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ew battle]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라는 말에는 누구라도 쉽게 무시해 버리기 힘든 묵직한 울림이 있다.

어느 누가 정의롭게 살아야 한다는 당위에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정의,라는 두 글자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사람으로 하여금 그렇게 살아야겠다는 결심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문제는 그 정의라는 것에 깔끔한 매뉴얼이 없다는 것이다.

다정하게 정답을 가르쳐 줄 선생님도 없고

내공을 걸고 지식인에 검색해도 마뜩한 답이 나오지 않는다.

 

인간의 삶에 닥치는 문제들은 너무나 다단하고 복잡해

정의 대 비정의의 상태로 도대체가 나눌 수가 없다.

 

일상에서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상황들은

철지난 할리우드 영화처럼 탐욕스럽고 비정하며 냉혈한(데다 못생긴) A와 사람 좋은 웃음에 성실하고 용감한(데다
잘생긴) B의 대결
구도가 아니라

-사실 이제는 할리우드 영화에서도 그런 구도를 찾아보기 힘들지만,

 

한 친구가 내게 거짓말을 털어놓는 바람에 나는 이 친구의 거짓말을 발설하지 않아야
하는도의적인 책임을 가지게 됐는데, 이걸 어쩌나, 이 거짓말로 인해 또 다른 친구가 큰 피해를 보게 될
상황이 생겨버렸으니 이런 상황에서 나는 원칙에 따라 행동을 해야 되는 것일까…에
더 가깝다.

 

모든 사람이 언제나 사람의 생명이나 천문학적인 액수의 재산,

혹은 사회의 질서 등을 좌우하며 생활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작은 결정을 해야 하는 수많은 순간과 마주친다.

그런 크고 작은 상황에서 어떤 논리에 따라 결정을 내리느냐,

사소한 것으로 치부되기 쉬운 결정들이 사실 커다란 정의를 굴리는 바퀴다.

   

그런 의미에서 정의란 주먹을 불끈 쥐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는 용사라기 보다는

사실 굉장히 섬세하고 예의바르고 조심스러운 학자의 모습이 어울린다.

혹은 닳고 닳아 유들유들해진 조정자이거나.

 

고대에 소크라테스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던 제자들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마이클 샌델은 생활에 밀착된 비근한 예부터

칸트, 벤담, 밀에 이르는 석학들의 이론을 아우르며

끊임없이 질문을 던진다.

질문을 통해 독자에게 고민하기를 강요하고

사건 이면에 얽혀 있는 상황을 고려하라고 충고한다. 

 

이것이 ‘정의’의 핵심이 아닐까.

정의는 개개 질문의 해답에 있는 아니라

끊임없는 질문 자체인 것 같다.

 

의탁할 절대선이 없는 상황에서 정의란 결국,

상충하는 사람들의 이익 사이에서

끊임없는 고민하는 이성을 통해 균형을 이루는 장치를 마련하는 것인 것이다.

   

언뜻, 죽을 때 까지 고민한들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질문들,

사람들의 이익이 실타래처럼 한 데 엉켜

모두가 정의롭다고 여길만한 해답은 나올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도

 

정의를 생각하는 것.

 

정의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에

내가 내린 대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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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battle] 동물에게서 한 수 배워 볼까? (지능적이고 매혹적인 동물들의 생존게임)

 


 

 

 

 

나는 (아주 가끔이지만) 동물의 세계를 보면서 감탄하곤 했다.

 

‘생존’만을 유일한 규칙으로 두고 먹고 먹히는
동물들을 보면서

 링 위에서 어떤 속임수나 장비도 없이 주먹만으로 맞붙는

권투 선수들을 볼 때처럼 처절한 순수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마도 죽을 힘을 다해 달리다 결국 사자에게 붙잡혀 잔뜩 움츠린 채

잡아 먹히고 마는 톰슨 가젤
정도만을
생각했기 때문인 것 같다.

힘이 세고 발이 빠르고 이빨이
날카로우면 먹고,

그렇지 못하면 먹히고.

 

하지만 독일 작가 마르쿠스 베네만이 지은

‘지능적이고 매혹적인 동물들의 생존게임’을
읽다 보면

(시튼 동물기 이후로 동물기는
처음이다!)

내 감탄이 사실 무식의 소치였을 뿐이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책에 기술된 동물들은 얼마나 지능적이고 계산적으로 행동하는지

되레 인간이 무능해 보일 지경이다.

 

먹이를 낚아채기 위해 쓰는 방법도
무척 다양해

사람이 동물에게서 한 수 배워야 할 전술이 하나 둘이 아니다.

 

책에 소개된 동물들은 가히,

 

차분히 기다릴 때와 대담하게 나서야 할 때를 알고,

스스로를 미끼로도 던질
줄 아는

제갈공명 못지 않은 지략가요,

미국의 전설적 사기꾼 프랭크 아비그네일 주니어 뺨치는 위장의 달인,

유디트를
능가하는 팜파탈,

영화 ‘다이보사츠 고개’의 류노스케 저리 가라 할만
한 음험한 도살자다.

 

심지어 어떤 동물은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고사조차 알고 있는 듯 하다!

 

삽화 대신 사진이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희귀 동물들이 많아 사진으로 담기가 어려웠을 듯 하다.

대신 세련되고 재치있는 작가의 설명이

부족한 시각 정보를 대신하고도 남는다.

 

p. 20

아이아이원숭이는 특이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눈언저리는 유난히
검어 힘들게 야근한 것 같은 인상을 주고…

 

유령처럼 마르고 뼈대만 앙상한 긴 손가락이다. 아이아이원숭이가 동화 <헨델과
그레텔>의 헨델처럼 못된 마녀에게 잡혀 매일 철창 밖으로 손가락 하나를 내밀어
통통하게 살이 쪘는지 점검받아야 한다면 죽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p.298

문외한의 눈으로 보아도 기괴하게 생긴 귀상어의 머리가 정말로 망치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물론 상어는 그 머리로 실제로 못을 박지는
않는다. 양 옆에 눈이 있으니 머리로 못을 박으면 아마도 아플 것이다.

 

p.306

귀상어의 괴상한 머리의 가장 주된 기능은 바로 전기탐지기 기능이다. 귀상어가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며 먹이를 탐지하는 모습은 인간들이 탐지기로 해변을 수색하는
모습과 당황할 정도로 흡사하다. 귀상어가 지구에 서식하기 시작한 지 상당히 오래된
종이 아니었더라면 귀상어가 그 넓은 머리를 잠망경처럼 물 속에서 수직으로 조금
내어놓고는, 사람들이 해변에서 수색하는 놀라운 기술을 엿본 것은 아닌지 의심이
갈 정도다.

 

 

책을 읽는 내내 동물을 인간보다 하등한
생물로 치부해 버릴 수 없다고

다시 한 번 느끼게 됐다.

동물은 인간에게 종속된 존재가 아니라

그 세계를 살짝 들여다보는
것 만으로 감탄을 자아내는

지능적이고 매혹적이며 독자적인 개체이다.

 

그러니 인간이 조금 더 편해지자고 동물이나 식물을 희생시켜도
된다는 식의 사고는 얼마나 무지하고 오만하며 위험한가.

 

문득 4대강 공사 구간에서 발견됐지만 환경영향평가서에서는
누락돼 터전을 잃게 됐다는 멸종위기종 수리부엉이, 참매, 표범장지뱀의 사진이 떠올라
마음이 불편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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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battle]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최인호의 인연’)

  

 

 

때로 앞에 앉은 상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다가

어떻게 할 수 없이 따뜻한 느낌에 휩싸이는 경험을 할 때가 있다.

 

 

몸에 따뜻한 피가 돌고 있는 것이 생생하게 느껴지고

따뜻한 봄바람을 입은 것 같기도 하고

품이 넉넉한 누군가에게 안겨 있는 것 같기도 한 느낌.

 

 

그런 것은 대부분 상대방이 내 인연이라는 사실을

자각하게 될 때이다.

 

 

因緣,

 

 

이유가 있어

얽혀있는 사람들.

 

 

지금 이 사람과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것이

 

 

하나에서 열까지 다르기만 한 우리 두 사람의

바로 지금 이 순간 이 곳이 겹쳐져서 만들어낸

 

 

흔하다면 흔하고

기적같다면 기적같은 경험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 상대방은 때로 좋아서 견딜 수가 없는 사람일 수도 있고

숨소리도 거슬릴 만큼 싫어하는 사람일 수도 있고

아무런 감상이 없던 사람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내 앞에 앉은 사람이

우연이 아니라 다 이유가 있어서

촘촘하게 얽혀 있는 우주의 그물에 함께 걸려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

 

 

살아가는 것이 무의미하다는 지독하고 오랜 외로움도 녹아버리고

미움도 사라지고, 사랑은 한층 깊어진다.

 

 

물론 이런 것은 아주 가끔 깨닫고

곧 잊어버린다.

 

 

사람들은 많은 것을 잃어버리며 살아간다.

돈도, 기회도, 시간도,

때로는 상실감조차도 상실한 채 살아간다.

 

 

하지만 그 어떤 것의 상실도 잃어버린 사람에 비할 수는 없다.

 

 

잔인하게 잘라버린 관계,

혹은 인연이라는 것을 깨닫기도 전에 사라진 관계,

혹은 사랑을 충분히 쏟지 못한 관계….

 

 

잃어버린 많은 얼굴들이 떠오른다.

이목구비가 희미해진 얼굴도 있다.

얼굴은 희미해져도 후회는 희미해지지 않는다.

 

 

‘최인호의 인연’은

최인호 작가를 둘러싼 관계로 가득찬 글이다.

또한 그 관계들이 결국 작가의 모든 것이라는 것을 느낄 수 있는 글이다.

 

 

따뜻한 작가가 선한 사람들과 함께 나눈 기억을 엿보며

죽은 나무에서 꽃이 피어나는 이미지가 머리 속에서 떠나질 않았다.

인연이란 바로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인연을 떠올렸다.

 

 

소모적이고 의미없는 우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지금은 이해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확실히 존재하는 어떤 이유로 해서 지금 내 곁에서 함께 하는 사람들.

 

 

마른 내 인생에 꽃을 피워 줄,

결국,

나의 모든 것.

 

 

 

지친 몸과 마음에 천천히, 힘이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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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는 부조리하다. 하지만…

 

 

누군가 사랑은 예술이고 연애는 정치라고 했다.

 

그래서 사랑은 그저 아름다울
뿐이지만

연애는 끝임없이 관계의 우위를 파악하고 계산해야
한다.

 

이 사람은 나를 정말로 사랑할까.

이 사람은 나를 왜 사랑할까.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하는 만큼 이 사람도 나를 사랑할까.

사랑이 변하지는 않을까.

이 사람의 역사와 배경에 나의 역사와 배경이 어울릴까.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기 시작하면

그 생각을 모두 담을
말을 찾다가 찾다가

결국에 내뱉는 말은
이렇다.

 

-연애는 부조리해.

 

연애는부조리해부조리해.조리라고는눈곱만큼도없어.브래드피트랑안젤리나졸리도헤어지지않았냔말이야.연애가조리에맞다면엘리엇스미스가어떻게노래를썼겠고허진호가무슨수로영화를만들겠어.아이고사람들은어쩌려고연애란걸하는걸까아아.

 

라고 투덜대면

양천구 민방위 씨는 언제나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라이나생명적으로다가 맹목적인 인내심으로
반박한다.

 

 

 

 

 

민방위 씨가 연애는 부조리하다고 단박에 인정해도 화가 날 게 뻔하면서

연애가 부조리하지 않다는 그 순순한 대답에 나는 또 심사가 틀린다.

 

연애는 부조리해.

아주 연약한 공격에도 허물어지는 게 사랑이야.

손에 잡히지 않고 눈에 보이지 않는 건 뭐든 그래.

 

그런
양천구 민방위 씨가 하루는 책 한 권을 내밀었다.

보고 좀 깨달으라고.

 

책은, 프레데릭 페테르스의 자전적
만화 ‘푸른 알약’이었다.

 

작가는 한 여자를 만난다.

모든 인연처럼 평범하지만

딴은 운명적인 만남이었다.

 

감정이 구체적으로
변하자 남자는 여자에게 고백을 한다.

그런데 여자의 대답은,

 

 

”프레드, 난 에이즈 보균자예요.”

 

절벽에서
떨어지는 아찔함.

 

”에이즈라고요?”

”양성이에요.
양성보균자죠. 내 아들도요.”

 

 

하지만 속 깊은 남자는 아찔함을
느낄 뿐,

포기하지 않는다.

 

남자는 사랑이란
것이 조리에 들어맞은
완전한
상태로 내 품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과는
과정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듯 하다.

 

에이즈 보균자인 여자와 남자가 만들어가는 사랑에는

사람들이 예상하는 신파가 없다.

지독한 인고의 과정만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 곳에는 (당연히,
평범하기 짝이 없도록 열렬한) 사랑이
있고

사랑의 이면에 놓인
어려움을 담담히 짊어진 남녀가 있다.

 

늘 한켠에 선 죽음의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불안이 있지만

그 불안을 이겨내도록 도와주는 질병에 대한 이해의 과정이 있다.

넉넉한 웃음과 유머가 있다.

 

속 깊은 남녀의 사랑

따뜻하고 통찰력
있는 글과

거친 듯 사실적인 그림체에
담겨

 

연애란 것이 파탄이 나야
마땅한 부조리의 산물이라는 증거를 찾지 못해 안달이 난

내 유치하고 덜 자란
마음에 쉬 사라지지 않는 울림을 만든다.

 

인생과 사랑은 모두 쉽지 않다.

여자가 늘 시간에 맞춰 먹어야 하는 푸른 알약처럼 불편하고 복잡하다.

하지만 모두 포기해버릴 만큼 어렵지만도 않은
것이다.

 

책을 읽을수록 두 사람의 사랑이 사실은 전혀 특별하지 않다는 것이 확실해진다.

 

두 연인이 짊어진 에이즈라는 짐은 사실 그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있다.

연약한 관계가 파탄나려면 무려
에이즈 씩이나 필요하지 않다.

 

88만원 세대에는 그 짐이 쉬 가난이나 생활고가 될 수도 있고

두 사람의 배경의
차이나 사랑이나 관계를 대하는 시선의 차이가 될 수도 있으며

혹은 너무도 간단히
타이밍이 되기도 한다.

 

불안이나 불신도 때로 능히 에이즈보다 강력하게 관계를
파탄낸다.

 

 

하지만 누구도 죽는 걸 의식하면서 살아갈 순 없어.

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곧 죽을 운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사랑할 순 없어.

 

 

한 가지는 확실하다.

누가 뭐래도 연애는 부조리하다.

 

이것도 확실하다.

 

털끝만큼도 상처받지 않겠다고 갑옷을 단단히 입고

불안에 덜덜 떨며

계속해서 계산만 하고 있다가는

 

(혹은 나처럼 부조리하다고 투덜대기만 해서는. -_-)

 

절대로 작가와 작가의 연인이 나누는 사랑은 경험할
수 없을 거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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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battle] 일개미씨, 힘을 내요 (‘일개미의 반란’)

어려서부터
내 꿈은 비회사원이었다.

 

나이가
들면서 꿈은 조금씩 변주를 거듭했지만,

큰 회사에서 열심히 일을 하는 회사원이
됐던 적은 없다.

 

하지만
다른 많은 꿈과 마찬가지로 ‘꿈은 꿈일 뿐’ 으로 남겨 두고,

만 2년이
넘게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하고 저녁에 퇴근해 집으로 돌아온다.

 

일에 치이고,
때로 돈에 치이고, 또 사람에 치여 생긴 상처를 제대로 돌보지도 못하고,

회사에 묶여 열 살은 더 늙어버린 기분으로

여전히
비직장인을 동경만 하며 시간은 흘러간다.

 

하고 있는
일이 적성에 맞지 않는 것도 아니고,

넥타이가
싫어요,

도 아니며

별 보며
출근해 달 보며 퇴근하는 것도 아닌데

나는 왜
이렇게 비회사원을 동경하는 걸까.

 

이렇게
저렇게 고민을 해 봐도 결론은 처세에 밝지 못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내가 하고
있는 일 너머로 사람사이의 역학 관계나 상황을 읽는 머리가 부족한 것이다.

 

몸도 마음도
피로한 연말, 처세책 한 권을 받았다.

‘일개미의
반란’은 이솝 우화를
직장인의 현실 속에 녹여내 쉽고 재미있게 읽힌다.

직장 생활을
하다가 한 번쯤 보고 듣고 느꼈을 상황 대처법을 읽으며 공감도 되고

내가 처한
상황에서 해야 할 행동을 한 번쯤 점검해 볼 수도 있겠다.

 

그 해석이
이현령비현령인 데가 있고

가십의
나열로 느껴진다는 점이 단점.

 

그런데
책을 읽고나니
내 시대에 뒤떨어진 믿음이 오히려 단단해졌다.

 

많은 사람들이
처세의 중요함을 이야기한다.

It’s not
what you know, but whom you know

(당신이 무엇을 아는가 보다는 당신이 누구를 아는가가
더 중요하다)라고도 한다.

 

하지만
나는 처세술이라는 단어가 주는

핵심에
닿지 못하는 의존적인 어감이 역시 불편하다.

시대에
발맞추지 못하는 태고적 마인드라 해도

나는 정공법이
더 좋다.

 

사내 정치,
처세술이 순간 순간 빠져나갈 길을 만들어주고

회사 생활을
조금 편히 만들어 줄 수 있는 지는 몰라도

나를 더
높이 올려주지도

더구나
더 멀리 가게 해 주지는 못하는 것이다.

 

책이 전하는
많은 충고 중 내가 생각하는 핵심은

“남 탓
말고 자신의 일만 똑바로 하자.”(p.217)

 

결국 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내 실력이고 내 깜냥이다.

게다가
내 업은 번역과 기사쓰기가 아닌가.

 

(그래서
또 하나
마음에 남은 충고.

“한 번의
과오가 영원히 발목을 잡는다.” p.277

오역이나
오보를 한 번 하게 되면 그 기사는 꼬리표처럼 나를 따라 다닐게다. )

 

돈과 명예로
대표되는 성공이라는 것은

성공만
머리 속에 넣고 죽어라 달린다고 누구나 쥘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순간 순간
자신의 내면이 내는 솔직한 소리에 집중하고

좋아하는
일을 열심히 하다보면

어느 순간
보너스처럼 주어지는 것일 뿐.

 

이뤄낸
일 하나 없는 한 해다.

오전 7시가 되면 떠지지 않는 눈을 억지로 뜨고
출근해

일을 하다
퇴근시간이 되면 지친 몸으로 퇴근하기를 반복했다.

여러 시험에
응시했다가 떨어지고 또 낙심했다.

 

피로와
권태와 실망 때문에 고개를 꼿꼿하게 들기도 힘이 들고

비회사원의
꿈은 더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이제 새해가 밝는다.

내년도
그 다음해도 하루 하루
이 악물고 이렇게 버텨내면

언젠가는
어느 틈에 가까이 온 성공 비슷한 것과 마주하게 될지도. 

 

 

+

 

만성피로증후군
자가 진단을 해보니

10개 중에
10개가 다 내 증상이다.

 

새해에는
몸도 좀 돌봐야지.

따라서
일개미의 반란이 주는 가장 의미심장한 충고는 이것!

‘좋아하는
일이 오히려 자신을 죽일 수 있다.’(p.39)

 

일도 처세도
일단 몸이 건강한 다음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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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ew battle] 비경영학적 인간의 ‘경영학 무작정 따라하기’

언제부터 어제가 오늘 같고, 지난주랑 지난
달이랑 구분이 안 되더니 어느새 회사에서 일을 한 지도 2년이 지났다.


월급은 마치 첫사랑처럼 내 통장에 잠시
머물렀다 떠날 뿐이고,

시험이 한 달도 안 남았으니 이제 촌음을 아껴 공부를 할테다! 라고 주먹을 불끈 쥐어 봐야

주먹에
힘이 채 풀리기도 전에 오늘은 회식, 내일은 님이랑 약속, 모레는 친구랑 약속에,

아침만 되면 눈을 뜨기가 어려워 1분만 더, 2분만 더를 계속하다 회사에는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눈도 침침하고 속도 쓰리고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


이건 정말 뭔가 총체적이고 종합적인 자기 경영 실패.

재정 관리도, 업무관리도, 건강관리도, 아울러 정신건강관리도 점수를 잘 줘야 낙제점,

‘경영학 무작정 따라하기’도 대체 언제 받은 책인데 서평 쓰는 것을 미루고 또 미루고 한 번 더 미루고 미룬 김에 미루다

이제 서야 쓰고 있으니 시간 관리도 낙제.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대학생일 때도 나는 그 흔한 경영 관리 수업 하나 들어본 적이 없구나.

서점가면 입구부터 널린 경영학 실용서적도 손에 잡아 본 적 없으니 그렇다면 이 지경이 된 자기 경영 실패는

뼛속까지 인문학적 인간의 당연한 귀결이란 말인가!


경영학에는 별 흥미가 생기지도 않았고, 창업이나 경영은 나와는 거리가 먼 일이라고 지레 관심을 끄고 살았는데

그  생각이 씨가 된 것인지 실제로 먼 거리에서 살고 있고, 앞으로 거리가 줄어들 일도 난망해 보인다.


하지만 ‘경영학 무작정 따라하기’는 나같이 경영학적인 배경지식이 전무한 사람이 읽기에도 큰 무리가 없다.

총 63장으로 나눠 경영학의 다양한 개념을 설명하고 있는데, 개념의 이해가 쉽도록 비근한 예시가 풍부하고 설명이 친절하다.

경영학의 기본적 정의와
이론에서부터 경영관리·조직관리·인사관리, 마케팅 전략에 이르기까지

경영학의 곳곳을 빠뜨리지 않고 다루고 있다.

한참을 읽을 때 까지 번역서라는 사실을 몰랐을 정도로 번역도 ‘투’가 없이 깔끔해 좋다.


중간
중간 경영학 개념과 상식이 보기 쉽게 정리된 부분을
시간 날 때마다 읽어 두면

경영학 관계로는 특히나 무식이 살찌는
내가 외신 번역할 때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경영학의 목적은 자원의 효과적인 관리를 통한 최대 이윤 창출.

그렇다면
경영이라는 게 별 게 있나,

관리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는데.


직장에 다니며 매일 출퇴근을 하고 있으니 나도
어떤 의미에서는 경영을 하고 있는 셈이다.

경영학의 기본은 파악하고 있는 것이 시대의 유행어처럼 돼버린 ‘경쟁력 강화’에 도움이
되겠지.    

돈도, 시간도, 사람도 알차게 쓰는
거다!

앞으로 2년 뒤에는 좀 더 뿌듯해하며 지난 2년을 반추할 수 있도록.

 

 

 

+

“돈도, 시간도, 사람도 알차게 써야겠다”
고 생각하며 뭔가 찬란한 배경음이 들리는 듯한 환각 속에 책을 덮었지만

다음 순간 나는
TV 홈쇼핑 채널 쇼호스트들에게 설득 당해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고 있었어요..

그래서 결국 속옷세트를 샀어요..

왠지 예쁜 속옷을 사야만 할 것 같았어.

예쁜 속옷을 입지 않는
것은 현대 직장 여성의 경영학적
의무와 책임을 망기하는 일이라는 듯이 말을 했단 말이야.

쇼호스트들이.

정말이야.

진짜 그랬어.


쇼호스트님들은
지옥 갈거야. -_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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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을 찾아가는 작은 물고기의 헤엄 (르 클레지오, ‘황금물고기’)

 

간단히 설명하자면
‘황금 물고기’는 2008년 노벨상을 받은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가 쓴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다. 사실
나는 성장소설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웬만하면 ‘본전은 하는’ 안전한 선택 같기도 하고, 성장하지 못하고 청춘을 소모하고 있는 나를 야단치는 소리 같아서.

 

 

작년 11월에 노벨 문학상
발표가 있었다. 한국 사람으로서 고은 선생이 받으면 좋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는 한 편으로
‘속죄’의 이언 매큐언, 혹은
‘노인을 위한 바다는 없다’를 거쳐 ‘로드’로
만개한 코맥 매카시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하지만 수상자는 (내게는
의외였던) 르 클레지오였고, 운의씨가 생일 선물로 그의 작품, 황금 물고기를 선물해 주었다.

 

 

그래서 읽게 된 소설
‘황금 물고기’의 주인공 소녀의 이름은 라일라. 밤이란 뜻이다. 밤은
세찬 진실의 시간. 라일라는 밤처럼 어두운 아프리카에서
태어났지만 일곱 살 무렵 누군가에게 납치돼 팔려간다.

 

 

랄라 아스마란 이름의
할머니가 라일라를 사들인 뒤 집에서 키우며 친할머니와 다를 바 없는 애정을 쏟지만 얼마 안가 숨을 거둔다. 할머니를 잃은 라일라는 이후
표류를 계속한다. 태어난 땅과 피로 맺어진 가족을 그야말로
‘강탈당한’ 라일라에게 표류는 숙명이다.

 

 

나는 어렸을
적부터 사람들이 끊임없이 나를 그물로 잡으려 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나를 끈끈이에 들러붙게 했다. 그들은 자신의 감상과 그들 자신의
약점으로 내게 덫을 놓았다. 본문 중에서.

 

 

라일라는 랄라
아스마의 고약한 아들 내외를 피해 여인숙으로 들어가
‘공주님’들과 지낸다. 이
‘공주님’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 타고난 것인지 오랜 표류 생활 속에서 후천적으로 만들어진 것인지 알 수 없는 라일라의
자유롭고 예술가적 면모가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한다.

 

 

랄라 아스마 할머니의
고약한 아들내외에게 학대를 당하다 도망을 쳐 예전 여인숙의 공주님들과 다시 함께 살기 시작한다.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하더라도 가난을 경험한 적이 없는 라일라에게 아프리카 빈민촌의 생활은 견디기 어렵다. 스페인으로 배를 타고 들어가다 잡히는 아프리카 불법
이민자의 사진을 자주 본다. 사진 속의 불안에 떨리고 운명을 저주하는 듯한 얼굴이 라일라와 겹쳐졌다. 라일라는 그들 중 한 명이
돼 프랑스로 간다.

 

 

스웨덴 학술원은 노벨
문학상의 수상자를 발표하면서
“르 클레지오는 새로운 시작과 시적인 모험, 감각적인 황홀경을 표현하는 작가로 지배 문명 안팎을 넘어 인류애를
탐험하였다”고 밝혔다.

 

 

황금물고기에서도 르
클레지오의 시선이 머무는 곳에는 안쓰러운 인생들이 있다.

넉넉하거나 많이 배운 사람들은 지성과 교양으로 위장한 발톱으로 라일라에게
생채기를 낸다.

그 생채기를 핥아주는 건 언제나 어렵고 괴로운 인생을 사는 사람들.

 

 

라일라는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아니다. 많은 사람들을 스쳐 지나간다. 소설 속에는 많은 사람이 등장해 놀랍도록 현실적인 삶을 보여주지만 책을 덮은
뒤에 누구도 기억에 남지 않는다.

라일라는 그 누구에게도, 그 무엇에도 큰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누구도 손에 힘을 주어 붙잡지
않는다. 그녀는 모두와 함께 헤엄치고, 모든 것을 그저 헤엄쳐 지나간다.

랄라 아스마 할머니를 잃은 라일라는 엘 하즈 할아버지를 만나고,

자매 같은 후리야와 멀어지면 시몬느와 가까워지고,

시몬느가 사라지면 새라가 나타난다. 남자친구 노노를 떠나면 벨라를, 장 빌랑을
만나게 된다.

사람은 끊임없이 사라지고, 그 자리는 다른 사람이 채운다.

기쁨도
슬픔도 끊임없이 대체된다. 라일라의 표류는 서서히 항해로
변해간다.

 

 

우리는 젊었다.
그 누구의 것도 아닌 그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었다. 본문 중에서

 

 

라일라는 어렸을 적
교통사고를 당해 한 쪽 청력을 잃었다.

한 쪽만 들리는 귀로 라일라는
세상과 절반만 소통한다.

라일라는 이 사실을 불편해하지도, 이상하거나 슬프게 여기지도
않는다.

오히려 이따금씩 들리지 않는 한 쪽 귀 뒤로 편안히 숨어든다.

 

 

어차피 사람 사이의
완전한 이해나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완전한 이해나 소통을 기본값으로 생각한다.

인간이 외롭고 불행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 대상에 대해 결핍감을 지나치게 크게 느끼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다. 인간은 외롭고, 불행하다.

그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다면 조금 덜 외롭고 덜 불행할 수 있을텐데.

 

 

라일라가 하킴의
할아버지 엘 하즈를 만나면서 라일라의 항해의 목적지는 자신의 뿌리가 된다.

 

 

그는 예언자
마호메트와 가장 먼저 기도에 헌신했던 그의 종 빌랄에 대해 말했다.

헤지라
이후 예언자 마호메트가 아이샤의 팔에 안겨 숨을 거두었을 때,

빌랄은 아프리카로 돌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밀림을 헤매다가 만난 큰 강을 따라 내려가 대양의 연안에 이르렀다.

엘 하즈는 빌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그 일이 자기 가족에게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 했다.

그 때마다 하킴은 바닥에 앉아서 빨려 들어가듯
귀를 기울였다.

그 후 나는 빌랄의 이야기를 결코 잊지 못했다.

내게 있어서 그것은 또한 나 자신의 이야기였다. 본문
중에서

 

 

라일라의 표류에 잠시
잠깐 동행하는 이 불안한 젊음들은

때로 해지는 파리 거리를 내려다 보며

건물 옥상에 모여 악기를 연주하고 노래를 부른다.

 

 

책을 읽으면서 너무나
선명했던 한 장면.

밤이 내린 파리에서 울려 퍼지는 노노의 북소리,

하킴의 산자소리,

시몬느와 라일라의 노래소리.

이들의 뿌리이자 검은
대륙의 소리,

그 날것의 소리가 귀가 아닌 심장으로 들려왔다.

라일라가 소리를 듣는 바로 그 방식으로.

 

 

라일라는 서서히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키를 돌리기 시작한다.

 

 

잠시, 아주 잠시
믿지 못할 행운이 라일라를 찾아오기도 한다.

팡파레를 배경음악으로 깔고
‘오오, 기구한 운명을 이겨내고

고통을
음악으로 승화시킨 눈물겨운 인간 승리의 음악가,

그 이름은 라일라’가 되기 직전,

표류라는 천형은
라일라에게 열병을 선물한다.

열병에 걸린 라일라는 나머지 한 쪽의 청력마저 잃어버린다.

 

 

라일라가 나머지 귀의
청력마저 잃어버리는 과정은 슬프게 그려지지 않는다.

라일라는 괴로워하지도 안타까워하지도 슬퍼하지도 않는다.

이마저도 생의 한 단계로서,
이제껏 그래왔듯, 지나쳐 간다.

 

 

세상의 소리와 완전히
단절되었지만 라일라는 이미 물리적 소리의 무의미를 몸으로 체득한 뒤다.

그리고 이제 자신이 시작된 곳으로, 모든 것이 시작된 곳으로
돌아가기로 한다.

 

 

고향을 빼앗긴 채
아랍과 프랑스, 미국을 떠돌던 소녀는 마침내 아프리카로 돌아간다.

그저 한 사람의 개인일 뿐인 동시에 억압받는 모든 사람들, 여성과
자연, 비문명의 상태이기도 한 그녀는 먼 곳을 돌아 마침내 자신의 뿌리로 돌아온다.

표류를 마친 황금 물고기는 처음으로
불안과
이질감이 없는 충만하고 평온한 어머니의 바다를 헤엄친다.

 

 

더 이상 멀리
갈 필요가 없다. 이제 나는 마침내 내 여행의 끝에 다다랐음을 안다.

어느 다른 곳이 아니라 바로 이 곳이다.

말라붙은 소금처럼 새하얀
거리, 부동의 벽들, 까마귀 울음소리.

십오 년 전에, 영겁의 시간 전에, 물 때문에 생긴 분쟁, 우물을 놓고 벌인 싸움,

복수를
위하여 힐랄 부족의 적인 크라우이가 부족의 누군가가 나를 유괴해 간 곳이

바로 이곳이다.

바닷물에 손을 담그면 물살을 거슬러 올라가 어느
강의 물을 만지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 사막 먼지에 손을 올려 놓으며, 나는 내가 태어난 땅을 만진다,

내 어머니의 손을
만진다. 본문 중에서

 

그리고
험한 바다와 폭풍우의 기억이 없는 나의 성장은 더디고 지난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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