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족보책에 불 지른 개성 살던 왕건 32대손 (13)

by 주성하기자   2017-09-14 3:01 pm

 

8월 8일 새벽 전화소리에 잠을 깼다. 새벽에 오는 전화는 북에서 오는 전화다.

 

그러잖아도 추석이 가까워 오면서 쓸쓸해지기 시작하던 터라 고미 아버지의 전화는 고향의 향수를 불러왔다.

 

여느 때는 긴장 속에 불필요한 말은 삼갔으나 “최채 엄마랑, 고미 엄마랑 다 잘 지내고 있어요? 보고 싶어요. 여기 살아도 한시도 고향을 잊은 적 없어요.” 그리움에 젖어있는 내 목소리에 고미아버지도 함께 감동한다.

 

“통일이 돼야 00아지미를 만나겠구먼. 통일이 인차 될 것 같소. 여기 분위기 보니까.”

 

그 말뜻이 뭔지 안다. 북한에서 살아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무언가를 암시해주는 나름의 예감일 것이다.

 

“고미아버지. 조금만 기다려요. 여기선 통일준비위원회가 조직되고 통일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제 통일이 되면 우리 모두 백두산에 올라가요.”

 

전화기를 타고 울리는 나의 말은 고미아버지를 통해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로 전달될 것이다. 백두산 밑에 사는 고미네 동네사람들의 어질고 순박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목숨 걸고 내 손목을 잡고 강 건네준 남철아버지에게 고맙단 인사도 못하고 헤어졌는데 그게 제일 맘에 걸린다. 

 

조상님께 아뢰는 간절한 소원
 
벌써 하늘이 높아지고 무더위는 서서히 물러가고 있다. 올해 추석은 빨리도 찾아온다. 하늘나라 조상님들과 함께 쇠는 이날은 1년 365일중 가장 큰 명절이지만 남한에 와서 추석은 내게 있어 제일 쓸쓸한 날이다.

 

부모님 산소에 밥 한 그릇 드리지 못하는 불효녀가 된 나, 외국이라면 그리 슬프지 않을 텐데, 내 땅인데도 갈 수 없다는 분단의 설음은 가슴속 한으로 쌓여져 갔다.

 

나만이 아닌 이 땅의 수많은 이산자 가족들과 탈북자 우리 모두의 천륜은 원한의 철책선에 꽁꽁 묶여 수십여년세월 고통에 몸부림치고 있다.
 
나는 북에 있을 때 남한사람들은 추석을 어떻게 쇠는지 참 궁금했었다.

 

남한 TV는 무서워서 자주 못 봤지만 라디오는 구들바닥에 엎드려 몰래 듣곤 하였는데 고속도로가 막히고 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들으며 (차가 얼마나 많으면 막히는가?) 이런 궁금증을 키우며 풍요로운 남한사회의 정경을 눈앞에 그려보았다. 

 

북한에서 추석은 년중 제일 잘 먹는 날이다. 조상 덕에 이밥이라고 이날이면 그리도 소원하던 고기, 생선을 제상에 올렸다가 먹어볼 수 있다.

 

지방별로 좀 차이 나지만 제상에 올려놓지 않는 음식으로는 고등어 같은 비늘 없는 생선, 닭, 소고기이다. 소는 조상이라고 소고기를 절대 올려놓지 않는다. 평안도 지방에서는 닭을 올리기도 한다.
 
추석전날만은 시장의 먹거리가 말짱 팔려나가는 날이다. ‘고난의 행군’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집안은 7촌까지 다 모여 추석을 함께 쇠었다.

 

추석전날에는 친척들이 제물을 꾸려가지고 우리 집에 모여든다. 우리 아버지가 집안의 좌상이었던 것이다. 밤을 새워 여자들은 송편을 빚고 생선을 굽는 동안 남자들은 구들위에 앉아 주패장(카드)을 번지거나 덕담으로 시간을 보낸다.

 

조상님들 잡수기전에 절대 음식을 먹어보면 안 된다고 어른들은 주의를 주었지만 나와 5촌조카는 마당에서 두부와 전을 부치며 몰래 입에 넣으며 히닥거리기도 했다.

 

어머니는 샘물을 길어다 제사음식을 정성껏 만드셨는데 죽은 사람을 위해 산 사람이 할 수 있는 성의표시이기도 했다. 하지만, 조상을 잘 모셔야 자손들의 일이 잘 될 수 있다는 희망이 더 크셨다.
 
점점 생활이 쪼들리면서 조상님 제사는 단순히 조상을 기리는 것보다는 집안자손들에게 복을 보내주기를 기원하는 기복의 장으로 되었다.

 

“할아버지. 요즘 살기 힘든데 우리 집에 돈 많이 들어오게 해주시고 먹을 걱정 없이 살게 해주세요.” “의덕이 병도 낮게 해주시고 집안일 다 잘되게 해주세요.” 제사 때마다 어머니나 우리 자식들은 간절히 빈다.

 

“죽은 사람이 뭘 안다고 그런 헛소릴 하고 있냐?”는 아버지의 삐뚤어진 말씀에 다툼이 시작된다. 평시에 옥수수밥에 국 한 그릇 덩그러니 차려주시던 어머니가 없는 돈을 털어 그 비싼 고기며 생선을 먹지도 않는 죽은 조상에게 드리는 것이 내심 심기가 불편하신 모양이다.
 
어머니는 제물 살 때 흥정하면 부정 탄다고 시장에서 제일 좋은 것으로 흥정 없이 사오군 하셨다. 그런데 아버지 때문에 매번 우리 집 제사는 부정을 타는 격이다.

 

“내 저 영감 땜에 속 터져 죽겠다. 웬수라고.” 어머니의 탄식소리를 들으며 나는 아버지가 한없이 원망스러웠다.

 

아버지의 심술궂은 언행으로 조상님이 대노해서 그런지, 조상 덕 보는 사람은 따로 있는지 그리도 제사에 정성을 드리지만 우리 집안일이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

 

‘잘 되면 제 탓이요, 못 되면 조상 탓이다’는 말처럼 도무지 생활고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원인을 조상을 잘 모시지 못한데서 찾곤 했다.
 
생명유지의 1차적 조건인 물질생활의 결핍은 사람들을 절망 속에 빠뜨려 놓았고 난관을 타개할 방책이 없는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사람들은 초자연적인 힘, 신령님이나 조상님들에게 궁여지책으로 매여 달리게 되었다.

 

남한에서도 꿈에 조상을 보면 로또에 당첨되거나 좋은 일이 생기는 것처럼 조상이 도와주는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죽은 사람이 그리 전지전능해서 산 사람 원하는 걸 다 해결해 줄 순 없는 노릇이다.
 
북한은 제사도 식량낭비나 구시대 관습으로 보고 없애고자 하였다.

 

1980년대에 죽은 사람에게 제상을 차리는 것은 사회주의 생활문화양식과는 거리가 먼 봉건풍습을 답습하고 식량낭비를 불러오는 것이니 간단히 꽃다발을 드리고 묵례나 하는 식으로 제사를 하면 어떻겠는가는 김일성의 교시도 있었다.

 

하지만 끝내 조상전래의 전통적인 제사법은 없애지 못했다. 국방력 강화에 우선적 투자를 하면서 이에 따른 경공업, 식생활부분에서는 저소비생활을 강요할 수밖에 없었던 북한은 1990년대 초반까지 관혼상제를 낭비의 주되는 요소로 보고 허례허식을 없애도록 처벌과 교양, 소개 선전에 열을 올렸다.

 

그러던 것이 “고난의 행군”으로 관혼상제에도 굶주림의 사회상이 반영되면서 자연스레 검소해질 수밖에 없었다.   

추석날 제사는 집집의 생활형편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계기가 되었다. 부모 산소에 차려드릴 제물을 장만할 돈이 없어 제사도 못 지내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추석날 산에 오면 늘 만나군 하던 우리 동네 유림이가 언제부터 보이지 않는다. “유림이네 살기 힘드나봐. 산에 안 오는걸 보니” 그나마 음식을 해들고 산에 오는 사람은 살림이 괜찮은 편이다.

 

술 한 병을 꽁무니에 차고 올라가 부어드리는 사람, 지어 물을 술병에 넣어 술을 대신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에겐 술 한 병 살 돈마저도 없었던 것이다.

 

막바지에 이른 사람들을 제외하고 북한주민들은 아무리 없는 살림에도 제사만은 잘 차려드리는데 그래봤자 돼지고기 500g~1kg, 생선 세 마리, 사과, 배 3알, 계란 3알, 두부, 당과류 한 봉지, 대략 이 정도로 딱 제상에 올려놓을 양만큼만 사들인다. 그것도 한 끼를 간신히 에우는 사람들에게는 큰 부담이다.
 
시장 활동을 통해 주민구성이 계층화 되면서 추석날 제사는 경제적 지위와 위세를 과시하는 하나의 행사가 되었다. 제사가 끝나면 묘주위에 둘러앉아 녹음기를 켜놓고 아이 어른 할 것 없이 춤을 주는 사람들도 있었다.

 

“저 미친놈들. 죽은 사람 옆에 와서 뭐가 좋다고 저 지랄이냐?” 참 보기 드문 광경이었지만 그들 나름대로 추석날 제사를 계기로 경제적 여유로움을 만끽하고 조상님들 앞에서 집안의 위력을 뽐내고 싶은 과시욕에서 나온 행동일 것이다.
 
언니네 시집형제는 7형제인데 둘째 시형이 그 일대에 소문난 부자였다. 농장에 고리대를 놓아 1년에 벼 5톤씩 끌어들이는 둘째형을 형제들도 “토지주”(토착지주)라고 부른다.

 

추석전날에 형제가 다 같이 모여  함께 쇠군 하였는데 조카애들까지 주렁주렁, 몇 십 명이 모여 명절을 쇠기엔 큰집으로선 경제적 부담이 많았다. 들고 온 것보다 더 축을 내고 가니 모든 것이 돈으로 계산되는 요즘 세월엔 수지 안 맞는 노릇이다.

 

각자 제상을 차려가지고 산소로 바로 오라는 둘째시형의 어명 하에 큰 형네부터 순서대로 제상을 차리고 제사를 지낸다. 형제 일곱이니 7번 제사를 지내는데 잘 차려가지고 오지 못한 형제들이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다.

 

형제들도 잘 사는 형제끼리 가까이 오가고 못사는 형제는 쓴 외보듯 하고 있으니 제일 못 살고 가난한 언니네 식구들은 집안대사에 모일 때마다 주눅이 든다.

 

그늘진 조카애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이모들이라도 잘 살아서 힘을 실어주어야 겠다는 생각이 들군 했다.

 

죽어서도 천대받는 북한의 조상들
 
북한은 화장을 잘 하지 않는다. 사망자가 늘어나면서 산 면적 전체가 묘지로 덮이게 되자 국가로서는 대책이 필요했다. 그리하여 1990년대에 평양시 락랑구역 오봉산에 화장터가 유일하게 서게 되었는데 기름사정으로 전국에 일반화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에는 10년이 되면 묘를 털어 다시 칠성 널에 뼈를 맞추고 묻어주는 풍습이 있는데, 땅에 묻지 않고 드문히 자체로 기름을 뿌리고 화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화장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들기 때문에 남한과는 반대로 오히려 재력이 있는 사람들이 화장을 하는 편이다.
 
북한의 유명한 조기천 시인이 말했듯이 “조선은 산이 많은 나라 그 많은 봉우리…….”는 또 작은 봉우리(묘지)들로 뒤덮여 있다. 다닥다닥한 묘봉우리와 비석들은 ‘고난의 행군’시기 죽어나간 수많은 사람들의 수자를 고발하는 상징이기도 했다.

 

묘들이 나무 한 대 없는 벌거숭이산에서 빤드럼히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 같아 비위가 상했던 김정일은 2000년대 중반 청진 방문시 ‘산에 무슨 묘지가 저리 많아? 외부에서 보이지 않게 처리하라.’는 불편함을 내비쳤다.
 
“못된 짓은 다하고 돌아가니 저게 벌 받아 썩어지지 않겠니? 제 눈에 거슬린다고 조상묘를 평토하라면 어떡하냐?” 청진에 사는 사촌언니가 이 사연을 전하며 김정일을 욕한다.

 

김정일의 방침관철을 위해 철길주변에서 보이는 구간의 묘를 평토하고 비석을 없애라는 지시가 중앙에서 내려왔다. 산림보호원들이 돌아다니며 비석을 강제로 뽑아놓고 가버린다.

 

우리 엄마 묘도 철길 가까기 있었는데 어느날 가보니 비석이 뽑혀져 있었다. 다시 박아 넣었으나 누군가 뽑아다 땔감으로 써버렸다.

 

그래서 철길주변의 묘지들은 펑퍼짐하게 뗏장을 입혀 비오면 패이거나 땅이 내려앉아 묘를 잃어버리는 일이 수다하다. 철길 가까운 곳에는 비석도 못 세우게 돼 있어 상돌모서리에 간단히 고인의 이름과 생일을 새겨 넣는다.
 
산이 묘투성인만큼 추석날은 사람천지로 변한다. 남보다 먼저 상을 받아야 조상님들이 복을 준다고 경쟁적으로 아침 일찍 산에 올라간다.

 

“빨리 가자. 할아버지 노하시겠다. 남들 벌써 아침상 받았는데 우리 늦게 온다고…” 벌써 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 자전거뒤꽁무니에 아이들을 태우고 가는 사람, 제상을 머리에 이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아낙네들, 길바닥엔 사람들이 하얗게 널린다.
 
제사를 마치고 묘주위에 둘러앉아 음복하면서 가문의 역사에 대해 집안어른들은 일장연설을 하시는데 그때에야 가문에 대해 조금이나마 알게 된다.

 

1968년부터 김정일이 전당, 전국, 전민이 오직 김일성의 사상과 역사, 의도대로만 사고하고 살아야 하며 향토계, 비석계를 비롯한 전통적인 계모임을 없애고, 가문의 족보를 없애라고 명령했다.

 

우리는 오직 김부자만을 알고 살아야 할 의무를 강요당해왔던 것이다. 1972년 “당의 유일사상체계 10대원칙”이 선포된 후 가정집들에 대한 검열을 통해 족보를 간수 하고 있던 사람들은 반동으로 몰려 정치범 수용소로 끌려갔다.
 
우리 집안 족보도 다 불살라 버렸는데, 그래서 북한주민들은 족보가 없고 조상이 누구인지도 모른다. 다만 우리 집안은 역도산을 배출한 유명한 가문이라는 것만은 안다.

 

가문이 모이면 백부님들이 역도산과 그의 형들인 김항락, 김공락과 함께 어린 시절을 보내던 얘기는 단골메뉴다.

 

단오날 씨름때마다 1등을 하여 황소상을 타면 동대천가에서 구워 먹었다던지, 2차세계대전 발발 후 42년도 일본 기모노를 입고 고향에 왔었고, 45년 봄에 왔었고, 등등…진짜로 우리 집안사람들의 골격은 모두 일반인보다 우람차고 굵은 편이다.

 

역도산의 아버지와 우리 아버지대에서는 가운데 ‘석’자 돌림이고, 역도산(김신락)은 우리 형제 항열이라서 8촌까지 흘락, 채락, 곤락, 이렇게 락자돌림으로 이름이 지어졌다. 
 

북한이 유네스코 지정을 위해 개성에 만들어놓은 왕건릉.

북한 교과서에 실린 왕건 어진

1993년 4월 개성시당을 통해 김일성에게 고려의 태조왕이었던 왕건의 족보가 전해졌다. 그 사연인즉 족보의 주인은 모든 가정집에서 족보를 없애라는 당국의 지시가 떨어지자 장독 깊숙이 감추어 두었다. 

 

훗날 그것이 아들에게 발각되자 아들은 “엄마. 반동으로 몰려 죽으려고 그래?” 사색이 되어 족보에 불을 지른다. 불속에서 어머니는 황급히 건져내고 아들은 자수한다며 불에 타고 나머지를 시당에 갖다 바쳤다.

 

그 아들이 고려태조왕 왕건의 32대 후손인 왕록진(현재 70대 중반)인데 초상으로 그려진 왕건과 꼭 같이 생겼다고 한다.

 

노동당시대가 좋으니 참 희한한 일이 다 있다고 그들 모자를 칭찬하는 김일성은 아들 김정일이 무슨 짓을 하고 돌아가는지 눈, 귀가 다 막혀 현실과 동떨어진 세계에서 자화자찬에 빠져 세월을 보낼 때였다.

 

실로 김씨 일가가 역사를 왜곡, 말살하고 우리 민족의 역사위에 군림하여 온 그 죄는 천추에 용납할 수 없는 만고의 대죄이다.

 

… … … …

 

필자 샛별 (다음글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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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감찰관

    김가 놈 족보가 개 족보니 뭐..다른 집들 것 다 태워버리라 그랬겠네..

    리플작성 2017-09-14 03:58:02

  2. 산을 보기 좋게 하고 묘지를 없애려면, 나무를 심거나 공동묘지를 만들던가 화장터를 증설해 주면 된다.

    그저 눈에 띄는 것만 없애면 된다고 생각하는게 꼭 눈에 보이는 집값 잡겠다고 보유세, 양도세만 잔뜩 매기는 자들과 똑같다.

    리플작성 2017-09-14 05:19:18

  3. 뫼등바위

    주기자,
    다른 글 옮겨 올 땐출처를 글 머리에 밝히면 좋겠소.
    꼭 글 하단에 출처의 꼬리를 달곤 그러는데 …. 흐음.

    모르고 읽을 땐 주기자가 이런 글까지 쓰나(?) 하는 생각도 한다오.
    끝에 가서 다른 글 옮겨 온 걸 알게 되는데 정당하지 못하단 생각이 들곤하오.

    리플작성 2017-09-14 07:56:12

  4. 뫼등바위

    탈북자 중에 똑똑하고, 유명하고, 뻗어 갈 전망 좋은 사람 중 한 분이 주기자요.
    탈북자 자녀 중에 똑똑하고, 잘 나가고, 출세하고, 운 좋고 한 분 중 으뜸은 프레지던트 문씨요.
    탈북자도 잘 하면 성공하지만 그저 그렇고 하면 망하는 게 사회가 한국이요.

    ‘잘 하면’ 이 말이 가지는 스팩트럼이 너무 크긴하지만….

    암튼 보수적인 신문사에 취직해 열심히 하느라 고생 많소.

    리플작성 2017-09-14 08:03:27

    • 뫼등바위

      중간 글이 잘 이어지지 않는 부분이 있으니 알아서 읽으시오

      리플작성 2017-09-14 08:04:38

  5. 상호부조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고 백두혈통 운운 하면서 반동봉건놀이하면서 엄한 사람들을 반동으로 몰아…

    리플작성 2017-09-14 10:07:16

  6. zwin2000

    저는 북한에 제사가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송강호 나오는 영화 의형제인가? 거기에서도 지방쓸줄 모르는걸 보고 북한에서 온걸 알아차리는 장면도 나오고,
    그런데 반대로 북한이 제사를 더 열심히 지내는 것처럼 나오네요.
    그게 어쩧다는건 아니고, 제가 잘 못알고 있나 해서요.

    리플작성 2017-09-15 08:13:03

  7. GarryInsight

    차례, 제사 상 차리는 법이 다르더군요.

    남한에서는 옛부터 해오던데로 홍동백서, 좌포우혜,, 뭐 이런 원칙에 따라 재물을 차립니다만, 북에서는 그냥 시각적으로 볼 때에 낮은 것은 앞에 높은 것은 뒤에 놓나 봅니다.

    리플작성 2017-09-15 10:02:28

  8. GarryInsight

    문화재 복원 방식도 다른데, 북한은 저런 식으로 왕건릉을 새로 개건(?)해 놓는게 문화재로서의 가치가 거의 없다는 사실을 모르나 봅니다.. 돌 하나라도 원래 모습대로 그냥 있어야 하는건데 말이지요.

    목조 건물을 지을 때에도 시멘트로 지어 버립니다. 한국에서는 옛날 짓는 방식대로 도목수가 감독을 하면서 가구를 짜 맞춰 짓듯이 만듭니다.

    북한이 어설픈 발굴과 복원으로 도리어 문화재를 파괴하는 일을 이제라도 중단을 하고, 필요하면 남한에 도움을 요청해야 합니다.

    문화재 보전이나 복원 사업은 남북이 정치적 여건과 관계없이 같이 하기 좋은 사업이지요.

    개성 만월대에서 공동 발굴 사업을 진행한 적이 있었지요.

    리플작성 2017-09-15 10:08:13


  9. 샛별님 혹시 작가? 글을 굉장히 잘 쓰심. 왠지 학창시절 읽은 근대 소설 읽는 느낌도 나고….. 내용의 비참함은 둘째치고. 뭐랄까 .. …가끔 북 출신 분들이 쓰신 과거 회상 글 보면,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읽을 때처럼 아련하고 초현실적인 느낌이 남.

    리플작성 2017-09-15 11:21:32

  10. posdcorb99

    역도산. 왜 그러나. 일본인들이 기억이 많다는데, 전설적 인물이에요. 북한에서도 그런이야기하나 종중장묘문화에서 그 생활일때가 북한은 그런 문화가 없다는 소리인가? 효율성문제에서 관행을 다시 생각해봐야.

    리플작성 2017-09-16 11:59:13

  11. posdcorb99

    역도산. 일본인들이 국적을 모르며, 기억하는 전설적인물인데, 북한에서도 그런 이야기하나? 종중에서 장묘라든가 벌초를 중요하게 여기며 사는 것이 현재인데, 북한은 그 문제에서 그러나? 효율성과 관행을 잘 생각해봐야

    리플작성 2017-09-16 12:03:43

  12. 재미한국인

    샛별님 글을 오랫만에 또 읽습니다. 이렇게 아무 것도 지불하지 않고 읽어도 되나요? 밥이라도 한끼 사드려야 도리일 것 같은데, 그럴 수는 없구요. 다음 글 기다려집니다.

    리플작성 2017-09-17 09:37: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