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탈북자 수기

탈북자 최초의 의용소방대원 (10)

by 주성하기자   2017-06-25 2:08 pm

김형식 씨는 군관 제대군인이다. 중앙당에서 군관 제대군인들은 군사학을 가르치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군관 제대군인이었던 형식 씨는 혜산시의 한 중학교에서 군사학과 자동차 과목 교사로 근무하였다.

 

한국에 먼저 온 누나는 이 좋은 세상을 두고 왜 거기서 고생을 하냐며 온 가족이 한국으로 오라고 권유했다.

 

누나의 권유가 아니더라도 비전이 보이지 않는 북한 사회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군사를 가르치는 것에 불만도 있었기에 한국행을 생각하면서 중학교를 그만두고 비교적 자유롭게 준비할 수 있는 철도로 직장을 옮겼다.

 

물론 그것도 쉽지 않아 사직서를 내고도 거의 1년을 씨름하다가 가까스로 옮긴 직장이었다. 북한을 떠나기로 마음을 굳혔지만 처와 아들을 데리고 떠나야 했으므로 처를 설득하는 일이 쉽지는 않았다.

 

우선 다섯 살 아들이 가장 마음에 걸렸다. 처음에는 위험한 길이라 아들을 처갓집에 맡겨 놓고 떠났다가 무사히 도착하면 아들을 데려가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었다.

 

그러나 정작 아들을 떼 놓고 떠날 수는 없다는 생각에 방법을 모색했다. 물결이 세고 깊으니 포대기로 싸서 업고 강을 넘기는 틀린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비닐로 바지를 만들어서 강가에 가서 입히고 목마를 태우고 건너갈 작전을 세웠다.

드디어 20077월 압록강을 건너기로 작정하였는데 어린 아들이 미리부터 비닐로 된 바지를 입히면 입지 않으려고 할 것 같아서 강가에 나가서 비닐로 감쌌다.

 

다섯 살 아들은 비닐로 싸서 목마를 태우고 약속된 시간인 한밤중에 압록강을 건넜다.

 

장마철이라 압록강 물이 넘칠 때도 있었고 물이 조금 빠질 때도 있어서 강을 지키는 국경 경비대 군인들과 짜고 가장 위험이 적은 곳으로 한밤중에 탈북하게 되었다.

 

한국에 있는 누나가 선을 놓아서 위조여권을 만들어 단동에서 배를 타고 대한민국으로 오기로 되어 있었었다.

 

무사히 강을 넘어 하룻밤을 보낸 후 급히 단동으로 떠났다. 그런데 위조 서류들을 준비하느라고 50여 일을 단동에서 체류해야 했는데 그 기간에 숨어 지내면서 위험을 수시로 느끼게 되었다.

 

어린 아들을 데리고 남의 집에 숨어 있자니 어려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심지어 빨래를 해도 밖에서 말릴 수가 없어서 방 안에서 말리다 보니 냄새가 난다고 주인집 아주머니가 눈살을 찌푸렸다.

 

더 힘든 것은 주인집에 아들 또래의 어린 아들이 있다 보니 장난감 한 개를 놓고도 수시로 싸우는 것이었다. 항상 잘못도 없는 아들이 억울하게 당해야 했고 그걸 보는 부모의 마음은 찢어지는 듯했다.

 

며칠 만 며칠 만 하면서 참은 것이 50여 일을 기다리다 보니 그 매일매일이 지옥 같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조여권을 만들어 왔는데 어린애는 남자가 아니라 여자애 얼굴이었다.

더욱이 먼저 한국으로 가던 탈북자들이 배 안에서 애를 데리고 가다가 말투 때문에 발각되어 북송되었다는 이야기도 들은지라 걱정이 태산 같았다.

 

배를 타고 오는 동안 아들이 돌아다니거나 말을 하면 신분이 탄로 날 것 같아서 마음이 아팠지만 어린 아들에게 수면제를 먹이고 떠났다.

 

걱정을 많이 했던 아들이 배를 타자 마침 잠이 들었고 덕분에 무사히 한국의 인천항에 도착하게 되었다.

 

단동에서 저녁 5시에 떠났는데 인천항에 아침 10시에 도착하게 되었다. 배 안에서 보낸 17시간은 순간도 마음을 놓지 못하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압록강을 건너면서도 그랬고 중국에서 숨어 살 때에도, 더구나 단동에서 인천항으로 오는 배 안에서도 아들 때문에 어려움을 배로 겪기도 했다.

 

하지만 대한민국에 도착했을 때 아들을 데리고 떠나기 정말 잘 했다는 생각에 너무 행복했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처음에는 정착하기가 많이 힘들었다. 더욱이 배를 타고 입국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의 두 배가 넘는 브로커 비용을 물어야 했기에 어려움이 더 컸다.

 

북한에서도 빚이라고는 지고 살아보지 못했는데 브로커 비용을 갚지 못하면 빚쟁이가 되는 것이 싫었다.

 

하루라도 빨리 브로커 비용을 청산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집에 도착한 날 정착금과 생계비가 나오는 통장을 통째로 브로커 비용으로 넘기고 무작정 일용직으로 일하게 되었다.

 

북한에서 중학교 교사였다는 경력은 아무 도움이 안 되었고 남들이 일하기를 꺼려하는 직종이라도 가릴 형편이 안 되었다.

 

그때에는 정말 어린 아들의 우유 살 돈도 없을 정도로 어려웠다.

 

게다가 아는 것도 별로 없고 체격도 건장하지 못해 보니 낮게 보거나 차별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말투가 틀리다고 어디서 왔는지 물어보기에 북한에서 왔다고 했더니 그다음부터는 아랫사람 대하듯 함부로 대하기도 하고 뒤에서 뒷소리도 하는 사람도 있었다.

 

북한에서 왔는데 뭘 알겠는가. 일할 줄도 모르고 아는 것도 없을 거라는 것이었다.

 

나는 왜 북한에서 태어나서 이런 수모를 받아야 하나 하는 생각에 많이 서글펐지만 그렇다고 일일이 변명하기도 싫었다.

이 사회에는 나쁜 사람보다 좋은 사람이 더 많다. 그러니까 이 사회가 굴러가는 거다.”

 

포기할 수도 있었던 그때 함께 일하던 지인이 어깨를 두드려 주면서 해 줬던 말이 큰 힘이 되었고 지금까지도 그 말을 마음 깊이 새기면서 살고 있다.

 

그 말이 눈물겹도록 고마웠고 그분들의 이해와 도움으로 하나하나 배워가면서 어려운 일용직을 이겨 나갈 수 있었다.

 

내가 북한에서 교사로 일했는데 한국에 와서 이런 막일을 하면서 차별까지 당해야 하나 하는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면 결코 이겨나가지 못 했을 것이었다.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말처럼, 북한에서 아무리 잘 나가던 사람이라도 한국에 오면 북한의 생각을 다 버리고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금도 씨는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기술을 배워야 안정된 일자리에서 일할 수 있다

 

처음에는 에어컨을 하면 돈이 된다고 해서 시작했는데 너무 힘이 들더라고요.”

 

형식 씨는 처음에 에어컨 설치기사로 일하였는데 육체적으로도 힘들고 수입도 안 되었다.

 

게다가 에어컨 설치라는 것이 계절을 많이 타다 보니 정상적으로 일을 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기술을 배워야 안정된 일자리에서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생각으로 컴퓨터 정비학원에서 열심히 배웠다.

 

북한에서는 군사학과 자동차에 대해 가르치던 교사였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 새롭게 배우는 과목이긴 하지만 배우는 것은 크게 힘들지 않았다.

 

자격증을 취득하고 2009년에 부천의 한 회사에 전기 설비 관리로 취직하게 되었다. 지역의 주민들을 상대해야 하는 직업이기에 간혹 억울한 일을 당할 때도 있고 불이익을 경험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형식 씨는 절대로 화를 내는 법이 없다. 그분들이 내 부모 같고 내 가족 같다는 생각으로 이해하고 진심을 다 해서 도움을 주다 보면 진심은 항상 통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다 보면 어르신들이 너무 고맙다고 음료수를 권하든가 적은 돈이라도 쥐어 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고향의 부모님 같은 생각도 들고 자식들에게서 용돈을 타서 쓰시는 분들이시라 성의는 고맙지만 늘 사양한다고 했다.

 

물론 교사로 근무하던 사람이 한국에 와서 막일부터 해야 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만 기왕 내가 선택한 길이기도 하고 내 가족을 위해서는 내가 이겨내야 할 일이라는 생각으로 열심히 견디어 나갔던 것 같다.

 

지금은 관리사무소에서 안정적으로 일하고 있지만 형식 씨와 함께 일하던 분들은 몇 년이 지난 지금도 항상 그를 잊지 못하고 서로 연락도 자주 한다.

 

며칠 전에도 제일 처음 들어갔던 회사의 관리소장이 전화해 일자리가 마땅치 않으면 자기한테 오라고 농담 섞인 말을 했다고 한다.

 

나는 의용소방대원이다

 

형식 씨의 차에는 의용소방대원 복장이 항상 구비되어 있다. 형식 씨가 의용소방대원이 된 데는 나름대로의 계기가 있었다.

 

한국에 와서 거의 10년이 되다 보니 적성에 맞고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일하고 있고 아내도 역시 맞벌이로 열심히 일하고 있다.

 

게다가 다섯 살 꼬마로 한국에 입국한 아들이 이제는 14살 어엿한 중학생이 되었다. 아빠의 키를 훌쩍 넘는 아들과 친구처럼 지내기도 하면서 항상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형식 씨는 항상 오늘의 행복이 크면 클수록 고마운 대한민국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의용소방대원으로 근무하는 지인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평소에 허물없이 가깝게 지내기도 하는 좋은 형이라고만 생각했는데 화재현장에서 헌신적으로 소방대원들을 보조하는 그의 모습을 본 이후부터는 그가 산 같이 커 보였고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어떻게 하면 나도 그렇게 좋은 일로 이 사회에 봉사할 수 없겠느냐고 주저주저하면서 말을 꺼냈을 때 그 지인은 참 잘 생각했다고 함께 일해 보자며 격려해 주었다.

 

이어 그에게 어떻게 의용소방대원이 되는지, 어떤 업무를 하는지를 하나하나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그의 소개로 신청 서류를 접수하고 면접을 치렀다. 어렵지만 갈망하던 의용소방대원이 된지 벌써 1년이 훌쩍 넘었다고 한다.

 

형식 씨는 심사위원 5명이 앉아서 면접을 볼 때 설레던 마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그동안 화재 현장에도 몇 번 동참해서 소방대원들의 업무를 보조하기도 했다. 지금도 도움이 필요한 현장을 목격하면 항상 속으로 되뇌곤 한다.

 

나는 의용소방대원이지, 그러니까 나는 반드시 저들을 도와야 하는 거다.”

 

주문처럼 자신과의 대화를 하면서 주저 없이 어려운 일에 뛰어들어 돕는다고 한다.

 

받은 사랑을 돌려줄 줄 아는 사람,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는 기꺼이 자신을 바쳐 도울 줄 아는 형식 씨. 그의 미소가 오늘은 더 유난히 돋보인다.

 

출처 : 남북하나재단 잡지 동포사랑.

 

카테고리 : 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탈북자 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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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Craig Steven Wright

    돈데보이 1 BTC = $2576.74

    리플작성 2017-06-25 04:41:08

  2. 눈물겨운 탈출기와 감동적인 정착기 잘읽었습니다. 긍정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한번 깨닫게 되는군요. 감사합니다.

    리플작성 2017-06-25 04:53:05

  3. 김삿갓

    평생상심하는 흥석이
    죽장집고미투리신꼬 떠돌이길 그얼마뇨
    흐르는물 뜬구름처럼 천지사방이 내집이어라
    아 돌아가기도 머물기도 어려운 인생은 나그네길
    민사가 모두 운명으로 정해젿거늘
    덧업는 인생이 부질업시 헤메고 읻노라
    (얼굴에)화장해라 오래된생각이다

    리플작성 2017-06-25 05:26:21

  4. 훌륭한 분입니다.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세요.

    리플작성 2017-06-25 06:23:17

  5. 스토니

    정말 좋은 이야기입니다..탈북인이든 남한사람이든 이분과 같은 마음으로 살면 누구나 자유로운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겠네요..헬조선 타령으로 세월을 보내는 청춘들이나 노력없이 쉽게 남들만큼 돈을 벌려는 사람들에겐 이나라도 살기힘든 곳이겠지만요.

    리플작성 2017-06-26 09:10:48

  6. 델리

    참 고생 많으셨습니다. 그래도 남한에 잘 정착하신거 같아 흐뭇합니다. 앞으로도 행복한 일만 있으시길 빕니다.

    리플작성 2017-06-26 10:07:02

  7. 무하

    정말 훌륭한 분입니다 꼭 성공하세요

    리플작성 2017-06-27 02:43:51

  8. s8512542

    부디 남한에서 행복하게 잘 사시기를 기도하겠습니다…
    화이팅!!!~~

    리플작성 2017-06-27 03:33:53

  9. 숙연글

    응원합니다!

    리플작성 2017-06-28 02:35:45

  10. 으라차차

    행복하세요. 응원합니다.~

    리플작성 2017-06-29 05:30: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