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북한축구해부2>-남한에도 없는 5부 리그 북한엔 있다 (22)
by 주성하기자 2010/02/07 4:57 pm
이런
숙청 분위기에 대표팀도 말려들었다. 대표팀이 갑산파의 지도자이자 북한 2인자였던
박금철 당 중앙위원회 조직담당부위원장과 김도만 선전담당부위원장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는 이유였다. 실제 박금철과 김도만은 자신들의 업적을 내세우기 위해 축구를
크게 활용하기도 했다.
분위기가
바뀌면서 선수들은 끝없는 사상투쟁회의를 벌이고 자아반성을 해야 했다.
이
과정에 신영규는 지주 아들이라는 점이 문제가 됐다. 대표팀은 결국 숙청돼 지방에
흩어졌다. 이때의 숙청바람이 얼마나 무서웠던지 1968년 중순 지방 중견 간부직의
3분의 2가 공석이었다고 한다.
당시
북한에는 대표팀이 8강전을 앞두고 제국주의자들의 ‘기생 작전’에 말려들었기 때문에
숙청됐다는 소문이 돌았다.
포르투갈전을
앞두고 숙소에 침입한 외국여자들과 잠자리를 같이해 다리에 맥이 빠져 5골이나 허용했다는
것이다. 소문의 진위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천리마축구단을 자부하던 북한팀이 중요한
경기를 앞두고 그렇게 정신자세가 풀어졌다는 점은 믿기 힘들다.

북한팀의
월드컵 8강신화를 소재로 제작한 다큐멘터리 ‘천리마 축구단’.
숙청된
선수들이 가장 많이 배치된 곳은 함경북도 경성군의 생기령요업공장. 노동자가 됐지만
축구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 당시 요업공장의 출퇴근길에서 공을 발로 툭툭
튕기며 가는 전직 대표팀 선수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고 한다.
보석은
진흙탕에 묻어도 보석이다. 몇 년 뒤부터 요업공장 자녀들이 다니는 학교 축구단이
전국대회에서 늘 1등을 차지하기 시작했다. 8강 주역 대다수가 함북에서 추방생활을
해서인지 지금도 함북 축구팀은 각 도 축구팀 가운데서 최강이다.
10년간의
‘혁명화 기간’이 지난 뒤 북한 당국은 일부 선수들을 복귀시켰다. 이미 현역 나이를
훌쩍 넘긴 까닭에 대개 감독이 됐다.
그러나
일부는 영원히 묻혔다. FIFA 회장이 극찬했던 신영규가 대표적이다. 북한 당국은
그가 1996년에 사망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런던월드컵 이후 그의 행적은 알려진 바
없다.
월드컵
본선 아시아 선수 최초 골 기록을 가지고 있는 박승진은 1980년대 중반 요덕정치범수용소에
있었다고 한다. 그가 “먹어본 벌레 중에 바퀴벌레가 가장 맛있었다”고 말했다 해서
수용소에서 그의 별명은 ‘바퀴벌레’였다고 한다.
2002년
영국인 다큐멘터리 제작자 대니얼 고든 감독이 북한에 들어가 런던월드컵 8강 진출기와
이후 이야기를 담은 ‘천리마축구단’이라는 다큐를 찍었다.
36년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8강 주역 중 그때까지 생존자는 박두익 박승진 림중선 임승휘 양성국
리찬명 한봉진 7명에 불과했다.

잉글랜드
월드컵에서 강호 이탈리아를 1-0으로 꺾은 승리의 주역 중 현재까지 살아 있는 영웅들이
가슴에 훈장을 달고 김일성 동상 앞에서 기념 촬영을 하고 있다. 왼쪽부터 박승진,
임중선, 박두익, 임승휘, 양성국, 이창명, 명례현 감독, 한봉진.
박승진은
수용소에서 사면된 것으로 보인다. 이들은 축구팀 감독을 하고 있었다.
고든
감독은 “북한 선수들은 서양 사람들이 자신들의 스토리를 다큐로 만든다는 사실에
놀랐다”고 말했다. 자신들이 잊히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한 것이다. 이들은 이
다큐를 계기로 그해 미들즈브러를 방문해 환대를 받기도 했다.
8강
대표팀이 숙청된 뒤 북한에선 “저렇게 세대를 끊어놓았으니 우리 축구가 앞으로
30년은 일어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돌기도 했다. 실제로 북한 축구는 이후 수십
년 동안 스포츠를 정치의 희생양으로 삼은 대가를 톡톡히 치렀다.
1960년대
남한은 아시아 최강인 북한과의 대결을 일부러 피했다. 1966년 런던월드컵 예선 때는
북한과의 대결에 부담을 느껴 일부러 출전을 포기하기도 했다.
북한의
8강 진출에 자극받은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은 1967년 1월 김호, 김정남, 이회택
등 스타들로 양지팀을 창단했지만 남북대결은 이뤄지지 못했고 팀은 3년 뒤 해산됐다.
남북
축구가 처음 국제무대에서 만난 것은 1976년 방콕 아시아청소년대회 준결승. 이때
한국이 1-0으로 패배했다.
대표팀
간의 첫 경기는 1978년 12월 방콕 아시안게임 결승으로 연장 혈투 끝에 0-0으로 비겨
남북이 공동우승을 차지했다.
1980년대부터
북한 축구는 확연한 열세를 보였다.
한국은
1980년 9월 쿠웨이트에서 열린 아시안컵 준결승(2-1)과 1989년 싱가포르에서 열린
이탈리아월드컵 예선(1-0), 1990년 중국 베이징에서 치른 다이너스티컵(1-0 )에서
모두 북한을 눌렀다.
1980년대
북한 축구계에서 주목할 점은 여자축구팀의 창설이다. 여자축구가 1986년 아시안게임
정식종목으로 채택되자 북한은 1986년 5월 여자축구팀을 창설하고 이를 전략종목으로
육성했다.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리는 북한 여자축구팀.
불과
3~4년 전만 해도 공식 출판물에서 “썩고 병든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여자까지 공을
차게 만든다”고 비웃던 것에서 태도가 싹 바뀌었다.
여자축구뿐
아니라 여자유도, 여자역기 등 비난의 대상이었던 종목들이 지금은 북한 스포츠의
효자 종목이 됐다. 초기에는 여자 축구선수를 육상선수 중에서 선발했다.
남자축구에서
남한에 계속 패하던 북한은 여자축구에서 드디어 반전을 이뤄냈다. 남북 여자축구대표팀
간의 첫 경기는 1990년 베이징 아시안게임에서 성사됐다.
북한의
7-0 대승. 당시 첫 골을 넣은 이홍실 선수는 현장에서 노동당원이 되는 ‘영예’를
안았다. 북한에서 현장 노동당 입당은 특별한 공을 세웠을 경우에 허용된다. 이홍실
선수는 이후 국제여성축구 심판원이 됐다.
승승장구한
여자축구와는 달리 남자축구는 세계와의 격차가 계속 벌어지기만 했다. 충격을 받은
북한은 결국 1990년대 초반 파격적인 조치를 내놓았다.
우선
1990년 북한이 주최하는 첫 국제축구대회인 ‘평양컵 국제축구대회’가 시작됐다.
우승팀 2만달러, 준우승팀 1만달러, 3위팀 5000달러라는 너무나 ‘짠’ 상금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대회는 1992년 3회까지만 열리고 중단됐다. 참가 희망국도 없었을뿐더러
북한의 성적도 시원찮았던 것이다.
또
다른 대책은 외국인 감독의 영입이다. 헝가리 출신으로 독일 리그에서 잔뼈가 굵은
팔 체르나이 감독이 영입됐다.
분데스리가의
전성기였던 1978~83년 사이 5년간 바이에른 뮌헨FC 감독을 맡았고 두 차례의 리그
우승을 이뤄냈던 이 명장은 1990년대엔 헝가리 한 프로팀 감독으로 추락해 있었다.
체르나이는
1991년 6월부터 1993년 10월까지 북한 대표팀 고문을 지냈다. 대표팀 감독은 북한인이었다.
초기 성과는 괜찮은 듯했다.
부임
4개월 만에 미국에서 미국 대표팀을 2-1로 이겼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체르나이의
북한행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아무리 명장이라고 해도 전권 위임을 받지 않은
한 북한 시스템에서 능력을 발휘할 공간은 크지 않았던 것이다.
1993년
10월 북한 대표팀은 미국월드컵 조별 예선 경기를 치르기 위해 카타르로 떠났다.
이때 북한은 단 1경기만 이기고 모두 패했다. 특히 한국팀에는 3-0으로 완패하면서
한국에 ‘도하의 기적’을 선물했다.
당시
체르나이는 카타르에서 곧바로 헝가리로 돌아갔다. 북한 대표팀 단장이던 체육위원회
김모 부위원장은 평양객화차대 노동자로 강직됐다.
당시
북한 대표팀 감독이던 윤명찬 역시 책임론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윤 감독은 1999년
한국으로 망명한다. 외국인 고문을 도입했던 개방파들이 된서리를 맞은 뒤 북한 축구는
12년 동안 와신상담에 들어갔다.
1995년부터
경제난이 본격화하면서 북한 체육계도 어려워졌다. 공이나 축구화가 제대로 공급되지
못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다른 종목에 비하면 축구는 그나마 나았다.
2004년에
문기남 전 북한 축구대표팀 감독 가족은 한국으로 망명했는데, 문 감독의 아들 문경민씨는
당시 북한 축구선수들은 그래도 육류를 먹었다고 증언했다.
문경민씨는
1990년대 기관차체육단 축구선수로 있으면서 국가대표로 뽑히기도 했다. 그는 독일에서
광우병이 발생해 수십만 마리의 소를 도살했을 때 북한은 이 쇠고기를 들여왔고,
이 고기가 축구선수들에게 우선적으로 공급됐다고 증언했다.
경제가
어려운 와중에도 축구 리그는 명맥을 유지했다. 북한에도 리그제도가 있다. 교통사정
때문에 홈경기와 원정경기 형식은 아니지만 1년에 3단계로 나눠 한 지역에서 집중적으로
경기를 치른다.
2월에
시작되는 만경대상대회는 4월에 우승자를 배출한다. 이어 7월에 토너먼트로 진행되는
기술혁신대회가 열리며, 9월에 리그전으로 치르는 공화국선수권대회가 있다.
3개
대회의 우승팀이 또 경기를 벌여 11월까지 최강자를 가리는데, 우승자가 겹치면 준우승자가
출전한다. 최종 우승자에게는 축구협회장컵과 함께 태국에서 열리는 킹스컵대회 출전권이
주어진다. 꼴찌팀 중 한 팀은 2부 리그로 강등된다.
1부
리그는 ‘최강팀경기’ 또는 ‘명수급리그’라고 한다. 시기마다 약간 달라지지만
1부 리그에는 보통 12개 팀이 소속돼 있다.
4·25,
평양시, 기관차, 압록강, 월미도, 리명수, 용남산, 경공업성, 대동강, 소백수 등의
체육단이 1부 리그의 고정 멤버다. 이 중 앞의 4개 체육단은 모든 스포츠 종목을
다 갖고 있는 특급 체육단이다.
또
각 도 축구단 사이의 경기에서 1위를 한 팀이 매년 1부 리그에 올라온다. 도 축구단에서는
함북이 강팀이다. 국가대표팀과 청소년대표팀이 1부 리그에 참여해 경기를 하기도
한다. 경기 감각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다.
2부
리그는 각 체육단의 2진과 도급 체육단이 소속돼 있다. 이런 식으로 북한에는 5부
리그까지 모두 130개의 전문 축구팀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많은 축구팀을 갖고 있으면서도 얼마 전까지 북한의 FIFA 랭킹은 100위권 밖에서
맴돌았다.
가장
큰 문제는 선수자원의 부족이다. 북한 전역을 열심히 돌아다녀도 신체적 조건을 갖춘
유망주를 발굴하기 어렵다.
20세
전후의 신체적 조건은 5세 미만 어린 시절의 영양공급에 크게 좌우된다. 하지만 축구선수
재목을 알아보고 유아 때부터 잘 먹일 방법은 없다.
경제난으로
어려서부터 기초체력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에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 선수로 뽑은
뒤 그때부터 아무리 잘 먹여봐야 한계가 있다는 것이 북한 축구관계자들의 고충이다.
재능이 있는 선수를 뽑아도 키와 체격이 따라주지 않아 외국팀에는 고전할 수밖에
없다.
이런
한계를 의식했기 때문인지 최근 선수 발굴 연령대가 점점 어려지고 있다. 20세 이하,
17세 이하, 15세 이하 팀에 이어 최근에는 12세 이하 팀들도 생겨났다.
여기서는
8~9세 어린이도 뛰는데 이런 팀은 4·25체육단에도 여러 개 있다. 이는 축구
유망주들을 최대한 어린 시절부터 잘 먹여 평균 신장을 키우는 효과를 내기 위해서다.
하지만
아무리 잘 먹인다고 해도 북한 안에서는 한계가 있다. 최근에는 남측이 중국 쿤밍에서
훈련을 하는 북한 축구팀을 지원하고 있다.
모든
팀이 다 나올 수는 없기 때문에 매 연령대 팀에서 한 개 조씩 나오는 식이다. 한창
자랄 나이인지라 반년 동안만 중국에서 잘 먹다가 북한에 들어가면 북한에 남아 있던
같은 연령대 축구팀과는 키가 벌써 확연하게 차이 난다고 한다.
(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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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g
2010-02-07
좋은글
내가 일등..
2010-02-07
헉~내가 일등이네..첨이닷ㅅㅅㅅㅋㅋㅋㅋ
내가 2등
2010-02-07
2등도 내가 먹자3등은 안해….
북괴타도
2010-02-07
SDFS님 이런글에 꼭 광고글을 올리셔야겠습니까?
광고글은 삼갑시다.
카프
2010-02-07
그렇군요……
처음에 주기자님이 어떻게 북한 축구계의 사정을 잘 아실까 의아해 했는데,,,
북한 축구계의 주요인사 몇 분이 탈북하셔서 남한에 오셨군요.
저는 1960년대 말 2차 종파사건(갑산파숙청사건) 당시 축구계에까지 영향이 미친줄은 미처 몰랐네요.
북한 축구사에서 북한 축구발전의 씻지못할 아픔의 시기가 그느무 정치적 사건(김일성 유일사상화=1인독재체제 강화과정=부자세습과정) 때문에 피해갈 수 없었다는 사실은 매우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그리고 주기자님의 글을 보니까, 이런 생각이 드네요. 남북 축구사에서 축구의 실력차이는 남북한 경제력의 차이의 상관관계와 일정한 맥을 같이 한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또 그럴 수 밖에 없겠지만요….
저도 이번 월드컵에서 남북한 축구가 모두 좋은 성적을 내기를 바랍니다만, 한편으로는 또 다시 스포츠가 정치에 이용된다든가 희생양이 되지 않을까 걱정도 드네요. 히틀러도 1930년대 스포츠를 정치에 활용했고, 5공시절 전두환도 특정 스포츠(프로야구 초창기)를 통치에 접목했죠.
근데, 축구얘기하고는 좀 벗어난 이야기이지만, 위 사진 가운데 가슴에 덕지덕지 붙힌 훈장사진들을 보니 저는 참 씁씁함을 느낍니다. 물론 훈장제도라는 것이 남한에도 있고(무궁화훈장, 국민훈장 등), 자본주의국가들 거의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존재하는 것입니다만, 훈장제도는 특히 기존 ‘공산’권(실제는 국가자본주의 체제) 나라들에서 발전했고, 특히 스탈린체제가 특히 심했죠. 1917년 러시아 노동자혁명 직후 한 10년간(1917년~1928년)은 저런 훈장제도가 없었습니다. 러시아는 1920년대 말에 스탈린의 반(反)혁명에 의해 다시 자본주의 사회(국가자본주의)로 되돌아갔는데, 그 때부터 1917년 이전 시기 짜르 전제정의 악습들이 다시 되살아 났고, 훈장제도도 그 악습 가운데 하나로서 스탈린이 계급통치 수단의 일환으로 다시 등장시킨 것이죠. 독재국가에서 훈장제도란 독재자가 다수 국민들을 다루는 하나의 통치기법이고, 비민주적 요소가 심한 사회일수록 그 제도가 활성화된 측면이 면이 있죠. 물론 나라에 훌륭한 역할을 한 사람들을 무시해서는 안되겠죠. 대우는 해 주되, 그것이 실질적으로 당사자에게 국민들의 마음과 뜻이 담겨 혜택이 돌아가게 하면 되는 것이지, 그러한 행위와 과정이 지배자 및 독재자가 계급지배를 위한 수단의 일환으로 과시 선전되면서 이용되어서는 안된다고 봅니다. 개인의 능력과 특기가 독재자의 정치적 이해에 반할 때는 수용소에 쳐 넣고,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부합할 때는 가슴에 훈장이랍시고 주렁주렁 (좀 심하게 표현하면 개 목걸이 달듯이) 달아주는 통치행태는 분명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진정으로 민주화된 사회와 인간이 해방되어 가는 사회는 그러한 모습들과는 거리가 멀다고 봅니다.
좋은 글 잘 봤습니다.
소악녀
2010-02-07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북괴타도
2010-02-07
저기요 주기자님 북한 신의주 초산 만포 그쪽에 폭동일어났다는 말을 들었는데 그건 어떻게 되었나요? 궁금합니다.
하나
2010-02-07
잘 읽고 갑니다~
이거
2010-02-07
저 훈장단것 참 보기 머~합니다. 한국사람이 보면 개목거리 밖에 안보이네요.ㅋ 저걸훈장이라고 준 정일이 ㅋㅋ
ㅎㅎ
2010-02-07
수늬꿘
matt1983
2010-02-08
음, 주기자님 북한 축구에 대하여 정리하신 글 잘 읽었습니다.
스포츠 특히 축구는 북한이나 남한이나 정말 인기종목입니다.
그리고, 북한여자축구 잘 하는 거 보고 매우 놀랐습니다.
본문에서 5부 리그까지 있다는 거 보고 그랬구나 하고 생각합니다.(많이 지원한다라는 느낌)
남아공 월드컵 예선전에서 북한 축구하는 거 보고 투지하나는
남한축구 선수 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더라구요.(남북한 전에서)
(내 주관적 견해일 수도 있으니 악플 달지 말아 주세요^^)
그런데 조추첨 때문에 좀 실망이 되었죠.
그러나 좋은 성적 거두어서 북한 인민들 희망과 용기 주길 바랍니다.
다시한번,
축구사 정리하시느라 수고 하셨어요.^^
남과 북의 가교가 되어 주세요.
남북한입장차이
2010-02-08
남한의 입장 :
통일은 좀..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북한 경제 개발권은 중국에 대부분 넘어가 있으며..
백두산까지 6.25전쟁을 일의킨후 자신들의 마음데로 중국에 절반을 뗴어준 댓가도 치뤄야 하고
북한의 자원 개발권도 다 중국이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남한을 괴롭힌 책임도 북한사람들에게 상당하다고 생각하는데
남한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북한사람들을 위해서 세금을 두배로 내려고 할리가 없을거같습니다
게다가 북한처녀들이 중국인들에게 대거 팔려나가고 이런 더러운 일들이 게속 되고 있어서
남한 사람들까지 같은 민족으로 치부가 되면 남한사람들도 중국인들에게 싸게 먹힌다 라는 인식이 됩니다
마치 홍콩,대만 사람들이 중국인인것을 부정하는것처럼 그렇게 되어가는겁니다
제가 생각해도 좀 거부감이 심하게 느껴지네요 지금까지 북한에게 무상으로 원조한것으로 충분하고
남한사람들을 납치 북송 시킨 지금까지 책임을 모두 북한이 사죄하고 보상하지 않는한
아니 그렇게 해도 남한사람들은 북한과의 통일을 달가워하지 않을겁니다
어쨌건 통일은 절대적으로 반대입니다
북한입장:
6.25에 의해서 남한사람들을 무차별로 많이 죽인것은 인정하지만 우리또한 김일성에게 속은것이다
그리고 50년대 초반에 남한이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때 북한이 식량 원조를 해주기도 했지 않나
그것을 남한사람들은 잊은것인가? 우리가 가난한 삶을 살고 있는것은 군부의 탓이지 우리 탓이 아니다
그리고 북한사람들은 바보들만 있냐고 너희들은 왜 민주주의를 쟁취하지 않냐고 이런 말을 우리가 왜들어야 하나 우리들도 나름데로 혁명노선을 거치고 김정일 정권을 반대했던 수만명의 사람들이 교화소에 있다
남한사람들 못지 않게 엄청난 수의 사람들이 죽었단 말이다 그것에 관한건 제대로 조사도 안해보면서
북한을 단순하게 바라보려고 하는 남한의 시각이 안타깝다
gg
2010-02-08
어째서 통일은 불가능한가?
그 첫번째 이유로는 북한의 국제적인 범죄 행위 비열한 행위 비열한 납취등등 때문이다
동독과 북한은 똑같이 1945년에 분단 공산국이 되었다. 그러나 동독은 여러 면에서 북한과 달랐다. 상대방을 침략하지도, 상대국 장관들을 죽이지도, 지하에서 핵폭탄을 터뜨리지도 않았다. 같은 독재지만 동독에는 세습도 강제수용소도 없었다. 굶어 죽는 인민도 없었다. 동독은 체제의 유연성도 북한과 달랐다
그래서 서독 사람들은 동독을 같은 민족이라 생각하였고 기꺼이 통일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북한은 어떠한가? 몇만명의 남한사람들을 북한에 북송 시켜 성폭행,납치,사형 등등 수없는
범죄행위들을 저질렀는데 남한사람들이 북한사람들을 환영 할리가 없다
통일 이야기는 이제 끝이다
전씨가족
2010-02-08
남한은 자본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 북한은 공산주의에 입각한 민주주의 라는 면이 있는데 이 두 체제가 지나친 면으로 평행선을 달릴때는 영원히 합쳐 질 수가 없게 되지요.
북한에서는 제국주의적인 자본주의에 물든 자들을 사악한 악마로 보고 남한에서는 공산당사상을 가진 빨갱이들은 죽어 마땅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통일이 된다해도 서로 치고 박아서 피터지는 비극만 생기지요. 여기 이런 블로그의 댓글에서만 보더라도 자명한 일이지요.
사람사는 세상에 공산주의 적인 생각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고 자본주의 적인 생각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지요. 이런 사상의 자유는 선진국가들에게느 아무런 문제가 안되는데 유독 한국만은 이분법적 논리로 서로 대립을 하고 있는데 참으로 안타까운 노릇입니다.
개정일이가 독재를 하는 것은 분명히 반대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을 이데올로기 면으로 이해하면 안됩니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이들도 독재를 했는데 이것을 이데올로기적으로 이해하면 안되느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남한은 그래도 어느정도 민주주의를 찾아 오긴 했지만 북한은 민주주의를 못찾아 왔다는 것 그 정도로 이해해야지 빨갱이 타령으로 몰아 부치면 결국 해방후의 상황이 다시 전개 되어 집니다.
두 이념 체제를 인정하고 서서히 접근하는 방법이 비극울 줄이는 가장 좋은 방법입니다. 지금 남한 사람들은 남한의 자본주의만이 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자본주의 만을 민주주의라고 생각하는 그것이 무식이며 비극으로 몰고 가게 만드는 원인이 됩니다. 북한 역시 공산주의 만이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것이야 말로 조선이 통일이 안되는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사실은 두 체제가 향상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주장하니까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입니다. 해방이후부터 오늘까지 끝임없는 지금 이 지구상에도 없는 이데올로기 전쟁으로 남의 나라에 놀아나고 있습니다. 우리가 분단된 근본적인 원인은 일본에게 있습니다.
서서히 상대방을 인정하면서 평화적으로 나아가야 비극을 줄일 수 있습니다. 단 독재에 관해서는 탈북자들을 감싸 안는 것으로 독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암시적으로만 보이면 됩니다.
전쟁하면 남북한은 완전 거지가 됩니다. 그때는 중국 일본 미국이 이 나라를 분활로 따먹습니다.
김씨가족
2010-02-08
전씨가족 완전 무식이 철철 흐르네
니가 멀안다고 그딴식으로 댓글다는게냐
일기 적지말고 꺼져
쏘리쏘리쏘리
2010-02-08
박정희가 50년대에 북한의 발전을 보면서 남한의 경제가 너무 처참하니까 줄담배를 2년간 피웠다는
소리가 있던데 그후로 남한 경제가 북한을 추월하니까 줄담배도 끊고…
전씨가족
2010-02-08
서독이 우리나라 처럼 빈부격차가 극심한 자본주의 국가 였는가? 동독이 북한처럼 세습독재 공산주의 국가 였는가?
서독은 모든 교육이 무상인 사회보장제도 국가였고 동독은 역시 질서가 지켜지는 공산주의 국가 였다.
그들은 이데올로기적인 대립으로 나누어 놓을 수 없는 게르만민족이였지. 그들은 서로가 지나치게 증오
하는 이데올로기적인 대립국가가 아니였다. 서로를 향해서 빨싸움을 하는 민족이아니였지.
걸핏하면 좌빨 우빨하면서 코피터지는 이념분쟁주의자들이 있는한 영원히 이땅은 피의 싸움속에서
미국 일본 중국에 놀아난다.
벗어나지 못한다
ㅉㅉㅉ
2010-02-08
저 60년대 북한 축구 선수들~ 외국 같으면 평생 호강했을텐데… 저렇게 되다니… 토사구팽이란 말을 떠올리게 한다. 한신 장군의 비극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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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8
방콕청소년축구 남북대결 때,
남한의 함영준 골키퍼가 부상으로 쓰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있을 때
그냥 경기 진행시켜서 한 골 먹었음.
75년인 것 같은데, 76년인가?
키퍼는 들것에 실려 나왔는데,
정말 실신해서 정신이 없었던 건지
일어설 체면이 없어 끝까지 고 한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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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2
별로 관계없는 이야기일 수도 있는데 6개월만 잘먹다 들어가도 키가 확연히 차이난다는 대목이 참 가슴이 아프네요.. 어린이 청소년들이 못먹어서 키가 못큰다는 것은 무슨 아프리카도 아니고 같은 민족으로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광우병
2010-02-16
광우병 소고기에 대해
덧글에도 전혀 언급이 없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대한민국은 만일 정신병 지수가 있다면
과연 얼마나 건강할 지에 대해 의구심이 듭니다.
그때 그 오랜 동안 촛불 시위대로 대표되는 일군의 국민들이
먼지 만큼이라도 생리대에라도 닿기만해도
광우병에 걸린다고 울며불며 일으킨 소란과
명박산성….
쇼킹한 것은 유모차에 눈에 넣어도 아프지않을 소중한 아기들까지 동원해 일으켰던
그 하늘이 무너져 내린 것 같은 난리법석….
심지어 죽창 끝을 갈라 전경들의 눈을 찌르면서
마음으로는 이미 여러번 죽였던 그 극한의 분노심에 치를 떨었던 분들에 대해
뭔가 여전히 궁금한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것입니다.
독일에서 살처분한 광우병 ‘확진’ 소고기까지 포함 수입해서
그 귀한 축구선수부터 대접해 먹인
매우 안타까운 ‘사실확인’에 대해
과연
그분들은 어떤 ‘극심한 마음의 고통’을 느끼는지
그런 극악무도한 정권에 대해 어떤 의로운 분노심이 하늘을 찌르시는지
혹은 그쪽 못지 않게 ‘크게 속았다’는 것을 깨달은 지금은
피해를 크게 입은 다른 국민들
국격을 손상당한 많은 교포들에게 사죄까지는 아니라도
미안하다는 마음의 표현을 얼마나 능동적으로 하셨는지
유모차나 중딩들 졸업식에 던지는 밀가루 푸대는 과한 듯하고 혹은 무엇이든
행동하는 양심으로 표현하지는 못해도
불편을 끼쳐서
미안하다고
조그맣게 혼자 만의 블로그에라도 적어 놓은 분들이 있는지 등에 대해
궁금해도 될까요?
‘우리’가 더불어 산다는 데 대해 이해를 구하고자하는 한 국민올림.
Lennie Curreri
2012-01-28
Thank you for your article posting. Very much oblig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