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교안 대통령 만들려면, 박근혜는 전두환을 배워라②

 


다시 보는 전두환의 전략

 

2004년 전두환 전 대통령을 만난 박근혜 대통령. 박 대통령은 전 전 대통령을 탈탈 털었는데, 그가 황교안 대행을 대통령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전씨가 노태우씨를 옹립해준 과정을 연구해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주목할 것이 전두환-노태우 관계이다. 전씨는 권력의지가 강한 사람이었다. 대위로 육사 교관을 하던 1961년 그는 강영훈 육사 교장(중장)의 만류를 뚫고 생도를 끌고 나와 5·16 지지 행진을 했다.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사관생도 시위를 만들어 박정희 권력 공고화에 기여한 것이다. 그리고 4년제 육사 졸업생 가운데 ‘드센 이’를 뽑아 만든 하나회를 이끌었다.
그는 하극상(下剋上)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1979년 10·26사건이 일어나 계엄이 선포된 덕에 보안사령관을 하던 그는 합수본부장이 되었다. 그리고 저격범이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인 것을 알자 망설이지 않고 체포해, ‘김재규의 혁명’을 차단해 버렸다. 두 달 뒤에는 김 부장의 요청으로 10·26 현장 인근의 음식점에 와 있었던 정승화 계엄사령관 겸 육군총장을 체포하는 과단성을 보였다(12·12사건). 이듬해 서울의 봄과 광주민주화운동 시위에도 단호히 대처했다.
노태우씨는 전씨만큼 권력의지가 강하지 않았다. 전씨는 1931년 1월생이고 노씨는 32년 12월생이다. 연도로만 보면 한 살 차이이지만, 생일까지 따지면 2년 가까운 차이가 난다. 그래서인지 노씨는 전씨의 자리를 이어 받는 경우가 많았다. 그 마지막이 대통령 주고받기였다. 권력의지가 약한 노씨가 대통령이 된 것은 권력의지가 대권을 잡는 필수조건이 아님을 보여준다. 대운을 쥐고 있으면 권력의지가 약해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
전-노 정권 교체기로 돌아가 보자. 1987년의 대한민국은 지금처럼 혁명적인 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전두환 대통령이 내놓은 4·13호헌(護憲)조치가 그해 1월 7일 물고문을 받다 죽은 박종철 서울대생 사건과 결합돼, “호헌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는 엄청난 시위를 만들어낸 것이다(6월사태).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한 전 대통령은 노씨를 후보로 내세워 국민 요구는 들어주고, 야권은 분열시키는 전략으로 나갔다.
이를 위해 한 가장 큰 시도가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받아들이는 6·29선언이었다. 이 선언은 노태우 후보가 했다. 그러나 청와대에서 통치사료비서관을 했던 김성익씨 등은 하나같이 “6·29선언은 전두환 대통령 작품”이라고 증언한다. 이들은 “전 대통령이 이를 제의했을 때 노 후보는 오히려 거부했었다”고 말한다. 이에 전 대통령이 “이렇게 해야 야권이 분열돼 이길 수 있다”며 대선 자금지원을 포함한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해 노 후보를 설득해냈다.
5공 인사들의 증언에 따르면 전 대통령은 야권의 김영삼 김대중씨는 후보 단일화를 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고, 둘이 단일화를 하지 못하도록 공작할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한다. 그때 안기부에 있었던 한 관계자의 증언이다.
“천하 3분지계를 썼다. 야권에서 2명 이상의 후보가 나오면, 한 사람만 나온 여당 후보는 당선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런데 야권에서는 김종필씨까지 나와 1노3김이 경쟁하게 되었다. 4분지계, 꽃놀이패가 행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래도 전 정권은 방심하지 않았다. 상도동계(김영삼 측)는 정치를 해왔으니 자금이 있었으나, 동교동계(김대중 측)는 적었다.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이지만 그때 동교동계가 대중을 동원하는 유세를 할 수 있도록 교묘한 방법으로 자금을 제공해준 것은 안기부였다.
유세가 본격화되자 김영삼씨의 지지율이 김대중씨를 앞서갔다. 김영삼씨는 교회 장로였다. 때문에 우리는 기독교계가 아주 싫어하는 한 종교단체로부터 김영삼씨가 돈을 받았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 결과 둘의 지지율이 다시 백중해져. 노태우 후보가 무난히 12대 대통령에 달성될 수 있었다.
때문에 김영삼씨는 전씨를 두고두고 미워했다. 13대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자신의 임기가 끝나기 직전 사면해주긴 했지만, 5·18 특별법을 만들어 전씨에게 사형을 선고하게 했다. 반면 김대중씨는 전두환씨가 대통령을 한 1981년 내란모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해외로 쫓겨났었지만, 14대 대통령이 된 다음에는 김영삼씨처럼 전씨를 코너에 몰지 않았다.
또 하나 안기부가 펼친 정치공작이 노태우 후보를 향해 ‘군부독재 타도’ 등을 외치며 달걀 등을 던지게 하는 것이었다. 이를 막기 위해 노 후보 측은 방탄유리를 들고 다녔는데, 그러한 모습이 보수층을 결집시킬 것으로 예측했다. 보수는 모으고 야권은 분열시키면 직선제를 해도 정권교체를 막을 수 있다고 전두환 정부는 확신했다.”
5,6공 시절 정치를 한 모 인사는 ‘황 대행을 대통령으로 만들 수 있느냐’는 탄핵 여부에 관계없이 대중 동원력이 있는 박 대통령이 황 대행을 전폭적으로 지지해주느냐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했다. 그는 “박 대통령의 지목은 여권 후보를 단일화하는 효과를 발휘한다. 보수신당은 박 대통령의 힘을 막아내지 못할 것이다. 보수 세력은 어떤 경우에도 좌파에는 정권을 줄 수 없다고 보고 당선 가능한 이에게 집중할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의견을 낸 인사들은 박근혜와 전두환의 화해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박근혜 대통령은 5공 세력이 최태민씨를 탄압했기에 전두환씨를 매우 싫어한다. 그러나 전씨와 5공 세력은 박 대통령을 도왔으면 도왔지 방해한 적이 없다. 최순실 게이트가 터져 나온 뒤 그때 왜 최씨를 영애로부터 잘라내지 못했느냐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을 보면 5공의 판단이 옳았음이 증명된다. 그런 점에서 박 대통령은 전 전 대통령과 화해하고 그의 방법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최태민 문제로 틀어져 버린 전두환-박근혜 관계

 

전씨는 중령인 1967년 수경사 30대대장, 준장인 1976년 경호실 차장보로 청와대에 근무했다. 김재규씨를 변론했던 강신욱 변호사는 한 인터뷰에서 “그때 큰 영애는 전씨를 오빠라고 불렀다.”고 증언한 바 있다. 두 사람 관계는 10·26사건 후 청와대에서 발견된 박정희 자금 전씨 측이 가져가 틀어졌다고 하는 의견이 있다. 전 전 대통령의 비서관을 지낸 민정기씨는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10·26 직후 합수본부는 김계원 전 비서실장의 금고에서 비서관들이 ‘박정희 대통령의 개인 돈’이라고 주장한 9억5천만 원이 발견되자, 권숙정 비서관을 통해 박근혜씨에게 전달했다. 그러자 박씨는 ‘10·26사건의 진상을 철저히 밝혀 달라’는 부탁과 함께 수사비에 보태 쓰라며 3억5천만 원을 되보내 주었다.”
이러한 두 사람 관계는 전씨가 국보위를 만들며 권력을 장악해가다 대통령이 되면서 소원해졌다고 한다. 그러한 전씨 등은 김재규 정보부장이 그랬던 것처럼 박씨와 최태민씨를 갈라놓으려고 했다. 때문에 최씨를 인제로 보냈는데, 박씨가 반발하는 바람에 최씨가 돌아올 수 있게 해줬다. 박근혜씨의 마음을 알아차린 5공은 그리고 서먹해져 더 이상 관여하지 않았는데, 피해의식이 있는 최씨가 불만을 토로해 박씨는 전씨 등에게 적대감을 가졌다는 것이다.
5공 측 한 인사는 “그땐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되리라고 상상도 하지 못했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족이니 잘 지내기를 바라고 더 이상 관계하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대통령에서 물러난 전두환씨는 김영삼 정부 시절 사형을 선고받으면서 대통령연금을 비롯한 재산을 추징당했다. 그러한 전씨 부부는 계속 연희동 집에서 살았는데 2011년 연희동을 방문했던 기자는 이순자씨에게 “어떻게 생활하느냐”고 물었었다.
이씨는 “이 집은 내가 헌집을 사서 고친 다음 파는 것을 서너 번 해서 번 돈으로 산 것이라 내 명의로 돼 있어 추징을 당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친정아버지로부터 받은 유산(그후 검찰 조사에서 30억원으로 밝혀짐)을 넣은 즉석연금(일시금으로 넣으면 다음 달부터 사망 시까지 매월 나오는 연금)으로 살고 있다. 이 연금 역시 내 명의라 추징당하지 않았다. 이 연금은 매달 1000만원 가량 나오는데 일 하는 아주머니를 쓰고 세금을 내고 근근히 산다.”라고 대답한 바 있다.
그런데 2013년 박근혜 정부는 일명 ‘전두환 추징법’을 만들어 전씨가 미납하고 있는 추징금을 걷어야 한다며 연희동 집과 즉석연금을 압류해버렸다. 고향의 선산과 전씨 자녀들의 재산도 압류했다. 탈탈 털어버린 것이다. 그 후 검찰은 약간의 배려를 해줬다. 두 사람이 돌아가실 때까지는 그 집에 살도록 해주고, 즉석연금은 압류대상에 해제해준 것이다. 이 일로 대범한 듯 한 전씨도 배신감을 느꼈다고 한다.
때문에 최순실 게이트가 한창이던 지난 1월 2일 자택에서 신년 인사회를 한 그는 채널A의 카메라 앞에서 “여자 대통령이 나오니 참 신통치 않다”“박 대통령이 똑똑하고 잘하는데 혼자 사니까 아무리 머리가 좋아도…” “결혼도 한 번 안 해 보고, 애도 (안 낳아 봤다). 역시 그 영향이 있다. 인생 문제라든지…” “인간관계라는 것이 부부간에 살면서, 싸우면서 좋은 것이 많이 나오는 법인데, 자기 혼자서 뭘 어떡하겠는가”라고 말했다.

 


돌고 도는 세상

 

돌고 도는 것이 세상이다. 1981년 김대중씨에게 사형을 선고하게 했던 전씨가 1996년 김영삼 정부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았다. 그때 전두환씨는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에서 최태민씨를 박씨로부터 떼어내려고 했는데, 그것이 박근혜씨의 분노를 사, 박근혜씨가 대통령이 된 후 재산을 탈탈 털리는 처지를 당했다. 그리고 3년 뒤 박대통령은 최씨의 딸인 최순실씨 사건으로 탄핵을 당하게 되었다.
박근혜와 전두환 세력의 불화는 보수 세력의 분리를 보는 것 같다. 다음 대선에서 정권이 교체된다면 가장 큰 타격을 받은 것은 박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다. 이를 피하고자 한다면 박 대통령은 탄핵 여부와 관계없이 보수세력이 인정할 수 있는 인물을 대권 후보로 내세워야 한다. 그리고 다양한 보수를 결집시켜야 한다. 이는 전두환씨가 노태우씨를 당선시킨 방법을 참고하는 것이고, 5공 세력과 화해해야 하는 문제가 된다.
그러나 큰 차이는 있다. 전두환-노태우는 생도 시절부터 수십년 간 관계를 맺어온 사이이지만 박 대통령이 밀 수 있는 후보로 주목받는 황 대행은 ‘보수’를 제외하고는 이렇다 할 교집합이 없다. 그런데 황 대행은 좋은 운수를 갖고 있는 듯 하다. 운(運)도 세상처럼 돌고 도는 존재다. 지금의 대운이 잠시 뒤에는 큰 악운으로 바뀔 수도 있다. 대운을 유지하려면 기반부터 다지는 치밀함이 필요하다.
탄핵을 만난 박 대통령과 대운을 만난 듯한 황 대행이 손을 잡으려면 박 대통령은 전두환 전 대통령 측과 얽히고설킨 인연부터 정리해야 할 지 모른다. 그것이 박 대통령과 황 대행을 비난받게 하는 요소가 될 수 있지만, 그것은 반대파의 목소리는 커지나 반대파는 늘어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대신 보수는 조용히 결집한다. 헌재 판결과 별도로 박 대통령도 그만의 결정을 해야 하는 시기로 몰리고 있다.

이정훈 에 대해

hoon@donga.com 주간동아 편집장과 논설위원 등을 거친 동아일보 기자. 묵직하고 심도 있는 기사를 많이 써 한국기자상과 연세언론상, 삼성언론상 등을 수상했다. 국방과 정보 원자력 우주 해양 산악 역사에 관심이 많고 통일을 지론으로 갖고 있다. 천안함 정치학, 연평도 통일론, 한국의 핵 주권, 공작, 발로 쓴 반동북공정 등을 저술했다. 기자 인터뷰 보기 - "국정원 신화 벗기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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