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빛나는 가을날 널 은유하고 싶어

카테고리 : 좋은 문학 | 작성자 : harrison

[ 책 이야기 ] 은유가 된 독자 The Reader as Metaphor

 

이 빛나는 가을날 널 은유하고 싶어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2권 을 숨기려는 자와 찾아내려는 자가 벌이는 죽음의 지적 게임.”  최고의 기호학자이자 소설가 움베르토 에코의 대표작 의 스토리 뼈대입니다. 르네상스가 움트기 시작하는 14세기 이탈리아. 신권의 상징인 교황의 절대권위가 서서히 흔들리던 1327년 이탈리아 북부 한 수도원. 이곳은 기독교계 최대의 장서관(도서관)으로 당시 동서고금의 깊고 넓은 지식들을 채록한 방대한 서적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시학 2권 은 에코가 상상력으로 등장시킨 가상의 서적입니다.

 

수도원의 실력자 호르헤 신부는 인간의 자유의지를 애써 무시하며 중세적 가치 아래 모든 것을 복속시키려 합니다. 그는 지식은 인간을 타락시키며 지식은 발전이 아니라 순환할 뿐이라고 강변합니다. 늙은 수도사 호르헤는 인간의 웃음을 저주합니다. 웃음이 두려움을 없애기 때문입니다. 인간에게 두려움이 없으면 악마(사탄)의 존재를 무시하게 되고, 그러면 신앙도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호르헤 신부는 웃음(인본주의)이 신의 권능을 부정하는 악마의 선물이라고 믿고, 을 금서로 규정하고 각 페이지마다 독약을 묻혀놓습니다. 비밀리에 이 금서를 찾아내 읽어보려는 수사들이 하나둘 원인미상의 죽음을 당합니다. 소설 속에서 책은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미디어입니다. 책은 중세의 신권을 넘어서려는 르네상스 인본주의를 탄생시키는 미디어이기도 합니다. 책은 수천 년 인류문명을 표상하는 최고의 매체입니다.

 

책을 만들고 책을 소비하는 인간. 책을 읽는 사람, 책을 손에 든 인간의 또 다른 이름이 독자입니다. 32개 언어로 번역된 명저 를 쓴 “세계 최고의 독서가” 알베르토 망구엘 신작이 나왔습니다. 망구엘은 “언어의 파수꾼”, “책의 수호자”로 유명합니다. 신작《은유가 된 독자 The Reader as Metaphor》(행성B 펴냄)는 서양문학을 근간으로 독서와 독자에 대한 개념이 어떻게 탄생하고, 변화해 왔는지를 파헤칩니다. 의 후속편 격인 를 다뤘습니다.

 

저자 망구엘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록》, 《길가메시 서사시》, 단테의 《신곡》, 몽테뉴의 《수상록》, 셰익스피어의 《햄릿》,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니나》 등 서양문학사에서 내로라하는 작품들을 꺼내 독자와 시식회를 갖으며 독자론을 펼칩니다.

 

망구엘은 독자는 1.여행자, 2.은둔자, 3.책벌레 이 세 가지로 은유된다고 분류합니다. 《신곡》의 주인공 단테가 대표적인 ‘여행자’ 유형입니다. 지옥, 연옥, 천국을 거쳐 최고천에 이릅니다.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독서를 “텍스트를 독파하는 여행”이라고 했는데 세상을 여행하듯 텍스트를 여행한다는 것입니다. ‘독서의 경험’과 ‘삶의 경험’은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며 교호작용을 합니다.

 

‘은둔자’의 대표 주자는 셰익스피어가 창조해낸 최고의 캐릭터인 ‘햄릿’입니다. 햄릿은 “질질 끌고, 충동적이고, 명상적이고, 폭력적이고, 철학적이고, 경솔한 인물로, 도대체 종잡을 수가 없는 캐릭터입니다.” 책 지식만 습득한, 우유부단한 책상물림입니다. 망구엘은 햄릿을 “읽은 지혜만 지껄이는 겉멋쟁이” “생각이 지나쳐 불구가 된 남자”로 평가합니다.

 

이런 시각엔 햄릿 형 독자를 ‘비활동적이고 사회 문제에 무관심한’ 이들이라고 보는 부정적인 시선도 있습니다. 상아탑에 갇힌 지식인을 불신하는 토대가 됩니다. 멀티미디어 스마트 모바일시대, 이 시대엔 상아탑 자체가 무기력의 폐쇄회로로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망구엘은 ‘책벌레’ 유형으로 보바리 부인과 돈키호테, 안나 카레니나를 들고 있습니다. 여기서 책벌레란 독서를 통해 지혜를 얻지 못하고, 마치 좀벌레가 책을 먹어 치우듯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사람을 뜻합니다. 망구엘은 책벌레에 대한 비딱한 시선의 한 편엔 기독교가 있다고 봅니다. 기독교는 늘 ‘말씀에서 창조된 세상’을 지향했고, 이는 지적 행위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다는 것인데 텍스트 검열 책벌레 조롱 등의 현상이 나타났다고 분석합니다.

 

여행자, 은둔자, 책벌레란 은유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책 읽기는 영원합니다. 인간은 “단어를 섭취하고, 단어로 이루어져 있으며, 단어가 존재의 수단”인 동시에 “독서하는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모름지기 독서란 여행과 같은데, 그것은 목적지를 향해 성급하게 걷거나 뛰는 것이 아니라 마치 피곤하고 지친 순례자처럼 천천히 앞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 빛나는 가을날 망구엘은 ‘순례자의 독서’를 권하고 있습니다. 가을엔 한 통의 편지를 쓸 옛 의무를 기억합니다. 푸른 파도 흰 포말을 주입한 몽블랑 만년필을 들고 누런 갱지 펼쳐 너를 향한 그리움을 밀고 나갑니다. 그리고 읽다만 책 페이지 속으로 달려갑니다.

 

- 해리슨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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