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력한 추상성, 강력한 구체성
요즘은 교회 목사님 설교를 인터넷으로 편하게 들을 수 있다. 주일 설교를 동영상이나 MP3로 쉽게 접할 수 있다. 말씀을 전파하는 대부분 성직자들도 좋은 설교 제목을 구하기 위해 편집자처럼 고심한다고 한다. 커뮤니케이션 측면에서 보면 두 가지로 나뉜다. 내가 작성한 설교이니 내 눈높이에서 제목을 붙이는 경우와 경청하는 신도들의 눈높이를 배려한 제목을 내 건 경우다.
* 생의 전도 * 두려움의 극복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 진리의 성령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 죄의 기원과 본질 * 게으름은 죄악이다 식의 설교 제목은 추상적이고 밋밋하다. 30분 분량 설교 내용이 미리 짐작되지 않고 딱딱한 신앙적 당위성만 내걸려있다.
* 경제문제가 사랑을 무너뜨릴 수 있다 * 무례한 기독교와 공손한 기독교 * 젊음의 강점을 100% 활용하는 삶 * 고독은 기도를 만나야 창조적으로 된다 * 가장 힘든 시간이 큰 기적을 이루는 시작이다 * 아무리 좋은 것도 전달되어야 가치가 있다 식의 설교 제목은 설교 콘텐츠의 핵심을 잘 잡아 설득력을 발휘한다. 붕 뜬 주제가 아니라 일상생활의 고민과 딜레마를 다뤄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설교는 신도를 대상으로 한 영적 커뮤니케이션 행위다. 청중들이 더 쉽게 감동할 수 있도록 설교 제목도 소통능력을 갖춰야 한다.
사는 곳 주변 학교들 본관에 내걸린 캐치프레이즈 간판을 살펴보았다. 하나같이 관료주의적이다. 학교를 관리하는 교육청의 훈육적 시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학생들은 철저히 대상화되어 있다. 교육현장이 여전히 교육서비스의 수요자가 아닌 공급자 위주로 편성되어 있다.
* 21세기를 선도하는 자율 창의 도덕적인 인간육성 (서울 가 중학교 ) * 자율적- 창의적- 도덕적 인간교육 (서울 나 중학교) * 실력과 인성을 갖춘 창의적 인재 육성 (서울 다 중학교 ) 매일 교정을 오가는 수백 수천 명 학생들의 관점이 아니라 수십 명 선생님을 대상으로 한 판에 박힌 교육지침일 뿐이다.
조금 나아보이는 캐치프레이즈가 몇몇 학교에서 보인다. * 깨어나자 도전하자 000인(서울 라 고교) * 오늘도 세계를 주름잡기 위하여(지방 마 고교) * 심오한 사고, 정확한 판단, 과감한 실천 (지방 바 고교) * 인격과 지성의 만남, 00고 (지방 사 고교) 완벽하진 않지만 학생 중심의 관점이 살아나고 있다. 질풍노도기를 거치는 청소년을 격려하고 껴안아주는 구호가 필요하다. 불확실한 미래를 씩씩하게 개척할 수 있도록 호연지기를 북돋워주는 ‘푸르른 캐치프레이즈’가 많이 나와야 한다.
위 사진은 성남시 분당 소재 한 중학교 3학년 교실 모습. 이 학교는 교훈 급훈이 따로 없다. 한 반 20여명의 학생들이 자율적으로 반 캐치프레이즈를 의논해 교실에 내걸었다고 한다. 지금 천장에 일방 직진 금지 표시가 걸려있고 그 옆에 “앞만 보고 달리지 마세요. 어디를 가고 있는지는 알아야죠” 문구가 보인다.
무한경쟁 시대 ‘더불어 함께 사는 삶’을 추구해보자는 취지가 담겨있다. 곡선보다 지름길인 직선만 선호하는데 세태. 빠른 삶보다는 먼저 어디로 가야하는 지를 차근차근 알아본 다음 전진하자는 의미라고 한다. 어린 학생들의 때 묻지 않는 생각이 담긴 멋진 캐치프레이즈다.
집안의 가훈, 학급의 급훈, 학교의 교훈, 회사의 사훈은 액자 속 죽은 글월이 아니라 조직의 미래비전을 담은 슬로건 역할을 해야 한다. 개성 있는 슬로건 개발은 조직 발전의 지름길이다. 슬로건은 구성원들의 힘을 분산시키지 않고 공통의 목표를 향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 주변 곳곳의 슬로건들은 싱겁고 평범하다. 밋밋하기 그지없다. 추상적 단어조합에 머물고 있다.
* 가화만사성 * 부모공경 형제우애 * 참되고 슬기롭게 * 노사화합 실현 * 살맛나는 우리직장 식의 슬로건은 하나마나한 메시지다. 모 기업의 캐치프레이즈는 “최고의 고객가치를 지향하는 000”. 요즘 고객만족을 중시하지 않는 기업이 있을까. 너무도 당연한 의무사항을 자신의 목표로 내걸고 있다. 있으나마나한 구호다.
대로변 대형광고 입간판 내용이 ‘인류에 공헌하는 국립 00대학교’.“인류에 공헌하고 있다”는 주장은 “서로 사랑 합시다”식의 하나마나한 다짐. 참으로 허망한 간판 카피다.
지인 중 한 중년여성은 아직도 수십 년 전 중1 시절 학급 급훈을 잊지 못하고 있다. “소녀들이여, 야망을 가져라”였다. 모두가 ‘소년들이여, 야망을 가져라’고 할 때 중1 여학생들이 스스로 궁리한 급훈이라고 한다. 이처럼 밋밋한 슬로건과 개성 넘친 슬로건의 차이는 평생을 간다.
성직자의 설교제목, 학교의 슬로건, 회사의 캐치프레이즈는 조직 성원의 눈과 마음속으로 파고들어야 한다. 호소력 있는 캐치프레이즈는 세 가지 작성 원칙을 지키면 무난하다.
첫째, 학교의 주인은 학생, 회사의 주인은 사원. 사회의 주인은 시민. 국가의 주인은 국민. 즉 구성원의 눈높이에 맞춰야 한다.
둘째, 추상적인 단어를 쓰지 말고 구체적 메시지를 제시해야 한다. 추상적인 것은 책임회피고 얼버무리는 것이다. 사람 마음은 구체적 단어에 움직인다. “사랑해”보다 “널 보기위해 달려왔어”가 백번 낫다.
셋째, 자기 조직만의 고유문화를 드러내야 한다. 독창성에 치우쳐 낯선 개념이 들어와선 안 된다. 고유한 동질성은 공감대를 넓히고 정서적 유대감을 준다. 캐치프레이즈의 본질은 나를 위한 것이 아니고 전체를 위한 서비스다.
harrison.



와우~ 눈이 번쩍 떠지는 굉장한 글입니다.
한편의 멋진 강의를 듣고난 기분이네요.
글이 신선하고 사각사각한 시원한 사과 맛이 느껴집니다….
개인적으론 “심오한 사고, 정확한 판단, 과감한 실천” 이란 교훈이 가장 맘에 드네요…
특히 마지막의 과감한 실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