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가 사랑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까닭

카테고리 : 내가 본 영화들아 | 작성자 : harrison

 

[ 영화 한 편 ]


 남자가 사랑에 실패할 수밖에 없는 까닭


청나라 멸망 이후 중국 대륙은 여러 군벌들이 할거하면서 분열됩니다. 일본제국주의는 이 틈을 놓치지 않고 대륙 침략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한반도를 삼킨 다음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 지역에 일본의 조종을 받는 괴뢰 국가 만주국을 세웁니다. 일제의 야욕은 1937년 발발한 중일전쟁으로 강화 되었고 이 전쟁으로 중국인 30만명이 학살당한 난징대학살이 발생하기도 합니다.


1940년대 당시 야금야금 중국대륙을 파먹었던 일본제국주의. 여기에 대항하는 중국엔 장개석의 국민당 군대과 모택동의 공산당 군대가 서로 세력다툼을 벌이며 일제와 투쟁했습니다. 국민당 내부에는 당시 일본군의 중국점령 상황에 대한 뚜렷한 견해차가 있었습니다. 중국의 힘을 길러 일본을 몰아내야한다는 장개석의 중경정부(중경에 위치했기에 중경정부라 호칭)와 현실적으로 일본과의 평화교섭을 통해 중국의 힘을 길러야한다는 왕정위의 남경정부(남경에 위치했기에 남경정부라 호칭)가 건곤일척의 살육전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역사는 왕정위를 수반으로 한 남경정부를 일본의 앞잡이 괴뢰정권이라고 평가합니다. 중경정부와 남경정부는 치열한 스파이전 및 요인 암살전을 펼칩니다. 특히 열강의 외국 조계지(중국이 열강에게 내어준 개항구역)가 많았던 상해는 수많은 첩보원이 활개치고 있었습니다.


영화 의 시대적 배경은 일본군, 친일세력, 항일세력이 얽히고설킨 1942년입니다. 홍콩에 사는 상해 출신 여대생 왕치아즈는 영화 연극에 흠뻑 빠져있습니다. 대학교 연극부에 가입하는데 연극부의 리더인 광위민에 호감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광위민이 이끄는 연극부는 항일 무장투쟁을 지향하는 대학생 운동권 비밀조직입니다. 광위민은 장개석의 국민당 중경정부 첩보부대의 지령을 받고 있습니다. 어느 날 광위민은 ‘친일파를 척결하자’는 기치를 올리며 요인암살 작전을 밝힙니다. 연극부 청년들은 일제히 작전에 가담하겠다고 맹세하고 왕치아즈도 손을 내밀어 합세합니다.

 

 

암살 대상은 친일 괴뢰정부인 남경 정부의 첩보부대 핵심인물인 미스터 이(易). 미모가 뛰어난 왕치아즈에게 부여된 임무는 홍콩에서 암약하고 있는 易에게 접근하여 적기에 그를 암살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하는 스파이 역할입니다. 왕치아즈는 섹스경험이 없었기에 연극부 남성 동료와 감정 없는 섹스체험도 마다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오직 암살작전의 성공을 위해서 말입니다.


왕치아즈는 ‘막부인’이란 유부녀 신분으로 위장해 易의 아내가 주도하는 유한마담 마작모임에 들어갑니다. 易의 아내와 친해지다 보니 易의 자택에서 벌이는 마작놀이 멤버에 자연스럽게 끼이게 됩니다. 드디어 왕치아즈와 易의 운명적 대면이 이뤄집니다.


영화제목 는 의미심장합니다. 色은 욕망이며 본능을 바탕으로 한 정욕과 열정입니다. 戒는 색에 대한 경고이며 지켜야할 계명과 계율입니다. 불교에서 색은 형상이자 실재이며 계는 자기를 지키는 절제를 의미합니다.

 

죽음을 눈에 앞둔 왕치아즈의 슬픈 미소 한 자락


왕치아즈에게 부여된 계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고 철저한 가상의 인물 ‘막부인’으로의 완벽한 변신입니다. 그것이 항일조직의 명령입니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것으로 생을 단련시켜온 남자 易가 눈치 채지 못하게 진솔한 마음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기실 易는 어디에도 소속되지 못한 떠돌이이자 외로운 사냥꾼입니다. 그 자신이 헌신해야할 민족주의 애국주의 국가주의도 없습니다. 정치적 신념을 가진 아나키스트도 아닙니다. 남자는 격변의 시대에서 오직 살아남고자 합니다. 그래서 易의 계에는 타인에 대한 철저한 불신을 바탕으로 모든 것을 확인해야 하는 두려움이 들어 있습니다. 나라를 배신하고 친일행각을 하는 易는 살아남기 위해 여자와의 사랑도 오직 육체적 쾌락에만 국한시켜야 합니다.


易는 다가오는 왕치아즈를 피하지 않고 의심과 확인을 거쳐 마음의 문을 서서히 열어줍니다. 두 사람의 밀회 무대는 홍콩에서 상해로 이동합니다. 스파이로서 계에 철저해야할 여성이 자신이 처단해야할 적을 사랑하게 되는 역설적 운명이 본격적으로 도드라집니다.


 易에게 색과 계는 팽팽한 긴장의 연속입니다. 색은 어느 경우에도 계를 무너뜨려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왕치아즈와의 밀회가 거듭되면서 그의 색과 계는 출렁거리고 휘청거립니다. 어느덧 易는 왕치아즈에 집착합니다. 죽음의 불안감과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는 두려움을 벗어나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하고픈 본능적 욕구를 왕치아즈를 통해 채웁니다.


왕치아즈에게 색은 처녀성까지 포기하며 역할에 충실하려는 순수 열정. 그것이 본질입니다. 계를 이루기 위해 易에게 사랑받아야 하고 그래서 易를 사랑하게 됩니다. 왕치아즈의 욕망은 계를 통해 자기 존재 의미를 찾으려는 순수정념입니다.


어느 순간 왕치아즈의 색계는 똬리 튼 뱀처럼 易의 색계와 뒤엉킵니다. 왕치아즈의 계는 易의 색에 스며들어야 관철될 것입니다. 색과 계는 상호 대립이 아니라 상호 관계로 서로를 필연적으로 전제합니다. 이제 색과 계는 완벽한 일치를 향해 질주합니다.


압도적인 정사 장면은 남녀의 어긋난 색과 계의 어우러짐을 보여주는 영화적 미장센입니다. 감성 돋는 관객이라면 뜨거운 베드신에서 오히려 슬픔을 느낄 것입니다. 이안 감독의 섬세한 연출력이 빛나는 순간입니다.


남자의 사랑은 색과 계의 대립적 관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유한의 사랑입니다. 여자의 사랑은 계를 통해 색을 완성시키며 사랑으로 승화됩니다. 그래서 사랑은 여성의 몫입니다. 서로에 대한 계략을 품고서 만남을 시작하고 육체로 이어지고 그것이 서로의 삶을 위로하고 소중한 것을 내어주는 관계로 가는 풍경. 이는 욕망 이익의 한계에 늘 갇혀 사는 모든 인간 군상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마지막 처형장에서 죽음을 눈에 앞둔 왕치아즈의 슬픈 미소 한 자락. 시대에 이용만 당했던 한 여자가 자신의 연기가 어느 순간 사랑으로 변해있음을 자각하는 순간입니다. 삶은 한 편의 연극이고 그 무대 위의 연극이 한 편의 사랑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색과 계의 변증법을 작품성 – 연출 – 연기 3박자로 완벽하게 풀어낸 영화입니다.


타이틀 : 색계 (色, 戒, Lust, Caution, 2007)
감독 : 이안
주연 : 양조위(미스터 이) 탕웨이(왕치아즈/막 부인)


ㅡ 해리슨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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