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에서 쓰는 평양이야기 탈북자 수기

북에서 온 여성 서예가 (8)

by 주성하기자   2017-03-18 12:09 pm

차형옥 씨는 북한에서 인민군 국경경비대에서 군관으로 근무하신 부모님 밑에서 2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모님들의 사랑 속에서 서예 전문가로서의 꿈을 키우며 자랐다.

 

형옥 씨는 어릴 때부터 남한테 지기를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공부도 서예도 운동도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혹시 자신의 부족함으로 인해 뒤처지는 것 같으면 뜬 눈으로 밤새우며 문제점을 찾아내었다.

 

형옥 씨는 이렇게 끊임없이 노력하는 자세와 문제점을 보완하고자 하는 열성으로 남한에 와서도 빨리 정착하고자 각고의 노력을 하고 있다.

 

북한에 두고 온 어린 아들

 

형옥 씨가 남한 땅에 발을 내디딘 지 어느덧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지난 3년은 앞일을 알 수 없어 불안하고 초조했던 시간들이었다. 그 시간들은 고난의 시간이었고 인생을 경험하게 된 시간들이었다.

 

고향을 떠나야 했고 어린 아들을 두고 두만강을 건너 중국에서 살아야 했던 삶은 어떻게 보면 형옥 씨의 34년 인생을 돌아보게 한 시기였다.

 

잠을 자도 편히 잘 수 없었고 전화 소리 나 부르는 소리, 경찰차를 보면 심장이 오그라들며 매 순간을 불안과 초조함 속에서 생활했다.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고 어린 아들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고 싶다는 의지 하나로 선택한 길이 참을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이었다.

 

중국에 있는 동안은 운이 좋아 중국인 신분증을 소유하고 살았지만 유창하지 못한 중국어 때문에 신분이 들통날까 봐 자유롭지 못 했다.

 

그러던 중 고맙게도 좋은 언니를 만나게 되어 그분의 소개로 취직하여 돈도 벌기 시작했고 신앙생활도 하게 되었다. 생활은 점점 안정되어 같지만 마음 한 편에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두고 온 것이 항상 맘에 걸렸다.

 

사랑하는 아들과 부모형제들의 안부가 늘 걱정되었고 불효 자식, 나쁜 엄마가 되지 않기 위해 중국 돈 5000원을 벌어 고향에 가야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이를 악물고 일해서 어느덧 목표했던 돈을 다 모아갈 때쯤 형옥 씨는 ‘뇌하수체종양’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다.

 

상상도 못 했던 청천벽력 같은 진단을 받는 순간 얼마나 마음이 힘들었는지는 말로 표현하기 힘들다. 다른 곳도 아닌 뇌에 종양이 생겼다는 진단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 떠 오른 두 글자, 그것은 바로 ‘자살’이었다.

 

고향을 등진 그에게 하늘이 내린 벌이라 생각했고 살아갈 용기와 희망이 사라졌다. 회사에는 사표를 냈고 텅 빈 집에서 아무것도 먹지 않고 죽을 각오로 보름을 지냈다.

 

나는 혼자가 아니며 병 때문에 자살하면 안 된다

 

여러 차례 자살을 시도했으나 참 신기하게도 그때마다 초인종 소리가 울리며 마트 사장이 찾아오는 일이 여러 번 있었다.

 

후에 사장에게 조심스레 여쭤 봤더니 “어딘지 많이 아픈 기색이 보였고 항상 혼자 있는데 밖으로 나오는 것을 보지 못해 물이라도 가져다주고픈 마음에서 몇 번을 찾게 되었다”라고 했다.

 

사장의 따뜻한 마음에 북한 사람이라는 말을 전하고 싶었지만 알릴 수 없어 얼마나 울고 울었는지 모른다. 그때 문득 ‘내가 아직 혼자가 아니다’는 생각이 들었고 정신이 들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근무하는 과장이 “세상에는 험한 일을 당하고 죽음을 선고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병 때문에 자신을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자신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병과 싸워 이겨서 고향에 갈 생각을 해야 하지 않느냐”는 말도 생각났다.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다. 형옥 씨는 그때부터 뇌종양을 극복한 사람들의 소식과 자료, 수술을 잘 하는 병원을 알아보기 시작했고 한국에서 잘 고친다는 소식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중국 청도 인민병원 국제부에 재직하고 있던 인하대학교수와 연결이 되어 한국행을 시도했다.한 번 죽는 인생, 한국에 가서 수술이라도 받아보고 죽을 결심을 했다.

 

이후 중국 단동을 거쳐 한국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지금의 남편을 만나게 되었다.

 

한국에 첫 발을 디딘 그날부터 제2의 인생을 살게 되었지만 새로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한편으로는 허전하고 두려웠다.

 

하나센터에서 11일 동안 초기 집중교육을 마치는 그 시간도 즐겁게 느껴지지 않았고 텅 빈 집구석에 덩그러니 혼자 있는 시간들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집 밖을 나와 한국 사회를 몸으로 부딪치다 보니 정신이 어디에 가든지 말이 통하니 고향에 와 있는 느낌이었다. 중국에 있을 때는 아파도 아픈 것을 제대로 표현할 수 없었는데 한국에서 고향에 온 느낌을 가장 피부로 와 닿던 것이 의사소통이었다.

 

형옥 씨는 한국에 온 날부터 행복한 날보다 힘든 시기가 더 많았다고 말한다. 한국에서 받은 은혜와 북한에 두고 온 아들을 생각하며 열심히 살고 봉사하고 싶었다.

 

그래서 자격증을 빨리 취득하고 회사에 취직하고 싶어서 오전 오후까지 열심히 학원에 다녔다. 각고의 노력으로 취업성공패키지를 통해 자격증을 열심히 따기 시작했다.

 

처음 자격증을 땄을 때의 기쁨은 어디에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기뻤고 자신감도 생기기 시작했다. 힘들다는 한식조리사 자격증도 단번에 취득했다. 그러나 자격증만 취득했다고 취직이 다 되는 것은 아니었다.

 

면접에서 자꾸 떨어지는 이유가 경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했다. 처음에는 ‘북한에서 온 자신과 경력을 따지면 이길 사람이 어디 있을까?’ 하는 마음에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러한 실패의 과정이 형옥 씨를 더 성장하게 만들었고 다시 한 번 도전하게 만들었다. 오직 ‘할 수 있다’는 말만 생각했다. 자신의 경력과 경험들을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새로운 일자리에 도전했다.

 

여러 가지 자원봉사활동을 통해 세상을 몸으로 부딪치며 현실감각도 점차 익혔다.

 

남북을 하나로 연결하는 아름다운 서예

 

그러던 중 부산 하나센터가 새로 동아대학교로 이전한다는 소식을 접하고 하나센터를 찾아갔다.

 

상담을 통해 자신의 지난 이야기와 취업 문제에 대해 꾸밈없이 말하고 도움을 요청했다. 센터장이 북한에서 무엇을 했는지 물어서 ‘서예’라고 하자 그 재능을 남한에서 펼쳐보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하셨다.

 

‘아름다운 서예로 남북을 하나로 연결하며 북한 서예를 알리는 것도 통일을 앞당기는 길’이니 하나센터가 도와주겠다는 센터장의 말씀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형옥 씨의 서예가 다시 태어나게 된 계기가 바로 이때부터다. 이때부터 형옥 씨는 ‘통일 서예 강사’라는 이름으로 강의를 하기 시작했다. 북한에서 배운 ‘천봉체’라는 글씨로 강의를 하지만 캘리그라피도 배우고 있다.

 

각고의 노력 끝에 1급 자격증을 취득하고 ‘대한민국 서예 캘리그라피 대회’에서 스타작가 상 1위를 차지했다. 그밖에 여러 대회에서 수상을 했다.

 

하반기부터는 동아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통일 서예 강사’로 활동할 예정이다. 어린 10대 시절 북한에서 배운 서예를 40대인 지금 한국에서 다시 할 있다는 것은 꿈같은 일이다.

 

이 길로 인도해 주신 센터장님께 늘 고마운 마음으로 존경하고 있다. 형옥 씨는 아직 대한민국에서 성공적으로 정착했다고 말하기는 부족하다.

 

하지만 한국에서의 3년 동안 후회 없이 열심히 살고 있음에 자랑스럽고, 자신을 응원해 주신 모든 분들에게 고맙고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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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부킷빈땅

    차형옥씨 앞날에 성공과 평안이 있기를 바랍니다.
    부디 남한에서 성공하시고, 많은 탈북자들과 미래의 북한 주민들에게 모범이 되는 사람으로 발전하세요.

    리플작성 2017-03-18 01:48:09

  2. 잘 하셨습니다. 북한에 두고 온 아들을 빨리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리플작성 2017-03-18 01:50:35

  3. 시민

    한국에 와서 병은 잘 치료받고 완치되신 건가요?

    리플작성 2017-03-18 03:00:53

  4. 북한의 예술이라는 것이 대개는 한국에서 인정을 못 받죠. 그 이유는 예술이 거의 장인(기능인) 수준으로 전락해서 입니다. 연주나 무용이나 그림 같은 것을 기술적 완성도만 따지니까요. 기술적 완성도만 높으면 사회주의 예술인 사실주의만 입각하면 되니까요. 예술 작품이 값어치가 있으려면 그 작품이 주는 감성이 있어야 하죠. 감성의 영역 감성 해석의 영역에서 독보적인 수준이 있어야 예술로 치죠. 오히려 기술적 완성도가 모자라도 말이죠. 여기에 의미론까지 포함되면 이제는 고가의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북한에서 오신 예술가 분들을 보면 기술적 장인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경우가 많지요.
    표현의 자유가 없었기 때문이죠.

    리플작성 2017-03-18 03:18:30

  5. 숙연글

    응원합니다. 천봉체를 사진으로 밖에 볼 수 없는 게 아쉬운데, 사진으로는 벌써 명인이시네요. 꼭 아드님 만나시길, 민족을 일깨우는 서예가로 오래오래 사시길 기원합니다.

    리플작성 2017-03-19 02:50:27

  6. 낙타

    꼭 성공하시고, 꼭 행복하세요. 차형옥 선생님의 앞날에 편안하시길 기원합니다.

    리플작성 2017-03-21 08:06:54

  7. 지나가던사람

    힘들게 탈북하시고 남한에서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하는 모습 정말 대단하시네요.
    글씨 멋지네요 ^^

    리플작성 2017-03-21 07:14:06

  8. 한마디

    종양 수술은 하셨나요?

    리플작성 2017-03-23 10:10: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