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샌델, 정의란 무엇인가

 

 

 

정의란 무엇인가.

책 제목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그러다 우스갯소리 하나가 생각이 났다.

‘정의’란 말에 ‘정의(義, justice)’를 떠올리면 문과생, ‘정의(, definition)’를 떠올리면 이과생이라던.

 

아마 책 표지를 보지 않고서도 나는 자연스레 ‘정의(義, justice)’를 떠올렸을 것이다.

내가 문과생이라서가 아니라 뒤에 자리잡고 있는 ‘무엇인가’라는
단어가 짐작케 해주니까.

우리는 ‘정의(, definition)’를 원론적으로 궁금해하지 않는다.

왜 그렇게 ‘정의하는 것일까’라고 의문을 가져도 그 ‘정의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의(義, justice)’는 다르다.

그건 가치 판단의 영역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돌아보면 ‘정의(義, justice)‘는 우리에게 참 친숙한 단어다.

어릴 때 본 만화영화를 떠올려보라.

"정의의 이름으로 널 용서하지 않겠다"부터 "정의는
승리한다"까지, 정의의 사도들이 TV에 차고 넘치다 못해 TV 밖 현실에서까지
정의로운 용사를 흉내내던 시절.

그렇게 정의는 우리 가까이 있었다.

 

그런데 우리는 그 ‘정의(義, justice)’가 무엇인지 알기는 했을까?

그때의 "정의가 승리한다"라는 말은 ‘선한 것이
이기고 나쁜 것은 지는’ 이른바 ‘권선징악’의 의미가 강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고 보면 어릴 때 자주 즐겨보던 <콩쥐팥쥐>나
<헨델과 그레텔>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렇다면 이것도 정의가 승리한 것인가?

 

「명사」

 

「1」진리에 맞는 올바른 도리.

¶ 자유와 정의와 진리/정의의 사도/정의를
위하여 싸우다.

「2」바른 의의(意義).

「3」『철학』개인 간의 올바른 도리. 또는 사회를
구성하고 유지하는 공정한 도리.

¶ 분배 정의/사회의 정의를 실현하다.

「4」『철학』플라톤의 철학에서, 지혜ㆍ용기ㆍ절제의
완전한 조화를 이르는 말.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와 있는 ‘정의(義, justice)’의 뜻은 이렇다.

우리가 익히 보고 들어왔던 정의라는 것은 1번과 2번의
뜻이 강할 것이다.

그리고 마이크 샌델의 이 책은 3번과 4번의 뜻이 강한 듯 보인다.

그가 책 내내 강조하고 있는 ‘정치철학’이란 용어도 그렇거니와
책에서 말하는 정의는 ‘사회 구성원의 합의 혹은 결정’에 가깝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가 생긴다.

사회 구성원 모두의 생각이 ‘일치하는’ 합의나 결정은 존재하기
어려운 것이니까.

 

마이클 샌델은 그러한 문제를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아니, 설명이라기보다는 같이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고 있다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 모르겠다.

 

사실 처음 이 책을 봤을 때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제목에 "아,
정의란 이런 것이고 저런 것이고 어쩌고 저쩌고 그래서 저래서…"라는 식의
정의에 대한 구구절절 가르쳐주는 책인 줄 알았다.

그래서 조금은 정의가 무엇일까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도
싶었다.

그런데 의외로 이 책은 ‘무엇이 정의인가’ 확답을 내리지 않는다.

같은 사안에 대한 두 가지 상반된 의견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자꾸 생각하게 만든다.

 

물론 각 사안에 대해서 어느 누가 어떤 말을 했고, 그래서 어떤
면이 쟁점인지 배경지식을 충분히 설명한다.

하지만 그 설명을 들었다고 해서 ‘정의란 이런 것이다’라고 명확하게
와닿지는 않는다.

보다 원론적이고 형이상학적 이야기가 반복되고 있기에.

누군가 20년 넘게 강의해온 이것을, 단순히 책 한 번 읽고 나서
다 알았다고 하기엔 너무 오만한 거 아닌가?

 

그냥 이렇게도 생각할 수 있고, 저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데,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스스로 도덕적 딜레마에 빠지는 경험도 했고, 대학 시절 ‘지식사회학’이나
‘정치사회학’ 시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도 느꼈다.

하루에 한 장(챕터)씩 읽고 다음 날 회사 직원들에게 책의 내용을
요약해주면 어떻게 생각하느냐 질문도 던져봤다.

그런 날들이 굉장히 신선했다.

경리팀 차장님은 너무 어려운 거 아니냐고 했지만, 왠지 그래서
매력 있었다.

바쁜 생활 속에서 이런 간혹 넋 놓고 사는 기분이었는데 이런 사고(考)를 통해서 왠지 살아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관련한 여러 저작들을 읽고 싶다는 욕구마저 일었다.

 

다시 책 표지를 들여다본다.

‘하버드대 20년 연속 최고의 명강의’라는 헤드 카피가
보인다.

그리고 책 제목과 지은이 밑에 서브 카피가 보인다.

 

전 세계의 석학들은 왜 정의에 주목하는가?

하버드대 학생들은 정의를 어떻게 배우는가?

 

책을 읽고 나니 그 이유를 알겠다.

전 세계 수재들이 모인다는 하버드.

이 강의를 직접 체험할 수 있는 그들은 행운아다.

어쩌면 그들이 그럴 만한 능력을 갖추었기에 그 능력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한다면 지나친 망상일까?

 

그러면서 아쉬움 하나.

우리에게는 왜 이런 강의가 없을까.

실제 강연 장면을 썼다는 표지를 보면 강의실에 수백 명은 족히
되어보이는 학생들이 보인다.

아마도 우리네 대학이었다면 학점을 잘 주는 교수의 강의였겠지.

그 생각이 떠오르니 문득 씁쓸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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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규,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박민규.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꽤나 유명해면서 작가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거기까지 일 뿐 나는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

어느 순간부터 소설에 흥미가 없어진 나는, 아니 정확히 말해서 내 또래 여자들의
삶을 대변하는 소설 말고는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 편이 옳겠다.

그래서 나는 별다른 흥미가 없었다.

 

그런 내게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가 들어온 것은 자주 보는 영화잡지를
통해서였다.

"그래도 날 사랑해 줄 건가요?"라는 메인 카피.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의 이야기라는 자못 구미가 당겼다.

 

물론 나는 바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그때의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생각과는 다른 생활에 나는 조금씩 무기력해지고 있었기 때문에…

 

몇 개월이 지나고, 친한 동생의 집들이가 있어서 간 날, 거기서 나는 이 책을
다시 마주했다.

시끄럽게 웃고 떠들다가 그의 책장에 꽂힌 이 책을 보게 되었다.

 

"이거 재미있어?"

"괜찮아요. 읽어볼 만해요."

 

그 말에 나는 책장에서 그 책을 꺼내들었다.

시끄러운 사람들 틈 속에서 책을 꺼내든 나를 보고 그는 책을 빌려주겠노라고
했다.

알았다고 했지만, 나는 궁금했다.

못생긴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과연 어떨까.

어쩌면 일반적인 속물 근성에 의한 호기심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급하게, 일단 줄거리라도 대강 파악하자는 생각에 매우 빠르게 책장을
넘겼다.

 

아련한 80년대의 추억.

하지만 그때의 나는 초등학생이었으므로 당시의 유행이니 음악이니 하는 것은
몰랐다.

더러 유명한 가수의 이름은 나도 익히 알았지만, 그때의 내게는 이지연이나 박남정이
절대 지존의 우상이었고, 나는 꼭 그만큼의 초딩 수준이었으로 아는 바가 없다.

하긴 내 기준에서 그건 중요한 게 아니지…

 

기묘한 그 둘의 사랑.

아니, 셋이라고 해야 하나?

그와 그녀, 그리고 요한.

 

한눈에 봐도 절로 못생겼다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여자를 사랑하게 된 남자.

그런 그를 사랑하게 된 여자.

그리고 둘 사이에 끼인 요한.

 

각자는 각자의 사연이 있었고, 아픔이 있었다.

그래서 서로를 알아본 것일까?

 

사실 소설의 형식은 맘에 들지 않았다.

글쓰기 형식도 편집도 문체도 내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럼에도 숨가쁘게 읽어내려간 건 두 사람의 사랑과 요한이 가지고 있는 정신세계에
매료되었기 때문이다.

 

얼굴이 못생겼다는 걸 빼면 그녀는 그저 평범한 여자다.

배우를 꿈꿨던 아버지가 정말 유명 배우가 되면서 가족을 떠난 걸 빼면 그는 그저
평범한 남자다.

무명의 배우였던, 그러나 외모는 뛰어났던, 그래서 재벌가의 첩이 되어 살아야
했던, 그러다 그 미모가 빛을 다해 다른 사람에게 그 자리를 내줘야 했던 엄마가
자살한 것만 빼면 요한 역시 평범한 남자다.

그런데 그래서 그들은 평범하지 못하다.

그들의 상처가 어떻게든 그들을 지배하고 있고, 그들 관계에 미묘하게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그들의 관계는 지극히 평범하다.

누구나 한때는 20대의 열병을 앓는 것처럼 그들도 그랬고, 그들의 사랑도 다른
사람들처럼 평범했다.

 

이 평범이란 매우 의미 있다.

 

"나는 그저 평범하게 살고 싶어."

"야,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게 평범하게 사는 거야."

 

친구와 나는 언젠가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그렇다.

평범은 말과는 달리 매우 어렵다.

문득 이 세상에 완전히 평범하게 사는 사람이 있을까, 하는 의문도 가져봤다.

그래서 내게 그들의 평범함은 예사롭지 않았다.

그냥 내 주변의 이야기, 혹은 내 이야기일 수 있었으니까.

그녀의 외모가 어떻든 간에, 그와 요한의 상처가 어떻든 간에.

그들은 남들과 비슷한 20대 청년들이었다.

 

그런데 또 그래서 슬펐다.

아니 애잔했다고 말하는 편이 옳겠다.

어쨌거나 그 사랑으로 그들은 성장하기 시작한다.

한 번도 사랑받아본 적 없는 그들.

그러나 그들의 관계가 그들을 서서히 변화시킨다.

그건 굉장히 놀랍고 멋진 일이다.

 

물론 우리네 일상은 소설처럼 진행되지 않는다.

영원한 사랑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건 우리도 누군가를 만나고 헤어지고 또 만나고 헤어지면서 성장해
간다는 점일 테다.

소설 속처럼 죽을 때까지 지속되는 사랑은 어느 소수에게 허락된 축복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사람은 살아간다.

그 과정에서 변하고 성장하고 진화하면서.

때로는 퇴보할 때도 있겠지만, 그 역시 전진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한다.

 

사랑해요.

사랑해.

 

담담한 그들의 마지막 어조.

그들의 사랑은 잔잔한 호수와도 같았다.

서서히 서로에게 물드는, 저녁녘의 석양처럼.

아마 서로에게 사랑한다고 말했을 때에도 그런 느낌이지 않을까.

한없이 행복하지만 또 담담한 어조.

마치 어느 따사로운 봄날의 햇볕 같은.

 

그 순간 내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흘렀다.

 

 

-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더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부러워하지 않는

당신 <자신>의 얼굴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는 그것이

우리의, 아름다운 얼굴이라고 생각합니다.

 

‘작가의 말’ 중에서 굉장히 마음에 와닿은 부분이다.

최근 나도 그런 얼굴을 갖기 위해 노력 중이다.

누군가 내게 남겨준 그 얼굴을 지키기 위해.

 

 

 -

어젯밤부터 오늘 오전까지, 12시간 안에 틈틈히 급박하게 읽어내려간 책.

약간의 차이를 두고 다시 읽어봐야겠다.

이번엔 정독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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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vs 이성적 분노

 

 

 

 

드디어 <심리수사관 아오이> 제3권을 읽었다. 어느 기사에서인가 그런 글을 봤다.
<미스터리 극장 에지>가 없었다면 <심리수사관 아오이>는 탄생하지도 않았을 거라고. 이 말은 <아오이>가
<에지>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걸 뜻한다. 프로파일링 전문가가 여자 형사라는 점과 그 수사관을 도와주는 기이한 능력의 소유자들.
둘은 비슷한 포맷을 유지하고 있다. 단 <에지>에서 보여주었던 프로파일링이라는 것이 <아오이>에서는 좀더 본격적으로
나타난다. 그런 면에 있어 난 아오이가 에지보다 한 수 위라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아오이는 뭔가 심오하다. 굉장히 철학적이고 난해해서 휴식의
의미의 독서(?)보다는 고난이도의 이해력을 요구한다. 이는 <할아버지와 나의 사건수첩>이라는 만화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초등학교
5학년생이 주인공인 추리만화치고는 고도의 사고력을 요한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훨씬 더 매력이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그런데 이번
아오이 3권을 읽으면서 문득 이 만화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과 상당히 맞닿아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처음 읽었을 때는 잘
몰랐다. 그냥 이번에도 역시나 어렵구나 하면서 이해되지 않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나 다시 읽었을 때 문득 <죄와 벌>이 스치고
지나갔다. 특히나 ‘사상범죄’라는 제목을 가진 에피소드. 난 이게 <죄와 벌>의 또 다른 변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
아니면 작가가 그 소설에서 내러티브를 차용해 온 것인가? 사건의 시작은 아오이에게 온 발신인 불명의 엽서였다. 그 엽서가
아오이에게 도착한 이후로 아오이 주변에 사건이 생긴 것이다. 아무래도 수사관이니 사건이 그녀 주변에 항상 따라다니는 것이 당연지사지만, 이번은
좀 다른 것이 그녀와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피해자란 점이었다. 그녀가 대학 때 사귀었던 남자와 그녀가 고등학생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 하지만
남자의 사랑은 거짓이었고, 친구의 우정은 기만이었다. 남자에게 아오이는 난공불락의 여성을 정복하는 일종의 게임이었고, 고등학생 때의 친구는
그녀를 부려먹는 하녀쯤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안 누군가가 아오이를 대신해 그들을 응징한 것이었다. 아오이를 대신한 ‘그’.
그는 말한다. “진짜로 해로운 건 법에 걸리지 않고 교묘하게 사람을 짓밟고 착취하는 가장 악질적인 죄인이야.” 즉 그는
법으로 해결되지 않는 범죄(?)를 그 스스로의 방법대로 단죄한 것이다. 사실 거짓된 사랑도, 배반된 우정도, 어느 쪽도 법으로 단죄할 수도 없고
범죄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럼에도 그로 인해 사람들은 상처 입고 그로 인해 인생이 변하기도 한다. 이건 단지 예일 뿐이지 우리 주변에 이런 식의
일들은 비일비재하다. 이건 <죄와 벌>에서 라스콜리니코프가 전당포 노인을 죽인 이유와도 상통한다. 오로지 돈만 알고 남을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는 벌레만도 못한 인간. 그런 인간을 죽여서 그 돈으로 더 많은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면 되지 않는가.
아오이도 미지의 ‘그’의 말을 들으며 흔들리는 자신을 발견한다. 아오이 자신도 마음속에 잠재된 어두움이 있다. 아직 그것이
무엇인지 스토리 속에서 발견되지는 않고 있지만, 그건 아오이가 가진 신념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거대한 어두움이다. 따라서 겉으로는 미지의
‘그’의 말을 부정하지만 속으로는 흔들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하지만 라스콜리니코프에겐 ‘소냐’라는 구원의 손길이 있었다.
그녀는 거리에서 몸 파는 여자였지만, 라스콜리니코프는 그녀로 인해 자신의 행동이 죄였다는 걸 알게 되고 자수를 한다. 그런데 아오이는? 그녀는
마음의 경계선이 위태롭다는 걸 스스로 감지한다. 그러나 다행이도 그런 그녀의 마음을 알아 챈 동료들로부터 마음의 안정을 얻는다. 그렇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어찌 되는 거지? 이러한 면이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되는 것은 아닐 터다. 사실 나도 뭐가 옳고 그른지 잘
모른다. 그저 내가 배운 것이 아무리 악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도 인간인 이상 존중받고 보호받아야 한다고 하기 때문에 그러려니 생각할 뿐이다.
그건 본능과는 다른 문제다. 그 사람이 단순히 미워서 증오스러워서 죽이고 싶은 마음과는 다른 것이다. 그건 차라리 인간적(?)이다. 하지만
미지의 ‘그’처럼, 애초의 라스콜리니코프처럼 그런 생각을 가진 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왜냐하면 그들에겐 그것이 ‘절대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들이 가진 생각들이 때로는 맞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난 원칙적으로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이다. 자살 또한
일종의 범죄인 마당에 아무리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같은 인간이 그를 죽일 권리는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건 합법적인 살인일 뿐이다. 그리고
그 사형수가 만약 죽기 전에 자기 죄를 진정 뉘우치고 있다면… 그렇다면 최소한 그 빚을 갚아야 할 시간 정도는 줘야 되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반대의 경우도 배재할 수 없다. 혹시라도 거짓으로 뉘우치고 모범수로 인정받아 출소한 뒤에 자신을 신고했던, 혹은 자신을 체포했던 사람을
찾아가 복수를 한다면? 그렇다면 사형제도가 있는 편이 나은 게 아닌가? 내 생각엔 이에 대한 해답은 없다. 어쩌면 인류 최후의
그날까지 우리는 이 모호한 경계에서 아슬아슬하게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다만 사회라는 거대한 조직 속에서 질서를 지키기 위해서 일종의 체계를
만들고 거기에 순응하는 것일 뿐이다. 즉 그건 외면적인 합의일 뿐이지 속으로 어떤 생각들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만약 미지의 ‘그’나
라스콜리니코프처럼 그러한 것이 ‘절대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겐 법으로 단죄가 가해질지라도 그 자신들은 절대 그것이 잘못임을 깨닫지 못할
테니까. 어쩌면 나는 아오이나 소냐를 통해 구원받은 라스콜리니프 쪽에 가까운 것 같다. 하지만 확실히 모르겠다. 이것 역시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 하는 문제와 마찬가지로 굉장히 원론적이면서도 어려운 문제다. 결국 미지의 ‘그’는 체포되기 전 사고로
죽는다. 아오이에게 의문만을 남겨둔 채. 그리고 그녀는 말한다. “여러 명의 전문가가 그에게 몇 개의 인격 장애, 정신병 등의 이름을
갖다 붙이겠지. 그러나 내 생각은 달라. 왜냐하면 그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은 욕망과 분노 등의 본능적이고 원시적인 것이 아니거든. 그것은 매우
이성적으로 규명해 낸 일종의 철학과도 같은 것임을 나는 알기 때문이다.” 그렇다. 그건 ‘일종의 철학’이다. 그래서 이 에피소드의 제목이
‘사상범죄’인 것 같다. 충동적이거나 감정적인 것이 아닌 철저히 이성적인 사고를 기반해 만들어진 범죄다. 그렇지만 그에겐 이 범죄가 일탈이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건 그만의 해결방식이다. 도스토예프스키는 <죄와 벌>을 통해서 당시 만연하고 있던
이성적, 합리적 사고를 꼬집어 주고 싶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아오이>의 작가 미즈호 미노는 무엇을 말하고 싶은 걸까? 내 생각엔
그녀(그녀가 맞는지 모르겠지만…)의 생각이 어느 정도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맥락을 같이 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미즈호 미노는 알고 있는 것
같다. 겉으로 평범하게 보이는 사람들의 일상이 실제로는 정의와 이성적 분노를 공중곡예 하듯이 오가고 있다는 것을. 나도 언젠가 그런 공중곡예를
알아차릴 날이 오지 않을까? 이 같은 생각을 하니 조금은 무서워졌다. 그리고 내가 사는 이 세상이 너무나 어려워졌다. 어쩌면 내
평생 풀리지 않을 수수께끼일지도 모르겠다.

 

-

2002년 4월 21일에 쓴 글.

요새 <정의란 무엇인가>를 보고 있는데, 이상하게도
그때 읽었던 <심리수사관 아오이> 3권 ‘사상범죄’
편이 자꾸 기억이 났다.

그리고 그때 써두었던 이 글도.

 

오랜만에 어려운 철학적 화두를 접하다 보니 머리가
아프긴 하지만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던지는 화두는
참으로 흥미롭다.

개인적으로 일이 많아서 아직 반 정도밖에 못 읽었는데
얼른 마무리하고 그에 대한 느낌을 써봐야지.

 

우리가 사는 세상은 참으로 어려운 문제가 많다.

어쩌면 어려운 ‘주제’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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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처드 니스벳, <인텔리전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처음 IQ 검사란 걸 해보았다.

그리고 그 검사에서 나의 IQ 점수는 150에 가까웠다.

덕분에 나는 학교에서 운영하고 있는 과학영재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우리 학교는 IQ 점수가 높은 학생들을 ‘과학영재반’이란 이름에
묶어 특별 교육을 실시하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게 그리 달갑지 않았다.

방학에도 일정 기간 학교에 가야했으며, 다섯 살에 한글을 깨우친
것과 달리 구구단은 3학년이 다 되어서야 외울 정도로 수학적 재능이 없었던
나는 수학적 지식이 필요한 실험과 사고를 해야 하는 게 매우 싫증이 났다.

 

중2 때 다시 검사한 나의 IQ 점수는 초등학교 때보다 20점가량 내려가
있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데 묘하게도 나는 그 떨어진 20점가량이 내 수학적 재능의 부족에서
기인했다고 생각했다.

기억에 의한다면 나는 수학적 논리력이 필요한 문제는 깊게 생각하지도
않고 답을 찍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스스로 위안했다.

 

"네가 수학에 재능이 없어서, 싫어해서 공부를 안 했잖아.
그러니 그만큼 떨어진 거야."

 

인정하고 나니 거짓말처럼 그 점수는 아무것도 아닌 게 되었다.

내가 다시 노력만 한다면 깎인 점수는 다시 극복 가능하리라 믿었다.

그랬더니 마음이 편해졌다.

 

그 이후로 나는 IQ 검사를 해본 적이 없다.

다시 IQ 검사를 한다면 마지막 검사 때보다 더 떨어져 있겠거니
짐작은 한다.

하지만 자존심이 상할 것 같지 않다.

내 지능은 분명 어느 한쪽에 특화되어 있으리라 스스로 생각하니까.

 

그런 면에서 리처드 니스벳의 <인텔리전스: 평범함과 비범함의 비밀을 밝힌 문화 지능의 지도>는
내가 어릴 때 생각했던 막연한 추론을 뒷받침해주는 책이다.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 중2 때 떨어진
내 IQ 점수에 대한 내 판단이 단순히 틀린 게 아니었다는 점에서 나는 매우 흥미로웠고
신기로웠다.

 

물론 내 환경이 공부를 하기에 극악할 정도로 나빴던 건 아니다.

산수를 비롯한 수학은 늘 내 골칫덩어리였고, 덕분에 나는 물리나
화학 같은 과목까지 잘하지 못했다.

그런 부족한 점을 나도 부모님도 잘 알고 있었고, 그걸 메우기 위해
어느 정도 노력은 했다.

다만 내가 그 노력에 너무 흥미를 잃어 손을 놓아버린 점에서 그
환경은 어느 정도 내가 만든 셈이긴 했지만.

 

그런데 이 책 읽으면 읽을수록 화가 난다.

과연 ‘지능의 범위’를 어디까지 한정할 수 있단 말인가?

지능과 재능은 동일한 범주에 속하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범주에
속하는 것일까?

"지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라고
주구장창 주장하는 이 책은, 결국 "교육 수준이 높고, 경제 형편이 좋은 가정의
아이들이 IQ가 높다"라는 것으로 귀결되고, 그런 아이들이 "취직을 잘하고
돈을 잘 번다"라는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세상에나!

이제 ‘개천에서 용 나는 일’은 전혀 없겠네?!

 

매우 불편했다.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조기 교육 열풍, 사교육 열풍,
강남 8학군에 대한 인기 등에 대한 근거를 이 책은 제공하고 있었다.

물론 현실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기에 뭐라 반박할 여지는 없다.

하지만 그런 줄서기에 대한 것만이 과연 지능인 것일까?

 

책읽기에 대한 능력과 상관없이 음악적 재능이 있는 아이는?

수학적 사고력과 관계 없이 글을 잘 쓰는 아이는?

글을 못 깨우쳤더라도 바둑을 잘 두는 아이는?

 

아이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재능을 배재해버리고 ‘지능’ 하나에만
몰두해버리는 이 책은, 지금의 우리 교육 현실이 마땅하다라는 근거로 작용할 수
있음에 나는 놀랐고 불쾌했고 씁쓸했다.

여기서 말하는 ‘환경’은 결국 돈에 의해 지배되었다.

물론 다른 대안을 제시 안 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 역시 돈 문제와 결부되어 있다.

저소득층 아이들을 위한 조기 교육이나 과외 학습은 결국 정부가
나서서 할 수밖에 없는데, 그 조차도 예산의 문제고 기득권층의 이해관계와 맞닿게
된다.

순수한 교사들의 열정도 그렇다.

누군가의 희생이 없으면 저소득층 아이들의 지능은 올라가는 데
상당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IQ는 타고나는 것이다, 라는 명제를 신봉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저 각기 특화된 뇌 부분이 다르다고는 생각했다.

그걸 후천적인 방법으로 계발할 수는 있다고 믿었다.

그렇지 않다면 같은 집안에서 태어난 형제들은 모두 IQ 수준이 비슷하거나
지식 수준이 비슷하거나 타고난 재능 또한 비슷해야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공부 잘하는 형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동생이 있듯이.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이룬 성취마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IQ는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라는 사실을 뒷받침하는
무수한 통계와 실험 자료를 바탕으로 한다.

그리고 그 자료들은 모두 의미가 있다.

그런 자료를 모으고 소개하는 것만으로도 "IQ는 타고난 것이다"라는
명제를 반대하는 근거로 이 자료는 매우 훌륭하다.

무엇보다 아시아인과 유태인이 왜 여러 분야에서 높은 성취를 이뤘는지
매우 타당한 근거를 밝히고 있다.

이런 점에서 본다면 아주 훌륭한 조사 자료이자 보고 자료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타난 결론들이 참으로 부담스럽고 불편하다.

문득 생각해봤다.

내가 나중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으면 이런 환경을 제공해줄 수
있는 능력이 되는가?

아이의 IQ가 낮은 건 부모의 지적, 경제적 능력이 낮아서라는 비판을
받게 되면 나는 어떤 대응을 해야 하는 것일까?

내가 생각이 삐뚤어진 것인지 몰라도 이러한 현실 자체가 매우 암담하고
힘겹게 느껴졌다.

 

하지만 "후천적인 노력에 의해 지능지수가 올라갈 수 있다"라는
주장은 외면해서는 안 될 것이다.

‘동기부여’의 측면이라면 경제적 여건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노력
가능하니까.

이 책에 의하면 ‘칭찬이 고래를 춤추게 하는 건 사실’이다.

아이들은 칭찬과 애정을 먹고 자란다.

그리고 이는 단순히 성격이나 EQ뿐 아니라 지능에도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

 

그렇게 본다면 그리 분노할 일도 아닌 듯하다.^^;;;

 

그런데 과연 지능지수가 높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일까?

모두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일까?

차라리 나는 ‘재능’에 주목하고 싶다.

난 아이의 지능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재능 또한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그 범주가 미묘하지만 분명 다르다고 생각한다.

 

읽는 내내 오만가지 잡상에 시달렸다.

그것도 대부분 부정적인.

그런데 그건 내가 반골 기질이 있는 사람이고 전형적인 서민이라서
그렇다면 내 태생의 한계이니 그렇다 치자.

어쨌든 읽는 내내 의미가 없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뭔가 명확하게 정리되지는 않고, 뭔가 잔뜩 숙제만 떠안은
느낌이다.

이제 누군가 이 내가 안은 숙제를 정리해주는 결과를 내주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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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 <최인호의 인연>

 

 

 

어렸을 때 나는 에세이 읽는 것을 별로 내켜하지 않았다.

낯 모르는 사람의 일상을 들여다보는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다.

차라리 친구가 쓴 일기장이라면 모를까, 일면식도 없는 사람의 이야기를
읽는 것은 곤혹이었다.

그래서 에세이류는 선뜻 손이 가지 않았다.

 

그러다 나이를 먹게 되면서 조금씩 에세이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어쩐 일인지 모르지만 이제 남의 이야기를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어째서일까?

 

<최인호의 인연>을 만나는 순간, 나는 그에 대한 답을 어렴풋이
찾았다.

1부를 읽고 난 후에 나는 불현듯 생각했다.

세월의 흐름이 보는 눈을 넓혀주는구나, 라고.

 

그렇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으면서 많은 경험을
쌓다 보니 남들이 주는 세월의 경험과 흔적을 공감하며 받아들일 수 있는 시야가
트인 것이다.

책을 읽으며 나는 내 나이를 실감했다.

여전히 까칠하고 욱하고 삐딱하지만, 이제 남의 이야기에 귀도 기울이고
공감을 표할 수 있는 마음의 시야를 가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과의 인연에 감사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읽는 재미가 있는 글에는 질투가 앞선다.

오랫동안 글을 쓰면서 지내온 사람이고, 그 글로 인해 명성을 쌓은
사람이니 글솜씨야 어쩌면 당연한 노릇이다.

나는 한낱 이름없는 개인일 따름이고.

그럼에도 왜 이렇게 질투가 나는지, 순간순간 책장을 덮어버리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이렇게 글을 풀어내는 솜씨가 내게도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긴 그런 능력이 내게 있었다면 지금의 내 모습은 또 달라져 있겠지.

결국 길의 흐름이라는 것도 ‘능력의 인연’에 닿아 있는 모양이다.

어떤 능력과 인연을 쌓느냐에 따라 수천 수만 갈래의 길이 존재하는
것 같다.

 

글을 읽으며 지나온 내 인연을 아스라히 떠올려봤다.

이 세상의 어떤 인연이 지금의 나를 이끌었을까?

수많은 사람, 수많은 기억이 머릿속에 불현듯 떠오른다.

그리고 반성한다.

나는 왜 그 인연을 지금껏 지켜오지 못했던 것일까.

 

물론 한때는 그런 인연들이 덧없는 것이라 느끼기도 했다.

그래서 왜 나는 그런 인연을 쌓아서 이렇게 괴롭고 아프고 슬픈지
책망한 적도 있다.

하지만 책을 읽고 나선 그 모든 것조차 인연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인연.

그래서 인연은 소중하다.

그게 어느 이름 모를 길에서 만난 이름 모를 꽃일지라도.

 

가슴 알싸한, 그러면서도 희미한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지난날의
인연을 떠올리며, 작가에 대한 질투와 함께 나는 책을 덮었다.

그리고 언젠가 나도 이런 인연의 흔적들을 남길 수 있었으면 하는
소망을 갖는다.

 

그렇지만 지금 중요한 건 지금의 인연들을 한층 더 소중히 여기고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러고 보니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인우가 학생들을
처음 만난 날 한 말이 기억난다.

 

"이 지구상 어느 한 곳에 요만한 바늘
하나를 꽂고, 저 하늘 꼭대기에서 밀씨를 또 딱 하나 떨어뜨리는 거야. 그 밀씨가
나폴나폴 떨어져서 그 바늘 위에 꽂힐 확률. 바로 그 계산도 안 되는 기가 막힌 확률로
니들이 지금 이곳, 지구상에 그 하고 많은 나라 중에서도 대한민국, 대한민국 중에서도
서울, 서울 안에서도 세연고등학교, 그 중에서 2학년, 그걸로도 모자라서 5반에서
만난 거다. 지금 니들 앞에 옆에 있는 친구들도 다 그렇게 엄청난 확률로 만난 거고
나하고도 그렇게 만난 거다. 그걸
인연이라고
부르는 거다."

 

이 책도 아마 그런 인연으로 만난 거겠지.

특히 책 곳곳에 스며든 풍경들을 보면서 그 풍경들과도 인연을 맺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인연을 돌아보면서도 앞으로 새로운 인연을 만나기 위해 떠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간혹 나는 이렇게 글의 힘을 발견하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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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호, <일개미의 반란>

 

 

 

묵은 해가 가고, 새로운 해가 왔다.

그렇다고 해서 일상이 크게 달라지진 않는다.

물론 이때를 기회 삼아 새롭게 마음을 다지곤 한다.

주변 정리도 해보고, 한 해를 돌아보기도 하며, 새로운 계획을 세워보기도
한다.

연말연초를 보내는 모습은 매해 되풀이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매년 같은 행동을 되풀이한다.

어쨌거나 마음을 새롭게 다지는 건 의미 있는 일이고, 잠시나마
그로 인해 힘을 얻어 나아갈 수 있다.

우리의 인생이 그러하다.

 

서점에 깔린 수많은 자기계발서들도 그렇다.

사실 ‘특별한’ 내용은 그다지 없다.

큰 하나의 줄기만 제외한다면 그 곁가지는 비슷비슷하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자꾸 손이 가는 건 어쩔 수 없다.

연말연초를 보내는 상황과 비슷하다.

어쨌거나 읽는 그 순간 반성과 깨달음을 준다.

실천의 몫은 본인의 몫이지 책이 책임져줄 부분은 아니다.

 

<일개미의 반란>도 비슷했다.

내내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지~!"라고 추임새를
넣긴 했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그래서 반란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하는 의문만 남는다.

<회사가 당신에게 알려주지 않는 50가지 비밀>을 비롯해 이전에도
‘직장에서 징하게 살아남는 기술’을 설파한 책들은 많았다.

<일개미의 반란>도 고만고만한 수준에서 그쳤을 뿐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더군다나 일러스트 빼면 200쪽이 될까말까 한 책을 보고 있노라니 ’기획과
편집의 승리’라는 소리가 절로 나온다.

 

하지만 ‘기획과 편집’도 능력이면 능력이다.

이 책에 직장에서 살아남는 무수한 방법이 나오듯이 이 책 또한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기획과 편집으로 무장했을 뿐이다.

그래서 그 점에는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사실 평소에도 "모든 길은 고전 속에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이솝 이야기>라는 고전 속에서 직장생활의 모습을 차용해온 점은
마음에 들었다.

책을 받기 전에 인터넷 서점에서 이 책을 본 적이 있었는데, 내
눈길을 끄는 건 <일개미의 반란>이라는 제목이 아니라 "우리가 몰랐던
직장인을 위한 이솝우화"라는 부제였다.

특히 ‘직장인을 위한 이솝우화’라는 부분이.

 

솔직히 누구나 쉽게 생각할 수 있는 부분이다.

하지만 ‘생각을 하는 것’과 ‘글로 엮어내는 것’은 다른 차원의 문제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인 것이고, 콜럼부스처럼 달걀 끝을
깨뜨려서라도 먼저 세우는 사람이 임자인 법이다.

그런 면에서 이 책의 기획은 성공적이며, 중간중간 촌철살인의 문구를
넣은 일러스트 또한 의미가 있다.

 

다만 텍스트가 좀 빈약하지 않았나 싶은 느낌은 든다.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 같은 데에는 짧은 글이 미덕이지만 책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쓸데없이 말을 길게 늘어놓으라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더 깊고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법도 한데 너무 간단하게
쓸고 지나가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든다.

게다가 원래 인터넷 카페나 블로그에 연재했던 글이라서 그런지
모르지만 간혹 책의 전체적인 통일성에서 뭔가 어긋나는 부분도 있다고 느껴졌다.

넷상에 연재했던 글을 그대로 옮겨온다고 해서 책이 되는 것은 아니다.

간간히 보이던 교정상의 오류와 더불어 아쉬운 점이었다.

 

어쨌거나 인터넷에서 연재되었던 이전의 글이 직장인들에게 그렇게
인기를 끌었던 이유는 동시대를 사는 직장인으로서 느끼는 공감대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책으로 옮겨온 지금도 그러한 공감대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게다가 이제 직장생활 9년차에 들어서는 내게 확연이 눈에 보이는
부분도 있었다.

아, 그걸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몇 년 더 일찍 직장생활 잘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어쩌면 체득해온 지난 시절이 있기에 가능한 일 아닐까?

 

술자리에서 이런저런 울분을 토해놓는 후배 직장인의 애환을
‘이솝 우화’를 빌어 잘 버무려놓고 손해나지 않는 선에서 충고해주는 선배를 모는
모습이다.

그런 면에서 이제 막 직장생활을 시작하는 사회 초년생들에게는
하나의 길잡이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그 ‘일개미의 반란’이 결국 ‘직장에서 바퀴벌레처럼 징하게
살아남는 법’이라는 건 여전히 씁쓸한 뒷맛이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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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쿤, <과학혁명의 구조>

 

 

 

<과학혁명의
구조>는 대학 시절부터 내가 읽고 싶었던 책 중에 하나였다.

다이어리를
바꿀 때마다 나는 늘 읽고 싶은 책의 리스트를 정리해두었는데, 거기에 빠지지 않는
책 중 하나였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언제나 ‘하고 싶은 것’에 집중하게 만들지 않는다.

세상의
유혹에 약한 탓이겠지만, 나 역시 그런고로 책 목록은 늘 잠자고 있었고, 그렇게
이 책은 항상 묻혀져 있었다.

 

그러다
드디어, 우연찮게 이 책을 읽을 기회가 생겼다.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경험상
느끼는 거지만, 한 번 기회를 놓치면 또 놓치기 쉽다.

인생사가
그렇듯 책 읽기도 별반 다르지 않다.

 

그런데
이 책 무지 실망이다.

‘읽어야
할 고전’ 중에 꼽히는, ‘과학사’와 관련된 책이지만 과학을 뛰어넘어 인문한, 사회과학,
예술에까지 영향을 끼친 이 책에 나는 실망하고 말았다.

 

다른
게 아니라 번역이 영 아니올시다였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번역이 이상한 책이 한두 권이 아니었지만(대표적인 경우로 해리포터
시리즈를 꼽을 수 있겠다), 이 책은 도저히 용서가 되지 않았다.

원문에
충실하게 번역했다고?

글쎄,
원문을 곧이 곧대로 한글로 옮겨놓았다고 해서 ‘원문에 충실한 번역’이 되는 것은
아니다.

최소한
어떤 문장을 봤을 때 어떤 게 주어고 어떤 게 서술어인지 가늠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역자
서문마저도 번역문처럼 어색함을 느꼈을 때 나는 이 재앙을 예견해야 했었는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이 책은 ‘과학사’를 다룬 책이지만 ‘청소년 필독서’로 꼽힐 만큼 넓은 독자층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과학을 모르는 사람’도 읽을 수 있게, 최소한 어떤 내용에 대한 배경지식은
이해할 수 있게 간단한 주석이라도 달려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실제로
미국에서는 쿤의 원 저작 외에도 이런 배경지식을 달아놓은 판본도 있다고 한다.

 

물론
원문에 충실한 번역, 중요하다.

하지만
무언가 번역을 하고 출간을 한다면 최소한 그 책에 대한 필요성은 인지하고 있을
터.

무엇보다
필독서로 꼽히는 고전이라면, 그리고 그 넓은 독자층을 염두에 두었다면 최소한의
노력은 필요했을 텐데 그러지 못함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을 ‘읽었다’라고 하지 못하겠다.

대략적인
그림은 그릴 수 있을지언정 완전히 체득하지 못했으므로.


한 페이지도 쭉쭉 읽어나가지 못했다.

같은
문장을 세 번쯤 읽어야 대략적인 그림이 그려졌다.

영어
실력이 뛰어나신 분들이야 한글을 영어로 변환해서 생각했다고 하더라만, 나는 그
정도 실력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그래서
박상익 교수님은 말했다.

"잘못된
번역은 반역이라고."


책을 ‘반역’이라고까지 부르고 싶진 않지만, 최소한의 노력이 아쉽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하겠다.

출판사에서
개역판이 나오고 29쇄를 찍었을 때까지 이런 비판은 하나도 없었던 것일까?

이럴
때는 독점계약의 폐해를 절대적으로 느낀다.

누군가
재번역을 해주지 않으면 우리는 이 책을 앞으로도 계속 봐야할 것이다.

 

‘패러다임’
그리고 ‘패러다임의 전환’이란 말은 이미 우리 사회에 널리 쓰이고 있는 말이다.

바로
<과학혁명의 구조> 때문이다.

쿤이
<과학혁명의 구조>에서 패러다임이란 용어를 언급한 이후, 이 용어는 다양한
뜻을 내포하며 빈번하게 사용되는 용어 중 하나가 되었다.

그만큼
이 저작이 현재 우리 생활에도 끼치는 영향은 대단하다.

하지만
책은 그 내용을 음미할 수 있을 만한 여유를 주지 못해서 아쉬울 따름이다.

 

다만
책을 보면서 느낀 것 하나.

과학사에서
패러다임의 변화는 정상과학이 심각한 이상 현상들의 빈번한 출현에 의해서 위기에
부딪혀 붕괴될 때 일어나는데, 이러한 이상 현상들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진행된
것이 아니라 실험을 하다가 예상치 못한 결과에 의해 나타난 점이 많다고 볼 때 역시나
세렌디피티는 진리라는 점?^^;;

 

여튼
언젠가는 또 다른 번역본이 나왔으면 좋겠다.

책에
대한 내용은 그때 다시 제대로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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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진, <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

 

 

 

‘연애’는
불멸의 화두다.

그래서
세상에는 연애 관련서가 끊임없이 쏟아져나오고, ‘그 남자’ 혹은 ‘그 여자’의 마음을
알고 싶어서 안달하는 사람들이 줄을 섰으며, 세상의 남자 혹은 여자들은 어디에
모여 있기에 나의 연인은 보이지 않느냐며 투덜거림이 끊이지 않는다.

TV에
넘쳐나는 사랑 이야기는 연애에 대한 환상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며, 달마다 있는
무슨무슨 데이는 우리가 커플이 되도록 부추긴다.

이런
세상 속에서 ‘연애하지 않음’은 마치 사회에서 도태된 것처럼 여겨진다.

그래서
일단 연애는 하고 봐야 한다.

 

하지만
인생, 어디 생각대로 되는가?

분연하게
"연애 하겠소!"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보지만, 이런 조바심은 외려 함정을
파고 만다.

덕분에
하지 말아야 할 연애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김현진은
이를 ‘B급 연애’라 칭했다.

그리고
연애 홍수의 시대, B급 연애에 빠져 허우적대는 여자들을 위해 "누구의 연인도
되지 마라"고 말한다.

 

‘김현진의
B급 연애 탈출기’라는 부제답게 이 책은 작가 본연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다.

그녀가
겪었던 B급 연애, 그리고 그녀 주변 사람들이 겪은 B급 연애가 주요 내용이다.

여기서
‘B급 연애’란 작가 말에 의하면 ‘사랑받으려고 안달복달하다가 결국엔 심장까지 타들어가
지쳐 나가 떨어지는 서글픈 연애’를 일컫는다.

‘심장까지
타들어가는 불 같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받으려고
안달복달하다가 지쳐 나가 떨어지는 서글픈 연애’다.

사랑받을
자신이 없어 저보다 못한 남자와 사귀다가 지쳐 나가떨어지는 연애.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어떤 ‘결핍’을 극복하지 못해 혹독하게 쓰러질
수밖에 없었던 여자들의 연애.

 

하지만
여자들로 하여금 ‘B급 연애’에 빠지도록 부추기는 것은 이 사회다.

어리고
예쁘고 늘씬한 여자만 선호하는 이 사회.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자기보다 잘난 여자는 기피하는 이 사회.


꾸미고 잘 쓰고 다니면 ‘된장녀’라 욕을 먹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무슨 자신감으로
그렇게 하고 다니느냐’는 타박을 듣는다.

이런
사회에서 여자들의 선택지는 점점 줄어들고 B급 연애로 내몰릴 수밖에 없다.

 

때문에
이 책은 특별하다.


책에 담긴 담론은 ‘B급 연애’라고 대변되기는 하지만, 넓게는 이 사회가 담고 있는
수많은 남녀관계들에 대한 진지한 고찰까지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다.

‘연애’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긴 하지만, 실상은 우리 사회를 비판하는 요소가 많다.

 

마치
맥주를 앞에 두고 열띤 대화를 하는 듯한 문체는 그래서 설득력 있다.

같이
맥주 한 잔 쭉 들이키고 "그래 맞아!" 하고 맞장구치게 하기 때문이다.

아니,
그런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책을
읽고 있노라면, "이 여자, 혹시 우리가 가졌던 술자리에 혹시 끼었던 여자 아니야?"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여자들끼리
술자리에서 토해내는 불만과 혼란을 그만큼 잘 정리했기 때문이다.

정리만
잘했을까?

그야말로
통렬하고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긍정적인 해결책까지 제시한다.

물론
그 역시 우리가 술자리에서 내렸던 잠정적인 결론과 다를 바 없었다.

"일단
내 자신부터 잘 알고 사랑하기."

 

그래,
어떻게 보면 뻔한 이야기다.

하지만
뻔하지 않은 이유는 가끔 비틈의 미학이 보이기 때문이다.

사실
예상치 못한 비틈의 시선은 나도 모르게 깨달음을 주기도 했다.

대표적인
예가 손태영에 관한 이야기였는데, "헤픈 여자는 행복하면 안 된다"라는
공식을 그녀가 깼기 때문에 무수한 비판을 받았다고 하는 점이었다.


이러저러한 사연이 많았던 여자가 멋진 남자랑 결혼했으니 사람들이 배가 아플
수밖에.

그럴
듯했다.

작가의
말대로 대다수의 여자는 그렇게 할 수 있을 만한 미모와 재능을 갖추지 못했다.

거꾸로
남자 입장에서는 나와 헤어진 여자가 나보다 잘난 남자랑 결혼했으니 배알이 꼴리고.

결과적으로
일반 사람들은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단 논리로 질투를 하거나, "뭔가
있나 보지"라는 말로 비난하는 편이 그나마 속 편하다.

정말로
정확한 지적이었다.

 

무엇보다
나보다 덜 산 20대 여자가 이런 이야기를 쏟아낼 수 있다는 게 놀라웠다.

아,
물론 그녀가 쌓은 이런저런 경험에 빗대어 본다면, 나의 나이 많음은 그냥 수치상에
불과할 뿐이다.

10대
때부터 확고한 자기만의 가치관으로 살아왔던 그녀는 최소한 나보다 치열하게 살아온
것은 분명하니까.


치열한 삶 때문에 이 나이 때에 이런 통찰력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겠지.

그래서
나는 그녀가 부러웠다.

그런데
모름지기 ‘책을 쓴다는 것’ 자체가 어떠한 통찰이 없으면 힘들다고 생각하는 편이라,
그런 경지에 도달하지 못한 나를 반성하게 된다.

물론
그 반성이 순간적일지라도.

나는
나란 사람에 대해 너무 잘 알아서, 나란 사람은 ‘쓰기 작업’보다는 ‘읽기 작업’을
더 편안하게 여김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나는 보수적이고 안정적인 사람이다.

 

다만
작가인 김현지는 현재 가장 빛나는 20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고, 사진으로 본
그녀의 미모는 썩, 매우 괜찮은 축에 속한다는 점이 아쉽다.

정말
이런 여자가 B급 연애를 했을까 하는 의문점이 드니까.

그런데
역으로 생각하면 이렇게 젊고 예쁜 여자도 B급 연애를 한다잖아! 라는 위안이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애초 작가가 이 책을 쓴 목적은 성공한 셈이다.

"다들
A급 연애만 하는 것처럼 보이는 세상에서 여기 구질구질한 B급 연애만 하는 여자들도
있다고, 그러니까 울지 말라고, 나를 비롯한 B급 연애 동지들에게 말하고 싶었다"라는
그녀의 말처럼.

 

그리고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저자의 모든 인세가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조 분회 투쟁
기금’으로 사용된다는 점이고.

뭔가
언밸러스한 것 같지만 그래서 더 특별한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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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디르 벤카테시, <괴짜 사회학>

 

 

 

"통계와 연구실을 박차고 거리로 나선 괴짜 사회학자의 세상탐구"

부제인지 카피인지
모를 문구를 들여다본다.

과연 이 책은
이 문구에 부합하는가?

 

‘괴짜 사회학’이란 제목을 누가 붙였는지 몰라도, 그리고 누가 카피와
뒤표지 문구를 뽑았는지 몰라도 사람들 낚는 솜씨 하나만큼은 칭찬해주고 싶다.

표지만 보면 이 책은 정말이지 근사한 ‘사회학’ 책이다.

하지만 내용은 그렇지 않다.

 

‘Gang Leader For a Day’

즉 ‘하루 동안 두목되기’란 원제가 이 책에 더 부합한다.

이 책은 빈민가를 경험한 한 사회학자의 회고록에서 더 나아가지
않는다.

실제 경험했던 일을 담담하게 풀어내는 이 책은, 그래서 수필에
가깝게 느껴질 뿐 학문적 경향은 그다지 느껴지지 않는다.

 

아, 물론 이 책이 씌어진 배경이 지역 사회를 연구의 일환으로 실제적인
연구를 위해 빈민가에 들어갔고, 논문의 자료를 모으기 위함임을 잊지는 않았다.

다만 이 책에서 드러나는 과정은 그 전 단계일 뿐 실제적인 학문적
고찰은 이뤄지지 않았음을 말하고 싶을 따름이다.

그래서 나는 이 책보다는 이 책에 나온 내용을 기반으로 해서 쓴
수디르 벤카테시의 ‘논문’이 더 궁금했다.

 

게다가 이 책에 나온 내용은 그다지 새롭지도, 놀랍지도 않았다.

"빈민가에는 나름의 규칙이 있고, 그 규칙 안에서 움직인다.
그것은 흡사 작은 정부와도 같았다"라고 느꼈던 점을 빼고는.

인도 태생의 중산층 출신의 학부생에게는 그러한 풍경이 새로웠을
수 있을 것 같긴 하다.

게다가 빈민가를 통솔하고 있는 갱단의 우두머리와 교류를 하며
그 속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는 건 굉장한 경험이기도 하고.

 

하지만 ‘사회학’이라고 이름 붙일 만한 담론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 책을 재미있게 읽었으면서도 실망한 부분은 그 때문이었다.

‘괴짜’와 ‘사회학’이 주는 이미지에 혹했었는데, 실상은 ‘하루 동안
갱단의 두목이 되어봤다’라는 책 속의 한 에피소드처럼 사건과 개인적 느낌만이
난무할 뿐이었다.

최소한의 이런 곳을 향한 정부의 정책이 왜 잘못되었는지, 이 상황이
어떻게 야기된 것인지 사회학자다운 식견을 보여줬더라면 이렇게 허무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은 사실 수디르 벤카테시가 학부생 시절에 경험한 이야기로서
책에 씌어진 카피처럼 ‘사회학자’로서의 견해는 아니다.

그는 공부를 하고 있는, 강단을 떠나 실제적인 경험을 해보고 싶은
학생이었고, 그러한 호기심과 사회학도로서의 열망을 실행에 옮긴 것일 뿐이다.

이제 공부하고 있는 학생이 내밀 수 있는 ‘사회학적 견해’라는 게
얼마나 대단할 수 있겠는가.

학부 졸업생인 나도 어줍잖은 흉내만 낼 뿐이고, 그나마 졸업한
지 10년이 다 되어가는 이 시점에서는 더욱 그렇다.

물론 내가 학교를 다니고 있던 시절에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냥 그는 학문적 호기심에 가득 찬 애송이일 뿐이었다.

책을 쓴 시점은 그가 아무리 교수가 된 이후였다고 할지라도.

그렇더라도
빈민가에 대한 학문적 관점은 그닥 많이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세상탐구’라는 말에는 동의한다.

그는 꽤 근사한 통찰력으로 빈민가를 바라보니까.

무엇보다 편견 없이 그들 사회를 대하는 게 나로서는 대단해보였다.

하긴 그것이 조사자의 태도이기도 하니까.

 

제목과 카피에 낚였다라는 점을 빼면 읽는 재미는 있는 책이다.

무엇보다 조사자의 태도와 견지는 한번 배워볼 만하다고 느꼈고.

사실 내가 지금 학교에 다니고 있다면 후배들에게 한 번 읽어볼
것을 권하거나, 교수님께 한 번쯤 읽고 레포트를 써도 괜찮겠다는 건의 정도는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다.

모름지기 학생이란 이러한 호기심과 열정과 도전이 필요할 테니까.

아직 여물지 않은 학부생의 태도를 함께 느껴보고 배워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직접적
접근방법’을 선택하고, 그걸 실행한 수디르에게 나는 어느 정도 감동을 받았다.

그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가 익히 들은 바에 의하면 미국의 빈민가라는 곳은 만만치 않은 곳이니까.

 

아마도 수디르 벤카테시가 ‘천재적 사회학자’라는 수식어를 얻는
데에는 이때의 경험이 크게 작용하지 않았나 싶다.

이때의 경험으로 그는 그저 그런 강단의 사회학자가 아닌 실천하고
행동하는 사회학자가 될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그래, 그렇게 본다면 그에게는 ‘괴짜 사회학자’가 될 자질이 있긴
했나 보다.

 

어쨌거나 새로운 경험을 한 수디르에게 박수를.

그 경험을 함께 나눠가질 수 있었던 나에게도 박수를.

그리고 근사한 포장을 아끼지 않은 김영사의 이름 모를 편집자에게도
박수를.

 

 

-

날은
춥고, 손도 얼고, 발도 얼고.

추위가
손발을 얼리는 바람에 뇌까지 굳어져서 의도한 대로의 느낌이 잘 살지 않는다.


책을 읽은 시점이 벌써 3주나 지난 탓이기도 하지만.

이래서
겨울이 싫다.


또한 핑계에 불과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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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라이시 가즈후미, <서른다섯, 사랑>

                                                  

 

 

 

"엄마, 미안해.""엄마, 외톨이로 죽게 해서 미안해. 계속 원망해서 미안해."미호의 마지막
대사를 읽는 순간, 나도 모르게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왠지 모를 서러움과 사람이 이렇게 용서를 하고 화해할 수도 있구나 하는 감격이
뒤섞인, 사실 딱히 그 정체를 알기 힘든 눈물이.하지만 그녀는 살았고, 사랑을 했고, 새로운 생명을 잉태했으며, 살아 있는 여자가
되었다.어쩌면 그건 그녀의 엄마가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주고 간 선물인지도 모른다.그녀도 나도 이제 그 사실을
안다.그건 유지 말대로 그녀도 ‘마음의 용’을 키웠기에 가능했던 일.나도 그런 ‘마음의 용’을 키울 수
있다면.’서른다섯, 사랑’이란 제목이 너무 진부해진다.원제인 ‘마음에 용을 새기고’가 매우 명확하게 와닿는
시점.하지만 그 ‘사랑’이 단순히 이성(理性)에 관해 한정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나, 그리고 내 인생.죽어서
없애고만 싶어던 자신의 삶을 서른다섯에 다시 시작한 미호처럼.<!–"

 

 

-

책을 읽고 나서 담당 편집자와 이야기를 나누다가 작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물었다.

남자란다.

"진짜? 아니, 남자가 어떻게 이렇게 여자 심리를
디테일하게 묘사할 수 있어?"

우리 두 사람은 작가가 게이가 아닐까 생각했다.

그리고 일본 문화에 정통한 사람 말에 의하면 게이가
맞단다.^^;;

뭐 그게 그렇게 중요한 일은 아닐 테지만…

그냥 신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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