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수석이 보안법 폐지 총대 메달라 했다” 盧정권 기무사령관 송영근 의원 폭로 [2012년 12월 신동아]

 

● 2003년 盧 대통령과 靑서 회동 뒤 文이 요청
● 군-검찰총장-경찰청장까지 반대해 무산
● 軍 장악 위해 사법개혁 추진-협조한 군인 진급 요구도
● 청남대 반환 뒤 병사막사 예산으로 대통령 별장 지어라
● 민정수석실이 관여한 군 怪문서 사건 수사 흐지부지

 

군복 입은 문재인 후보. 그는 어떤 안보관을 갖고 있는가(왼쪽). 문재인 후보의 안보관에 의문을 제기한 송영근 의원.

 

18대 대통령선거에서는 안보가 실종됐다. 후보들의 안보관 대북관 통일관 등을 검증하지 않고 그냥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박근혜 새누리당, 문재인 민주통합당, 안철수 무소속 후보는 서로 ‘안보 적임자’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 가운데 문재인 후보는 노무현-김정일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한 서해 북방한계선(NLL) 논란의 한 당사자다. 그는 국가보안법을 폐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바꾸지 않았고, 제주해군기지 공사에 대해서는 일단 공사를 중단한 뒤 재검토, 육군 의무병의 복무기한은 18개월로 단축 등을 내걸었다. 

새누리당의 송영근 의원은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2003년 4월 소장으로 기무사령관이 돼 중장으로 진급한 후 2005년 2월까지 근무하고 전역했다. 그가 기무사령관을 시작한 시기 육군과 기무사는 노 정부와 사이가 나쁘지 않았다. 그러나 노 정부가 보안법 폐지와 군 사법개혁 등을 추진하면서 부딪치기 시작했다. 그는 “문재인 후보가 수석으로 있던 민정수석실은 안보 흔들기에 적극 참여했다”며 “여당 의원이 아니라 안보를 담당해온 군인의 입장에서 객관적인 사실을 밝히겠다”며 이런 일화를 공개했다. 

“탄핵 사태 전인 2003년 여름 청와대에서 저녁을 같이하자고 하기에 갔더니 노 대통령이 문재인 민정수석과 같이 있었다. 노 대통령은 정보기관장과 독대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기에 민정수석을 배석시킨 가운데 정보기관장을 만났다. 노 대통령은 자신의 군 생활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파할 때까지 특별한 당부가 없어 왜 불렀나 했다. 만찬장을 나서자 문 수석이 ‘사령관께서 총대를 좀 메주십시오’라고 했다. 당시 노 정부는 보안법 폐지를 추진했지만 송광수 검찰총장, 최기문 경찰청장 등 모든 공안 담당자가 다 반대해 꼼짝 못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나를 불러 보안법 폐지에 앞장서달라고 한 것으로 보였다.”

▼ 물론 동의하지 않았겠다.

“그렇다. 그러자 민정수석실은 진급을 미끼로 기무사의 모 실장을 회유해, 기무사령관인 나의 언동을 감시하게 하고 기무사 내부 정보를 따로 보고하게 했다. 민정수석실에서는 변호사 출신의 전모 비서관과 기자 출신의 강모 행정관이 기무사를 담당했다.”

 

“진급 미끼로 기무사 간부 회유”

▼ 이듬해 가을 정기인사 때 그들과 정면충돌한 것으로 알고 있다.

“1990년 윤석양 이병 사건을 계기로 보안사에서 기무사로 이름을 바꾼 후 기무사는 민간 정보를 보지 못하게 됐다. 군인들의 부동산과 세금 자료는 국세청이 갖고 있고, 민간 법률 위반 사실은 경찰청 등에서 갖고 있는데, 보지 못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청와대는 모두 볼 수 있다. 2004년 가을 기무사는 규정된 법령에 따라 3명의 장성 진급자를 확정했는데, 문제의 모 실장은 진급자가 되지 못했다. 그때 문후보는 시민사회수석으로 잠시 가 있다가 이듬해 다시 민정수석으로 돌아왔다.

그러한 인사안을 대통령 재가를 받기 위해 올리자 민정수석실이 세 명을 모두 탈락시키고 그 실장은 무조건 진급시키라고 했다. 기무사의 진급 심사가 잘못됐다면 바꿔야겠지만 그런 것도 아니었다. 윤광웅 국방부 장관도 바꾸라는 전화를 걸어왔기에 장관실로 찾아가, ‘이러한 지시는 나를 불신한다는 뜻이니 전역을 하겠다’고 맞섰다. 그러자 윤 장관은 ‘다 바꿀 수 없으면 한 명이라도 바꾸라’며 특정인에 대한 자료를 내놓았다.

그 자료는 본인 동의가 없으면 법적으로는 구할 수 없는 것이었다. 민간기관이 관리하는 것이라 기무사는 구할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못 보던 정보가 나왔기에 그를 불러 물어보니 사실을 인정했다. 이 때문에 그를 탈락시키고 청와대가 요구한 실장을 진급시키려 했는데, 민정수석실은 다 바꿔야 한다고 주장했다. 승강이 끝에 한 명을 더 바꾸는 것으로 인사를 마무리했다.”

▼ 본인의 동의가 없으면 구할 수 없는 자료를 국방부 장관이 어떻게 입수했는가.

“그게 의문점이라 자료 발급 경위를 추적해봤더니, 청와대가 진급시키라고 했던 그 실장이 추진한 것으로 확인됐다. 민정수석실은 진급을 미끼로 군 내 동조자를 포섭해 기무사를 감시하고 조종하려고 했다.”

▼ 그 파동 이전에 군은 노무현 정부가 추진한 군 사법개혁으로 출렁거렸다.

“그것 때문에 노 대통령은 조영길 국방부장관을 퇴임시키고 자신과 부산상고 동문인 윤광웅씨를 장관에 임명했다(2004년 7월). 그리고 민정수석실이 중심이 돼 더욱 강하게 추진한 것이 군 사법개혁이었다.

민주주의 체제에선 권력 독점을 막기 위해 3권 분립제를 택한다. 그러나 군은 승리를 최종 목표로 하므로 지휘관에게 전권을 주는 체제를 고수한다. 군사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인물도 작전과 부대 통솔에 필요하다고 판단되면 지휘관은 사형을 면하고 그를 작전에 투입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니 군 검찰은 헌병이 수사한 것을 기소하고, 지휘부에 법률 자문을 하는 참모 기구에 머물게 된다.

하지만 검찰은 법률에 의해 경찰과 국가정보원을 통제할 수 있다. 정치인과 관료의 비리를 캐는 사정권도 행사한다. 군 검찰을 검찰과 같이 활동할 수 있게 해준다면, 군권(軍權)은 한 순간에 전쟁전문가에서 법률전문가로 넘어간다. 노 정권은 여기에 주목해 국방부에 독립된 군 검찰청을 둔다는 계획을 세운 것 같다.”

 
 

 

“군 사법개혁에 모든 지휘관 반대”

▼ 그 개혁안은 전체 사법개혁안의 일부로 추진되지 않았나.

“그렇다. 노 정부는 보안법을 폐지하고 대검 중수부를 없애며, 검찰로부터 독립된 고위공직자비리수사처(공수처)를 만드는 전체 사법개혁을 추진했다. 그 개혁의 일부가 군 사법개혁이었다. 2002년 대선 직전 열린 국정감사에서 국방부 법무관리관이 이회창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 아들의 병역비리를 부정하는 소신 발언을 했다. 그 대선에서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자 2003년 민정수석실은 일부 군 검찰관과 공조해 공금횡령 혐의로 그를 전역시키고, 후임자로 P 준장을 임명해 군 사법개혁을 추진했다.”

▼ 군부의 반발이 만만치 않았겠다.

“군 사법개혁은 군부의 일인지라 군정(軍政)권을 가진 군 지휘부가 개입할 수가 있다. 국방부에서는 장관과 차관, 합참의장, 각군 총장, 해병대사령관, 기무사령관이 참석하는 군무(軍務)회의가 최고 의결기구다. 중요 안건은 이 회의 참석자들이 의결해야 하는 ‘의결보고’로, 그렇지 않은 것은 보고만 하는 ‘참고보고’로 올라온다. 

어느 날 P 관리관이 군무회의에 들어와 참고보고로 군 사법개혁안을 보고했다. 그는 이 보고를 하는 것으로써 국방부의 군 사법개혁안을 확정짓고 민정수석실로 보낼 생각이었다. 보고가 끝나는 순간, 군 사법개혁은 군 체제를 바꾸는 것이므로 군무회의에서 의결해야 한다는 판단이 들었다. 이 때문에 회의가 끝난 후 바로 조영길 장관을 찾아가 이야기했더니 금방 알아듣고, P 관리관에게 ‘다시 의결보고로 올려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지휘관 관할권을 없애고 군에 검찰청을 만든다는 군 사법개혁안이 의결안건으로 올라오자 조 장관과 유보선 차관, 남재준 육군, 문정일 해군, 이한호 공군, 김인식 해병대사령관까지 전원이 ‘우리 군을 뿌리째 흔들려고 하느냐’며 강력히 반대해 부결시켰다. 그 사실이 알려지자 민정수석실이 상당히 격노했다고 하더라. 조영길 장관을 물러나게 한 것은 그 후다.”

▼ 그러나 이후 국방부는 군 사법개혁에 동의하지 않았나.

“윤광웅 씨를 거쳐 김장수 씨가 국방부 장관이 되자, 김 장관을 압박해 군 사법개혁안에 서명하게 했다. 그렇게 해서 노 정부의 전체 사법개혁안이 확정됐다. 그러나 검찰이 공수처 신설에 반대해 이 개혁안은 국회를 통과하지 못했다. 군 사법개혁안도 함께 날아간 것이다. 병력 축소와 연합사 해체에 이어 군 사법개혁안까지 확정됐다면 한국의 안보체제는 크게 흔들렸을 것이다.”

 

청남대 폐지하고 “별장 내놔라”

▼ 청와대와 사이가 나빴는데 육군이 병사용 막사를 지을 예산으로 계룡대에 노 대통령 별장을 지어줬다는 지적이 있다.

“병사용 막사를 지을 예산으로 지어준 것은 사실이지만 내가 관할하는 일이 아니라 설명하기 곤란하다.”

이에 대해서는 동석했던 한 예비역 장성이 나서서 이렇게 설명했다.

“계룡대를 건설할 때 유사시엔 대통령 관저이고 평시에는 별장이 되는 건물을 함께 지었다. 그런데 따로 청남대를 지었고 역대 대통령은 청남대만 찾았기에, 이 건물 사용이 백지화됐다. 이 때문에 육군 총장이 그 건물을 사용하고 총장용 공관은 육군 차장이 사용하게 되었다. 노 대통령은 집권 직후 청남대를 폐지하고, 경호실장을 통해 계룡대의 대통령 관사를 내놓으라고 했다. 남재준 총장은 ‘총장이 쓰던 관사를 어떻게 대통령이 쓰게 하느냐’며 반대했다. 고민에 빠진 국방부는 이리저리 궁리하다 전방 병사를 위한 막사와 화장실·급수시설을 짓기 위해 배정해놓은 예산에서 73억원을 갹출해 2005년 계룡대에 별도로 대통령 별장을 짓게 했다.”

‘주간동아’ 2005년 6월 7일자는 이 문제에 대해 정밀 추적한 바 있다. 당시 이 문제를 담당했던 국방부의 소식통은 “연말이 되면 통상 전년도에 책정해 놓은 예산을 다 집행하지 못해 남은 돈이 있다. 이런 예산을 전용(轉用)해서 문제의 건물을 설계했다”고 말했다. 

국방부는 이 건물을 대통령 별장이 아니라 유사시 대통령 관저로만 보고 전시 대비시설로 규정했다. ‘주간동아’는 이 실무자가 “전시 대비시설은 합참에서 관리한다. 때문에 이 시설을 지어야 한다는 소요는 합참에서 제기했다. 그러나 합참 또한 단독으로 이러한 건물을 짓는다고 결정 내릴 수 없다. 청와대를 비롯한 관계기관과 협의해 이러한 제의를 올렸다. 하지만 이 사업을 위한 예산이 적법하게 전용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모르겠다.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은 정말 당혹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고 말했다고 보도했었다.

▼ 2004년 9월 3일 내일신문이 ‘8월 30일 열린 육본 참모부장들이 참석하는 주간상황회의에서 남재준 총장이 “왜 정중부의 난이 일어났는지 아는가?”라는 말을 했다’고 보도해 소동이 일었다.

“그 직후 청와대가 기무사에 조사를 맡겼다. 회의록과 참석자 전원, 그리고 그들이 회의 중 메모한 노트까지 조사했지만, 그런 발언이 있었다는 자료를 찾을 수 없었다. 남 총장이 정중부 발언을 했다는 이야기는, 청와대가 고분고분하지 않은 육본이 두려워 만들어낸 것으로 판단됐다. 정중부 발언은 군 인사권을 가져오기 위한 사전 포석으로 보였다. 민정수석실은 군 인사권을 장악해야 군을 통제할 수 있다고 본 것 같다.”


 

 

“정중부 발언으로 군 인사권 장악 노려”

그때까지 중장 이하의 장성 인사는 군정권을 가진 각군 본부가 갑·을·병 추천위의 추천을 받아 선발위에 넘기면 선발위가 확정했다. 여기에 참모총장이 추천 ‘서명’을 하고, 합참의장이 ‘부서’하면, 국방부 장관의 ‘제청’과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발표했다. 이때 이들이 이의를 제기하면, 각군은 갑·을·병 추천위와 선발위를 다시 열어 새로 진급자를 선발한다. 총장 이상의 상급자는 이의만 제기할 뿐 진급자 확정에는 개입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장성 인사가 임박하면 실력자들은 총장에게 “○○○를 진급시켜주라”는 청탁을 한다. 총장은 이를 추천위와 선발위에 전달해 성사되게 했다. 실력자들이 영향을 끼치긴 했지만 진급자 결정권은 위원회로 한정해 놓은 것이다. 

2004년 청와대는 인사 업무를 민정수석실과 인사수석실(2003년에는 인사비서관실)으로 나눠 추진하고 있었다. 송 의원은 “그때 정찬용 인사수석이 찾아와 ‘다른 부처에서는 인사안을 2~3배수로 올려 청와대에서 낙점하게 하는데, 왜 군에서는 1배수로만 올리느냐? 당장 2~3배수로 올리는 것이 어렵다면 1.2배수나 1.5배수로 올려 청와대가 선택할 수 있게 해야 한다’라고 했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나 법령에 근거한 요구가 아니었기에 육본과 기무사는 진급심사위가 선정한 1배수 인사안을 올렸다. 기무사 인사안은 윤광웅 장관이 본인 동의가 없으면 구할 수 없는 자료를 제시하는 바람에 수정됐다. 그러나 육본 인사안은 원안대로 나갔다.”

육본과 민정수석실은 크게 충돌했다. 이 문제에 대해 ‘주간동아’ 2005년 2월 22일자는 민정수석실의 강모 행정관(국장, 기자 출신)이 국방부로 윤광웅 장관을 만나러 왔었고, 그후 윤 장관이 김승렬 차관보를 계룡대로 보내 육군의 진급자를 바꾸라고 했지만, 남 총장과 심사위원들이 버티는 바람에 바꾸지 못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남재준 vs 노무현

▼ 2004년 육군 장성 인사가 청탁을 배제하고 이뤄졌다는 증거를 들 수 있는가,

2004년 11월 21일 ‘국방부/육군본부 대령연합회원 일동’ 명의로 뿌려진 괴문서(왼쪽). 괴문서 사건 수사를 시작한 2004년 11월의 합조단 문서(가운데), 내사 종결하자는 내용의 2005년 12월의 합조단 문서.

2004년 11월 21일 ‘국방부/육군본부 대령연합회원 일동’ 명의로 뿌려진 괴문서(왼쪽). 괴문서 사건 수사를 시작한 2004년 11월의 합조단 문서(가운데), 내사 종결하자는 내용의 2005년 12월의 합조단 문서.

“당시 합참의장은 남 총장의 동기생이었다. 의장은 관례대로 몇 사람의 진급을 부탁했으나 (남 총장이)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크게 분노한 것으로 알고 있다.”

당시 육본 인사참모부장이었던 윤일영 예비역 소장은 ‘신동아’ 2007년 6월호 인터뷰에서 “그 합참의장은 흥분해서 컵을 던지고 실무 장교를 걷어찼다”고 말한 바 있다. 장교 구타 건에 대해 이 합참의장은 “합참 근무자의 진급이 적어 화를 낸 것은 맞다. 그러나 발로 찬 것은 기억이 없다. 그때 일은 다 잊어버리고 싶다”고 해명했었다.

▼ 노 대통령은 원안대로 재가했는가.

“그것은 청와대에 들어갔던 남 총장이 답변할 사항이다. 내가 들은 바로는 노 대통령은 한마디를 하며 재가한 것으로 안다. ‘이번 인사안은 재가하지만, 군 통수권자는 대통령이니 통수권을 행사할 수 있는 여유를 달라”는 말을 했다. 이에 장관은 “알겠다”고 대답했으나, 남 총장은 “군이 정치에 개입해서도 안 되지만, 정치가 군에 개입해서도 안 된다. 정치권이 군 인사에 개입하면 군인들이 정치에 줄을 서는 현상이 일어나 군이 통제되지 않는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안다. 그러자 노 대통령은 ‘장관과 잘 의논하셔서, 제 뜻도 헤아려서 인사안을 올려주도록 해주십시오’라고 한 후 재가했다고 들었다. 그후 장관을 만났더니 ‘대통령 앞에서 그럴 수가 있느나!’며 남 총장을 강하게 비판했다. 

민정수석실은 남 총장이 임기를 마치고 퇴임한 후 비로소 장성 인사에 개입할 수 있었다. 2005년과 2006년 1.2배수와 1.3배수로 장성 진급자를 올리게 한 것이다. 이는 법적 근거가 없는 조치였다. 이 때문에 군인사법 시행령을 고쳐 2007년부터는 병과별로 예비후보를 올리는 인사안을 만들게 했다.”

▼ 그리고 한 달 뒤 남 총장이 자기 인맥만 진급시켰다는 괴문서가 국방부 앞의 군인 숙소인 ‘국방레스텔’의 지하 주차장 등에 뿌려졌으나 범인이 잡히지 않았다. 이 사건은 1993년 서울 동빙고동 군인아파트 현관에 군 사조직인 하나회 명단을 고발하는 괴문서가 뿌려진 후 두 번째로 발생한 군 괴문서 살포사건이다. 군에서 괴문서를 뿌리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1993년에는 수사를 강화하자 백승도 육군 대령이 자수했다. 송 의원이 이끈 기무사는 왜 2004년 괴문서 사건의 범인을 밝히지 못했나.

“괴문서 살포와 궤를 같이해 시작된 것이 국방부 검찰단의 육본 인사담당 부서 압수수색이었다. 그들은 괴문서에 실린 것처럼, 육군에 남 총장 사조직이 있어 그들만 진급시켰다고 보고 압수수색을 했다. 그러나 혐의점을 찾지 못하고, 실무 장교 몇몇만 적법하게 인사업무를 하지 않았다고 기소했다.

수사가 용두사미가 되자 곧바로 누가 허위 내용을 담은 괴문서를 살포했느냐로 관심이 옮겨졌다. 기무사는 민정수석실 전모 비서관 지시로 기자 출신인 강모 행정관이 인사에 불만을 품은 사람을 만나 이 문서를 작성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 그러나 기무사는 내사만 할 수 있어, 수사는 헌병 지휘부인 국방부 합동조사단이 맡았다. 1주일여 후 한성동 합조단장과 통화를 했더니 그는 ‘머리를 식히려 남산에 와 있다’라고 했다. 그리고 수사가 흐지부지 종결되고 말았다.”

 

 

“뻔한 범인을 잡지 않은 괴문서 사건”

이 사건과 관련된 합조단 문서들은 헌병대가 1년간 이 사건을 수사했음을 보여준다. 2004년 11월 작성된 문서는 범인 체포 시까지 수사하겠다고 밝히고 있으나, 1년이 지난 2005년 12월 작성한 ‘업무보고’는 용의자가 10명으로 압축했지만 ‘내사종결 하는 것이 좋겠다’는 건의를 담고 있다. 두 문서를 모두 결재했던 한 전 단장은 이렇게 말했다.

“그 시절 노무현 정권은 군을 지배하기 위해 온갖 수단을 다 썼다. 남 총장은 군을 지키기 위해 애를 썼고. 그때 군 사법개혁이 이뤄졌다면 지금 우리 군 지휘체계는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 헌병도 크게 흔들렸을 것이다. 수사 책임자로서 그 사건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다.… 증거가 나오지 않아 윤광웅 장관에게 내사 종결한다는 보고를 할 수밖에 없었다.”

▼ 기소됐던 장교들은 유죄를 받았나.

“군 검찰이 기소하자 그들의 동기생들이 변호사 비용을 만들기 위한 모금운동을 벌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민정수석실은 진짜로 군에서 집단행동이 일어나는 줄 알고 긴장했다. 오랜 재판 끝에 그들은 모두 무죄 판결을 받고 복귀했다. 그러나 노무현 정권 아래서 진급에 계속 누락됐다. 계급정년까지만 군복을 입고 있을 수밖에 없게 됐는데, 얼마 전 모두 7차로 진급했다. 군에서의 진급은 3차가 마지막이고 예외적으로 4차가 있었는데, 전무후무하게 7차 진급이 이뤄졌다. 이러한 진급이 뜻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송 의원은 끝으로 이 말을 꼭 하고 싶다고 했다.

“내가 여당이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2003년 보안법 폐지 시도로 시작해 군 사법개혁과 군 인사권 장악으로 이어진 노 무현 정권의 군부 흔들기는 우리의 안보체제를 뒤흔드는 핵폭탄이었다. 소신 있는 군인을 진급시키는게 아니라 거꾸로 정치인에 잘 보이려는 군인이 진급하는 체제를 만들고 이를 합법화한 것이 노무현 정권이었다. 이 사건의 중심부에 문재인 후보가 있었다. 문 후보의 안보관을 알려면 괴문서 사건을 다시 조사해 범인을 밝혀내야 한다. 괴문서 사건의 주역인 전씨는 문후보의 최측근이다. 2004년, 2005년과 같은 안보 흔들기는 다시 반복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이정훈 에 대해

hoon@donga.com 주간동아 편집장과 논설위원 등을 거친 동아일보 기자. 묵직하고 심도 있는 기사를 많이 써 한국기자상과 연세언론상, 삼성언론상 등을 수상했다. 국방과 정보 원자력 우주 해양 산악 역사에 관심이 많고 통일을 지론으로 갖고 있다. 천안함 정치학, 연평도 통일론, 한국의 핵 주권, 공작, 발로 쓴 반동북공정 등을 저술했다. 기자 인터뷰 보기 - "국정원 신화 벗기고 싶었다"

댓글(1) ““문재인 수석이 보안법 폐지 총대 메달라 했다” 盧정권 기무사령관 송영근 의원 폭로 [2012년 12월 신동아]”

  1. 1313620188730593 4월 22, 2017 at 11:01 pm #

    좋은 글 고맙습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