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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제대증명서를 바꾼 북한군 여성 소대장 (14)

by 주성하기자   2010/03/15 9:33 am

한해가
저문다.

 


한 살 나이를 먹는다고 생각하니 한일 없이 먹었다 싶은 쉰다섯 살의 나이가 야속하다는
생각이 든다.

 

좋은
세상에 와서도 때 없이 찾아드는 감기, 몸살도 걱정이다.

 

20대
초반, 여성고사총 중대에서 소대장으로 복무하던 때, 신체조건을 따지지 않고 피를
뽑았던 것이 지금까지도 허약한 신체의 요인이 되고 있는 것 같다.

 

1974년
3월 1일, 나는 소대원들과 함께 북한의 (지방주권)선거철을 맞아 군중무용연습을
하고 있었다. 3월 4일이 선거 날이기 때문에 소대와 중대, 대대의 모든 일정이 분주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갑자기
대대 정치지도원의 “집합”구령이 떨어졌다. 대대가 운동장에 모두 정열하자 “피
형이 O형인사람들은 대렬 20보 앞으로 갓”하는 구령이 떨어졌다.

 

당과
조국을 위해 목숨도 초개같이 바치겠다던 나, 더욱이 갓 소대장으로 임명된 내가
대대 정치지도원의 명령에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나와
또 다른 중대의 몇몇 지휘관, 그리고 병사들이 한 걸음씩 대열 앞으로 나섰다. 대열
앞에 나서서 들은 사연인즉 대대 통신소대 전사 한명과 소대장이 명령 수행 중 3도
화상을 입었다는 것 이었다.

 

어떠한
명령 수행중이였으며 가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모른 채, 무작정 대대 정치지도원이
명하는 대로 운수차를 타고, 부대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한 황해북도 신계군 인민병원으로
실려 갔다.

 

 가면서
들은 이야기지만 두 군인이 “김일성동지혁명력사 연구실”에 걸려있는 도록 판 도색작업을
하다가 화재가 발생, 초상화며 도록들을 화재로부터 보호하려다가 심한 화상을 입었다는
것이었다.

 

당시에도
화재와 같은 재해 상황에서 김일성의 초상화를 구하는 사람들이 높이 평가되던 시절이어서
‘드디어 우리 대대에서도 영웅들이 탄생 하는구나’고 감탄하면서도 그들을 위한
수혈 때문에 선발되었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나야말로
군관학교(사관학교)신체검사를 겨우 통과한 “허약한 체질”을 타고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주변의 급박한 환경은 “허약한 체질”따위를 운운할 수 없게 했다. 병원에 당도하자
마차 피형 검사가 시작되었고, O형으로 확인된 남성군인 다섯 명은 각각 200그램씩의
피를 뽑게 되었다.

 

 나를
포함한 여성군인 세 명은 첫날 300그램, 이튿날 또 다시 200그램을 뽑게 되었는데
이유인즉, 여성들의 경우에는 체내에서 피가 자체생산 된다는 군의관의 설명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회병원이라서
준비된 혈청이 없는가’고 했더니 군인들의 전속병원인 “군의소”는 더한 실정이라는
것 역시 동행한 대대 군의관의 설명이었다.

 

여하튼
그렇게 막강한(내 생각으로는) 피를 수혈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통신소대의 전사는
일주일도 채 못 넘긴 채 수명을 달리하였고 소대장도 보름 만에 끝내 사망하고 마는
“슬픈 사태”가 벌어졌다.

 

사망자들의
시체가 부대로 되 실려 오고 아들의 사망소식을 듣고 부대를 찾아온 고향의 부모들께는
“아들의 영웅적 소행”이 장황하게 설명되었다.

 

하지만
나 개인적으로는 수혈을 한 이튿날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가 속해있던 부대에서는 군관들의 월급을 떼어 수혈에 참가한 군인들을 대상으로
이른바 영양보충을 실시하였으나 정신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압박감에 시달리던
나는 그해 6월의 농촌지원전투장에서 저혈압증상으로 쓰러지고 말았다.

 

특별한
대책과 “약”이 없었다. 그 후로는 줄 곳 빈혈증 증세로 시달림을 받아왔으며 끝내는
중대장 진급을 앞둔 1980년 가을, 제대자의 운명을 맞게 되었다.

 

제대후
어느날, 임신중이던 내가 또다시 빈혈증세로 평양의 한 병원에 실려가게 되었는데
의사가 말하기를 “여자들이 자체로 피를 생산한다는 말이 어느 사전에 있는가”고
군의관들의 무지를 꾸짖는 것이었다.

 

속았다
싶었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었다. 그렇게 살다가… 대한민국-서울에 왔는데, 와서
더욱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의
몸에는 활동에 필요한 충분한량의 혈액이 있고 매일 일정한 량이 새로 생기기 때문에
건강한 성인의 경우 320~400그램 정도의 헌혈은 오히려 건강에 이롭다는 것이 아닌가.
게다가 헌혈을 통하여 새로운 피를 공급해줌으로써 자신의 몸에 활력을 줄 수 있다니!

 

도대체
북한 의학에 상식이라도 통하는지가 궁금했다. 이곳 남한에서는 그렇게 흔한 헌혈을
북한에서는 왜 그렇게 두렵게 생각하는 것이며 영양보충을 시켜준다, 만다 하면서
난리를 피워대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기초
영양상태가 하도 좋지 못해 어쩔 수 없이 취해지는 조치라고 미루어 짐작은 하지만
인생자체가 혼란의 연속이었던 과거에 대고 더 이상의 할 말을 찾을 수도 없다.

 

바램이
있다면 김일성의 초상화 따위를 위해 죽기조차 각오하는 북한의 군인들, 그리고 주민들이
이제라도 제 정신을 찾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김춘애
이 글은 탈북자동지회의 허락하에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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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4) “피와 제대증명서를 바꾼 북한군 여성 소대장”

  1. truckdriver

    2010-03-12

    남북이 같은 민족이라는게 믿겨지지 않을정도지요. 김부자독재에 사람들의 유전자도 바뀐것 같아요. 원래 평안도쪽의 서북인들은 활달하고 괄괄한 사람들인데 어째서 김정일이 밑에서 벌벌떨고있는지 도통 이해가 가지않습니다. 결국 해결책은 북조선 인민들 스스로 들고일어나는수 밖에 없어요. 스스로의 노력없인 누구도 북조선에 관심을 갖지않을겁니다. 괜히 관심가졌다가 덤터기쓰기 딱 좋거든요. 그리고 제발 그 지독한 쇄국주의 사슬에서 깨어나길 간절히 바랍니다.

  2. islia2

    2010-03-12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3. birdieputt

    2010-03-12

    북한에 식량을 지원해야한다는 것에는 기본적으로 공감을 하고 있으나, 게리란 친구는 북한이 핵개발을 하게 된 이유가 미국의 봉쇄에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네요. 그럼 베트남은 핵이 없는데 왜 미국이 봉쇄를 풀었을까요? 중국은 60년대부터 핵을 가지고 있었는데 왜 미국이 봉쇄를 계속했을까요? 그래요. 다 미국탓이라 합시다. 넘 탓하면 뭐가 나옵니까? 미국이 없어지나요? 개방만 하면 금방 잘 먹고 잘 살수 있는 지구촌이 형성되어있는데, 개방을 하지 않고 식량내놓고, 금강산 구경와서 총 좀 맞아죽고 여차하면 서울을 불바다 만들겠다는데.. 지난정권처럼 돈다발을 바쳐 핵개발하게 하나요? 식량지원이 주민들에게 갈수 있는 장치가 되어 있어야 보내는 것입니다. “식량이 어디가냐? 군인들 간부들 먹고 나면 장마당을 통해 주민에게 갈 것 아니냐?”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공감하는 면이 있습니다만, 주는 사람이 정해야지요. 받는사람이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4. apujols

    2010-03-12

    북한의 어린이들에게 영양 공급을 하는 캐나다의 자선단체가 있습니다. 제가 지켜본 결과 이 단체를 통해 북한에 공급되는 두유, 영양소들은 고아원,탁아소,임산부에게 공급되고 있으며 군사 전용 가능성은 매우 약합니다. 해당 단체에서 일하는 분들이 정기적으로 북한을 방문해서 공급상황과 공급 받는 아이들의 영양 상태를 체크하고 있습니다. 단체 대표인 수잔 리치씨는 대전 외국인 학교와 이화 여대 통역 대학원을 졸업해 한국어 실력이 매우 탁월한데 대전 외국인 학교 선배인 세브란스 외국인 진료센터의 인요한(존 린튼)씨의 북한 방문담을 듣고 이 단체를 세우고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웹싸이트를 통해 한국에서도 크레딧카드로 기부가 가능합니다. 저는 몇번 기부를 했습니다. 여기서 북한 아이의 기아에 대해 걱정하신다고 열변을 토하시는 분들이 우선 기부를 하셨으면 합니다.

    http://www2.firststepscanada.org/

  5. 운영자

    2010-03-13

    저널로그 운영자입니다. 이 포스트가 동아닷컴 기사로 선정되었습니다~☆

  6. D 드래곤

    2010-03-13

    잘 읽고 가겠습니다.

  7. 카프

    2010-03-13

    (**제 시리즈 글은 현재 분단으로 인해 직접적으로 고통 받고 있는 국내외의 많은 분들과 함께, 우리들의 과거 역사를 함께 되돌아보면서, 조금이나마 그 아픔을 함께 나누고 싶은 작은 마음에서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지난날 굴곡 많았던 우리 역사를 현재 우리들의 위치에서 되짚어보며, 지금도 남북한 사회 모두가 발전의 제약이 되고 있는 분단문제에 대해 근원적으로 다시한번 생각해 보고, 오늘날 남북문제를 풀어가는 데 있어서 우리들의 역할문제를 함께 고민해 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제 글의 논지는 이전 글들과 일정하게 연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처음 보시는 분들은 앞의 글들도 참고해 주셨으면 합니다.)

    - 분단 역사 이야기 (3) -

    1.

    오늘은 세계 근대사에서 나타났던 두 개의 커다란 역사적 사건 가운데 첫 번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지난 번 글에서 근대 자본주의 사회의 사회 모순들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사회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노동자들의 ‘자기해방적 능동적 행위’를 언급한 바 있는데요, 그 ‘능동적 행위’가 대표적으로 실제 역사에서 어떻게 나타났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첫 번째 역사적 사건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먼저 다음의 노래 가사를 한 번 음미해 보고 넘어갈까 합니다. 이 노래는 일제시대와 해방공간 시기에 민족독립과 사회변혁을 위해 싸운 조선의 독립운동가ㆍ사회주의자ㆍ사회변혁 실천가들이 불렀던 노래가사입니다.

    -철창의 봄-

    동남풍이 불어서 포도꽃 피고
    향기로운 바람은 철창을 싼다
    아~ 불란서에 봄이 왔건만
    잘 있거라 이 봄아 나는 가련다

    진달래꽃 무르녹은 언덕 밑에서
    순이야 잘 있더냐 고향의 마을
    이국에 가신 님의 부름소리에
    조선이여 불러보며 울기도 했다

    그런데 이 노래 가사에 나오는 ‘불란서의 봄’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요? 왜 일제말기까지 끝까지 일제에 타협하지 않고 비타협적으로 투쟁한 조선의 독립운동가ㆍ사회주의자들ㆍ사회변혁 실천가들은 일제시대 국내에서, 그리고 만주에서 독립운동을 하며 ‘불란서의 봄’을 그리워했을까요? ‘포도꽃’ 등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이 노래의 1절 가사는 분명 프랑스와 관련된 내용인 것 같고, 2절은 일제시대 고향을 떠나 투쟁하던 조선의 독립운동가ㆍ사회주의자들의 마음이 담겨 있는 노래가사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노래를 직접 한 번 들어보고 싶은 분들은 포탈 검색창에서 ‘철창의 봄’으로 검색하시면 들을 수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불란서의 봄’이란 바로 1871년 3월 18일부터 5월 28일까지 존재했던 파리코뮨(commune de paris)을 상징적으로 지칭하는 말입니다. ‘코뮨’이란 말은 중세에서부터 ‘자치공동체’의 의미로서 사용해 오던 말이지만, 그것이 프랑스 근대시기 혁명투쟁을 거치면서 프랑스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능동적 행위 의미를 담아, 다수의 구성원이 서로 인간답게 어우러지는 자치 ‘공동체’를 뜻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1871년 봄 프랑스 파리의 노동자들과 시민들은 당시 부르주아 정부의 반국민적 반시민적 행위에 반기를 들고 200만 파리시민 모두가 떨쳐 일어나 자신들의 정부, 즉 노동자 정부를 세워 두 달 동안 자치정부를 운영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파리꼬뮨’입니다.

    2.

    이 파리꼬뮨은 20세기 가장 영향력과 파급력이 컸던 1917년 러시아혁명에 일정한 영향을 끼쳤던 사건이고, 또 러시아혁명은 한국근현대사 특히 남북 분단사ㆍ북한사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던 사건이기 때문에, 저는 한국 근ㆍ현대사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 두 사건의 역사적 의미와 성격을 우리들은 정확히 알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 두 사건의 역사적 자리매김은 앞으로 살펴보고자 하는 세계 근현대사에서의 굵직한 사건들, 즉 2차 세계대전 이후 동유럽 나라들의 정치변화의 성격, 1949년 중국혁명의 내용, 해방공간 북한지역 ‘민주개혁’(이른바 ‘반제반봉건인민민주주의혁명’)과 어떤 차이점들이 있는지를 밝혀내는 데 있어서 중요합니다.

    파리꼬뮨은 한마디로 인류역사에서 노동자 계급이 자신들의 능동적 행위를 통해 자신들의 정부 즉 ‘노동자정부’를 세운 세계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프랑스는 산업혁명의 영향으로 자본주의가 크게 발전한 상태였고, 식민지 약탈전쟁에서도 몇몇 나라들과 함께 중심에 서 있었습니다. 1848혁명을 가로챈 나폴레옹 3세(루이 보나빠르뜨/ 나폴레옹 1세의 조카)는 20년 동안 통치하면서 방대한 자본주의 관료국가(50만 명 가량의 관료와 50만 명 가량의 군대)를 운영하고 있었고, 언론, 집회, 결사의 자유를 금지하는 것은 물론 폭압적으로 노동자들의 투쟁을 탄압해 오던 상황이었습니다.

    1870년 7월 보불전쟁(‘독불전쟁’ 또는 ‘프로이센ㆍ프랑스전쟁’이라고도 합니다.)이 일어났는데, 9월 2일 나폴레옹3세가 프로이센군(독일군)의 포로가 되는 일이 벌어집니다. 이런 상황에서 파리의 노동자 및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국민방위군(일종의 의용군)’에 지원하여 프랑스 방위에 전력을 다하였습니다.

    그런데 당시 부르주아지를 대표하던 정부 관료들은 파리시민과 국민방위군의 항전주장에도 불구하고 프로이센과 강화하는 쪽으로 입장을 취했고, 2월 말에 티에르를 임시행정장관으로 하는 국민의회(보르드 의회)는 파리시민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알자스, 로렌지방의 할양 등의 내용을 포함한 굴욕적인 베르사이유 강화조약을 체결합니다. 그리고 곧바로 자본가, 채권자, 지주들의 이해를 대변하고 있던 국민의회는, 시민들에게 모든 부채와 임대료를 당장 지불하라는 명령을 내리고, 자신들만 프로이센군에게 포위되어 있는 혼란스런 파리에서 빠져나와 프랑스 남쪽 바르세이유로 피신하려 하였습니다. 당시 파리는 5개월 가까이 독일군에게 포위되어 있는 상황에서 마침내 식량도 바닥이 나 고양이 고기가 식품점 진열대에 올라오고 말, 개, 쥐, 동물원의 코끼리까지도 잡아먹어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마침내 임시정부는 파리 시내 전선을 지키고 있던 대포마저 지들 꺼라고 퇴각하려 하자, 파리의 노동자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고, 격분한 파리노동자와 시민들은 정부에 전쟁을 선포하였고, 그 과정에서 일부 정규군이 부르주아 정부의 지시를 거부하고 국민방위군에 합류했으며, 3월 18일 정부가 정부군을 동원하여 기습적으로 파리 민중지구의 국민방위군 진지를 탈취하고 국민방위군을 해산시키려 하였으나, 파리 민중의 반격으로 부르주아정부는 베르사이유로 퇴각했습니다.다. 투쟁지도부는 새로운 정식 정부가 성립될 때까지 ‘중앙위원회’로 결집했습니다.

    그리고 3월 28일 파리시내 20개구에서 선거를 실시하여 자신들의 대표를 뽑고, 새로운 혁명정부를 구성하였습니다. 구성원의 대다수는 노동자들이거나 노동자들의 공인된 대표들이었습니다. 이들은 파리노동자들과 소시민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책들을 입안하고 즉각적으로 시행해 나갔습니다. 국가와 교회의 분리, 야간노동 금지, 아동 노동금지, 교재학용품 무상지급, 징집제 폐지와 자발적 윤번제 실시, 빈곤층의 부채와 임대료 지불 일시 연기, 방치된 공장 및 작업장의 자발적 공동운영, 공무원 봉급 상한제 제정, 국가(정부) 차원의 종교교육금지 등 전적으로 당시 파리노동자들과 시민들의 이해를 대변하는 정책들이었습니다. 매춘도 사라져 여성들은 생산적인 노동에 종사했고, 이전 고관들이 누리던 기득권과 판공비 같은 것도 사라졌습니다. 교육시설은 파리시민 누구에게나 무상으로 개방되었고, 교육의 기회도 만인에 개방되었습니다. 물론 꼬뮨은 개인적인 사적소유를 부정하지도 않았고, 종교는 억압적인 이전의 국가와 분리되어 개인의 문제로 되었습니다. 파리의 상점주, 수공업자, 소상인들도 자신들과 대립적이지 않은 꼬뮨을 적극 지지했습니다. 이런 정책들이 나올 수 있었던 것은 노동자들을 주축으로 하는 정부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는데, 당시 상황을 말해주는 한 자료를 구체적으로 보겠습니다.

    “꼬뮨 최초의 포고령은….상비군(정규군)을 철폐하고 그것을 무장한 국민들로 대체하는 것이었다. 꾜뮨은 시의 다양한 구(區)에서 보통선거로 선출되었고, 단기간 책임 소환 가능한 시의원들로 구성되었다. 그 구성원의 대다수는 자연스럽게 노동자 혹은 노동계급의 공인된 대표들이었다. 꼬뮨은 의회기구가 아니라 상설 행정부인 동시에 입법부였다. 경찰은 중앙정부의 하수인 역할을 더 이상 계속하지 않았으며, 이전의 정치적 속성을 벗고, 언제라도 책임소환이 가능한 꼬뮨의 집행인으로 바뀌었다. 행정부의 다른 모든 부서의 관리들도 마찬가지였다. 꼬뮨의 구성원들은 노동자의 임금을 받고 공공 서비스를 수행해야만 했다……….사이비 독립성의 가면이 법관들로부터도 벗겨졌다. 그동안 법관들은 모든 정부에 대해 충성의 맹세를 한 다음 다시 그것을 파기하곤 했던 자신들의 비굴한 굴종을 은폐하는 데 기여했던 것이다. 나머지 관리들과 마찬가지로, 치안판사와 법관도 선거로 선출되고, 책임을 져야 했으며, 소환될 수 있었다.”(『프랑스 내전』중에서 )

    3.

    우리들은 이러한 파리꼬뮨의 성격을 어떻게 일반화해서 그 핵심을 짚어야 할까요? 파리꼬뮨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지만, 역사가들은 대체로 다음과 같은 해석으로 견해가 모아지고 있습니다. 첫째는 파리꼬뮨 즉 ‘노동자 정부’는 이전 시기 억압적인 정부 형태들과는 달리 철저하게 ‘개방적인 정치형태’였다 라는 점입니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직접 선출된 노동자 대표들 즉 정부의 구성원들(오늘날로 말하면 정부각료, 고위공직자, 국회의원 등 정치가들, 관료특권층 등)이 노동자들의 평균임금(!)을 받고 공공 서비스 일을 수행했다는 점입니다. 파리꼬뮨의 두 번째는 특징은 대표가 잘못이 있을 경우 그 책임을 즉각 묻는 것과 동시에 언제라도 즉각 소환이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상비군이 폐지되고 그 자리에 ‘국민방위군’(민병대)이 윤번제로 그 자리를 차지했다는 점이었습니다. 이것이 이후 역사에서도 노동자 정부들(혹은 그 맹아형태의 정부들)에서 나타났던 일반화된 바로 노동자 국가(정부)의 특징들입니다.

    다시 말해 파리꼬뮨은 국가와 국민 간의 분리를 없애고 국가를 주민들의 통제에 복속시키는 형태였습니다. 분명 당시까지 보여 왔던 부르주아 정부 보다 훨씬 고차원적인 형태의 민주주의였습니다. 자본가 정부에서는 국가와 국민이 분리되고, 국민이 대상화됩니다. 일(노동) 하는 사람 따로 있고, 정치하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 4년마다 혹은 5년마다 돌아오는 선거에서 국민들은 그(선거) 때만 일시적으로 굽신거리는 정치가들을 선택할 뿐이고, 이후 정치가들이 그들만의 이해를 위해 무슨 짓을 하든 관여할 수 없습니다. 국민은 국가와 사실상 관계를 맺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명목상으로만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부와 권력의 실질적 불평등에도 불구하고 투표행위로 마치 동등한 것처럼 나타납니다. 나중에 속았다고 자각하면서도 돌아오는 선거에서 또 속는 것이 부르주아 정치의 특징입니다. 현재 북한 같은 경우는 이러한 부르주아 보통선거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물론 파리꼬뮨의 한계도 있습니다. 놀라운 점이도 한데, 혁명과정에서 여성들이 역할이 매우 컸음에도 불구하고 19세기 후반기 그 때까지도 자코뱅주의의 영향이 남아 있어서 여성들이 선거에서 배제되었습니다. 여성들의 선거권과 해방은 1917년 러시아혁명에서 자신들의 역사적 존재를 확실히 드러내며 완전한 권리를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스탈린체제의 아래에서의 여성문제는 나중에 지적하겠습니다만, 일단 여기서는 구분해서 봅시다.) 그리고 꼬뮨정부의 문제점은 프랑스 지방 도시들에서도 파리꼬뮨의 소식을 듣고 동조운동을 벌여나가는 모습을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가지고 있던 ‘선량한 품성’ 때문에 반혁명 위협을 갖고 있던 베르사이유에 있는 적들에 대해 그들이 재정비를 채 갖추기 전에 과감하게 공격하기를 꺼렸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베르사유에 물러나 있던 부르주아 정부는 재정비를 마친 다음, 한 때 자신들의 적이었던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과 이웃 부르주아 정부들의 지원을 받아 고립된 파리를 포위했고, 마침내 5월 21일 파리시내 내부에 사전 침투시킨 밀고자들의 손수건 신호에 따라 기습적으로 공격하였습니다. 파리노동자와 시민들은 시내 곳곳에 바리케이트를 쳤고, 결사항전을 하며 시가전이 전개되었습니다. 그러나 ‘피의 일요일’이라고 부르는 일주일간 정부군에 맞서 격렬하게 저항했으나 5월 28일 파리꼬뮨의 최후의 전사들은 파리 동부 방센 요새에서 패하며 ‘불란서의 봄’을 마감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3만 명 가까운 파리 시민이 정부군에 의해 학살되었고, 4만여 명이 군사재판에 회부되었으며, 1만여 명이 사형, 무기징역 및 그밖에 유죄선고를 받았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80명의 어린이와 130여 명의 부녀자들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파리 북쪽 페르 라세즈 묘역에는 꼬뮨의 최후전사들이 총살되었던 ‘파리꼬뮨 병사의 벽’과 그 전사자들의 무덤이 남아 있습니다.

    4.

    맑스는 파리꼬뮨에서 새로운 사회의 맹아와 원형을 찾았습니다. 그는 노동해방, 인간해방의 새로운 세상을 ‘골방’에서 몽상으로 찾지 않고, 현실 노동자 시민들의 투쟁에서 나타나는 모습에서 발견했습니다. 19세기 근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회구성원의 다수를 차지하는 노동자계급이 체제의 모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자신들의 정부까지 만들었던 최초의 능동적이고 역사적인 행위는 이런 형태로 나타났습니다.

    사실, 선입견을 버리고 냉정히 생각해 보면, 파리꼬뮨에서 보여주었던 파리노동자ㆍ시민들이 모습(사회내용)은 오늘날 사회의 엄청난 특권과 혜택을 받고 있는 남북한 위정자들의 모습(당장 ‘국회의원 특권 혜택’을 한 번 검색해 보세요), 부패한 중국지배층들, 미국 관료들을 생각할 때 훨씬 더 민주적인 내용이 아닐까요? 우리들의 대표자들이 우리들의 평균봉급을 받는다는 것이 현재 남북한에서 가능한 일일까요? 파리꼬뮨의 교육정책과 그 정신은 학생들을 무한경쟁으로 끊임없이 몰아넣고 ‘예산타령’만 하는 오늘날 위정자들의 ‘민주주의’보다 140년 전 ‘민주주의’가 백배는 더 민주적인 것이 아닐까요? 성매매가 판치는 오늘날의 사회보다 140년 전 ‘민주주의’가 더 건전한 사회 아닐까요? 한창 젊은날 10년 이상을 군대에서 청춘을 썩혀야 하는 오늘날 북한사회 지배층들이 떠드는 ‘민주주의’ 보다 140년 전 민주주의가 천배는 더 민주주의적인 것이 아니었을까요? 나라 예산을 국민(서민과 주민)들을 위해 우선적으로 쓰려하지 않고, 자신의 과시 및 권력유지와 사적인 욕심을 챙기려는 남북한 위정자들의 위선의 ‘민주주의’ 보다 140년 전 노동자 민주주의가 훨씬 더 역사적 의미를 갖는 민주주의가 아닐까요?

    5.

    원래 이번 글에서는 가능한 한 빨리 해방 후 남북분단사를 다루기 위해 파리꼬뮨과 1917년 러시아혁명을 함께 다루려고 했는데요, 쓰다 보니 수박겉핥기 식으로 넘어가기도 좀 그렇고 해서,… 또 해방공간 역사를 오늘날의 시점에서 되돌아 볼 때 이 사건들에 대해 되새겨 볼 문제들이 있는 것도 같아서 글이 길어졌습니다. 그리고 위에서 노래 이야기도 나와서 조금 미리 언급할 내용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파리꼬뮨, 러시아혁명과 우리나라 역사 특히 해방공간의 역사와의 관련성 문제인데요…..자세한 것은 그 시기를 다룰 때 말씀드리도록 하고요…우선 저 얘기만 짧게 할께요.

    2년 전인가 3년 전에 ‘서울1945’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저는 그 드라마를 보지는 못했습니다만, 해방공간 실제 인물인 이강국과 일명 ‘조선의 마타하리’라고 불리는 김순임을 다룬 드라마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러데 거기서 나오는 이강국이 일제시대 독일유학도 갔다오고 해방공간 박헌영과 함께 사회변혁이론에 관한 꽤 뛰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는 인물입니다. 북에 가서 비참한 생을 마감은 했지만요…물론 김일성은 이론적으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풋내기에 불과 했구요.(증언 기록들을 보면, 김일성은 사석에서 박헌영을 부를 때 “여보 이론가” 그랬답니다),,,그 오늘날 김일성의 저작으로 알려져 있는 김일성의 초기 글들 가운데 내용의 상당수와, 해방직후 당시 그가 했던 연설문 등의 거의 대부분은 실제는 해방직후에 소련에서 지원 나온 사람들(일명 ‘소련파’)에 의해 작성된 것들입니다.

    그런데, 이른바 ‘8월 테제(방침)’(해방직후 좌파진영의 운동 지침 문건)를 직접 작성했던 박헌영과 이론적으로 뛰어났다는 이강국 조차도 제가 보는 관점에서는 파리꼬뮨과 러시아혁명의 의미를 비롯한 맑스주의의 핵심고리들을 그 시기에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그것은 2차 세계대전 전후의 제3세계 나라들의 노동자 민중들의 투쟁과 그 투쟁을 지도하고 책임졌던 지도부의 노선을 구분해서 생각은 해야 할 문제입니다만,… 어쨌든 해방공간 변혁운동진영이 가지고 있던 운동노선의 한계가 그 당시 개별 나라 지도부들의 개인적 문제라기보다는 당시 세계 좌파진영 운동을 총괄 주도(지도)하고 있던 스탈린주의의 근원적 한계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동유럽도 마찬가지였구요. 그래서 우리들은 스탈린주의와 스탈린주의 이전의 운동이 어떻게 다르고, 스탈린주의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고, 그것이 어떻게 조선에 투영되었는가, 또 그 속에서 분단의 원인문제를 당시 세계정세 문제와 함께 찾아 볼 수 있는 내용들은 없는가 하는 점 등을 이어지는 글들 속에서 다루려고 합니다.

    글이 길어서 죄송하구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운영자님, 댓글 수정기능을 추가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8. Hs

    2010-03-13

    댓글달기를 로그인으로 제한하니 예전보다는 조금 낫군요.
    예전보다 좀더 성숙된 댓글들이 기대됩니다
    한술에 배부르긴 좀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_-;

  9. Hs

    2010-03-13

    카프님의 글은 잘 읽어보았습니다. 파리 꼬뮨이군요.

    그런데 꼬뮨식 체제를 정부에 적용하는 개념은 당시 상황에서 완전히 새로운 과도기적 정부였음을 감안하더라도 애당초 조금 현실성이 없었던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됩니다.

    20세기 초부터 아나코-신디컬리즘에 기초한 수많은 농촌공동체가 세워졌지만 80년대 이후부터 현재까지 거의 대부분이 없어지기도 하였고, 소비에트 정부의 변화조차도 단순한 변질이 아닌 (국가를 형성하기 위해 기초적으로 필요한) 권력흐름의 이동현상의 하나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본 적이 있습니다.

    국가라는 것이 필요에 따라 일정한 형태의 강제성을 띌 때도 있고 전체 구성원들이 지도부에 자발적이면서도 지속적인 협력과 지지를 하여야 일관된 정책을 펼칠 수 있는만큼 (현재 시점에서도) 국가라는 존재에 적용하기는 조금 이르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작은 농촌공동체에서도조차 제대로 적용이 되지 않아 결국은 문을 닫곤 하니 탐욕스러운 이웃국가들을 두고있는 이상 코뮨 체제로 국가를 운영하자는 개념은 상당히 비현실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분명 혁명을 달성한 레닌과 트로츠키도 새로운 소비에트 체제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파리 코뮨과 마찬가지의 형태의 좌절을 하고 생각의 전환을 했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스탈린체제는 단순한 혁명의 변질이 아닌 이미 예정된 파국이 아니었나 하는 주장이 맞다는 생각도 듭니다.

  10. Hs

    2010-03-13

    생각해 보니 제 용어선정이 잘못된 듯 하군요. 아나코 생디칼리즘이 아닌 그냥 생디칼리즘을 얘기했어야 했었습니다. 아나코 생디칼리즘은 코뮨하고는 또 조금 다르겠지요 ^^;
    아무튼 (만약 이 글을 보신다면) 좋은 글 기대해 보겠습니다

  11. 서태하

    2010-03-14

    재밌네요

  12. 간호사

    2010-03-15

    간호사 누나가 좀 불쌍하네여

  13. 통일?

    2010-03-15

    잘 읽었습니다

  14. Mitchel Teichert

    2011-05-05

    I’d come to pass on with you one this subject. Which is not something I usually do! I enjoy reading a post that will make people think. Also, thanks for allowing me to speak my mi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