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서린호텔과 청계천 주변 풍경

                                                                                    

역사의
중심을 장식했던 서린호텔,

 

그리고
청계천 출발점

 

 

 

지하철 5호선 광화문역에서 동아일보 사옥 쪽으로 나와

청계천 입구에 접어들면 왼편에 베니건스 간판이 보이는 고층 건물이 눈에 띕니다.

‘청계 11(일레븐)’ 이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이 건물은

신문사 ‘머니투데이’를 비롯해 여러 회사 사무실들이 입주해 있는 오피스빌딩입니다.

이 건물에서 시작해 청계천로를 따라 모전교를 지나 광교까지

왼쪽으로는 서린(瑞麟)동이 오른쪽으로는 다(茶)동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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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1(검정선 내부가 서린동 회색선 내부가 다동)

 

‘서린동’하면 서울 도심에서 직장 생활을 한 40-50대들에게 무교동과 함께

먹자골목으로 기억되는 곳입니다.

지금도 이 동네에는 낙지집과 대구탕집 따위의 음식점들이

밥때가 되면 쏟아져나오는 직장인들을 상대로 성업중입니다.


동네는 1960,70년대 강북이 서울의 강자일 때가 최전성기였습니다.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80년대 이후엔

시내의 그저 그런 오피스타운의 하나로 전락한 이 동네에

30년 이상 터줏대감처럼 버티고 있으면서

주변의 영고성쇠를 말없이 증언있는 건물이 앞서 소개한 청계 11 빌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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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1>청계11 빌딩. 2008.12.17                                              이진성

 

서울시 중구 서린동 149번지. 지금은 부근의 엇비슷한 높이의 건물들 사이에서

지나치기 쉬운 평범한 오피스빌딩이지만

1992년까지만 해도 ‘서린호텔’이라는 이름을 단 유서깊은
숙박시설이었습니다.

옛적 사진을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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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2>지금의 씨티은행 부근에서 바라본 서린호텔                           김한용사진연구소

 


신문을 뒤져보니현재와 같은 건물은 1973년 9월 1일 호텔로 문을 열었습니다.

대지 510평, 건평 4299평에 70미터 높이 20층 건물이니

당시 초고층 빌딩으로 대접받을 만 했습니다.

기사에 따르면 이 호텔은 1968년 4월 관광호텔로 등록한 뒤 영업하던
4층 건물을

1972년 말에 증축해 재개장한 것이랍니다.

객실은 65실에서 228실로 늘었고요.(매일경제 1973년 8월 31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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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사진2의
확대                                                                                                 김한용사진연구소

 

서린호텔는 1968년
호텔이 되기 이전부터 여관으로 잘 알려진 곳이었습니다.

우선 문필가 이병주의 자전적 소설이라고 할 수 있는 ‘그 해 5월’을 보면

서린호텔의
전신인 서린여관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병주 하면 40대에
늦깎이로 소설을 쓰기 시작해 일가를 이룬,

그를 기리는 사람들 사이에선
‘한국의 발자크’……

가 될 뻔한 작가로 칭송받고 있는 인물인데요,

‘그 해 5월’은 5.16 쿠데타가 나던 1961년 5월이 배경입니다.

소설 한 대목을 인용합니다.

 

“그 무렵만 해도 서린여관은 한국적인 정서와 품위를 지니고 있었다.

외벽을 겸한 행랑풍 건물의 중간에 있는 대문에 들어서면 좁다란 뜰이 있고

뜰 한가운데 회랑을 두른 건물, 그리고 그 둘레에 방이 배치되어 있는데 (…)

요컨대 서린여관은 그만한 풍류를 새겨놓고 있었다는 얘기다.”

 

구상 시인 추모문집인 ‘홀로와 더불어’에도 서린여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실려 있습니다.

 

“서린호텔은 광화문 근처 무교동 초입, 지금은 넚어졌지만

소방서(인용자 주-블로그에서 다룬 바로 그 경성소방서입니다)에서

얼마 멀지 않은 모교 다리 옆에 있었다. 한옥으로 지었으나

커피숍만은 서양식 건물로 1970년대는 꽤 호와로운 찻집이었다.”

 

 

서울 도심의
여느 호텔과 마찬가지로 이곳도 위치가 위치이다보니

‘숙박’이라는 본연의 용도 외에도 각종 정치적, 역사적 사건의

현장이
돼 왔습니다. 그
자취를 조금 살펴볼까요?

-빛바랜 사진 속 이야기가 됐지만 1986년 7월 8일 서린호텔에서는

DJ-YS 두 사람이 조찬 간담회에 참석해

개헌안과 구속자 석방 문제를 논하기도 했습니다.

-이명박 정부 재경부 장관을 지낸 강만수 씨가 쓴

‘현장에서 본 한국경제 30년’엔
강 씨가 실무자 시절

서린호텔에 방 잡아놓고 금융실명제와 관련된 보고서를

밤새며 만들었다는 증언도 있습니다.

-정형근 건강보험공단 이사장도 서린호텔과 뗄 수 없는 기억이 있죠.

1987년 1월 14일 치안본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 언어학과 3학년생인 박종철 씨가 물고문으로 살해당했는데요,

오마이뉴스 2002년 10월 13일자에 따르면 바로 그날 밤 치안본부의 요청으로

관계기관 긴급대책회의가 소집되는데 장소가 서린호텔이었습니다.

당시 대공수사국 수사단장이던 정형근
씨도 참석하는데 이 자리에서

그 유명한 “탁 치니 억 하고 쓰러졌다"는 발표문이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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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4>사진2의 확대. 호텔 현판과 마크                                                                                             김한용사진연구소

 

사진을 확대해 보다보면 원본 크기에선 발견하기 어려운 재미난
사실도  확인됩니다

서린호텔의 영문 표기는 ‘Seoulin Hotel’입니다. 직역하면 ‘서울 안 호텔’인데

그래서인지 김포공항에 내린 외국인들이 이 이름을 쉽게 기억하고

즐겨 찾았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이름짓기가
지금 봐도 센스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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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5>사진2의 중앙 부분 확대
                                                                 김한용사진연구소

 

확대한 사진 한장 더 볼까요?

‘혼식분식’이라는 옥상 전광판이
눈에 확 들어오는 감리회관 건물로

지난 1986년 서울 도심 재개발로
헐리게 됩니다

이자리엔 지금 동화면세점 빌딩으로
잘 알려진 광화문빌딩이 들어서 있죠.

사진 속 건물엔 당시 사회적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총력저축의 해’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고

타이핑과 외국어를 할 줄 아는
사무 인력의 필요성을 반영하듯

타자학원과 외국어학원이 입점해
있었네요.

이제 이 사진들이 언제 촬영됐는지 한번 추적해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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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6>사진2와 같은 시기 촬영                                                                                 김한용사진연구소

 

금의 다동 한국관광공사 자리쯤에서 촬영한 사진입니다.

사진 아랫부분은 무교동과 다동, 윗쪽은 서린동인데

사이을 가로지르는 청계천로는 도로 확장 공사가
한창입니다

이 동네를 왕복4차선의 20미터 도로가 50미터로 확
넓어지는 시기,

언제쯤이었나 묵은 신문을 찾아봤더니 1976년쯤이더군요.

‘헐리는 밤의 환락가’라는 제목의

1976년 3월 9일
동아일보 기사를 인용합니다.

 

"서울시의
도심 재개발 사업에 따라 (…)광교-중부소방서 앞까지의

노폭확장공사를 위해 주변건물의 철거작업이 지난2월부터
시작되면서

무교동은 어수선해졌다.무교동 일대에는 230여
개의 유흥업소들이 밀집,

밤의 낭만을 구가해 왔는데 이번에 헐리게 되는
업소는 모두 64개(…)

 

서린동이라고 무사할 수 있었을까요?

시차는 좀 있었지만  재개발의 손길을 피해가지는
못했습니다

사진 우상단 서린호텔에서 회집까지의 건물들은

1984년 도심 재개발 계획에 따라 하나 둘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지금은 SK에너지와 SK 서린빌딩, 한국개발리스 건물들이

잇달아 들어서게 됩니다.

특히 맨 위 지도에 표시된 SK 서린빌딩 자리엔
원래

1960년대 젊은이들의 통기타 문화를 이끌던 음악감상실

‘세시봉’이 들어서 있던 스타다스트호텔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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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7                                                                                                                            이진성

그리고 지금은?

청계천이 흐르고 왕복 4차선의 도로가 놓여 있죠

사진2와 비슷한 자리에서 지금의 청계11 빌딩을 찍어봤습니다.(FIN)

 

 

이진성
KBS 기자

카테고리 : 서울의 옛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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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학생전용 아데네 극장의 추억

 

 

 한창
건설중인 진양상가,

 

 

그리고 ‘아데네 극장’의 추억……

 

 

  

    "중,고등학교
    시절, 아마 거의 매주 극장을 다닐만큼 영화에 푹 빠져 있었답니다. 보고 싶은
    영화는 사복을 입고서라도 꼭 보고야 말았고 키가 큰 편이라 지도 선생님들한테
    한번도 걸려 보질 않았었지요, 그리고 당시 대한극장 건너편에 학생 전용극장인
    아데네 극장이 있어서 이 곳은 교복을 입고도 관람이 가능했었죠
    ,"

     

    (엘비스프레쏘리
    블로그
    : http://blog.naver.com/elvispresori)

 

 

김한용 선생은 ‘모더니스트‘였다.

 

무엇보다 그 자신이 20대 초반에
전공했던 그림과 화구를 팔아버리고, 시대의 첨단을 달린 ‘카메라’를 장만해
사진기자를 거쳐 국내 최초의 상업 사진작가로 변신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그의 사진첩에는
하루가 다르게 변신하는 산업화 시기 서울의 모습이 오롯히 담겨 있었다.

 

그는 평범한 일상의
삶에도 주목했지만
근대화 시기 대한민국의 외적인 변화에 시선을 돌림으로써 단순한
이미지 컬렉터가 아닌, 역사를 기록하는 취재기자로서의 역할에 충실했던 것이다.

 

물론
그가 기록해 놓은  오래전 서울의 근대화 과정은 매우 생소했다. 대부분의
건물은 이미 사라졌거나 형태를 교묘하게 바꿔 쉽게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진첩을 검토하는 기자가
한 눈에 알아챌 수 있는 사진도 없지 않았다.

 

    "아…, 이건
    세운상가로군요. 충무로 쪽에서 찍은 세운상가 맞죠?" (정호재)

     

    "그렇지.
    아마도 대한극장 쪽에서 촬영하지 않았나 싶어… 건물이 한창 올가가고 있을 때니, 연도
    확인이 비교적 쉽겠구먼…"(김한용 선생)

     

 

김한용
作 1968년작(추정)—세운상가와 진양상가

 

이렇게 길쭉한 건물은
서울, 아니 아시아에서도 유래를 찾기 힘들 정도로 독특하다.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한 눈에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이상할지 모른다. 기자에게도 90년대 초중반까지
TV나 비디오를 사기 위해 들낙거렸던 추억의 장소다.

 

1966년
불도저 시장으로 이름 높은 ‘김현옥 서울시장’의 지휘아래 건설이 시작돼, 종로~퇴계로
사이에 현대상가(13층), 세운가동상가(8층), 청계상가(8층), 대림상가(12층), 삼풍(14층),
풍전호텔(10층), 신성상가(10층), 진양상가(17층)가 들어선 당시 동양 최대의 건축물.(철근 7000t과 시멘트 87만부대가
들어간 연면적은 20만6025㎡, 최대 864세대가 거주하는 주상복합타운 이었다.)

 

세운이라는
이름 또한
‘세계의 기운이 이곳으로 모리라’
뜻의 진취적인 작명이었다고 전한다.

 

문제는 서울 중심을
북에서 남으로 가로지른 환경 파괴적 건물이라는 점. 이제는 서울의 흉물로
변해버린 세운상가는 조금씩 철거가 진행중이지만 강남이 개발되기 직전 1970년대까지  최고급
주상복합 건물로 유명세를, 이후는 전자제품 타운으로 근근히 명맥을 이어왔다.

  

1968년
세운상가와 진양상가–부분 확대

 

때문에
이 사진은 1968년으로 추정된다.

 

1967년도에
건설된 앞동(현대상가, 세운상가)가 멀리 보이고, 1968년에 건설된 충무로 쪽으로
뒷동(풍전호텔 진양상가)는 이제 막 골조공사가 끝나 있기 때문이다. 1968년 봄철의
어느 대낮인 셈이다.

 

김한용
선생이 충무로 건너편 대한극장 옥상에서 이 사진을 찍을 때만 해도 철골 콘크리트
더미는 ‘근대화이자 발전의 상징’이나 다름없었을 터. 이 세운상가 사이를 가로질렀던
청계고가와 함께 세운상가마저도 서울도심 녹지축 확보를 위해 시나브로 사라질
예정이라고 하니, 1960년대 본격화된 대한민국의 산업화가 2010 전후해서 새로운
전환점에 들어섰다고 볼 수 있겠다.

 

확실하게
50년이란 세월은 시대의 흐름까지도 바꿔놓을 만한 긴 시간인 셈이다. 그런데, 이
사진을 살펴보던 기자는 조금 생경한 극장 간판을 보고 의문에 휩싸인다.

 

아.
데. 네. 극. 장

 

아테네도 아닌, 아데네
극장?  

 

오래된 극장인 것은
확실한데, 서울에서 영화 꽤 본 기자도 쉽게 기억해 내지 못할 정도로 생경한 이름이었다.
그러나 의문은 금새 풀렸다. 대한극장 건너에 자리한 ‘극동극장’의 60-70년대 이름이
다름아닌 ‘아데네 극장’이었기 때문이다.

 

재개봉관,
혹은 3류극장으로 평가된 이 극장은 2005년 ‘광식이와 광태’ 상영을 끝으로
폐관됐다고 한다. 그런데 ‘아데네 극장’이란 범상치 않은 이름에서 조금 더 색다른
매력에 이끌렸다. 조금 더 정보를 끌어모을 필요를 느꼈다.

 

사진확대—아데네
극장 간판 및 입구

 

사진상으로
‘아데네 극장’의 간판만 보일뿐 본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아데네 극장이었을까? 자료를 추적해 들어가니, 이 아데네 극장은 1961년 교총(교원단체총연합회)가
청소년 전용 극장을 목표로 극장을 인수했다는 자료를 찾을 수 있었다.

 

61년
이후 아데네 극장은 개봉관에서 종영한 영화들 가운데
미성년자 관람가의 영화들을 상영해 준 재개봉관이었던 셈이다.

 

지금이야
재개봉관은 ‘뒤쳐짐’의 상징이지만 40년전 돈 없는 교복군단에게 재개봉관이라도
감지덕지였을 듯(
사진속 영화 <탈주특급>은
1965년도에 제작된 헐리우드 서부극이지만 1968년 아데네에서 상영됐다
).

 

앞서
살짝 언급한 대로 교복을 입은 채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몇 안돼는 장소였기 때문에
서울 시내 중고생들에게는 꿈의 장소였다고 한다. 이 곳을 통해 헐리우드의 서부활극이나
영국의 클리프 리처드 같은 당대의 최신 유행 정보를 교류할 수 있었기에 오늘날
60대가 가까워진 60년대 서울시내 중고등학생들은 반드시 한 번쯤은 거쳐가고
싶어했던 극장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흥미로운 사실은 이 극장의 원 소유주가, 영화배우 신영균(申榮均)이라는 사실. 60년대를
대표하는 당대의 최고 인기배우 신씨는 당시 금호동의 금호극장, 충무로의「아데네」극장
등 2개 극장주였는데 이 아데네 극장을 팔았다는 것. 이를 인수한 곳이 교총인지
아닌지는 확실치가 않다. 단시 신영균은 30대 초반에도 이미 재벌급 재력을 뽐냈었다는
것 정도.

 

 1968년
경고문 "육교로 건너가시오, 건너가지못함 "(중부경찰서)

 

당시 경고문은 저렇게
구어체, 설명적이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더 놀라운 점은,
그 당시 사진에
무단횡단을 하는 사람이 단 한명도 없다는 점이다.

‘건너가지못함’의
위력일까? 아니면 당시 가장 번화했던 충무로 4거리의 위력일까?

 

그리고
2009년 7월 어느날….

 

그리하여
이 사진을 다시 찍어보기 위해 7월 어느날 힘겹게 충무로로 향했다.

 

50년전의
충무로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었다. 아데네 극장 입구를 장식했던 몇몇 유명한 냉면집과
한식집들이 헐리고 오피스 빌딩으로 바뀐 것을 제외하고는 한 눈에 이 곳이 사진에
등장한 그 곳이었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17층이라는 당시 최대 규모로
지어진 진양 상가의 위용.

 

이를
화각에 담아내기 위해, 40년전 김한용 선생이 그랬던 것 처럼 또다시 대한극장을
오르다.

 

 

 

 정호재

作 2009년 진양상가

 

 

대한극장
7층 높이에 올라서야 겨우 비슷한 장면이 눈에 들어왔다.

 

이미
진양상가를 둘러싼 인근 빌딩들로 인해 세운상가 전체 모습이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


구도로는 충문히 불만족스럽다.

답답해
보이는 빌딩과, 아직도 개발되지 못한 진양상가 오른편의 구옥들.

그리고,
복합 멀티플렉스로 변해버린 어정쩡한 대한극장 까지…

 

 

 

 

진양상가를
피해 고개를 아래로 돌려 도로를 굽어보니,

8차선
시원한 왕복 도로가 (진양상가보다) 이전 느낌과 흡사하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육교는
사라지고, 아데네 극장 간판은 빌딩에 밀려 사라지고 없지만

충무로에는
차들이 막힘없이 제 갈길을 시원하게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보면,


널찍한 충무로에선 수많은 영화 스타들이 명멸했갔고,


도로를 축으로 놓였던 적지 않은 개봉관, 재개봉관을 사이로

꿈많던
교복입은 젊은이들의 꿈이 피고 지었다.

 

그러고
보니 건물보다는 사람과 차가 다니는 도로가


긴 생명력을 갖고 있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2009년
8월 24일. 정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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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서대문구 대현동의 터줏마님 이화여대의 옛모습

 

 

 

상아탑이란 바로 저런
모습

 

 

이화여대 대강당, 대학원관,
본관…

 

 

 

 

 

김한용
선생의 작품집을 찬찬히 훑어 보면 치열한 삶을 조망한 작품 속에 간간히

서울의
고궁이라던지, 정갈한
대학의 모습이 종종 등장함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혜화동을
둘러싼 성균관대와 서울대는 물론이고 고려대와 연세대 그리고 이화여대가 그의 단골
행선지였습니다.

 

이번에
선정한 작품은 언제나 그렇듯 연도 미상의 이화여대입니다.

 

(김
선생님은 1950년대 주로 이 6X6 롤라이 이안리플렉스 카메라를 사용했습니다. 50년대
이후작품이란 것만 확실합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날짜를 기억하게 할만한 보조 기록이
없습니다)

 

 

김한용
作. 이화여대 1950년대.

 

 

선생의
수 많은 작품 파일 속에서 이 작품을 고른 첫째 이유는 바로 정문 앞쪽으로 늘어선
한옥 마을 풍경 때문입니다.

 

하얀
눈이 기왓장을 살포시 덮은 표정도 인상적이지만, 그보다는 한옥으로 대표되는

전근대(?)의
현실 너머로 펼쳐진 이화여대 3대 건물(대강당, 대학원관, 본관)의 멋드러진 위용과

그에
더해 고딕양식이 뿜어내는 현대적 권위의 아이러니함이 묘한 느낌을 전하고 있습니다.

 

이른바
한국적 상아탑의 이미지가 이 한장의 사진에 명징하게 드러난 셈입니다.

  

 

이화여대의
자랑인 대강당을 비롯한 석조전의 모습

 

 

왼쪽이
지금도 이화여대 생들의 입학식과 졸업식 그리고 채플 강의가 펼쳐지는 대강당입니다.

당시
전교생이 모두 함께 할 수 있는 3000여명의 객석과 300여명이 설수 있는 대형 무대만으로도

국내
대학 사상 최초로 시도된 대학 건물로 기념비 적인 의미를 갖는 작품이라고 하네요.

 


앞에 보이는 건물이 대학원 별관(1936년작)이고, 그 뒤로 보이는 건물이 대학원관(1935년작)입니다.

 

이화여대의
역사는 비교적 소상히 알려져 있습니다.

 

1886년
선교사 스크랜튼 부인이 운영하던 여학교에 고종이 이화학당이라는 교명을 하사했다던지,

한일합방이
있던 1910년 여성교육 사상 최초의 대학교육이 이뤄졌고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성
인재들이 배출됐다는 바로 그런 스토리 말입니다

 

1925년
종합대학으로 성장하려는 노력이 좌절되고 오히려 전문학교로 격화된 이화여대는

1935년
현재의 대현동 캠퍼스로 이전하면서 부흥의 꿈을 이루게 됩니다.

앞에
보이는 3대 건물이 바로 이화여대 시작의 상징이자 원대한 비전의 상징으로 자리매깁합니다.

(아쉽게도
이대 건물들은 그 역사나 아름다움에 비해 그 역사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은 점은
아쉽네요)

 

 


사진이 보여주는 이화여대 만으론 1950년대 겨울이라는 점 이외에는 별다른 단서가
없습니다.

 

지금
사진에는 본관 바로 옆에 1958년에 건설된 헬렌관이 없는 점으로 미루어 1958년 이전
사진이라는

대략적인
시기를 파악할 수 있는 것 만으로 위안을 삼을 수 밖 없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현재 대학 지하시설의 최고봉으로 손꼽히는 ECC 입구가 1950년대 사진에도

매우
또렷하게 확인됩니다.

 

 

2009년
6월 : 이화여대를 촬영하다

 

사실
김한용 선생의 이화여대 작품을 접하고 과연 어떻게 이 사진을 재현할 수 있을지
고민이 됐다.

막상
이대 앞으로 출사를 나갔는데, 수 많은 고층 건물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와
비슷한 구도의 사진을 찍는게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2시간여
이대앞을 빙빙 돌다가 이대 앞에 높이 솟은 쇼핑센터에서 10층에서 비슷한 구도를 찾아냈습니다.

물론
완벽하지는 않지만 충분히 만족스러운 구도입니다.

 

 

김한용
선생이 찍은 거리와 각도는 다르지만 구도는 꽤 비슷합니다.

 

50년여의
세월이 흐른 지금 한옥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대학은
꽤 근사하게 몸집을 불렸습니다.

나무가
없어 거의 민둥산인 뒷산에는 보기 좋을 정도로 울창하게 나무가 자랐습니다.

이제는
대학 건물을 상아탑이라고 부를 정도로 거대해 보이지도 않고,

주변
민간 건물들이 충분히 성장했기 때문에 대학이 오히려 포위된 듯한 느낌까지 풍깁니다.

 

 

 

최근
이화여대와 관련돼 가장 높은 관심을 받고 있는 지하공간 ECC(이화캠퍼스복합단지)
부근을 확대해 봤습니다.

 

정말
거대한 입구입니다.


곳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개미처럼 깨알같이 보이는 군요.

애당초
이대의 주요한 언덕인 본관 석조전 앞 땅을 쪼개 만든 설계가 인상적입니다.

2004년
2월 국내 대학사상 최초로 국제 설계공모전에 당선된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의
지하도시 안을

그대로
캠퍼스 내에 구현해 내 화제를 모은 작품이다.

 

지하
6층에 이르는 지하공간에는 2만여평의 새로운 시설물들이 들어섰고

덕분에
비좁은 캠퍼스 내에 후죽순 처럼 생겨날 건물들을 지하로 끌어당겨

이화여대의
자랑인 70년 고건축물을 그대로 유지할 수 있게 됐습니다.

때로
기술의 발전은 역사의 보존에도 큰 도움이 되는 법인가 봅니다

 

 

그러나
2000년대 초반까지 이화여대생들이 기차깃을 건너갔던 추억의 이화교는

거대한
ECC의 설계와 더불어 추억으로 묻혀버네요.

 

어느새
가난한 선교사의 사립학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돈이 많은 대학으로,

또한
가장 등록금이 비싼 대학으로 상아탑이 아닌 상아성으로 변하고 말았다.

 

과연
대학은 1930년대에 비해 진보한 것일까?

혹은
건축만 진보한 것일까


답은 70여년간 이화여대 교정을 지켜온 삼총사 만이 알고 있을 것입니다.

 

 

2009년
8월 10일 정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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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화신백화점에 나붙은 미미화장품 광고

 

 

60년대에도
백화점의 메인 상품은 화장품…

 

      미미화장품의 추억

 

 

 

 

화신백화점.
두말할
필요 없이 근대화 시기의 서울을 묘사할 때 반드시 포함시켜야할 명소 중의 명소다.

 


장소가 역사적 공간으로 자리잡았는지 여부를 체크하는 방법으로, 필자는
문학작품에 언급이 됐는지 여부를 중시한다(물론 90년대 이후로는 영화를 포함시킬
수도 있겠다). 지난 번 미스코시 백화점이 소설가 이상의 일제시대 작품에 등장한
사례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화신백화점은 1960년대를 전후한 전후 서울사를 언급할
때 가장 많이 등장하는 소설의 중심 배경이 되는 장소가 아닐까 싶다.

 

    "그래도
    구보는, 약간 자신이 있는 듯싶은 걸음걸이로 전차 선로를 두 번 횡당하여 화신상회
    앞으로 간다. 그리고 저도 모를 사이에 그의 발은 백화점 안으로 들어서기조차 하였다"
    (1934,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

     

    "형님,
    어린 것 화신 구경이나 한번 시키세요. 제가 약속했었는데…"(1959, 이범선
    오발탄)

     

    "나는
    ‘안’과 평화시장 앞의 가로등과 화신백화점의 유리등과 같은 무료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를 한다. 계산하기 위해 호주머니 손을 넣는 순간…" (서울 1964년 겨울,
    김승옥)

 

지금의
종각 바로 건넛편에 자리잡았던 화신백화점의 짧지 않았떤 역사에 대해서는 지금도
클릭 몇번이면 비교적 소상하게 인터넷에서 찾아볼 수 있다. 때문에 자세하게 언급할 필요는 없을
듯 싶다.

 

그래도
딱 하나 언급해야 하는 인물이 바로 ‘박흥식’ 이란 조선 최대의 거부다. 조선 최고의
상인으로 불렸던 박흥식의 일대기를 가장 잘 집약하고 있는 공간이 바로 종로통 입구의 화신백화점이다.
충무로 입구의 미스코시 백화점과 대항해 민족자본(때론 매판자본이란 비난을 받으면서도)의
대표주자로
꿋꿋하게 조선 최고의 상권을 지켜낸 시대의 풍운아이자, 대한민국 경제계의 영원한 1세대다. 그리고 그가 무려 50년
가까이 일궈온 유통비즈니스의 핵심이 다름아닌
‘화신’이란 브랜드다. 물론 영원할 것만 같았던 ‘박흥식’과 ‘화신’은 1984년 화신백화점이
헐리면서 1차 몰락을 예고했고, 그리고 1994년 그가 세상을 뜨면서 완전하게 종언을 고하고
만다.

 

 

김한용
작가가 1960년대 초반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화신백화점. 당시 서울의
가장 번화했던 종로의 일상을 고스란히 담고 있기 때문에 김한용 선생의 작품 성향을
명징하게 보여주는 대표작이라 불러도 무방하다. 특이 작품을 구석구석을 살펴
보면서 느낄 수 있는 기분이란 마치 ‘타이머신’을 타고 그 시대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생생함이 돋보인다.

 

그렇다면
왜 60년대 초반일까? 물론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로 추측할 수도 있겠지만 자동차의
수명이 꽤 길기 때문에 정확치 않다. 이
가운데 필자의 눈을 잡아끈 대목은 다름아닌 ‘미미화장품‘이란 무척이나 도회적
브랜드였다.

 

 

‘화(和)’
화신백화점의 상징이라 말할 수 있는 ‘화’자가 건물 중앙에 들어서 있다. ‘화신’이란
브랜드는 일제시대 거상 박흥식 자본의 성격을 가장 명확하게 드러내는 이름이라고
후대 역사가들은 입을 모은다. 이른바 ‘일본에 동화겠다’는 믿음의 표시라는 얘기다.
그런 의도로 작성했는지는 불분명 하지만 일본 총독부와 박흥식의 관계는 시대적
상황을 반영해 어쩔 수 없었을 것이란 추측도 상당부분 존재한다. 물론 이제와서
그가 민족자본가였는지, 매판자본가였는지를 논증하는 일은 무의미한 일이 되버렸다.
그 역시도 시대에 충실했던 한 사람의 역사인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미미
화장품—-(고려화학공업사)

 

모두모두 예뻐져요 /

젋어져요
희고 곱고 아름다워진다니까
/

미미 네오크림
/

미미 네오골드크림
/
————-(1960년대 중반 CM송)

 

미미화장품이란
브랜드는 50~60년대 당시 ABC화장품(현 아모레퍼시픽)과 함께 가장 대표적인 화장품 회사라고
전한다. 50년대 후반에 포-마드 기름과 박가분 등으로 시장을 장악한 미미화장품은
50년대 후반부터 크림 시리즈로 세간의 화제를 뿌렸다고 한다. 특히 미미화장품의
본거지는 다름아닌 이 화신백화점이었다고 하니 어째서 이렇게 화신백화점전면을
크게 장식하고 있는지 짐작할만하다.

 

그러나
70년대 이후 고려화학공업사의 얘기는 기록이 희미하다. 아마도 70년대 최강자로
군림한 아모레 화장품에 간단하게 밀렸을 것으로 추측된다.(정보 기다립니다)

 

때문에
그 어디에서도 미미마담크림이 언제 출시돼 팔리기 시작한 상품인지에 대한 정보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고론 C역시 마찬가지.

그렇다고 사진속에 힌트가 아예 전무한 것은 아니었다.

 

미미화장품의 강력한 라이벌인 ABC화장품의 광고물은 화신백화점 옆 면에서 간신히
찾아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ABC화장품"은
현재 "아모레" "아이오페" "리리코스"
등을 파는 (주)태평양의
옛 상표이다. 아마도 ABC라는 영문이름이 도회적이고 세련됐을 뿐만 아니라 이국적인
느낌을 주기 때문에(마치 80년대 ‘드봉’이란 프랑스어처럼) 대표 브랜드 명으로 내세웠을
듯 싶다.

 

ABC
 화장품은 (와!와!) /

현대인
문화 모두가 사랑하네 /

누나도
언니도 /

곳곳마다
ABC가 화제로구나 /

너도
나도 발라보고 다시찾는 ABC

젋어지네
예뻐지네 ABC 화장품의 자랑꽃 피네 /
————(1960년대
중반)

 

 

 

 

1959년
당시 최고의 인기 배우인 최무룡과 이민자를 모델로 등장시킨 ABC화장품의
비타민 크림

지금도
절찬리에 판매중인 ABC 포마드 클래식 51년 디자인과 거의 흡사하다.

 

확신은
없지만 필자가 간신히 엿보이는 ABC광고판을 비타민 크림 광고로 판단하는 이유는
A. B. C. 라는 로고가 생동감 넘치게 기울어 져 있기 때문이다. 1951년 ABC포마드라는
브랜드로 처음 탄생한 ABC브랜드는 개성에서 출발한 서성환 회장의 태평양에게는
매우 효자 브랜드였던 것으로 기록된다. ABC 100번 크림, ABC 향수 포마드 등등 국내
최초의 브랜드 통합(CI)의 사례로 마케팅 업계에 기록된 매우 유명한 상품이기 때문이다.

 


한가지 팩트는 태평양화학은 1960년 1월에 전설의 히트작인 ‘코티분 백분’을 발매하고
나선다. 코티분은 50~60년대에 여성이 가장 가지고 싶어했던 화장품이고 태평양은
이것을 국산화함으로 이른바 메이저 회사된 업체인데, 아마도 이 코티분이
빅 히트를 하기 이전에 크림광고를 화신 백화점에 걸지 않았을까 하는 추축이 가능하다.

 

결과적으로
필자는 이 사진을 1960~1961년으로 추측해본다.
(의견 환영합니다)

 

 

화신백화점 입구에서
비로소 ‘화신’이란 이름이 보인다. 시계는 낮 12시 23분을 가리키고 있다. 아마도
점심을 먹으로 가던 도중에 찍었을 듯 싶다.  

 


앞으로 구형 FIAT 자동차(추정)과 크라이슬러 자동차가 멋스럽게 종각 사거리를 횡단하고
있었다. 자동차야 말로 사진의 미장센을 결정짓는 중대 포인트. 마치 이 대목만 봐서는
유럽 혹은 일본의 어느 거리를 걷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그 뒤로 살짝 엿보이는 종로 1가의 풍경들.

종로의
모습은 언제나 서울에 사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찔 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모두다
추억의 힘일 터이다.

 

 

그리고
2009년 7월 1일

무려
50년이란 세월이 흐른 지금 종각의 풍경은 예전와 크게 달라졌다.

 

한국
근대 건축의 1세대인 박길융(1898~1943)씨가 지었던 화신이 무너진 자리에는 알루미늄
시트를 입은 어색한 이방인이 등장해 있었다. 시대가 거꾸로 흘렀는지 건축가는 100년전
태어난 한국인이 아닌 남미에서 태어나서 뉴욕에서 활동중인 라파엘 비뇰리(Rafael
Vinoly)라는 정체모를 작가였고, 그가 종로의 의미를 알리 없기에 건축물의 형태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괴이해져버리고 말았다.

 

 

 


대신 자동차는 한국산 현대 자동차로 바뀌어 있었고,

사람들의
표정이나 옷차림은 조금더 여유로와 보였다.

그러나
50년전에 비해 행복한지 아닌지 여부는 확인할 수 없게 됐다.

 

여전히
저개발 상태인 종로 1가만이 위안이 된다고 할까?

 

물론
개발 혹은 미개발의 어느 한쪽이 선(善)이기 때문이 아니라,

역사성을
보존케 할만한 아무런 장치 없는 개발이 횡행하는 시대이기 때문이리라.

 

 

 

 

(2009년
7월6일 by 정호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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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극장, 국내 최고 70mm 전용극장의 위용

 

 

  미국이 건설한 제2의
부민관, 사라진 대한극장의 추억

 

 

 

     

     "충무로에서 보자"

     

    2000년 초반까지 서울에서 이 같은 표현은 ‘영화를 보자’ 혹은 ‘대한극장에서
    영화를 보자’와 동의어로 통했다. 그만큼 충무로에서 대한극장이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았음을 뜻한다. 지금도 충무로 한 가운데에는 대한극장이 우뚝서 있고,
    지하철 충무로 역을 바로 극장 앞으로 배치 시킬만큼 위력적인 모양새를 띄고 있지만
    예전과 같은 포스를 뿜어내진 못한다.

     

    2000년도로 멀티플렉스로 바뀌면서 생긴 변화다.

     

    ‘대한극장’이란 단어 속에는 70mm라는 대형 스크린과, 거기에 어울릴법한
    대작 ‘벤허’ ‘아라비아의로렌스’ 혹은 ‘닥터 지바고’ 같은 추억의 명화들이 오버랩된다.
    실제 대한극장은 국내 최초이자 최대의 현대식 영화관이 주는 근대화의 상징이자
    미국 문화의 첨단 전위였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일평생을 충무로에서 살다시피한 김한용 선생의 사진첩에 대한극장이 없었다면
    오히려 서운했을 것이다.

     

    Dahan Theater 라는 낯선 영문표기가 흥미를 끈다.

    어째서 저런 표기가 나왔을까? 게다가 흑백으로 비치는 건물의 모양새가 어찌
    뉴욕의 극장가를 옮겨놓은듯 이국적이다.

    아니나 다를까 대한극장의 설립 배경에는 미국의 힘, 혹은 미국 문화의 힘이 자리잡고
    있었다.

     

    1955년 당시 서울시장인 김형민과 당시 실력자였던 주한미8군 사령관인 벤프리트
    중장은 시민들에게 문화 오락 및 휴식의 기회를 주기 위한 상설극장을 계획한다.
    여기에 힘을 더한 곳이 바로 <20세기 폭스>사로 설계와 기자재를 댔다고 한다.
    당시 최첨단인 중앙식 공기조화 시스템을 도입해 창문이 없는 건물로 설계된 대한극장은
    무려 2000여 좌석과 70mm대형화면을 갖추고 미국에서 유행하는 첨단 영화를 대한민국으로
    직접 뿌리는 말 그대로 ‘미국 문화의 가장 빠른 전달 창구’ 역할을 담당했다. (실제
    미국에서 공수한 의자까지 배치됐다고 한다. 덕분에 대한극장의 좌석은 경쟁 극장보다
    훨씬 넓고 안락했다)

     

    좋게 말하면 첨단 극장이고 나쁘게 표현하면 일제시대 부민관의 재현이었던 셈이다.

     

    설계를 책임진 사람은 당시 27살의 신예 건축가인 김형만 교수다. 당시 일본 동경공업대를
    졸업한 그는 이 작품으로 데뷔하다시피하여 훗날 <강남 고속버스 터미널 마스터플랜>까지
    만들게 됐다.

     

     

    극장 앞은 당시에도 젊은이들의 해방구였다.

    검정색 교복을 입은 까까머리 남자 중고등학생들이 당시 첨단 문화상품인 헐리우드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 앞으로 몰려들었다.

    이른바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가 시작된 셈이다.

     

    그 앞으로 검은색 선글라스를 낀 멋진 신식 여성의 포즈도 인상 깊다.

    살짝이나마 짧아진 한목의 매무새가 1950년대 후반, 60년대 초 달라진 세상을
    반영하는 모습니다.

     

     

    멋드러진 최신식 극장은 1958년에 준공됐다.

    당시 동양 제일의 극장이란 수식어까지 더해져 서울 시민들에게는 최고의 문화시설로
    총애를 받았다.

     

    4월2일 준공과 더불어 걸린 작품은 미국영화인 <잊지못할 사랑-An Affair to
    Remember>였다고 전한다.

     

     

    사진에 잡힌 영화는 놀랍게도 히틀러의 <나의투쟁> 그리고 <남태평양-South
    Pacific>이란 영화다.

    70mm란 광고가 보이지만 1958년 개관시에는 70mm가 아니었고 1960년 이후에 70mm로
    증설됐다고 하니, 이 사진이 찍힌 연도는 아마도 1960년 이후가 될 터. 남태평양이
    국내에서 개봉한 시기가 70mm로 바꾼 직후라는 기록과 더해보면 1960년 어느 봄날로
    추정된다.

     

     

     

      당시 상영된 영화인 1958년작 남태평양

     

     

    장르 : 뮤지컬, 멜로/애정/로맨스, 전쟁 | 미국 | 151 분

    감독 : 조슈아 로간

     

    <사운드 오브 뮤직>, <왕과 나> 등으로 유명한 뮤지컬의 거장 리차드 로저스(Richard Rodgers)와 오스카
    해머슈타인 2세(Oscar Hammerstein II)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영화화한 작품.   ——–
    <출처 네이버 영화>

     

    전쟁으로 폐허가 된 서울의 한복판에서 조금은 한가롭게 비치는 <남태평양>이라니.
    게다가 살짜쿵 벌거벗은 남여의 멋진 로맨스까지. 당시 제3세계에 속했던 서울의
    젊은이들이 헐리우드 영화에 열광하지 않았다는 것이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영화란 환상이고, 꿈을 파는 공장이다"란 명제가 당시처럼 잘 들어맞았던
    때도 없을 듯.

     

    그리고 히틀러의 자서전 격인《나의 투쟁 Mein Kampf》이 영화화 됐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때문에 나의 투쟁이란 작품은 영화인지 아니면 다큐멘터리인지
    혼란스럽다. 물론 독일 제3제국의 종말을 처참하게 그렸을 것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을 듯 싶은 작품이다.

     

     

    <오로지 대한극만만 상영할 수 있는 TODD-AD 70mm
    대형스크린 한국최초 상영>

     

    어릴적 신문광고를 펼쳐보면 대한극장의 70mm 로고를 쉽게 찾아볼 수 있었다.

    1960년대 이후 대한극장은 대작들의 향연을 즐기기에 가장 최적의 장소로
    꼽혔다.

     

    그 가운데 기념비적인 작품으로는 1962년도에 대한극장에서 개봉한 <벤허>를
    꼽는 이들이 많다. 이 당시 <벤허>의 충격이 어느정도였냐 하면 당시 250만~300만
    서울 시민이라고 추산되던 시절 무려 70만명이 벤허를 보기 위해 대한극장을 다녀갔을
    정도였다고 한다. 서울 사람 가운데 대한극장에서 벤허를 안 본사람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는 얘기다.

     

    당시나 지금이나 대한극장의 모기업은 <세기상사>다.

     

    당시 영화배급시장은 정권의 특혜사업으로 불렸지만 수익이 큰만큼 경쟁도
    극심했다고 한다. 세기상사는 그 혼란의 와중에도 꾸준하게 영화에서 번 돈을 영화에
    투자했고, 한국 최초의 애니메니션 홍길동을 제작하는 등 한국 영화계에 적지
    않은 공헌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과거의 영화만큼 거대 배급사나 제작사로 성장한
    것으로 평가하기는 어렵게 됐다.

     

     

     

    물론 대한극장의 위용은 그럴싸 하지만 충무로의 모습은 1950년대 후반의 모습을
    고스란이 담고 있다.

     

    아이를 들쳐맨 그리 젊어보이지 않은 아주머니들과 그 뒤로 범죄는 전화 112,
    불은 전화 119라는 표식이 그렇다.

    게다가 쓰레기통에 아로새겨진 샘표간장 광고라니.

      

     

    2008년 말, 어느 화창한 겨울날에 찍은 충무로 대한극장의 모습이다.

     

    4층 규모의 대한극장이 그 두배 가까이 높아졌지만 오히려 더 작아진 느낌이다.

    아마도 대한극장의 성장에 비해 주변의 성장이 더 빨랐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대형극장은 그대로고 상영관의 수도 대폭 늘어났을 뿐만 아니라 3D
    디지털 입체영화까지 상영하는 시대가 됐지만, 오히려 대한극장은 시대의 뒤안길로
    밀린 것 같은 모양새다.

     

     .

    대한극장이란 글씨체만 과거와 흡사하게 남았다.

    사람들은 이제 영화를 소비하기 위해 극장에 찾는다.

    더 이상 극장 자체를 소비하기 위해 그 곳에 가지 않는다.

    하드웨어는 보편화 됐고, 컨텐츠는 폭증했다는 얘기다.

     

    멀티플렉스의 등장과 함께, 

    1960년대의 상징 대한극장은 충무로의 아련한 추억으로 봉인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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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의 작은 중국 '아서원'을 기억하시나요?

 

 

을지로의
작은 중국 ‘아서원’을 기억하시나요?

 

                                                                                        이진성
KBS 기자

 

앞서
서울시청 광장을 보셨으니 이제 다른 사진도 한 장 살펴볼까요?


사진 역시 그 때 그 시절 서울의 도심 풍경을 담은 흑백 사진입니다.

먼저
사진 중앙 아래위로 쭉 뻗어 좌우를 나누는 큰 길을 볼까요?

 

 

 사진1
<출처-김한용 사진연구소>

 

 

거리를
달리는 자동차가 그다지 많아 보이지는 않습니다.

미끈하게
빠진 세단 승용차는 눈에 띄지 않고 지프를 개조해 만든 차량들과 승합버스만 보이죠?

큰길
좌우의 건물들도 얼핏 봐도 높아봐야 4층을 넘지 않습니다.

아직
지붕도 기와가 많습니다.

사진
중앙 부근에 사거리가 있는 걸로 봐서 도심이긴 한데 과연 여기는 어딜까요?

 

 

 

사진2
-

사진1의 상단 부분을 확대해 본 것입니다.

 


길 가운데로는 아직 전차도 다니는 걸로 미뤄 1968년 이전이겠죠?

전차는
1968년 11월 30일 마지막 운행을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으니까요.

가로수는
아직 헐벗어 있지만 사람들이 두터운 옷차림이 아닌 걸로 봐서

계절은
막 겨울을 벗어나 봄으로 접어들 무렵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횡단보도도 없어 그냥 길을 건너가는 행인들이 눈에 띄는 이 곳, 그어디 쯤일까요?

아무리
뜯어봐도 눈에 확 들어와 랜드마크로 삼을 만한 건물이 없습니다.

 

 

건물로
위치의 식별이 어렵다면 사진 속 현수막이나 간판의 글자를 유심히 살펴봐야죠.

사진
속 사거리 도로를 가로지르며 걸린 현수막엔 글씨가 거꾸로 인쇄돼 있는데

전국
OO선수권대회까지는 확인할 수 있는데 OO가 뭔지를 모르겠네요.

하지만
아무리 아리송하다고 하더라도 사진 속 장소를 알려주는 단서는 사진 속에 반드시
숨어 있기 마련입니다.


다시 눈 크게 뜨고 다음 사진 한 번 들여다볼까요?

 

이번엔
사진1의 아래쪽을 키운 사진 2장이 연속해서 나갑니다.

 

 

 

 

사진3

 

사진4

 

사진1의
아래쪽 큰길 바로 오른편 2층짜리 흰색 건물이 보이시죠?

사진
3은 사진1의 아래쪽 흰색 벽돌(타일?)로 벽을 마감한 건물을 확대한 것이고

사진4는
그 건물의 간판 부분을 좀 확대한 것입니다.

벽돌인지
타일인지 구별이 어려운 외벽에 창이 나 있는 기와지붕 건물 말입니다.


건물 벽에 조그맣게 붙은 간판에 쓰인 글자가 바로 단서 되겠습니다.

 

간판
맨 위에 영어로 CHINESE RESTAURANT, 그 아래 YA SHUE Y–N(– 부분은 전봇대에 가려
안 보입니다),

그리고
맨 아래에 한자로 중화요리 雅叙?이라는 글자가 보이실 겁니다.

눈치빠르신
분들 벌써 아시겠죠?

 

바로
‘아서원’입니다.

 

 ‘아서원’하면
제 나이 또래 서울 토박이들의 기억 속에는 빈 공백으로 남아있는 곳일 테지만

50대
이상만 하더라도 머릿속에는 또렷하게 각인된 장소일 겁니다.

 

『차이나타운
없는 나라』(양필승·이정희,삼성경제연구소, 2004) 84-85쪽을 보면 아서원의

간략한
연혁이 나옵니다. 조금 생뚱맞지만 그대로 인용해 봅니다.

 

    중화요리점은
    1950년대와 1960년대 외식을 위한 식당이 다양하게 발달하지 않았던 때 한국인
    사이에 매우 인기가 높았다. 당시 가장 대표적인 중화요리점은 아서원(雅敍園)이었다.
    이 중화요리점은 1907년께 산동성 복산현(福山縣) 출신의 서광빈(徐光賓)에 의해
    설립되어 1970년 송사로 문을 닫을 때까지 약 60년간의 역사를 간직한, 한국의
    대표적인 화교경영요리점이었다. (…) 반도호텔과 조선호텔 사이의 땅 460여평에
    들어선 4층짜리 붉은 벽돌건물로, 총 수용능력은 900여명이나 되었다. 한국전쟁
    직후인 1954년과 1955년은 미군과 유엔군이 이곳을 많이 이용했다. 이후에는
    자유당과 공화당 정부인사와 정치가의 사교의 장으로 각광을 받았다. (…)그러나
    아서원의 설립자 서광빈의 외딸이 1969년 롯데에 6,000만원의 헐값을 받고 팔아버렸다.

 

대구
영남일보 이춘호 기자의 2005년 12월 20일 기사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오는데요,

 

아서원은
1907년 산동성 복산현 출신 서광빈(徐光賓)씨가 서울 반도호텔 옆에 지은

4층짜리
중화요릿집으로 한 때는 중국의 석학 임어당, 손문의 아들 손과(孫科)도 들렀던 곳입니다.


박헌영은 1925년 4월 17일 조선공산당 결성식을 아서원에서 열기도 했다는데요,

 

(http://www.yeongnam.com/yeongnam/html/yeongnamdaily/plan/article.shtml?id=20051220.010220816490001)
중앙일보에 1979년 9월17일부터 12월 15일까지 실린 ‘화교’라는 연재물을 보면
이 사진 속 건물은 1937년도에 새로 지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롯데가 호텔을 짓는다며 매입한 땅, 그리고 현재는 롯데호텔이 서 있는 바로 그 곳에
사진 속의 흰 건물 ‘아서원’이 있었던 겁니다. 당시 지번으로는 정확히 서울시
을지로1가 180번지입니다.(어떤 자료에는 181번지라고 나오기도 합니다) 이제 이
사진 속 장소가 어딘지 확연히 드러났죠? 자, 이제 다시 사진 1로 돌아가 볼까요?

 

 

 

사진1

 

작가가
사진을 찍은 위치는 어디였을까요? 아서원 바로 왼쪽 건물은 지난번에도 소개한 바
있는 반도호텔이었습니다. 아마도 사진을 찍은 작가는 반도호텔에서 을지로 거리를
내려다보며 구도를 잡고 셔터를 눌렀을 겁니다. 그러니까 사진을 좌우로 나누는 큰길은
지금의 서울시청 광장에서 을지로입구까지 이르는 길로 현재는 왼쪽으로는 시청을지로별관과
삼성화재 등이 오른쪽으로는 롯데호텔이 서 있는, 바로 그 거리겠죠. 이번엔 다시
사진2로 갑니다.

 

 

사진2

 

 

 

사진5(일본생명/중구청
홈페이지에서)

 

사진
속 사거리 바로 오른 쪽 건물은 일제강점기 시기 지어진 일본생명빌딩으로

당시 장안에
이름났던 ‘화원식당’이 들어서 있었다고

근대문화재 연구가 이순우 선생은 자신의
카페(cafe.daum.net/distorted)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또 우리 화단에서 한국적인
인상주의의 개척자로 소개되고 있는 오지호 화백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오 화백은
1923년 9월 29일~10월 1일 사이 바로 이 건물에서 회원전을 열었다고 돼 있습니다.

해방을 맞고 임시정부의 요인들의 귀국한 직후인 1945년 12월 4일에는

이 건물에서
민족진영 세력 39개 정당단체들이 대표자회의를 열며 통합운동을 벌이기도 했고

1947년엔
보건위생부가 설치되기도 했습니다.

지금 이 자리엔 SK네트웍스 건물이 세워져 있습니다.

(1947년부터
건물이 허물어지기까지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아시는 분 댓글을!!!)

 

 


뒤 돔형의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악명을 떨쳤던 동양척식회사 건물입니다.

 

동척은
아시다시피 ‘조선의 경제 독점과 토지·자원의 수탈을 목적으로 일본제국이
세운 국책회사로 대영제국의 동인도 회사를 본뜬 식민지 수탈기관’(위키백과)이었죠.이
건물은 해방 이후 대한민국 정부의 내무부 건물 등으로 쓰이다가 1968년인가 72년인가
헐리고 나중에 그 자리에는 외환은행 본점이 들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언제
헐렸는지 정확하게 아시는 분, 댓글 부탁합니다.)   

 

사진2
속의 사거리 왼쪽에 있는 첫 건물 뒤 두 번째 건물 보이죠?

 

그리스식 기둥들이 있는
건물은 ‘원각사’로 당시 지번은 을지로 2가 4번지입니다.

이순우 선생의 카페에
들어가서 ‘원각사’라고 치면 자세한 소개글이 나오는데요,

이 건물이 원래는 일제강점기인
1912년 지어진 일제의 ‘18은행’이었다고 합니다.

1936년 은행이 철수한 뒤에는
경춘철도주식회사 본점으로도 쓰였고 1958년 12월 22일엔 에 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이인직의 ‘원각사’와는 별개의 건물입니다. 이 건물은 한국을 찾아오는 외국인들에게
민속공연을 선보이기 위해 마련한 300석 규모의 소극장으로 1902년 국내 최초로 만들어진
국립극장 ‘원각사’에서 이름을 따왔다고 합니다. (동아일보 1958년 12월 23일자)
이 건물은 1960년 12월 5일 화재로 전소됐고 지금은 내외빌딩이 들어서 있습니다.

 

 

 

그림
1 – 이제
현재 지도를 함께 보면서 위치 확인 들어가겠습니다.

 

 

롯데호텔
옆—>아서원  (검은표시)

을지로입구
5번 출구쪽—>알본생명  (파란표시)

일본생명
오른쪽—>동양척식주식회사 (빨간 표시)

을지로입구
4번 출구쪽—>원각사 (하늘색 표시)

 

 

 

※보너스
나갑니다,

 

사진 속 장소를 포함하고 있는 시원스런 항공사진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장소가 어디인지 직접 찾아보시기 바랍니다.

금방 찾으실 수 있을 겁니다.

물론 상업용으로
마구 가져다 쓰시면 저작권법에 걸린다는 사실, 상식이겠죠?

  

 

 

추가>

동양척식회사의 해방
이후 이력에 대해서 짤막한 팁 하나 추가합니다

<건축사> 1987년 12월호에 목원대 김정동 교수가 쓴 글입니다

"1945년 8.15 해방이 되고 미군정이 시작되자 신한공사(新韓公司)가 이 건물을 맡았다가

다시 귀속농지관리국으로 넘어갔고 1948년 국군이 창설되면서 국방부 정훈국이 사용했다.

6.25동란 때는 이 건물이 좌익계 인민보(人民報)에 점령되었으나 다행히 피해는 면했다.

서울이 수복되면서는 내무부(內務部)가 사용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4.19를 전후하는 자유당 말기부터 내무부는 또 다시 원성의 표적이 되었다.

때문에 내무부는 청사가 목조건물이라 데모대로부터 화재피해를 받지 않을까 걱정하기도 했었다.

그후 내무부는 이 건물에서 철수(1970), 건물은 한국외환은행에 매각되기에 이르렀다.

1972년 초석건설이 이 건물의 철거공사를 맡아 동척의 잔재를 털어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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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1년 서울광장-당당한 역사의 흔적

1961년의 서울광장.

 

선생님의 서울사진첩에는 유달리 1959~1962년 사이의 사진이 집중됐음을 알아챌 수 있다. 이유는 선생이 서울 충무로에 ‘김한용 사진연구소’를 개소한 시기가 1959년(당시 나이 36살)이기 때문이다. 서울 한복판에 튼실한 스튜디오도 마련하고 때마침 불어닥친 사진 수요의 급증으로 생활이 점차 안정기에 접어든 시기가 바로 이 무렵이다.

 

 

그 때문인지 그는 보다 정력적으로 변화하는 서울의 모습을 렌즈에 담았다.

1960년에 벌어진 4.19와 이듬해 5.16여파 때문인지 1961년의 이미지는 혼란에 가깝다. 그러나 사진에 비친 당시 서울의 모습은 평화롭고 오히려 차분하게 느껴진다. 특히 흑백필름 특유의 세련미까지 느껴진다.

 

 

1961년도 서울광장 모습. 당시에도 널찍한 서울시청 앞 광장은 잔디로 채워져 있었다. 이 같은 공간은 70년대 이후 잠시 분수대로 변했다가 2000년대 들어서야 서울시청앞과 맞닿은 진정한 광장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물은 현재는 서울프라자호텔이 자리한, 서울시청앞 맞은편 ‘대한체육회’ 건물이다.

 

마치 서울시청과 댓구를 이루듯 많은 부분이 닮아 있는 것이 특징이다.

3층은 강당으로 우리나라의 거의 대부분의 체육단체들이 바로 저곳에서 창립식을 갖고 대한체육회 소속으로 편입됐다. 한마디로 우리나라 체육계의 산실이 바로 저곳이었다는 얘기다. 1950년대 이후 줄곧 저 자리를 지켜온 대한체육회 건물은 60년대 절정을 맞이하고 1970년 후반 이 자리를 서울프라자호텔에 물려주고 잠실로 이전한다.

 

 

대한체육회에서 내건 프랜카드에 적힌 단기 4294년이란 숫자가 이 사진이 찍힌 날짜를 말해주고 있다.

사실 거리 풍경의 핵심은 바로 저런 시대의 정보를 담고 있는 게시물이라고 해야 할 듯 싶다.

 

한화그룹 소유의 서울프라자호텔.

 

사실 이 건물을 처음본 1980년대 이후부터 필자는 이 건물을 그다지 높게 평가하지 않았다. 날이 갈수록 이 건물은 아예 잘못 설계된 건물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 무엇보다. 너무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왔고, 서울 광장을 우악스럽게 감싸는 자세로 공간을 단절시키는 효과를 갖고 있다. 디자인 또안 너무 각진 형태라 1980년대의 세련됨이 2000년까지 유지되지 못하고 있다. 1976년도에 세워져 어느새 3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그 다음으로 눈길을 사로잡는 건물은 역시나 남대문.

 

여러모로 남대문이란 서울시 설계의 화룡점정을 이뤄내는 위엄과 풍채를 지니고 있다.

쭉 뻗은 도로 끝에 서 있는 남대문의 위용은 지금봐도 당당한 왕국의 힘을 느끼게 한다.

 

저 남대문을 거쳐 태평로를 지나 경복궁 앞까지 행진했던 조선군인과, 혹은 서울을 점령했던 외국군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1961년도의 사진에는 태평로의 당당한 위엄이 살아 있다.

 

 

서울광장 위치에 세워졌던 입간판들 -국제지역사회개발회의- -와세다 대학교 축구팀-

지금 기준으로는 참으로 초라한 수준의 행사지만

당시에는 국가적인 관심을 받았을 정도로 큰 행사였믕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마지막 포인트는 바로 덕수궁 앞에 포진한 차량과 인파들의 모습.

도로에 아무런 교통라인이 정리되지 않아 사람과 차들이 엉켜 있는 모습이 신선하다.

차량의 대부분은 전쟁이 끝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그런지 지프차가 대부분이다.

행인들의 복장 또한 상당히 세련돼졌다.

 

 

최근 다음커뮤니케이션이 공개한 로드뷰로 이곳의 사진을 캡쳐해봤다.

사람은 찾아볼 수 없고 건물과 차량만을 찾아볼 수 없다.

거리에서 인간이 배제됐을 뿐만 아니라 역사 또한 점차 엷어지고 있다는 얘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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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호텔들 조선을 포위하다—②웨스틴 조선호텔

 

서울 시내 한복판에 있다는

원구단 황궁우에 가보니 실제 많이 답답하더군요.

호텔에 둘러 쌓여 있어, 과연 이곳이 고종황제의 즉위식이 있었던 곳인지 미심쩍을 정도입니다.

접근하기도 쉽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원구단이란 곳이 무엇을 하는 곳인지 제대로 배운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 스스로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하는 현실입니다.

 

그간 원구단에 대한 얘기는 꽤 자주 인구에 회자돼왔습니다.

바로  원구단을 무너뜨리고 그 위에 세워진

조선호텔 때문인데요.

오늘은 우리가 신세계 그룹 소유로 알고 있는,

우리나라 최고 호텔 체인중 하나인 웨스틴 조선호텔에 대해 대해서 설명드릴까 합니다.

 

 

1914년 신축돼 1968년에 헐린 옛 조선호텔 전경. 흑백으로 묘사된 호텔의 모습이 단아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그렇지만 호텔의 연원을 알고 나면 불괘해질 수 있다. 이 사진이 찍힌 시기는 이 사진만으로는 단언할 수 없다. 1960년대 어느 봄날 이라는 것이 우리가 내놓을 수 있는 유일한 답이다. 

 

 

근대 한국 호텔의 최초 수식어 싹쓸이

 

고려시대에까진 이 땅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원구단(환구단)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조선시대에는 성리학적 질서가 자리잡으며 제후국으로 몰락했기 때문에 하늘에 제사를 지낼 필요가 없었죠. 그래서 고종황제가 즉위하기 이전까지 원구단이 필요가 없었다고 하네요.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조선을 접수하고 이 원구단을 정리할 필요를 느꼈던 듯 합니다. 그리하여 1913년 황궁우만 남기고 철거된 자리(580여평) 위에 지하1층 지상 4층의 최신식 호텔,

조선 호테루가 개관하게 됩니다. 총독부가 조선황제가 제사드리던 위치에 호텔을 지었다는 것에 분개하는 지사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호텔이란 어떻게 보면 시정잡배들이 놀고 먹는 곳이니까요.

 

한국 최초의 호텔은 인천의 대불호텔이었다고 하고, 서울 최초는 정동에 세워진 손탁호텔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금새 사라졌고, 결국 조선호테루는 한국의 거의 모든 최초 호텔의 수식어를 싹쓸이 하게 됩니다.

 

최초의 엘리베이터, 최초의 아이스크림, 최초의 부페식사, 댄스파티, 서구식 결혼식 등등 서구 문화가 최초로 소개된 장소가 바로 이 조선호테루 입니다. 이 곳은 일제시대부터 식민지 조선을 방문하는 국빈이나 해외 고위관리들이 투숙하는 영빈관 역할까지 했다고 합니다. 원래 원구단이 들어서기 전 이 자리가 명나라 사진을 접대하는 장소였음을 상기하면 제역할을 찾은 셈이긴 합니다만…그럼에도 꺼림칙 함은 피할 수 없을 듯 합니다.

 

이 호텔의 설립 주체는 조선총독부 산하 철도국 입니다. 이 호텔 뿐만 아니라 조선반도의 대부분 호텔은 철도국이 직영하는 형태로 운영이 됐다고 합니다. 때문에 건물을 자세히 살펴보면 서울역 건물의 디자인과도 흡사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문 정면에 CHOSUN HOTEL이라는 영문명이 쓰여져 있고, 발음은 조선 호테루 라고 했다고 합니다.

 

 

사실 조선철도호텔(예명)의 운명은 해방 이후가 더 흥미진진합니다.

 

1948년 미군정이 끝난 직후 이 호텔의 소유권은 당연히 대한민국 정부(교통부)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다 1963년 관광공사가 생기면서 다시 공사 소유가 되지요. 당시 막 출범한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국은 경제개발계획의 일환으로 국제적 호텔 건립의 필요성을 느끼게 됩니다. 당연히 이 호텔도 그 후보중에 하나였겠죠.

 

1967년 한국과 미국의 아메리칸 에어라인즈 사와 50대 50합작을 통해 호텔을 잠시 운영하게 됩니다. 그러다 1979년 미국의 지분은 세계적 호텔 체인인 웨스틴인터내셔널로 넘어가게 되지요. 그 때부터 이름은 웨스틴 조선 호텔이 됩니다. 한국의 주인도 정부에서 민간 사업자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바로 삼성이지요.

 

1983년 한국 관광공사의 지분은 삼성그룹에게 인계가 됐고 다시 1992년 삼성에서 떨어져 나온 신세계로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1995년 드디어 신세계가 웨스틴 그룹의 지분 50%를 추가로 매입하게 돼서 결국은 신세계 차지가 됩니다.

 

황제 폐하의 땅이 일제를 거쳐, 다시 미국을 경유하여 한국 재벌의 품에 돌아온 경위가 흥미롭지 않습니까?

 

 

 

조선호텔 홈페이지에 가면 다음과 같은 당당한(?) 환구단 소개가 있습니다. 저는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만. 어떻게 저런 자신감 넘치는 질문이 나왔는지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실제 저런 질문이 많았겠죠?

 

 

 

황궁우가 조선호텔에 가려진 모습입니다. 마치 조선총독부에 가려진 경복궁의 느낌이 나지 않으십니까?

조선이라는 체제는 일본의 근대화에 철저하게 밀려 한국인의 역사 기억 속에서도 철저하게 가려지고 말았습니다. 

 

 

(출처미상)

 

원구단을 해체하기 전에 찍은 사진이라고 합니다. 이 원구단이 해체된 자리에 조선호텔이 지어진 것이지요. 조선호텔에 가보신 분들은 알겠지만 앞에 보이는 황궁우가 마치 조선호텔을 위한 정원 장식인 양 다소곳 하게 서있는 모습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2008년 1월5일 촬영한 조선호텔과 원구단 황궁우 모습입니다.

날이 갈수록 근대는 커가는 데 반해 조선이라는 상징은 날이 갈수록 초라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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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호텔들 원구단을 둘러싸다—① 반도호텔

서울 시청과 을지로 입구 사이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호텔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롯데호텔과 조선호텔이 대표적이지요. 이 호텔들의 역사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이상으로 깁니다.

1930년대에 세워졌으니 거진 80년을 향해 가고 있는 셈입니다.

 

롯데와 신세계 라는 우리나라 굴지의 재벌이 소유했다는 것도 인상적입니다만,

무엇보다 이들 호텔들의 위치가 환상적입니다.

서울의 가장 중심에 자리를 잡고 있는 셈이지요.

 

어떻게 그렇게 된 일일까요?

 

그 답은 조선호텔에 가신 분들이 잘 알듯 싶습니다.

조선호텔에 가면 어느 객실에서든 한 눈에 들어오는 건축물이 있습니다.

 

 

우리가 교과서에서 ”환구단”이라고 배웠던 서울 중구 소공동에 자리잡은 ”원구단 황국우”의 모습입니다. 이 원구단에서 조선의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드렸더랬습니다. 이 때(?)만 해도 원구단의 모습이 대중에게 그다지 멀지 않았다지만, 이제는 제국의 호텔들에 둘러 싸여 아예 모습을 감추고 말았습니다. 근대에 갖힌 조선이란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셈입니다. 

 

 

바로 원구단 황궁우입니다.

 

(1) 언제 찍은 사진일까?

 

조선호텔의 후원처럼 착각하기 십상인 원구단 황궁우입니다.

 

황궁우는 광무 3년인 1899년에 만들어진 3층 팔각정 모양의 건물로 하늘과 땅의 신령들의 신위판을 모시던 곳입니다. 원래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용도로 마련된 원구단에 딸린 부속 건물이라고 보면 됩니다. 사진 속에는 원래의 원구단 모습은 이미 사라지고 조선호텔과 반도호텔이 들어서 있습니다.   

 

황궁우 뒤쪽으로 반도호텔이 보이고 호텔 굴뚝에서는 난방을 하는지 김이 피어오르고 있군요. 황궁우 앞 정원에는 눈이 쌓여 있는 걸로 봐서 당연히 겨울이겠죠.

 

반도호텔과 황궁우 사이에는 1965년 1월 23일 반도 아케이드라고 지금의 쇼핑센터격인 연쇄상가기 있었는데 이 사진에는 등장하지 않는 걸로 봐서 사진은

1965년 이전에 찍지 않았을까 추정해 봅니다. 혹시 정확한 촬영 연도를 짐작하시는 분, 댓글 달아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서울 시내 권력자들의 사교장이었던 반도호텔. 호텔의 굴뚝에 매달린 BANDO HOTEL이라는 네온사인이 인상적입니다. 이미 눈치 채셨겠지만 ”반도”라는 표현은 명확하게 일본이 한국을 칭할 때 자주 쓰던 표현입니다. 예전에 ”반도패션”이란 상표도 유행했었는데 이제는 잘 쓰지 않는 말이 됐습니다. 참 다행입니다.

 

 

(2) 반도호텔 소사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황궁우 뒤편 보이는 건물은 반도호텔입니다.

 

『관광공사 25년사』(한국관광공사 刊 1987)를 찾아보면 반도호텔은 1936년 5월 일본인 노구치가 세웠다는데요, 흥남질소비료공장 등 조선과 만주 땅에서 군수산업으로 떼돈을 번 신흥재벌이라고 합니다. 대지 1544평에 건평 6164평의 8층짜리 콘크리트 건물로 5층까지는 회사 사무실로 쓰고 6층부터 8층까지 객실로 꾸몄는데 모두 111실로 150여 명이 투숙 가능했다고 합니다.

 

광복 후에는 미국대사관 직원 숙소, 한국전쟁 때는 미8군 사령부 등으로 사용됐고 1953년 8월 우리 정부가 인수하면서 리모델링을 했답니다.

 

반도호텔은 특히 역사의 격변기를 증언하는 현장으로서도 잘 알려져 있죠. 1961년 5.16 쿠데타가 일어났을 당시 장면 총리는 집무실로 쓰던 809호에서 빠져나와 주한 미국 대사관으로 향했지만 문을 열어주지 않아 결국 혜화동 갈멜 수도원으로 피신했습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습니다만 만약 장면 총리가 미국 대사관으로 바로 갈 수 있었더라면 쿠데타가 성사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제기되기도 합니다.

 

이후 반도호텔은 1974년 7월 3일 오전 10시 종무식을 마지막으로 문을 닫고 사흘 뒤인 7월 6일 공식적으로 롯데에 인수됩니다. 이듬해 5월 1일 롯데호텔 공사가 착공돼 부분적으로 헐리기 시작했고, 마침내 1979년 3월 10일 롯데호텔이 완공되면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1948년 반도호텔 전경 (출처:제주교육박물관 홈페이지)

 

 

(3)참고자료

 

* 반도호텔의 옛 건물, 홍포 전단, 메뉴판 사진 등을 소장하고 있는 분의 블로그입니다.-

http://blog.naver.com/keizyo/20053931003

 

* 이 밖에 ‘원구단’ 자체의 연혁이나 상세한 자료를 원하시는 분은

http://cafe.daum.net/distorted

로 들어가셔서 ‘원구단’이라고 쳐 보시기 바랍니다.

 

 

원구단은 조선호텔과 롯데호텔 그리고 프레지던트 호텔에 둘러 쌓여 있습니다.

가운데 원이 바로 원구단 자리입니다.

원구단을 제대로 볼 수 있는 곳이 우리나라 최고의 호텔이라는 점은 참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2009년 1월 5일 촬영한 모습입니다.

반도호텔 자리가 롯데호텔로 변신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뒤로 삼성화재 건물이 보이네요.

사진방향이 미묘하게 바뀐 이유는 김한용 선생님이 찍은 자리는 현재 조선호텔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글 – 이진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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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사거리의 1960년대 모습은 어떨까요?

1950년대 서울 광화문 사진을 구경했으니 이제 1960년대로 옮겨갈 차례 입니다.

 

아래 댓글로 지적해 주신 대로 높이 솟은 건물은 옛

시민회관이라는 점이 확연해 졌습니다. 현재 세종문화회관 자리에 우뚝 서 있습니다. 눈 썰미 있는 분은 금새 알아보시겠지만 이 건물은 ”

부민관”을 모방한 건물입니다. 부민관이 남긴 유산인 셈인데, 저렇게 탑처럼 만들어진 부분에 플래카드를 걸어 놓으니 홍보효과가 높은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멀리서도 보일 수 있으니까요.

 

안타깝게도 이 건물은

1972년도에 화재로 소실됐고

이후 세종문화회관이라는 근사한 건물이 탄생하는 터전이 됐습니다. 20년 가까이 서울 시민에게 문화적 토대를 제공한 소중한 공간이 되는 셈이지요.

 

지난번 사진에서 보았듯이 광화문 앞 빈 공간이 상당부분 사라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금새 건물이 차고 들어온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이 사진이 1960년대임을 증명하는 것은 바로 중앙청 앞에 나붙은 ”증산” ”수출” ”건설”이라는 구호에서도 확인 가능합니다. 

 

 

 

1965년도 광화문 사거리의 도회적인 모습. 권력자의 공간이라는 점을 강조하듯 웅장하고 정갈합니다.지하도 위헤 건설된 차양, 하얀색 가리개의 모던한 디자인이 인상적입니다.

 

아래 댓글에서 이진성(KBS 기자)씨가 지적했듯이 이 사진은 광화문 지하차도가 건설된 이후인 1966년도 무렵의 사진으로 보입니다. 지적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그나저나 저 차양은 콘크리트인지 아니면 천으로 만든 것인지 궁금하네요.

 

 

옛 중앙청 건물을 살펴보니

”증산 수출 건설”이라는 구호가 눈에 보입니다. 즉각 이 사진이 1965년 이후에 찍힌 사진임을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근거가 됩니다. 아마도 이 사진이 찍힐 당시 저 건물 내에 박정희 전 대통령이 일을 하고 있었을 지도 모를 일입니다.

    "1964년도 업적으로는 1억 2,000만 달러를 수출했다고 나온다. 그리고 1965년에는

    「증산, 수출, 건설」을 시정방향으로 설정했는데, 증산에서는 양곡3,700만석, 석탄 1,000만 톤 등등 수출에서는 1억 7,000만 달러를 책정했다. 건설에서는 국토개발, 전력, 철도, 주택 등의 건설을 나열했다. 그리고는

    「나는 금년을 "일 하는 해"로 정하고 정부와 국민이 일치 단결하여 거족적으로 일하고 전진할 것을 사랑하는 2,700만 동포에게 호소한다」고 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 연두교서 해설)—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시대가 내세운 구호가, 2000년대의 우리 모습과 묘하게 매치가 된다는 점입니다. 바로 이명박-강만수 라는 우리나라 최고의 경제정책 집행자들의 경제정책이 바로 그것인데요. 이 두분은 집요하게

수출과 건설을 화두로 삼고 있지 않습니까? 바로 이 분들이 현장에서 활동하던 30대 시절이 바로 166년 근처이기 때문이 아닐까요?

 

젊은날의 충격과 기억은 오래 지속되는 것 같습니다.

 

 

1950년대 허허 벌판이던 광화문 사거리 주변이 금새 상업지구로 변신했습니다. 역시 가장 인상적인 마크는 오늘날에도 인기 브랜드로 자리매김 하고 있는 오뚜기 상표 입니다. 마아가린과 미풍 광고를 보니 역시 당시는 먹는 것 중심의 소비재 산업이 중심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지금은 교보문고가 서있는 자리 입니다. 광화문 사거리를 달리는 앙증맞은 차의 모습이 인상적입니다.

교보문고 터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자세히 설명을 드리도록 하지요.

 

 

시민문화회관에 걸려 있는 공연 알림 현수막입니다.

 

당시 어떤 공연을 주로 했는지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2008년 12월 16일</b에 촬영한 광화문 네거리 모습입니다.

각도가 정확하게 일치하지는 않지만 43년전 모습과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카테고리 : 서울의 옛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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