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chive | 反동북공정 RSS feed for this section

중국의 후안무치, 구단선의 비밀을 밝힌다

    네덜란드 헤이그의 상설중재재판소(PCA)가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은 근거가 없다고 판결했다. 중국이 암초를 매립해서 만든 인공섬을 기점으로 선포한 EEZ(배타적 경제수역) 경계선도 인정하지 않았다. 중국은 불난 집처럼 시끄러워졌고 소송을 제기했던 필리핀은 희색이 만연해졌다. 미국과 일본도 화색이 만연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먼저 중국이 일방적으로 선포한 구단선(九段線)부터 설명해보자. 구단선이 있으면 1단선, 2단선, 8단선도 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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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활자 출토로 본 고려의 힘 “전성기 영토 고구려보다 컸다”

만월대 금속활자 출토로 본 고려의 힘 전성기 고려는 고구려보다 컸다. -고려사 “우리나라의 넓이는 만리이다” 이정훈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 국사 교과서들은 고려의 국경을 청천강에서 함흥을 잇는 선 정도로 그려놓고 있다. 그래서인지 고려를 거란과 몽골 홍건적 등의 침입을 받은 약한 나라로만 알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기록을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조선 초 만든 고려 정사(正史)인 ‘고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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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땅’ 고구려 古土를 가다⓸

            장수태왕은 南進 아닌 西進     요동에 있는 평양을 이북의 평양으로 끌고 온 것은 조선이다. 아버지 이성계를 도와 고려를 뒤집은 이방원이 명나라 황실에 ‘화녕과 조선 중에 나라 이름을 정해달라’고 하자 명 황제가 조선을 골랐다. 그때 조선은 요동을 장악하지 못했다. 요동을 수복하려는 최영을 죽이고 등극한 것이 이성계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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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땅’ 고구려 古土를 가다⓷

            고조선 평양이 고구려 평양     평양성을 수도로 삼은 고구려는 95년간 번성하다, 다시 심각한 위기를 만났다. 모용황이 이끄는 전연(前燕)군의 압력을 받게 된 것. 고구려는 선비족이 세운 전연과 사이가 좋지 않아 오랫동안 싸웠는데, 그러한 전연이 모용황 시절 강성해졌다. 모용황이 침입할 것이 분명해지자 고구려는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수도인 평양성을 증축했다(고국원왕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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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땅’ 고구려 古土를 가다⓶

    “지안엔 국내성 아닌 黃城”     고구려사를 바로 세우려면 고구려의 수도와 영토가 어디였는지부터 밝혀야 한다. 먼저 수도 문제를 살펴보자. 우리 국사 교과서는 중국 지안을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이 있었던 곳으로 비정한다. 그러나 이는 삼국사기의 기록과 맞지 않다. 그런데도 누구도 고치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뜻있는 이들은 “한국 역사학계는 죽었다”라고까지 말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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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땅’ 고구려 古土를 가다⓵

    “고구려의 수도 평양은 이북 아닌 요동에 있었다!”     ● 삼국사기의 ‘東’자를 해석하지 않은 역사학계 ● 지안(集安)엔 국내성 아닌 황성이 있었다 ● 장수태왕은 이북 평양으로 천도한 적 없다 ● 말로만 식민사관 탈피, 실제론 일제 史觀에 묶여     괄목상대(刮目相對). 오랜만에 찾아간 중국 지린(吉林)성 지안(集安)시가 그러했다. 밝아지고 화려해지고 북적였다. 이유는 한국인이 풀어놓는 ‘돈’ 때문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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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영구 분단에서 한반도를 본다⑥(끝)북방공정에 대응 없는 몽골

    중국인 가이드 앞세우는 내몽골 관광객     둘은 같은 언어를 쓰지만 문자는 다르게 쓰고 있다. 내몽골인들은 고유의 몽골어로 표기하나, 몽골인들은 러시아 키릴문자로 적고 있다. 몽골은 중국과 거의 내왕하지 않고 지내다가 1992년 민주화를 하면서 중국+내몽골을 만나게 되었다. 개방을 한 민주몽골이 공산중국을 만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중국이 훨씬 더 잘 살고 있었다. 개방의 여파는 중국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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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영구 분단에서 한반도를 본다⑤수흐바타르와 초이발산

    몽골의 레닌과 스탈린     유목민의 아들로 태어난 수흐바타르는 역전(驛傳)마차의 마부를 하다, 1911년 신해혁명으로 몽골이 독립하자 군에 들어가 기관총 부대 소대장을 하였다. 제대한 뒤에는 정부 인쇄소의 식자공(植字工)을 하였다. 1917년 러시아에서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자극받은 그는 1920년 초이발산과 함께 몽골 인민당을 만들어 정부를 세우기 위한 투쟁에 들어갔다. 그는 레닌을 두 차례 만나 몽골 혁명 성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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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영구 분단에서 한반도를 본다④北元을 대신해 일어나 중가르

    북원 항복 받은 淸태종 홍타이지     1619년 명나라는 4개 방면으로 누르하치 군을 공격했다가 ‘사르후’라는 곳에서 대패를 했다. ‘사르후 전투’로 불리는 이 전투는 8기의 위력을 보여준 역사적인 전투로 손꼽힌다. 그러자 릭단을 따르던 부족들이 친누르히치 쪽으로 대거 이탈했다. 친누르하치의 주장은 호르친부(部)였다. 호르친부는 칭기즈칸의 동생인 하사르의 후손들이다. 하사르는 칭기즈칸이 몽골을 통일할 때 많은 공을 세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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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영구 분단에서 한반도를 본다③明에 맞서 남북국 시대 만든 北元

    ‘백기사’ 오이라트의 흥기     그러한 북원을 대체해준 것이 ‘몽골의 사촌’이라고 할 수 있는 ‘오이라트’ 세력이었다. 오이라트는 ‘숲 속의 사람’이라는 뜻이다. 오이라트족은 ‘백기사’처럼 할하 몽골인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일어나 몽골을 일으켜 주었다. 이들은 중부 몽골(지금의 울란바토르 주변)에 주로 거주하는 할하 몽골인과 달리 척박한 서(西)몽골과 바이칼호 인근에서 살아왔다. 그러한 오이라트를 칭기즈칸의 큰 아들인 조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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