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남 피살 사건 ④ 쿠알라룸푸르의 공작전

김정남 얼굴에서 VX 가스를 피어오르게 한 베트남인 흐엉. 그가 생존한 것은 해독제 처치를 했다는 뜻이다. 이는 그의 행동이 위험하다는 것을 그가 알고 했다는 의미도 된다. 그 역시 북한 물색조의 공작에 걸려든 희생자이다.--동아일보

 

3월1일 세팡 법원에 나온 인도네시아인 아이샤. 그도 북한 물색공작에 걸려든 희생자이다.---동아일보

쿠알라룸푸르의 공작전
김정남 암살은 새로운 공작전을 촉발했다
이정훈 기자 hoon@donga.com

 

김정남 암살에 참여한 베트남 여성 도안 티 흐엉과 인도네시아 여성 시티 아이샤가 3월 1일 말레이시아 세팡 법원에 출석했다. 드디어 북한의 공작 실체가 공개되기에 이른 것이다. 두 여인은 하나같이 김정남을 살해하려던 게 아니라 TV 몰래카메라 프로그램을 찍는 줄 알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이 사실이라면 이들은 전형적인 물색공작의 희생자이다.
공작조직은 그들의 흔적을 지우는 방법으로 종종 최종 실행자를 물색한다. 그때 유심히 살펴보는 것이 해낼 수 있는 능력과 의지의 여부다. 말레이시아 경찰의 발표에 따르면 리재남을 조장으로 한 1조는 흐엉, 오종길이 이끄는 2조는 인도네시아의 아이샤를 찾아냈다. 흐엉을 찾아낼 때는 그가 연예인 지망생이라는 것을 알고 접근한 것으로 보인다.
편승공작도 했다. 편승 대상으로는 한류를 선정했다. 물색조는 흐엉과 아이샤가 한류를 좋아한다는 것을 이용해 포섭한 것이다. 경험이 적은 젊은 외국인들은 남북한 사람을 정확히 구분하지 못한다. 해외에서 만나는 한국인은 한국사람 일색이니, 북한인이 접근해도 한국인인가 보다 하는데 그것을 노린 것이다.
물색조는 아이샤를 북한으로 데려가 관광시킴으로써 환심을 샀다. 흐엉은 이미 한류에 매료돼 한국인들과 접촉하고 있었으니 접근이 더 쉬웠던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한국 돈으로 10여만원 상당을 주고 몰래 카메라를 찍는다며 공항에서 김정남 얼굴에 VX 가스 원재료를 바르게 했다. 재판에서 쟁점이 될 것은 두 사람이 김정남 얼굴에 바르는 액체의 정체를 알았느냐의 여부다.
북한 공작조직은 VX 가스 원액을 둘로 나눴다. 나눠놓으면 VX 가스가 되지 않으니 위험하지 않기 때문이다. 공작조직은 아이샤가 먼저 VX의 반쪽 원료를 김정남 얼굴에 바르고, 이어 흐엉이 나머지를 바르게 했다. 흐엉이 손을 대는 순간 김정남의 얼굴에서는 바로 VX 가스가 피어오르니 김정남은 중독에 들어간다. 그렇다면 흐엉의 손에서도 VX 가스가 피어오를 것이니, 흐엉도 중독됐거나 사망했어야 한다.
그런도 흐엉은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VX 가스 해독제는 시중에서 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흐엉은 미리 해독제 처치를 했거나 행동 후 화장실에 들러 손을 씻고 해독제를 자가 투여했을 수 있다. 해독제 처치를 했다면 흐엉은 김정남 얼굴에 바르는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 되니, 살인 혐의를 벗어나기 어려워진다.
좀 더 교묘했다면 북한은 흐엉에게 해독제 처지를 알려주지 않았어야 한다. 그랬더라면 흐엉도 사망해 배후는 더욱 감춰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아 김정남의 얼굴에 바른 것이 위험하다는 것을 간접 증명해주게 되었다. 북한이 준 임무도 증언할 수 있게 되었다. 북한으로부터 완전 버림받은 흐엉이 어떤 증언을 하느냐에 따라 북한과 말레이 관계는 춤을 추게 된다.
추방이 결정된 리정철의 사건도 논쟁이 될 것이다. 리정철 사건은 북한이 말레이에서 만든 공작 조직을 보여줄 것이라는 점에서 큰 관심을 끌 전망이다. 김정남 사건 보도를 유심히 살펴본 독자라면 말레이 경찰이 김정남 암살과 관련됐다는 구체적 설명 없이 쿠알라룸푸르에 1년 이상 살아온 리정철을 체포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북한은 리정철 구하기에 최선을 다 했다. 이를 위해 북한은 유엔대표부 차석대사를 지낸 리동일을 쿠알라룸푸르에 보내기까지 했다. 북한은 미국과의 교섭창구도 되는 유엔대표부에 근무해온 최고의 외교관을 보낸 것이다. 강철 말레이시아 주재 북한 대사는 영어가 유창하지 못한 데가 말레이 외교부로 불려 들어가 주의를 듣는 ‘초치(招致)’까지 당했으니 활동에 제약이 있다고 보고 ‘에이스’를 긴급 투입한 것이다.
말레이 경찰이 리정철부터 체포하고, 북한이 리정철을 구하기 위해 A급 외교관을 급파한 것은 김정남 사건이 다른 방향으로 비화할 수 있다는 뜻이다. 말레이는 리정철이 김정남 암살과 별도로 다른 공작을 해온 것으로 본다. 그러나 아직은 확실한 증거를 잡지 못한 듯 하다. 리정철 사건으로 말레이와 북한이 새로운 공작전을 펼치게 될 것이다.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레이 언론이 리정철이 불법 도박과 음란사이트를 운영했다고 보도한 점에 주목해야 한다.

 

강철 말레이사아 주재 북한 대사. 북한은 강 대사를 아웃시키고 유엔에서 외교전을 치러온 이동일을 쿠알라룸푸르로 보냈다. 더 이상의 손실을 막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왜 리정철 사건에 매달리나

 

북한은 노동자나 주재원 등으로 위장한 사이버 요원을 중국으로 보내 한국어로 된 도박과 음란사이트를 운영해왔다. 우연히 한국인들이 이 사이트에 접속하면 그들의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해킹하거나 악성 댓글을 다는 공작을 한다. 이중 심각한 것이 해킹인데 방호벽이 약한 곳은 종종 뚫리기고 한다. 수년 전 한국에서는 모 은행 전산망이 북한 공작조직에 사이버 테러를 당한 바 있다.
리정철은 말레이에서 이와 비슷한 공작을 해왔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향후 말레이가 리정철 흔적을 어떻게 조사할 지에 대해서는 한국 정보기관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한 소식통은 “말레이시아는 리정철을 추방한 차제에 말레이시아에 구축된 북한 공작망을 다 뽑아내려고 할 것”이라며 이런 의견을 밝혔다.
“북한은 노동자나 학생 등으로 위장한 블랙을 심양을 비롯한 중국의 여러 도시로 보내 도박이나 음란사이트 등을 운용하며 한국의 컴퓨터망을 해킹하는 사이버공작을 해오지 않았는가. 그 과정에서 한국 등 다른 나라 조직폭력배와 연결되면 마약이나 위조달러 등도 유통시켜 왔다. 이것이 유엔 제재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외화벌이를 해온 비법이었다.
중국에 파견된 국정원 블랙 요원들이 이를 차단하는 노력을 해왔다. 이들의 추적으로 밝혀낸 사실을 국정원이 그 나라 정보기관에 전달하면, 그 나라 정보기관은 경찰에 알려 그들을 체포한다. 때문에 북한 공작조직도 대책을 마련한다. 사전에 그 지역 경찰을 포섭해 단속을 차단시키는 것이다. 남북 공작원은 3국에서 그렇게 싸우는데, 이 싸움이 커지면 주재국 정보기관이 나선다.
2014년의 화교 간첩 유우성 사건은 중국 정보기관인 국가안전부가 한국 재판에 영향을 끼쳐 중국에 침투해 있던 국정원 공작원을 발라낸 사건이었다. 한중 관계가 좋았던 지난 해 4월 중국은 북한 식당 종업원 13명의 탈북을 허용해주었다. 그러나 사드 문제로 관계가 나빠진 지난 연말에는 방해했다. 국정원은 중국에서 도박 사이트를 운영하며 한국의 조직폭력배와도 연결돼 외화벌이를 하던 북한 조직을 포섭해 탈북시키려 했었는데, 중국 국가안전부가 이를 알고 덮쳐 이들을 북한으로 보내버린 것이다.
북한은 말레이시아가 준 무(無)비자 혜택을 이용해 말레이시아를 제2의 중국으로 이용해왔다. 말레이는 중국보다는 서방에 더 가까우니 북한에게는 더 좋은 거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김정남 암살을 계기로 리정철을 검거한 것은 말레이 정보기관이 북한이 쿠알라룸푸르에 구축한 공작망을 일망타진하겠다는 신호다. 때문에 북한은 리동일을 보내는 등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다.”
말레이시아는 북한 주재 자국대사를 소환해 북한과 단교할 의사를 내비쳤다. 김정남 암살 사건은 외부적으로는 외교전 양상이지만 안으로는 한국과 중국은 물론이고 여러 나라 정보기관이 뛰어든 복잡한 첩보전으로 확대되고 있다. 한 소식통은 “말레이는 김정남 시신을 북한에 쉽게 인도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김정남 가족이 김정남 시신 인도를 요구할 것인가는 또 다른 공작전의 소재가 된다”고 예측했다.

 

리정철을 돌려받기 위해 북한이 긴급히 투입한 리동일 유엔주재 차석대사. 북한이 A급 외교관인 리동일을 긴급 투입한 것은 리정철이 그만큼 중요한 일을 쿠알라룸푸르에서 해왔다는 뜻이다.--동아일보

 

김정남의 가족이 안전을 이유로 한국이나 중국에 자신의 DNA 샘플을 주고 대신 김정남 DNA와 비교해달라고 하고 ‘맞으면’ 시신 인수까지 대행해 달라고 한다면, 순식간에 전선은 말레이를 벗어날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한국에 그 일을 맡기면 남북 관계가 긴장되고, 중국에 부탁한다면 북중 관계가 일그러진다. 말레이는 북한을 고립시키고 우군을 얻기 위해 기 이러한 구도가 형성되도록 조성할 가능성도 있다고 그는 전망했다.
말레이의 북한 압박은 상당기간 지속될 전망이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것이 왜 말레이는 김정남의 말레이 방문 목적과 동선(動線) 등을 밝히지 않느냐는 점이다. 말레이 경찰은 쿠알라룸푸르의 한 콘도를 북한인들이 예약해 공작을 모의했다는 것까지 밝혀냈음에도 김정남이 묵었던 숙소는 공개하지 않고 있다. 한 소식통의 분석이다.
“지금 김정남 암살 사건 수사는 말레이 경찰이 하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말레이 정보부가 진두지휘하고 있다. 이들은 외교부에 대해서도 영향력을 발휘한다. 유엔의 대북제제에도 불국하고 말레이는 북한과의 교역을 중단하지 않았었다. 그런데 남중국해에 대한 중국이 압박이 거세지자 미국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많아졌다. 때문에 가장 생색을 내는 방법으로 북한을 제재하며 북한과 단교할 것으로 보인다. 이를 위해 김정남 암살 카드를 사용할 것이다.”
그는 말레이가 북한대사관으로 숨어든 두 명의 용의자 인도를 요구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제법상 대사관은 치외법권 지대라 주재국의 사법 기관도 들어갈 수가 없다. 말레이는 그러한 국제법을 지키면서 계속 두 사람 인도를 요구하는데, 그래도 들어주지 않으면 북한 공작조직이 김정남을 말레이로 유인한 방법과 말레이에 들어온 김정남을 추적한 것 등은 차례로 공개할 것으로 예상했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것이 자히드 하미디 말레이시아 부총리가 자국 언론을 통해 “이 사건은 두 달 전부터 치밀하게 준비된 공작”이라고 밝힌 점이다. 이는 말레이가 김정남의 방문 이유와 동선, 그리고 북한이 구축한 말레이 공작망을 거의 다 파악했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전모를 공표하지 않는 것은 북한을 상대로 모종의 거래를 하기 위한 것으로 본다. 이 소식통은 “말레이시아는 그들이 알지 못한 공작망까지 다 뽑아내려고 할 것이다. 이를 위해 북한 대사관으로 숨어든 두 명의 수배자 카드를 사용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2014년 말레이시아는 우크라이나 상공을 지나던 국영 여객기가 우크라이나 반군이 쏜 미사일에 맞아 격추된 데 이어 이 항공사 예하의 저가 항공기 한 대가 인도양에서 실종되는 사고를 당했다. 그로 인해 레이시아는 국영항공사를 해체했다가 새로 만드는 수고를 겪는 등 많은 손해를 보았다. 때문에 김정남 사건을 철저히 수사하고 북한도 응징해 말레이의 명성을 회복하려고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작전과 함께 주목할 것이 국정원의 능력이다. 말레이 경찰은 김정남 암살에 참여한 북한인 여섯 명의 인적 사항을 밝혔다. 그러자 국정원은 국회 정보위에서 4인은 보위성(국가정보원과 비슷), 2인은 외교성 소속이라고 설명했다. 국정원은 어떻게 6인이 소속된 곳을 밝힐 수 있었을까. 한 소식통의 의견이다.
“평시 우리 정보기관이 하는 일 중의 하나가 북한 요인들의 인적사항을 수집하는 것이다. 그리고 모든 방법을 동원해 그들의 사진을 찍는다. 그렇게 해서 축적한 데이터베이스가 상당하다. 말레이 경찰이 발표한 6인의 이름과 사진을 이 데이터베이스에 대조하니 바로 6인의 신원이 확인된 것이다.”
그러나 국정원은 허점도 보였다. 쿠알라룸푸르를 탈출한 4인은 3개국을 돌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평양행 비행기에 올랐다. 불라디보스토크에는 북한 노동자들과 기관원들이 다수 나와 있기에 국정원도 적잖은 요원을 투입한다. 블라디보스토크의 북한 식당에 가면 배짱 좋게 북한 종업원들과 놀고 있는 국정원 블랙들을 볼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이들은 폭넓게 활동해왔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관계자 나빠져 결정적인 순간에 러시아 정보부의 협조를 받아내지 못했다. 이들은 북한 4인조가 블라디보스토크 공항에 왔다는 것을 알아내 통보했으나 러시아 정보부는 움직이지 않았다. 러시아가 협조했다면 김정남 암살 사건은 전모가 드러나고 한러관계는 더없이 좋아지고 러시아는 대북 제재에 동참했다는 큰 명분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한 관계자는 “러시아가 사드 배치에 반대하는 것은 한러 관계가 나빠졌다는 뜻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계속 무시하고 있다가 4인을 놓치는 결과를 맞았다. 천려일실이다”라고 평가했다.

 

————————-

 

1981년 평양에서 아버지 김정일(왼쪽 앉은 이)과 사진을 찍은 김정남(오른쪽 앉은 아이). 이 사진이 있어 정남은 김정일의 아들임을 분명히 주장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정남과 정철, 정은은 할아버지 김일성과 찍은 사진이 없다. 때문에 정통성이 없다는 문제에 직면하는데, 김정일이 정은을 찍었기에 정은은 김정일 사후 북한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정은은 할아버지로부터 인정 받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기에 같은 조건을 가진 이들을 없애 권력을 강화하는 것이다. 장성택과 김정남 척결은 그러한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뒷줄은 성혜랑씨와 이남옥, 이한영 남매--등나무 출판사 제공

 

왕위 다툼과 스탠딩 오더
할아버지와 찍은 사진이 없어 시작된 형제의 난

 

손자를 귀여워하는 것은 모든 할아버지의 본심이다. 그러나 정남과 정철 정은은 한 번도 할아버지를 본 적이 없다.I갓난아이는 돌 무렵이 가장 예쁜데, 이들은 할아버지와 돌 사진도 찍어보지 못한 것이다. 이는 김정일이 아버지가 무서워 혼외 아들을 김일성에게 보여주지 못한 탓이다.
김정일이 공식적으로 결혼한 여성은 홍일천이다. 홍일천은 설송과 춘송 두 딸만 낳았다. 김정남은 여러 여성을 편력해, 이 출신의 영화배우 성혜림으로부터는 정남, 재일교표 출신의 고영희(고용희라고도 함)에게서는 정철과 정은이라는 아들을 얻었다. 그러나 아버지가 무서워 아들을 해외로 보냈다.
김정남은 성혜림과 함께 모스크바로 갔다, 그때 동행시킨 이가 성혜림의 언니인 성혜랑씨와 그의 자녀(이한영, 이남옥)였다. 그 후 성혜림은 모스크바에 남고 이들은 스위스로 옮겨가 살았다. 1982년 이한영이 사라진(한국으로 망명) 다음에도 김정남은 계속 스위스에 살았다. 이는 그때도 김정남 보호는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는 의미가 된다. 김정일에게는 김정남이 있다는 것을 아버지가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정철-정은 형제는 고영희의 동생인 고영숙 부부가 그들의 자녀와 함께 스위스로 데리고 나가 키웠다. 고영희는 자기 선택으로 따라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한 때인 1997년 이한영씨 망명이 언론에 공개돼, 우리는 김정남에 대해 잘 알게 되었다. 그 시기 김정일은 김일성의 사망(1994)으로 권력의 정점에 있었지만 정남을 불러들이지 않았다. 대중에게도 감춘 것이다.
자신과 아들이 버려졌다는 것 때문에 성혜림과 고영희는 상당한 스트레스를 받다가 숨졌다. 그러한 이들을 챙겨준 이가 장성택이었다. 2008년 중풍에 걸렸다 회복한 김정일은 정은을 후계자로 찍었는지 조금씩 공개하기 시작했다. 2010년 천안함 사건 이후에는 중국에 데려가는 등 적극적으로 공개했다.
2011년 김정일이 죽자 장성택은 김정일의 부탁대로 정은을 후계자로 옹립했다. 이러한 사정을 아는 우리 정보기관은 장성택이 실권자로 섭정할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2년 뒤 김정은은 장성택을 처형했다. 권력 장악에 나선 것이다. 정철은 호르몬 장애가 있어 사회생활을 하기 어렵다. 그러나 정남은 장성택처럼 옹립해주는 세력이 있으면 언제든지 북한에 들어와 자신을 대체할 수 있기에 그를 없애라는 스탠딩 오더를 내렸다.
중국 지도층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김정은을 싫어한다. 정은도 그것을 알기에 중국에 살며 중국과 가까운 정남에 대한 적개심을 키워갔다고 한다. 정남은 중국의 경호 덕분에 몇 차례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더는 어렵다고 봤는지 2015년 김정은에게 살려 달라는 편지를 보냈다. 그럼에도 스탠딩 오더는 풀리지 않았다. 그리고 유인책에 걸렸는지 2017년 쿠알라룸푸르에서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할아버지와 찍은 사진만 한 장 있었어도 정남 형제는 싸움에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사진을 찍힌 손자가 정통성을 인정받아 권력을 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정남 암살은 세 형제의 처지가 똑 같았기에 일어난 사건이다. 세 형제 모두 정통성이 없으니 장성택이 리더가 돼도 그만인 상황이었다. 장성택의 도움으로 집권한 정은은 그러한 현실을 인지하고 장성택을 죽이고 김정남도 살해했다. 그런 점에서 김정은의 권력 장악 공작은 계속될 전망이다. 김정은은 독한 자이다.

 

———————-

 

영화 '베를린'의 한 장면. 수년 후 김정남 사건을 소재로 한 영화 '쿠알라룸푸르'가 만들어질 수도 있다.

 

영화 ‘베를린’과 쿠알라룸푸르 사건

 

말레이시아는 ‘섞인 나라’다. 비동맹 외교를 추진해왔기에 동(東)과 서(西)가 만난다. 남북한 모두에게 무(無)비자를 적용해 왔다. 아시아에 있으면서도 무슬림이 다수다. 황인종이 있지만 검은 피부도 적지 않다. 말레이계와 중국계, 인도계가 섞여 산다. 말레이어 외에 식민지배한 영국의 유흔인 영어와 화교들의 중국어, 인도계인 타밀어도 통한다.
김정남 사건을 보고 있노라면 지난해 영국에서 일어난 태영호 공사의 망명이 떠오른다. 태공사의 망명이 없었더라면 ‘스탠딩 오더’에도 불구하고 김정남은 좀 더 살았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영화 ‘베를린’도 오버랩된다. 냉전시대 베를린 시내를 걷는 성인 남성의 6할이 스파이였다는데, 쿠알라룸푸르도 비슷했을 것 같다. 김정남이 암살된 지금은 더 할 것이다.
영화 ‘베를린’에서는 3각 전쟁이 일어난다. 베를린에 침투한 국정원 블랙 요원 정진수는 베를린 주재 북한 대사 표종성이 북한 무기를 불법 밀매한다는 것을 알고 추적한다. 그러한 때 북한에서 권력 교체가 일어나 표종성을 의심한다. 북한이 보낸 ‘블랙’ 동명수는 표종성의 부인을 압박하는 방법으로 표종성의 혐의를 추적한다. 위기를 느낀 표종성은 정진수와 접촉해 한국 망명을 타진하는데, 그러한 표종성을 동명수가 암살한다. 그리고 마주친 남북의 두 블랙이 총을 겨눈다….
김정남은 ‘주저하기만 태공사’가 아니었을까. 표종성을 김정남으로, 남북의 공작원을 정진수와 동명수로 환치한다면, 훗날 ‘쿠알라룸푸르’란 영화가 만들어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

이정훈 에 대해

hoon@donga.com 주간동아 편집장과 논설위원 등을 거친 동아일보 기자. 묵직하고 심도 있는 기사를 많이 써 한국기자상과 연세언론상, 삼성언론상 등을 수상했다. 국방과 정보 원자력 우주 해양 산악 역사에 관심이 많고 통일을 지론으로 갖고 있다. 천안함 정치학, 연평도 통일론, 한국의 핵 주권, 공작, 발로 쓴 반동북공정 등을 저술했다. 기자 인터뷰 보기 - "국정원 신화 벗기고 싶었다"

아직 댓글이 없습니다.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