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전 보도…의미의 과잉?

 교수님이 강의실에 들어와 한 폭의 수묵화를 펼쳐 보입니다.

"무엇이 있습니까?"

"물고기가 보입니다. 잉어 같습니다."

"또 무엇이 있습니까?"

"바위와 수초도 있습니다."

"그것밖에 없습니까?"

"…"

"무엇이 있냐고 물었지 무엇이 그려져 있냐고 묻지 않았습니다."

"아, 물! 물이 있습니다. 잉어가 살아있고 수초가 곧추서 있으니 물이 있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붓으로 그려져 있지 않아도 헤엄치는 잉어와 흔들리는 수초가 물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사회과학은 이렇게 감춰진 ‘물’을 유추해내는 일입니다."

 

  위의 강의는 저의 21년 전 추억입니다. 어떤 현상을 마주칠 때마다 이 가르침을 되뇌곤 했습니다.

  그런데 기자가 되면서 그림을 보는 입장이 아닌 그리는 입장이 됐습니다. 신문을 만들어 독자에게 선보이는 게 제 일이니까요. 하지만 이 가르침은 여전히 유효했습니다. 내가 붓을 들어 물을 그린답시고 덕지덕지 그림을 망치고 있지는 않은지 항상 고민하니까요. 제목을 달 때, 주어진 ‘팩트’를 어떻게 묘사해야 독자가 이면의 의미까지 유추할 수 있을까 고민했습니다.

  그러면서 경계했던 것은 ‘의미의 과잉’이었습니다. 잉어와 수초가 물을 증명하듯, 팩트를 파고 들면 의미가 보입니다. "자, 이 의미는 이거요"라고 단정하는 것은 촌스러운 저널리즘이라 생각했습니다.

 

  한국 축구가 그리스를 멋지게 꺾은 다음날, 모든 신문쟁이들은 월요일자 신문을 어떻게 만들지 머리를 싸맸을 겁니다. 결과가 다 알려진 상황에서 그 감동을 이어가야 하니까요.

  한 신문은 ‘달라진 태극전사’에 초점을 맞췄고 다른 한 신문은 ‘달라진 한국축구’에 초점을 맞췄습니다.

  전자는 태극전사들이 축구를 즐기고, 자신감이 넘치며 영리하다고 분석했습니다. 완전히 새로운 세대라는 것이죠.

  후자의 신문은 ‘뻥축구’와 백패스가 없어졌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예전 경기와 비교한 통계데이터도 제시했습니다.

 

  둘 다 신문을 만드는 전형적 기법입니다. 하지만 어느 쪽이 더 신뢰가 갈까요? 저는 후자였습니다.

  전자의 경우, 박주영이나 기성용이 축구를 ‘즐기는’ 신세대라는 설명은 아마 맞을 겁니다. 그런데 ‘만약 그리스에게 졌다면 이런 분석을 했을까’라는 의문이 들었습니다. 의미부여 자체를 위한 의미부여. 즉 의미의 과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반면 뻥축구와 백패스가 줄었다는 것은 경기를 본 사람이라면 "맞아 진짜 그랬어"하고 맞장구를 칠 겁니다. 게다가 통계까지 나왔으니 자신의 ‘축구 감상 수준’에 은근한 자부심도 느끼겠죠.

  뻥축구가 없어졌다는 ‘팩트’에서 자신감이 충만한 선수들이라는 ‘의미’는 바로 유추됩니다. 굳이 해석을 붙이지 않아도 독자가 알아챕니다. 그렇게 알아채는 게 ‘떠먹여 주는’ 계몽주의적 신문보다 더 기분 좋을 겁니다.

 

  밴쿠버 겨울올림픽을 거치면서 사람들은 피겨스케이팅 박사가 됐습니다. 김연아의 몸짓을 ‘무용’ 정도로 보던 사람도 이제는 그 몸짓이 ‘과제 수행’이며 포인트를 얻기 위한 사투임을 알게 됐습니다. 그러면서 찰나의 ‘포인트 상실’에 흔들리지 않는 김연아가 얼마나 강심장인지도 알게 됐습니다.

  만약 언론이 김연아에 대한 미사여구로만 지면을 꾸몄다면 그 이면의 ‘강심장’과 ‘강한 체력’은 알려지지 않고 그저 ‘아름다운 선수’로만 남았을 겁니다. 진정한 찬사는 ‘팩트’에서 나왔던 것입니다.

  과유불급. 제가 가장 좋아하는 한자성어입니다. 오버하지 않고 흥분하지 않는, 쿨한 신문을 꿈꿔 봅니다.

카테고리 : 잡설

댓글(3) 그리스전 보도…의미의 과잉?

  1. 푸치 says:

    저 역시도 달라진 한국축구와 감독의 리더십에 초점을 맞춘 기사들이 돋보였다고 생각해요..그건, 경영학에서도 통할 수 있는 거니까요..좋은 글 잘 봤습니다..^^

  2. sar says:

    저도 이번 그리스전을 보면서 실력이 업그레이드 된걸 느꼈었는데 구체적으로 무엇이 좋아진지 몰았었죠
    뻥축구와 백패스가 줄었다는 글에 무릎을 탁 쳤습니다.

  3. noel says:

    ‘OO세대’라는 의미부여하기는 G세대에서 끝났어야 한 것 아닌가 싶어요. 독자들의 공감을 얻은 언어가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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