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조경제 사용설명서

이명박 정부 시절 보고서에 초록 표지를 입히는 것이 유행했다. 대통령이 ‘녹색성장’을 강조하니 공무원들이 표지 색깔부터 바꿨다. 녹색기후기획과, 녹색미래담당관 등 정부 직제 이름에도 앞다퉈 녹색 자를 넣었다. 대통령 직속 위원회까지 만들어 추진했던 이 프로젝트의 성과에 대해선 평가가 엇갈리지만 목표만큼은 구체적이었다.

 

김영삼 정부의 ‘세계화’는 다시 돌아봐도 헛웃음이 나온다. 세계화는 1994년 해외 출장 중이던 김 전 대통령이 “다음 날 기자회견에서 터뜨릴 것이 없느냐”고 요구해 비행기 안에서 급조됐다. 기존의 ‘국제화’와 뭐가 다르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공무원들은 온갖 화려한 수식어를 갖다 붙였다. 의미가 다르다며 영문 표기도 따로 ‘Segyehwa’라고 썼다.

 

20년이 지난 지금 국제화와 세계화를 구분해서 쓰는 사람은 거의 없다. 졸속으로 만들어진 국정과제는 준비 안 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 규제 장치 없는 외환자유화와 자본시장 개방으로 결국 외환위기를 부르는 데 일조했다.

 

요즘 박근혜정부의 ‘창조경제’ 논란을 보면 옛날 생각이 난다. 대통령이 창조경제를 외치니 모든 정부 부처와 대기업들이 창조에 다걸기를 하고 있다. ‘창조관광’ ‘창조직업’ ‘미래창조펀드’ 등 온갖 곳에 창조가 난무한다. 그러다 보니 ‘창조경제가 뭐냐’는 논란을 자초하고 말았다.

 

최문기 미래창조과학부 장관 후보자는 인사청문회에서 “창조경제란 기술추격형 경제를 선도형 경제로 바꾸는 것”이라고 말했다가 혼쭐이 났다. 민주통합당 전병헌 의원은 최 후보자에게 “‘달리기에서 1등 하려면 1등으로 달리면 된다’는 답변과 뭐가 다르냐. 참 공허하다”고 비웃었다.

 

급기야 박근혜 대통령까지 나서 ‘창조경제는 이런 것이다’는 설명을 했지만 대통령의 설명 이후 더 애매모호해졌다는 평가가 많다. 박 대통령의 설명을 중심으로 창조경제의 키워드를 뽑아본다면 창의성, 과학기술과 정보통신기술(ICT)의 융합, 산업과 산업의 융합, 창업 활성화 정도다. 하나같이 한국 경제가 나아갈 방향으로 강조돼 온 것들이다.

 

청년 창업 활성화를 강조하며 새로운 펀드들을 만들겠다고 하는데 지금도 정책금융공사의 청년창업펀드, 중소기업청의 청년창업 정책자금대출이 있다. 신성장동력 투자펀드는 1조 원 가운데 절반도 못 썼다. 과학기술 간, 산업 간 융합이 중요하니까 서울대에 융합과학기술대학원까지 만들어 안철수 전 교수가 원장을 맡았던 거다.

 

이미 있는 좋은 건 다 나열해놓고 새로운 개념처럼 말하니 듣는 사람이 어리둥절할 수밖에…. 이런 내용이라면 ‘지식경제’ ‘혁신경제’ ‘스마트경제’ ‘신(新)경제’ 등 무어라 이름 붙여도 다 마찬가지다. 기왕에 추진하던 과제들을 이름만 창조로 살짝 바꿔도 아무 차이가 없으니 너도 나도 창조를 내건다. 더구나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이런 데 ‘천재’들이다.

 

국민행복, 경제민주화 등 이 정부가 표방하는 과제들은 한결같이 다 모호하다. 창조경제는 그중에서 가장 구체화할 수 있는 과제인데도 이 모양이다. 창조경제의 핵심부인 미래부 장관 후보자는 창조경제가 뭔지 모른다. 정부는 이제야 범정부 태스크포스를 만든다 하고, 대통령의 싱크탱크인 국가미래연구원은 앞으로 창조경제의 개념과 정책을 토론하는 세미나를 열겠단다.

 

창조와 혁신, 지식창업 활성화 등 어차피 우리 경제가 추진해야 할 과제들을 열심히 하겠다는데 야박하게 꼬치꼬치 따지려는 게 아니다. 말잔치만 벌이다 맹탕으로 끝날까 봐 걱정돼서 그런다. 목표가 분명해야 목표를 달성할 수 있다.

 

창조경제라는 비전은 다소 추상적이더라도 분야별 기간별 구체적 목표를 세우고, 목표 달성을 측정할 수 있는 기준을 만들어 5년 후엔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경제성장률이나 취업자 수 증가 등 경제에서 숫자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카테고리 : 신문 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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