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남표발 교육개혁과 '나이브'라는 함정

우리 사회 최대의 적은 무엇일까? 아마도 ‘나이브’가 아닐까 싶다.

 

naive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na·ive,
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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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static.naver.com/endic/2005/images/font/syn/e0fe.gif〕〔F에서;L타고난, 자연의」 에서〕 a.
1a <사람이> 순진, 소박한, 천진난만한, 숫된
   

http://sstatic.naver.com/endic/2005/images/blt_exam.gifnaive+of++to do》 Its naive of you to believe that. 그것믿다니 순진하구나.
b (특히 젊기 때문에) 세상르는;단순한, 고지식한
c 믿기 쉬운, 속기 쉬운
2미술소박한, 원시적인
3 (특정 분야에) 경험없는;선입지식없는
4 <동물 이> 실험[투약] 당하지 않은
n. 순진사람;경험부족사람,  이런
뜻이다.

 

대학 영문학 시간에 ‘캔디다’라는 희곡을  공부할 때 처음 접했던 개념이다.서양 문화의 어느 단계에서 치열하게 고민됐던 개념이라는 뜻이다. 요즘
말로 바꾸면 ‘착한 무능’이라고 해야할까? 이 ‘착한 무능’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파멸로 몰아넣는 지 우리는 민주화 이래 계속해서 경험하고 있다.개혁보다는 통일에 집착했던 DJ정권을 제외하고 김영삼 정권과 노무현정권의
실패원인은 바로 이 나이브함이  아닐까?일반 기업에서도 숱하게 경험하는 바다.우리나라의 기업문화의 가장 큰 고질병이
바로 이런 무능한 착한 사람이 만들어내는 문제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게다가 이런 무능한 착한 사람은 우리 사회 특유의 ’인정’과 ‘정의’에 대한 대중심리
덕분에  궁극적인 승자가 되는 경우도 많다.  

 

언뜻 아이러니로 보이는 이 ‘착한
무능’이란 복잡 다단한 인간의 마음과 욕망이 빚어내는 ‘현장의
치열함’ 혹은 ‘복잡함’에
대한,즉 ’실체적 진실’에 대한 이해 없이 막연하게 ‘착함’을
추구하는 마음이다.숫자를 통한 철저한 계량화나 분석적인 접근보다는 두루뭉실하게 ‘함의’를 추구하는 동양문화의 특징이 만들어낸 현상일 것이다. 하지만 구두선이 아닌 실천에 들어가보면 사실 착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현명함,즉 궁극적으로 그 선 혹은 착한 것이
진짜 선이거나 착한 것일 수 있는 지에 대한 통찰력이다.왜냐하면 선은 궁극적으로 공리에 기여해야 선이다.단지 의도가 착하다고 해서 착한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그런데 우리나라의 ‘개혁’이나 ‘정의’는 대개 ‘의도의 착함’에
머문다.

 KAIST와 MB정권의 교육개혁에 관해
걱정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예를 들어,카이스트가 경시나
수능점수가 아닌 학교장 추천이나 내신을 참고해 일반고의 학생들을 뽑고,포스텍이 입학사정관제도로 전원을 선발한다는데 과연 우리사회에서 ‘내신’이 ’공교육의 영역인가’하는
점이다. 우리나라 교육현실에서 ‘내신’은
절대’공교육의 결실’이 아니다.그야말로 ‘엄마 노력의 결실’이자 ‘사교육의 꽃’이 내신이다.수능이나
경시는 사교육이 뒷받침된다고 해도,즉 엄마가 아무리 극성을 부려도, 개인의
능력이 전제되지 않으면, 절대로 점수가 나오지 않는다.특히
수학이나 과학 경시는 더더욱 그렇다.특목고 합격 수준의 영어도 마찬가지다.언어 역시 일정 수준 이상은 단지 ‘언어’가 아니기 때문에 외국에 살다왔다고 해서 모두 다 특목고에 합격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엄마들이 이미 경험을 통해 깨달은 바다.외고들의 목표 역시 단지 영어를 잘하는 아이를 뽑는 것이
아니라 우수한 학생을 뽑는 것이 목표이다.다만 뛰어난 학생들 사이에서는 외국에서 살다온 아이가 절대적으로 유리하다.

 

분명한 것은 특목고 입시를 위한 사교육이
평준화 정책으로 인해 미처 공교육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영재교육’에
대한 대체역할은 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이 진정한 영재교육인지가 의문이긴 하지만 적어도 사교육은 그나마
영재들의 ‘선행’에 대한 욕구라도 해소시켜 준다.하지만 아직 우리나라는 공교육에서도 영재교육의 기반조차 마련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또 과연 우리나라 국민들의 성향상 공교육에서 영재교육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을
지에 의문을 갖는 부모들도 많다. 특목고나 경시같은 제도의 문제점은 그 내용이 아니라, 기회의 불평등과 ‘과열’로
인한 사회적 낭비,어린 시절부터 아이를 입시전쟁으로 내모는 아동학대같은 부작용이 문제일 뿐이다.

 

하지만 대학수능의 경우 특목고 입시와는 또 다르다.수능에서 상위권의 점수를 내는데 외국 경험이나 경시경험은 충분조건은
돼도 필요조건은 아니다.그래서 집안이 가난한 학생일수록 오히려 수능에 승부를 건다.반면 내신은 그야말로 ‘엄마의 뒷받침’이 필수다.그 뿐만이 아니다. 지식에
대한 폭넓은 접근보다는 오로지 ‘시험용 공부’에만 매달리는
사람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것이 내신이다. 전교1등을 하려면 고교3년
내내 전과목 고액과외를 받아야한다는 믿을 수 없는 얘기도 있다.게다가 음악,미술,체육까지
내신을 잘 받으려면 아주 어린시절 부터 어떤 ‘뒷받침’이
필요한 지 엄마들은 안다.심지어 입시컨설팅업체들은
초등학생 엄마들을 상대로 내신으로 대학에 입학하는 수시에 합력하려면 초등학교때부터 대학입시를 전제로 한 로드맵을 짜야한다고 충고하는  실정이다.

입학사정관제 역시 정말 걱정되는 부분이다.사정관의 ‘자의’가 ‘합격의 잣대’인 이 제도가 과연 대한민국의 교육현실에서도 ‘착한’ 제도일 수 있을까? 온갖
뒷거래와 엄마들의 ’독특한 스펙만들기 전쟁’의 또 다른 도화선이 되지않을까? 입시를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않는 것이 우리나라 교육 환경이다. 많이 배우고,돈많고,똑똑하고,시간많고,오로지
내 가족밖에 모르는 ‘엄마’들이 이끌어가는 전쟁이 바로 ‘입시전쟁’이다. 그런 나라에서 과연 입학사정관제도가 순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있을까?

결국, 그나마, 우리나라에서 가장 평등한 것은,아니 진정한 인재를 선별하는 방법은  ’난이도’를 통한 변별이다.그나마 외고나 과고 입시는 사교육이 필요조건은 돼도 충분조건은
안된다는 것이 엄마들의 경험이다.안되는 애는 외국에서 2-3년씩
유학해도 안된다는 것이다.

 

적어도 교육이 여전히 ‘먹고사는’ 문제의
가장 중요한 관건으로 작용하는 한,우리나라에서는
어떤 제도를 취하든 ‘경쟁’이나 ‘과열’은 피할 수 없다.우리
사회가 어떤 직업을 택해도 평생 안정적으로 편하게 먹고 살 수 있는, 그런 사회가 되기 전까지는.이같은 현실을 인정하고 나면,결국 우리나라 입시전쟁에서 실천할 수있는 미덕은 ’모두에게
얼마나 공평한 경쟁기회를 제공하느냐’이다.공교육 강화의 목적은
거기에 맞춰져야 한다.즉,가난한 아이들에게도 경쟁에 뛰어들
수 있는 기회는 제공돼야 한다는 뜻이다.어떤 방법으로도 입시전쟁을 없앨 수는 없으니 공교육이 그 입시경쟁을
맡아야한다는 뜻이다.그런 의미에서 공교육을 강화한다면서
국제중,특목고,자율형 사립고를 확대하는 MB정권의 교육정책의 정확한 목표가 무엇인 지 참으로 혼란스럽다.이것
저것 다 펼쳐놓고, 우왕좌왕 하지말고, 일단 정확한 목표를
정하고,거기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해야하지 않을까싶다.

 

결국 정부건 KAIST건 포스텍이건 ‘공교육 활성화’의 실체적 의미를
깨우치고,공교육 강화에 나서야 ‘사교육비 절감’과 ‘공평한 기회 제공’이라는
최소한의 ‘선’이라도 실현할 수 있다. 엄마들 사이에 
전두환 정권이 취한 교육 정책이 그나마 우리나라 현실에서 가장 ‘착한’  입시정책이었다는 회고담이 나도는 것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당시와 지금은 교육의 수요가 많이 다르다는 점이다.영어가 대표적인 예다.그런 의미에서 정부나 카이스트나 포스텍의 개혁정책은 공교육
현장이나 사교육 현장의 정확한 ’실체’에 관해서 잘 모른 채 ‘나이브하게’
개혁에 나서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하면 지나친 기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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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법과 한나라당의 무지

아무나 시간을 내서 MBC KBS 그리고 SBS의 스튜디오에 한번 나가보면 우리나라 방송산업이
얼마나 황당한 지 단번에 알게된다.오로지 PD를 만나기 위해서,그래서 한번이라도 방송을 타기위해서, PD에게 눈도장을 찍기위해 하루종일 복도에서 서성대는 매니저들이 진을 치고 있기 때문이다.(하긴 우후죽순으로 늘어난 인터넷언론사
덕분에 지금은 기자들이 더 많다고 한다.) 처음으로 방송을 출입하면서 가장 황당했던 풍경이 바로 이것이었다.도무지 다른 분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비상식들이 방송분야에서는관행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특히 가요제작자들은 사실상 방송에 목을 메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들
지상파3사의 방송을 한번이라도 타야 그나마 신곡을
알릴 수라도 있기 때문이다.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10여년전만
해도 신곡이 나오면 방송을 타기위해 가요 제작자들이 통상 설정하는라디오 PD 한 명당 촌지 
곡당 2천만원이라는 게 이 바닥의 불문율이었다.지금도 PD뇌물 수수사건이 종종 검찰의 조사 대상이 되는 것을 보면,이같은 관행이 완전히 사라진 것 같지는 않다.

 

국내 가요산업이 붕괴된 것이
꼭 인터넷의 불법복제 때문일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된다.가요의 불법복제는 인터넷 이전에도일상적이었기 때문이다.인터넷 이전에도 정품시장보다 소위리어커테입
시장규모가 훨씬 컸었다.불법복제의 폭과 범위가 훨씬 광범위한 인터넷이 가요산업 붕괴의 직격탄이 된 것은
틀림없겠지만,가요PD들의 잇딴 뇌물수수 사건으로 인해 신곡의 유일한 마케팅 수단이었던 방송국의순위프로가 대거 사라진 것도 인터넷의 불법복제 못지않은 원인으로 꼽을 수 있다.

 

한류의 꽃이라 불리는 드라마의
사정 또한 이와 별반 다르지않다. 방송사는 원래플랫폼이다.원래 컨텐츠의 제작은  독립 프로덕션이 맡고,방송사는 이 컨텐츠를 ’캐스팅하는 것이 원래 책정된 기능이다.그러나 군사정권 시절,정권의 방송장악 의도에 의해, ‘지상파 3라는 공고한
독과점 체제를 구축하게 됨에 따라 ,밀려드는 광고를 미처 소화할 시간이 모자랐던  방송사들은 복잡하게수주라는 형식을 취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된다.광고가 넘치는데 굳이경쟁이라는
형식을 취할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그래서 직접 PD를 뽑고,제작비를
투입해,드라마를 비롯한 각종 컨텐츠를 직접 제작하게  된다.

 

MBC KBS 등 공영방송사가 30여개가 넘는 계열사에 1만여명이 넘는 어마어마한 인력을 보유하게 되는 배경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독과점에 의해 항상 광고물량은 넘쳤고,어마어마한 수익은 전부 제작비와 인건비,그리고 사원복지에 쓰여지게 된다.그 많은 인력에도 불구하고 평균연봉이 1억원이 넘는다는 사실은 이들 방송사들이 누리는독과점의 혜택이 어느 정도인지 짐작하게 한다.게다가 MBC공영방송이면서도
광고를 수입기반으로 하고,따라서 오로지 시청률을 지상과제로 삼으면서도,
누구의 감시도 받지않는해방구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극히 일부의 방송기금을 제외하고는 버는 돈을 전부 사원들이
나눠쓰는 셈이다. 덕분에 MBC의 컨텐츠 경쟁력은 3사 중에서도 단연 으뜸이다.특히 드라마의 경우 MBC를 일러드라마 제국이라
할 정도로 인기 드라마를 만드는 노하우가 뛰어나다.감사를 받는 공영방송의 특성상 제작비 한도가 엄격한 KBS와 달리 MBC는 제작비건 출연료건 마음대로 책정할 수 있으니, 스타를 맘껏 끌어다 쓸 수 있으니,시청률 경쟁에서는 KBS에 비해 항상 절대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MBC는 컨텐츠 경쟁력에 있어서의
자본의 위력을 이미 경험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다는 얘기다.) 사정이 그러하니 연예산업에서 MBC PD들이 누리는 권력이 어느 정도 일지 한번 상상해보라.지상천국이란
단어가 있다면,아마 MBC를 두고 생겨난 말일 것이다.금력과 권력과 여인의 분내라는남자들의 로망 모두
구현한 곳이 바로 MBC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이같은그들만의 지상천국은 밖에서 보면 말 그대로복마전이다.

 

이처럼 우리나라 컨텐츠 산업에서 지상파 방송과  PD들의 권력은 ’황제를 넘어 거의
가깝다.방송사와 PD들이 가요나 드라마, 스타의 존재 자체를 좌우하기 때문이다.그래서 매니저들은 한결같이다시 태어나면 꼭 방송국 PD로 태어나고 싶다고 농담처럼 말하곤 한다.(우리
회사 한 가요담당 구악기자의 꿈이기도 했다.)그러나  ’이 지배하는 세상이 얼마마 암흑세상인지는 이미 우리는 서양의 중세시대를 
통해서 충분히 경험한 바 있다.방송 출입기자로 2년을
보내면서 나는세상에 이런 복마전이 또 있을까하는 자문을
수없이 했더랬다.촌지같은 뇌물은 악의 축에도 들지 않는다.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비리가 다반사인 곳이 바로 방송계였다.그러나 실체가 아니라 이미지를 사고 파는 산업의 속성상 ’복마전은 방송산업의 어쩔 수 없는 속성일 수도 있다.

 

문제는 21세기
들어 단지문화이거나
사회 인프라이던컨텐츠가 국민을 먹여살리는산업의 쌀
등장했다는 사실이다.

 

어린 시절  서양과 우리나라의 위인전을 골고루 읽으면서 참으로 의아했던 것 중 하나가 우리나라의 위인은 대부분장군이거나의적이라는 점이었다.침략의 위험을 막아냈거나 쌀을 훔쳐서 백성에게 나눠주는 것이 우리나라 위인들의
위업이었다.어린 나이에도 나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차곤했다.장군이 침략의 위험을 막아내는 것은 위업이 아니라 당연한 것이었고,어차피 나눠봤자 전 국민이 배부를 수는 없는빈약한 창고를 털어서 한끼 배불리 먹이는 것이 참으로 허무한 한바탕 한풀이지  어찌위업이란 말인가? 그런
것은위인전의 소재가 아니라 문학의 소재가 아닐까하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어린 시절,백일장의
단골소재였던독립운동
’6.25
전쟁통일‘ 역시 마찬가지였다.내가 보기에는독립투사의 항일정신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다뤄야 할 것은척화비같은 걸 세워놓으면 서양오랑캐들이 우리나라를 가만히 놔둘
것이라고 생각한 우리나라 권력층과 지식인들의무지였다.6.25 역시 마찬가지였다.공산침략을 막아낸 자랑스런 국군의 활약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단지이념때문에 서로의 가슴에 총질을
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의무지맹목이었다.’통일역시 마찬가지다.나는 아직도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이 그토록 부르짖는민족의 정확한 의미가 무엇인 지,남북이
공히 외쳐대는  ‘통일  의미하는 바가 정확히 무엇인 지 잘 모른다.정의로운 사람들은 그것이 일제의  ’식민사관때문이라고 한다.그러나 나는 그같은 식민사관을 뒤집어 엎을만한 팩트를
발견하지도 못했다.나는 우리나라 위인중에세종과 과학자들정조와 과학자들그리고이순신문익점을 빼고는 진정한 위인이라고 공감할 만한 인물을 보지 못했다.

 

지금 우리 사회 정의의전가의
보도로 등장한독립투사들의 위업역시 장군들의 그것과 별로 다를 바가 없다.나는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던
분들도 훌륭하지만, 이 땅에서 그 지독한 일제의 수탈을 겪어내면서도,초근목피로
연명하며,비루하지만 끈질기게 생명을 보존한, 생명을 이어간,민초들이 훨씬 더 위대한 독립투사들이라고 생각한다.’언어를 통한 민족 의식의 보존을 가능케 했던신문의 힘‘ 과 젊은 민족 지도자를 양성했던 ‘교육의 힘’ 또한 빼놓을 수없다.저항의
토대가 된 민족자본의 중요성도 간과해서는 안된다.만주에서 말달리던 분들만 일제에
저항했던 것은 아닌 것이다.

 

미국을 여행하면서, ’화살과 말총과
기차에 저항한 ’모히칸 족의 최후를 끝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가고 있는 아메리칸 인디언들의 운명을 보면서 더욱 그러했다.한편에선 저항하더라도 대다수의 민초들은 흑인들처럼 채찍
아래서라도 끈질기게생명을 유지했더라면,어쩌면
흑인 출신 오바마보다, 인디언 출신 미국 대통령이 더 먼저 탄생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슬픈 열대는 단지 아프리카 만이 아닌 것이다.따라서 어린 우리에게 고취시켜야했던 것은 ’독립운동의 자부심보다 ’척화비라는파워엘리트의 무지몽매에 대한 반성이어야 했다.하물며 독립운동이  민족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밑거름이 아니라
단지헤게모니쟁취의 수단으로 악용되는 요즘은 더욱 그러하다

 

우리 역사에서 그나마 진짜
위업이라고 공감할할 만한팩트들을 접하게 된 것은 기업을 출입하게 되면서부터이다.이 빈곤한 땅에서철강산업
주력으로 만들어낸 박태준의 선택,70이 가까운 나이에반도체에 올인한 이병철의 선택,오직 강대국만이 가능하다고 전제됐던 자동차산업을
일궈낸 정주영의 선택,그리고 무모한 줄 알면서도반대를
무릅쓰고전전자교환기
‘CDMA’
을 택한 기술관료들과 김영삼 대통령의 선택이 바로 그것이다.그리고독재자박정희
대통령의 일련의 개발정책들이다.왜냐하면 이같은위업들로 인해 우리 민족은, 5천년 내내  해마다 여름이면,굶어죽는 사람이 거리를 가득 메웠던절대빈곤국이었던 우리나라는, 그리하여
오로지 배불리 먹어보는 것이 유일한 꿈이었던 우리민족은, 마침내 숙명과도 같은가난을 극복했기 때문이다.

 

방송법은 이같은 민족의 끼니를
좌우하는역사적 선택의 연장선상에 있다. ‘컨텐츠산업은 이미 21세기  산업의 꽃으로 등장했다.게다가 우리나라는 컨텐츠산업의 핵심
플랫폼인 인터넷과 모바일의 최강국이고,’한류라는 글로벌 교두보도 확보했다.그리고한류의 꽃은 뭐니뭐니해도 드라마다.단적인 예가 일본,대만,한국판이
제자된 드라마꽃보다 남자. 방송 전문가들은 영화나 가요와 달리드라마는 절대적으로 우리나라에 특화된 컨텐츠라고 입을 모은다.예술가 정신이
중요한 영화나 가요와 달리 드라마는 스포츠처럼헝그리정신
중요한 경쟁력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그리고 그같은 드라마의 경쟁력은
한류를 통해 이미 입증된 바다.

 

문제는복마전이라 할  방송3사의
독과점 체제,그 중 2사는 공영방송이고,두개의 공영방송 중 MBC는 최근 자본과 기업을 적대시하는
좌파 성향을 굳힌 상태에서 ’드라마를 중심으로
한 우리나라 컨텐츠 산업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느냐는 점이다.여기에는 대기업의 자본 유입이 필수적이다.공연과 영화산업을 통해 우리는 컨텐츠산업에 있어서 대기업 자본의 유용성을 익히 경험해왔다.민주당과
한나라당의 차이는 기본적으로 자본과 기업의 역할에 대한 시각의
차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이 ’대기업 자본 배제에 덜컥 동조한 것은 스스로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게다가 대기업의
진입을 규제하면서 신문사의 진입은 어떤 논리로 주장한다는 것인가?

 

 신문사의 방송진입  규제
또한  일종의 반기업법이다신문사도 언론임과 동시에 기업이다.그럼에도 불구하고, DJ정권과 노무현정권은 보수신문들이 자신들의통일정책에 반대한다는 이유로,보수신문을친일파독재정권 유착이라는 마타도어로 매도하는 것도 모자라(우리는 일제와 독재 정권의 선전도구였던 서울신문, 경향신문,KBS,MBC 동아일보 기자 출신들이 만든 한겨레 신문이조선 동아를 비난하는, 정말 황당한 시대에 살고있다.)자칫 신문산업을 고사시킬 수 도 있는 각종 반기업 조항을 만들어놓았다. 미디어
빅뱅시대 미디어기업의 유일한 생존전략으로 종합미디어 전략을 추구하는 세계적 추세에도 불구하고
신문사의 손발을 꽁꽁 묶어놓은 것이 대표적인 예다.이같은 반기업 조항을 폐기하는 것은기업입국을 정체성으로 삼는 한나라당의 의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의
반기업정서에 동조해 절대로 포기해서는 안되는 원칙을 과감하게 포기하는 한나라당의 정체성은 도대체 무엇인가? 도대체 한나라당이 주장하는 방송법의 본질,나아가 비전은 무엇인가? 방송법을 통해 어떻게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것일까?  스스로 원칙이 없으니,설득도  못하고, 결국
파국을 부르는 것이다.172석이 아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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럭셔리,자본주의의 무덤

 

"엔젤로니는 "보통의 경기후퇴 이후에는 소비자들이 기존
쇼핑방식으로 되돌아오지만 최근처럼 심각한 경기후퇴에서는 윤리적 기반에 근거해 사람들이 명품을 거부한다"며 "더 오래 지속될 수록 더 검소하면서도 대량판매를 선호하는 생활방식을 고수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이같은 상황이 2차 세계대전 이후처럼 한 세대에 걸쳐 지속될 수 있다는 우려다.
밸류리테일의 스코트 말킨 역시 "`생각의 패러다임`이 변하고 있다"며 "사회적
상황이나 소비자들의 심리가 변하면서 무엇이 가치와 신뢰성을 구성하는지 더 자세하게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이제 사람들이 죄책감 없는 쇼핑을 원하기 때문에 명품 쇼핑이 이젠 윤리의 문제가 됐다는 지적이다.
특히 신문(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가격의
댐이 무너졌을 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 속의 또 다른 댐이 분명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극소수 특수층의 허영이 아니라 워너비들의 ‘유행’이 된 ‘명품’들을 보면서,고객을 
VIP도 모자라서,VVIP,더 나아가 MIP로
구분해가는 마케터들을 보면서,그런 용어들이 바로 ‘자본주의의
묘비명’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해외 출장길, 공항에서 당연하게 200만원짜리 명품 핸드백을 사는 연봉 5천만원 미만의 여자애들을 보면서,단지 시간 문제로 느껴지던
‘시장의 붕괴’에 대한 내 예감은, 분명히 사리에
맞는 것이었다.

 

 

자본은 신처럼 참으로 다양한 얼굴을 가졌다.우연과
무분별을 가장하지만,자세히 들여다보면,시간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그렇지도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유의미한,지속적으로 필요성을 인정받는 ‘가치’를 만들어내지 못하는 자본은,아주
짧은 영화 끝에 결국 도태된다.마치 폭력으로 만들어낸 권력이 단시일내 무너지는 것처럼.세상의 모든 모순은 결국 스스로 해결점을 찾게 마련이다.그것이 바로
시간의 법칙이다.’럭셔리’는 오로지 극소수의 상징,다수의 욕망의 등대로서의 럭셔리여야 했다.

 

 

누구나 접근 가능한 ’사회적
럭셔리’가 아닌 핸드백,코트같은 ‘개인적인’ 럭셔리 산업이 대중들의
소비에 대한 욕망을 고사시키는,200만원짜리 핸드백이 ‘유행’이 되는, 그리하여 ‘소비’가 간헐적인 욕망의 충족에 따른 달콤함의 경험이 아니라 죄책감과
부끄러움의 경험이 되는,소비 능력이 계급 구분의 장치가 되는,그리하여
나같은 서민 혹은 중산층이 소비로부터 소외되는 순간,자본주의는
몰락한다.유행이 된 명품,명품산업의 융성,즉 소비의 양극화가 자본주의의 무덤인 이유는 바로 그것이다.바로 미국식 자본주의의 문제점이다.마르크스는 틀렸다.모순은 생산력에 있는 것이 아니라 소비력에 있다.

 

 

그러므로 예전에도 그랬듯이 과학과
기술만이 지금 몰락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대안이다.무작정
돈을 푸는 것보다, 누구나 달콤하게 욕망할 수 있는 ‘소비’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 내는 것,그것이 가장 빠른 해결 방법이다.그리고 나는 그 새로운 욕망의 출구가 ‘지식’이거나 ‘문화’이거나 ‘자연’이거나 로봇이거나
우주여행같은 것이기를 기대한다.허영이 아닌 소통 혹은 진보에 대한 욕망.그러니 우리 이제부터라도 이제 그만 덜떨어진 VIP마케팅은 집어치고
섬세하게 그리고 솔직하게 우리의 새로운 욕망의 출구를 모색해보는 것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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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종말

‘세종대왕이라는 키워드에 낚여 프레시안에 들어가 진보주의자 교수의 글을 읽다보니  문득 한숨이 나왔다.광화문 광장에 세종대왕 동상 건립과 관련해 세종대왕 동상을 세워서는 안되는다는 이분 주장의 근거는 ‘세종대왕은 군주이기 때문’이다.봉건제인 ‘군주’라는 틀안에서 발휘된,백성을 섬기는 대상이 아니라 어리석은 백성으로 보는 군주의 리더십을 오늘날 준거로 삼아서는 안된다는 것이 이분 발언의 요지이다.

 

재미있는 것은 이 황당한(?) 주장을 위해 이분이 구사하고 있는 참으로 휘황찬란한 지식들이다.정치학 교수답게 서양철학의 다양한 개념과 단어들을 두루 구사하시면서 열변을 토해내고 있다.그런데 그런 지식들을 동원해서 결국 하고자하는 주장은 정작 현실에 발을 딛고 사는 사람이 들으면 정말 황당한 내용이다.

 

스스로 진보를 자처하시는 정치학교수이신 이 분의 글에 대해 감히 ‘황당하다’고 하는 이유는 이분의 글은 ’을 제시하는 학문적 근거에서는 그럴 듯하다가도 주장을 제시하기 위한 사실적 근거에 가면 전혀 황당한 얘기가 되기 때문이다.즉,이론은 열심히 공부하셨으나 그것을 ‘개인화’ 또는 ‘우리 사회에 적용’하는 대목에서 구체적 검증이 부족한 데서 나온 무리수이다. 예를 들어,이런 대목이다

 

"성공했다는 것은 투쟁에서 살아남았다는 뜻일 뿐이다. 성공담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다면, 역경을 이겨낸 소망이나 성공한 후의 선행 등, 선한 의지가 표명되기 때문이다."

 

교수라는 우리 사회 성공한 사람의 대표적인 직업을 가진  이 분에게는 성공이 단지 생존경쟁에서 살아남는 일  뿐이다.하지만 사실은 어떤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이라는 것은, 무엇인가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가치를 만들어냄으로써 그 가치를 돈과 바꿨다는 뜻이다. 다만  그 과정이 악덕스러운 경우가 많아  비판과 감시가 필요할 뿐, 성공 그 자체가 단지 생존투쟁은 아니라는 사실이다.오히려 한 개인의 총체적 삶을 내거는 용기가 필요한,위험을 무릅쓴  모험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분은  이런  기본적인 경제지식조차  결여돼 있는 상태에서 비판을 하고있는 셈이다.

 

이런 식이니  우리나라의 지식인들은 스스로 멸종의 길을 걸어 들어가고 있는 것이다.삶의 구체적인 현장에서의 경험없이, 혹은 우리 사회의 구성틀인 자본주의의 실제에 관한 고찰도 없이,오로지 책에서 읽거나 정해진 틀로,세상에 관해,인간에 관해,삶에 관해, 상상하거나 억측하고 오해한 후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결론을 내리거나 엉뚱한 분노를 표출한다.나는 이분이 자신의 성공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 지 궁금했다.

 

문제는 이런 식의 옵솔로지에 의한 피해자들이다.90년대말 벤처거품 때,수많은 벤처사업가들을 취재하면서, 나는 아주 재미있는 사실을 한가지 발견했다.인터뷰를 해보면,기업을 창업했다는 사람들이 열에 아홉은  장차 이 기업활동을 통해서 어떠어떠한 가치를 창출해내겠다는 것이 아니라 벤처를 통해 돈을 많이 벌어서 고아원을 짓는다거나,기부를 한다거나,기타 등등 선한 일을 하겠다는 것이었다. 아까 그 교수가 주장하는 것처럼 성공이라는 것이 의미를 갖는 것은 오로지 성공한 후의 선행뿐이라는 낡은지식에 사로잡힌 결과이리라.나는 그런 내용의 인터뷰를 할 때마다 재밌어서 죽을 뻔 했다.이 사람들이 도대체 기업을  하겠다는 것인지,로또를 하겠다는 것인지,반문하고 싶은 욕구를  참느라 애를 먹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더 재미있는 것은 결과다. 나중에 거품이 가라앉고, 승자와 패자가 구별됐을 때의 결과는? 기업을 하면서 그런 식의 선행을 목표로 삼았던 사람들은 다 망했다는 사실.망하는게 당연하다.기업을 하겠다면서기업이 무엇인 지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겠는가? 선행을 하려면 차라리 처음부터 고아원을 짓거나 사회사업을 해야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살아남은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믿겨지지 않겠지만,자신들이  벤처를 통해서 만들어내고자하는 사회적 가치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명확히 인지한,정말 몇 안되는,청년들이었다는  사실

 

지식인이 펼치는 담론이 이런 식이라면,그리하여 그같은 옵솔로지에 의한 피해자가 늘어갈수록,지식인은 아마 점점 설 땅을 잃게 될 것이다.정원이 1명짜리 인문학이나 사회관련학과가 늘고있는 것이 단지 물신주의의 팽배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아서  나오는 작은 한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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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대통령,대통령직,그리고 엑스칼리버

노무현대통령이 조만간 ‘대통령 하지마라’ ‘직업정치 하지마라’라는 내용의 글을 온라인에 올릴 예정이라는 뉴스를 보면서 노대통령은 우리나라 직업정치와 대통령직 에 관한 문제를 논하기 이전에 ‘과연 내가 대통령이라는 ‘엑스칼리버’의 진정한 주인이었나’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먼저 해보았어야 하지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회사 다닐 때 남자들을 보면서 가장 신기했던 것 중의 하나가 ‘이 칼을 뽑는 자만이 칼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저 유명한 엑스칼리버식의 ‘자기검증’의 기제가 도무지 작동하지 않는 문화였다.가령 사장이라는 자리를 꿈꾸는 사람중에 자신이 과연 ‘사장’이라는 막중한 자리를 제대로 해낼만한 능력이 있는지,자질이 되는지,경력이 되는지에 관해 스스로 자문하는 남자들을 보지 못했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아주 작은 팀장자리에도 끊임없이 ‘과연 내가 이 자리에 적격일까?’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이 있지 않을까’라고 자문하는 것과는 도무지 다른  문화를 보면서 그처럼 막무가내의 권력욕의 정체는무엇일까 궁금해하곤 했었다.오직 칼을 뽑는 자만이 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부여받는 ‘아서왕의 전설’같은 신화가 부재한,자기검증이나 자기 정체성에 관한 철학이 빈곤한 문화탓이겠거니 하면서도 항상 신기했었다.그것은 신화 이전에 양심의 문제인 것 같았기 때문이다.

 

 

노무현대통령으로 말할 것 같으면,나는 그가 청문회때 재떨이를 던져 일약 ‘스타’로 떠오를 때부터 별로 맘에 들지 않았다.스스로는 남다른  정의감이라고 생각했겠지만 내게는 단지 쇼맨쉽으로 느껴져서다.다른 사람들이 그보다 정의감이 적어서 재떨이를 던지지 않는 것은 아닐텐데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우리나라 냄비언론은 그를 단박에 ‘정의감의 표상’으로 추겨세우며 스타로 만들었고,그는 계속해서 ‘독자적인’ 행동으로 대중을 감동시켰고, 스타인채로 대통령이 됐다.혹자는 그의 독자적인 행동을 ’신념’이라고 평가한다.하지만 조직문화에서 톡톡 튀는 ‘독자행동’이 절대로 ‘신념’이 아니라는 것은, 사심없이 조직생활을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무엇보다 스타는 외모거나 쇼맨십이거나 행운이지 실력의 산물이 아니다.스타가 갑작스런 인기를 내면으로 삭여낼 기회를 갖지못한 채 계속 스타로 머물러 있을 경우 얼마나 황당한 사고방식을 갖게 되는지는 ’스타세상’인 연예계에서 1년만 지내보면 안다.그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한마디로 ‘내가 세상의 기준’이고 ‘세상이 나를 위해 존재한다’는 식이다. 그리고 그런 착각속에서 결국은 도태당한다.연예계에서조차 아무리 첫 출발은 스타였다 할지라도 일단 뜬 뒤에는 꽤 긴 시간동안 숱한  고초를 겪으면서 인기의 의미를 내면화해야 진정한 연기자로 거듭 날 수 있다.

단지 이미지 뿐인 듯한 연예계의 섭리도 그러한데 하물며 그는 ‘스타’에서 곧장 대통령이 됐다.그것도 스스로의 권력의지가 아니라, 젊은 운동권 세력이 표방하는 ’정의의 도구’로써.문제많은 전직 대통령을 향해 재떨이를 집어던지거나 서민을 생각만 해도 눈물이 줄줄 흐르는,그의 특출한 정의감은 ‘이벤트용’으로는 최상의 상품이었던 것이다.노무현 대통령이 대통령에 출마하기전에 한번만이라도 ‘내가 과연 대통령이라는 자리에 적격인지’ 스스로 질문을 던져보았다면,대통령직을 수행한 후에 ‘대통령 하지마라’라는 식의 후회섞인 성찰을 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아예 대통령직을 하지않았거나,했더라도 자기성찰에 기반한 제대로된 대통령직을 수행했을 터이니.

 

 

그러나 그는 아마도 ‘ 스타’인채로 대통령이 되었고,그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준 일등공신인 ‘특출한 정의감’은 그의  대통령 재직시 ’오직 나만이 정의의 도구’라는 독선으로 나타났고,한나라를 통합해내는 임무를 가진 대통령직을 수행하는 데 결정적 장애물이 됐다.그럼에도 불구하고,아직도 세상에 대해 하고싶은 말이 ‘대통령 하지마라’ ‘직업정치 하지마라’라면,그는 아직도 ’독선과 오만’에서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그 말은 뒤집어보면 "나같은 정의로운 사람도 실패했는데,다른 누가 대통령직을 제대로 해낼 수 있겠느냐"는 오만이기 때문이다.그는 자신의 대통령직 실패 이유가 독선과 오만이라는 사실을 아직도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그리고 그의 그런 식의 확신이 아마도 지금 우리나라 지식사회의 수준이다.

 

 

그에 못지않게 그가 대통령이 됐을 때,개인적으로 신기했던 것은 그를 추앙하던 사람들의 ‘감회’였다. ‘나와 별다를 게 없는 노무현같은 평범한 사람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다’는. 심지어어떤 사람은 ‘고졸도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점에 의미를 부여하기도 하는 것이었다.나는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깜짝 깜짝 놀라곤한다. 한 나라의 운명을 책임질 대통령을 뽑는 기준이 ‘대통령이라는 쉽지않은 자리에서  얼마나 직무를 잘 수행할 수 있을지’가 기준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사람도 대통령이 될수 있다’는 일종의 대리만족인 듯 해서다.

물론 그런 식의대리만족의 욕구보다는 ‘도덕성’이라는 일차적인 기준에서 가장 뛰어났다는 점이 그가 대통령에 당선된 결정적 이유겠지만,대통령이라는 자리를 차지하는 인물에게나 대통령을 선출하는 국민에게 ’도덕성’이나 ‘정의감’, 그 이상의 ‘승자의 조건’에 대한 자기성찰이나 점검같은 ‘엑스칼리버’의 기제를 기대하는 것은 나의 무리한 기대일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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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교선택제,소리없는 공교육혁명

요즘 강남 엄마들 사이에는 공교육에 대한  작은 기대감이 소리없이 번져가고 있다.최소한 대학입시에서는  어쩌면 아이가 공부 못하면 엄마 책임이라는 멍에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다.이같은 기대감의 단초는  올해 중3학년부터 실시될 고교선택제다.고교선택제는  당국이 추첨에 의해 학생들을 무작위로 배정하지 않는 대신   학생이  자신이 다니고 싶은 학교를 선택하는 제도다.

 

  이 때문에 엄마들 사이에서는 벌써 1지망을 어떤 학교로 할 것인가를 두고 이런저런 정보가  오가는가 하면, 대치동의 일부 학원에서는 "이제는 굳이 특목고에 보낼 필요가 없다.재단이 취약한 특목고보다는 재단이 튼튼한  사립고교가  대학입시에는 훨씬 유리할 수 있다"는 조언을 내놓고 있다.눈치 빠른 학부모들 사이에는 벌써부터  공립학교 기피움직임도 있다.우수 교사를 확보하고  자율 학습 체제를 갖추는데는 아무래도 공립학교보다 사립학교가 훨씬 유리할 것이라는 계산이다.재단사정이 여의치않은 사립학교도 기피대상이다.

 

이때문에  일부 입시 성적이 좋지 않았던 고등학교들에는 비상벨이 울렸다.이들 학교들은 벌써부터 예비중3   학부모들을 초청해 학교 설명회를 갖기도 한다.영화에도 등장할 정도로 재단이 문제가 많기로 유명한 S고는 얼마전 각 중학교별로 2~3명의 학부모들을 초청해 학교 설명회를 가졌다.설명회의 골자는 문제가 많던 이사장도 바뀌었고,입시지도를 위해 완벽한 자율학습 체제를 준비했으니 마음놓고 자신들의 학교를 지원해달라는 내용이었다.

 

이처럼 고교들이 우수교사유치와 자율학습을 통한 철저한 입시공부 관리를 공약(?)으로 내세우며 유치전을 벌이자 일부 엄마들 사이에서는 벌써부터 자율형 사립고 무용론이 나오기도 한다.고교 선택제를 하게되면 학교들이 알아서 우수교사를 유치하고 철저한 입시관리체제를 갖출텐데 굳이 등록금을 내면서 다닐 필요가 있냐는 것이다.

 

그러나 고교선택제가 자리잡고,그로인해 공교육이 활성화된다고 해서  사교육이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학원들이 만들어놓은 교육시스템이 워낙 우수해서   사교육을 완전히 끊지는 못할 것이라는 해석이다.특목고 학생들처럼 주중은 학교에서,주말은 학원에서 공부하는 식이 되지않겠냐는 것.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전적으로 사교육에 의존하는 것보다는 훨씬 낫다는 의견이 지배적이다.

 

문제는 입시전쟁이 이미 중학교,초등학교까지 내려갔다는 사실이다.특목고 입시에서 사실상 대학입시가 결정돼버리는 상황에서 ’고교선택제가 얼마나 실효성을 가질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특히 기존의 외고,영재고,과학고,국제고외에 앞으로 100개의 자율형 사립고가 지정되고 나면,고교선택제는 사실상 의미가 없게 되지 않겠느냐는 우려도 있다.결국 겉은 평준화 속은 엘리트교육이라는 모순된 교육체제로 인해 특목고입시만 과열시켜놓은 기존 교육 시스템과 별로 다를게 없을 것이라는 것.

 

 

따라서 꼬이고 꼬인 교육문제를 바로잡으려면 우선 원칙부터 바로잡을 필요가 있다.그래야 평등한 기회 보장이라는 민주주의  원리가 자리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평준화면 평준화   원칙을 철저하게 지켜 부모의 경제적 기반이 튼튼한 학생들만 사교육을 통해  특목고에 진학하고,다시 대학진학에서 유리한 기회를 선점하는 폐단을 없애야 할 것이다.엘리트 교육이 교육원칙이라면 과감하게 평준화 원칙을 철폐하는 한편 공교육을 활성화해 모든 학생들이  학원이 아닌 학교라는 공교육의 틀 안에서 공평한 실력경쟁을 할 수 있도록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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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작 뮤지컬과 디지털의 역설

제작비 100억이 투입되는  뮤지컬이 등장한다고  한다.국내 뮤지컬 제작비가 100억이라니. 몇 년 전만 해도 꿈조차 꿀 수 없었던 일이다.아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이다.불과 10여년 전 만 해도 ‘제작비 100억 규모의 뮤지컬’은 달나라 이야기였다.100억원 가량의  제작비를 들였다는 세계적인 서커스단인 미국 라스베가스의 태양의 서커스‘사의 히트작  ’O'쇼를 ‘구경’하는 것이, 10여년 전, 우리나라 공연 관계자들의 꿈이었다면  지금의 관객들은 믿을까?

물론 인플레를 따지면,조금  과장일지 모르지만, 불과 10여년만에 우리나라의  공연시장의 제작비 규모가 ‘태양의 서커스’에 필적하는 규모가 된 것이다.실제로 국내에서도 공연시장의 규모가 영화시장에 맞먹을 정도로 커졌다고 한다.얼마전까지만 해도 관객을 끌어들이기 쉬운 스타 탤런트나 영화배우의 출연을 ‘단비’로 해서 명맥을 이어가던 공연계의 현실을 돌이키면, 관계자들조차도 어리둥절할 ‘상전벽해’가 아닌가 싶다.

아이러니한 것은 공연시장이 이처럼 단시일내에 커지는데 기여한 1등 공로자가 다름 아닌 디지털이라는 사실이다. 진짜 주범은 불법복제다.영화나 드라마,가요등 디지털로 복제가 가능한 문화 콘텐츠가 불법 복제와 무료 다운로드로 인해 자금회수가 거의 불가능하자 문화 컨텐츠의 자본이 공연같은 복제가 불가능한 아날로그 컨텐츠로 몰린 덕분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들어 인터넷 업계에서 돈을 좀 벌었다는 기업은 이같은 ‘불법다운로드’를 조장하는 웹하드 업체들이다.이들 업체들의 경우 공공연하게는 저장공간인 웹하드를 제공하는 비지니스를 표방하지만 사실은 알고보면 이같은 불법다운로드를 도와주는 서비스를 통해 돈을 챙겨왔다.

이같은 사정은 포털같은 대형 인터넷 기업도 예외는 아니다.저작권에 대한 단속이 엄해진 요즘도 검색창을 치면 ‘꽃보다 남자’같은 드라마나 ‘적벽대전’같은 영화,최신 유행하는 가요를 얼마든 지 공짜로 즐길 수 있다.이들은 직접적인 다운로드로 돈을 챙기는 것은 아니지만 그같은 편리함(?)으로 인한 트래픽이 중요한 돈버는 기반임을 감안하면,국내 인터넷 기업들의 수익모델은 ‘불법복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실제로 국내 가요시장은 이같은 불법복제로 인해 시장 자체가 사라져가는 사막화현상으로 고전하고 있다.

그러나 문화자본이 이같은 디지털 불법복제를 피해 아날로그인 공연시장으로 몰리는 현상이 과연 바람직하기만 한 것일까? 영원히 불가능할 것으로 여겨졌던 ’100억 제작비’라는 꿈이 실현될 만큼 커진 공연시장의 규모가 업계의 관계자들이나 공연을 사랑하는 관객들로서야 더 이상 반가울 수 없겠지만,문화산업  전체로 볼 때 이같은 현상이 과연 바람직한가하는 것은 한번 따져봐야 할 일이다.

영화시장에서 이미 겪었듯이,탄탄한 대본력이나 짱짱한 연출력,뛰어난 연기력을 보유한 배우의 적절한 수급 능력 없이,풍선에 바람넣듯이 단기간에 확장된 문화시장은 역시 풍선에서 바람이 빠지듯이 단번에 수축된다.충분한 인프라 없이 단기간에 자본규모가 확장된 공연산업 역시 영화시장의 선례를 따를 공산이 크다.

특히 문화를 단지 정신적 인프라로 보기에는 너무나 커져버린 문화산업의 중요성을 놓고 보더라도 문화자본이 공연같은 아날로그 콘텐츠 시장으로만 몰리는 것은 위험하다.영화나 드라마,가요는 단지 ‘문화’로서의 의미를 넘어 21세기의 가장 유망한 산업분야인 ‘컨텐츠산업’의 핵심이다.세계는 이미 콘텐츠 전쟁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무엇보다 우리는 ‘한류’를 통해 영화나 드라마,가요같은 콘텐츠를 세계에 수출할 수 있는 교두보도 확보한 상태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불법복제같은 원시적인 컨텐츠 소비문화로 인해 공연같은 아날로그 시장에 매달린다면,총을 버려두고 활로 싸우는 격이나 다름없다.

인터넷 선도국이라는 타이틀의 의미는 인터넷의 긍정적 기능과 부정적 기능 모두를 먼저 경험한다는 뜻이다.즉, 시행착오를 가장 먼저 거침으로써 가장 먼저 진화에 필요한 지혜를 얻을 수 있다는뜻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지털의 문제를 디지털안에서 풀지못하고 아날로그로 역행하는 것은불법복제같은 문제조차 정치적인 계산으로 대하는 우리 정치권의 후진성 때문이다.인터넷의 영향력은 이미 우리의 일상은 물론 산업까지 좌우할 정도로 막강한데,정치권의 논의는 여전히 ‘표현의 자유’같은 원론적인 수준의 정치적 공방에 머물러있다.

하지만 인터넷의 현실은 보다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해결방법을 원하고 있다.인터넷을 과연 법으로 규제할 필요가 있는지, 필요하다면 어떤 형태의 법인지,혹은 법을 통한 규제가 아니라면, 과연 어떤 대안이나 장치가 있는 것인지,보다 실천적인 해결 방법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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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목고와 교육난민

 

”서울대 절반이 교육특구 출신”이라는 제목이 시사하는 바는 두가지다.하나는 강남에 살고싶지 않은데,아니 사실은 강남에 살 형편이 못되는데, 아이 교육 때문에 할 수 없이 강남에 이사와 사는 나처럼, 교육 때문에 이사다니는 ”교육난민”이 정말로 많은가보다하는 것과,도대체  ”평준화와 엘리트교육”이라는 이 모순되는 정책을 언제까지 이대로 놔둘 것인가하는 하는 점이다.

 

학교교육은 철저하게 평준화를 지향하면서 ”특목고”와 ”과학고”를 만들어서 ”선발고사”를 치게 만들면 당연히 엘리트교육은 사교육 몫이 된다.게다가 공부는 비슷한 수준의 아이들이 경쟁해야 효과를 볼 수 있기 때문에 일단 자신의 아이가 상위그룹에 속하기를 원하는 부모라면,당연히 우수한 아이들이 많이 몰리는 곳으로 따라갈 수 밖에 없다.그러니 자연히 우수한 곳은 더 우수한 아이들이 많아지게 되어 ”교육특구”라는 독특한 동네가 생기게 된다.

 

문제는 이런 식의 ”사교육”을 통한 ”엘리트교육”이 과연 효과가 있는가하는 점이다.대치동에 와서 정말 황당한 것이 바로 이점이었다.가령 수학의 경우,잘하는 아이들은 벌써 초등학교때 고교과정을 끝내고 경시대회를 준비하게된다.사실상 초등 혹은 중등1학년에 이미 고교과정을,그것도 심화까지 마치게 되는 것이다.그래서 과고에 입학하게 되면,그래도 과고까지는 그 ”선행”이 어느 정도 지켜진다.황당한 것은 대학에서는 과고를 나온 아이나 일반고를 나온 아이나 같아진다는 것이 아이를 과고를 거쳐 서울대에 보낸 엄마의 증언이다.

 

영어 역시 마찬가지다.나는 이 국제화시대에 굳이 ”외고”라는 형태의 특목고가 필요한 지 부터가 의문이다.영어의 경우 어차피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결국 영어의 문제가 아닌 지능의 문제가 된다.즉,전체적인 학습능력이 뛰어나야만 우수한 성적을 내게되는 것이다.즉,형태만 외고일 뿐 외고 또한 일종의 영재학교인 셈이다.문제는 이 외고출신 학생들 역시 대학에 들어가면 일반고 나온 아이랑 별 차이가 없게 된다는 점이다.사실상 어학능력만이 목표라면 대학에 들어간 후에도 얼마든지 뛰어난 영어능력을 기를 수 있다.

 

결국 아이들만 초등학교때부터 입시부담에 시달리게 될 뿐 내가 볼 때에는 평준화의 이상도,엘리트교육의 실효도 없는 ”낭비 중의 낭비”가 현재 우리나라 입시제도이다.

 

게다가 지금 벌어지고있는 사교육 전쟁의 가장 큰 희생자는 아이들이다.이들이 해내야하는 공부의 양과 질을 들여다보면 강남아이들 10명 중 1명은 자살유혹에 시달린다는 여론조사가 납득이 간다.사교육의 주범인 엄마들 스스로도 아동학대라며 한숨을 내쉬는 실정이다.

 

게다가 현재 입시제도는 ”인재양성”이라는 국가교육의 면목표보다는 이런 형식의 ”특목고”가 없으면 ”글로벌시대에 걸맞는 경쟁력”을 키워주기를 지향하는 부모들이 줄줄이 아이들을 해외유학을 보내게될 것을 예방하기위한 경제적인 목표가 앞선 정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한심한 것은,아무도 진짜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는다는 점이다.가장 나쁜 것은 진정한 비판세력이 되어야 할 야당이다.여당의 교육정책이 실제로 만들어내는 문제들을 점검하고 대안을 제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로지 ”부자를 위한 정책”등의 이념적인 호만을 되풀이하고 있다는 점이다.더 나쁜 것은 마치 ”경쟁없는 세상”이 가능한 것처럼 아직 나이어린 청소년들을 호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내가 보기에 진정한 교육민주주의란 ”평등한 경쟁기회”를 보장하는 것이다.현재 실시되고 있는 교육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겉은 평준화,속은 엘리트교육”의 이중성 때문에 교육의 본령이 학교가 아닌 학원이 되면서 ”평등한 경쟁기회 보장”이라는 민주주의의 가장 중요한 원칙이 심각하고 훼손되고 있다는 점이다. 교육특구는 바로 그같은 교육현실의 산물이다.

 

따라서 입시가 공정경쟁이 되려면 하루빨리 공교육이 활성화돼야한다. 공교육 활성화 방안은 사실상 제대로 된 경제살리기 정책이기도 하다.한달 수백만원에 달하는 사교육비 지출만 없어져도 당장 소비가 활성화 될 수 있을 것이다.공교육 활성화의 관건은 영어와 입시교육이다.영어의 경우 대학입학전까지 특정한 자격을 취득해야 졸업할 수 있게 하되,입시과목에서 제외하고,그 시험수준을  철저하게 학교에서 가르치는 실용영어 수준에 맞춰, 그 자격 취득여부를 학교가 책임지도록 한다면,해외유학 붐이나 사교육비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입시교육 역시 학원이 아닌 학교에서 맡을 수 있도록 유도하는 정책이 필요하다.e러닝을 활용한다면 학교교육만으로도 얼마든 지 맞춤교육이 가능하다.

 

”경쟁없는 천국”같은 이상적 목표가 아니라,”교육이 곧 부모의 의무이자 책임”인 우리나라 교육현실에 기반한 정책이 시급하다.주지하다시피 ”경쟁없는 천국”이라는 ”이상”을 내세운 ”이해찬식 교육정책”이 결국엔 아이들을 ”학대”에 가까운 입시전쟁으로 내모는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을 현 교육정책의 입안자인 야당은 명심해야 할 것이다.

 

일단 목표를 ”공교육 활성화”에 맞춰 정부,국회,전문가,국민들이 묘안을 짜낸다면 쉽사리 방법을 찾을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정부의 실책이나 사회문제를 오로지 ”시위의 재료”로 삼아 헤게모니 쟁취의 수단으로만 삼으려는 야당과 좌파들이다.이들이 ”비판을 위한 비판”이 아니라 정말로 문제의 해결점을 찾기위한 노력을 한다면 교육문제도 얼마든 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여당이든 야당이든, 아이들과 엄마들을 이 끔찍한 사교육 전쟁에서 하루빨리 해방시켜 줄 의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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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와 창조적 자본주의

 

 

스타벅스가 흔들리고 있다는 뉴스를 접하고 잠깐 가슴이 아려왔다.참 이상하지.불길한 예감은 항상 맞아떨어진다.동네 다방처럼 순식간에 점포수를 늘려가고,이런저런 ”잡스런(?)”영역에 손을 뻗치는 스타벅스를 보면서 고개를 흔들었었는데,결국 이런 소식을 접하고 말았다.

개인적으로 스타벅스는 내게 참으로 흥미로운 세계를 열어준 기업이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거대한 프레임속에서 헤메던 내게 두 프레임의 교집합,특 통합이라는 새로운 차원을 열어준 기업이기 때문이다.세상은 영화 매트릭스가 주장하는 대로 빨간약과 파란약의 선택을 강요하지 않는다는 확신.

 

”내가 ”스타벅스”라는 기업을 처음 대면한 것은 98년 무렵,미국 출장길에서였다.공항에서 무료하게 비행기를 기다리던 우리 일행에게 미국을 잘 아는 관계자가 멋스러운 종이컵을 잔뜩 들고오더니 ”미국에서 요즘 유행하는 고급 원두 커피”라며 한잔씩 권했고,나는 한국에서 맛봤던 자판기속의 커피와는 차원이 다른 종이컵속의 커피향에 어리둥절했더랬다.

그리고 얼마 후 우연히 서점에서 제목는 기억나지않지만 스타벅스 창업자가 쓴 스타벅스의 탄생에 관한 책을 읽게되었다. 고전이 아닌 책 중에서 나를 그토록 흥분시킨 책은 아마도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후 처음이었을것이다.그런데 더 아이러니한 것은 나를 흥분시킨 것은 스타벅스의 커피향이 아니라 바로 탄생설화였다.

 

젊은 시절을 온통 70년대 학번의 낭만주의와 80년대 학번의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사이에서 헤메어 온 83학번인 나는 30대 중반인 90년대 후반까지도 여전히 내 몸이 요구하는 자본주의의 매력과 내 양심이 요구하는 사회주의의 이상속에서 헤메고 있던 ”지식노동자”였다. 하지만 나는 막연하게 사회주의보다는 자본주의가 더 인간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대다수는 단순히 스타벅스라는 브랜드를 전파하는 효과적인 ”마케팅전략”이라고 치부했을 수도 있는 그 책에서 내가 찾아낸 ”새로운 진실”은 이를테면 자본주의의 새로운 얼굴 혹은 ”혁명가”로서의 기업가의 발견이었다.

기존에 내가 알고있는 상품의 ”가치”는 ”보다 편리한” 혹은 ”보다 아름다운” 혹은 ”보다 고급스런” 혹은 ”보다 값싼”같은 것들이었다.그런데 스타벅스의 창업철학은 좀 달랐다.이 창업자들은 경제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고급 배전두 커피의 마니아들이었다.그들은 그 커피향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많은 사람들이 너무 많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자신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고급 커피향을 즐길 수 있게하는 방편으로 스타벅스라는 기업을 창업했던 것이다.

 

즉,스타벅스는 최소한의 자본으로 최대의 잉여를 창출하는 자본주의의 기본 원리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기업이었다.스타벅스의 창업철학은 지식인이나 예술가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내게는 ”스타벅스”라는 기업의 창업철학이 이를테면 ”자본주의2.0”으로 다가온 셈이었다.과장하면 스타벅스의 커피는 단순이 잉여의 수단인 상품이 아니라 철학이었고,그곳의 직원들은 단순히 노동력을 제공하는 노동자가 아니라 미적체험을 도와주는 전파하는, ”배리스타”라는 예술가였다.

그러나 ”철학”은 실천하기가 어려운 영역인가보다.몇 년 후 우리나라에 들어온 ”스타벅스”는 내가그토록 흥분했던 스타벅스가 아니었다. 신세계에 의해 들어온 스타벅스는 내가 감동한 스타벅스의 본질과는 거리가 멀었다.현금과 부동산에 집착하는 전형적인 한국식 재벌의 프레임 그대로였다.아마도 신세계의 스타벅스 운영자는 스타벅스의 가치를 ”인테리어”와 ”상품의 퀄리티”라고만 생각한 듯 하다.순식간에 동네 다방수보다 많아진 스타벅스는 이내 ”별다방”이라는 한국적인 아이덴티티를 획득했고,스타벅스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은 ”속빈강정”이라는 뜻의 ”된장녀”이미지를 뒤집어 쓰게 됐다.내 눈에는 스타벅스의 종말이 눈에 환히 보였다.내가 알기로는 미국 본토의 스타벅스의 확장전략 역시 한국식과별로 다르지 않았다.

 

내가 파악한 스타벅스의 본질은 동네다방처럼 무시로 드나들어서는 안되는 곳이었다.그야말로 ”값싸고 편리한” 대중의 세계가진력날 무렵,어쩌다 한번씩 들러서 ”푸르른 틈새”처럼 잠깐 호사를 맛보는 것이었다.내게 스타벅스의 커피는 단순한 커피가 아닌 창업철학을 음미하는 체험이자 경험이었던 것이다.

스타벅스는 회생할 수 있을까? 내 눈에는 쉽지않아 보인다.왜냐하면 내가 보기에 스타벅스 가 몰락한 것은 ”금융위기”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철학,자신의 정체성을 스스로 훼손한 것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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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참사, 집,그리고 샤일록

 

얼핏 참으로 어이없는 사고인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실은 필연적인 사건인 용산참사”를 지켜보면서 떠오른 것이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에 나오는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이었다.용산참사와 샤일록이라니 좀 너무 엉뚱한가?

 

하지만 그 중간에 알랭 드 보통의 ”행복의 건축”이 있다.보통은 ”집”을 그렇게 정의한다.”어떤 공간과 어떤 희망이 일치했을 때 우리는 그곳을 ”집”이라 부른다.”고. 그런데 나는 그의 책 ”행복의 건축”을 읽는 내내 공감하기보다는 씁쓸했었다.

 

앞으로 수백년 후에도 오히려 세월의 이끼로 더욱 아름다워질 그 웅장하고 장중한 대리석 건축물들의 소유자들,전 세계의 물자를 수탈해 저토록 엄청한 박람회를 개최한 대륙의 소유자들의 건축에 대한 시선을,미학보다는 생존의 필요성에 의해 얼기설기 대충대충 쌓아올린, 20년만 지나면 마치 퇴기의 얼굴처럼 퇴락해가는 우리의 시멘트 건축물들에 적용할 수 있겠는가?

”집에” 관한 정의 역시 마찬가지다.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주거형태인 아파트에 살면서  ”희망과 일치하는 공간”으로서의  집을 자리매김 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더구나 우리 사회에서 집은 단지 희망을 담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일종의 경제행위의 대상이기도 하다.마치 ”베니스의 상인”에서 포샤의 약혼자인 바사니오에게 단지 ”우정의 표현방법”인 ”돈을 빌려주는 행위”가 샤일록에게는 ”생계의 수단”이었던 것처럼.

그러나 지혜로 연인을 구출하는 포샤의 활약이 주인 ”베니스의 상인”에서 두사람간의 이견은 좁혀지지 않는다.다만 샤일록에 대한 묘사를 통해 셰익스피어가 유태인을 얼마나 경멸했는 지를 감지할 수 있을 뿐이다.하지만 이후 이 ”이자”에 관한 유럽인들과 유태인들의 견해차이는 ”아우슈비츠”라는 끔찍한 재앙의 씨앗이 된다.(셰익스피어가 좀더 선구안이 있어 그때 ”이자”에 관해서도 혜안을 가졌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하고 나는 생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유태인들의 이 ”이자”가 나중에 만들어내는 저 어마어마한 시스템을 보라.

 

용산참사 역시 깊이 짚어가보면 문제의 핵심은 ”사퇴”나 ”사과”가 아니라,촛불같은 제의가 아니라 중요한 논점이다.즉,우리 사회의 ”집을 보는 이중적인 시선 ”이다.보통처럼 집이 ”희망과 일치하는 공간”인 사람이 있는가하면 집이 ”보다 안정적인 형태로 자본을 늘려가는 부동산의 하나”인 사람도 있다.

 

전자의 경우 ”집”이 제공하는 정신적 보상에 관심이 있다면,후자에게 집은 자본을 하는 또 다른 형태인 셈이다.전자가 후자를 삶의 가장 소중한 공간이자 기억의 저장소인 집까지 재테크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경제동물”로 보고 경멸한다., 후자는 전자를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신의 생존조건에 대해 연구하지않는 사람이거나, 일상의 안일함만을 추구하는  게으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이같은 ”시선의 불일치”의 원인은 아마도  전례없는 압축성장이 만들어낸 ”땅의 효용의 비약적인 증가”라는 우리나라만의 특수한 사정일 것이다.즉,보통같은 유럽인의 철학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사정이 있는 것이다.유태인들이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받는 사업을 생계수단으로 삼을 수 밖에 없었던 그들만의 사정이 있었던 것처럼.

그래서 이제,단순히 성장이나 개발이 아니라 그 상위개념의 무엇인가를 추구해야하는 단계에 이르른 지금,우리 사회도 ”집”에 관한 이 시선의 불일치를 해결해야 할 때가 되었다.용산참사는 그 필요성의 한 상징이다.따라서 이 비극은 단순히 공권력을 함부로 사용했느냐 안했느냐, 혹은 책임을 지고 사퇴하느냐 마느냐,대통령이 사과를 하느냐마느냐하는 ”정쟁”으로 끝나서는 안된다.항상 대중을 위한 제물찾기에 급급한 우리 정치권의 수준으로는 절대 이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없다.

 

따라서 이번 용산참사는  경제, 건축, 부동산 전문가들이 나서야한다. ”집”이 ”희망과 치하는 행복한 공간”인지,아니면 보다 안정적으로 자본을 늘려가는 ”부동산”인지,이 두 가지의 시선은 오로지 충돌적인 것인지,공존할 수 있는 것인지,아니면 보다 새로운 시선이 가능한 것인 지에 관해 심도 깊은 논의의 계기가 되어야한다.오로지 헤게모니 쟁취에만 눈이 빨개있는 정치인이나 지식인이 아니라 ”현장”을 아는 전문가들이 나서야 할 대목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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