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비 오는 날 김일성대 여대생의 굴욕 (130)

by 주성하기자   2011/08/10 9:01 am

한국에 와서 여기 사람들은 비가 오는 날 장화를 신고 다니지 않는 것을 보고 놀랐다.

 

물론 나도 이제는 장화를 신고 다니라고 하면 답답해서 신지 않을 것이 분명하지만, 처음에는 북한에서 비가 올 때 자주 꺼내 신던 장화를 여기선 왜 신지 않는지 의아했다.

 

내 경우는 지금은 장화를 신을 필요는 없다. 비가 오는 날에 출근하면서 비를 맞으며 먼 거리를 이동할 일이 별로 없다.

 

북한은 도로 상태가 좋지 않아 진창이 튀기는 것은 물론 교통수단이 발달하지 못해 멀리 걸어가야 하기 때문에 장화가 필수적이다.

 

비 오는 날 장화를 신고 지나가는 평양의 여인들. 평양의 가장 중심부인 고려호텔 앞에서
찍은 것으로 보인다.

 

물론 모두가 장화를 신는 것은 아니지만 비 올 때는 장화신은 사람들이 적지 않다. 특히 도로사정이 좋은 평양보단 지방 사람들이 장화를 더 많이 신는다.

 

그렇지만 장화도 비싸서 가난한 집에선 사서 신을 엄두를 내지 못한다.

 

우산도 북한에선 비싼 소비품이다.

 

내 집 신발장에 쌓여있는 우산들을 볼 때마다 북한에서 우산에 얽혔던 여러 추억들이 떠오른다.

 

북한 사람들이 쓰는 우산도 여기 지하철에서 쉽게 볼 수 있는 5000원짜리 접이식 중국우산과 똑같다.

 

하지만 애지중지하면서 쓰다보니 오래 쓴다. 우산도 없는 사람들은 비닐을 그냥 쓰고 다니거나 혹은 조금 더 품을 많이 들여 비옷 비슷하게 만들어 입고 다닌다.

 

한국도 지금은 경제적으로 풍족해져서 그렇지 아마 1950~60년대를 살아본 분들이라면 비가 오는 날 비료 마대를 쓰고 발을 젖어가면서 다녔던 기억들이 있을 것이다. 북한도 그보다 조금 나은 실정이다.

 

비 오는 날 평양 풍경. 이것도 고려호텔 옆 평양역과 연결된 지하도로 앞으로 보인다.

 

김일성대는 경제력이 괜찮은 집의 자식들이 오다보니 우산이 없어서 힘든 사람들은 거의 없다.
하지만 기숙사생들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물론 집에서 우산 정도는 사서 보냈겠지만 배가 고프다보니 대학 인근에 있는 개인집들에 우산을 저당 잡히고 먹을 것과 바꾸어 먹는다.

 

저당 맡기는 항목은 우산뿐만 아니다. 옷도 벗어주고 가방도 주고 등 참으로 다양하지만 그중에서 가장 먼저 저당 잡히는 것은 우산이나 장화이다. 평상시 잘 쓰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내가 대학에 다니던 10여 년 전에는 우리 학년 기숙사생들의 절반 이상이 비가 오는 날에 우산이 없었다.

 

대학 청사까지는 15분 정도 걸어 올라가야 하기 때문에 우산이 없이 등교하면 옷은 다 젖을 수밖에 없다.

 

비가 오는 날이면 기숙사 현관문 앞에는 우산이 없는 남학생들이 서서 같이 우산을 쓰고 갈 사람들을 찾는다. 그러다보니 기숙사에서 올라가는 학생들은 우산 한 개에 두 명, 심지어 세 명씩 매달려 간다.

 

그러고도 동료를 찾지 못한 학생들이 많다. 이런 학생들은 현관문에 서서 지나가는 여학생들을 기다린다.

 

여학생 기숙사도 인근에 있었다. 참고로 김일성대 기숙사생 중에는 여성은 다섯 명 중에 한명 정도로 많지는 않다.

 

여학생들도 남자들처럼 저당 잡히고 먹을 것을 바꾸어먹는 일은 마찬가지지만, 우산이나 장화 같은 것은 없으면 체면에 상당히 구겨지기에 웬만하면 갖고 있으려 한다.

 

남학생은 비를 맞으면 뛰어다니면 되지만 여학생이 그러고 다니면 정말 부끄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남학생은 술이나 담배와 같은 비싼 것들을 사느라 닥치는 대로 저당 잡히지만 여학생은 먹는 문제만 해결하면 되기 때문에 닥치는 대로 저당 잡히진 않는다.

 

아무튼 목을 빼고 현관문 밖을 살피다가 여학생이 지나가면 남학생들이 뛰어나간다.

 

하지만 이번에 내가 뛰고 네가 기다려라 하는 식의 약속이 없기 때문에 여학생 한명에 남자 몇 명이 동시에 뛰어나가는 일이 태반이다.

 

경쟁을 벌이다 성공한 한 명을 내놓고 나머지는 다시 현관에 되돌아와 다음 기회를 기다리거나 혹은 돌아오기 창피하면 그냥 그 속도로 비를 맞으며 대학에 달려 올라간다.

 

여학생들도 비가 오는 날에는 이런 일에 익숙 돼 있어 함께 쓰고 올라가자고 요청하면 거절하지 않는다.

 

한국에선 이런 일이 있으면 뭔 이상한 놈이냐는 식으로 대접받기 십상이지만 대학에선 서로 사정들 뻔히 아니 그렇게 야박하게 대하진 않는다.  

 

비 오는 날 평양 풍경. 남자의 파란 비옷이 눈길을 끈다. 북한에선 저런 비옷은 꽤 비싸다.
북한산은 없고 일본제와 중국제가 들어오는데 사실 저것은 어부들이 입는 옷이라고
한다. 하지만 북한에선 잘 사는 사람들이 저런 비옷을 입고 다닌다.

 

그런데 남학생들이 아무리 우산이 궁하기로서니 덮어놓고 마구 뛰어가는 것은 아니다.

 

똑같이 우산을 쓰고 지나가는 여대생인데도, 어떤 여학생에겐 한꺼번에 네댓 명이 우르르 뛰어가는가 하면 어떤 여학생은 남학생들이 열 명 넘게 뻔히 내다보면서 달려갈 생각을 하지 않는다.

 

앞서 가는 여학생에겐 네댓 명이 뛰어가는데 자기에겐 뛰어오는 남학생이 없으면 기분이 어떨지는 내가 여학생이 아니니 알 수는 없다.

 

아마 한국 같으면 무슨 ‘굴욕 시리즈’ 같은 것이 인터넷에 오르지 않을지 모르겠다.

 

일단 우산 밑에 뛰어 들어가는데 성공하면 “어디까지 가십니까”하고 물으면서 우산대를 남자가 넘겨받아 드는 것이 수순이다. 여자가 받쳐 든 우산에 남자가 구부정하고 따라가는 것이 모양새가 좋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화가 시작되면 대학에 당도하기 전까지 십 여분 동안 서로 이야기를 나눈다.

 

물론 여학생이 묻는 말에 잘 대답하지 않으면 “너 별로야”하는 표현이니 너무 멋쩍지 않을 정도로만 이야기하는 센스도 당연지사.

 

십 여분 동안에 긴 이야기를 할 수는 없다. 우산 한번 썼다고 해서 친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물론 가까운 한두 달 내에 어디서 또 만나면 인연인가보다 하고 서로 웃으면서 아는 체는 할 수 있겠지만 그 넓은 대학구내에서 더구나 이야기를 건넬 정도의 상황에서 다시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북한은 남한처럼 소개팅이니 번개팅이니 하는 문화가 없다. 내가 대학 다닐 때 대다수의 학생들은 도덕적으로 대단히 건전했다.

 

그렇다고 남녀간에 부처님처럼 지낼 수도 없는 일이다. 여학생을 알게 되는 범위는 자기 학부, 그리고 자기 고향 정도이다. 그리고 이처럼 비가 오는 날 잠시 생판 모르는 다른 학부의 이성과 이야기하는 기회가 있는 정도다. 그것도 용기가 적잖게 필요하다.

 

비가 오니 문뜩 대학 때 추억이 들었다. 나는 우산을 잘 챙겨 다니던 모범생이었는데 왜지?

.

.

.

.

.

.

.

.

.

.

.

 

그럼 그렇지, 안 믿을 줄 알았다.

 

 

(아래↓ 손가락을 누르면 더 많은 사람들이 이 글을 보게 됩니다)

 

카테고리 :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태그 : , , , , ,

댓글 남기기



댓글 (130) “비 오는 날 김일성대 여대생의 굴욕”

  1. 유증상

    2011-08-16

    비오는날 장화 신는게 훨씬더 멋있지 않을까? 저모습이 북한이 아니라 유럽쪽이라면 아마
    낭만적으로 보일텐데

  2. 아저씨

    2011-08-16

    남한에서는 거의 다 자동차를 가지고 있으니 조금 먼 길이면 차를 타고 이동할 것이고 이것이 대중문화가 되다보니 자동차를 가지지 못한 소수의 사람들이 혼자서 장화를 신고 다니기가 이상하겠지요. 글을 읽어보니 어릴 적 생각이 납니다.

    그리고 우리도 옛날에는 여학생들 우산 빌려 쓰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때인가부터 남녀 간에 매너라는 것이 자리잡게 되면서 어색해지더군요. 여자들 편하게 대하다간 남한에서 큰일 납니다..ㅎㅎ

  3. 놀부

    2011-08-16

    우리도 이전에 우산 많이 빌려쓰고 그랬다.
    우산 빌려주는것 가지고 굴욕이라 하면 안된다.

  4. 티코아빠

    2011-08-16

    마누라 없인 살아도…장화없이 못산다고 하던(봉천동)이 있었죠…

  5. ㅁㄹㅇㅁㅇㄹ

    2011-08-16

    좀 이건좀 부럽네. 그녀의 허리를 감싸고……

  6. ㅁㅇㄺㄱ

    2011-08-16

    애들 비옷은 더러 입지 않나요?

    귀여운거 많은데 비옷…

    장화도 운동화처럼 깔창도 있고….

    http://www.11st.co.kr/product/SellerProductDetail.tmall?method=getSellerProductDetail&prdNo=73042144

  7. ㅋㅋ

    2011-08-16

    장화 이쁘다

  8. 8월

    2011-08-17

    이거 예전에 올려주셨던 글 아닌가요?
    이글을 분명히 예전에 본 기억이 있어서요…

  9. 평양

    2011-08-21

    글의 내용은 비슷이 맞는데요..
    음~~~ 제목이 좀 ~~
    굴욕이라뇨?. 미덕이죠,
    비오는날 우산있는 사람이 우산 없는 사람한테 씌워주는건 당연하게 미덕이죠.
    평양에 와서 한번 보시죠, 감동 먹는 장면들 많은데..
    저두 평양에서 사는데요 비오는날 깜빡 하고 우산 못가지고 나오면 지나가선 사람한테 부탁해서 우산 같이 쓰고가는데요 거절 받은적 한번도 없거든요. 남자든 녀자든…

    좋은 소리 했으면 합니다~!

    • 초등학생

      2011-08-22

      평양 님 평양에서 사신다고요? 어떻게 이 사이트를 들어올 수 있지??

  10. 레인부츠

    2011-08-23

    이제 한국에서는 장화, 우산은 생필품이 아닌 패션이죠. 한국에서 여대생이 혼자 우산쓰고가는데 쌩판 모르는 남학생이 끼어들어서 같이 쓰고가지고 하면 ㅋ 교내미친놈으로 인증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