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은 미국 문화재로 지정된 집인데 우리집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동네로 이사온 1997년에 이 집이 경매물로 나왔었습니다. 그때 우리도 집을 사려고 했어서 이집에 경매를 해 보려고 여러번 안밖을 살펴보러 갔었지요. 그때 경매자들 bid가 너무 낮았는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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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은 미국 문화재로 지정된 집인데 우리집에서 15분 정도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우리가 이동네로 이사온 1997년에 이 집이 경매물로 나왔었습니다. 그때 우리도 집을 사려고 했어서 이집에 경매를 해 보려고 여러번 안밖을 살펴보러 갔었지요. 그때 경매자들 bid가 너무 낮았는지 [...]
며칠전음력설날인 2월3일에는 죠이스와 만나 점심을 먹었습니다.
친정엄마때문에 친구와 점심을 먹고 노닥거릴 형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런 귀한 친구의 인연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습니다.
죠이스를 만난건 1998년말 남편따라 이곳으로 와서
시작한 직장이었습니다.
죠이스와는 직장생활 같이 하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이 조금씩 친해졌지요.
남편도 죠이스도 간호대학을 졸업한 간호사였는데
죠이스는 다시 대학원에 가서 컴퓨터를 공부 했다고 하더군요.
죠이스는 직장에서 일도 성실히 잘하고, 머리도 명석한하지요.
내가 따라갈 수 없을 정도로…
죠이스는 간호사 남편과 딸 둘에 아들하나두고 평범하게 사는데,
좋은 옷이라던가, 좋은 자동차, 좋은집… 이런것에는 통 관심이 없어 보이고…
어떤때 보면 약간 히피족 같은 경향이 있는것 같기도 합니다.
일본사람이 옛날 페루인가에 이민을 가서 남미사람과 결혼한 후손이라 그런지
약간 동양인같이 보이면서도 피부는 남미사람같이 가무잡잡하고그렇습니다.
나이도 물어 본적이 없어 자세히 모르지만
막내가 올해 대학을 졸업하니
거의 60에 가까우리라 생각됩니다.
부모가 돈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 그런지
큰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여기저기 옮겨다니면서여행안내원등을 하는데
한때는 알라스카에도 있었고 한동안은 인도에서도 살고그랬습니다.
둘째인 아들은 하바드에 입학이 됬는데
하바드를 안가고 유펜에 가더니 (유펜도 아주 좋은 대학이긴 합니다.)
대학 2학년때인가 휴학하고 태평양 한가운데 있는 어떤섬에
평화봉사단 일원으로
갔었습니다.
2년간 임무 수행하고 돌아오면서 그 섬에서 원주민 여자아이와
결혼을 해서 미국으로 돌아 왔다고 합니다.
인터넷도 전화도 없고 한달에 한번 우편물만
들어가는 그 섬에서 물고기 잡아먹고, 과일따먹고 살던…
영어도 모르는아가씨와 결혼해서 미국에 데려왔다고 합니다.
죠이스도 아들 영향을 받았는지
2009년에뜬금없이 직장 그만두고 평화봉사단 신청을 해서
에쿠아도르에서 1년반동안 봉사하고 왔습니다.

대학생들 사이에 끼어서 평화봉사단 훈련을 받았답니다.
처음 죠이스가 에쿠아도르에 간다고 했을때는 이해가 안가고
나이 60다되서 직장 그만두고 평화봉사단을 자청하다니?
돌았나? 남편과 무슨 문제가 있나? 여러가지로 생각했었지요.

그리고는 이렇게 혼자 보따리 짊어지고 그곳에 도착했답니다.

그곳 대사관저 정원에서 봉사단원을 위해 환영파티를 열어 주었었답니다.
미대사를 만나는 곳이라 모두 한껏 잘 차려입었다고…
죠이스가 같이 살았던 호스트 가족이랍니다.
봉사단원끼리 운동회 비슷한 것을 했는데 이팀에서 죠이스를 퀸으로 뽑아주었답니다.
각 팀에서 뽑힌 퀸들이랍니다.
아마죤 정글 속에서 수영도 하고…
정글속에서 이렇게 위험한 줄타기도 하고…노란모자가 죠이스 입니다.
그래도 2년 기한인데 남편이 혼자 사는걸 너무 힘들어 한다고
1년반만에 돌아 왔습니다.
죠이스가 돌아오기 직전에 남편과 큰딸이 에쿠아도르에 와서 같이 그곳 여행을
했답니다.

하지만 지난
1년반 동안 죠이스가 그곳 사람들에게 봉사하면서
스페인어도 능통해지고,
그곳 풍습도 배우고, 신비한곳에 여행도 많이하고 아주 성숙해 져서 돌아오니
지금은 죠이스가 부럽습니다.
나는 죠이스가 돈에 신경안쓰고 아이들도 하고 싶은 일이나 하면서
사랑하는 사람과 살면 된다고 생각하는 나와는 다른 아주 트인 엄마인줄 알았는데…
이번에 만나보니 큰딸이 직업이탄탄한 남자와결혼해서
아이도 낳고 살기를 원하고…
아들이 문화의 세계를 모르고 영어도 모르는 남태평양에서 온 아가씨와 결혼해서
무난히 결혼생활을 잘 할 수 있을까? 걱정을 많이 하더군요.
죠이스도 역시 엄마이니,
세상사는… 속물적인 것을 아주 초월할 수는 없는가 봅니다.
이번에 만났을때 내가 자기의 제일 친한 친구래네요.
나도 실은 죠이스가 아주 가까운 친구같이 생각이 들긴 합니다.
우리의 우정이 오래 지속되기를 바랍니다

며칠전 동아 "여인들의 담소실"에 나온 글입니다.
…………
…………
어제 00 그룹사에 필기. 1차 면접 합격후 최종 임원 면접을 보고 온 딸아이.
12명의 임원(대표이사외 중역들은 다 모인듯)한 자리.
5명씩 들어가서 일분씩 자기 소개를 하였답니다.
남자 3명 여자 2명
남자 면접생한테 질문의 분량이 더많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한 남자 면접생 순서에
한 임원이 [000 씨는 00 대학 나왔네요~~!!?]
그렇게 말하곤 아무 질문도 안하고 옆사람에게 질문 순서가 넘어갔답니다.
면접생들 모두 순간 놀라고
그 면접생은 온몸에 뜨거운 물을 부어맞은듯한 모멸감을 참으며
말없이 앉아 있었답니다.
…………..
…………..
내 옆에서 남편이 이
글을 읽고
오랫동안 전문경영인으로서 많은 사람을 면접을 해서 뽑은 경험을
토대로 이야기 한것을 적어 보았습니다.
그
면접생 순서에 한 임원이 [000 씨는 00 대학 나왔네요~~!!?] 했을때 얼른
"네~~
제가 고등학교때 열심히 공부안하고 놀았기 때문에
00
대학 나왔습니다.
그렇지만 대학에 가서는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노력했기때문에 오늘 일류대학교 졸업생들과 어깨를 겨루고
최종 면접까지 왔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제가 이회사에 들어와서
기여를 할려고 합니다.
제가 어떻게 기여를 할건지 설명할 기회를 주십시요.
"
이렇게 해서 어떻게 해서든지 이야기할 기회를 포착했어야 했답니다.
면접관은 이사람이 극한 상황에서 어떻게
대처를 할 수 있나 보고 싶어 하기도 한답니다.
(미국식 생각?)
우리가 만난 한 여학생은 초등학교,
중,
고교,
그리고
서울 상대를 거의 수석으로 졸업하고,
미국 유수의 시카고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하고난후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투자 개발은행에 면접을 했답니다.
그런데 면접관이 미식축구에 관한 이야기를 물었답니다.
미식축구에 문외한인 이 학생은 전혀 대답을 못해서 떨어졌답니다.
그분 아버지가 이렇게 말도 안되는 질문을 해서,
떨어 뜨렸다고 하셨는데…
그럴때는
"나라마다 문화의 차이가 있어서 미식축구는 잘 모르지만,
그것이 이회사에 도움이 된다면 열심히 배우고 흥미를 가지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제 자신에 대하여 설명할 기회를 주시고
제가 어떻게 귀하의 회사에서 내 경험과 지식을 가지고 기여할 수 있는지
설명할 기회를 주십시요."
이렇게 대답을 했어야 했다고 합니다.
면접관은
또 전혀 모르는 일에 부닦쳤을때
어떻게
대응하나도 보고 싶어도 한답니다.
인터뷰를 할려면
어려서 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자기자신을 일관성 있게 바라보고
분석해야 한답니다.
자기 자신이 오늘에 있기 위해서 어떻게 일관성 있게 살아 왔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답니다.
예를 들면 회사의 지도자가 되기 위해서 어릴때 부터,
청소년 때부터
학교에서는 어떤것을 어떻게 공부했는지
학교와 사회에서 어떤활동을 했는지…
학자가 되기 위해서 어릴때 부터
어떤 것에 흥미를 갖고 어떻게 공부를 하고 자신을 키워 왔는지…
세상에서 자기 본인이 자기 자신을 가장 잘 알기때문에
면접에 합격하도록 자기가 자신을 가장 잘 팔 수 있야 하고…
회사에서는 자기자신을 팔 줄 모르는 사람은 회사물건을 잘 팔 수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모든 인터뷰의 질문은 자기가 살아온 과정의 일관성 속에서
대답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남편 친구들 거의다 은퇴를 했다고 합니다.
올해는 대학동기들중 한국에서 대학교수를 하고있는
6명이 한꺼번에 은퇴를 한답니다.
남편이 친구들 은퇴 파티할때는 꼭 한국에 가서 참석하자고 합니다.
남편은 앞으로 한5년 더 직장생활 하겠다고 하면서
더 늙기전에,
힘 있을때,
여행좀 다니자고
올해부터는 출장갈때 꼭 좀 따라와 달라고 부탁을 합니다.
얼마전에 남편이 갑자기 브라질에 갈 일이 생겨서
따라 갔다 왔습니다.
미국은 여름이라 요즈음 저녁8시가 되어야 해가지고
9시가 되어야 어두워 집니다.
근데 쌍 파울로에 가니 낮에는 덥고 아침저녁은 좀 선선한 여름날씨인데
저녁 다섯시면 해가지고 여섯시가되면 깜깜해 졌습니다.
웬일인가 했더니 적도가 가까운 브라질은 지금 7월이 겨울이라고 합니다.
지금은 한겨울이돼서 이정도지 여름인
12월에는 무척 덥다고 합니다.
쌍 파울로에서의 처음날인 일요일에는 그곳 한인교회인 온누리 교회에 갔었습니다.
쌍파울로에만도 한인 교회가
40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예배 끝나고 점심은 교회에서 먹었습니다.
(흰밥,
무국,
잡채,
배추것저리)
신기한것은 교인들이 점심먹고 설거지나 뒷청소는 하지않고 그냥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브라질은 인건비가싸서 도우미 아줌마/아저씨 들이 그런일은 다 한답니다.
.
그리고는 브라질한인학교 구경을 했습니다.
이 학교는 브라질의 한국인들이
(대부분 브라질의 저소득층 시민상대로 싸구려 옷을파는…)
7백만불을 모금하고 또 한국정부에서 2백만불을 지원해 주어서 지었다고 합니다.
그렇게 어려운 중에도 자식들의 한국교육을 위해서 이렇게 큰돈을 모금한것을 보니
참 감격 스러 웠습니다.
브라질의 평균 인건비가 미국의
5분의
1이나
7분의
1인것을 감안하면
이 모금한 돈이 어마어마하게 큰돈 인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개같이 벌어서 정승같이 쓴다는 말이 이런것을 두고 하는 말인가 싶습니다.
후에 강당을 지을때는 2백만 딸러를 브라질 한국교민들이 모금하고
또 백만불을 한국정부에서 지원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 학교는 오전 중에는 브라질 선생님들이 브라질 정규교육 과정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한국에서 파견나온 선생님들과 교민선생님들이 한국의 정규 교육과정을 가르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 학교을 졸업하면 브라질 졸업장 그리고 한국학교의 졸업장 두가지를 갖는답니다.
학생들은 이학교를 졸업하고나서
브라질에서 제일 좋다는,
매년
30만명이
apply해서 겨우 만 오천명이 뽑힌다는
(적어도 20대 1의 어려운 관문)
쌍파울로 대학을 가는 학생들도 있고
미국 대학에 가는 학생들도 있고,
또 한국에 있는 대학에 가는 학생들도 있답니다.
학생은
2살짜리 유아부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있는데
한학년에 한학급이고 전체 학생은
300명이라 합니다.
학생이
300명인데도 브라질,
한국 전 교육과정을 가르치기 때문에
선생님을 포함한 직원들은
120명이랍니다.
이학급에는 바쁜 엄마들이 유아들을 보낸다는데…
하루종일 봐주고…
먹여주고…
필요하면 기저귀도 갈아주고…
놀아주고…
언어등 가르쳐 준답니다.
요즈음은 겨울방학때인데 상급반 학생들이 학교에 와서
유아반애들 밥도 먹여주고 놀아도 주고 하는것이 침 대견해 보였습니다.
(남편은 주중에 일을 하기때문에 나혼자 주중에 몇번 다시 이학교에 가 봤습니다.)
유치원반 인것 같았습니다.

지하1층,
지상사층인 건물이고 새로 지은 강당은 좋은 공연장이 될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아이들은 언어를 쉽게 배우는지 브라질에서 쓰는 폴튜갈어도 유창하게 하지만
폴튜갈어와 비슷한 스페인어,
이태리어,
불어까지 잘 한답니다.
당연히 한국어와 영어도 잘 하고요.
이번달의 교훈중의 하나는 “거짓말 안하기”입니다.
“거짓말을 하지말자”라는 구호는
소시적에 우리도 학교에서 늘상 쓰던말이 였던것이 기억 났습니다.
이북 영사관에서도 이 학교에 관심을 보여 아래 백두산 천지 그림을
이 학교에 선물 했다고 합니다.
한국말 시도 암송시키고…
외국에서 아이들이 한국말을 잘하고,
또 한국인의 미덕을 배우는게 참 좋아 보였습니다.
아버지와 단 둘이 사는 학생의 아버지가 어느날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이 학생이 학교 선생님한테 연락을 했더랍니다.
이 소식을 듣고 전교생이 장례식에 참석하고…
위로를 해주고…
도와주고…
옛날 우리가 스승을 어버이 처럼 생각하던 그 모습을
이 멀리 떨어진 브라질에서 발견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 얘기를 듣고 참 감격스러웠습니다.
음악실,
미술실,
무용실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무용실에서는 한국고전무용도 가르키고
사물놀이등도 가르킵니다.
이곳은 도서관입니다.
아이들이 한국 소설등 많은 한글책들을 읽습니다.
고국소식도 열심히 읽고요.
학생들용 컴퓨터 입니다.
이 학교에서는 학교 컴퓨터/넷트웍,
보안장치등을
학생들로 하여금 하게 하는데,
아이들이 컴퓨터 귀신들 이랍니다.
참 잘한답니다.
교실마다 컴퓨터가 있고
Wireless
인터넷에 연결될 수가 있고
칠판에 쓴 선생님들의 노트는 자동으로
Power point로
convert가 되서
바로 학생들게 이멜로 갈 수 있게 되어있고
하여간 최신형 시설을 설비하고 있었습니다.
선구적인 생각을 가진 학부형과 선생님의 노력으로
이 학교가 브라질에서 명문으로 도약을 하고 있고
이제는 한국교민의 애들뿐 아니라 브라질 사람들도 아이들을 이 학교에
보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세계 어느나라에도 이렇게 좋은 교포학교는 없다고 합니다.
미국에는 물론 없고요.
일본인들이 브라질에서 경제권을 쥐고 성공은 했지만…
이 비슷한 일본교포 학교를 세웠었는데
이민
2세
3세로 가면서 점점 일본에 관한 관심이 없어지면서 일본교포학교에 관한 관심도 없어져
결국 문을 닫았다고 하더군요.
한국의 고위인사들이 브라질을 방문하면 꼭 이 학교를 들른다고 합니다.
이명박대통령이 서울시장 이셨을때 방문해 주셨었고
올
11월엔 다시 대통령으로서 브라질에 오신다는데
이 학교 강당에 교민들이 모여 환영식을 한다고 합니다.
이렇게 학생들을 보내는 부모님들이나
또 이렇게 열심을 다해 학교를 이끌어 가는 선생님들을 보고 저절로 머리가 숙여 졌습니다.
여기에서 옛날 우리가 가졌던 진정한 스승의 상을 발견하였습니다.
이 학교를 운영하는데 일년에
4백만불이 드는데
등록금으로는 도저히 운영이 되지않아
교민등 여러단체에서 기부금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희들도 조금 학교에 기부금을 드렸습니다.
여행중이라 현금도 별로없고 해서 겨우 미화200딸러를 학교에 기부했습니다.
200딸러면 학생들 지우개도 사 주지 못할 작은 돈이지만
moral
support ( 정신적인 지원)
이었습니다.
아래는 브라질 한국학교 오픈 블로그 입니다
http://colegiopolilogos.com.br/blog/
많은 분들의 격려가 수고하시는 선생님들과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
뒷바라지하는 부모님들께 큰 힘이 되리라 믿습니다.
고국의 얼을 배우겠다는 학생과
고국의 얼을 가르치겠다는 선생님들 생각에
교정을 떠나며 목이 메었습니다.
그리고 일요일인데도 학교에 나오셔서
학교 소개를 해주신 두분 선생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피부는 정말 하얗고, 머리가 아주노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날씨가 춥고 햇볕이 따갑지 않아서 그런가 상상해 봤습니다.
옛날 이스라엘에서 이티오피아로 이주해 살고있는 유태인들을 발견했는데
(아직도 유태교 모든 풍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는)
기후가 뜨거워서 그런지 피부색이 까맣게 변해있던 것과 같은 이치인지 모릅니다
에티오피아에 사는 유대인 여인입니다. (Falasha
Woman)
이 여인은 유대 성서에 나오는 인물들의 상을
진흙으로 만들어 거리에서 팔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여인의 목에 걸려있는 커다란 다윗의
별이 유난히 돋보입니다.
결혼관
내가 만난 몇몇 엔지니어 말을 들으니 스웨덴에서는 여자친구와 오래 같이 살면서도,
(그런 커플을 스웨덴에서는 리빙컴패니온 이라나 그렇게 부른다는데),
꼭 결혼식을 올리고 혼인신고를 해야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다고 했습니다.
한 엔지니어는 여자친구와 아이를 셋이나 낳고 15년이나 같이 행복하게 살았는데,
미국 지사에 발령을 받아 가족과 같이 가려니까, 부부가 아니면 안됀다고 해서
할 수없이 혼인신고를 했다합니다.
스웨덴의 유리제품이 유명하다 해서 뒤의 그릇을 200딸러 주고 샀습니다.
(저런 그릇은 어디에 쓰는지 몰라 우리집에서 먼지만 뒤집어 쓰고
있습니다.)
음식
호텔에서 주는 아침은 부페 인데 꼭 딱딱하게 삶은 겨란들이 있었습니다.
스웨덴 사람들은 껍질을 약간까고 숫가락으로 계란을 파 먹었섰습니다.
그리고 햄 같은cold
cut 이외에
언제나 여러가지 종류의 sardine이 있었습니다.
나한테는 붉은 쏘스(도마도?)에 들은sardine이 제일 맛있었습니다.
그래서 “너네도 날생선 먹는구나”
했더니 아니라고 빡빡 우깁니다.
자기네 생선은 순 날것은 아니고 특별하게
process를 했대나…
내 입맛엔sardine도
smoked salmon도 다 날생선 같은데…
그리고 어느 식당엘 가거나,
특별히 겨울엔 큰 그릇에 양배추를 채 썬 것을 내와서
사라다 드레싱같은것을 쳐서 먹었습니다.
미국같이 다양한 야채 샐러드가 없었습니다.
파티에 가면 가재를
appetizer로 먼저 내놓고 손으로 쭉쭉 빨아 먹씁디다,
우리 처럼 말이에요.
반가워서 나도 손가락으로 가제를 잡고 쪽쪽….
그리고 작은 커피잔에 따끈하게 데운 술을 주는데 달았고 밑에는 건포도도 있었습니다.
스웨덴(유럽)
음식이 미국 음식보다는 훨씬 내 입맛에 맞았습니다.
그리고 회사앞에 중국집이 한개 있었는데
고급스럽고 크고 음식이 아주 깔끔했었습니다.
그리고 중국집 주인도 귀공자같고 인상이 좋았습니다.
인품도 좋아보였는데 그래서 동양인 일지라도 스웨덴같은데서 장사를 잘 하나 보다 생각했습니다.
회사동료들과 같이 출장을 가보니까 중국집에 들은 가지않더군요.
독일에 있었을때도 호텔근처에 중국집이 하나 있었는데
늘 몇명이 같이 가는데,
아무도 그곳에 가자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때때로 나는 동양음식이 먹고 싶었었는데도,
혼자 떨어져서 먹기도 그렇고 해서 결국 그 중국집에 못가봤습니다.
미국 내 출장때 봐도 중국집,
일본집등 동양음식점에 가자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역시 서양사람들이 선호하는 음식은 양식이고
중국음식은 값이 저렴하기때문에 가는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한번은 옛날 장의사(?)했던곳을 개조해서 만든 유명한 식당이란델 갔었습니다.
와인은 지하실 술을 저장하는 곳에 들어가서 마셨는데
그곳은 옛날 시체를 두었던 곳이라고 했습니다.
스웨덴 겨울이 추워서 사람이 겨울에 죽으면 땅이 얼어붙어서 땅팔수가 없으니까
그곳에 시체를 두었다가 봄에 날이풀리면 땅파고 묻었었다고 합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요즈음은 겨울에 죽는사람은 지금은 어떻게 하는지?
궁금해 집니다.
커피잔은 미국것의 반 정도 작은 싸이즈인데 커피가 독합니다.
제가 스웨덴 사무실에 먼저 출근한 날에는
커피봉지에 있는 커피의 반만넣고 제 입에 맞는 커피를 만들어 놓곤 했습니다.
그러면 나중에 출근한 사람들이 난리가 납니다.
누가 이렇게 이상한 커피를 만들어 놨냐고…
한편 스웨덴 사람들이 미국 지부인 저의 회사에도 장기간 와서 머믈곤 했는데…
미국 커피가 싱거워서 못마신다고 어떤분은 아침에 우리들 출근하기전에 와서
한꺼번에 커피를 두봉지를 넣고 만듭니다.
그러면 미국사람들 아우성입니다.
누가 커피를 이렇게 진하게 만들어 놨느냐고요.
스웨덴에서 만난 아프리카에서 온 한엔지니어말에 의하면
많은 스웨덴 사람들이 커피를 마시면 속이 부글거리고 않좋아서 못마신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왜 그렇게 커피를 진하게 만드는지 이해가 안간답니다.
하루는 이태리에서 출장온 엔지니어와 저녁식사를 같이 했는데
그사람은 스웨덴커피가 너무 순하고 맛이 없답니다.
이태리 커피는 얼마나 진하고 맛있는지 모른답니다.
그때는 그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를 못했는데
지난5월 이태리에 갔을때 비로서 이태리 커피가 어떤건지 알았습니다.
커피 좋아하는 나지만 이태리 커피는 도저히 마실수가 없어서
맥도널드 같은데에서 미국 커피를 찾아 마셨었습니다.
스웨덴에서 산
Dinner Bell 들입니다.
이름과 성(Family
Name)
많은 스웨덴 사람들 성(Family
Name)끝에
…son이 붙어 있더군요.예를들면
Andersson, Johanson… 이 성들이 스웨덴에서는 김씨,
이씨같이 흔한성입니다.Johanson 같으면Johan
& son, 요한씨와 아들들을 합해서
Family를 말한다는 뜻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누군가가 설명을 해주더군요.
한번은 호텔에 짐을 풀고나서 그 이틑날 회의시간이랑 일정을 알려고
Jon
Johanson씨에게 전화를 할려고 했었습니다.
루드비카는 아주 작은 도시니까 전화번호부 책도 얇았습니다.
그런데Jon
Johanson이름이 열개정도 돼서 누군지 알 도리가 없었습니다.
스웨덴에서Jon
Johanson이란 이름이 참 흔한가 봅니다.
전화번호를 뒤적이다
Kim이란 성을 가진 사람도 발견했습니다.
그옛날에도 그 작은 스웨덴의 도시까지 한국사람이 살더군요.
관광
어느해 봄에 딱 한번 스탁홈을 혼자 구경을 했었습니다.
코닥 인스턴트 카메라로 길가는 사람한테 부탁해서 몇장 찍은것 올려보았습니다.
그나마도 현상도 안하고 그냥놔두었다가
13년(?)이 지난 며칠전에 현상해 봤더니 사진에 광선이 들어갔는지 잘 안됐습니다.
저 사진에 있는 핸드백 아직도 쓰고 있습니다.
커서 편리합니다.

유람선도 타보긴 했지만 혼자하는 관광은 재미가 없었습니다.

제가 1990년부터 1997년까지 ABB에 다녔었는데,
본사가 있는 스웨덴의
Ludvika, 또 독일의
Badhonnef에 가끔 갔었습니다.
출장을 갔었기 때문에
여행을 할 기회도, 또 사진도 찍은것이 별로 없지만
그곳에서 일하면서 느낀것을 두번에 나누어 적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제 글은 10년도 더 지난 오래전 스웨덴 얘기이지만 그리고 여행기도 아니지만
건모님과 모니카님의 근래의 스웨덴 얘기, 여행기등을 기대해 봅니다.
이 회사 마크인데 아직도 컴퓨터 오른쪽 위에 붙이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다른 지방에 있거나 외국에 있는 사람들과 동영상이나
Conference call로 회의를 많이 하지만
그때는 스웨덴 본사에서 회의가 있으면 그곳까지 비행기타고 가야만 했었습니다.
저는 주로Ludvika라는 도시에 가곤 했었는데
(때로는 스톡홈에만 갔다가 오기도 했었고요.)
주로 스톡홈에서 비행기를 갈아탔는데 Ludvika공항은 아주 작은 시골공항이었습니다.
어떤땐 택시를 대절해서 가기도 했는데…
회사동료와 같이 같이 갈때는 괜챦았는데,
한번은 나혼자 몇시간 택시운전수와 갈려니 은근히 겁이 났었습니다.
그때가 겨울이였는데 택시타고 가면서 보니까 길 양쪽으로 쭉 뻗은 스웨덴의 사철나무가
아름답고 인상적이였던것 같고,
드문드문 빠르게 뛰어가는 여우도 보였습니다.
스웨덴에서는
미국에서 그 비싸다는 벤츠나
Volvo가 참 흔했습니다.
택시도 벤츠,
트럭도 벤츠,
그리고 뻐스도 벤츠였습니다.
어떤 한국분이 독일에 출장을 갔더니 독일회사사람이 벤츠를 타고나와
모시더라고 감격을 하셨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벤츠가 독일에서는 그냥 보통 서민이 타는 차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날씨
저는 주로 한겨울인
1-2월에 스웨덴엘 가곤 했었습니다.
스웨덴 사람들은 주로 걸어서 많이 다닙니다.
호텔에서 회사 사무실까지 내 걸음으로20분정도 걸렸었습니다.
오후
4시
5시에 퇴근해도 언제나 밖은 깜깜하고
얼음이 두껍게 얼은 아스팔트위에 눈까지 싸여있어서 걷기가 힘이 들었었습니다.
그래서 길을 걸을때 모자,
목도리,
장갑으로 싸매고
또 겨울부츠를 꼭 신어야 했습니다.
스웨덴에서는 사무실에 들어오면 부츠를 벗어놓고
누구나 밑이 두꺼운 나무로된 나막신으로 갈아 신습니다.
나막신 위 발덮는데는 가죽으로 된것도 있었고…
스웨덴에서 사온 기념품 나막신입니다.
하여간 남자들이 나막신을 신고다니는게 참 신기해 보였었습니다.
그런데 한번은
6월말경에 스웨덴에 갔었습니다.
6월말
7월한달은 모두 휴가를 떠나서 회사가 텅비일땐데
이때는 어떻게 그때 오라고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날은 사무실에서 일하다 보니 밤
11시였습니다.
깜깜한 밤중에 호텔까지 혼자서 걸어갈 생각을 하니 은근히 겁이 났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밤
11시인데 초저녁이나 새벽같이 밖이 환했습니다.
그리고 길가에서 사람들이 기타,
아코디온 치면서 노래하고 춤추고 축제을 하고 있었습니다.
스웨덴이 북극에 있어서 여름엔 거의 밤이 없다는걸 생각 못했었습니다.
그날 축제도 구경하고,
길에서 이것저것 사먹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기념 란닝구도 한개 샀습니다.
언어
스웨덴사람들이 대부분 영어,
독일어등
3-4개국어를 하기 때문에
늘 영어로 의사소통을 했었습니다.
식당에 가도 영어메뉴를 달래서 시켜먹었었습니다.
딱 한군데,
Bakery(제과점)주인이 영어를 못했었는데
손가락으로 사고싶은것을 고르고 몇개라고 표시를 하고는 산적이 있었지만요.
한번은 루드비카에서 스톡홈으로 기차을 타고 나올려고 했는데
기차가 오지않아서 마냥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다행히 어떤 스웨덴 사람이 다가 오더니
“오늘은 기차가 운행이 안돼니까 뻐스로 가야한다”고 쓰여있는데
왜 뻐스 정류장으로 가지않고 여기에 서 있느냐?
고 한적이 있었습니다.
스웨덴 글을 몰라서 겪은 일입니다.
글모르는 까막눈이 설음을 실감했습니다.
다행히 그분이 친절히 가르쳐 주어서 무사히 스톡홈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회의진행도 영어로 했는데,
스웨덴,
놀웨이,
핀랜드,
독일,
이태리등에서 온 엔지니어들이라
모두다 자기나라 특유의 액센트가 있어서
미국 토백이 영어 보다 알아듣는게 힘이 들었습니다
예를들면 스웨덴 사람들은
copy를 “꼽삐”라고 발음했습니다.
실은 직장에 중국사람들이 많았었는데 중국사람들 영어도 참 알아듣기가 힘이듭니다.
그런데 실제 토백이 미국사람들은 외국인 영어를 참 잘 알아듣습니다.
1994년
Winter Olympic 기념촛대입니다.
스웨덴의 유명한 크리스탈 회사에서 만들었습니다.
사람들
스웨덴,
놀웨이,
핀랜드 사람들은 아주 활달하게 인사 잘하는 미국인들과 달리
동양인 비슷하고 수줍은 사람들 이었습니다.
처음엔 뚝뚝하고 무표정한것 같은데 일단 친해지면 아주 정깊고 친절했습니다.
스웨덴사람들은 딱 짤라서No(싫다)라고 하지 않는답니다.
동의할때는 물론
Yes라고 하겠지만,
거절할때는
May be (글쎄?)
뭐 이렇게 대답한답니다.
이런태도는 한국사람 비슷한것 같습니다.
미국에서 자란 우리아들은 한국에서 유학온 학생들과 많이 친하게 지냈었는데
가끔 아들이 같이 무엇을 하자고 제안을 하면 꼭 할것같았는데,
(딱 짤라서 그런일에는 흥미가 없다고 말하지 않으니)
막상 일을 추진하면 뒤로 빠져서 당황한적이 있다고 합니다.
같이 공부를 해도 우리아들은 어제
4시간 꼬박 공부했다 이러는데
한국 학생들은 “공부 하나도 않했다”,
“책은 들여다도 안봤다”
이렇게 얘기한다고 합니다.
우리 아들말에 의하면 그학생이 공부 하나도 않한다는데 잘따라가는것을 보면서
그 학생은 천재가 아닐까 생각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스웨덴 사람들은
(독일,
핀랜드,
놀웨이사람들도 마찬가지)
회사에
Business차 온사람들 대접을 참잘 했습니다.
나같이 회의 참석차,
아니면
Project하러 온 사람들도
유명한 음식점에 데리고 다니고,
구경도 시켜주면서 대접을 잘 하는데,
회사의 고객들 한테야 얼마나 대접을 몇배 더 잘하겠지요.
그래서 유럽사람들이 미국사람들 보다
Business를 잘하나 봅니다.
스웨덴 사람들의 생활이 누구나 비슷한가 봅니다.
의사나 용접공이나 자기가 좋아서 선택한 일의 종류가 다를 뿐이지
세금빼고 나면 수입은 비슷하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의사와 용접공이 한골목 비슷하게 생긴 옆집에 산다고 합니다.
노후에는 누구나 사회가 보장하는 비슷한 편안한 생활을 하니까
노후를 위해 아등바등 하는것 같지도 않았습니다.
제가본 스웨덴은 조용하고,
평화스러웠습니다.
빈부의 차가 없고 모두 비슷비슷하게 사니까
남의 것을 뺏으려 사기도 치지않고,
돈이 많다고 으시대지도
남을 없신여기지도 않고,
돈이 없어서 기죽고,
비굴해 지는일도 없는것 같았습니다.
특별히 같이 일하던 한 스웨덴 상관께서는
미국에서 아이들을 하바드니,
프린스턴등 아이브리그에 보낼려고 애쓰고
의과대학에 들어갔다고 기뻐하고 자랑하는 게 도저히 이해가 안된다고 했습니다.
같이 일하던
Kenneth란 사람이 늘 저 가죽가방을 들고 다니는게 참 멋져보였었습니다.
그래서 어느날
Ludvika한 상점에 가서 똑 같은것을
250딸러를 주고 남편을 위해 사왔습니다.
남편이 한번도 쓰지않아 집에서 먼지만 뒤집어 쓰고 있습니다.
(금색이 나던 장식도 색갈이 변했구요.)
그래도 의사같은 좋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돈 많이 벌 수 있고 큰집에서 화려하게 살 수 있는 미국으로 올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때는 호텔이니,
음식점이니 집들이 미국이 훨씬 크고 화려했었습니다.
그래서 스웨덴 엔지니어들이 미국지사에 발령 받아
미국에서 생활하는것을 좋아하는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 미국에 오면 컴퓨터니,
생활용품등을
구입해 가지고 스웨덴으로 가곤 했습니다.
아마 그때는 미국이 물질이 풍부하고 물가가 쌋던모양입니다.
7월에는 유럽사람들은 대부분
summer house에 가기때문에
7월한달은 연락불통입니다.
그래서
Customer Service등 문의사항은 미국에 있는 제가 하곤 했습니다.
이웃사촌 놀웨이
놀웨이와 스웨덴은 원래 같은나라였었는데
왕족
4촌끼리 싸움이 나서 나라가 둘로 갈라져 동쪽반은 스웨덴이고
서쪽반은 놀웨이가 됐다고 합니다.
두 나라가 대단히 비슷하고,
사이도 좋지만
티걱 태걱도 하기도 하는가 봅니다.
예를들면 노벨상 같은것도 심사를 양쪽국에서 분야별로 하는것을 보면 사이가 좋아보입니다.
헌데
2차대전때에 히틀러가 스웨덴을 칠것이 무서워서
스웨덴에서 히틀러에게 놀웨이를 칠 수 있게 길을 열어줄테니 스웨덴은 치지 말아달라 부탁을 했답니다.
그래서 일부 놀웨이 사람들 마음에 그 앙금이 남아 있다고 합니다.
스웨덴에서 만난 한 젊쟎은 놀웨이회사 간부가 한 농담을 보면,
두나라가 은근히 서로 흉보는 면도 있는것 같습니다.
“예수는 놀웨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
“예수가 놀웨이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는증거가 있다”
“그 증거는 예수가 태어났을때
東방에서
3명의 賢者(Wise
men)가 예물을 가지고 말 구유에 찾아 왔다는데”
“놀웨이 東방에는 賢者(Wise
men)가 없다”
주:
놀웨이의 東방이란 동쪽에 있는 스웨덴을 칭합니다.
대단히
웃기는 농담이었는데
이분이
아주 심각한 얼굴로 얘기해서 더 우스웠습니다.
우리가 하던
project를 통괄하시던 분은Egil
Henriksen이라는 놀웨이 회사의 부사장 이셨는데
한번은 부인과 함께 우리집에도 오셨었습니다.
이분이 갔다주신 선물입니다.
선물이 이런 상자에 들어 있었습니다.
serving
스픈 셋트입니다
뚜껑 안쪽에 있는 놀웨이
Viking그림입니다
스픈의 손잡이에 있는 무늬입니다.
양지말님이 말씀하신것 같이 우리도 바이킹이 스웨덴의 선조인가 했는데
Mr.
Henriksen은 “아니야 걔네들이 무슨 바이킹이야!!!
우리가 바이킹이지!!
”하셨습니다.
나는 바이킹을 왜구(일본 해적)정도로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놀웨이 사람들은 바이킹을 징기스칸같은 영웅으로 숭배를 하고
바이킹의 후예라는 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저렇게 선물상자에도 선물에도 바이킹 그림을 넣은것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하기야 스웨덴 사람들이 히틀러한테 한짓을 생각하면
바이킹하고는 거리가 멀지요.
우리집 뒷뜰에 사슴 두마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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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refix = o />
사슴들이 저렇게 꼼짝않고 오랫동안 앉아 있으니
혹시나 다쳐서 움직이지 못하나?
병이 들었나?
은근히 걱정이 됐었습니다.
카메라를 들고 뒷뜰에 나가니 한마리가 일어서서 나를 쳐다봅니다.

나만 뚤어지게 보던 사슴들이 갑자기 고개를 돌리더니 반대쪽을 바라보았습니다.

내가 나타나서 그런지 반대편에서 헐레벌떡 어미 사슴이 뛰어오고 있었습니다

어미가 새끼들을 지나서 내쪽으로 오고 있었습니다
어미가 나한테 점점 가까워 지니까 더럭 겁이 났습니다.
사슴도 사람을 공격하나?
나한테 달려들면 어쩌지?
겁이나서 더이상 사슴 사진을 찍을 수가 없었고
나도 도망갈 궁리를 하고 있었습니다.
(남편말에 의하면 사슴도 새끼보호 본능이 있어서
사람을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미가 나를 공격할듯이 가까이 닦아오더니
갑자기 획 뒤돌아서 뛰어갔습니다
그리고 새끼들을 데리고 번개같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뒤늦게 정신이 들어 카메라 샷다를 눌르긴 했는데 도망가는 세마리 초점이 맞지 않았습니다.
세사슴의 꽁무니만 보입니다.
어미가 어디선가 숨어서 새끼들을 지켜보고 있었던것 같습니다.
그런데 얼마 지나서 밖을 내다보니 새끼 두마리가 또 나와서 잔디밭에 앉아 있더군요.
뒷뜰에 사슴 머리가 조그맣게 보였었습니다
앞뒷마당에 로빈이 많아서 이렇게 사진에 끼어서 나왔습니다.
멀리서 보니 잔디밭에 좀 경사가 있어서 그런지
“사슴 머리만 뎅강 짤라진게 아닌가?”
생각이 되서 겁이 났었습니다.
그러지 않아도 지난달 뒷뜰에서 사슴 새끼 몸통은 먹히고
뎅강떨어진 머리와 네 발만 잔디밭에 있어서 얼마나 끔찍했는지…
뉴욕주에 코요테
(coyote)가 있다던데,
우리 뒷뜰에도 코요테가 있단 말인가?
가끔씩 뒷뜰에서 여우를 본적은 있는데,
그럼 그것들이 코요테란 말인가?
(여우들이 너무 빨라서 아직 사진은 찍지 못했습니다.)
혹은 우리 뒤뜰에 여우도 있고,
코요테도 있다는 말인가?
며칠전 이동네 뉴스에 여우가 아이한테 달려들어 물어서
할아버지가 여우를 쫒으려다가 할아버지도 같이 물렸다고…
남편은 출근하면서 나한테 혼자서 절대 뒷뜰에 나가지 말라고…
여우나 코요테한테 물릴지도 모른다고 신신당부를 하곤 합니다.
다시 카메라를 들고나가 가까히 가서 찍으니
사슴들이 할 수 없이 일어납니다.
결국은 귀챦아 하면서 뒷뜰뒤 숲속으로 가버렸습니다.
집으로 들어와 다른일좀 하다가 밖을 내다보니
새끼 두마리가 다시 나와서 잔디밭에 앉아 있었습니다.
남편도 퇴근해서 보더니
사슴들이 우리집을 쉬고 잠자는 장소로 정했다 보다고…
야생동물들이 집에서 상주하는것 안좋은 것이라고…
밖에 나가서 쫒았습니다.


이 남자는 회사가 갈라지기 전에 우리남편의 부하직원 이었답니다.
하지만 그분 아직도 직장에 잘 다니고, 성실히 일도 잘하는 사람이랍니다.
어쩌다 유명인사가 돼서 이부부의 사진이랑 이야기가
인터넷, ABC, NBC, CBS, Fox 등 유명 TV 뉴스와
미국 신문, 영국 타블로이드
심지어는 Wall Street Journal 월 스트릿 져널까지…
전세계에 나옵니다.
그 이유는 이분의 아내(41)가 공원 피크닉테이블 위에서
29살짜리 남자와 대낮에 섹스를 했기때문 이라고 합니다.

목격자 말에 의하면 29살 남자 저스틴은 웃통을 벗고,
바지도 벗어내려서 발목에 걸치고 앉아 있고,
41살 수잔은 그 저스틴 무릎에 앉아 있었답니다.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어린이 놀이터에 나와있던 한 엄마가 이광경을
목격하고 너무 놀래서 911에 신고를 했다고 합니다.

경찰이 와서
"무얼하고 있느냐?"
물으니
이커플은
"그냥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라고 대답을 했다고 합니다.
검찰은 이 커플을 풍기문란죄로 기소하고
수잔에게는 간통죄도 추가 기소를 했다고 합니다.
전 처음 알았는데 뉴욕주에도 간통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간통죄가 인정되면 최고
90일 징역을 살거나 혹은
500딸러의 벌금을 물어야 한답니다.
이여자의 남편 죠가 아내 수쟌을 두둔하고 나섰다고 합니다.
죠는 6년전 결혼한 수쟌을 아직도 사랑하고 있고
간통죄는 취하가 되기를 원한다고 합니다.
그 문제는 아내와 남편인 본인이 해결을 하게 해 줬으면 했답니다.

간통죄로 피소된 수쟌이 남편 죠와 손을
잡고 법정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인터넷에 많은 사람들이 댓글들을 달았는데…
대부분 풍기문란죄는 해당하다고 생각하는데
간통죄는 부부간의 문제라고 하는군요.
모두 이이야기를 기사거리로 할려고 혈안이 되어있나 봅니다.
죠가 갑자기 유명인사가 된 이유는
아내가 경찰에서 남편이 성전환수술을 받았기 때문에
자기가 그럴 수 밖에 없다고 변명을 하는 바람에
더욱더 이 이야기가 세계적인 쎈세이션을 일으켰다고 합니다.

무명인사이던 죠가 아내때문에 갑자기
유명인사가 됐으니
미국 국회의원에 출마 할 수도 있을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제부터는 돈버는것도 문제가 아닐것 같습니다.
현장사진을 제공한 사람이 없어서
현장사진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미안합니다.
이번에 한국에 갔을때
중학교 1학녀때부터 고3때까지 꼭 붙어다녀서
학교에서 3총사라 불리웠던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한 친구는 유명한 신경외과 교수 남편과 한국에 살고있고
또한 친구는 은퇴한 병리학의사 남편과 한국에서 반, 미국에서 반 왔다갔다 하면서 사는데…
우연히 우리셋이 동시에 서울에 있게되어
40년만에 셋이 같이 만날 수 있는 참 귀한 기회가 찾아 왔지요.
그런데 남편혼자 놔두고 나 혼자만 친구만나러 가기가 뭘해서
남편한테 같이 가자고 했지요.
친구들과 만나기로한 예술의 전당에 들어서니
요요마 공연이 있다고 크게 써 붙여 있더군요.
우리는 만나서 먼저 미술전람회등을 구경했습니다.
남편은 밤낮이 바뀌어서 그런지
사람들 만나느라 매일 바쁘게 다녀서 그런지 많이 피곤해 했습니다.
마침 이층 미술전람회장 뒤쪽에 의자들이 있는데 한적했습니다.
친구들 만나는데 도시락을 싸와서 그런지…
좀 남편이 눈총받는것 같기도 해서
당신은 저전람회 안쪽이 조용하니까 의자에서 좀 눈을 붙이세요" 했지요.
그런데 남편이 의자에 누워서 잠이 깜박 들려고 했을때
경비 아저씨(?)가 와서는
"아저씨! 여기서 주무시면 안돼요!!!"하고 깨우더랍니다.
남편은
"아니 내가 이 전람회에 라이브전시물인데…
나를 몰라보고 깨우다니…" 했습니다.
남편이 노숙자 노릇하다가 쫒겨나서
우리한테 와 사진을 찍어 주었습니다.
우리 친구들이 이제는 늙어서 사진찍어놓으면 흉하다고
질색을 해서 몇개 못찍었지만은요.

저 젊은 여인들이나 입는
레이스달린 원피스 입고 나갔다가 친구들한테 흉 많이 잡혔습니다

60대 후반 할머니들입니다.
남편이 노숙자 하던 이야기를 듣고는
친구들이 깔깔 웃었습니다.
한 친구가
"난 얘가 남편한테 "여기서 자고 있어요~~~"할때
그런일이 있을줄 알았다."
그러니까 다른 친구가
"그래서 부부는 다 비슷하게 끼리끼리 만나서 살지 안니?" 합니다.
우리둘이 둘다 짝맞게 푼수라는 뜻이지요.
하여간 우리는 이번에는 자리를 옮겨서
분수앞 커피점에 들어가 이야기를 할려고 했는데…
아직 문을 열지않았나 했었어요.
하는수 없이 음악공연하는곳에 들어가 의자에 앉아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친구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니 뒤에 우두커니 앉아있는 남편에게 신경이 쓰였습니다.
그래서 남편한테 우리는 저녁을 먹어야 하니 먼저 가라고 이야기 했지요.
한창 셋이서 수다를 떠느라 정신이 없는데
공연장 직원인듯한 사람이 다가 오더니
지금 요요마 연주회가 시작되는데 들어오셔서
공연을 관람해 주시겠느냐고 표를 4장 주네요.
무려 16만원짜리 좌석인데 공짜로 표를 얻다니…
(아마 제일 비싼표들이 안팔린게 있었가 봅니다.)
표가 한장 남는데 노숙자 할아버지를 그냥 먼저 들여보내서 얼마나 아쉽던지…
우리 노숙자 할아버지도 요요마 팬인데…
하여간 R석이 있는 2층으로 올라가니 로비에 갖가지 맛있는
오더블들이 손님들을 위해 차려있고… 갖가지 드링크와 와인까지…
노숙자 마누라가 요요마의 연주를 듣고
맛있는 음식도 먹고… 와인도 마신 운좋은 날이었습니다.

우루과이 투우장 -
지금은 투우를 안한다고 합니다.

콜로니아의 한 거리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부케부스라는
Ferry를
1시간 가량 타고
우르과이의 콜로니아 델 사크라멘토(Colonia del Sacramento)의 역사도시에
갔었습니다.
콜로니아는 포르튜갈과 스페인이 여기를 점령할려고
전쟁을 오랫동안 해서
1-2년동안 스페인이 통치를 하면
다음
1-2년동안은 폴튜갈이 스페인을 물리치고 통치자가 된것이
최소한 다섯 여섯번은 되는것 같았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이도시에는 스페인문화와 폴튜갈 문화가 공존을 하는데
어떤곳은 한쪽거리에는 폴튜갈풍집들이 있고,
길건너편에는
스페인 양식의 스페인풍의집들이 있습니다.
두나라의 문화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이랍니다.
이곳은
성문인데 성곽주위에는 대포들이 있습니다.
이것들이
폴튜갈과 스페인이 전쟁을 할 때 쓰여진것들 이라 합니다.
이성곽안에 (4평방 킬로메터 면적에) 대부분의 역사적인 유물들이 있습니다.
가령 우루과이 최초의 성당이라던가…
한 여섯시간쯤이면 다 볼수가 있습니다.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스페인풍의 집은 지붕에 발코니가 있고 폴튜갈 양식집은 이중의 경사로 되어 있답니다.
또 창살의 모양도 다르답니다.

이 골목 뒤는 바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