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대의 광화문 사거리

 

광화문 네거리,

 

광화문 광장이라는 표현보다는 더 익숙합니다.

최근 서울시는 광화문 광장을 복원하겠다고 수 백억원의 예산을 투입해서 대대적인 공사를 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근사한 작품이 나올 지는 모르겠지만, 그만큼 정치와 문화의 중심지로 광화문이 갖는 상징성이 대단하다는 뜻 같습니다.

 

실제 한 인터넷 언론사 대표는

"광화문 근처를 버리고 상암동으로 이전을 결정한 것을 후회한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올 여름 촛불 시위를 보고 광화문 거리의 무거움을 다시금 깨달았다는 얘기였습니다.

 

이순신 장군 동상, 교보문고 빌딩, 동아일보사…

 

광화문을 상징하는 건물들은 적지 않지요. 그런데 ”광화문 네거리”란 권력이 자리한 것을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닙니다.

임진왜란 이후엔 조선 임금이 거처하는 곳이 창경궁이었던 탓에

고종이 광화문을 복원한 이후에야 비로소 광화문 앞이 권력의 길로 자리매김 할 수 있었던 것이죠.

이후 조선총독부가 광화문을 밀어 내고 들어 앉으면서, 근대 이후에 그 경향이 더두드러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1950년대 후반의 광화문 네거리 사진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김한용 선생님은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고집스럽게 기록용 사진을 많이 찍으셨습니다. 이런 구도의 사진을 찍기 위해서는 건물 옥상으로 올라가서 셔터를 눌러야 했을 텐데요. 비싼 필름을 사용해야 했는데, 이런 사진은 대상이 명확치 않기 때문에 기록용으로 보입니다. 정말 웬만한 언론사도 이런 사진을 소장하기는 쉽지 않은데 말입니다.)

 

 

 

전철이 느긋하게 광화문 네거리를 오다니던 1950년대 후반의 모습. 놀랍게도 지금은 상업지대인 곳이 대부분 공원으로 이뤄져 있습니다. 저 사진 가운데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미국 대사관/ 문화체육관광부가 유이합니다. 

 

 

사진을 조금 확대해 봤습니다. 각종 식당과 상업 빌딩으로 들어찬 저 광화문 모퉁이가 평화로운 공원이었습니다.

냉면과 불고기 간판이 인상적입니다. 행인들이 정장을 차려 입고 있는 모습도 보이네요.  

 

 

저 전철은 청와대 쪽에서 내려오는 2번 전철인가 될 것입니다. 나중에 40~60년대 서울시내 전철도를 찾아놓겠습니다.

한-미-일 프로레스링 대회”라는 입간판도 눈에 띕니다. 아마도 일본에서 인기있던 프로레스링 영향 때문이겠죠.

 

 

 그리고 언제나 옛날 사진에 등장하는 조선총독부(옛 국립중앙박물관) 모습입니다.

 

저는 1993년도에 본격적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했는데, 당시에 이 건물을 보고 깜짝 놀랬던 기억이 있습니다. 물론 박물관 내부를 세심하게 돌아다녔던 기억도 있습니다. 이 건물의 해체 결정에 살짝 흔들리기도 했지만 이 보다 더 근사한 광화문이 새로 탄생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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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는 소방서의 원형(原形), 경성소방서

겨울이 되면 바빠지는 관공서가 있다.  바로

소방서다.

 

”소방서”라고 하면 생각나는 이미지란 긴급출동 119, 높은 망루, 붉은색 트럭(?), 사다리차, 그리고 강철같은 체력과 희생정신을 지닌 용감한 소방관 등이다. 특히 제 목숨을 바쳐 시민을 구하는 소방관은 매년 미담을 장식하는 소재이기도 하다. 소방서에 대한 좋은 인상이 고착화된 데는 초등학교 시절 소방차 그리기 대회나, 소방서 견학 등의 치밀한 대국민 홍보가 자리매김한 탓이 크다.

 

언젠가 소방관에게 그 이유를 물었던 적이 있다.

 

"왜 소방관은 다른 공무원들과 조금 달라 보이죠?"(정호재)

 

"글쎄요. 아주 여러 이유가 있는데, 내 생각은 소방서의 역사가 ”

관(官)”이면서도 관에서 독립해온

역사이기 때문에 그런듯 해요."

 

한 노(老) 소방관의 입에서 들은 이 말을 그 때는 잘 알아채지 못했다. 사실 소방서나 소방관의 역사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사진관의 한 구석에서 찾아낸 이 한장의 사진은 우리나라 근대 소방의 뿌리를 조용하게 웅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는 소방의 역사에 대해서 찬찬히 공부할 기회를 얻게 됐다.   

 

 

1936년에 건축돼 1978년 태평로 확장공사 때 사라진 우리나라 근대 소방의 뿌리인 경성소방서(옛 중부소방서) 전경. 이 정도로 선명한 사진이 인터넷에 공개 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1959년 촬영(추정)

 

우리나라 소방의 뿌리는 조선시대 세종대왕이 설치했다는

”금화도감”으로 거스러 올라갈 수 있다. 하지만 그 조직이 어떤 식으로 운영됐는지 자세한 기록은 남겨져 있지 않다. 때문에 1925년 4월1일에 세워진 경성 소방서를 근대 소방서의 원조라고 말할 수 가 있다. 물론 그 이전에도 소방조직이나 소방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단다. 특히 소방의 체계를 갖춘 일본 등 외세의 관심에 따라 소방 조직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한다.

 

일본의 지배가 시작된 직후 본격적으로 일본총독부의 소방조직을 정비가 시작됐는데

 

1911.7월 경성소방조를 조직하여 남산순소로

1915.3월 소방 사무를 소방청에서 경기도 경찰부로 이관

1922       남대문 소방서를 경성소방서로

1925. 4월 조선총독부 관제 개정에 따라 경성소방서가 생겼다는 것이다.

(출처: 물총의 한국소방역사)

 

이 말발굽 모양의 6층 망루를 지닌 경성소방서가 세워진 것은 1936년 12월이다. 일제의 조선 지배가 절정에 달했을 때다. 애당초 선혜창이 있던 자레에서 세워진 경성소방서는 1937년 당시 태평통 일정목이라 불리는, 현재는

동아일보사 건너편 광화문 파이낸스 빌딩 앞 길 자리,

지상 8층 지하 1층 대형물에 입게

 

당시 이 6층 높이의 망루는 즉각 장안의 화제가 됐다.

 

그 당시에 이 정도 높은 빌딩은 앞쪽 부민관이나 조선 총독부를 제외하고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 망루에 올라가면 4대문 안이 훤히 내다보였다고 하니 화재 감시와 예방에는 이 같은 고층빌딩이 가장 효과적이었을 것이다. 일본의 한 건축 회사가 시공한 것으로 전하는 이 소방서는 이후 우리나라 소방서의 가장 전형적인 모습으로 복제에 복제를 거듭하게 된다.

 

     

  왼쪽은 용산 소방서의 망루. 오른쪽은 일제시대 촬영된 경성소방서의 모습. 망루 윗부분에 일본어가 크게 씌여 있다.

 

단순하게 건물 뿐만이 아니다. 적잖이 많은 소방제도와 전통은 어쩔 수 없이 일제시대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 소방의 날의 유래 : 현재 소방의 날은 119에서 유래한 11월 9일이다. 그러나 1991년 이전에는 12월 1일이었다고 한다. 바로 일제시대에 만들어진 <방화의 날>이 12월 1일이었기 때문이다. 소방이란 확실하게 ”계몽 시대”의 산물이었다. 총독부는 당시에도 불조심 포스터나 구호 표어 등을 공모하고 만들어서 학교 교육에 극적으로 활용했다고 전한다.

 

* 119의 유래 : 긴급출동 119을 보면 혹시 미국의 911에서 따온게 아닐까 생각하는 사람이 나오기도 했다. 그러나 이 또한 일제시대에 정착한 번호라고 한다. 1926년 일본의 교토전화국에서 당시 112라는 번호를 사용하였으나 착오가 많다 1927년 잘 안쓰는 9자를 도입하여 119라고 했다고 합니다. 이를 본따서 1935년 경성전화국에서는 자동식 서비스를 처음 실시하면서 114와 119 등의 서비스 전화를 개통했다고 합니다. 당시 표어는 ""불이 났을 때 소방서에 알립시다."(국번없이 119)

 

 

망루 사진을 확대한 모습입니다. 이미 세워진 지 25년 가까이 돼서 그런지 망루의 유리창 곳곳이 그리 깨끗해 보이지 않습니다. 서울 시내에도 고층건물이 세워지기 시작해서 예전의 망루 역할을 기대하기 힘들기 때문인 듯 보입니다. 멀리 명동성당과 카톨릭회관, 그리고 4대문을 둘러쌌던 야산들이 보이는 풍광이 인상적입니다.

 

 

 

"불은 전화 119로"

"너도나도불조심자나개나불조심"

 

1950년대 후반에 나붙은 불조심 포스터 입니다. 2000년대의 표어와 크게 달라지지 않은 점이 인상적입니다.

 

경성소방서는 해방 이후 종로소방라고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이후에는 중부소방서라고 개칭됐고, 이제는 그 자리는 도로에 내어주고 평범한 관공서로 물러 앉고 말았습니다. 요즘에는 소방서라는 건물이 매우 소방착가 편리하게 들어오고 나갈 수 있을 정로도 실용적으로 바뀌었습니다.

 

앞서 언급했던 노 소방서의 생각을 정리하면 이렇습니다.

 

"소방서의 뿌리를 찾아올라가면 경찰이 나오지만, 더 올라가다 보면 급하게 불을 끄는 의용조직이 나오기도 해요. 소방관이 아니라 소방수라는 말이 익숙했던 시절이 있었다는 말인데…. 경찰 내에서도 말이 많은 조직이어서 광복과 함께 자치조직으로 떨어져 나왔고 1929년 경찰공무원법 제정과 77년 소방공무원법 도입으로 가까스로 확고한 관의 위치에 올라설 수 있었죠.

 

이게 전부가 아닌게… 1980년대 응급환자 이송을 시작하기도 했잖아요? 이 모두가 국민을 사랑하는 마음이기도 하지만 끊임없이 국민들에게 사랑을 받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조직의 특성이기도 한거죠. 우리는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면 미래를 보장받기 힘든 조직이에요. 그러니 끊임없이 대국민 홍보와 계도, 그리고 우리의 희생이 필요한게 아닐까요?"

 

 

 

 

동아일보사에서 내려다본 예전 경성소방서 자리.

저기 사람들이 걸어다니는 인도에 우리 근대소방서의 뿌리가 자리잡고 있었다.

 

 

일제시대의 소방서가 자리했던 태평1정목. 지금은 태평로라 불리우는 근사한 인도로 변해 있다.

 

 

혹시 이 자리에 아직도 소서 있었다면 남대문 화재를 보다 신속하게 진화할 수 있었을까? 물론 답은 아니다에 가깝겠지만 왠지 옛스러운 소방서 풍광이 그리운 것도 사실이다.

 

 

*참고자료를 얻게 해주신 경산소방서에서 근무하시는 물총(구명보) 소방관님께 감사드립니다.

www.mulchoung.re.r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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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의 날개가 튀어나온 그곳, '미스코시 백화점'의 추억

 

"미스코시 백화점 알지? 이게 그거고…." (김한용 선생)

"네?"

 

선생님과 원판 필름을 정리하는 도중 난데 없이 ”미스코시(三越)”란 일본말이 튀어나왔다.

사전 정보가 없던 나는 조금 어안이 벙벙해졌다. 그런데 곰곰히 살펴보니 처음 보는 건물이 아니었다.

 

"선생님 이거 신세계 백화점 아닌가요?"(나)

 

"그렇지, 신세계 맞아. 그런데 예전에는 미스코시였어…아니지 ”동화”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는데…"

 

나 역시도 신세계 백화점 자리는 원래 일본계 백화점이 위치하고 있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올해 85살의 김한용 선생님은 아직도 ”신세계”란 이름이 어색했던 모양이다.

아직도 미스코시라는 옛 이름을 기억하고 있으니 말이다.

 

처음 드는 궁금증은 다름이 아닌,

예전 일본의 긴자거리에서 스쳐간 ”미스코시”와 신세계 자리에 있던 ”미스코시”가 같은 회사일까?

 

 

플라티너스 낙엽이 진 늦가을, 명동 입구에서 바라본동화백화점(현 신세계 백화점)의 위풍당당한 모습.

1959년도로 추정된다. 희미하게 동화 백화점이라는 표시가 보인다.(김한용 作)

 

물론 지당한 추론이며 명백한 사실이다. 예전 경성의 미스코시는 현재 일본 백화점 랭킹 4위의 미스코시 그 회사의 지점이었다.

 

1930년 10월 24일, 일본 미스코시백화점의 조선지점으로 탄생한 이 건물은 동경 긴자에 위치한 본사의 모습을 그대로 따왔다고 한다. 애당초 명동은 일본인들이 가장 먼저 상권을 휘어잡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남산 주위는 일본인들의 주요 거주지이기도 했다. 때문에 한국은행 바로 앞, 경성의 최고 번화가인 혼마치 1정목에서 출발한 미스코시 조선지점은 일본상권의 한국상권 지배의 상징물인 셈이었다.

 

조선과 만주를 통털어 최고의 백화점

 

무엇보다 건물터 자체가 예사롭지 않다. 1895년 청일전쟁 당시 일본 영사관이 있던 자리였다. 한일 합방 뒤에는 경성부청이 있던 일본 권력의 중심지였던 장소다. 이 자리에 일본을 대표하는 상가가 들어선 셈이다. 일본의 한국 지배가 총에서 점차 돈(자본)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상징하는 셈이다.

 

지하1층 지상 4층, 대치 730평 건평 360평에 자리잡은 이 건물의 설계자는 일본인 건축하 하야시로 알려졌다. 조선과 만주를 통털어 최고의 백화점을 표방하고 설계했기 때문에 호사스런 대리석으로 건물이 장식됐다.

 

미스코시의 성공 이후 을지로 입구에 조지야백화점, 남촌상가에는 미나카이백화점, 히라다백화점 등 일본인 경영의 백화점이 다수 진출하여 구태의연하던 조선의 상거래와 문화에 큰 충격을 던졌다고 한다. 이른바 모던보이 시대을 탄생한 물적 토대가 되는 셈이다.

 

조선 최고의 백화점이자 최신 문명의 상징이었기 때문인지 첨단 영업형태를 지닌 것으로 유명세를 탔다. 이른바 백화점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철저한 정찰판매를 30년대에 시작한 것이다. 당시 모든 재래상가가 협상을 통한 흥정이란 게 당연시 되는 풍조에서 정찰제란 큰 문화적 충격이었다고 전한다.

 

span style=”font-size:9pt;”>게다가 미스코시가 내세운 판매 방식은 지금 관점에서도 근대적이다. 1945년 철수할 때까지 고집스럽게 정찰제를 고집한 것은 물론, 반품제도를 실시했고 1년에 단 두 차례에 바겐세일 행사를 실시했으면 경품 판매 역시 1년에 두 차례 시행했다고 한다. 게다가 전화주문배달도 시작됐는데 서울시내는 물론, 인천까지도 지방고객의 주문전화를 받고 상품을 배달했다. 여기에 철저한 서비스는 기본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백화점의 탄생이 바로 미스코시인 셈이다.

 

조선 사람들에게 첫 근대의 충격

 

시전 상인들만 보다 대리석 빌딩 안에 들어찬 신식 백화점을 본 조선 사람들의 충격은 적지 않았나 보다.

문학작품에 미스코시란 표현은 그리 낯설지 않기 때문이다.

 

1930년 이후 조선에 진출한 일본자본의 상징이자 근대화의 표상

 

    “저어 참, 영감님?” “왜야?” “우리 저기 미쓰꼬시 가서, 난찌(런치) 먹구 가요?” “난찌? 난찌란 건 또 무어다냐.”
    “난찌라구, 서양 즘심(점심) 말이에요.” “서양 즘심?” ”내애, 퍽 맛이 있어요!” “아서라! 그놈의 서양밥, 말두 내지 마라!"
    “왜요?” “내가 그년의 것이 좋다구 히여서, 그놈의 디 무어라더냐 허넌 디를 가서, 한번 사먹다가 돈만 내버리구 죽을 뻔히였다!” “하하하, 어떡허다가?” “아, 그놈의 것 꼭 소시랑을 여 논 것치름 생긴 것을 주먼서 밥을 먹으라넌구나! 허 참…….”
    ≪채만식, 태평천하(1938)≫:

     

     

    "나는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시간 후에 내가 미쓰꼬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나는 거기 아무 데나 주저앉아서 내 자라 온 스물 여섯 해를 회고하여 보았다.… 이때 뚜우 하고 정오 사이렌이 울었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이상,날개(1936)》: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경성의 최고 명물로 바로 이 미스코시의 옥상정원이 꼽혔다고 한다. 날개 잃은 천재 이상도 바로 이 미스코시 주변에서 어슬렁 거리며 식민지 청춘의 역겨움을 벗어던지려 했는지 모른다.

 

어찌됐건 이 미스코시의 운명은 순탄치 않았다. 해방이후 곧장 국유재산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일본군이 빠져나간 자리는 곧장 미군이 들어찼고 미스코시 백화점은 단순한 영문이름인 ”PX”라는 간판을 내걸어야 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호사스러운 PX가 탄생한 셈이다. 그리고 1964년 삼성이 이 건물을 인수하기 전까지 동화백화점이라는 이름으로 백화점의 명맥을 유지했다.

   

1950년신세계 백화점 앞에는 PX라는 간판이 붙어 있었다.(신세계 홍페이지 발췌)

 

1940년대 조선중앙우체국(왼쪽) 건물이 헐리기 직전의 명동-충무로 입구 모습.

남산타워가 생기기 이전의 남산은 조금 생경하다

 

첫 번째 사진(동화백화점)을 확대한 모습. 1959년의 사회상을 엿볼 수 있다. 1950년대 웨서턴 무비의 수퍼스타 렌돌프 스코트 주연의 <네바가 결투>가 동화백화점 내 동양 극장에서 상영됐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어머니 따라 삼만리>라는 표현이 인상적이다.

 

 

2008년 11월 20일 촬영. 플라티너스는 간데 없고 소나무가 자리잡고 있다. 건물의 원형은 그대로지만 외부 장식은 상당히 변했다. (최근 신세계는 뒤에 보이는 메사 빌딩도 1500억원에 매입했다.)

 

신세계란 이름이 40년 이상 회자되면서 미스코시란 이름을 거의 완벽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해서 불과 15년 존속했을 뿐인 미스코시란 이름이 역사에서 완전히 지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어찌됐건 그들은 근대라는 괴물을 우리에게 전파를 시켰고,

그 유산을 누군가 이어서 여전히 그 자리에서 똑같은 방식으로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참고로, 이 건물은 마땅히 근대유산으로 지정돼야 함에도 해당 회사측에서 극구 반대해서 유산으로 지정되지 않았다고 한다.

신축과 증축에 제한을 받지 않겠다는 의지다.

 

이제는 한국 자본의 상징이 된 옛 미스코시 백화점을 지켜보면 갑자기, 뜬금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지금도 신세계 백화점 옥상에는 누군가 퇴화된 날개를 푸드덕 대고 있을까?" 

 

분명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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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건축의 대명사 '부민관'을 아십니까?

 

너무 익숙한 풍경은 눈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태평로에서 광화문 방면으로 걷다 보면 소박한 흰색 건물을 하나 발견할 수 있다.

누구나 고개를 끄덕인다.

 

‘아, 서울시의회 건물이었지.’

 

눈에 익다는 얘기는 자연스럽다, 조화를 이룬다.

그렇다. 이 건물은 그다지 튀지 않는다.

근대적 건축 흐름에 조금은 뒤쳐졌지만 크게 눈에 거스르지 않는다는 얘기다.

최근 건물이라 지레 짐작하기 마련이지만 이 건물의 연원을 알고 나면 사람들은 깜짝 놀랄 수 밖에 없다.

 

* 설립연도 : 1935년 12월 10일

* 원 명칭 : 부민관

(府民館)

 


 

1958~1960년 사이(추정)의 부민관 모습. 지금 광화문에서 볼 수 있는 풍광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만큼 광화문 네거리는 가장 첨단을 달린 서울의 중심부였다.

 

 

어느새 73년째 광화문 네 거리를 지켜 온 터줏대감인 셈이다.

눈에 거슬리지 않는 이유는 바로 이 녹록치 않은 역사성에 있다.

 

과연 부민관의 원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1935년부터 광화문 사거리 지킨 명물

 

이미 이름에서 그 유래를 유추할 수 없는 시대가 됐다.

 

왜냐하면 이 건물을 계획했던 1934년 당시 서울시의 정식 명칭은 한성부, 아니 경성부(京城府)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시립극장이 아니라 부립극장이었던 셈이다. 당시 수도 서울시민(약 40만명)을 위한 문화 예술공간으로 계획됐고 실제 그 용도로 활용됐다.

 

4층 건물, 연면적 1700평. 건축가는 아마도 일본인일 터. 이 같은 대형건물은 당시로는 거대한 파격이었고 실제 이 하얀 건물은 조선총독부, 경성부청(현 서울시청)과 함께 도심의 랜드마크 구실을 톡톡히 했다. 우뚝 솟은 탑이 주는 효과도 컷을 것이다.

 

일제시대 최 전성기를 상징하는 건물이고, 극장이자 공연장으로 활용됐던 건물이니 만큼 이 건물은 주로 정치활동의 중심 역할을 톡톡히 한 것으로 전해진다. 1935년부터 45년까지 10여년간 이 부민관에서 동아시아의 번영와 일본 황실의 안녕을 기원하는 충성 서약이 끝도 없이 반복됐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이 건물을 지은 사람 역시 경성부라는 일제의 관청이었고 돈을 댄 곳 역시 경성전기라는 일본 회사였다

 

경성전기 기부금 100만원으로 공사 시작

 

당시 독점기업으로 이름을 떨친 회사가 바로 경성전기라는 회사가 있었다고 한다. 원래 1908년 ‘일한와사주식회사’라는 기업이 1909년 한국 최초의 전기 회사인 콜브란의 ‘한미전기회사’를 인수하면서 커진 회사라고 한다. 이후 일제의 지원에 의해 전기와 전화사업의 거의 독점적인 사업권과 자연스러운 독점 이윤을 거뒀다고 한다.

 

이 회사의 독점이윤이 문제가 되자 사회환원이라는 명목으로 서울시에 기부한 돈이 바로 100만원. 당시 물가를 고려해 보면 상당한 가격이다.(1935년 쌀 80㎏이 당시 가격으로 17.8원(圓)

이었고, 노동자들의 하루 임금이 1원 정도였다고 한다) 직접 비교는 힘들겠지만

100만원이란 쌀 가격 기준으로 약 10000배를 곱하면 100억대의 돈이 된다.

 

1932년 <조선과 건축>이라는 자료에 이 부민관의 위치가 정해진 기록이 나온다. 원래는 덕수궁 안쪽에 이 건물을 지으려 했지만 행정적인 문제로 인해 현재 자리, 당시는 이왕직 소유의 덕안궁터 일부와 경성기독교청년회관이 있던 자리를 합친 장소로 결정이 났다고 전한다.

 


 

1959년도 무렵 부민관 앞 도로를 달리는 서울시 뻐스. 디자인이 인상적이다. 당시 이 건물은 대한민국 국회였다.

 

 

부민관 폭탄 테러를 아십니까?

 

1945년 7월24일 저녁 7시. 한 남자가 부민관 앞에 도착했다.

 

그 시각 부민관 안에서는 친일파의 거두 박춘금이 만든 대의당 주최의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리고 있었다. 당시에는 이런 친정부(친일파) 단체가 우후죽순 처럼 생겨나 전쟁을 격려하고 후원금을 모집하던 시기였다. 경성에서는 주로 이 부민관에서 정치집회가 주로 열렸고, 이 부민관 주변은 언제나 친일과 반일의 미묘한 대립이 흐르고 있었다.

 

밤 9시에 박춘금이 단상에 오르자, 그 남자는 다이나마이트를 꺼내 불을 붙였다. 물론 박춘금의 연설을 듣던 사람들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리고 이 남자와 동지들은 유유히 부민관을 빠져나왔고, 거한 폭음 소리와 연기가 부민관 내를 가득 채웠다. 19살 청년 조문기과 3명의 대한애국 청년단 단원들이 이뤄낸 그 유명한 ‘부민관 의거’다.

 

당시 부민관 안에는 조선 총독과 조선군 사령관, 왕자오밍[汪兆銘]의 괴뢰중국 대 정위안간[丁元幹], 만주국 대표 탕춘톈[唐春田], 일본 대표 다카야마 도라오[高山虎雄] 등이 연사로 참가해 미국·영국을 규탄하고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리 많은 사람이 죽지는 않았다고 한다. 목표했던 박춘금도 살아남았으니 말이다.

 

2005년에 이 곳에서 부민관 의거 60주년 기념 행사가 열리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부민관이 어느 곳인지 잘 모른다. 유명한 사건이, 끊임없이 드라마를 통해서 재연되곤 하지만 역사 속에서 그리 높은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서울 한복판을 겨냥한 테러였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리 유명한 인물이 죽지 않아서 일까?

 

이렇게 일본의 군국주의가 절정에 달한 시점에 독점기업의 지원금으로 세워진 건축물의 일대기는 매우 복잡다단하다.

 

원죄를 갖고 태어난 만큼 복잡한 여정

 

1935~45년까지 부민관, 미군 군정청에서 사용, 1950년 4월에는 원래의 목적인 국립극장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58일만 사용된 국립극장은 1950년 하반기에는 치열한 남북한 대치의 중심(주로 정치범 스파이 재판소로 활용)으로 부각됐다, 이어 전쟁 이후부터 1975년까지 20년 넘게 우리나라 국회로 재활용됐다. 그 때는 물론 이름도 국회였다.

 

1975년 여의도에 국회가 세워지자 이제는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불렸고, 다시 1991년에는 지방자치제의 실시에 따라 서울시의회 의사당으로 변신해 오늘에 이르렀다.

 

한 때 정치의 중심지에서 문화 예술의 중심공간으로, 이제는 알듯 말듯 존재감이 부족한 서울시 정치의 중심부로 활용되고 있는 셈이다.

 

얼마전 서울시의회 의원 대다수가  불법적인 돈을 받아 선거에 활용했다는 기사를 접했을 때 부민관의 복잡하나 이력이 떠오른 것은 나 뿐이었을까?

 

어떤 건축가가 이렇게 말한 것을 기억한다.

 

"건물은 나이가 들수록 선(善)해집니다"

 

맞다. 건물이 무슨 죄가 있을까? 항상 문제는 범상치 않은 대한민국의 현대사였다.

 

 

 

 

2008년 11월. 제가 최대한 비슷한 구도에서 찍어본 사진입니다. 새 건물이 주위를 둘러 싸고 있지만 원 건물 자체가 주는 단정함은 예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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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에게 건방진 제안을 드리다

 

두 번째 방문에서, 한 장의 사진이 내 눈을 사로잡았다.

 

"어르신 저 사진은 무언가요?"

"응, 남산에서 찍은 사진이지…"

 

그는 반평생을 명동과 충무로에서 살아온 사람이다.

잘 알다시피 명동은 남산 아래자락에 위치한 동네다.

그는 산책하듯 남산을 오다니며 마치 일상을 기록하듯

수십 년 동안ㅇ 서울 시내를 기록하고 관조해왔던 것이다.

 

"저 위에 사진은 1950년대 후반에 찍은 서울이고,

아래 사진은 1980년대에 찍은 서울이야. 비교해 보면 참 근사하지?"

 

 

화면에 작게 나와있지만 이 작품은 작가 김한용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이자,

그의 작품 세계을 한 눈에 보여주는 작품이다.

(실제 그의 제1회 전시회 메인 작품이었다).

 

명동에 터를 박고 살아온 그는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1950년대 서울의 모습을 기록한 작가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는 온 집안 벽면을 사진으로 채운 괴짜 사진 작가일 수 있다.

그러나 그는 마치 남들이 쓰기 싫은 일기를 매일같이 써내려가며

주변 소시민들과 서울에 대한 기록을 그의 성 안에 아로새겨 놓은 것이다.

 

그의 작업실을 둘러보던 나는 그가 정리해놓은 데이터베이스 작업을 보고 또 한번 깜짝 놀랄 수 밖에 없었다.

 

"저게 다 선생님이 찍은 사진인가요?"

"그렇지…내가 찍은 사진 가운데 알짜배기 필름만을 저렇게 정리해 놓았지."

 

 

요즘은 디카가 널리 보급돼서 사진을 찍는 사람이 많다.

그런데 경험했다 시피 사진을 분류하는 작업은 그야말로 중노동에 가깝다.

아니 디지털 시대에는 어찌보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말할 수도 있을지 모른다.

물론 일반인들에게는 불가능이겠지만, 사진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에게 분류란 또 하나의 숙명이다.

 

그런데 그 작업을 10년도 아니고 50년간 계속 해온 분이 계신다는 것이다.

하나의 회사에서 하기 힘든 일을, 일개 개인이 해올 수 있었다는 점에

나는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아니 선생님. 저 어려운 작업을 어찌 하셨습니까?"

"이 사람이~!, 아까 말했지 않나. 난 세 사람 몫을 살아왔다고"

 

 

 

7~80년대 칼라 사진은 비교적 정밀하게 정리가 되어 있었다.

그렇다면 5~60년대 필름은 어떻게 보관돼 있었을까?

 

예상대로 꼼꼼한 선생님 답게 나름의 분류 체계를 세워 제대로 관리하고 있었다.

 

 

글씨가 작아 안보일 수도 있지만, 그는 옛 사진들을 나무/동물/식물에서 부터 경기도/전라도/외국 같은 지역으로까지, 나름 원칙과 체계를 잡아 세밀하게 분류하고 있었다.

 

"선생님 옛날 사진을 좀 봐도 될까요?"

"그래 조심해서 보게. 그런데 말이지, 혼자관리가 힘들어 상당부분 유실됐거나 필름이 남아있지 않은 대목이 많아."

 

그의 말대로 관심이 있을만한 필름은 제자리에 꽂혀 있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더구나 그의 사진은 대략 50년대 후반, 60년대 초반 같은 대략적인 추측만 가능하지

정확한 연대와 찍은 장소를 확증할 수 없는 약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필름과 인화된 옛 사진을 보면서 나는 순식간에 50년전 옛 시간으로 빨려들어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이 노작가에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의 작업실에 대한 순례가 끝난 이후, 명동의 한 대폿집에서 나는 그에게 중대한 제안을 드렸다.

 

"선생님의 옛 사진을 인터넷에 소개를 하고 싶습니다."

 

곰곰히 생각하던 그는 나에게 빙긋이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사실 글 잘쓰는 기자가 도와주면 나야 고맙지. 대신 옛날 상황을 세밀하게 표현하는 글을 써줬으면 좋겠는데…"

 

"자료를 꼼꼼하게 수집하고 참고하겠습니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또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자네 사진 좋아하나?"

 

"그렇습니다." 그리고는 나의 사진 이력을 짧게나마 소개했다.

 

"사실, 내 목표가 말야, 예전에 찍었던 장소에서 다시 찍어보고 싶은건데, 나이가 먹으니 좀처럼 움직이기가 싫더라구

자네가 변화된 옛 사진을 찍어주면 고맙겠구먼. 혹시 알아? 3년뒤 내 88세 생일에 같이 전시회를 할 수도 있을지…"

 

이렇게 어렵사리 허락을 하고 그는 내게 고급 와인 한잔을 주문시켜 주었다.

 

 

* PS

 

사실 여기까지가 이 블로그를 개설하게 된 이유에 속하는 대목이다.

작가 김한용과 그의 사진에 대한 얘기는 이제부터 시작인 셈이다.

 

물론 마지막 발언은 그가 나의 사진 실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한 발언일 것이다.

하지만 그가 내게 어떤 것을 원하는 지는 명확해 졌다.

과연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문과 함게, 새로운 도전에 대한 강한 의지가 충만하기 시작했다.

 

 

카테고리 : 작가 김한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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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城(스튜디오)을 헤집으며 감격하다

 

누구나 자신만의 성(城)을 꿈꾼다.

 

특히 예술가들에게 있어 작업실은 자신만의 아이덴티티이자,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이 될 수 있다.

때문에 작가의 서재를 훔쳐본다거나, 예술가의 집을 방문한다는 것은

기자 최대의 즐거움이자 특권(?)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김 작가(*원로이신 만큼 호칭이 고민스럽습니다. 하지만 영원한 현역임을 주장하시기 때문에, 평이하게 작가나 선생이란 존칭으로 약하고자 합니다)의 스튜디오는

충무로 사진타운의 중심부에 자리하고 있었다.

 

지금은 빈틈을 찾기 힘들 정도로 빽빽한 빌딩의 숲을 이룬 동네이지만, 그가 1963년도(그의 나이 40)에 첫 집을 살 무렵에는

꽤 한가한 동네였다고 한다. 그리고 10년 뒤인 1973년도에 바로 이 곳에 48평짜리 일본 적산가옥을 당시 약 900만원에 구입하여 스튜디오를 꾸몄다고 한다.

 

 

서울 한복판에 자리잡은 그의 고즈넉한 스튜디오 외관. 지하는 암실, 1등은 스튜디오 2층은 자신의 살림집으로 설계됐다. 그의 나이 50세에 자신만의 ”사진도장(道場)”을 갖고 줄곧 이 곳에서 활동을 해온 것이다.

 

어렵사리 그의 허락을 받고 스튜디오 내부를 꼼꼼히 들여다 볼 수 있었다.

그 역시 자신이 쌓아온 성에 대한 자부심이 만만치 않았다.

 

"난 말이오. 북에서 땡전 한푼 없이 월남한 사람이오. 진짜 열심이 살았오. 남들이 8시간 일하고 8시간 잠자고 8시간을 쉬었다면, 난 24시간을 일했다니까. 젊은날 내 스스로 ”한 사람 몫이 아닌 세 사람 몫을 살자고 다짐했던 거지. 그래서 일이 있으면 절대 잠도 안자고 남들보다 세 배로 빨리 걷고, 세 배로 뛰어다니며 일을 해왔어요. 그렇게 번 돈으로 전시회도 세 번이나 하고, 광고사진도 하고 작품사진도 찍으며 살아온 것 아니겠소? 그렇게 돈 벌어서 이 스튜디오도 만들었고…"

 

실제로 그의 40대 이후의 삶은 이 곳 충무로에 스튜디오에 녹아 있는 듯 보였다.

 

 

지하실에 마련된 암실에서 한 컷. 디지털 이전 거의 모든 사진작가들은 하루의 1/3을 암실에서 보내곤 했다.

그 역시도 2000년대 이후 거대한 디지털 흐름에 합류했기 때문에 이 곳은 현재 봉인됐다.

 

 

1층 스튜디오 전경.

예전 그는 국내 최고의 광고 사진작가였다. 7~80년대 이 스튜디오는 언제나 국내 최고 스타들로 북적였다고 한다.

 

그는 80년대 후반 이후 그는 상업활동을 줄여가고 주로 ”사진강의”와 개인적 작품활동에 매진해왔다고 한다.

때문에 그는 자신의 스튜디오를 ”자신이 직접 찍은 사진을 전시하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켜왔다.

그의 사진에 대한 사랑을 확인할 수 있는 모습이다.

 

그의 스튜디오를 살펴보는 것만으로 마치 무슨 화랑에 온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왕년 이 스튜디오를 찾은 여자 배우들. 사실 내가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은 왼쪽의

”김자옥” 정도 뿐이다.

 

 

80년대 초반 광고에 등장했던, 백일섭, 조치훈, 신성일, 홍정욱의 부친인 남궁원의 모습이 보인다.

 

 

대발이 아빠인 이순재 씨(가운데)가 등장한 한 커피광고.

 

 

그는 이런 옛 사진들을 통해 자신의 옛 추억을 음미할 뿐만 아니라 늘상 함께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생님, 왜 이렇게 벽을 온통 사진으로 덧대 놓으셨나요?"(호자이)

 

"왜냐구? 난 말이요. 평생을 사진과 함께 한 사람이오. 모든 사진이 나의 혼이 들어간 작품들이오.

이 것들을 항상 옆에 두고 곰씹는거지. 어디가 잘찍었는지, 아니면 반성하기도 하고. 이렇게 걸어두면 멋지지 않아요?"

 

그의 사진에 대한 사랑과 몰입은 스튜디오를 헤집으면 헤집을 수록 놀라워

구경하는 이를 압도하고 남음이 있었다.

 

지금은 그의 스튜디오를 매주 한 차례 가기 때문에 별 무감각하지만,

당시의 충격을 아래의 몇장의 사진으로 덧붙여 본다.

 

 

 

그의 서재겸 작업실 풍경.

 

 

서재의 김한용 작가

 

 

그의 침실. 침실에는 카메라가 세 대나 굴러다니고 있었다. 그는 언제 언제나 사진을 찍었다.

 

 

대략 이렇게 그의 스튜디오 순례가 끝이났다.

 

그는 집을 나서며 "별 것도 아니라"고 겸양해 했지만 평생을 사진과 함께한 인생이 매우 궁금해 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다음 방문에 그의 사진 인생을 들려주겠다는 약속을 받아 낼 수 있었다.

 

1924년산 평범한 미술학도는 과연 어떻게 사진기를 손에 쥐고 역동적인 사진인생을 살아온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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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 한 인생, 김한용 선생을 만나다(2)

 

그렇게 그의 이름을 내 취재수첩 ”꼭 만나야 할 사람” 리스트에 올려 놓았지만,

3년이 지나도록 그를 찾을만한 마땅한 명분이 생기지 않았다.

 

무엇보다 걸림돌은 그의 적지 않은 나이였다.

그는 1924년생, 우리 나이로 올해 85세가 된다.

한 마디로 내 할아버지 뻘이라고 해도 과격한 표현이 아니다.

 

"아직도 현역으로 사진을 찍고 계시진 않겠지?"라는 근거 없는 추축에서부터,

심지어는

"건강은 정말 괜찮으실까?"하는 불경한 생각까지 스멀스멀 떠올랐다.

 

그의 이름을 인터넷을 통해 검색하면서 다음과 같은 프로필을 얻어낼 수 있었다.

 

"국내 광고사진 제1호"

"민간 사진연구소를 설립한 최초의 사진가"

 

1962년 1월 여원 표지

 

혹시 ”여원” 이란 여성지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으실지 모르겠다. 1970년대 여성지 전성 시대의 주인공이자 국내 최초의 칼라 표지잡지로 이름을 날린 매체다. 그런데 이 분이 바로 1962년부터 잡지의 칼라화보를 담당한 사진작가였다고 한다.

 

이 밖에도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나 안익태 선생의 사진을

찍은 장본인이라는 얘기를 접하자 흥미가 배가됐다.

 

 

애국가를 작곡한 안익태씨의 한국 공연,

해방직후 서울 공연에서 김한용 선생이 찍은 사진이란다.

 

 

그런데 막상 원로 사진작가를 찾아가서, 당췌 무엇을 물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기자들이 이럴 때 쓰는 방법은 무작정 집으로 찾아가는

”신공(神功)”이 존재한다.

전화로 용건을 말하는 것 보다 훨씬 효과적인 방법이다.

 

그리하여 올 여름, 아마도 7월일거다.

그의 집 주소와 전화번호를 들고, 서울시 중구 충무로에 있다는 연구소를 찾았다.  

 

 

충무로 한 복판, 고풍스러운 단독주택 앞에 내걸린 <김한용사진연구소>입간판.

연구소장의 사진에 대한 고집이 물씬 풍긴다. 개인적으로 이런 옛스러운 집을 좋아한다.  

 

문을 두드렸지만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

결국 10여분을 기다리다가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OOO소개로 전화드리는 OOO라고 합니다. 혹시 집에 계시는지요?"

 

그는 귀가 청명하게 들리지는 않아 보였다. 그런 그가 이렇게 답했다.

 

"어? 나 집에 있는데…."

 

그렇게 하여 그를 만났다. 그는 85세란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만큼 정정해 보였다.

"껄껄~"하고 웃는 모습에서 도인의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나를 만나러 왔다고? 왜?….내 사진이 보고 싶어?"(김한용)

"네, 그렇습니다. 선생님 사진 인생이 궁금해서 왔습니다."

 

사실 사진 인생을 물어볼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스튜디오에 자신의 인생이 투영돼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자신의 집을 완벽하게 사진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놓은 장인이었다.

컴컴했던 그의 스튜디는 낯선이가 들어서자 환~한 빛이 1974년에 지어졌다는 35년된 스튜디오를 비추기 시작했다.

 

사진의 물결, 사진의 쓰나미….

 

"아, 이분은 자신의 인생을 사진과 함께 한 분이구나" 하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머리를 스친다.

 

 

자신이 만든 연구소(스튜디오) 벽면에서 포즈를 취한 김한용 선생.

85세의 나이가 믿겨지지 않을 정도로 정정했고, 아직도 하루에 수백장의 사진을 찍는 현역 사진작가다.

 

국내 1세대 보도사진가, 국내 1호 광고 사진가, 그리고 국내 최고령 현역 사진작가…

김한용이란 이름에 부여할 수 있는 영예로운 타이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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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한용 선생과의 첫 만남(1)

벌써 3년이 훌쩍 흘렀습니다.

 

제가 평소에 존경하던 A선배가 제게 이런 말을 툭하고 던진 거지요.

 

"호재, 너 사진 좋아하지? 충무로 김한용 선생이라고 아니?"

 

"글쎄요. 제가 사진 작가분들은 잘…"

 

독도 관련 사진으로 그분을 만났다는 A선배는 제게 알듯 말듯한 이런 말을 남기고 대화를 끝마쳤습니다.

 

"한번 꼭 만나봐라. 사진에 대한 애정이 보통이 아니시던데… 너는 대화가 꼭 통할 거야."

 

물론 당시에 저는 웃어 넘기고 말았습니다. ”사진에 애정이 없는 사진작가도 있을까?”라고 생각한 것이죠. 다행이도 그의 이름을 수첩에 적어 놓긴 했습니다만, 무슨 연락을 취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그 A선배가 김한용 선생을 통해 입수한 사진을 갖고 멋드러진 기사를 써 내려가는 것을 무뚝뚝하게 지켜보기만 했습니다.

 

바로 1953년 한국 산악회 회원들의 첫 독도방문 사진이 그 것입니다.

 

당시 사진작가로는 최초로 김한용 선생이 독도방문에 참여하여 기념비적인 사진 자료를 남겨놓은 것이죠.

 

당시 한국산악회원들은 한국전쟁으로 영토개념이 희미했던 독도에 들러, 본격적인 측량활동을 벌이고,

일본인들이 남겨놓은 표지석들을 제거하는 활동을 했습니다.

 

몇장의 사진을 첨부하면 이렇습니다.

 

1953년 10월 15일 독도의 동도에 상륙해 일본인들이 박아놓은 말뚝을 뽑아내는 한국산악회 회원들.

 

우리가 독도에서 찾아 볼 수 있는 독도 표지석

당시 ‘독도’ ‘獨島’‘LIANCOURT(리앙쿠르)’를 새긴 표석을 설치하는 홍종인 한국산악회 회장.

 

 

당시 독도에 세운 학술조사 기념 비석. Alphine Association 이란 표현이 인상적이다.

 

 

독도에 표석을 설치한 뒤 한국산악회 16명의 대원이 모여 기념사진을 찍는 모습.

맨 앞줄의 모자를 쓰고 사진기를 멘 이가 김한용씨.

 

당시 한국산악회는 독도의 동도에 상륙해 해변에 텐트를 치고 하루 야영을 했다고 합니다.

 

"1953년에 독도를 방문했던 사진작가라…"

 

어찌됐건 김한용 선생이란 이름 석자를 처음접한 2005년 초, 저는 그와의 인연의 연결고리를 만들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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