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는 가능한가

오병이어’는 가능한가 [2009.12.18 제790호]
[김찬호의 돈의 인문학]종교마저 장악해버린 돈을 향한
인간의 욕심… 예수 기적의 열쇠는 ‘공동체’에 있네



article, .article a, .article a:visited, .article p{ font-size:14px; color:#222222; line-height:24px; }
» ‘오병이어, 모두가 조금씩 내놓아 만든 기적.’ 조용히 온정을 내려놓는 손길들로 거리가 따스해지는
계절이다. 한 어린이가 엄마의 도움을 받아 구세군 자선냄비에 이웃돕기 성금을 넣고 있다. 한겨레 김명진 기자

유대교 랍비와 가톨릭 신부와 개신교 목사가 논쟁을 벌이게
됐다. 신도들이 교회에 낸 헌금 가운데 얼마만큼이 신의 몫이고, 얼마만큼이 성직자의 몫인가 하는 문제였다. 첫 번째로 랍비가 의견을 제시했다.
땅바닥에 둥그렇게 원을 그려놓고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돈을 던진다. 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야훼의 돈, 바깥으로 나가는 것은 성직자의
돈이다. 가톨릭 신부는 정반대였다. 원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성직자의 돈, 바깥으로 나가는 것이 하느님의 돈이라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개신교
목사가 의견을 내놓았다. 하나님은 하늘에 계신다. 그러니 돈을 하늘로 던져서 위로 올라가는 것은 하나님의 몫이고, 땅으로 떨어지는 것은 성직자의
몫이다.

대형 교회의 사유화와 불교의 재산 갈등

종교와 돈은 어떤 관계인가? 초월적인 세계를 향해 나아가는 구도의 생활에서 현세의 물질은 허망한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절대자의 섭리와 경륜 앞에서 상대적인 세계의 경제적 이해득실은 하찮은 문제로 작아진다. 영원한 천국을 약속받은 사람에게 물질적 손익은
덧없는 계산일 뿐이다. 더 나아가, 돈에 대한 욕심 자체가 진리의 구현에 걸림돌이 된다. 그래서 거룩한 뜻을 따르는 신자들에게 금욕과 청빈이
요구되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고 오직 하느님의 나라와 그 의(義)를 구하라, 자신의 소유를 아낌없이 나눠주면서 하늘에
보화를 쌓으라는 예수의 말씀은 그리스도교 경제관의 핵심을 이룬다.

하지만 현실에서 교회는 그러한 가르침을 쉽게 배반한다. 중세 교회의 면죄부 판매는 종교의 타락상을 극명하게
드러냈지만, 신의 형상이 금전으로 얼룩지고 뒤틀리는 일은 지금도 계속 벌어진다. 헌금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벌받을 것이라는 협박, 모인 헌금을
교세 확장과 성직자의 사리를 채우는 데 쓰는 모습, 교회 안에서도 부자들이 대접받는 분위기…. 근래에는 일부 대형 교회에서 교회가 교직자의
사유물처럼 여겨지고 교묘한 수법으로 아들에게 세습돼 지탄을 받고 그로 인해 신도들 사이에 분열이 일어나는데, 그 핵심에는 돈이라는 우상이 우뚝
서 있다. 순수한 영혼으로 성스러운 세계를 추구하는 공동체에서 속물근성과 탐욕이 독버섯처럼 번식하고, 이에 환멸을 느끼고 상처받아 교회를 떠나는
이가 적지 않다. 물론 기독교만이 아니다. 무소유와 해탈을 위해 정진하는 불교에서 재산을 둘러싼 갈등은 종종 폭력으로까지 비화한다.

그런데 돈을 좇는 종교에는 현세적 이윤을 추구하는 신자들의 신앙 동기가 깔려 있다. 이른바 기복 신앙은 많은
종교의 태생적 속성 가운데 하나다. 자신과 가족의 안락을 확보하기 위해 아무리 몸부림쳐도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에서 신령한 힘에 기대 소원을
이루고자 하는 갈망은 강렬하다. 인간의 영역 너머에 있는 운명을 신이 통제하도록 주문해, 불운을 물리치고 행운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질병이나
가난에서 벗어나는 수준을 넘어, 부귀영화를 얻고자 하는 욕심이 종교적 열망으로 표출될 때도 많다.

어느 교회당에서 늦은 밤에 한 신자가 간절히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주식에 투자했는데 대박을 터뜨려 큰돈을 벌 수
있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매달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바로 뒤에서 어느 노숙인이 끼니를 걱정하면서 1만원만 손에 쥐게 해달라고 애절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앞에서 기도하던 신자는 그의 중얼거리는 목소리에 신경이 쓰였는지 갑자기 뒤로 돌아 그에게 1만원을 건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이봐요, 하나님이 헷갈리시겠어요. 이 돈 드릴 테니까 이제 그만 돌아가시지요.”


“각자 가진 것을 모두 모으자”

개인만이 아니라 조직의 차원에서도 주술적 기복이 이뤄진다. 기독교적 가치를 경영 이념으로 내세우는 어느 기업은
매장에 휴게실을 없애가면서까지 기도실을 만들어 직원들이 일정한 시간에 기도하도록 했다. 그곳에는 다음과 같은 기도의 제목이 붙어 있다고 한다.
‘우리 회사를 더 성장하게 해주소서’ ‘세후 이익 6% 달성‘ ‘매출 10억 달성’ ‘총매출 1억 달성’….

물질적 축복의 희구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다만 그것이 실현되는 방식이 문제다. 무엇이 중요한가? 신약성경
마가복음 6장에 나오는 오병이어(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기적은 그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군중이 예수에게 몰려들어 말씀을 듣다 보니
날이 어둑해졌다. 제자들이 예수에게 다가와 “이곳은 들판이고 때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 마을에 가서 무엇을 사먹게 하십시오”라고 했다. 이에
예수는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라고 대답한다. 이에 제자들은 “그러면 우리가 가서 200데나리온의 떡을 사다가 그들을 먹일까요?”라고
되묻는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지금 먹을 것이 얼마나 있는지 물었고, 제자들이 수소문하니 한 어린아이가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꺼내놓았다. 예수는 5천 명의 군중을 50에서 100명 단위의 소그룹들로 나눠 앉게 한 뒤 그 음식에 축사한 다음 모두에게 나눠주도록 했다.
모두 만족스럽게 먹고 남은 분량이 열두 바구니였다.

먹을 것이 없는 상황에서 제자들이 내놓은 해결책은 각자 허기를 채우고 돌아오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수단은
화폐였다. 그것이 가장 간편하지만 예수가 보기에는 문제가 있었다. 돈이 있는 사람은 배불리 먹고 오겠지만, 돈이 없는 이는 굶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지시한다. 그런데 제자들은 여전히 돈으로 해결하는 발상을 벗어나지 못하고, 자기들이 그 많은
떡을 사다 먹여야 하느냐고 반문한다. 아마도 약간의 반항기와 짜증이 섞인 어조였으리라. 그런데 예수는 바깥에서 답을 구하지 않았다. ‘우리’
안에 이미 있는 것을 찾아보자고 제안했다. 각자 가진 것을 꺼내 모으고 나누면 얼마든지 먹을 수 있으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예수가 베푼 기적은 마술이 아니다. 만일 그가 초능력을 발휘해 순식간에 음식을 대량 복제해냈다면 인간은 항상 그런
구원자에게 기댈 수밖에 없다. 그러나 기적이 마음의 변화에서 비롯된다면 언제나 스스로 일으킬 수 있다. 예수 일행이 먹기에도 모자랄 만큼 적은
음식이지만 그것을 모두의 것으로 내놓고 나누기 시작하자, 군중도 가지고 있던 음식을 내놓았다.

» ‘기복 신앙’은 많은 종교의 태생적 속성 가운데 하나다. 2009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을 한 달여 앞둔
지난해 10월10일 오전 서울 강남구 한 사찰에서 수험생의 학부모가 합격을 기원하는 예불을 올리고 있다. <한겨레21> 윤운식
기자

군중을 소그룹으로 나눈 이유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군중을 소그룹으로 나눠서 앉도록 했다는 점이다. 5천 명이 한 무리로 있을 때와 달리 작은
단위로 분해되면서 그 안에 얼굴과 얼굴이 마주치면서 서로 알아볼 수 있는 공동체가 생겨난 것이다.

극도의 굶주림에 시달리는 아우슈비츠에서도 빵조각을 건네는 손길이 있었다. 어떤 수감자가 자기보다 더 배가 고플
것이라 여겨 옆사람에게 준 빵조각이 그 갸륵함을 싣고 여러 동료를 돌고 돌아 결국 자신의 손에 다시 오자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도 있다.
내가 내놓으면 저 사람도 내놓을 것이라는 계산에서가 아니라, 순수하게 나누는 미덕이 기적을 낳는다. 결핍된 상황에서 오히려 풍요를 경험한다.
결핍과 풍요의 역설은 사람과 사람의 관계 속에서 창조된다. 그러나 뿔뿔이 단절된 개인의 단순한 집합 속에서는 경쟁과 눈치가 판을 치면서 아무리
물질이 풍족해도 한없이 부족하다고 느끼게 된다. 우리는 지금 어떤 현실을 만들고 있는가? 그 밑에 깔려 있는 세계관은 무엇인가?

지구촌의 기아 문제 해결을 위해 활동하는 기금 조달 전문가 린 트위스트는 <돈 걱정 없이 행복하게 꿈을
이루는 법>(The Soul of Money)이라는 책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일단 세상을 무언가가 결핍된 곳으로 정의하고 나면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부족함을 채우는 데만 집중한다. 자기 자신을 책임진다는 것은 고귀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이 자기 자신을 책임질 수 있을 만큼
자원이 넉넉하지 않은 상황이라면, 남의 희생을 요구해서라도 살아남을 수밖에 없다. 안타까운 일이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심지어는
정당한 것으로 인정받기도 한다. 이것은 어린이들이 즐겨하는 의자 뺏기 놀이와 비슷하다. 사람 수에 비해 의자 수가 하나 모자라는 상황이다.
…결핍에 대한 두려움으로 인해 우리는 소중하다고 혹은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자원을 독점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필요한 제도와 시스템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뛰어난 두뇌의 힘으로 아직 오지 않은 사태를 미리 떠올려볼 수 있다. 그 상상력은 즐거운 삶에 대한 희망을
빚어내기도 하지만, 끔찍한 고통에 대한 불안을 자아내기도 한다. 아무리 재산이 많은 사람도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채 발가벗은 미물로
전락할 수 있다. 그것은 인간의 보편적 실존이다. 그런데 생존의 언덕이 가파르게 기울어질수록 탈락과 가난에 대한 공포가 만연한다. 경쟁에서
도태되고 그나마 가지고 있던 것마저 잃어버릴지 모른다는 염려 때문에 악착같이 돈을 모으고 불려나간다. 그러한 집착이 상승작용을 일으켜 빈익빈
부익부의 구조를 만들고 그것은 다시 삶에 대한 두려움으로 악순환된다.

저마다 원자화된 채 고립돼 경쟁만 할 때 결핍감의 압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를 잇는
마음에 초점을 맞출 때 풍요로움이 눈에 들어온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 세상에 충분하게 주어져 있다. 유한한 것을 차지하려 다투는 대신
무한한 것으로 모으고 넓혀갈 때 우주의 신비를 만난다. 물질 그 자체는 한정된 것이지만, 그것이 지니는 가치는 얼마든지 부풀릴 수 있다.
하루하루의 삶을 은총으로 받아들일 때 그 선물을 나누면서 존재를 누릴 수 있다. 이것은 특정 종교를 넘어서 누구나 체험하고 깨달을 수 있는
진실이다.

물질 가치는 얼마든지 부풀릴 수 있다

구세군의 자선냄비에 조용히 온정을 내려놓는 손길들로 거리가 따스해지는 계절이다. 수많은 사람들의 절망과 탄식이
깊어질수록 오병이어의 기적에 대한 소망이 간절해진다. 물신을 절대화하면서 한없이 숭배하는 세상, 사랑의 권능으로 의로운 세상을 이룩하고자 했던
예수의 임재는 어떤 축복으로 재현될 수 있는가.

‘세상 어둠 아무리 깊다 해도/ 마침내 별이 되어 오신 예수여/ 하늘과 땅을 잇는 존재 자체로/ 사랑의 시가 되신
아기여/ 살아 있는 우리 모두/ 더 이상 죄를 짓지 말고/ 맑은 마음으로/ 처음으로 속삭이게 하소서/ 겸손하게 내려앉기를/ 서로 먼저/ 사랑하는
일에만 깨어 있기를/ 침묵으로 외치는 작은 예수여.’(이혜인 ‘성탄 기도’ 중에서)

김찬호 성공회대 교양학부 초빙교수

카테고리 : 기본게시판 댓글 남기기

사라 장

김승현의 文化데이트>“이제 서른… 음악적 삶은 ‘立志’와 ‘不惑’의 중간”
10년만에 내한 독주회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

김승현기자 hyeon@munhwa.com


사진=신창섭기자

바이올리니스트 사라 장(한국명 장영주·29·사진)이 10년 만에 내한
독주회를 연다. 11일 안산에서 시작, 대전(12일), 창원(14일), 수원(17일), 전주(19일), 광주(21일), 구미(22일),
의정부(24일), 제주도(26일)를 거쳐 28일 서울에서 마무리를 한다. 한국에서 10년 만의 독주회 말고도 올해는 장씨에게 여러모로 특별한
해다. 바이올린을 처음 잡은 지
25년째이며, 첫 음반을 녹음한 지 20년째다.
또 한국 나이로 서른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7일 오후 서울 중구 장충동 신라호텔 19층 미팅룸에서 장씨를 만나 삶과 음악에 대해
들었다.
먼저 언제 어떻게 바이올린을 시작했느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네살반쯤 됐을 거예요.
세살때부터 피아노를 쳤는데 싫증이 났나봐요. 바이올린을 달라고 했더니 16분의1짜리 바이올린을 사주시더라구요.”돌상에서
공부 잘 할 애는 연필을 잡고,
돈 잘 벌 애는 돈을 잡는다고 역시 천재 바이올리니스트는 뭐가 달라도 좀 달라보인다.
“아니에요. 그냥 아빠 바이올린을
만지고 싶었어요. 못만지게 하면 더 만지고 싶잖아요. 그랬더니 ‘장난감’을 사주신 거지요.”그 ‘장난감’이 지금 힘과
테크닉, 감성이 조화를 이룬 세계 최고의 바이올리니스트를 만들 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장씨는 새로 장만한 4분의1짜리 독일제 바이올린으로
여섯살때 첫 연주회를 열었고, 아홉살때 뉴욕 필하모닉 신년음악회로 공식 데뷔했다. 이 음반이 세계적인 메이저음반사 EMI에서 ‘데뷔’라는
음반으로 2년 후 나왔다. 녹음시점을 앨범 데뷔로 치는 관행에 따르면
첫 앨범을 만든 지 20년째이지만 장씨는 굳이 “18년몇개월 됐다”고 말했다,
20년을 기념한 아주 특별한
앨범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자 특유의 호기심이 발동, ‘크로스오버냐’ ‘독주냐,
협연이냐’ 등 이리저리 돌려가며 몇 번 캐물었으나 “비밀”이라며 입을 다물었다.
“저는 지금까지
정크(junk·허섭스레기, 시시한 것)는 한번도 안 만들었어요. 크로스오버는 아니에요. 바이올린하고 놀기는 싫어요. 바이올린은 제게
잡(job·일)이 아니에요. 제 라이프(life·삶)거든요. 클래식을 퓨어(pure)하게
한다는 것은 말할 수 있어요. 정말 제가 하고 싶은 작업을 할 거예요.”
‘크로스오버는 아닌’ ‘하고 싶은
작업’이라는 말에서 세계 최고로서의 자신감이 묻어난다. 장씨는 최근 EMI서 쿠르트 마주어가 지휘한 드레스덴 심포니와 함께 연주한 브람스·브루흐
바이올린 콘체르토 앨범을 내놨다. 베스트앨범을 포함, 19개 음반을 내놓을 때까지 20년 동안 그는 특별한 예술가가 평생을 걸쳐 해도 이루기
힘든 탁월한 성과를 기록했다. 마주어를 비롯해 다니엘 바렌보임, 콜린 데이비스, 샤를르 뒤트와, 로린 마젤, 주빈 메타, 리카르도 무티, 앙드레
프레빈, 사이먼 래틀, 볼프강 자발리슈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지휘자들이 지휘하는 뉴욕
필하모닉, 베를린 필하모닉, 비엔나 필하모닉, 런던 심포니오케스트라 등 세계 최고
수준의 오케스트라와 협연했다. 이들 지휘자 한 사람과, 한 오케스트라와 협연만 해도 사실 ‘가문의 영광’이다.
25년째
하고, 그렇게 눈부신 성과를 이뤘으면 이제 좀 지루할 만도 해보인다. 하지만 그는 “옮겨다니며 시차를 계속 바꾸는 게
피지컬리(phisically·육체적으로) 힘들기도 하지만 음악은 가장 즐거운 라이프 스타일”이라며 “특히 새로운 나라, 도시, 사람들, 다양한
문화가 너무 신기하다”고 덧붙였다.“저는 연주를 즐겨요. 음악가가 된게 정말 행복해요. 새로운 지휘자와 오케스트라를 만나 수많은
레퍼토리를 공부하느라고 지루할 틈이 없어요. 매일 데디케이션(dedication·봉헌, 헌신, 여기서는 진지한 연습)해야 합니다. 하루라도 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바이올린은 제 삶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또 지금부터 2, 3년 앞까지 스케줄이 다 잡혀있어요. 제 삶에서
가족이 퍼스트(first)라면 다음이 음악입니다. 제게 음악은 결코 하비(hobby·취미)가 아닙니다.”사반세기를 바이올린 연주를
한 것과 관련, 우문을 던졌다가 본전도 찾지 못했다. 얼른 말을 돌려 그 동안 얼마나 많은 도시에서 연주했느냐고 묻자 그는 “아직 안 간 도시가
더 많겠지만 수백개쯤 안될까”라고 반문했다.“미국의 도시는 다했고, 유럽도 대부분 했고, 남미도 많이 가요. 한국,
일본, 중국에 최근 두바이까지 아시아도 많이 했어요. 아프리카도 케이프타운, 요하네스버그, 더반 등을 돌았어요. 이번 서울 공연은 특히 제가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우리나라의 도시들에서 연주해 큰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좋은 연주의 조건에 대해 묻자 그는 “밸런스”라고
했다.“연습실에 오래 있다고 좋은 것은 아니지요. 자기 길만 갈 수 없지요. 서로에게 양보하며 기브 앤드 테이크(give and
take)를 하며 맞춰가야 합니다.”10일로 생일이 지나면 만으로 29살, 한국나이로 서른이다. ‘서른, 잔치는 끝났다’라는 시도
있다. 인생에서 ‘서른’은 ‘입지(立志)’라고도 하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장씨는 “이제 시작하는 것”이라며 최씨의 시를
무시했다. 또 ‘입지’라는 데 대해 “뜻은 벌써 세웠다”면서 “아마 그런 표현이라면 ‘입지’와 ‘불혹(不惑)’의 사이일 것”이라고 의연하게
말했다. ‘지우학(志于學)’인 10대처럼 말하면서도 의식은 이미 ‘입지’와 ‘불혹’을 넘어 50대인 ‘지천명(知天命)을 향해 가고
있었다.10년 만의 독주회인데 왜 그리 뜸하게 독주회를 하는지 궁금해 하자 장씨는 “독주회를 많이 안한다”며 “오케스트라와 함께
해야 하는 콘체르토를 제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답했다. 그는 “미국과 유럽에서는 3년에 한번씩은 독주회를 하는데 한국에서는 왜 그렇게 됐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하지만 독주회는 기뻐요. 다른 색깔을 많이 보여주는 레퍼토리를 할 수 있거든요. 특히 이번 공연은 정말 제가
하고 싶은 레퍼토리만 골랐어요.”이번에 연주할 레퍼토리는 근대 이후 작곡된 바이올린 소나타 가운데 최고로 평가되는
프랑크의 ‘바이올린소나타’, 브람스의 바이올린 소나타 가운데 유일하게 단조로 작곡돼 낭만과 우수가 백미인 ‘바이올린소나타 3번’ 그리고 그리스
출신의 세계적 현대음악가 크리스토퍼 테오파니디스가 장씨에게 헌정한 ‘판타지’ 등이다.
“모든 곡이 정말 훌륭한 제가
인조이(enjoy)하는 곡입니다. 프랑크 소나타는 제가 제일 자랑하는 곡이에요. 로맨틱하고 예쁜 곡이지요. 브람스 3번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으로 드라마가 있어 들으면서 더욱 아름답게 느끼는 곡입니다. ‘판타지’는 테오파니디스가 작곡한 곡인데 이번에 피아노와 바이올린 곡으로 새로
만들어 줬어요. 이번 한국에서 연주가 세계 초연입니다.”장씨는 “‘판타지’가 자칫 바이올린 중심으로 흐르기 쉬워 협연자를
‘반주자’가 아닌 ‘솔로이스트’를 원했다”고 말했다.“한 곳에 치우치지 않는 파트너십이 필요하거든요. 따라 오는 것이 아니라
강력한 파트너십으로 대등하게 질서를 이룰 수 있는 솔로이스트로 전에 좋은 호흡을 이뤘던 앤드루 폰 오이엔과 함께 하게 돼
기쁩니다.”이 ‘젊고 아름다운 거장’의 앞으로의 도전과제는 무엇일까.“안 해본 곡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더 배우고
싶어요. 실내악을 좀 더 해보고 싶고 디스코그래피도 좀 더 제 색깔을 살려 만들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제는 정말 ‘이유가 있는 음악’을 하고
싶습니다.”나이가 서른이지만 음악밖에 모르는 너무나 순진무구한 모범생 같다. 그런 생활에서 일탈하고 싶었던 적은 없었는지 묻자
깔깔 웃으며 “다른 것 갖고는 놀아보고 싶지만 바이올린 갖고는 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바이올린은 제게
시리어스(serious)한 커리어예요. 바이올린만은 깨뜨리고 싶지 않아요. 그런 실험은 라이프에서나 할래요.”편집국 부국장
hyeon@munhwa.com■ 사라 장은…▲1980년 미국 출생 ▲1985년 바이올린 시작
▲1986년 필라델피아 지역 데이비드번드 오케스트라 협연 데뷔 ▲1989년 세계적 지휘자 주빈 메타, 리카르도 무티와 오디션 거쳐 뉴욕
필하모닉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오케스트라와 계약 ▲1990년 링컨센터 에이버리 피셔홀 뉴욕 필
신년음악회 ▲1991년 EMI 클래식과 독점 계약, 1992년 데뷔 음반 ‘데뷔’ 출반 ▲1986~1998년 줄리어드 예비학교 ▲1999년
줄리어드 음대 입학 ▲수상 : 에이버리 피셔 커리어 그란트상(1992) 그라모폰 선정 올해의 젊은 음악가상(1993), 영국BBC방송 인디펜던트
주최 클래식 뮤직상 신인상(1994), 에코 음반상(〃), 세계를 빛낸 한국음악인 대통령 표창(1995), 에이버리 피셔상(1999),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에프 협주곡’ 음반 그라모폰 에디터스 초이스(2006), 뉴스위크지 차세대 여성지도자 20인 선정(〃),
세계경제포럼(WEF)선정 ‘세계의 젊은 리더’

기사 게재 일자 2009-12-12
카테고리 : 기본게시판 댓글 1개

[스크랩]부자(父子)

 

더위가 한풀 꺽여 가을이 가까이 온 날 길상사에는 유모차에 탄 아이와 아빠가 왔습니다.일요 가족법회 시간에 부자는 법당을 향해 고요히
앉아있습니다. 아빠는 그루터기 의자에 아이는 편안한 유모차에. 뒤로 아스라이 보이는 관세음보살님이 이 부자를 보호하고 있는 듯 합니다.둘
다 웃고 있지는 않지만 웃고 있는 얼굴만큼이나 편안한 모습입니다.이들의 모습은 ‘선물’입니다.길상사라는 유형의 공간에서
만나는 그 순진한 세계.길상사는 항상 서있는 것들로만 이루어져 있지 않습니다.이렇게 가끔씩 경내에서 볼 수 있는 本然의 모습 또한
길상사의 모습이 아닌가 생각합니다.인간의 내면이 들어나는 모습을 찬찬히 바라보고 싶습니다.저자거리 한 복판에 있는
길상사이지만 도량을 찾는 이들의 몸짓 하나하나에서 부처의 모습을 보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누고 싶습니다.<!–"

카테고리 : 기본게시판 댓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