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비

 

길상사 사진을 찍지만 매번 가서 카메라를 들이대지는 않습니다.
어떤 날은 그냥 몸으로 길상사를 느끼러 가기도 합니다.
길상사 이 구석 저 구석을 둘러보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왼쪽으로는 자그마한 계곡이 있고 그 위쪽으로 스님들의 처소로 향하는 길에서 바로 이 팻말을 발견 했습니다. 열 번은 넘게 이 길을 다녔지만 보지 못했던 것을 본 것입니다.

‘자비심이란 이웃으로 향한 따뜻한 그 마음이 아니겠는가’
자비 사랑 인애 수도 없이 들어왔지만 이날만큼 사진속의 팻말을 보고 가슴이 뭉클 했던 적은 없었습니다.
‘아…그래…자비란 저런 것이지…’
길상사의 고요한 분위기에 젖어있던 내게 나무 둥치에 걸려있는 자비에 대한 가장 쉬운 설명은 더 이상 길상사를 경내를 소요하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 자리에서 맴맴 돌며 이웃으로 향한 따뜻한 마음, 따뜻한 마음을 되 뇌였습니다.
법정 스님이 올 하안거 입제 때 말씀하신 ‘친절’이란 단어도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깨닫지 못하고 좁아서 사전적인 의미의 글귀에 제가 감명 받았을지 모릅니다.
길상사에서 사진을 찍으며 저는 몸으로 ‘그 무엇’을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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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기경님의 방문

 

찬송가 대신 박수소리가 추기경님을 맞았습니다.
그 소리는 우뢰 같지는 않았지만  ‘추기경님이다’라는 함성과 합쳐져 세상 어느 박수보다 진심이 담겨진 것이었습니다. 공손하게 추기경을 부축하는 주지스님의 모습에서 추기경님을 맞는 길상사 4부대중의 마음가짐이 보입니다.
한국의 유일한 추기경이신 김수환 추기경께서 석가탄신일날 길상음악회에 오셨습니다.  

추기경님이 길상사 방문은 어려운 걸음 이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실천이요 자신을 온전히 바치는 보시였습니다. 몸이 불편한 당신의 어려움 보다는 세상의 도움이 필요한 이웃을 위해 헌신 하셨기에 추기경님의 길상사 방문은 사랑과 보시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게 했습니다. 종교 간의 알 듯 모를 듯한 벽이 남아있는 한국의 현실에서 가톨릭계 수장의 사찰 방문은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추기경님이 길상사에 오신 것만으로도 세간에 화제가 됐는데 그 목적이 국내입양을 돕는 성가정입양원을 위한 음악회 참석이었기에 사람들에게 입양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김수환 추기경께서 선종하셨습니다. 추기경과 법정스님 그리고 길상사와의 인연은 깊지요. 길상사의 관음석상 봉헌식 때 추기경께서는 길상사에 오셔서 법정스님과 길상사 사부대중에게 축하의 인삿말을 주셨고 부처님오신날 열리는 길상음악회 때도 가끔 오셨습니다.

위의 사진과 글은 2005년 부처님오신날 길상음악회에 오신 추기경님의 모습을 찍은 것입니다. 추기경님은 이때만에도 정정하셨고 음악회를 즐거운 표정으로 보셨습니다.

김수환 추기경님의 선종에 깊은 애도를 보내며 이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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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등 해결의 방법은-즉문즉설

정토회 법륜스님의 즉문즉설이 세간에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스님이 준비해 온 법문 대신 현장에서 불자들이 묻는 질문에 답하는 데 법문의 전달 방식이 색다르고 어떤 질문에도 답하는 내용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불러 일으키고 있어 얼마 전에는 즉문즉설이 책으로 까지 출간 돼 바 있다.

아래의 즉문즉설을 정토회의 홈페이지에서 발췌했다.

 

안녕하세요. 도반과 갈등이 있을 때 내 안으로 돌려 내려놓는다고 애쓰지만 돌아보면 참는 결과가 되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이럴 때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합니까?

사람과 사람 사이의 갈등은 가까이 있는 사람끼리 생깁니다. 상대의 성격이 나빠서, 고집불통이라서 갈등이 생기는 게 아니고 그런 사람도 멀리 있으면 갈등이 생기지 않습니다. 어쨌든 갈등이 생기는 사람은 나하고 가까이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에게는 누구나 다 자기중심성이 있습니다.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그렇습니다. 이것은 인간이 갖고 있는 하나의 특징이에요. 자기중심성이란 사물을 인식할 때 자기를 기준에 놓고 인식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앞, 뒤, 좌, 우를 말할 때 실제 공간상에 앞이 있고 뒤가 있고, 좌가 있고 우가 있는 건 아닙니다. 다만 자신을 기준으로 한 앞과 뒤, 좌와 우가 있다고 인식할 뿐입니다. 그러니까 나는 내 기준에서 세상을 인식하고 남편은 남편 기준에서 세상을 인식하고 자식은 자식 기준에서 세상을 인식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그럼 자기 기준을 왜 갖게 될까요? 사물을 인식할 때 자기를 중심에 놓고 인식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자기 기준을 불교 용어로는 ‘아상’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옳으니 그르니, 맞니 틀리니, 빠르니 늦으니 하는 분별을 늘 합니다. 그런 분별의 기준은 자신입니다. 상대방도 자기 기준에 따라 분별합니다. 이때 인식의 기준이 서로 다르니 분별이 서로 다를 수밖에 없어 갈등이 생깁니다. 이럴 때, 빠르고 더딘 게 본래 있는 게 아니고, 빠르다느니 더디다느니 하는 분별을 자기가 일으키고 있음을 알면 분별은 일어나더라도 고집을 하지 않게 되므로 갈등이 해소됩니다.

그런데 이런 이치를 이해해도 현실에서는 무의식적으로 감정이 일어나 앞서므로 잘 안 됩니다. 그럼 감정적으로는 왜 극복이 안 될까요? 지금까지 그렇게 해온 습관,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동안에도 작용하는 무의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게 업식입니다. 그 업식이 드러나는 것이 감정인데, 이 감정은 경계에 부딪힐 때 나도 모르게 무의식적이고 즉각적으로 일어납니다. 그럴 때 얼른 이성적으로 돌아가서 ‘이건 나를 기준으로 하기 때문에 생겨난 현상’이라고 깨달으면 그냥 사라지지만, 그때 알아차리지 못하면 계속 그 감정에 휩싸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감정이 오래 지속되기도 해서 때로는 10년, 20년, 30년까지 가기도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가슴에 못이 박히고, 한이 맺히지요.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런 마음 작용의 이치를 밝혀서 괴로움이 없는 삶을 살라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는 ‘나를 기준으로 해서 보니까 나에게 이런 감정이 생기는구나.’ 하고 내려놓는 것이고, 또 하나는 상대의 행위에 대해서 ‘아 저 사람이 자기 기준에서 보면 저렇게 감정이 일어날 수도 있겠구나, 저런 생각을 할 수가 있겠구나.’ 하고 이해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상대가 성질을 낼 때도 내가 편안해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즉각적인 반응,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내 감정은 당분간 계속 일어납니다. 왜냐하면 내가 깨어있지 못해서, 또 상대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해서 나도 모르게 경계에 부닥치면 무의식적으로 먼저 감정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간순간 깨어 있어라’ 하고 말하는 겁니다. 무엇보다 감정이 일어날 때 빨리 알아차려야 하고, 그래서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렇게 알아차리고 내려놓는 것을 반복함으로써 그런 무의식적 반응인 업식이 점점 약하게 되고 더 나아가 소멸되어가는 것입니다. 순간에 깨어 있는 힘이 커지면 실제 생활 속에서도 경계에 끄달리지 않는 초연한 상태가 점점 이루어집니다.

우선은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 없는 것을 목표로 삼지 말고, 갈등이 있는 그 현실을 인정하고 거기서 내 아상을 내려놓는 연습을 자꾸 해 보세요. 상대가 고집불통이라는 것은 그가 자기중심성이 강하다는 뜻도 있지만 그를 보는 내 중심성도 굉장히 강하다는 걸 말하는 거예요. 그 고집 센 성질을 꺾으려는 내 고집도 보통고집은 아니라는 거지요.

누구나 갈등 없이 자기 뜻대로 일이 되기를 원합니다. 조급하게 생각하지 말고 꾸준히 내 할 바를 다하고, 그렇게 자꾸 해나가면 결국은 해탈의 길로 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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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가의 서정

마음속에 두고 있는 서정은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보리밭 사이를 뛰놀 던 시골 출신들의 마음을 아련하게 하는 풍경과 아파트 속에서 평생을 보내고 있는 도시인들이 마음에 담고 있는 것은 천양지차라 해도 이상할 것이 없다.

내 서정의 바탕은  해질 무렵 대나무 밭에서 나는 참새 소리와 함께 하늘로 올라가는 연기에 오버랩 된 큰 집의 모습이다. 언듯 봤던 풍경이 정경이 되어 고이 고이 남을 줄 몰랐으니 다섯살 개구쟁이가 그것을 보지 않았더라면 내 안에는 어떤 게 남아있을지 모르겠다.

 

 

흔하디 흔한 풍경이지만 지금은 이런 모습도 발품을 팔아야 일별 할 수 있다.

한참을 걸어야 큰 냇가에 갈 수 있었지만 큰 집 바로뒤에는 10살 때 까지도 첨벙 댈 수 있는 도랑이 있었다. 도랑에 비치는 해는 본 기억이 없지만 붉은 해 탓에 도랑 색깔이 변하는 걸 보고 신기하다고 여긴 적이 있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시절 풍금소리에 맞춰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란 노래를 배울 때 큰 집 근처의 큰 냇가의 이 비슷한 광경을 떠올리곤 했다.

 

 

큰 어머니 손 잡고 봤던 강 건너 마을을 초등학교 4학년이 넘어가면서부터 혼자 보곤 했다. 멀리 멀리 있던 다리를 통해 마을을 가볼 수 도 있었지만 홀로 강둑 건너 먼 길을 걷기란 불가능했다. 큰 집의 큰 냇가의 수풀 가득한 좁은 강둑에 무서워하는 개들이 어슬렁거리고 그것보다 더 무서운 뱀을 피해 길을 가는 일은 큰 용기를 내야만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안개가 자욱하니 한강 너머 미사리가 수 십년전의 내가 가고 싶었던 마을과 비슷한 모양으로 변했다.

그 때는 호기심 가득한 시선으로 마을을 바라봤지만 지금은 추억의 눈으로 강 너머를 보며 사진을 찍는다. 저 곳에 무엇이 있는지는 훤희 알고 있다. 아무것도 몰랐을 땐 세상은 컷지만 세상사를 조금 알고나니 세상은 또 다른면으로 크고 넓다.

 

 

이름 모를 산들이 연이어 있다. 겹쳐지고 포개져있는 산들을 보는 일이 즐겁다. 추억을 되새김질 하기 때문이다. 저 산 너머에 뭐가 있을지 산속에 누가 사는지 궁금하지 않다.

세상을 모르고 살 때가 좋은 것인지 세상을 경계하며 살아가는 것이 좋은 것인지 헷갈린다. 전에는 사진 찍을 때 사람이 들어 간 장면을 찍었는데 지금은 정반대가 됐다. 사람도 세상에 존재하는 점이라는 생각이 강해진다.

역시 사람이 문제였다. 사람을 몰랐을 때 세상은 단지 세상이었으나 사람을 알고 나니 세상은 ”단지 세상”이 아니었다.사람을 몰랐던 시절의 정경을 만나니 숨통이 트이고 나도 모르게 카메라에 손이 갔다.

나는 물어야 한다. 나도 없는데 사람은 어딨고 세상은 어디있냐고. 자비는 버림에서 나오는 것임을 쬐끔 알았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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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천배 인도자

  천배를 넘게 했지만 처사님은 여전히 죽비를 힘 있게 들고 있습니다.
사진은 세 번째 절하는 시간에 촬영한 것입니다. 처사님이 죽비를 치며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면 절이 시작됩니다. 일 배 일 배가 처사님의 죽비 소리에 맞춰 진행됩니다.처사님은 삼천배의 인도자입니다.
길상사 3천배 수행은 50분절하고 십분 쉬는 형태로 다음날 새벽까지 이어집니다.
대략 계산을 해보면 한 시간에 5백배 정도를 하는 셈입니다.
삼천배를 하는 분도 하는 분이지만 그 분들의 절의 리듬을 잡아주어 삼천배를 완수하게 해주는 처사님의 공덕은 제 마음으로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흐트러지지 않는 처사님의 모습을 보고 그가 24시간 절을 해도 이처럼 꼿꼿한 자세를 유지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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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박한 집과 사랑

 

길상사 극락전은 수 십 칸이 넘는 큰 한옥 이지만 요란하지도 화려하지도 않습니다.
건물 일부의 모습도 그렇습니다. 문이 열려있거나 닫혀있어도 다 소박하게 보입니다.
단정한 모습으로 그 안에 앉아 계신 보살님 때문에 한옥도 사람도 더 단아하게 보입니다.
보살님은 극락전 안에 바르게 앉아 경을 읽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집이 고요하고 평화스러우니 그 안에 들어오는 사람도 그런 듯 합니다.

길상사라는 절 이름(寺名)에 걸 맞는 풍경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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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

 

사진을 찍은 후 세분의 관계를 물었습니다.
왼쪽 분이 중매를 섰다고 했습니다. 그제 서야 이해가 됐습니다.
순전히 제 생각 이지만 중매를 섰던 분과 아이 엄마의 기도는 감사의 기도였을 것 같습니다. 사람의 만남과 행복한 가정 그리고 건강한 아이. 인연으로 묶여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중매를 잘하면 술이 석잔 이라고 하는데 왼쪽 분은 능히 대접 받았을 것 같습니다.

아이도 함께 절을 했다면 이 사진보다 더 좋은 그림이 나왔을 테지만 그건 제 욕심이었습니다.
길상사를 찍다보니 평범한 사람들의 ‘작은 행복’과 ‘감사’의 모습도 덤으로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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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산 두개

 
파란 우산을 쫓아 연두색 우산이 따라가고 있습니다.
우산의 주인공들은 형제입니다. 앞서가는 파란 우산이 형입니다.
우산 둘은 어린이 예불 시간이 한참 지난 12시경 나란히 길상사 일주문에 나타났습니다. 둘은 몇 발자국을 같이 걷다가 경내 마당으로 향하는 계단에서 차이가 벌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파란 우산은 곧장 계단을 성큼성큼 걸어 올라왔지만 연두색 우산은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연두색 우산을 들은 아이의 나이는 기껏해야 다섯 살 정도로 보였습니다. 계단을 올라 경내 마당으로 들어선 파란 우산은 어린이 예불이 열리는 곳으로 곧장 향하다가 뒤따라오는 동생이 궁금한지 뒤를 돌아 봤습니다. 동생이 오질 않자 형은 동생을 기다렸습니다. 이윽고 동생이 계단의 마지막을 밟고 마당으로 올라서자 다시 형은 앞을 보고 가기 시작했습니다. 흐뭇한 광경 이었습니다.

우산 두개가 극락전 앞마당을 지나 왼쪽으로 가 길래 동생 뒤를 살금살금 따라가 형과 동생의 눈에 보이지 않는 우애를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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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과 아이

 
스님이 아이에게 대접한 것은 아이스크림이 아닌 차였습니다.
가만히 앉아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7월 어느 날 아이는 영문도 모른 채 아비의 손에 이끌려 생소한 스님 처소에 들어왔습니다. 차 봉지를 열고 물을 데우고 차 잎이 우려지는 동안 아이는 더워 죽을 지경 이었습니다. 10여분간의 기다림 끝에 아이는 스님으로부터 차를 대접 받고 있습니다. 객은 두 명 이었으나 스님은 먼저 이제 열 살 된 아이에게 백련차를 공손히 따르고 있습니다. 아이는 ‘이게 뭐야’하는 표정이 역력합니다. 아이는 스님이 하심(下心)으로 따랐던 차를 잠시 입에 가져갔을 뿐 뜨거운 것은 못 먹는 다며 거들떠보지도 않았습니다. 스님은 그런 아이를 나무라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아차 하시며 냉장고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생각해내곤 아이에게 권했습니다.

스님도 아마 이런 어린 아이에게 차를 따랐던 것은 처음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아이도 역시 생소한 경험을 했습니다. 이 장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던 아비인 저는 스님의 겸손한 모습을 카메라에 담게 되어 기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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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곡

 

길상사의 ‘계곡’ 입니다.
길상사를 모르더라도 옛 ‘대원각’을 와 보신 분이라면 길상사 경내 북에서 남으로 흐르는 작은 도랑이 있다는 걸 아실 겁니다.
이 물은 성북동의 훨씬 위쪽에서 내려오는 것으로 밑으로 내려가 성북천을 이룹니다.
경내의 도랑에는 그다지 많은 양의 물은 흐르지 않습니다.
하지만 물은 더할데 없이 맑으며 얼음장 처럼 차갑 습니다.

비가 꽤 내리자 그 작은 도랑에 사진에서 보듯이 훌륭한 계곡이 생겨 났습니다. 수량도 있어 보입니다. 낙차 때문인지 빗물과 합해진 계곡물은 작은 폭포라고 여겨질 정도의 그림을 만들어 냈습니다. 이날 계곡을 흐르는 물소리는 내리는 비의 그것과 함께 길상사 경내를 휘감았습니다.

평소 이 작은 도랑에서 흐르는 물소리에는 아취가 있습니다.
물소리가 하도 청아해 고기라도 있을까 물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지만 아쉽게도 고기는 보이지 않습니다. 이 맑은 물에 가재라도 살고 있으면 좋겠습니다.

대학로와 길상사는 걸어서 10-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습니다.
대학로면 서울의 복판인데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는 곳에 도량이 있고 그 도량안에 이런 아름다운 경치가 있다는 걸 상상이나 하실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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