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거리의 분향소'에서 조문해야 할까?

  “덕수궁 대한문보다는 고인에게 의미 있는 장소나 학교, 공공기관
등 실내에서 진행한다면 경찰과 시민들이 이렇게 대치할 일도 없을 텐데요.”

 

  5월 30일 오후 11시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 마련된 분향소 앞에서
경찰과 시민이 몇 시간째 대치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던 한 경찰관계자의 말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식을 국민장으로 치르기로 결정한 24일 이후
서울 곳곳에 국민장 분향소가 마련되었고 이와는 별도로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에도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마련한 시민 분향소가 차려졌다. 영결식 전날인 28일까지 이곳
분향소에는 10만 명이 넘는 시민들이 다녀갔다. 줄지은 조문객들은 덕수궁 돌담길을
따라 정동극장을 거쳐 경향신문사 건물에서 서대문로터리까지 이어지는 장관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많은 시민들이 모이다보니 여러 불편이 야기되기도
한다. 덕수궁 대한문 앞은 공간이 협소한 데 반해 지하철 1, 2호선이 지나는 시청역
인근인 데다 교통량도 많은 도심이라 평소 유동인구가 많기 때문이다. 30일 오전
경찰은 이런 이유로 덕수궁 분향소 일부를 철거하려다 저항하는 시민들과 부딪혀
주말 내내 소요를 빚기도 했다.

 

  반면 실내나 넓은 장소에 위치한 분향소들의 경우 이런 문제가 없었다.
각각 2만 명, 5만 명의 시민들이 찾은 서울역사박물관 분향소와 서울역광장 분향소가
그 예다. 40만 추모열풍을 일으킨 지난 2월 김수환 추기경 선종 때에도 추모식이
명동성당 안에서 진행된 만큼 경찰은 최소한의 병력만 출동시켰다.

 

 

  외국의 경우에도 추모식은 주로 실내나 넓은 공간에서 진행된다.
생전에 높은 대중적 인기를 누린 로널드 레이건 미국 제40대 대통령 추모식이 좋은
예다. 2004년 지병으로 사망한 그의 시신은 영결식 후 한동안 캘리포니아 시미밸리의
레이건대통령 기념도서관에 안치돼 일반 시민들의 조문을 받았다. 1분의 추모를 위해
10시간을 기다릴 정도로 줄이 길었지만 도심에서 떨어진 한적한 도서관의 내부에서
진행된 까닭에 교통체증과 같은 소요는 전혀 없었다. 미 전역의 지자체, 시민단체들도
추모공간을 마련했지만 대부분 실내이거나 한적한 시외 공간에 위치했다.

 

  30일 종로 도심을 통과해 출퇴근한다는 한 시민은 “추모제는 경건한
의식인 만큼 실내나 도시 외곽 같이 조용한 곳에서 진행하는 게 고인에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며 “노랫소리와 구호가 울리는 도심은 진지한 조문의 의미를 살리기 어려운
공간인 것 같다”고 말했다. 고인의 영정 앞에서 막대와 방패를 들고 대치하는 것은
누구도 원하는 일이 아닐 것이다. 막대, 방패로 대치할 필요가 없는 곳으로 옮기는
타협과 합의의 정신을 도출해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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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현직 의원, 장차관들의 '불편한 하루'

  서거 당일인 23일 전·현직 국회의원, 장·차관 등 수많은
인사가 노무현 대통령의 분향소가 마련된 봉하마을을 찾았다. 이들 중 많은 수가
마을회관 뒤에 위치한 빌라 건물과 인근 모텔에서 하루를 묵었다. 내로라하는 고위급
인사들이지만 협소한 공간 탓에 대부분 ‘불편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

 

<23일 봉하마을로 들어오는 노무현 대통령의 시신과 참여정부 측근들>

 

  전·현직 의원과 장·차관이 묵은 빌라는 봉하마을 건립
당시 수행원들 및 일반인에게 분양할 목적으로 지은 곳. 현재 3채가 비어있어 종종
노 전 대통령의 손님을 위한 숙소로 쓰였다. 한 채 당 24~27평에 불과한 빌라에 참여정부
관료를 포함한 100여 명의 인사가 묵다보니 자리가 좁을 수밖에 없었다.

 

 

  청와대 전직 관료인 김모 씨는 “대부분 새우잠을 잤다”며 “제대로
잠을 청할 분위기가 아니었던 데다 자리도 부족했다”고 말했다. 빌라에서 하루를
지새운 천호선 전 청와대 대변인은 “밤이 되니 추워져 얇은 이불을 나눠 드렸는데
아마도 모자랐을 것”이라며 “일부 전직 의원, 장관들은 양복을 덮고 잔 것 같다”고
말했다.

<부엉이바위에서 내려다 본 봉하마을 전경>

 

  쌀쌀한 밤 선잠을 청한 일부는 감기에 걸리기도 했다. 24일 아침
붉게 상기된 얼굴로 빌라에서 나온 민주당 이화영 의원은 “거실에서 잤다”며 피곤한
기색을 보였다. 이 의원의 측근은 이 의원이 불편한 잠자리 탓에 감기에 걸렸다고
전했다.    

 

  불편한 하루를 피해 인근 모텔을 찾아 나선 이들 가운데는 가까운
곳에서 모텔을 찾지 못해 한참을 헤맨 이들도 많았다. 스스로 불편한 밤을 택한 한
명인 민주당의 김민석 최고위원은 “편하게 잠자기를 기대할 자리가 아니지 않느냐”며
더 이상의 말을 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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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대병원으로 향하는 길에

  믿을 수 없는 소식을 접하고 황망한 마음에 끼적인다.

 

  아침 9시경, 갑작스레 회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미지야, 좀 나와
줘야겠다.” 이런 일이 자주 있기 때문에 별로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다음 말은
나의 모든 생각을 얼어버리게 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자살했을 지도 모른다는구나.”

 

  ‘설마…’ 하던 생각은 5분도 채 지나지 않아 두려운 확신으로 굳어져
갔다.
언론사마다 쏟아지는 뉴스들. 경찰 발표. 문재인 변호사의 브리핑. 회사에 발 도장
찍자마자 김해공항으로 가는 차편을 잡아타고 달리는 동안 난 이 너무도 놀라운 소식을
머릿속으로 정리할 여유가 필요했다. 하지만 쏟아지는 뉴스와 울리는 전화통은 그런 여유를
허용치 않았다.

 

  독자의 항의전화. “그래, 이제 노무현 죽으니까 속 시원하냐?”
화부터 나기에 앞서 가슴이 아팠다. 사람이 죽었다는데, 그의
이념과 정치색과 모든 행적을 앞서 기분이 좋을 이가 어디 있겠는가. 할 말을 잃고
그저 멍하니 독자의 말을 듣다가 “그럴 리 있나요, 독자님. 왜 전화가 저한테 연결되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당직기자가 나로 바뀌어 있었던 모양이다) 저희 그렇게 느끼지 않습니다.” 아무리 항변해 봐도 이미 생각이
굳어진 독자의 귀에는 ‘경 읽기’로 들릴 뿐이다.

 

  공항에 도착해 헐레벌떡 앞에 있는 택시를 잡아타고 정신없이 양산
부산대병원으로 달리는 길. 머릿속에는 여전히 정리되지 않은 생각과 복잡한 기분과,
그를 한때나마 응원했던(그래도 우리나라 대통령인데…하며) 과거의
내가 만수산 드렁칡처럼 얽혀 혼란스러운 가운데, 이제 곧 현장을 맞이하게 된다는
생각에 속이 울렁인다.

 

  왜 죽었을까. 왜. 왜. 왜. 어느덧 저 앞에 양산 부산대병원 팻말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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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연 씨 수사결과는 쥐??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 태산이 떠나갈 듯 요란을 떨더니 나온 건 쥐
한 마리).

 

 

총 42일에 걸쳐 41명의 전담인력 투입한 장자연 씨 자살사건 수사 결과에 어울리는
말이다. 경찰은 집과 사무실 등 27개소를 압수수색하고 컴퓨터·주소록·회계장부
등 총 842점의 자료와 통화내역 14만여 건, 계좌·카드 사용내역 955건, 10개소
CCTV 조사했지만 수사대상자 20명, 관련 참고인 118명 가운데 3명을 기소하는 데
그쳤다. 수사대상자 가운데 유력 언론사 대표와 금융인 등 세간의 관심을 모은 이들도
있었지만 혐의가 인정된 사람은 없다.

 

경찰의 수사는 그 과정에서부터 논란이 많았다. 언론보도를 뒤늦게 쫓아가는가
하면 수사에 있어 허둥지둥 대는 모습을 보였다. 장 씨 소속사 사무실이 위치했던
강남구 삼성동 40-9번지 건물은 스포츠지가 보도한 후 부랴부랴 조사에 들어갔고,
압수수색을 먼저한 다음 과학수사대를 파견해 증거물을 채취하는 등 뒤바뀐 순서를
보였다.    

 

조사대상자와 그 혐의 내용을 전적으로 비밀에 부쳐 여론의 빈축을 사기도 했다.
4월 3일 경찰은 공식브리핑을 통해 수사 후 대상자들의 신원과 혐의를 모두 공개하겠다고
밝혔다가 단 8시간 만에 이를 번복했다. 이후 경찰은 기자들의 관련 질의에 “확인해줄
수 없다”는 답으로 일관하며 14일 이후부터는 그나마 있었던 정기적인 브리핑 일정마저
일방적으로 취소해버렸다.

 

 

초미의 관심사였던 유력 언론사 대표의 조사도 의혹을 남겼다. 조사는 수사결과발표
하루를 앞두고 극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동안 경찰은 ‘갖은 방법을 동원해 조사를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지만 접촉하는 데만 근 한 달을 소모했다. 만난 지 하루 만에
무혐의 결과를 내면서 “이미 (진술을 제외한) 모든 조사가 다 끝난 상태였다”고
해명했지만, 장 씨가 접대 대상자로 방 씨를 지목한 이유에 대해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면서 여론의 의혹은 피할 수 없게 됐다.

 

결국 3월 14일에 시작한 수사는 소속사 대표 김 씨의 조사에 따라 혐의가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는 수많은 ‘사법처리중지’자들만 남긴 채 어중간하게 봉합됐다.
경찰은 지난 40여 일간 그랬던 것처럼 일본으로 도망간 김 씨가 잡혀오기만을 기다려야
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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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당경찰서에서

<탤런트 고 장자연 씨의 영정>

 

분당경찰서는 지난해 경기지방경찰청에서 발표한 형사과 실적 순위에서 최하위권을
기록했다. 마무리까지 많은 시간을 소모하는 큰 사건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올해 1분기 실적 발표가 얼마 안 남았지만 이번에도 형사들의 기대는 크게 다르지
않다. 3월 14일 탤런트 장자연 씨 자살사건 수사가 재개된 후 한 달 넘게 형사과
인력 전체가 장 씨 사건에만 매달려 있는 탓이다.

 

경기지방경찰청 인력을 더해 27명의 전담팀을 꾸렸던 분당경찰서는 현재 그 인원을
41명으로 증원한 상태다. 지방청 인력을 빼면 분당경찰서 형사들은 30여 명 남짓이지만
사실상 44명 형사과 전체가 전담팀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종 서류작업, 압수수색,
방문조사 등이 있을 때면 수시로 전담팀 외의 인력들이 동원되기 때문이다.  

 

<장 씨가 남긴 문건 일부>

 

문제는 형사가 일을 못 한다고 해서 매일 들어오던 사건도 줄어주는 건 아니라는
것. 이미 조사 중이던 사건에 더해 당직사건은 계속 쌓여 가는데 인력이 태부족한
탓에 대부분 ‘수사유예’ 상태다. 전담팀이 꾸려질 경우 일선서 업무보다 전담팀
업무를 우선해야 하기 때문에 본 업무에는 거의 손을 놓아야 한다.

 

2월 15일 터진 성남 판교 SK케미컬 공사현장 붕괴사고 역시 장 씨 사건으로 경찰서가
마비되면서 발생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 결론이 나오지 않은 상태다. SK 본사는 물론
하청업체와 설계감리회사, 토지공사 등 수 개의 업체를 조사해야 하는 방대한 작업에도
불구하고 현재 이 사건을 맡고 있는 형사는 형사팀장 두 명에 불과하다.

 

일반 형사들의 경우에는 SK 사건 때부터 따지면 근 두 달째 ‘투잡’ 생활을 하고
있다. 물론 공식적으로 당직사건만 처리하도록 배당된 인원도 있다. 형사 3개 팀
인력 일부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 장 씨 사건의 잡무에 동원되고 있어서 주7일 근무하고도
잠잘 시간조차 부족한 상황이다. 전담팀에 투입된 한 형사는 “이럴 시간에 다른
형사들 도와 도둑 한 놈 더 잡아야 하는데”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일선 경찰서의 ‘올인 비상체제’는 비단 장 씨 사건에만 국한된 일은 아니다.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사건이 터질 때마다 경찰의 치안과 민원해결 기능이 마비되는
상황은 반복된다. 지난 2월 경찰이 피해자를 구하기 위해 모조지폐를 이용해 화제가
됐던 제과점 여주인 납치사건 때도 담당서인 양천경찰서 형사 6개 팀 전원이 사건에
올인하면서 민원사건 처리가 거의 마비된 바 있다.  

 

미국 등 선진국은 대형 사건이 터지면 광역 단위에서 전문 인력을 모집해 태스크포스(task
force)를 구성하고 나머지 형사들은 그 일과 관계없이 원래 업무에 전념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준다고 한다. 우리도 전담팀 운영에 있어 보다 효율적인 묘를 고민해봐야
할 때가 아닐까. 두 마리 토끼를 잡으려다간 둘 다 놓치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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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습을 나서며

 “무슨 여자 분이 손에 그렇게 상처가 많아요?”

 

  근 1년 만에 어렵게 성사시킨 소개팅에서 처음 들은 말이었다. 나도
내 손을 보니 측은한 마음에 유구무언이었다. 검게 그을린 손등에 마치 담뱃불로
지진 듯한 둥근 상처 자국이 점점이 이어졌다. 상처인지 깊게 파인 주름인지 구분가지
않는 갈라진 상처도 여럿이었다. 웬만한 농꾼 아낙의 손도 이보다는 곱지 않을까.
경찰서에서의 수습 4개월, 그 고생길을 대변하고 있는 듯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루 취침시간 두 시간 미만, 하루 네댓 개 경찰서 무한 순회, 추위와
배고픔, 끊임없이 이어지는 지시와 보고. 그 어느 직종의 수습도 이처럼 몸으로 고되지는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 즈음 한 달이 지나 있었고, 자체 조절능력이 한계에 달했다고
느낄 때 즈음 두 달이 되어가고 있었고, 내 원래 일상이 가물가물해질 때 즈음이
세 달, 그리고 이제 좀 할만 하다는 느낌이 들 즈음에는 어느덧 네 달째에 도달해
있었다. “야, 살아있냐?”라는 친구들의 연락이 거듭되다 못해 ‘정말 내가 살아있을까’라는
의심이 들기 시작할 때 즈음, 캡이 ‘끝’을 선언하셨다. 믿기지 않았다.

 

 

  마냥 좋았냐고? 솔직히 말하면 시원섭섭했다. 난 ‘경찰서체질’인지
의외로 매일 밤 계속되는 형사들과의 밀고 당기기 게임이 싫지 않았고 온종일 추위에
배곯으며 국세청장 부인을 기다려도 지나고 나면 즐거운 추억만 남았다. 특히나 어느
한 곳에 구애받지 않고 다양한 사람과 장소를 만난 것은 매일의 활력소로 작용했다.
박카스 선전에서나 볼 법한 젊음의 모험과 실수(버스에서 잠들어 종점까지 가거나
서울 시내를 스쿠터 속도로 뛰고 남의 집 앞에서 밤새 기다리고 등등)까지 곁들여져
난 언제부터인가 다른 범인들의 일상과 다른 일탈 속에 살고 있다는 생각에 뿌듯한
마음까지 들기 시작했다.

 

 

 

  “제대로 하는 게 하나도 없다.”

 

  한 선배께 이 말을 들었을 때 ‘제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네요’라고
대꾸하고 싶은 걸 꾹 참았던 기억이 난다. 잘못한 것도 많았고 실수한 것도, 부족한
것도 많은 그야말로 좌충우돌 수습기였지만, 선배들께 혼도 많이 나고 실망도 많이
안겨드린 시간이었지만(그리고 나의 알토란 같던 손도 농꾼의 칡뿌리 같은 손으로
만들어버린 시간이었지만), 난 딱 하나 자신 있게 제대로 했고 그래서 흐뭇다고 말하고
싶다. 무엇보다도 내 자신이 정말 “즐거웠다!”는 것. 가감 없이, 난 정말 즐겼다.
그래서 나의 좌충우돌 수습기는 누구의 앞에서도, 그 어떤 질타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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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끼적이다… "2008세계보도사진전"

  난 보도사진을 참 좋아한다. 많은 생각을 하지 않고 볼 수 있어 좋다. 장면이 담은 호흡, 장단, 동작 모든 것은 꾸밈이 없다(물론 때때로 불가피한 꾸밈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당시의 현장, 순간을 담고 있다. 그리고 난 그 즉시성이 좋다. 사진의 가장 큰 매력이 아니겠는가.   당장에 있는 그대로를 생생하게 담아낼 수 있다는 것.

 

 

최근 사진전들이 많이 열리는데 그 중에서도 기회가 되면 꼭 가보는 것이 보도사진전이다. 사진부 교육 일환으로 ‘2008세계보도사진전’을 관람한다고 했을 때 무척 기뻤던 이유다. 비교적 밋밋한 전시회이긴 했지만 그래도 세상에 대한 시각과 감각을 높일 수 있는 기회였다. 몰랐던 사건과 사실을 알게 되었다는 점에서 그랬고, 그걸 담은 각도와 프레임의 새로움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랬고, 또 그걸 보며 내 안의 사명 같은 것을 되새길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랬다.

 

 

  사명? 너무 거창한 말이라면 ‘소(小)명’ 정도로 해두자. 항상 많이 보고 많이 알아야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다. 어느 날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시초는 어릴 적 나의 기억 속에 생생하게 남아있는 ‘보도사진의 추억’이었다. 유치원 때인가, 한 잡지사에서 출간한 구한말~일제시대 사진 모음집을 본 것인데 고작 1세기 전 이 땅에서 있었던 일을 지극히 사실적이고 충격적으로 담은 사진들에 놀랐던 기억이다. 몇몇 장면들은 너무도 끔찍한 것이어서 난 한동안 그 사진집이 꽂혀있던 아빠 방 가까이도 가지 않았다(20년이 지난 지금도 ‘외상후스트레스성장애PTSD-아빠 방 근처에만 가면 묘한 소름이 돋는’를 겪고 있다).

 

  그때 이후 난 역사라는 것에 처음으로 관심을 가지게 됐다. 어떻게 해서 사진에서 본 그런 일들이 일어나고 일어나야만 했는지 알고 싶었던 것이다. 그 관심이 대학까지 이어져 역사학과에 진학했고 이젠 기자라는 직함을 달고 서있다. 내가 보도사진을 좋아하는 이유는 이런 삶의 궤적과도 맞물려있다.

 

 

  이번 사진전은 소소한 규모였다. 크게 유명하거나 충격을 주는 사진은 없었지만 최근 사람 얼굴을 가까이 당겨 찍는 사진들에 눈이 가는지라 그런 사진들 몇 개가 기억에 남았다. 얼굴에 두건을 두른 여자의 사진<아래>도 그 중 하나다. 이라크 내 쿠르드반군의 한 사람으로 보이는데, 잿빛 상의와 대비되는 꽃무늬 두건, 뿌연 배경을 등지고 살포시 웃음을 머금은 눈매가 참 모순적이다. 그 어슷한 사선 배치까지. 불안하면서도 어쩐지 사람을 당기는 매력이 있었다. 그 여인은 왜 웃고 있는 걸까. 왜 예쁜 꽃무늬 두건을 둘러맸을까. 전쟁과 미움과 가난을 등에 진 사람의 얼굴엔 묘한 휴머니즘이 담겼다. 사진을 찍으니까 잠시 웃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순간이라 해도 곧 현실이고 현장이다. 그 여인은 이라크와 싸우고 쿠르드 국가 건설을 위해 일조하면서도 그녀만의 매일 매일을 살 테니까. “나도 여자랍니다~” 수줍게 웃는 그녀는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이제 기자의 길목에 들어선 내게 보도사진은 더욱 뜻 깊게 다가온다.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 갖가지 인간과 인간사를 담는 프레임, 이것은 곧 기자가 쓰는 글과 같은 선상에 있기 때문이다. 전시관을 나서며 사진부 선배가 강의에서 하신 말씀을 상기했다. “기자든 사진기자든 기본적으로 (피사체에 대한) 애정이 있어야 돼.” 난 많이 알고 싶고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래서 많이 보고 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건 기본적으로 내가 이 세상을 너무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를 재차 일깨워준 전시회 사진들에 소소한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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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유별녀의 입사성공기 – 어리버리에서 얼리버드 되기까지

  “지금 절 의심하시는 거예요?”

 

  11월 16일 신촌의 한 미용실, 손님 서너 명의 눈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트리트먼트 시술과 펌을 함께 해야만 머릿결이 상하지 않는다’는 미용사 선생님 말씀에 그 이유를 여쭈었던 것뿐인데. 쉬이 풀리지 않는 궁금증 때문에 질의응답이 40여 분간 계속됐고, 급기야 미용사 선생님을 화나게 만들고 만 것이다.

 

  “제가 못 미더우시면 디자이너 바꾸셔도 돼요.”

 

  “아니에요. 전 그냥 궁금해서 계속 여쭌 건데…”

 

  한참 내 진의를 설명한 후에야 미용사 선생님의 오해를 풀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내 삶에서 이런 일은 부지기수다. 식당에선 음식 맛에 대해 꼬치꼬치 캐묻고, 옷가게에 가면 옷의 시시콜콜한 부분에 대해서까지 알려하고, 은행에 가면 모르는 단어와 상품을 죄다 탐문한다. 그러면 대부분 상대방은 불편해한다. “왜요? 뭐가 잘못됐나요?” 아뇨, 난 그저 단순하게 궁금했을 뿐인데요. 나의 행동이 남들과 다르게 유별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기자 준비 한 번 해보는 것이 어때?”

 

  2006년의 끝자락, 한 지인이 내게 이렇게 말했을 때 그 남다른 ‘유별남’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어쩌면 학창시절 때부터 꾸준히 학보사, 방송부에서 활동해온 것도 나의 미래를 예시한 것일지 몰랐다. 당장 대학원에 휴학계를 냈다. 나의 언론고시 생활은 그렇게 시작됐다.

 

  처음은 막막했다. 학보사 경험이 있다고 해도 애초에 ‘out of 안중’이었던 기자직에 도전하려니 배운 것도, 일궈놓은 경력 하나도 없었다. 난 심지어 앵커(아나운서)와 기자를 구분하지도 못했다. 무작정 아나운서 아카데미로 향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기사 리포팅 실력 향상에 큰 도움을 주긴 했지만, 리포팅 면접에 앞서 통과해야 할 필기시험엔 아무런 도움이 안 됐다. 리포팅 실력 향상이란 것도 비용 대비 미미한 것이었다. 3월쯤 아카데미를 나왔다. 그리고 다음의 아랑 카페를 찾았다.

 

 

<스터디 중>

 

  일반적으로 언론고시 초입엔 아랑 카페를 통해 일면식 없는 사람들과 스터디를 꾸리게 된다. 나 역시 그랬는데, 처음 몇 번은 시행착오를 겪기 마련이다. 온라인상에서 서로의 실력을 검증한다는 명목 하에 논작문을 돌려보긴 하지만, 직접 만나보면 온라인에서 기대한 실력과 페르소나가 아닌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다 언론고시 경력이 쌓이다 보면 양질의 스터디 문이 열린다. 나의 경우 운 좋게 첫 시험이었던 Y사 공채에서 최종단계까지 올라감으로써 단시간에 그 문을 두드릴 수 있었다.

 

  2007년 Y사 공채는 그야말로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을 실감할 수 있는 기회였다. 운 좋게 준비했던 논술 주제가 나와 필기시험 통과, 1차 면접 때는 아나운서 아카데미에서 배운대로 리포팅 원활히 수행해 통과, 실무단계에선 연습 삼아 본다는 기분으로 당당히 임해 제법 좋은 성적을 받았다. 밑천 부족으로 결국 최종 낙방하긴 했지만, 이 일을 계기로 난 언론고시에 상당한 자신감을 얻었다. 준비 시작한지 한 달 만에 최종이라니. 별 것 아니란 생각마저 들었다.

 

  그것이 터무니없는 자신감임을 알게 된 것은 이어진 연이은 필기낙방 때문이다. Y사 이후 치러진 공채 가운데 필기를 통과한 시험은 단 하나도 없다. 굳이 따지자면 H사 1차 필기 통과가 있지만, 상식시험이었으므로 논외. 면접만 간대도 어떻게 승부수를 내볼 수 있을 것 같은데 바라는 것처럼 쉽지 않았다. 낙방, 낙방, 낙방 성적표를 받다보니 어느덧 연말이었다. 부모님은 물론 친지, 학교 친구, 선후배 모두에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이것이 재수생이라는 거구나. 내 인생에 재수란 없다고 자부해왔었는데, 오만이었다.

 

  그렇게 의도치 않은 겨울방학을 맞으며 난 마음가짐, 몸가짐을 새로이 할 필요성을 느꼈다. ‘새해 필기 all통과!’ 새 목표를 세웠다. 그에 걸맞게 빡빡한 일정표를 짰다. 열심히 하고 실력도 좋은 지인들 중심으로 스터디 3개(온라인 1개, 오프라인 2개)를 구성하고 매주 논작문 4개 이상, 그 중 2개 이상 다시 쓴다는 계획이었다. 한 주에 한 권 이상의 책을 읽자는 다짐도 했다. 물론 이 다짐은 2달도 못 가 유야무야되고 말았지만, 그래도 내 나름의 압력을 가한 덕에 꽤나 많은 책을 완독할 수 있었다. 사회과학 서적부터 소설에 이르기까지, 도움이 될 만한 것은 닥치는 대로 읽었다. 학부 전공이 사회학과 역사학이었던 것은 정말 크나큰 축복이었다. 기본 지식을 숙지한 덕에 웬만한 사회과학 서적은 별 어려움 없이 읽을 수 있었다. 교양서이든 소설이든 인상적인 문구나 도움이 될 만한 정보는 꼭 개인수첩에 메모했다.

 

<공채시험과 스터디 일정으로 가득 찼던 책상 앞 달력>

 

  신문도 더욱 꼼꼼히 보기 시작했다. 수첩을 따로 준비해 논작문 쓸 때나 토론할 때 도움이 될 만한 정보들을 일일이 손으로 옮겨 적었다. 스크랩하지 않고 굳이 속기한 이유는, 적으면서 한 번이라도 더 되새기기 위해서다. 내가 구독하는 신문 두 개 가운데 하나는 매주 논술 섹션을 발행했는데, 내용이 괜찮아서 꼭 모아두고 틈틈이 논술로 풀어보았다. 여러 주제를 접할 수 있는 데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환기하는 기회도 돼 좋았다.

 

  스터디원들과 함께 한 토론 역시 큰 도움이 됐다. 첫 해와 달리 준비 2년째가 되면 아는 사람도 늘고 내 실력도 ‘중후’해져 금세 좋은 스터디를 구할 수 있었다. 나 역시 그런 스터디 3개를 구했는데 구성원들 모두 경력자에 열심인지라 토론을 하면 다양한 아이디어와 격론이 쏟아졌다. 보통 주제는 이전 시간에 정하고 발제자를 뽑아 그가 올린 발제에 맞춰 하루 정도 토론할 내용을 준비했다. 다양한 시사문제에 대해 나의 입장을 정립하고 논리를 연마하는 데는 이만한 속성법이 없었다. 나의 경우 모 방송사 토론 프로그램 시민논객과 신문사 인턴, 시사 잡지의 모니터링 요원도 겸하면서 더욱 다양한 의견을 접할 수 있었다. 이런 경험은 필기시험뿐만 아니라 1, 2차, 최종 면접에서 떨지 않고 조리 있게 말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신문사 인턴동기들과 함께>

 

 

  그렇게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자 슬슬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필기에 붙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최종에서 낙방하는 일은 여전했지만, 지난해와 달리 무려 5개 회사의 최종시험에 올랐다. 그리고 마지막 시험에서 난 드디어 꿈에도 소망해마지 않던 기자 명함을 달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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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동아일보공채 최종합격자들과 함께 (기자+사원)>

 

  내게 최종합격의 기쁜 소식을 전해준 동아일보. 비교적 ‘빡센’ 전형과정을 자랑하는 언론사다. 일반적으로 언론사 공채는 자기소개서-필기시험(논작)-1차 면접-실무평가 및 합숙-최종 면접의 순서를 거치는데, 이 중 실무평가 및 합숙이라는 4단계 시험이 각 사 공채의 밀도를 결정한다. 동아는 이 4단계가 총 5일에 걸쳐 진행된다. 사흘 실무평가에 이틀 합숙이 이어지는데, 그동안 수험생들 간에는 물론 평가자와도 꽤나 돈독한 인적교류가 오간다. 일단 최종까지 올라오면 회사에 대한 애착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이유다.

 

  합격의 비법? 글쎄, 굳이 말하라면 답은 하나다. ‘내가 가진 전부로 임하라.’ 내가 갈고 닦은 지식과 기술을 전부 쏟아 부어야 함은 물론이요, 그 못지않게 나라는 사람, 꾸밈없는 나 그대로의 모습 전부를 보여주라는 말이다. 내가 A라는 사람이면 그 A의 전부를 장단 모두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해 괜히 언론사 논조에 맞추고자 어색하게 둘러대고 좋은 사람인양인성을 치장하는 사람은 성공할 수 없다. 이번 공채 합격자들도 최종면접에서 (세간에 알려진)회사 논조와 상반된 주장을 했다고 한다. 인성에 대한 부정적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모두 솔직하게 임한 결과, 이 자리에 서 있다.

 

 

 

<연수기간 중 신문배달 체험>

 

  결국 언론사 공채 합격의 길에 왕도란 없다. 물론 햇수로 2년이라는 길을 돌아온 나와 달리 첫해에 고속도로를 탄 동기도 있다. 하지만 그 친구라고 해서 대단한 비법이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어렸을 때부터 시사에 관심 많고 책 꾸준히 읽었고 성실하고 노력하는, 그런 사람이었을 뿐이다. 나 역시 기본적으로 호기심 넘치고 사회문제에 관심 많고 무언가를 읽고 쓰는 게 즐거운 사람이었다. 그런 밑바탕을 최선으로 끌어올리자 기자의 문턱에 도달할 수 있었다.

 

  갑작스레 뛰어들었지만, 준비하는 동안 나에게 꼭 맞는 옷임을 알게 됐고 누구보다 예쁘게 입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됐다. 그런 믿음, 자신감 덕에 목표를 성취할 수 있었다. 힘들고 치칠 때면 늘 떠올렸던 말이 있다. ‘언젠간 꼭 기자가 될 거잖아. 넌 아직 도착하지 못한 것뿐이야.’ 그 말을 믿고 계속 걸었기에, 포기하지 않았기에, 지금 여기에 서 있다.

 

지금까지, "D"ongA일보 기자 이미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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