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급히 걸어가는 한 여인이 있었다. 누군가 쫓아오기라도 하는 듯 그녀의 걸음은 매우 빨랐다. 갸름한 얼굴선에 또렷한 이목구비. 한 듯 안한 듯한 옅은 화장. 깊은 눈동자를 지닌 그녀의 외모는 지나가는 남자들이 힐끔힐끔 쳐다보게끔 만들었다. 단지 아쉬운 것은 허름한 옷, 여인의 허름한 옷차림은 다른 의미로 사람들의 눈을 끌었다. 그녀의 차림 중에서 봐줄만 한 것은 목에 걸친 진달래 빛 스카프뿐이었다. 그렇게 지나가는 곳 마다 여러 사람들의 눈길을 모으는 재주를 가진 그녀였지만 정작 본인은 사람들의 눈은 전혀 개의치 않는 듯 그저 걸음을 재촉할 뿐이었다. 하늘의 장난이었을까? 그러다 돌연, 도시에서 찾기 힘든 강풍이 일순 그녀의 스카프 풀어 제쳤다.
“아……”
그녀의 짧은 탄성이 마치 바람을 성나게라도 한 듯, 진달래 빛 스카프는 바람을 타고 점점 하늘 위로 날다가 어느 백화점 높은 깃대 위에 살짝 걸쳤다. 눈살을 찌푸려야 겨우 보일까 말까 할 정도로 멀어진 스카프. 더군다나 고개를 한참이나 젖혀 들어야 했던 그 백화점은 감히 그녀의 허름한 복장으로는 입구조차 다가가기 힘들 것 같은 그런 곳이었다. 그녀는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았다. 작년 이맘때 쯤. 돌아가신 어머니에게서 물려주신 하나 남은 유산과도 같은 소중한 스카프였다. 자신의 변덕이 아니었다면 여전히 장롱 속 보자기 안에서 머물러 있었을 그런 물건이었다. 괜히 마음이 들떠 스카프를 하고 온 것 같아 왈칵 눈물이 쏟아지려 했지만 굳은 자존심에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스카프부터 찾아야 했다.
“여기는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돌아가십시오.”
차가운 표정의 경비원이 그녀를 막았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오리라. 똑바로 쏘아보는 그 남자의 표정이 무서웠지만 그보다는 어머니의 마지막 선물이 더 소중했다. 그녀의 유일한 보물. 진달래 빛 스카프.
“부탁이에요. 어머니에게서 받은 유품인 스카프가 이 건물 꼭대기로 날아가 버렸어요. 제발 들어가게 해주세요. 스카프만 가지고 나올게요. 네? 부탁드려요. 제발요.”
“그거야 내 알 바 아니고. 이곳은 회원인 사람만 출입이 가능합니다. 험한 꼴 보기 전에 돌아가요.”
경비원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그만큼 이 건물이 대단한 사람만 들어갈 수 있는 걸까? “그럼 올라가셔서 스카프만 가져다주세요. 네? 제발요.”
“아니 그럼 여기는 누가 지킵니까. 아가씨. 사정 딱한 건 알겠는데,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정 뭐하면 나 퇴근할 때가지 기다리시던가.”
‘안 돼. 시간이 없어.’ 다급함과 막막함이 밀려들자 그녀는 왈칵 눈물을 쏟아냈다. 운다고 해결되는 일은 아무것도 없겠지만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무너져 내리듯 주저앉은 그녀는 이내 곧 어깨를 들썩거리며 울었다. 그녀의 주위는 그녀를 지켜보던 사람들로 이내 곧 가득 찼다. 얼굴을 살짝 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외모에 충분한 자신감이 있었다. 모여든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고 곧 하나 둘씩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아가씨, 왜 그래요?”
모여 있던 사람들은 그녀와 건물에 걸린 스카프를 번갈아 가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스카프가 바람에 때문에 건물 깃대에 걸려버렸어요. 정말 소중한건데 저는 건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해서……. 흑흑……” “아가씨, 제가 당신의 스카프를 가져다주겠습니다!”
여자는 울면서 곁눈질로 자신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그 남자를 보았다. 아무리 관대하게 봐도 평균이라고 하기도 힘든 얼굴,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제가 저 건물 벽을 타고서라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또 다른 남자가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곱상하게 생긴 외모였지만 그저 그런 옷차림을 한 남자였다. 말도 안 되는 농담까지 던지는 남자를 보며 그녀는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내가 겨우 이정도 밖에 안 되는 걸까? 두 번째 남자의 도움도 거절한 그녀는 계속 울면서 주위를 살폈다. 자신을 도와줄 사람을 찾기 위해. 그 때 모여 있던 사람들 뒤로 고급차 한 대가 섰다. 차에서 내린 사람은 정말 못생기고 키도 작았지만 온갖 명품을 두르고 있었다. 그녀는 그 남자를 못 본 척 계속 울었다. 그 남자는 모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도 무신경하게 지나쳐 건물 안으로 걸어갈 뿐이었다. 사람들에게 둘러 쌓여 하염없이 눈물 흘리던 그녀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그 남자 앞으로 달려갔다. 그녀는 눈물에 젖은 눈동자를 반짝이며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 남자는 자신의 앞길을 막은 무례한 아가씨를 바라보았다. 충분히 예쁜 얼굴을 가진 아가씨였다.
“왜 그러시죠?”
“저기요…… 죄송하지만 부탁 좀 드려도 될까요?”
“뭐죠?”
“제 스카프가 이 건물 위로 날아갔는데 들어가지 못하고 있어요. 정말 중요한건데……”
남자는 기가 찬 표정으로 여자를 바라보았다. 이게 믿으라는 말인가? 하지만 그는 굳이 따지지 않았다. 예쁘니까.
“저랑 같이 들어가시지요.”
남자는 그녀의 어깨를 감싸며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얼음장 같던 경비원이 허리를 90도 굽히며 인사를 올렸다. 순간 스카프를 찾을 수 있다는 희망에 상기되어있던 여자의 눈빛이 빛나는 걸 남자는 놓치지 않았다. 건물에 들어 선 남자는 집적 스카프를 찾으러 가지도 않았다. 그는 안내데스크 직원에게 명령하였고 그녀가 애태운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스카프는 너무 쉽게 다시 그녀의 손으로 돌아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예쁜 스카프네요. 괜찮으시면 얘기 좀 하다 가시겠어요?”
그녀의 얼굴에 수줍은 표정이 떠올랐다.
“네. 괜찮습니다.”
“저는 왕용입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수로. 김수로입니다.”
“수로 양.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선물 하나 드리고 싶군요. 괜찮으시죠?”
왕용은 수로와 함께 건물 안의 명품 매장으로 갔다. 스카프 코너에 진열되어있는 화려한 스카프들을 보며 수로는 방금 되찾은 스카프를 황급히 주머니에 숨겼다.
“오늘 스카프 때문에 고생하셨으니 선물을 스카프로 선물로 드리고 싶군요. 아름다운 사람은 아름다운 것들이 필요하지요.”
수로는 기쁘게 그의 선물을 받아들였다. 왕용은 그 후에도 수로와 함께 이 매장 저 매장을 돌아다니며 명품 옷과 보석들로 그녀를 꾸며 주었다. 아까까지 발길을 재촉하게 만든 오늘의 약속을 까맣게 잊은 채 어느새 수로는 왕용과 식사를 함께 하게 되었다. 그렇게 잠시만이라던 얘기는 밤을 넘어갔고 하루, 이틀, 수로는 왕용의 백화점에 VIP 룸에 머물렀다. 그동안 왕용은 수도 없이 많은 것을 그녀에게 선물해주었고 그로 인해 수로는 마치 천국에 온 듯한 느낌을 받으며 사치를 누렸다. 시간이 흘러 왕용과 함께 전에 없던 고급스러운 생활을 보낸 지도 어느새 한 달이 지났다. 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며 예전의 초라한 옷을 입고 다녀야 했던 과거는 모두 잊었다. 그러던 어느 날, 며칠간 얼굴 보기가 힘들던 왕용이 그녀의 방에 찾아왔다. 여느 때와 같이 진한 화장과 명품들로 한껏 치장한 수로는 반갑게 그를 맞이했다.
“왕용. 왜 이렇게 오랜만에 왔어?”
수로는 한껏 교태를 부리며 왕용을 맞이했지만 어쩐지 그의 반응은 시큰둥할 뿐이었다.
“수로. 이제 그만 너희 집으로 가라.”
청청 벽력같은 왕용의 말에 그녀는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왜?! 난 당신 여자잖아!?”
“내 여자? 내 여자 정도 되려면 집안부터 잘 타고 났었어야지. 예쁘장해서 좀 데리고 있었을 뿐이야. 내 주위 여자들과 달리 넌 좀 산뜻했거든. 그런데 너도 이제 별로 다를 바가 없어졌어. 너도 어쩔 수 없는 여자였다 이거지. 이제 이 방은 너보다 더 예쁘고 어린 사람이 쓸 거야. 오늘 중으로 방 빼.”
“뭐?! 말도 안 돼! 내가 왜! 안 돼. 제발. 이러지마.”
그녀는 왕용을 힘껏 끌어안았지만 왕용은 강하게 수로를 밀쳐 바닥에 내팽개쳤다.
“구질구질하게 놀고 있네. 빨리 꺼져.”
왕용은 경비원을 불렀다. 지난 한 달간 자신에게 굽실거리던 경비원은 다시 얼음장 같은 예전의 그 모습으로 그녀를 끌어냈다. 백화점 밖으로 내쫓긴 수로는 망연자실하게 건물 앞에 주저앉았다. 그런 그녀 앞에 경비원은 뭔가를 던졌다.
“예전에 내가 퇴근하면 찾아준다고 했지. 사장님께서 가져가라고 하시더라. 우리 백화점 질 떨어진다고.”
경비원이 던진 것은 진달래 빛 스카프였다. 그녀는 스카프를 가슴에 끌어안았다. 하지만 전처럼 소중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스카프와 함께 백화점 앞에 주저앉던 그녀는 해가 지고 백화점 문이 닫힐 때 쯤 부스스 일어났다. 그리고 초췌해진 얼굴을 들어 경비원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나지막이 말했다.
“부셔 버릴 거야.”
그리고 어둠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수로의 복수 중편으로 이어집니다)
고전문학의 이해. 고전의 재해석. 수로부인 과제 하나 완성한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