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라이시 가즈후미, <서른다섯, 사랑>

                                                  

 

 

 

"엄마, 미안해.""엄마, 외톨이로 죽게 해서 미안해. 계속 원망해서 미안해."미호의 마지막
대사를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왠지 모를 서러움과 사람이 이렇게 용서를 하고 화해할 수도 있구나 하는 감격이
뒤섞인, 사실 딱히 그 정체를 알기 힘든 눈물이.하지만 그녀는 살았고, 사랑을 했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했으며, 살아 있는 여자가
되었다.어쩌면 그건 그녀의 엄마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주고 간 선물인지도 모른다.그녀도 나도 이제 그 사실을
안다.그건 유지 말대로 그녀도 ‘마음의 용’을 키웠기에 가능했던 일.나도 그런 ‘마음의 용’을 키울 수
있다면.’서른다섯, 사랑’이란 제목이 너무 진부해진다.원제인 ‘마음에 용을 새기고’가 매우 명확하게 와닿는
시점.하지만 그 ‘사랑’이 단순히 이성(理性)에 관해 한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나, 그리고 내 인생.죽어서
없애고만 싶어던 자신의 삶을 서른다섯에 다시 시작한 미호처럼.<!–"

 

 

-

책을 읽고 나서 담당 편집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물었다.

남자란다.

"진짜? 아니, 남자가 어떻게 이렇게 여자 심리를
디테일하게 묘사할 수 있어?"

우리 두 사람은 작가가 게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일본 문화에 정통한 사람 말에 의하면 게이가
맞단다.^^;;

뭐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닐 테지만…

그냥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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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데츠야, <경영학 무작정 따라하기>

 

 

 

 

‘경영학
무작정 따라하기’

일단
큰 제목부터 본다.

‘무작정
따라하기’의 명성은 익히 들어서 알고 있다.

다만
따라 해야 되는 대상이 내 취향이 아니어서 한 번도 마주해본 적은 없다.

하지만
‘경영학’이라면 다르다.

어쨌거나
‘학문’에 대한 호기심은 일어나니까.

 

근데
뭔가 애매하다.

‘CEO를
꿈꾸는 당신의 선택!’ 같은 메인 카피나 ‘경영 공부가 10년 뒤, 당신의 미래를
결정한다’라는 서브 카피는 이 책이 ‘실용서’에 가깝다는 느낌을 주고 있다.

 

사실
표지 자체도 그렇지만, 그거야 뭐 길벗이라는 출판사가 원래 가지고 있는 속성이라고
생각하면 문제되지 않는다.

길벗이라면
원래 IT를 비롯한 컴퓨터나 기술 쪽이 강세인 출판사로 알고 있다.

그러한
특유의 분위기가 경제경영서로도 이어져 표지만 봐도 대충 감이 온다.

 


어차피 다 부차적인 문제다.

중요한
건 책이 보유하고 있는 ‘질’이다.

과연
‘경영학의 세계’는 어떠할까?

호기심으로
책장을 넘긴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머릿속에 의문점이 떠돈다.

 

"이거
정말 경영학에 대한 책 맞아?"

 

 

경영학
: 사업에서 좋은 결과를 내기 위해 회사 등의 조직이 갖고 있는 장비나 도구, 돈이나
정보 그리고 인재를 잘 활용하여 모두가 역할을 분담해 매끄럽게 일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학문

 

 

책에
나온 경영학의 정의를 보면 이 책은 그 점을 잘 따라가고 있는 책이다.

그럼에도
뒤통수가 뜨끈뜨근한 느낌.

경영학이란
학문을 평소에 접할 수 없어서 잘은 모르겠지만, 경제와 경제학이 다르고, 사회와
사회학이 다르고, 음악과 음악학이 다르듯이 ‘경영’과 ‘경영학’도 다르지 않을까?

적어도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경영’학’이라기보다는, ‘CEO를 꿈꾸는 당신의 선택!’이라는
메인 카피에서 오는 ‘실용적인 팁’적인 느낌이 강했다.

 

원래
경영학이 그렇다, 라고 하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건
내가 모르는 영역에 대한 무지를 탓할 밖에.

하긴
책 소제목에도 ‘경영학은 실용학문!’이라고 씌어져 있던가?

 

어쨌거나
실용서로 본다면 이 책은 어느 정도 합격점이다.

실제
직장생활을 하면서 궁금해하는 점에 대한 정리가 매우 잘되어 있다.

순서
정리나 이해를 돕기 위한 책의 구성도 만족도가 높았다.

지은이를
보니 원서가 일본서인 듯한데, 책을 읽다가 느끼는 건 일본 쪽 서적들은 이런 디테일한
정리를 매우 잘한다는 점이다.


책도 그런 책 중의 하나다.

물론
자주 보이는 교정상의 오류나 번역투의 문장이 정리가 안 된 점은 안타깝지만.

(영문이나
숫자 폰트가 좀 거슬린 면도 없잖아 있다. 근데 이건 뭐 직업병이라 치고…)

 

하지만
기초적인 조직관리부터 시작해 최근에 대두되는 경영전략이나 운영전략까지 흐름을
따라올 수 있었던 점은 매우 좋았다.

최근
경제경영과 관련한 기사나 책을 볼 때면 모르는 용어도 많았고, 생소한 분야도 많았는데
이 책을 통해 어느 정도 그런 점이 상쇄되긴 했다.

아마
기초적인 자료로 두고, 필요할 때 사전처럼 찾아가면서 읽어도 좋으리라.

 

게다가
감수자의 역할이 꽤나 컸을 듯한데, 책을 읽다 보면 이런 부분은 원서에 없었을 텐데
하는 곳이 있었다.

대부분
국내 실정에 관한 이야기인데, 감수자가 없었더라면 그저 그런 번역서로 그쳤을 책이
좀 더 내용이 있고 국내 독자에게 쓸모 있어졌다는 느낌이 들었다.

관련해서
자료도 찾아보는 데 수월할 것 같고.

 

다만
아무리 입문서라고 하지만 너무 수박 겉핥기 식으로 흘러간 것은 아닌지 하는 아쉬움이
든다.

최근에
MOT, 즉 ‘기술경영’에 대해서 배우는 중이라 관심이 많아서, 책 표지에 ‘MOT 핵심
개념까지 완전 정복!’라는 구절에 끌리기까지 했는데, 실제적으로 책을 읽어보니
내가 얻은 정보 수준만큼도 안 되어서 실망했다.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더 깊이 있게 들어가 더 많은 정보를 줄 수 있을 법한 것들이 간단하게 정리만
하는 식으로 넘어간 듯해서 아쉽다.

근데
이 또한 일본서가 가지고 있는 한계라면 인식하기 편하다.

일본서를
보면 목차나 소제나 책 구성은 굉장히 잘되어 있는데, 내용이 그에 따라 주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그나마
이 책은 그 정도로 함량 미달이 아니다.

다만
조금 아쉽다 정도?

 

정리하자면,
이런 류의 책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지만 전철을 타고 오며가며 편안하게 읽었다.

얼핏
지루할 수도 있는 내용인데, 여러 사례와 도표를 이용해 어렵지 않게 술술 읽히는
맛이 있었다.

사실
좀 더 깊이가 없어서 아쉽다고는 했지만, 최소한 그런 점 때문에 책 읽기에 대한
거부감은 없었던 것 같다.

재미를
위한 것이든 정보를 위한 것이든, 일단 책읽기의 미덕은 ‘잘 읽히기’일 테니까.

다소
여러 가지 아쉬움을 덮어두자면, ‘회사 경영’에 알고 싶은 사람, ‘직장 구조’에 대해
알고 싶은 사람, ‘조직 구성’에 대한 흥미를 느끼는 사람 등 조직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
기초적인 정보로서 유용하게 쓰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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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이현, <달콤한 나의 도시>

 

 

 

 

책 제목과는 달리 그 도시는 달콤하지 않았다.위장을 찌르는 듯한 쓴맛과 매운맛이 있었을 뿐.하긴 그래서
달콤함이 더욱 간절한 것인지도 모르겠다.세간을 들썩이게 했던, 그래서 드라마로까지 만들어졌던 이 소설은 내 관심사가
아니었다.표지와 표4 문구로도 모든 걸 짐작했으니까.게다가 한국적 새로운 ‘칙릿’의 지평으로 평가받은 이 소설에 대해서 구구절절
써내려간 기사를 하도 많이 봤으니까.이미 알려질 대로 알려진 대상에는 흥미가 가지 않는다.그러던 어느 날
오후.교통사고 후유증에서 벗어나지 못한 몸이 극도의 피로감을 호소하던 어느 날 오후, 나는 외근 나갔던 총무과 직원이 돌아오기가 무섭게
회사 2층 참고자료실 소파로 향했다.제법 큰 창이 있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햇볕 한 자락 들지 않는 그곳에서 나는 잠을
청했다.한 시간 가량 후 눈을 떴는데, 누워 있는 소파 눈높이에 맞춰서 책이 보였다.달콤한 나의 도시.익숙하면서도
생경해 보이는 그 제목에 나는 그냥 손을 뻗었다.한동안, 지금은 빈 정 대리 님 자리에 그 책을 놓아두었다.그리고 주말을
맞이해 그 책을 집으로 들고 왔다.지금 난 방황하고 있다.분명 패는 내가 쥐고 있다.그런데 상대가 먼저 패를
내보야만 한다.그 패를 기다리는 일이 너무 지난해서 조금은 그런 일상에서 도망치고 싶었다.가벼운 소설 하나, 그런 일상을 조금쯤
잊게 해주겠지.그런데 이상하다.솔직히 말하자면, 이 이야기, 전혀 새롭지 않다.내가 살아오면서 구구절절 읊었던
이야기가 다 들어 있다.하하.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나뿐은 아니었구나.다만 ‘콜럼버스의 달걀’처럼 누군가는 그런 이야기를
멋들어지게 포장해서 세상에 내놓고 돈도 벌고 명성도 쌓는다.차이점은 바로 그것.물론 내게 그 포장의 기술이 없으니 당연한 거
아니냐 한다면 할 말은 없다.어쨌거나 내 이야기인 듯한 소설을 보고 있자니 별로 유쾌하지 않았다.공교롭게도 오은수나 나나
비슷한 직업에 비슷한 고민에 비슷한 사회 생활을 영위하고 있다.내 현실을 가상의 이야기에서조차 확인사살당하는 기분, 별로 좋지
않다.같은 나이인 우리는 닮았지만 또 그만큼 다르다.그 사실을 확인하고 부정하면서 나는 오은수에게 짜증을 냈다.내
안의 일부가 툭 떨어져 나온 것을 멀건히 바라보며 다시 주워담는 느낌이 들었다.결국 내 인생도 그러하니까.아, 그래도 난
오은수처럼 유유부단하지 않다.최소한 내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 알고, 그대로 선택하려고 노력하고, 내가 선택한 것에 책임지려
노력하니까.무엇보다 난 아직 결혼에 목매는 사람이 아니며, 아직 누군가를 만날 때 이런저런 조건을 재거나 계산하지
않는다.’사랑’에 관한 한 아직 난 명확하다.그래, 어줍잖은 희망찬가를 부르며 끝내는 것보다는 낫다고
위안한다.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른두 살의 미혼 여성의 인생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서울의 맛’은 아닐 것이다.오은수가 그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서울의 맛’을 어떤 식으로 변화시켜갈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나는 다르리라고, 아니 다르다고
되뇌어본다.나는 오은수가 아니니까.서울은 오은수만의 도시가 아니다.

 

 

ps.

본문의
‘지금’은 2009년 10월경 상황입니다.

물론
지금 상황도 그때와 별반 다르지 않군요.

혼돈은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것도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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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모토 후미오, <플라나리아>

 

 

 

스물네 살이라는 젊은 나이에 유방암에 걸려 가슴 한 쪽을 잘라내야만 했던 하루카.병을 기화로 그동안 아무 의심
없이 걸어온 삶의 궤도를 이탈해버린 그녀는, 몸이 다 나아도 원래 궤도로 돌아오지 못한다.스스로를 ‘사회 부적응자’라고 말하는 그녀의
소망은 다음 세상에서는 ‘플라나리아’로 태어나는 것이다.그러나 누구도 그런 그녀를 이해하지 못한다.그녀를 사랑한다고 하는
애인마저도.그 속에서 그녀는 부유한다.그녀의 인생은 어디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저, 사회 부적응자예요"라고
말하는 그녀는 실상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몸은 다 나았지만 여전히 암 치료를 받고 있는 그녀는, 약물 치료에 의한
구토감과 무기력함을 견디며 살고 있다.하지만 아무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주지 않는다.그래서 그녀는 외롭고, 더더욱 사회
부적응자가 되어간다.아니, 그녀가 사람들과의 관계를 거부하고 있다는 것이 맞는 말이리라.삶이 그런 것이다.누군가
‘외로움’을 이야기한 적이 있다.누군가 옆에 없어서 생기는 외로움이 아닌, ‘인간 본연의 외로움’을.그는 죽을 때까지 그건
없어지지 않을 거라고 했다.나 역시 동감한다.태어날 때도 혼자고, 죽을 때까지 홀로인 인간은 원래 ‘외로운
존재’이니까.가족이 있어도, 애인이 있어도, 사람들 속에 있어도 외롭고 그 관계가 귀찮았던 하루카는 바로 그런 우리의 표상이
아닐까?그녀가 ‘플라나리아’로 환생하고 싶었던 건 단순히 없어진 가슴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수술로 복원은 했지만, 가슴
같지 않은 모양에 젖꼭지가 없는 흉한 한쪽 가슴 때문은 아니리라.재생 능력이 있는 플라나리아처럼 스스로도 재생하고 싶었으리라.
잘라내고 잘라내도 끈질기게 살아나는 플라나리아처럼 그렇게 살고 싶었으리라.그런데 그렇다고 해서 그 감정이 해결이
될까?모르겠다, 어차피 그건 그녀의 그리고 나의, 우리의 숙제일 터이다.그런 면에서 같이 실린 <사랑 있는
내일>의 스미에가 나는 참으로 부러웠다."굳이 말하자면 뇌가 남들하고 조금 다른가봐요.""손금 보러 오는 사람들 말이죠.
모두 불안해하고 외로워하고 뭔가에 굶주려 있어요. 그렇지만 나는 왜 그런지 그런 감정을 도무지 모르겠더라고요. 불안할 것도 없고 외로울 것도
없고 항상 그저 맹맹해요, 전부 다. 전에는 내가 이상한 사람인가 보다 하고 고민도 했는데, 잘 생각해보니까 뭐 그리 특별히 이상할 것도 없고
손해볼 것도 없대요. 좋은 성격을 타고 났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그렇게 말하는 그녀가 정말이지 부러워서, 단 한순간이라도 좋으니 나도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그리고 편안함과 여유로움을 뿜어내는 그녀의 에너지를 훔쳐오고 싶었다.그녀가 지니고 있는 무한한
자유까지도.이 외에도 <네이키드(Naked)> <어딘가가 아닌 여기> <죄수의 딜레마> 등 남은
세 단편에서도 ‘외로운 사람들’이 존재한다.일만 열심히 하다가 남편에게 이혼당하고 숨어사는 여자, 가족들과의 단절로 외로운 가정주부,
남자친구와는 섹스하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으면서 연애 감정이 없는 남자들과는 편한하게 섹스하는 직장 여성까지.그녀들의 삶은 모습은
묘하게 이지러져 있고, 그 안에서 힘겹고 괴로워한다.하지만 작가는 어느 누구의 삶에도 마침표를 찍어주지 않는다.이건 야마모토
후미오의 모든 작품이 담고 있는 특색이기도 한데, 아마도 우리의 삶이 현재 진행형이기 때문이리라.어차피 삶이란 살아가면서 묻고 나름의
답을 찾아가는 과정일 테니까.그래서 사람들은 오늘도 각자의 길을 간다.나 역시도.사는 동안 아마도 그런 의문과
감정은 끊이지 않을 것이며, 그에 대한 싸움도 끊이지 않으리라.그렇더라도 조금은 행복하고 싶다.나는 그저, 행복하고 싶을
따름이다.그건 외로움을 잊는다거나 욕망을 외면한다거나 아픔을 참는다거나 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그럼에도 행복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뜻한다.끝나지 않은 소설 속 인물들의 삶은 이제 내게로 넘어왔다.완결의 마침표가 찍어지지 않은 그 후반부를 써내려가는
것은, 이제 야마모토 후미오가 아닌 나 자신의 몫이 되었다.기꺼이 써내려갈 수 있는 용기를 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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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레이그 하비, <넥타이를 맨 바퀴>

 

 

“자기가 정말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는 사람은 3%정도밖에 안 된대. 적어도 너는 그 3% 안에 속해
있잖아.”글쎄, 그 3%라는 수치가 신빙성이 있는지는 지금도 의문이지만, 그때 선배는 그렇게 나를 위로했다. 난생 처음 내가
선택한 길에 의문이 들고, 이제라도 다른 길로 갈 수 있지 않을까 고민했던 그 시절에.물론, 그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선배의
위로가 먹혔던 어쨌든 간에 나는 늘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게 박봉에 격무에 시달리는 내 삶에 유일한
희망이고 의지였고 즐거움이었다. 다소 내 직업에 불만스런 기색을 내비쳤던 부모님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도 결국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는
이유였다.하지만 어느 새 나는 그 ‘좋아함’을 잃어버리고 있었다. 경험이 쌓일수록 내가 처리해야 할 일은 늘어났으며,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순수함은 장사가 돼야 살 수 있다는 절박함으로 바뀌었다. 또다시 나를 괴롭히는 고민. 이전과는 비슷하지만 무게감이 다른 고민.
다른 길로 가고 싶지만 이제 나는 할 줄 아는 게 이것밖에 없는데, 지금껏 이 길만 보고 달려왔는데…….그럴 때 그레고리와
조지프를 만났다.일단 ‘그레고리’란 이름이 주는 친숙함이 마음에 들었다. 카프카의 『변신』을 꽤나 좋아하는 나로서는 바퀴벌레의 이름이
그레고리란 사실이 꽤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물론 『변신』의 그레고리는 불행했다. 생계를 책임지는 의무를 버리고 싶어 한 그에게 남겨진 건
냉대뿐이었으니까. 하지만 『넥타이를 맨 바퀴』의 그레고리는 재치 있고 영리하고 기지가 넘쳤다. 어쩌면 『변신』의 그레고리가 긍정적이고 낙천적
성격을 가졌다면 아마 지금의 그레고리 모습이지 않았을까?그런 그레고리를 만난 건 조지프에게 행운이었다. 그 만남의 시초야 유쾌하지
않았던 게 사실이지만, 아무렴 어떠랴, 조지프가 그 나이 먹도록 살아오면서 그레고리만 한 친구를 만난 적은 없었을 테다. 아니, 어쩌며 그만 한
스승을 만난 적도 없었을 것이다. 조지프에게 그레고리는 스승이자 동료이자 친구였으니까.내게도 그랬다. 그레고리가 오랜 세월 바퀴
종족이 터득한 지혜를 알려준 사람은 조지프였지만, 그 배움을 훔쳐본 자로서 얻는 게 참 많았다. 특히 그 시점에 내가 갖고 있던 불안하고
고민하는 마음에 충분히 도움이 되었다. 조지프는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과연 마음에 들었을까? 그게 애초에 그가 하고 싶어 했던
일일까? 아마도 아니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레고리가 왜 이 직장을 택해서 들어왔느냐 하는 물음에 조지프는 ‘지금껏 찾은 최고의 직장’이라는
답변을 했으니까. ‘지금껏 찾은 최고의 일’이 아니라. 그렇다고 그게 흠은 아니다. 우리들 대부분이 그러니까. 적성이나 취향 같은
건 고려하지 않고 대충 점수에 맞춰 대학엘 가고, 대충 학점이나 현재 내 조건에 맞는 직장에 취직하고, 그러다 안 되면 때려치고 공무원 시험이나
준비해 볼까 하고……. 어쩌면 조지프도 우리와 같은 평균의 인간에 불과할 뿐이다.그런 그가 그레고리를 만나서 일하는 태도가
바뀐다. 심지어 “지금까지 직장에서 보낸 최고의 날이었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레고리가 말한 바퀴의 성공 법칙이나 그것을 실천해 가는 조지프의
모습도 좋았지만, 조지프가 만족한 표정으로 린들리에게 저런 말을 건넨 순간이 내겐 가장 멋진 장면이었고 마음에 들어와 박혔다. 조지프는 이제
일을 즐길 줄 아는 사람이 되었고, 그를 기반으로 새로운 목표를 설정할 줄 아는 사람이 된 것이다!아아, 이래서 사람들이 자기
계발서나 처세서를 많이 읽는구나. 어차피 알고 있던 사실이었지만 새삼스러웠다.어쨌거나 나는 좋아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조지프보다 못할 이유는 없다. 내가 힘들 때마다 버텨온 원동력이 바로 그것 아니었던가? 다만 내 이상과 회사의 경영 차원에서 상충하는
문제들이 나를 힘겹게 하고, 난 거기서 선택하려 했던 것이다. 알고 보면 두 가지는 상충하기도 하지만 합치될 수도 있는 부분이다.
나는 그걸 간과하고 있었다. 조지프는 아주 훌륭하게 자신을 뛰어넘어 또 다른 경지를 발견했다. 단순히 바퀴의 성공 법칙을
체득했다고 해서? 아니다. 무엇보다 자신의 의지가 있고 변해 가려는 욕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레고리도 그런 조지프의 의지를 알아봤던 것은
아닐까? 아무리 “내가 당신에게 성공의 법칙을 알려주겠소”라고 해도 조지프가 싫으면 그만이니까.물론 바퀴의 성공 법칙도 귀담아
들어야 한다. 사실 직장인이라면 구구절절 고개를 끄덕이며 마음으로 동감할 것이다. 더욱이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없어진 요즘 세상에서는.
그레고리가 조지프에게 전수해준 바퀴의 성공 법칙은 직장 내에서 일어나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대입하고 있다. 스스로의 마음을 추스르는 것부터
조직 내의 암투를 딛고 살아남는 실질적인 방법까지. 그리고 조지프는 훌륭히 해냈다. 덕분에 나도 그 뒤를 따라가면서 얻은 게
많았다. 어떻게 보면 참 시점이 묘하다. 왜 하필 그 시기에 이 책을 만나게 되었을까? 어차피 우리의 인생은 언제 어디서 어떤
일이 생길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저 그 시기에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는 점이 흔히 말하는 인연이라면 인연일는지도.일단 마음을 좀
편하게 먹고 싶다. 나도 조지프처럼 할 수 있을 테니까.★ 아주 작은 틈새라도 엄청난 기회가 될 수 있다.지금
결심한 이 마음이 어쩌면 작은 계기일지 모르지만, 이후에 어떤 결과를 가져다줄지는 나조차도 모른다. 그저 노력하는 마음만이라도 잃고 싶지 않다.
최소한 나는 조지프보다 조건이 훨씬 좋은 건 확실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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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환, <에비터젠의 유령>

 

 

【로비 김이환. 1978년생. 경희대 경제학과를 졸업한 후 글쓰기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2001년 봄 하이텔 시리얼을 통해 본격적인 글쓰기를
시도한 첫 작품 「에비터젠의 유령」에서 영감을 얻어 구상한 것이  바로 『 에비터젠의 유령』이었다(「에비터젠의 유령」은 이 책의 1부에
해당한다).가장 영향을 많이 받은 작가는 로저 젤라즈니와 로버트 하이라인이고, 좋아하는 작가들로는 더글러스 커플랜드, 백민석, 버지니아
울프, 레이먼드 카버, 조앤 롤링, 존 버닝햄, 앨리너 파전 등이 있다. 판타지, SF, 동화, 추리,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등 좋아하는
모든 장르를 아우르는 글을 쓰는 것이 작가로서의 목표다.본명보다 많이 사용하는 닉네임 ‘로비’는 영국의 팝스타 로비 윌리엄스(Robbie
Williams)에서 따온 것이다.】책 날개에 찍혀 있는 작가의 프로필을 본다. 활자화되어 박혀 있는 글자들은 ‘내가 과연 이
사람을 알고 있는 것일까?’ 하는 생경함마저 느끼게 한다. 그에게 책 출간 관련 이야기를 들은 건 참으로 우연한 계기였다.
언제던가, 아는 사람의 차를 타고 가던 중 그가 자기가 책을 낸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북하우스에서 진행하는 판타지 소설 공모에 입상을 했고,
그래서 책을 내기로 했으며 조만간 나온다는 이야기였다. 그의 이야기에 비추어보면 아직 데뷔도 안 한 신인에겐 괜찮은 조건이었다. 아마 추측건대,
북하우스는 그에게 준 계약금만큼의 부수도 팔지 못했을 것이다. ‘책 나오면 꼭 사볼게.’ 그날 책에 관한 이야기는 그걸로 끝이었다.
몇 달 후, 책이 출간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 이야기를 들은 지 거의 1년여쯤 지나서야 난 일 때문에 나간 어느 대형서점에서
그의 책을 찾아내었다. 『 에비터젠의 유령』. 표지는 평범했고, 편집은 다소 불만이었다. 하지만 표지 날개에 찍힌 그의 프로필은 내게 낯선 그의
모습을 일깨웠고 순간 질투심마저 들었다. 난 그의 글솜씨와 정신세계를 좋아하고 또 경외한다.그는 내가 아는 사람 중 최고의
글솜씨를 가졌다. 그가 풀어내는 글은 단 한 줄이라도 무언가가 존재한다. 더욱이 그는 창작뿐 아니라 온갖 종류의 글을 잘 쓴다. 비평, 감상,
수필, 시, 때로는 그냥 내뱉는 넋두리까지. 그에겐 재능이 있으며, 그를 뒷받침 할 만한 세계도 있다. 풍부한 독서력, 장르를 가리지 않는 영화
감상, 어떤 게 절대 취향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음악적 취향, 그리고 남과 다른 독특한 가치 체계. 그에겐 낭만도 있었으나 시니컬함도
존재했고, 고차원의 세계와 저속한 물질 세상이 적절히 자리잡고 있었으며,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평범하고
어떻게 보면 특이하고… 사실 그는 특이한 사람에 가깝지만, 또 그렇게 느끼고 있지만 그만큼 평범한 사람이기도 하다. 그런 그의
첫번째 작품. 장르는 판타지. 굉장히 매력 있었다. 그런 기대를 배신하지 않듯『 에비터젠의 유령』은 상당히 매혹적이었다. 아니,
그 이상이었다. 긴박감에 숨을 멈출 수 없었고, 등골이 써늘한 느낌 때문에 몸이 떨려오기도 했다. 원래 2권짜리 분량을 출판사의 요청으로
1권짜리로 줄였다고 하는데, 두 권 분량으로 기획된 애초의 내용은 어땠을까 하는 호기심이 일 정도로 나는 빠져들었다.솔직히 난
판타지 소설에 대해서 잘 모른다. 기껏 읽는 거라고 해봤자 이우혁 씨의 작품과 『묵향』뿐이니… 이우혁 씨는 문장이 투박할지 몰라도 소설에
들인 공이 대단하고 읽는 이에게 무언가 생각하게 하는 힘이 있다. 『 묵향』은 소설적 구성은 다소 엉성하지만 재미만큼은 확실하다. 이 정도
가지고 내가 판타지 소설에 관해 무엇을 말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확실한 건 『 에비터젠의 유령』은 내 마음에 꼭 들 만큼 멋진 작품이다.
이 소설은 모든 게 혼재되어 있다. 작가의 말처럼 SF, 판타지, 컴퓨터 게임, 낭만주의 시대의 그림, 애니메이션, 영화,
로맨스, 신화, 유머, 독설, 패러디, 퀴어, 호러 등 많은 요소가 산재되어 있다. 이는 작가의 풍부한 식견에도 기인한다. 그는 많은 방면에
관심을 가지고 있으며 열성적이다.  게임의 세계, 현실의 세계, 유령의 세계 그리고 작가가 만들어 낸 소설의 세계. 기본 얼개는
이 네 세계다. 이 네 세계는 서로 연관을 가지고 있으며, 심지어 작가인 로비조차 실명으로 소설 안에 들어가 있다. 이 소설 자체가 이야기 속에
이입되어 있는 것이다. 어디서부터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환영인지 확실히 경계를 그을 수 없는 이들 세계는 그 영역이 교집합도 되었다가
부분집합도 되었다가 여집합이 되기도 한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전체집합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런지 상당히 SF적인 느낌을
주는 소설이다. 굳이 비견하자면 영화 <매트릭스>가 될 수 있을까? 하지만 이는 소설이 가진 느낌이 그렇다는 것일 뿐이지 그 궤는
전혀 다르다. 이 소설에선 오랜 시간 죽지 않는 존재들이 나온다. 언제 어떻게 태어났는지도, 언제 어떻게 죽을지도 모르는 존재.
그들은 수천년간 수많은 모습으로 자신들의 생을 이어왔다. 작가는 그들을 ‘유령’이라 칭한다. 그들은 현실 세계에 살고 있지만, 실제로 그들이
사는 건 유령의 세계다. 거울 속 세상 같은 곳. 스캇, 잭, 에이프릴은 이런 자신들의 세계에 만족하고 살고 있지만, 빅터는 실제의 현실로
들어오기 위해 몸부림친다. 하지만 그조차 작가인 로비가 만들어 낸 세계다. 그들은 작가인 로비가 쓴 소설 속의 인물들이었으며,
로비 역시 그런 자신의 소설 속에 휘말리게 된다. 어느 게 진짜인지 애매모호한 세계와 상황. 어쩌면 제목인 ‘에비터젠의 유령’은 이러한 면을
대변해 주고 있는 제목일지 모른다.’에비터젠의 유령’은 ‘negative’의 유령을 뒤집은 말이다. negative가
evitgen으로 된 것이다. 이에 대한 설명조차 소설 내에서 작가인 로비와 로비의 팬이 그의 소설을 이야기하면서 밝혀지는데, 딱 어울리는
제목이라고 생각한다. negative를  evitgen으로 뒤집는 순간, 그 안에서는 무수한 뜻이 파생되었다. 그건 이 소설과도 딱 어울리는
이미지다. 그 뜻이 작가가 의도했던 것이든 내가 스스로 생성해 낸 것이든. 그래서 어찌 보면 이 소설은 난해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난  『 에비터젠의 유령』이 가지고 있는 난해함마저 좋다. 마치 영화 <얼굴 없는 미녀>를 볼 때 느꼈던 감정과 같다고나 할까?
난해함을 난해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각자가 가지고 있는 의미로 받아들인다면 훨씬 더 풍부하게 감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게 다소 작가의 의도와
빗나간다 하더라도 로비 김이환은 개의치 않을 것이다. 난 적어도 그가 그 정도의 아량은 갖추고 있는 사람임을 알기에.긴박한 호흡과
호기심을 끄는 얼개들 때문에 나조차 그에 따라 급박하게 읽어 내려갔다. 그 이후로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난 지금, 여유를 가지고 다시 한 번
느긋하게 유영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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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

 

 

사랑이란 여성들에게 더 열정적인 느낌이다. 사랑이란 옷으로 온몸을 휘감고 화려하게 춤추는 여인들에 비한다면 남성들의 느낌은 깊은 호흡으로
빨아들였다가 내뱉는 담배연기와도 같은 느낌이다. 불나방처럼 사랑의 불꽃 속에 무작정 몸을 던지는 이미지가 여자에게 강하다면, 남자는 그
안에 갈무리를 해두고 조금씩 토해 낸다고 할까? 물론 일반적으로 그려지는 이미지로 인한 것일 뿐 절대치는 아니다.  그런데
카프카의 <밀레나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면서 난 카프카에게 이러한 열정적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그 당혹감과 새로움이란!
소설 속에서 투영되는 카프카의 이미지는 무겁고 쓸쓸하고 불안에 가득 찬 존재다. 아마 실존주의의 신봉자이면서도, 결국 그의
태생적 신분 때문에 평생 이방인 같은 느낌으로 떠돌아야 했던 카프카 그 자신의 인생으로 인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애초에 마르크스가
주장했던 휴머니즘에 가까운 사회주의 사상을 가지고 있던 그였기에 사회 속의 개인은 그에게 항상 진지한 문제였고 고민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의 소설은 대부분 사회 고발적이고 그 주인공들은 외롭고 불안한 심리상태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그 모든 소설 속의
주인공들이 카프카의 분신이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그가 열정이 담긴 연애편지라니, 그것도 유부녀에게!  여전히
불안감에 허덕이는 카프카의 모습이 존재했지만, 밀레나에 대한 카프카의 열정만큼은 매우 뜨거웠다. “편지하지 마세요”라고 말해 놓고 금세
돌아서서 그러지 말라고 말하는 카프카. 나도 모르게 슬며시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너무나도 솔직한 사랑의 감정. 카프카에게 이러한
원초적(?) 감정이 있으리라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었던가. 카프카의 목소리가 너무 가감 없이 드러나는 이 편지는 사랑을 할 때의
카프카를 여실히 드러내 보여주고 있다. 때로는 애절하고 때로는 환희에 찬 바로 카프카 그 자신의 생생한 감정을
말이다.이러한 카프카의 사랑을 받았던, 카프카보다 14살 연하의 유부녀 밀레나가 순간 매우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만큼
카프카에 대한 애정 또한 깊어졌다. 그건 이미 작가 카프카에 대한 경의가 아니다. 카프카란 한 개인에게 주어지는 나의 관심과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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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변신>

 

 

인간은 얼마만큼 인간으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참으로 우스운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작품을 다 읽고 문득 떠오른 생각이
이것이었다. ‘본질과 현상.’ 본질이 현상보다 우선하는 것일까, 현상이 본질보다 우선하는 것일까? 카프카식으로 말하자면 본질이든 현상이든 그
위에 서 있는 것은 존재(실체)다. 실존주의 작가인 그는 본질보다 실존의 우위성, 보편보다는 개체를 중요시할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내가 여기서
말하는 본질과 현상은 단순히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을 두고 하는 생각이다. 단순히 벌레로 변했다고 해서, 즉 외적인 모습이 달라졌다고 해서 그가
갖고 있는 인간의 성품이라든가, 지적 능력까지 벌레 취급을 당해야 하는 것일까? 하지만 반대로, 기본적으로 인간의 성품이나 지식을 갖고 있더라도
그것을 제대로 표현하거나 실행하지 못한다면 그는 인간으로서 인정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흔히 하는 말이 있다. “사람 구실을 해야 사람이지.”
이는 어찌 보면 딜레마이기도 하다.사건의 시작은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신한 것부터다. 사람이 벌레로 변한다는 설정은 우화적이면서도
동화적이다. 처음에 오비디우스의 <변신>처럼 몽환적인 꿈을 갖고 있던 본인에게는 더욱 생경하고 섬뜩한 느낌으로 다가왔었다. 하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벌레로 변한 실체만 갖고 사고(思考)를 전개해 나가면 안 될 것 같다. 그레고르가 벌레로 변한 것은 그의 반복적이고 허탈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의 표출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렇다면 그 욕망의 표출이 왜 하필 벌레였던 것일까? 소설의 전개로 봐서
알 수 있듯이 그 욕망, 아니 그레고르에게 있어서 소박한 꿈에 불과했던 그 탈출은 사회의 질서에 반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그레고르
가족에게 한정시켜 보아도 그것은 그들 가족의 안녕과 평화를 깨뜨리는 일이었다. 실제적인 노동력을 제공했던 그레고르가 더 이상 그 능력의 수행을
하지 못하자 가족들은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다. 이를 사회로 확대시켜 보자. 인간은 끊임없이 노동력을 제공하여야 하고 그로 인해 사회가 유지될 수
있다. 따라서 그레고르의 희망이 벌레라는 실체로 변환되었다는 것은 그의 소망이 현실세계에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일상의 일탈이기보다 사회질서,
혹은 사회구조에서의 일탈이었던 것이다.이러한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이 가족들은 그레고르를 멀리하게 되고, 출근에 늦은 그레고르를
만나러 온 지배인은 벌레로 변한 그의 모습을 보고 혼비백산해서 도망가게 된다. 그러나 지배인의 경우는 좀 다른 생각을 해보았다. 지배인도 혹은
그레고르와 같은 소망을 갖고 있던 것은 아닐까? 그런데 그 소망의 표출이 그런 끔찍한 벌레로 나타난다면, 즉 사회로부터 제약을 받고 내몰리는
상황에 지배인은 겁을 먹고 도망간 것은 아니었을까? 자신도 그러한 꿈을 꾸면 그레고르와 똑같이 되고 말리라는 불안감과 공포. 비약이 심하긴
하지만 그레고르가 갖고 있던 외판원이란 직업을 보면 단순히 그레고르만 그러한 일상생활에서의 일탈을 꿈꾸었을 것 같지는 않다. 현대인들도
반복적이고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고 싶은 생각을 한다. 생긴 모습도 제각기 다르고 가치관이나 사는 방식, 경험도 각각 다른 인간이지만 때로는
공통된 꿈을 꿀 수 있는 것도 인간이 아닐까? 그것을 얼마만큼 실행에 옮기고 표출하는가는 개인의 따라 다른 양상으로 나타나겠지만
말이다.하지만 결과적으로 그레고르의 가족에게는 아무 일도 생기지 않았다. 그레고르의 노동력 부재로 금세 몰락해 버릴 것 같았던
잠자 씨 가족은 그레고르의 아버지와 여동생 그레테의 새로운 일자리로 점차 안정을 찾아 나간다. 그리고 더 나아가 아름답고 젊은 그레테를 통해
잠자 내외는 또 다른 삶의 기대를 충족시킨다. 사회란 곳도 마찬가지이다. 그레고르를 잃으면 다른 방향의 대안을 찾아 유지시켜 갈 수 있다.
문제는 이러한 사회구조 안에서 인간은 하나의 구조물로밖에 인식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레고르의 죽음은 개인의 이상과 인간의 사회적 역할 중
인간의 사회적 역할이 승리했음을 의미한다. 결국 이 작품의 핵심은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환경(사회)의 허구를 인식하고 폭로하는
것에 있다. 이는 카프카가 실존주의자라는 면에서 더욱 맞물린다. 더욱이 독일에서 유태인으로 살아야 했던 카프카에게 있어서 조국이라던가
공동사회라는 관념보다는 이방인, 국외자라는 신분에 대한 자각이 더욱 크게 작용했다고 한다. 이러한 면을 종합해 볼 때 카프카는 사회가 개인을
억압하고 구속하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고, 그러한 개인에 대한 사회적 억압을 참을 수 없었는지 모른다. 본인은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시하는 면이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동체에 의해 개인의 자유라던가 권리가 침해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는 않는다. 어차피 홀로 이 세상을 살아가지 못하는
인간으로서 공동체 안에 소속되어 살아가야 한다면 그러한 공동체가 개인의 자율성을 지지하고 계발시켜주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거대한 사회구조 안에서 인간의 사회적 역할에 대한 이러한 카프카의 인식은 마르크스적 가치관을 담고 있는 듯하다. 기계적인
인간관계에서 단순히 사회의 한 부품으로밖에 인정받지 못하는 인간의 소외에 대한 인식은 그러한 맥락과 함께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카프카는 그러한 자신의 이상이 현 사회구조에서는 실현될 수 없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확실히 꼬집어 이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내용을 따라가면서 카프카가 이 작품을 쓰게 된 이유가 자신의 실존주의 철학과 사회의 기본구조가 어긋남을 몸소 체험하고 그러한
괴리감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패배자의 의식은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그러한 사회 속에서 한
사람의 지식인으로서 한 번 돌을 던져보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그 의도는 훌륭한 성과를 거둔 듯하다.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당시의 소설 속 시대적 배경과 현대가 다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이 현대에서도 타당성이 있다는 것이다. 약 100년의 시차이지만 빠르게 변해가는
현대의 상황을 볼 때 이는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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