌진 해 버리고 너무 낮은 고도에서 투하하면
수면에서
튀어 버리기도 했었고—-.

그리고
조준도 중요하고 어뢰를 발사하는 항공기의 속도를 최대한 줄이는 것도 중요했어요.”                 ‘

항모가
가진 어뢰는 여덟 발이 전부였다.

1951년
아침 일찍 새로운 지휘관인 메릭 대령이 인도하여 11기의 스카이레이더와 호위기인 11기의 콜세어가 프린스턴을 이륙했다.

동해
바다를 지나서 한반도 백두대간을 가로질러서 파로호에

도착
한 시각이 오전 11시 30분이었다.

뜻밖에도
중공군의 대공 포화는 없었다.

선두
두 기의 스카이레이더들은 한 치의 주저도 없이 그대로

코스를
잡고 공격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중공군의 대공 포화가 늦장 포문을 열었다.

중공군은
미 해군기가 그렇게 빨리 돌아 올 줄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콜세어들이
대공 포대를 찾아내서 폭격을 하는 동안 스카이레이더들은 두기씩 짝을 이루어 호수 면을 스칠 듯이 낮게 고도를 잡고

스피드를
낮추었다.

 
해군 콜세어 전투기 공격기의 속도가 발사될 어뢰의 속도보다 빠르면 안 되었다.

그런
낮은 고도에 낮은 속도로 비행하는 것은 무척 힘든 노릇이었다.

더구나
콜세어들의 공격에도 불구하고 마구 쏟아지는 대공 포화 아래서

위와
같이 위험한 비행을 하는 것은 강철 같은 신경을 필요로 했다.

선도기의
크랩 대위와 잉글리쉬 대위가 발사한 어뢰들은 투하된 뒤중간쯤 달리다가 방향을 바꾸어서 엉뚱한 곳으로 돌진해서
폭파하고말았다

다행이도
나머지 여섯 개의 어뢰를 잘 작동이 되었다.

투하된
어뢰들은 잠시 수면 아래로 잠깐 모습을 감추었다가 곧 다시나타나 긴 항적(航跡)을 끌고 댐의 수문을 향하여 돌진했다.

수면에
바짝 붙어서 어뢰를 발사한 공격기들은 금방 바로 조종사 시야를 꽉
채우고 나타난 댐을 기어오르듯이 급상승해서 이탈했다.

어뢰들은
목표에 명중했다

주변의
산들을 뒤흔드는 거대한 폭음이

화천호를
뒤 덮었고 폭발이 만든 충격은 호수 면에 커다란 파도를

일으켜
호수 전체가 일렁이게 했다.

중앙
수문은 완전히 파괴되어 두 쪽이 나버렸다.


번째 수문은 직경이 3미터가 넘는 구멍을 만들었다.


해서 수문을 달고 있던 시멘트 지주 하나가

어뢰에
맞아서 완전하게 파괴되었다.

폭격을
끝낸 조종사들은 어마어마한 물줄기가 부서진 수문에서

흘러나와
댐 아래 계류를 넘치며 흘러 내려가는 장관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항모 프린스턴으로 돌아와서 오래 간만에 편한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중공군은
파로호를 미군과의 전투에서 이용해 볼 계획을 일찌감치 포기해야 했다.

세월이
흘렀다.

두어
달 전 나는 파로에 가보았다.

댐의
상류지점에 있는 민물 생선 매운탕 전문 식당들이 몰려있는 화천 호반에서 멀리 보이는 화천 수문과 댐,그리고 주변을 병풍처럼 첩첩히 둘러싼 지형을
보니 57년 전 이곳에서 어뢰 공격이 있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가 않았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그 곳은 마치 큰 찻잔 속 같았다.

찻잔의
가장자리에서 찻잔의 벽을 타고 내려가 좁은 찻잔 바닥에서

어뢰를
발사하고 다시 반대편 찻잔의 벽을 타고 올라가는 것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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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로호
지형 -안개로 댐의 촬영은 실패했고 파로호 공격 지점의                      2-3키로  상류쪽임 . 묘사한대로 수면이
찻잔 바닥                    과 같이 보인다.북한강은 유유히 흘러오다가 오른 쪽으로 구비 친 곳을
댐으로 막았다.

그래서
어뢰를 투하하기 위해서 공격기가 수면을 달려야 할 직선 거리는 극히
짧았다.

더구나
공격기는 매운탕 촌 뒤의 산을 타고

내려오다시피
해서 수면에 붙고 불과 몇 초안에 그 까다로운 어뢰를 위한 고도와
속도 각도 등을 계산해서 어뢰를 투하한 뒤 댐 위에서 급상승해야 했다.

나는
어뢰라는 것은 적 함대를 공격할 때 저공으로 수 십 킬로를 전방부터 수면에 완전히 붙은 저공으로 접근해서 어뢰를 투하하고 역시 저공으로
탈출하는
것으로 알았었다.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고 단 이틀 뒤 말레이 해역에서 영국 전함 프린스 어브 웨일스와 리펄스를 공격한 일본 해군 항공대의 쌍발 폭격기대도

이렇게
해면에 붙어서 접근했었고

미드웨이
해전에서 일본 항모부대에 저공으로 접근하다가 일본 제로기와 대공 포화로 전멸해버린 미 해군TBD 뇌격기 부대도 이렇게
해면을
달려서 접근했었다.

그러나
화천댐 공격대는 그런 전형적인 바다의 어뢰 공격

방법을
쓸 수가 없었던 것이다.

독일
급강하 폭격기 스투카가 하듯이 어뢰를 투하 하고

다시
급상승했던 것이다.

해전
사에 보기 힘든 특이한 어뢰 공격이었다.

나는
화천의 현장을 보고나서야 소문난 미군 해군의 조종 솜씨를

실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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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천
발전소하지만 이 기이한 어뢰 공격을 성공시킨 배후에는 미 해군 조종사의

솜씨만
있었던 것이 아니었다.

급강하와
급상승이 자유롭고 어뢰 발사 속도에 맞추어서

저공
저속으로 비행할 수 있는 해군 공격기로  디자인 된 스카이레이더의 뛰어난
성능이  덧 붙여져서 이런 대단한 전과를 가져 왔던 것이다.

한국전쟁동안
어뢰는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파로호에서
사용된 어뢰 공격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리고
이 공격은 세계 전사에 어뢰가 육지에서 사용된 진기록을 남긴 것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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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학력 12년' 시의원, 그냥 시의회 의장 될 듯"

[아시아경제 김봉수 기자] 기초의원 시절 12년간 가짜 학력을 사용해 물의를 빚고 있는 류수용 민주당 인천시의회 의장 내정자가 ‘무사히’ 의장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동료 민주당
인천시의원들과 인천시당 등이 신임 의장 내정자의 치명적인 도덕적 흠결이 발견됐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도덕성과 참신성을 바탕으로 시민으로부터 사랑받는 시의회를 만들겠다"는 초심을 벌써부터 잊은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이와 관련 민주당 인천시의원들은 지난 2일 오후 모임을 갖고 언론 보도를 통해 불거진 류 내정자의 기초의원 시절 가짜 학력 사용
사실에 대해 논의했다.지난달 30일 아시아경제 온라인판 최초 보도에 의해 류 내정자가 기초의원 시절인 제1,2,3회 지방선거 당시 인하대학원 재학, 서산농림고 등의 학력을 기재했지만 모두 허위 학력으로 밝혀졌기
때문이다.이에 대해 인천 지역 대표 시민단체 중 하나인 ‘평화와참여로가는인천연대’가 지난 1일 성명을 내 "도덕성에 치명적인
흠결이 있는 류 내정자는 자진 사퇴하라"고 촉구하는 등 인천 지역 시민단체들이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이날 회의에서
별다른 조치를 결의하지 않은 채 류 당선자의 해명만 듣고 회의를 끝낸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 시의원들이 "류 내정자가 스스로
거취를 표명해야 한다"고 요구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시의원들이 "의장 후보 경선 과정과 지방선거 도중에 이미 일부 알려졌던 사실인데다 마땅한
대안도 없는 만큼 그냥 넘어가자"는 쪽으로 의견을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민주당 인천시당 쪽도 류 내정자의 개인적인 유감 표시
성명만 발표하는 것으로 사태가 마무리되길 바라는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류 내정자는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오는 6일 개회되는
제6대 인천시의회 첫 정기회 본회의에서 인천시의회를 대표하는 의장으로 선출될 전망이다. 인천시의회 의장은 인천 지역에서 ’7대
기관장’ 중 하나로 꼽히는 요직으로, 인천시에선 송영길 인천시장 다음으로 권위를 인정받는 자리다.하지만 시민사회에선 새로 들어선 제6대
인천시의회에 대한 실망감이 커지고 있다. 33명의 시의원 중 23명의 압도적 다수를 차지한 민주당 인천시의원들은 ‘도덕성·참신성’
등을 무기로 들고 나와 인천시민들에게 선택을 받았었기 때문이다. 특히 민주당 인천시의원들 중 대다수가 류 내정자의 기초의원 시절
가짜 학력 사용 사실을 이미 알고도 의장 후보로 선출한 것으로 전해져 파문이 확산될 전망이다.민주당 인천시의원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류 내정자를 의장 후보로 선출한 것은 계파·정치 논리를 의장 후보 내정자의 도덕성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인천 부평구 정 모(38)씨는 "초선 의원들이 대부분인데 벌써부터 계파 싸움에 익숙한 걸 보니 이번 시의회도 별로
기대할 게 없는 것 같다"며 "어떻게 정치인들은 당선만 되면 시민들이 보는 시각은 무시하고 정당, 정치 논리만 우선시하는 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관련기사]☞ ‘허위학력’ 인천시의회 의장 내정자 거취 ‘주목’☞ 인천연대, ‘허위 학력’ 인천시의회
의장 내정자 사퇴 촉구☞ 허위학력으로 기초의원 3선한 사람이 광역의회 의장?☞ [단독] 인천시의회 신임 의장 내정자 허위 학력
기재 드러나☞ 제6대 인천시의회 의장에 류수용 당선자 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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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 영향력1위, 신뢰도 4위…박근혜 신뢰도 1위, 영향력 4위”

[중앙일보]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국민은 현재 정치적 영향력이 가장 큰 정치인으로 이명박 대통령을, 가장 신뢰하는 정치인으로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와 김문수 경기지사를 동시에 꼽았다. 이 대통령의 신뢰도는 오세훈 서울시장에 이어 4위에 그쳤다. 박 전 대표의 정치적 영향력은 김 지사·오 시장에 이어
4위였다.중앙SUNDAY가 동아시아연구원(EAI)·한국리서치와 공동으로 ‘2010 파워 정치인 영향력·신뢰도 평가’를 했다.
2007년과 2009년에 이은 세 번째 조사다. 지난달 29일 전국의 성인 남녀 8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조사했다.이 대통령과
차기 대권주자로 거론되는 주요 정치인 12명에 대해 물은 이번 조사는 한국의 정치 리더십 지형이 어떻게 변화했는지 알아보기 위한 것이다. 이들
중 이 대통령, 박 전 대표, 이회창 자유선진당 대표, 정몽준 한나라당 전 대표, 정세균 민주당 대표, 유시민보건복지부 장관, 정동영 의원 등 7명은 2009년 7월 조사에도 포함된 인물이다.영향력과 신뢰도를 ‘전혀
없다(0점)’에서 ‘매우 높다(10점)’ 사이 점수로 측정한 조사에서 이 대통령은 세 차례 조사 내내 영향력 1위를 지켰지만 신뢰도는
1위→3위→4위로 떨어졌다. 박 전 대표의 영향력도 2위→2위→4위가 됐다. 처음으로 조사 대상에 포함된 오세훈 시장, 김문수 지사의 약진도 주목할 만하다. 오 시장은 영향력 5.79점, 신뢰도 5.25점을, 김
지사는 각각 5.82점, 5.40점을 기록해 상위에 랭크됐다. 두 사람 모두 보수 성향의 한나라당 지지층에서 높은 점수를 받았다. 하지만
이들보다 영향력에서 뒤진 박 전 대표는 중도층에서 우위를 보였다. 세종시 문제로 대통령과 대립하면서 한나라당 지지층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한 반면 중도층이나 반대파의 평가는 개선됐기 때문으로 보인다.6·2 지방선거 패배를 책임지고 물러난 정몽준 전 대표는 영향력
9위(4.35점), 신뢰도 10위(4.15점), 세종시 수정법안 통과에 실패한 정운찬 총리는 영향력 5위(4.67점), 신뢰도
9위(4.29점)를 기록했다.선두그룹은 한나라당 소속 정치인이 채웠지만 중간그룹에서 야권의 상승세가 두드러진다. 영향력에서 정세균
대표가 6위(4.61점), 한명숙 전 총리가 7위(4.58점), 유시민 전 장관이 8위(4.55)였다. 신뢰도에선 유 전 장관이
5위(4.63점)로 올라섰고 한 전 총리가 6위 (4.50점), 정 대표가 7위(4.37점)였다. 이들은 2007년, 2009년엔
3점대였다.반면 정동영 의원(영향력 3.74점-12위, 신뢰도 3.81점-12위), 이회창 대표(영향력 3.91점-11위, 신뢰도
3.92점-11위)는 하위권에 머물렀다.이번 조사에선 “차세대 대권 주자감은 누구인지”도 물었다. “없다”(21.9%)와 “잘
모르겠다”(33.3%)는 응답이 절반을 넘었다. 나머지는 김두관 경남지사(15.0%), 안희정 충남지사(12.9%), 나경원 한나라당
의원(12.0%), 원희룡 한나라당 의원(11.5%) 순으로 답했다.정한울 ·정원칠 EAI여론분석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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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섹스가 아르헨티나-브라질 축구를 망쳤다"

게임 초반부터 독일은 힘이 펄펄 났다. 반면 아르헨티나는 ‘전차군단’의 힘에 밀려서인지 다리가 풀렸다. 누가 봐도 아르헨티나는 헉헉대는
모습이 역력했다.

3일(현지시간) 남아프리카공화국 그린포인트 스타디움에서 열린 월드컵 8강전에서 독일은 소나기 골을 퍼부어 아르헨티나에 4-0 압승을
거뒀다.

골은 예상보다 훨씬 빨리 터졌다. 전반 3분 토마스 뮐러의 헤딩 한 방으로 독일은 아르헨티나의 수비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이후 아르헨티나는
맹공을 퍼부었지만 독일의 견고한 수비에 걸려 결정적인 득점 찬스를 만들어내지 못했다. 아르헨티나의 수비는 독일의 빠른 공격에 속수무책, 그대로
당했다. 힘이 부쳤기 때문이다.

리오넬 메시를 비롯해 세계적인 선수들을 보유한 아르헨티나가 왜 이처럼 허무하게 당했을까. 팬들이 지적한 가장 큰 패인은 섹스다.

아르헨티나는 월드컵 개막 1주일을 앞두고 선수들의 섹스를 무제한 허용했다. 월드컵 참가국 중 처음으로 ‘프리 섹스’를 선언한 것. 선수들의
사기를 올려준다며 섹스를 허용했지만 결과는 무참했다. 독일과의 8강전에서 아르헨티나는 특히 수비선수들이 다리가 풀려 독일 공격진을 놓치기
일쑤였다. 개인기는 독일에 앞섰지만 지난 밤 과도한 성행위 탓인지 헉헉 댔다. 브라질도 마찬가지다. 강력한 우승후보가 네덜란드에 덜미를 잡혀
역전패의 수모를 당했다.

브라질도 아르헨티나가 섹스를 허용하자 뒤를 따랐다. 남미의 두 최강팀은 아내와 여자친구들을 데리고 남아공에 입성, 체력이 뚝 떨어지게 된
것이다. 월드컵 관계자들은 아르헨티나와 브라질의 탈락으로 앞으로 대부분의 국가들이 월드컵 기간 중 선수들에 철저한 금욕령을 내릴 것으로
내다봤다. 섹스가 브라질과 아르헨티나의 축구를 망쳤다고 믿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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