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왕의 귀환 – 황제 임요환의 전역에 즈음해

   이스포츠의 아이콘, 임요환이 전역했다. 일각에서는, 소위 ‘올드’의 부진에 흥미를 잃고 이스포츠로부터 멀어졌던 ‘올드 팬’들이 돌아올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전망을 내 놓기도 한다. 프로리그에 SK 텔레콤 T1의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관중석의 평균 연령대가 평소보다 서너 살은 높아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건 그저 그렇게 보이는 것일 지도 모른다. 정말 테란의 황제는 돌아온 것일까.

 

  격론이 벌어질 만도 하다. 나이를 먹어감에 따라 현저히 기량이 떨어지는 다른 선수들과 달리, 임요환은 입대 전까지 어느 정도 수준을 유지했다. 프로게이머 사이에서 최연장자에 가까운 시절에도, 우승을 차지하진 못해도 종종 4강, 결승까지는 올라가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 군생활을 하는 동안에는 눈에 띄는 성적을 보여주지 못했지만 그것은 공군이라는 특수성, 다른 모든 공군 선수들에게도 적용될 수밖에 없었던 핸디캡-연습 여건의 제한-이라는 면죄부가 있다. 나이와 기량저하의 일반적인 함수관계와는 큰 영향이 없어 보였던 임요환, 군대라는 특수성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었던 임요환. 이 두 가지 전제는, 이제 민간인이 되어 원래의 조건을 회복한 예전의 황제가 당당히 귀환할 것이라는 예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조건이다. 따라서 이스포츠의 적극적인 여론이 형성되곤 하는 몇몇 이스포츠 커뮤니티엔 황제의 귀환에 대한 커다란 기대감으로 충만한 분위기까지는 아니더라도 최소한 갑론을박 정도는 있어야 정상이 아닐까. 황제의 귀환을 꿈꾸는 자들을 비웃으며 꿈이라고, 희망에 불과하다고 ‘까대는’ 사람들이 대다수일지언정 무언가 이야기라도 있어야 정상이 아닐까. 그런데, 커뮤니티는 식어버린 청국장처럼 냉랭하다 못해 푸석푸석하기까지 하다. 아예 이야기꺼리조차 되지 못한다는 듯한 분위기이다. 임요환의 전역 자체는 기쁜 일이되, 황제의 귀환은 기대할 수 없다? 아마도 그런 뜻이리라. 누구를 탓하겠는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것은 오히려 자연스럽다. 서른이 다 된 퇴물에게 무언가를 바라는 게 가당키나 한가.

 

  프로게이머의 평균 연령은 낮아져만 간다. 기존의 프로게이머가 버티는 정도보다, 새롭게 유입되는 어린, 더 어린 선수들의 비중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계자 비관계자 할 것 없이, 이스포츠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선수 생명에 관한 문제제기를 한다. 은퇴 이후 지도자의 길을 걷거나 방송인이 되는 선수들, 이스포츠까지는 아니더라도 게임관련 업종에 종사하는 선수들이 나타남에 따라 은퇴 이후 선수들의 진로문제에 관해 우려를 토하는, ‘때 되면 으레 나타나는 목소리’는 요즘 다소 잦아들었다. 사실상 은퇴 이후 프로게이머의 경험을 살려 진로를 선택한 선수들의 비중은 그렇지 않은 선수들의 비중에 비해 턱없이 낮음에도 불구하고. 진실을 말하자면, 이것은 비단 프로게이머에만 국한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분야가 되었건 경쟁이 심한 특수직업의 경우(주로 스포츠) 경쟁에서 도태된 사람이 그 분야에서 다른 일을 하는 경우는 그리 흔치 않다. 종종 보이긴 하지만, 완전히 새로운 일을 하고 있는 다른 낙오자들은 아예 보이지 않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많아 보일 뿐인 것이다. 이스포츠 역시 상황은 사실 다르지 않다. 우려의 목소리를 잦아들게 만든 건, 리얼리티가 아니라 상징이다. 업종 자체가 경쟁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경쟁을 견뎌내지 못한 모두를 배려하는 마음은 누구에게나 크지 않다. 문제는 경쟁에서 살아남은 사람‘도’ 갈 곳이 없는 상황이다. 이건 정말 문제다. 따라서 은퇴 이후에도 안정적이고 탄탄한 진로를 보여주고 있는 뚜렷한 선례가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 가장 결정적인 것이다. 그리고, 그 부분이 해소되었기 때문에 그와 관련한 우려는 쑥 들어간 것이다.

 

  이스포츠는 기존의 여타 스포츠와 비교되곤 한다. 다른 부분에 관해선 다른 시각을 적용해도, 유사한 측면에 관해선 기존 스포츠의 기준이 잣대가 될 수밖에 없다. 선수의 평균 수명에 관해서도 그런 의미에서 이스포츠는 모자란 아이 취급을 받을 수밖에 없다. 기능적인 면과 빠른 두뇌 회전이 필요한 분야라면 비단 이스포츠뿐만이 아니라 어떤 분야가 되었건 올드가 ‘젊은 피’를 이기는 게 쉽지 않다. 그런데, 이스포츠는 이게 좀 심하다. 같은 멘탈 스포츠로 여겨지는 바둑의 경우만 보아도 그렇고, 하물며 육체의 단련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야구, 축구 등의 스포츠에도 노장 스타는 존재한다. 단순한 인기만을 척도로 한 스타가 아니라, 진짜 그 분야에서 최고의 활약을 하고 있는 ‘상대적인 노인’들이 제법 있다. 이스포츠는 이 면에서 아직 멀었다. 불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프로리그에서 두 자리 승수를 쌓아주는 선수는 고사하고, 아직 30대 프로게이머조차 없다. 이런 면에서, 우리는 임요환을 생각하게 된다.

 

  은퇴 이후의 진로 문제에 관한 이야기에서 밝힌 바 있듯, 선례라고 하는 것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 이상의 파급력을 가진다. 30대 프로게이머, 당당하게 잘 나가는 30대 프로게이머의 ‘재 여부’는 인식에 큰 영향 미친다. 이스포츠를 한사코 기존 스포츠와는 다른 시각으로만 바라보려하는 보수적인 경향의 인사들에게 더 성숙한 단계의 이스포츠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작지 않은 한 가지 이벤트가 될 수도 있고, 프로게이머를 희망하는 어린 친구들에게, 또는 그들의 부모에게 없었던 신뢰의 메시지를 전해주게 될 수도 있다. 물꼬를 트는 일은 어려워도 일단 작게나마 길이 열리면 그 길은 자연스럽게 커지게 된다. 일단 처음이 어려운 것이지, 한 명이 이루게 되면 생경함과 그로부터 오는 공포심은 익숙함으로 서서히 바뀌어 나가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첫 30대 프로게이머의 탄생은 필연코 제2, 제3의 30대 프로게이머의 탄생을 낳는 계기가 된다. 그리고 이후 이런 경향은 가속화 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임요환의 역할이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역대 최강의 프로게이머를 뽑을 때 임요환을 꼽지는 않는다. 오히려 이윤열, 최연성, 마재윤이 그런 질문 앞에선 단골손님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다수의 전문가들이 그렇다면 최고의 프로게이머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서슴없이 임요환을 꼽는다. 임요환은 많은 상징을 가지고 있는 선수이기 때문인데, 그 상징들에는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은 게 많다. 그래서 최고이고, 최고이지만 최고이기 때문에 해 주어야 하는 것들이 많다. 사실 임요환은 최고라는 프리미엄으로부터 많은 혜택을 누렸지만 많은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오기도 했다. 공식 직함은 없어도 대중에게 이스포츠를 알리는 메신저 역할을 해야 했기에 많은 매체에 노출해야만 했고, 이건 선수 그 자체로서의 가치를 높이는 활동에 큰 희생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황제 대접을 받는 만큼, 감수하지 않으면 안 되는 굴레이기도 한 것이다. 그랬던 임요환에게, 필자는 이제는 이스포츠를 위해 선수로 되돌아오라고 요구한다.

 

  신문지상에, 방송의 교양과 토크 프로그램에 출연해 이스포츠를 알리고 그 위상을 높이는 일보다 지금 현재의 임요환의 위치에선 성적을 내주는 것이 이스포츠를 위해 가장 큰 도움이 된다. 물론 선수 본인을 위해서도 지금쯤은 가시적인 성적을 내 주는 것이 그 무엇보다 큰 도움이 되리라는 것은 말할 필요조차 없다.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상황에서, 최소 개인리그 4강의 성적은 내주자. 임요환의 드랍십이 종횡무진 활약하며 스타리그 2연패의 신화, 3연속 결승의 신화를 이루던 시절보다 더 커다란 경이와 희망을 팬들에게 안겨줄 것이다. 팀배틀 스타일이 프로리그에서 대세가 되어 있는 현시점(앞으로도 팀배틀 대세는 유지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에서 임요환에게 소위 ‘올킬’의 로망을 기대하는 것은 오히려 어렵다. 그러나 개인리그에서의 활약은 역설적으로 기대할 수 있다. 찬찬히 생각해보면, 현실적으로 훨씬 가능성이 높은 일이고 팬들이 더욱 기대하는 일이고, 이스포츠의 발전에 가장 크게 도움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나중에 다른 글에서 구체적인 이유와 의견을 밝히겠지만, 팀배틀 시스템 내에서는 노장 선수의 위치는 국소적인 한 가지 확실한 역할만 담당해 주어도 정체성과 존재가치를 충분히 입증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리그의 훈련에 매진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는 면이 있고, 임요환이 이스포츠 전체에서 가지는 상징적 의미를 생각해서 SK 텔레콤 T1 팀에서 이런 면에서 배려를 좀 해 준다는 전제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임요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박정석과 더불어 역대 프로게이머중에 최고의 자기관리 능력을 보여준 임요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반복 훈련을 통한 스킬의 정교화가 아닌, 전략과 심리전을 통해 자신을 강화해온 임요환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기도 하다. 물론, 앞선 두 가지보다 더 큰 건 그 누구보다 강렬한 임요환의 승부욕이다. 그것이 불가능을 가능케 하리라. 아무튼 임요환은 이런 선수이기에, 팀배틀에서의 올킬을 기대하기는 힘들어도 집중적인 연구와 훈련을 통해 최고의 전략을 발휘할 수 있는 개인리그에서의 활약은 기대해 봄직하다. 물론 앞서 전제한 조건들이 충족되었을 경우지만. 변수가 무궁무진한 예선을 돌파할 수 있는가가 가장 큰 관건일 수도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큰 기대를 가지고 있다. 내가 인정한 남자, 임요환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더 결정적으로는 다른 이유 때문이다. 대단히 역설적으로 들리는 말이겠으나,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왕의 귀환’이기에 더 크게 기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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