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화법'은 편집기자를 흥분시킨다

  박근혜 한나라당 전 대표는 ‘짧고 굵게’ 말한다. 단순한 단어나 토씨도 그의 입을 거치면 뭔가 중요한 의미가 있어 보인다. 발언 타이밍과 메시지, 비유가 무게감을 갖기 때문이다. 과거 의미심장한 수사(修辭)로 명성을 날린 김종필 전 총리(대표작으로 ‘자의반 타의반’이 있다)를 능가한다는 평이다.

  그래서 편집기자들은 ‘박근혜는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대로 제목거리’라고 수군댄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발언이 터졌을 때 편집기자는 수많은 ‘제목거리’를 놓고 고민하게 된다.

  13일자 조간신문도 그랬다. 박 전 대표는 정부가 세종시 수정안을 발표한 다음날인 12일 기자들과의 ‘복도 대화’에서 단 몇 마디로 수정안 반대 의지를 강력히 보여줬다. 편집기자는 예외 없이 그의 발언을 따옴표 씌워 1면 제목으로 삼았다.

  사실 특정인의 말 자체를 제목으로 삼는 것은 그 말을 해석하는 제목보다 더 어렵다. 핵심 내용을 포함한 적절한 대목을 선택해야 하고(잘못 선택하면 ‘신문 입맛에 맞춰 발언을 거두절미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발언자의 캐릭터와 뉘앙스를 살려야 하고(실패하면 무미건조해진다), 말이 간결하고 임팩트가 있어야 한다(이 점에서 박 전 대표는 ‘제목 뽑기’에 최적인 화법을 구사한다).

  13일자 신문들이 선택한 ‘박근혜 제목’은 비슷하면서도 유의미한 차이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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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먼저 박근혜 전 대표의 주요 발언부터 살펴보자. 발언 순서대로 정리했다.

① “수정안은 원안이 다 빠지고 플러스 알파밖에 없다”

② “결과적으로 국민과의 약속을 어기고 신뢰만 잃은 것이다”

③ (충청 여론이 수정안에 우호적으로 돌아선다면?) "저는 분명히 입장을 밝혔다. 변함이 없다. 달라질 게 있겠느냐"

④ “(정부가) 저한테 설득하겠다고 해서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라고 한 것인데 말뜻을 못 알아듣는 것 같다”

⑤ “국민과의 약속을 지키자고 하는 것을 제왕적이라고 한다면 제왕적이라는 이야기를 100번이라도 듣겠다”

⑥ “그 때 약속할 때는 얼마나 절박했느냐”

 

한겨레 “원안 다 빠지고 +α만 남아”

  한겨레는 ①번 발언을 온전히 옮겨 놓았다. 세종시 수정안에 대한 직접적인 평가다.

  수정안 발표 다음날 박 전 대표의 첫 반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적절한 선택이다. 정부가 그렇게도 공들인 수정안을 한 마디로 뭉개버렸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 한 문장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그래서 어쨌다는 거야? So What?’이라는 질문에 답이 약하다. ‘원안은 물론이고 플러스 알파를 할 생각을 해야 한다’는 박근혜의 예전 발언을 기억 못하는 독자라면 헷갈릴 수 있다. ‘다 빠지고’는 부정적 뉘앙스인데 ‘플러스 알파’는 뭔가 좋아보이기도 하니까.

  편집기자도 그걸 알았나보다. 그래서 “국민과 약속 어기고 신뢰 잃어”라는 ②번 발언을 부제목으로 받쳐줬다. 그러면 확실히 ‘강한 비판’의 메시지가 살아난다.

  같은 맥락에서 ①과 ②를 합친 제목을 단 곳도 있다. 세계일보는 “원안 버리고 플러스α만… 신뢰 잃어”, 경향신문은 “+α만 남은 수정안 국민 신뢰만 잃어”라고 달았다. 하지만 두 제목 모두 ‘원안은 다 빠지고’라는 구어체의 맛을 살리지 못한 아쉬움이 남는다.

 

국민일보 “국민과의 약속 어기고 신뢰잃어”

동아일보 “국민약속 어기고 신뢰만 잃어”

  ②번 발언을 옮긴 신문은 국민일보와 동아일보다. 이날 발언 중 가장 준엄하게 정부를 꾸짖는 대목이다. 이 제목은 메시지가 단순하게 이해된다는 미덕이 있다. ‘아, 박근혜는 MB와 여전히, 더욱 강력하게 각을 세우는구나’하고 쉽게 상황이 파악된다.

  그런데 좀 식상한 감이 있다. 약속이나 신뢰는 항상 박 전 대표가 강조했던 단어. 수정안이 나온 직후라는 시간적 특수성이 와 닿지 않는다. 숲을 보여준 대신 나무를 놓쳤다고 할까?

  또 두 신문의 제목이 약간 차이가 나는 것도 재미있다. 둘 다 제목의 글자 수를 압축하기 위해 토씨를 생략했다. 국민일보는 ‘만(only)’을 포기했고 동아일보는 ‘과의’를 없앴다.

  ‘Only’가 들어가면 문장이 단호해진다. 밋밋한 문장에 악센트를 줄 수 있다. 동아일보는 그 맛을 놓치지 않았다. 그런데 ‘대(對)국민 약속’도 아닌 ‘국민약속’은 좀 이상하다. 국민요정이나 국민여동생도 아니고 국민약속이라니. 이왕이면 한 글자만 더 넣어서 ‘국민과 약속’정도로 했어도 훨씬 좋았을 것이다.

 

조선일보 충청 찬성 높아져도 내 입장 불변”

  조선일보는 ③번 발언을 썼다. 이건 수정안의 장래에 대한 예측을 담고 있다. 지금까지 정부가 ‘수정안 발표 → 충청 민심 호전 → 박근혜 설득’이라는 시나리오를 그렸다면 이 제목은 그 기대가 어그러짐을 보여준다. 정치 공학적으로 가장 의미 있는 제목이다.

  하지만 뭔가 강렬함이 떨어진다. ‘if’가 들어가는 조건 문장은 분석적이고 친절하지만 적나라하게 지르는 느낌이 약하다. 실제로 이 제목은 박 전 대표의 직접 화법이 아니라 기자의 질문(충청 찬성 높아지면?)에 박 전 대표가 답변(달라질 게 없다)한 것을 편의상 따옴표에 넣은 것이다.

  편집기자의 고민이 눈에 선하다. 의미를 짚을 것이냐 임팩트를 줄 것이냐. 영원한 숙제다.

 

중앙일보 "제왕적이라는 말 100번도 듣겠다"

  중앙일보는 ⑤번을 택했다. 자신에 대한 친이 측의 비판을 받아치는 자극적인 멘트다. 박 전 대표의 결의를 보여주는 데는 최적의 선택이다. 임팩트 최강이다.

  그런데 이 멘트만 달랑 1면에 있다는 게 문제다. So What? 수정안에 대해서 뭐라고 평했는지 알 수가 없다. 또 정두언 의원이 ‘제왕적’이라는 표현으로 박 전 대표를 비판한 사실을 모르는 독자에게는 뜬금없는 제목일 수 있다.

  그러나 기사를 읽으면 그런 의문은 다 풀린다. 또 독자는 전날 TV 뉴스를 접했을 가능성이 크므로 이정도 ‘생략’은 되레 조간신문의 경쟁력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즉 제목만 놓고 보면 편집 문법에 맞지 않지만 맥락을 따지면 수긍이 가는 제목 선택이다.

  제목의 자체 완결성이냐, 맥락을 감안한 생략이냐. 이는 독자의 수준을 어떻게 가정하고 신문을 만드느냐의 문제이기도 하다. 골치가 아프다.

  한편 이 ⑤번 발언은 조선일보와 경향신문이 3면 해설에 가져다 썼다. 중앙일보는 해설면에 조선일보가 1면에 쓴 ③번 발언을 썼다.

 

아까운 멘트 "말뜻을 못 알아듣는 것 같다"

  ④번 멘트는 중앙일보가 해설면에 소제목으로 쓴 것 외에 제목으로 쓰이지 않았다. 의미가 똑 부러지지 않고, 왠지 비아냥처럼 들리기도 해서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런 멘트가 ‘박근혜 화법’의 독특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지난해 10월 31일 박 전 대표는 세종시 수정안을 꺼낸 정운찬 총리를 겨냥해 "총리께서 정말 뭘 모르시는거다"라고 말한 적 있다. ‘나의 프레임’을 정해 놓고 그 프레임을 외곽에서 흔들려는 상대를 향해 정말 기분 나쁜 말을 툭 던져놓는 것.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신뢰만 잃었다"나 "제왕적이라는 말 100번이라도 듣겠다"보다 더 기분 나쁠 것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을 겨냥했던 ‘참 나쁜 대통령’ 발언도 비슷하다. 상대방의 속은 뒤집고 지지자로부터는 강한 공감을 얻는 ‘구어체 중의 구어체’다.

  뭐 그렇다고 이 ④번 멘트가 제목이 돼야 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제목의 ‘메시지’라는 측면에서 많은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뉘앙스’라는 측면에서, 게다가 화자가 박근혜라면, 이 멘트도 그냥 넘길 것은 아니었다.

카테고리 : 편집은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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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3) '박근혜 화법'은 편집기자를 흥분시킨다

  1. harrison says:

    일일이 손으로 만든 꼬라쥬같은 작품.
    김 편집자의 열정이 뚝 뚝 묻어나네…
    그네공쥬님, 바로 메타포가 단순명쾌하지….
    근데 이번 베팅은 넘 배수진이네
    옆 참모들이 잘 챙겨줘야 할 것 같은데….
    시각 시야 시선 전쟁일쎄,,,,,

  2. 운영자 sa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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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디젤의 힘 says:

    박근혜 전대표의 짧고 강렬한 한 마디는 뭐니 뭐니 해도 “참 나쁜 대통령” 인것 같습니다.
    영어로 따지면 요즘같으면 초등1, 저 학교다닐때면 중1 수준의 단어로 겁나게 강렬한 메시지를 전했던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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