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만 사진과 한국의 정서

”한국 사진을 대표하는 것은 무엇인가”
눈에 보이는 것은 무엇이고 정신은 무엇인가. 그 대표성은 누가 인정하는가. 한국 사진계에서도 이런 질문을 해야 할 때가 왔습니다. 국력과 예술의 상품성은 비례합니다. 현실입니다. 지금 뜨고 있는 중국 미술도 국력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인도 미술 역시 그렇습니다. 한국 사진도 국력을 바탕으로 용트림을 할 때가 왔습니다. 대표하는 사진가와 사진은 한국의 그것을 담아야 합니다.
현대성에 매몰 돼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는” 작품들이 범람하고 있습니다. 모르니 정교한 메커니즘에 입각한 ”만들기”가 횡행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도 즐기고 나도 즐기는” 사진을 김녕만은 찍어왔습니다. ”마음의 고향”이란 사진집은 그를 대표합니다. 수록된 사진 한 장 한 장에서 정서가 묻어 납니다. 느낌이 옵니다. 한국인이기때문입니다. 토속의 정취가 묻어나는 김녕만의 사진을 감상하시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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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고향”에서 발췌했습니다.


사진가 김녕만의 대표작 입니다. 작가의 동의 여부는 확신할 수 없으나 제가 보기엔 그렇습니다. 이 사진에는 일화가 있습니다. 중앙대 사진학과를 어렵게 다니던 청년 김녕만은 사진을 찍어 학비를 벌었습니다. 공모전에 사진을 출품하고 입상하면 받은 돈으로 학비를 댔던 것입니다. 이 사진 또한 공모전에서 입상한 작품 입니다. 고향에서 할아버지를 모델로 사진을 찍은 후 설레이는 마음으로 현상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갑자기 생긴 일 때문에 현상 탱크에서 필름을 꺼내지 못했습니다. 한참 후에 필름을 꺼낸 김녕만은 하늘이 노랬습니다. 공들여 찍은 사진이 현상이 오버돼 필름이 하얗게 변해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천우신조인지 이 한 컷만 윤곽이 남아있었습니다. 오버 현상은 컨트라스트를 강하게 했고 그 이유로 사진의 주제가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초가집 마당에 장닭 서너마리가 먹이를 쪼고 있습니다. 토방에 앉은 일가는 겨울의 햇볕을 받고 있습니다. 조류독감이 나라를 뒤숭숭하게 만드는 이즈음 사람과 닭이 공존하는 모습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사람인 우리가 혼자만 잘살려고 노력하지 않았더라면 애꿎은 목숨을 더 많이 건졌을텐데 욕심으로 무고한 축생(畜生)들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전북 고창의 70년대 모습 입니다.

아무리 70년대라고는 하지만 파격의 모습입니다. 70가까이 된 할머니께서 탁주 한 사발을 시원하게 들이키고 안주를 집고 있습니다. 아마도 할머니는 한 잔 더 걸치신 후에 아리랑을 불렀을 것 같습니다. ”아리랑~ 아리라~앙 아라~리~요” 당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가슴으로 울었을 것 같습니다. 먼저 떠난 영감은 좋은데 갔는지 전주에 사는 아들 딸은 잘 사는지 생각하고 또 생각했을 것입니다. 어머니의 어머니는 이런 삶을 사셨습니다.

자식 운동회에 온 엄마들이 힘차게 뜀박질을 하고 있습니다. 가운데 어머니는 늦동이를 보셨는지 다른 분 보다 나이가 더 들어보입니다. 앞에 뒤꿈치가 있는 걸 보면 이 어머니들 보다 뜀박질을 잘하는 선수가 있는 가 봅니다. 자식 기 안죽일려고 이를 악문 어머니들입니다. 한국의 어머니들은 예나 지금이나 자식이라면 당신을 버렸습니다.

주객이 전도됐습니다. 돼지는 손수레에 편히 앉아 가고 사람은 눈길에 낑낑댑니다. 5일장에 팔러가는 돼지인지 아니면 씨를 뿌리러 가는 길인지 모르나 함부로 다루면 안되는 돼지인가 봅니다. 췌언 이지만 흑돼지를 꿈에서 보면 운수대통한다고 합니다.^^

우마차를 타는 기분을 아시는지요. 고무신 질질 끌고 10리 길을 가려면 시간이 참 많이 걸렸습니다. 고무신 속에서 연방 미끌어지는 맨발은 야속했습니다. 뛰다가 걷다가 오줌 한 번 누고…어린나이에 십 리 길은 멀었습니다. 동네 아저씨가 모는 소달구지를 만나면 횡재한 거나 진배 없습니다. 아저씨는 쉬 태워줄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안태워 주면 아저씨 몰래 엉덩이를 살짝 걸치 곤 했습니다. 무게 때문에 소가 천천히 가면 아저씨는 ”이놈들”하고 내쫓았습니다. 실랑이를 몇 번 하다보면 어느새 우리 동네가 나왔습니다.

공부도 공부지만 집안일을 도와주는 것도 중요했습니다. 70년대 후반의 전북 고창에서 찍은 것입니다. 학교 갔다 온 아이는 꼴 베러 혹은 소 데릴러 가야했습니다. 숙제는 그 다음일 이었습니다. 중요한 재산인 소를 잘못 몰고 오면 아부지의 불호령이 떨어졌습니다. 풀을 더 먹으려는 소를 끌고 가야하는 절실함이 소녀의 표정에 묻어납니다.br>

우리는 이렇게 살았습니다. 작은 방에서 흙 마당에서 자고 놀았습니다. 어느 땐 소가 돼지가 친구였습니다. 돌아가고 싶지만 갈 수 없습니다. 향수로 간직할 뿐입니다.
사진가 김만에게 감사합니다. 그가 이런 모습을 담지 않았다면 아이들에게 할머니 할아버지 엄마 아빠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보여 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진가 김녕만은 동아일보 대선배 입니다. 동아일보 사진부를 거쳐 간 수많은 선배 중에 유독 세분만이 사진 찍기를 천직으로 알고 계시는데 그 중 한 분입니다. 평소와 달리 사진 중간에 ”김녕만”이란 워터마크를 찍었습니다. 무단 복제를 막기 위함입니다. 혜량해 주시길 바랍니다.

포스트 모던은 우리가 정복했던 잊고 있었던 것들로 회귀 하는 것이라고 진중권은 말했습니다.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김선배의 사진은 바로 이 정신을 대표하는 사진인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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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1) 김녕만 사진과 한국의 정서

  1. Seeker says:

    귀중한 사진들 감사합니다. 신문 보도 사진으로 이런 철학이 있는 사진들이 실려야 합니다.

    이 시대에 카메라는 비싼 물건이었죠. 가죽 케이스에 넣어서 장농 깊숙히 넣었다가 창경원 갈 때 집안 잔치 때나 잠깐 꺼내서 썼던 물건입니다. 거리 사진이나 사람 사진 찍는 건 미국 사람들이나 하던 짓이었습니다. 예술성까지 갖춘 이런 시대적 사진들은 흔치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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