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로군정서 지도자는 김좌진 아닌 서일장군

북로군정서 지도자는 김좌진 아닌 서일장군

1919년 룡정 3.13반일운동이후 연변을 중심으로 한 동북각지에는30여개의 반일무장단체들이 활동하고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북로군정서는 주요한 반일무장단체중의 하나였다. 이 반일무장단체의 지도자 및 결책자는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장군으로서 서일장군은 북로군정서와 청산리전투를 광명과 승리에로 이끈 력사의 주역이였다.

 

그러나 사상과 리념의 편견, 력사시각의 차이로 말미암아 한국독립운동사나 한국 국내 출판물들에는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장군이 력사의 저편으로 몰리고 서일장군이 북로군정서군 사령관으로 초빙한, 장군의 수하 장령 김좌진장군이 마치도 북로군정서를 이끈듯이 나타나며 청산리전투를 승리에로 이끈 주장으로, 절세의 영웅으로 나타난다. 력사는 외곡되여도 너무도 외곡되였다. 실상 력사는 덮어감추지 못하거늘 서일장군과 김좌진장군의 대비속에서 보면 서일장군은 북로군정서와 청산리전투를 광명과 승리에로 이끈 력사의 주역이였음을 어렵지 않게 보아낼수 있다.

 

1910년대 독립운동의 력사속으로 들어가보면 북로군정서 총재 서일은 반일독립운동 진영에서 찾아 보기힘든 문무겸비의 인물로서 북로군정서의 전신은 장군이 1911년에 왕청현 덕원리에 세운 《중광단》(重光團)이였다.

 

서일장군의 력사는 1881년부터 시작된다. 이해 2월 26일, 장군은 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김희동에서 인류력사속에 등장하였다. 장군의 본명은 서기학이고 초명(初名)은 서정학(徐正學)이요, 호는 백포(白圃), 본관은 리천(利川)이다. 족보속에서는 아간공(阿干公) 36세손이고 량경공파(良景公波), 양근(楊根) 계렬의 함흥문중 사람으로 알려진다.

 

1992년 6월 29일부 《리천서씨종보》 4면에 따르면 서일장군의 선친은 서재운이고 아들은 서윤제(1969년에 62살로 사망), 손자로는 서경섭(중국 할빈에 거주), 서만섭(1991년 9월 한국가서 인천거주) 두분이 있었다.

 

서일장군은 소년시절에 고향의 서당에서 한학(漢學)을 배웠다. 몇년 서당공부 끝에 경성함일사범학교 전신인 《유지의숙》에 입학하여 배움에 몰두하였다. 유지의숙은 함경북도 근대화운동의 선구자 이운섭선생이 창설한 의숙인데 몇해후에 경성함일사범학교로 개칭되였다. 이 학교는 많은 민족운동가들을 키운 의로운 학교이기도 한데 간도국민회군 사령 안무, 북로군정서 부총재 현천묵, 간부 김병철, 서대문순국자 김학섭 등 독립운동가들이 바로 이 학교 출신들이다.

 

1902년 봄에 서일장군은 경성함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 한일합방때까지 10년간 지방에서 교편을 잡았다.
1910년은 조선민족이 일제에 의해 나라 잃은 경술국치해, 이해 장군은 30살의 조선남아였다. 나라 잃은 슬픔을 달랠길없은 서일장군은 이듬해 1911년 가족과 함께 결연히 두만강을 건넜고 연변의 왕청현 덕원리에 자리를 잡았다.

 

왕청현 덕원리는 천교령 부근에 발원지를 둔 가야하와 십리평, 소왕청쪽에서 흘러나오는 대왕청하와 합수되는 부근 동북쪽 산기슭에 자리잡은 마을이다. 이주 그해(1911년) 3월에 서일장군은 대종교인들인 독립운동가 현천묵, 계화 등을 골간으로 반일독립단체—중광단을 조직하고 동지획득투쟁과 반일투쟁에 나섰다.

 

중광단을 말하자면 대종교를 떠올리지 않을수 없다. 대종교의 전신은 단군교로서 조선의 유구한 민족종교로 나타난다. 전하는데 의하면 상원(上元) 갑자 10월 3일에 단군이 령산 백두산에서 탄생한후 3천단부를 설치하고 고조선을 건립했는데 고조선의 태양숭배의 원시신앙이 종교로 발전하니 이 종교가 곧 단군교라 한다. 이 단군교가 력사속에서 력대로 부름이 서로 달리 불려지며 고려에서는 왕검교로 불리우다가 고려원종 시절에 몽고의 침입으로 페교되고말았다.

 

그러다가 1909년 음력 정월 15일에 이르러 애국자이며 독립운동가인 라철선생에 의해 단군교가 재생되였다. 이날 라철선생은 동지들은 오기호, 강우, 최전, 류동, 정중모, 리기, 김인식, 김춘식, 김윤식 등 수십인과 함께 서울의 취운정아래 6간초가집에서 단군교 포명서를 공포하였으니 이날 정월 보름날이 단군교의 중광절로 되었었다.

 

1910년 8월 5일에 단군교는 일제놈들의 시선을 따돌리고저 대종교로 개칭되고 1911년에 대종사 라철선생 등에 의해 대종교 총본사는 서울로부터 두만강 북안 화룡현 청파호에 자리를 옮기였다.
력사는 라철선생의 전이나 서일장군의 이주가 모두 1911년임을 알리였다. 1912년 10월에 서일장군은 대종교에 입교하고 이듬해 10월에 대종교 시교사로 떠올랐다. 시교사를 알자면 다시 총본사로 돌아가야 한다.

 

라철선생은 화룡현 청파호에 총본사를 둔후 총본사 산하에 동도본사(왕청현), 서도본사(상해), 북도본사(로령 소학령), 남도본사(조선 경성)등 4개 도본사를 설치하고 각지에 시교당 48개소 (연변에 22개소) 하였는데 서일장군이 왕청현의 동도분사를 주관하며 시교사로 나섰으니 장군의 위인됨을 헤아리고도 남음이 있다.

 

대종교의 력사는 중광된 그날부터 일제의 식민정책과 날카롭게 대립한 력사이고 피로 물든 반항의 력사임을 알려주고있다. 서일장군이 자기 반일독립단체의 이름을 중광단이라고 함도 대종교의 중광을 환호하고 단군을 숭상하며, 나라는 잃어도 조선의 혼, 민족의 혼은 앗아가지 못함을 선언하는 뜻에서였다.

 

서일장군은 1912년에 명동학교를 꾸리고 인재양성에 주력하는 한편 대종교 교리저술사업에 몰두하여 짧디짧은 몇년사이에 《삼일신교》, 《회삼경》, 《구변도설》(九變圖說), 《진리도설》, 《신리주해》(神理注解), 《5대종지강연》, 《3문1답》상하편, 《신사기의절안교정》 등을 저술하였다. 그중 《삼일신고》와 《회삼경》은대종사의 《신리대전》, 무원종사의 《신단설기》와 더불어 대종교의 4대경서로 받들리였다.

 

1916년 8월에 제1세교주 라철이 구월산 삼성사에서 순교하고 제2세교주로 김헌이 등극하였다. 1919년 초에 무원종사로 있던 김헌이 교통을 서일에게 전수하려하니 서일장군은 교주의 간곡한 권유를 5년간 보류키로 하고 무장투쟁준비에 심신을 쏟아부었다.

 

교통이란 대종교를 떠메고나갈 교주를 말한다. 서일장군이 교주추대를 잠시 미룬것은 무장투쟁을 위해서였다. 1919년 이해 조선에서 3.1운동이 폭발하고 룡정에서 3.13운동이 일어나자 마침내 10년만에 력사의 기회를 만났다.

 

1919년 3.1운동직후 서일장군은 중광단을 《대한정의단》으로 확대, 개편하고 단장으로 나섰다. 대한정의단은 《민보》와 《신국보》를 꾸리며 결사대원을 모집하였는데 응모, 등록한 결사대원이 1037명을 이루었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 8월에 산하에 독립무장단체—《대한군정회》를 조직하고 신민회계통의 무관출신들인 김좌진, 조성환, 리장녕을 초빙하여 군정회를 맡아보도록 위임하였다. 독립군편성을 위한 서일장군의 전략적결책이였다.

 

1919년 봄에 상해에서 대한림시정부가 수립된후 서일장군은 그 지도를 받기로 하고 이해 10월에 대한정의단과 대한군정회를 통합하여 대한군정부로 개편하였다. 대한군정부의 창립에 기여한 주요인물로는 서일, 현천묵, 김좌진, 조성환, 리장녕, 계화, 리범석, 박성태, 정신, 박두희, 리홍래, 윤창현, 라중소, 김성 등으로 알려진다.
1919년 12월에 대한군정부는 《국무원 제205호》 지시에 따라 《대한군정서》로 부름을 바꾸었다. 남만으로 불리운 서간도에 《서로군정서》가 있은데서 대한군정서는 그 대칭으로 북로군정서로 불리였다.
북로군정서 간부진영은 아래와 같다.

 

총재 서일
부총재 현천묵
참모장 리장녕
사단장 김규식
려단장 최해
련대장 정훈
련성대장 리범석
사관련성소장 김좌진

 

서일장군은 북로군정서 본부를 왕청현 서대파 십리평 잣덕에 설치하고 사관련성소도 이 부근에 세웠다. 십리평은 지금의 왕청현성 서쪽가인 덕원리에서 동으로 강을 거슬러 수십리 상기한 산간지대인데 잣덕은 십리평에서도 동쪽으로 몇리 떨어진 산언덕에 위치하고있었다.

 

현지답사와 력사고증에 의하면 사관련성소 예비훈련반은 북로군정서와 약 300메터 떨어진 남쪽의 넓은 평지에 자리잡았고 사관련성소는 잣덕에서도 동북쪽골안을 따라 약 15리 들어간 곳에 자리잡았다. 사관련성소 소장은 상기에서와 같이 김좌진장군이 맡아보았다.

김좌진장군은 자는 정원, 호는 백야(白冶)로서 1889년 11월 24일, 충청북도 홍성군 고도면 갈산리 량반가정 출신이다. 선친 김형규는 30여명의 머슴을 두고 2000여쌍 땅을 가진 갈산리의 갑부로 헤아려진다.

 

김좌진장군은 5살때 벌써 서당에서 공부하고 《삼국연의》, 《손자병법》, 《륙도삼략》 등 병서까지 읽으며 래일의 위인으로 자라났다. 장군의 위인됨을 이 세상이 잘 알기에 따로 설명은 하지 않겠지만 1906년에 80여간 집을 내서 《호명학교》를 꾸리고 교장으로 나서 빈부귀천없이 학생을 받아들였다는것은 그지없이 존경심을 자아낸다. 서울시절의 대한협회 골간으로, 서울무관학교의 입학생으로, 리동휘가 이끄는 서북학회의 주동자로, 오성학교의 교감으로, 광복단의 일원으로 뛰고뛴 발자취가 력력하다.

 

그러던 김좌진장군은 1917년 11월에 조국을 떠나 중국 동북방명길에 올라야 했다. 길림에서 대종교에 가입하고 려준, 조소앙 등과 함께 《대한독립의군부》를 조직, 1919년 초에는 김교헌, 려준 등 39인과 더불어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고 혈전독립의 무장투쟁기치를 드니 그 위상이 돋보이기만 한다.

 

1919년 8월, 김좌진장군은 길림을 떠나 왕청행에 올랐다. 장군은 왕청땅에서 서일장군이 조직한 대한정의단에 가입하고 서일장군에 의해 대한정의단 산하 독립무장단체—대한군정회의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초빙된다. 여기에서 지적하고픈것은 김좌진장군은 길림서 왔고 서일장군의 초빙을 받아 대한군정회에 나섰고 사관련성소 소장으로 임명되였다는 것이다. 그뒤의 북로군정서도 총재가 서일장군이고 김좌진은 그 수하의 한 장령으로 활동했을 뿐이다.

 

김좌진장군은 사관련성소 소장직무를 충실히 리행했다. 사관련성소는 선후로 400여명의 학생을 받아들이고 1920년 9월 9일에 제1회 졸업생 298명을 배출하여 북로군정서의 무장력량건설에 큰 힘을 보태였다. 이들이 그해 10월에 있은 유명한 청산리전투에서 중추적 역할을 놀았다고 하니 김좌진장군의군사적재질을 너무나 잘 헤아릴수 있다. 하기에 서일장군은 이에 앞서 1920년 7월 초에 김좌진장군을 사관연성소 소장 겸 북로군정서군 사령관으로 임명하기에 이르렀다.

 

또 지적할것이 있다. 북로군정서 사령관도 김좌진장군이 조직자, 결책자로 되고 사령관으로 된것이 아니라 서일장군이 산하 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제1선에서 군사를 통솔하게 한 력사사실이다.

 

이쯤하면 서일장군과 김좌진장군과의 관계를 리해할수 있으리라 믿어진다. 한마디로 개괄하면 북로군정서 지도자와 결책자는 총재 서일장군이였고 김좌진장군은 그 수하의 한 충실한 장령이였을 따름이다. 서일장군은 북로군정서의 총재일뿐만 아니라 군사총지휘, 군통수, 동북반일무장독립운동의 저명한 지도자의 한분으로서 말그대로 당시 독립무장투쟁진영에서 《찾아보기 힘든 문무겸비의 인물》이였다.

 

이제 다음 글에서 서술하겠지만 유명한 청산리전투도 서일장군의 전이방침과 전략부서에 따라 진행한 전투였다. 1920년 10월의 청산리전투후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국민회군, 신민단, 도독부, 의군부, 혈성단, 야단, 대한정의군정사 등 9개 독립무장단체의 3500여명 대오가 밀산에 모여 대회합을 이루고 《대한독립군단》을 결성하였을 때 그 총재는 서일장군이였다.

 

이것이 력사이며 이것이 서일장군의 참 모습이다.

/리함

서일장군의 반일활동 발자취

  귀신은 울부짖고 도깨비 날뛰는데

  하늘땅의 밝은 빛 가뭇없이 사라졌네

  독사가 물어뜯고 메돼지 달려들제

  사람들 피흘리고 살점을 뜯기누나

  해는 지고 앞길이 막막하거늘

  인간세상 어디로 가야 할소냐?

 

  이 시는 1921년 음력8월27일 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장군이 순직하기 직전에 읊은 시구로 대종교 종사 홍암 라철 유서의 한 구절이다

 

  서일의 원명은 서기학(徐夔学)이고 호는 백포 (白圃)이며 본관은 리천이다.1881년2월 26일에 조선함경북도 경원군 안농면 김회동에서 태여났다.10세에 향리에서 김학규의 문하에서 한학을 수여받았으며 22세에 함경북도 경성함일사범학교를 졸업한후 10여년간 고향에서 계몽사업과 교육구국 운동에 투신하였다.일제가 한국을 강점한후 1911년 3월 서일은 반일조직 중광단(重光团)을 창립하고 단장으로 추대되였다. 중광단 창립초기에는 주로 독립정신과 애국사상을 고취하는 선전활동에 치중하였다 1912년에 중국 왕청현 덕원리에서 명동학교를 설립하고 민족교육에 매진하였다. 그해 10월에 서일은 대종교에 입교하였다.

 

  중광단은 1919년5월 일부 공교도들과 련합하여 대한 정의단(大韩正义团)을 조직하고 변화를 통한 발전을 시도하였다. 중광단은 3.1운동 이후 대한정의단으로 발전하여 조직적인 반일무장투쟁을 준비하였다. 서일은 대한정의단 단장으로 취임하였다 대한정의단은 대종교 정신을 토대로 한 무장투쟁을 추구했다. 또한 ‘일민보(一民报)’와 ‘신국보(新国报)’라는 한글 신문을 발행하여 중국 동북지구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 동포들에게 독립의식을 고취시켰다. 그러나 대한정의단의 주요 인물들은 비군사 인원으로서 무장투쟁을 효과적으로 전개할수 없었다. 대한정의단 총재 서일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김좌진, 조성환 등 륙군무관학교를 졸업한 군사전문가들이 집결해있는 길림군정사(吉林军政司)와의 련합을 추진하였다. 1919년 가을 길림군정사는 대한정의단 총재 서일의 련합제의를 받아들여 대한군정서 (大韩军政署)로 발전하였다. 대한정의단은 1919년10월에 군정부(军政府)로 개편하였다가 대한민국 림시정부의 명령에 따라 대한군정서로 개칭하고 본격적인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

 

  대한군정서의 총재는 서일, 부총재는 현천묵, 총사령관은 김좌진이였다. 대한군정서의 중앙조직은 총재부와 사령부로 나뉘였으며 총재부는 군정서의 대외업무와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사령부는 군사부분을 담당하였다 .

 

  1920년 10월에 진행한 청산리전역은 연길지구 여러 한국 반일무장부대가 련합작전하여 대승을 거둔 대표적인 전투였다 서일총재가 통솔한 대한군정서 부대는 기타 반일무장부대와 긴밀히 배합하여 지형의 우세와 사전의 충분한 준비로 일본 침략자들의 위풍을 꺾어버렸다.

 

  청산리전역에서 대패한 일본침략자들은 실패를 달가워 하지 않고 대량의 군대를 증원하여 보복활동을 감행하여 선후로 2600여명의 무고한 조선인들을 살해한 경신년 대학살 사건을 빚어내고 반일 무장단체에 대한 경신년 대토벌을 감행했다. 이와 동시에 봉계군벌 장작림은 자기 세력을 강화하여 동북 더 나가서는 전 중국을 통제하려는 야심으로 경제와 군사 주권을 일본제국주의에게 팔아 자기의 무장력량을 강화 확장하였을 뿐만아니라 ‘만주에서 불량선인 단체를 숙청하라’는 일본의 요구에 따라 동북지구에서 활동하는 한국 반일단체와 반일무장조직들을 취체하고 탄압하였다. 일본 침략자들의 전례없던 대토벌과 장작림 봉계군벌의 탄압 그리고 경제상 후원공급의 결핍으로 각 반일 무장단체들이 전례없는 곤경에 빠졌다 .생사존망의 관두에 서일은 동포들의 희생을 최소화시키고 반일무장 유생력량을 보전하기 위하여 전략적 이동을 주장하고 대한군정서부대를 동북동남 국경지역인 밀산으로 이동시켰다

 

  1920년 12월 중순에 대한독립군, 대한군정서, 간도대한국민회, 대한신민단, 군무도독부, 의군부, 혈성단, 야단, 대한정의군정서 등10여개 독립군 단체 3000여명의 독립군 장병들이 밀산 평양진에 집결하였다. 서일은 밀산에 집결한 10여개 무장단체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 (大韩独立军团)을 결성하고 총재로 추대되였다. 대한독립군단 지휘부의 주요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총재 서일,부총재 홍범도, 김좌진, 조성환, 문백순, 김호익, 외교부장 최진동, 사령관 김구식, 참모장 리장녕, 라중소, 군사고문 지청천, 제1려단장 김규식, 참모 박영희, 제2려단장 안무, 참모 리단승, 제2려단기병대장 강필림.

 

  비록 밀산은 일찍 1910년대에 ‘한흥동’, ‘십리와’ 등 한국독립운동 해외의 최초 무장기지를 건설한 곳으로 한인사회의 일정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나 경제 기반이 비교적 취약한 곳이여서 몇천명의 독립군이 장기간 주둔할 곳은 못되였다. 더우기 중국 동북지구의 12월 엄동기간에 준비없이 이동한 수많은 독립군장병들의 의식주를 해결하는것이 큰 문제로 되였다. 전례없던 곤경에 빠진 독립군장병은 시급히 출로를 구해야 했다 .

 

  1910년대 러시아 연해주는 중국 동북지구와 마찬가지로 한국독립운동의 세력이 자리잡고 있었고 약 20만에 이르는 한인들이 한인사회를 형성하고 있었기때문에 새로운 한국 독립운동 근거지로 부상하고 있었다. 더우기 러시아 10월혁명 이후 소련정부가 피압박 민족 해방전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있었기때문에 소련 연해주지역은 한국독립운동가들에게 새로운 희망으로 되였다.대한독립군단 지도자들은 여러차례의 토론을 거쳐 소련 연해주지역으로의 전략 이동을 결정하였다.

 

  1921년 1월초에 대한독립군단 장병들은 밀산을 떠나 호림현 호두에서 우쑤리강을 건너 소련 변경도시 이만시를 걸쳐 연해주 노령소추풍령에 집결하였다. 노령소추풍령에서 독립군 단체들은 밀산에서 결성된 대한독립군단을 다시 대한독립군총합부로 재편하였다. 대한독립군총합부 주요 구성 원은 다음과 같다.

 

  총장 서일, 부총장 한춘운, 군무사령관 홍범도, 군무부장 김좌진, 외교부장 최진동, 서기 박래순, 경리부장 홍범도, 서기 리홍래, 비서과장 채묵,정찰과장 서인극, 모연부장 김성지.

 

  1921년 3월말 대한독립군총합부와 기타 한국 반일무장단체 장병들은 소련정부의 통지를 받고 중국 흑하시 량안에 자리 잡고있는 알렉쎄브스크시에 집결하였다.

 

  1920년대 초기 소련10월 사회주의혁명이 갓 승리하고 각 나라의 혁명을 지지하는 공산국제가 발전하는 때여서 한국 각 반일무장 단체들은 소련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이때 일본은 소련정부에 한국 반일무장단체들의 무장을 해제할데 대한 압력을 가하였다. 당시 갓 성립되여 정권이 확고하지 못한 소련정부는 소련에 주둔하고 있는 한국 각 반일무장단체들을 소련홍군에 편입시키고 반일무장단체들의 그 명칭을 취소하자는 건의를 내놓았다. 얼마후 소련정부는 또 원바탕에 있던 싸할린 의용대를 개칭하고 모든 한국 반일무장단체가 그의 지휘를 받아야 한다고 선포하였다.

 

  서일을 총장으로 하는 대한독립군총합부는 기타 한국 반일무장 단체들과 함께 알렉쎄브스크시에서 개편문제를 둘러싸고 치렬한 쟁론을 벌렸다. 쟁론끝에 모순이 많았지만 한국 각 반일무장단체를 3개 련대와 경비대로 고려혁명군을 편성한다는 결의가 공포되였다. 이 명령은 1921년 6월25일에 반포되였으며 24시간내에 집행하여야 한다는 소련정부의 최후 통첩이 내려졌다. 그러나 한국 각 반일단체의 많은 장병들은 이 결의를 접수하지 않았다.

 

  1921년6월28일 오후 4시경에 소련홍군은 장갑차 2대 와30여정의 기관총 화력의 엄호밑에 600여명의 기병을 앞세우고 개편에 복종하지 않은 한국반일무장단체 장병들을 진압했는데 홍수같이 밀려드는 소련홍군의 공세앞에서 한국 반일무장단체 장병들의 저항이란 너무나도 미약했던것이다. 전투가 시작되여 한시각도 못되여 한국반일무장단체의 장병들은 밀리고 쫓기여 마침내 흑룡강에 이르렀다. 그들의 뒤에서는 탄우가 비발치듯 날아왔고 앞에는 도도히 물결치는 검푸른 흑룡강이 가로놓였다. 진퇴량난의 궁지에 빠진 장병들은 흑룡강에 첨벙첨벙 뛰여들었다. 수많은 장병들이 총탄에 비참하게 맞아 죽었고 물에 빠져 죽었다.

 

  이 참안에서 한국반일무장단체의 전사자가 272명,익사자 31명,행방불명이 250명이고 포로가 917명이였다 일본 침략군과의 전례없는 대격전인 청산리 전투에서도 이렇게 큰 손실을 보지 않았다. 이것이 바로 한국반일무장투쟁사에서 무장력량이 일대 조락을 초래한 ‘자유시 사변’ 또는 ‘흑하 참안’이다.

 

  서일은 ‘자유시사변’후 분산된 군정서부대의 100여명의 성원들을 조직하여 천신만고의 애로를 거쳐 밀산 백포자 당벽진에 돌아와 군정서를 재건하는 활동을 전개하였다.

  불행하게도 1921년 8월17일 저녁에 서일의 부대는 마적들의 돌연적 습격을 받아 하루밤사이에 대부분 장병들이 피살되였다. 크나큰 타격을 받은 서일은 너무도 비통한 나머지 하늘을 우러러 통탄하면서 대종교 종사 홍암 라철 유서중의 시 한구절을 읊었다 그리고 나서 마을 뒤산 수림속에 들어가 돌을 베개로 잔디를 자리로 하고 귀천하였는데 그때 서일은 41세의 장년이였다.

 

  서일의 장례식은 밀산 백포자 당벽진에서 진행되였는데 그 유해는 당벽진 뒤산에다 모시였다. 6년후 대종교의 단애 윤세복 종사가 당벽진에 와서 서일의 유해를 화장하여 화룡현 청파호의 뒤산에 면례하였는데 한세기가 지나도록 서일은 지금까지 멀고먼 북쪽나라 이국땅의 쓸쓸한 산비탈에서 대종교 제1세교주 홍암 라철, 제2세교주 무원 김교헌과 동반하여 초라한 산을 쓰고있다.

/종합

About 김혁

중국조선족 소설가, 언론인
카테고리 : 한반도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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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2) 북로군정서 지도자는 김좌진 아닌 서일장군

  1. admin says:

    저널로그 운영자입니다. 이 포스트가 동아닷컴 기사로 선정되었습니다.~☆

  2. 쭐쭈루미 says:

    림진왜란 때 리순신 장군은 삼도수군통제사로 불멸의 업적을 쌓으셨는데, 편제상 都元帥 권율 장군 휘하셨습니다. 그렇다고 한산대첩이나 명량대첩,노량대첩이 권율 장군의 업적이라 하지 않는 것 처럼, 청산리 대첩을 김좌진 장군의 업적으로 한다 해서 서일 장군의 애국심과 명망을 깍는 건 아닐 것입니다. 그리고 서일 장군님의 업적이 묻히는 걸 안타깝게 여기시는 마음 이해합니다. 님의 글을 보고 서일 장군의 여생을 살펴볼 수 있게 되어 감사히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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