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7년 김대중의 눈물, 2017년 문재인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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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김대중의 눈물, 2017년 문재인의 눈물
광주항쟁 통해 이어지는 한국 민주화 성격 압축적으로 보여줘
▲ 눈물 훔치는 문재인 대통령, 그리고 정세균 국회의장 18일 광주광역시 북구 운정동 국립5·18
민주묘지에서 열린 제37주년 5·18 민주화운동 기념식에 참석한 문재인 대통령과 정세균 국회의
장이 5.18 당시 생후 3일 만에 아버지를 잃은 김소형씨의 사연을 들으며 눈물을 훔치고 있다.ⓒ
공동취재사진

18일 열린 37주년 5.18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포함한 참석자 전원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제창했다. ‘임을 위한 행진곡’ 문제로 지난 2009년부터 시작된 5.18 기념식 파행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게 되었다.

‘임을 위한 행진곡’에 대한 극우 세력의 음해, 그리고 이에 편승한 보수 세력들의 여러 행태는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 시절의 비정상화, 민주주의 퇴행을 상징한다. 그리고 최근 전두환이 자신의 회고록을 통해서 역사 왜곡과 망언을 일삼은 것도 이와 관련되어 있다.

그렇게 볼 때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은 비정상화의 정상화, 반민주에서 민주로의 이행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큰 의미가 있다. 이는 촛불항쟁과 정권교체를 통해서 민주주의 회복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또한 오늘 기념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1980년 항쟁당시 아버지를 잃은 김소형씨의 사부곡에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문재인 대통령은 아버지에 대한 추도사를 마친 김씨를 포옹하며 유가족의 슬픔을 함께 하였다.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 유가족과 슬픔을 함께 눈물을 흘린 문 대통령의 모습에서, 이명박-박근혜 정권 9년의 역사가 끝났음을 확인했다. 그리고 국가가 다시 정상화되고 민주화가 이뤄지고 있음을 느꼈다. 그런데 이 장면을 보면서 30년 전인 1987년이 떠올랐다. 그리고 당시 그곳에서 유족들과 함께 눈물 흘린 한 사람이 있었다.

1987년 6월 항쟁 이전 5.18은 전두환 정권에 의해 금기시되었다. 희생자들에 대한 유족들의 추모도 정권의 감시 속에서 조용히 이뤄질 수밖에 없었던 암흑의 시간이었다. 그래서 그 당시 광주 망월동 묘역(1997년 국립5.18민주묘지가 조성되기 전에 5.18희생자들이 묻혀 있던 곳)에서는 유가족을 비롯한 소수만이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부를 수 있었다.

이것이 6월 항쟁을 통해서 바뀌게 되었다. 그 이후부터 광주 망월동 묘역 추모행사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공개적으로 부를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당시 분위기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1987년 9월 8일 거행된 추도행사였다.

당시 추도행사는 광주민중항쟁 이후 처음 광주를 방문한 김대중을 위해서 거행된 것이었다. 이 날 김대중은 1971년 이후 16년만에 처음으로 광주를 방문했었다. 그 사이 3년 동안 2번에 걸친 해외 망명, 납치 살해 미수, 사형선고, 5년 5개월 동안의 수감 생활 등 여러 고난을 겪었던 김대중은 사면 복권된 이후에 광주를 찾을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 5.18 37주년을 맞이하여 30년 전 추도 행사를 다시 살펴보는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앞에서 설명한 대로 현재 ‘임을 위한 행진곡’을 둘러싼 상황이 30년 전과 매우 유사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광주민중항쟁 발생 원인에 대한 이해를 높이기 위함이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광주민중항쟁이 전두환 정권의 의도된 폭력에 의해서 촉발되었다는 사실을 잘 모른다. 이것은 진보 진영도 예외는 아니다. 이는 광주항쟁의 역사적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는 데에 있어 문제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에 바로 잡을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가 이 글을 쓰는 이유다.

임을 위한 행진곡과 한국 민주화, 1987년 2017년

그러면 먼저 ‘임을 위한 행진곡’ 관련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1987년 9월 8일 김대중이 광주를 방문하자 수십만 명의 광주 시민이 모였다. 그리고 김대중의 망월동 묘역 참배에는 수 만 명의 사람들이 몰려들어서 입추의 여지가 없을 정도였다.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그리고 김대중은 다음과 같은 추도사를 낭독했다.

“나는 주어진 신문을 통해서 처음으로 광주의거를 알았고, 내가 그 배후 조종자로 조작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리고 광주시민이 계엄령 해제와 김대중 석방을 주장하면서 시위를 했고, 180여 명이 죽었다는 계엄사령부의 발표도 보았던 것입니다. 아! 그 기사를 읽을 당시의 나의 충격을 무엇으로 표현하겠습니까? … 나는 마침내 죽기로 결심했었습니다. 그것만이 내가 여러분과 같이 영원히 사는 길이며, 우리 국민과 역사 앞에 바르게 서는 길이라고 생각되었던 것입니다.”

김대중의 추도사가 끝난 이후 유가족을 비롯한 수만 명의 시민들은 ‘임을 위한 행진곡’을 불렀다. 광주 망월동 묘역에 이렇게 수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도 처음이며, 그 사람들이 이 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었던 것도 그 때가 처음이었다. 이는 한국 민주화의 진전을 상징했다.

1987년 6월 민주화 이후 광주항쟁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노력은 지속되었다. 그 결과 노태우 정권 때에는 광주청문회를 통해서 1980년 광주의 진실이 서서히 알려지게 되었다. 그리고 김영삼 정권은 5.18특별법을 제정하여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있어 큰 업적을 남겼으며 이것이 김대중-노무현 정권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발전은 이명박 정권 들어서면서부터 중단되었고 오히려 후퇴하게 되었다. 이명박 정권은 집권 2년 차인 2009년부터 ‘임을 위한 행진곡’ 제창을 수용하지 않았으며 이것이 2016년까지 이어졌다. 이것은 극우 세력들의 5.18 폄훼와 음해에 은근 슬쩍 동조하는 행위로써 1987년 민주화 이후의 성과를 무너트리는 것이었다.

그리고 5.18에 대한 이들의 반민주적, 반인권적 태도는 정권의 전반적인 성향과 관련되어 있었다. 세월호 사건에서 보여준 이들의 태도가 이를 증명한다. 그래서 정권교체 후 올해 5.18 기념식에서 ‘임을 위한 행진곡’을 정상적으로 부를 수 있게 된 것은 비정상화에서 정상화, 반민주에서 민주로의 이행을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근거가 된다.

1980년 광주항쟁이 위대한 이유


▲  사진은 1987년 9월 8일 광주 망월동 묘역에서 김대중이 유가족과 함께 통곡하는 모습. ⓒ 연
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
그 다음으로 광주항쟁 발생 원인과 관련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9월 8일 광주 망월동 추모 행사 광경을 보면 5.18유가족, 광주시민, 김대중은 운명공동체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대중이 유가족을 끌어안고 통곡하는 사진은 지금 보아도 마음이 아플 정도다. 이것은 1980년 광주항쟁 발생 원인과 관련해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아직도 많은 사람들은 1980년 광주 항쟁 발생 원인에 대해서 잘 모른다. 그리고 이것은 광주항쟁 발생 원인이 다른 항쟁과 다른 면이 있다는 점과 관련이 깊다. 광주항쟁은 국가 폭력이 항쟁 발생의 근본적인 원인이라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경우에 속한다.

전두환의 제2의 쿠데타로 불리는 1980년 5.17 비상계엄 확대 이후 5월 18일 오전에 광주 전남대학교에서 반대 시위가 있었다. 그러나 그 당시 조직화되지 않았던 수 백명 학생들의 시위는 공권력에 의해서 수그러들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4시부터 시내에 진출한 공수부대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의 잔인한 진압 작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당시 시위 규모나 상태 등을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것은 시위 진압이 근본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런데 19일에는 공수부대의 만행이 더욱 심해져서 광주는 피로 물들기 시작했다.

18일 오후에 있었던 공수부대의 만행은 순식간에 소문이 퍼졌다. 그리고 일요일이었던 18일과 달리 19일에는 신문이 발간되어 ‘김대중 체포’ 소식이 알려졌다. 이 모든 것이 유신 잔당인 전두환 신군부 세력의 폭거임을 알게 된 수천 명의 광주시민들이 거리로 나오게 되었다. 이 때부터 광주항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당시 상황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광주의 비극은 전두환 신군부 세력들의 의도된 폭력에 의해서 촉발되었다. 전두환 세력은 자신들의 쿠데타 진행 과정에 방해되는 세력에게 공포심을 주기 위해서 고의적으로 잔혹한 폭력을 사용한 것이다.

그런데 광주시민들은 자신들의 피를 통해 이와 같은 전두환 세력의 추악하고 검은 의도에 결정적인 타격을 주었다. 만일 5월 19일에 광주시민들이 거리로 나오지 않았다면 광주시민들이 대규모로 희생당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광주시민들은 전두환 세력을 향해 목숨을 건 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그 당시 광주시민들의 투쟁이 없었다면 전두환 정권 내내 이어진 대규모 민주화 투쟁은 나타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 그랬다면 한국의 민주화는 1987년보다 더 늦게, 더 좋지 않은 방향에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전두환이 김대중에 대한 사형집행을 끝내 하지 못한 결정적 이유는 미국의 압력 때문이었다. 미국은 1980년 광주의 비극을 통해서 씻을 수 없는 잘못을 저지른 전두환이 김대중에 대한 사형까지 집행하게 되면 전두환 정권이 흔들리게 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면 광주시민들은 자신들의 피를 통해서 한국의 민주화를 이끌어냈고 민주화 투사 김대중의 생명도 구한 것이다. 김대중은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9월 8일 김대중은 추도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광주는 오늘도 계속되고 있으며, 광주를 우회해서는 민족사의 올바른 전개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평화와 자유와 민주의 찬가가 울려퍼지는 그 날, 광주는 구원의 상징으로 영원한 별빛이 되어 민족의 앞길을 인도할 것입니다.”

이것은 민주주의와 평화적 통일을 동시에 추구한 김대중의 정치적 노선을 압축해서 보여준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민주주의와 평화적 통일은 1980년 광주민중항쟁의 역사적 의의라고 생각된다. 또한 이것은 오늘 문재인 대통령이 말한 내용에도 이어진다.

“목숨이 오가는 극한 상황에서도 절제력을 잃지 않고 민주주의를 지켜낸 광주정신은 그대로 촛불광장에서 부활했습니다. 촛불은 5·18민주화운동의 정신 위에서 국민주권시대를 열었습니다. 국민이 대한민국의 주인임을 선언했습니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의 뜻을 받드는 정부가 될 것임을 광주 영령들 앞에 천명합니다.”

문재인 정권은 촛불항쟁을 통해서 탄생할 수 있었다. 촛불항쟁을 통해서 지난 이명박-박근혜 정권으로 이어지는 신권위주의 체제를 종식시키고 새로운 민주주의 시대가 열릴 수 있게 된 것이다.

광주항쟁이 30년전 1987년 민주화를 이끌어냈듯이 촛불은 2017년 새로운 민주화 시대를 이끌어 낸 것이다. 그리고 촛불항쟁은 광주항쟁의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 문재인 대통령의 진단은 역사적 흐름 속에서 볼 때 매우 바람직하며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종합적으로 볼 때 필자는 30년 전인 1987년 9월 8일 김대중이 참석했던 추도 행사, 그리고 2017년 오늘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했던 추도 행사의 의미는 매우 크다고 생각한다. 광주항쟁을 통해서 이어지고 있는 한국 민주화의 성격을 압축적으로 보여주기 때문이다. ‘임을 위한 행진곡’ 그리고 유가족과 함께 두 정치 지도자의 눈물은 이것을 상징한다.

카테고리 : 생활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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