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움 잃지 않을 때 사람 사이 물길이 흐릅니다

카테고리 : 생기발랄 한국말 | 작성자 : harrison

 

 

 [ 생기발랄 한국말 59 ]

 

 그리움은 힘이 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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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봐도, 생은 투자 없는 끝없는 소비

즐겁거나 슬프거나 쉬 지워지지 않은 기억들만

떨어져나간 단추 자리처럼 뚜렷하다

문득 사랑하는 일마저 어느새 닳고

더러워진 옷소매처럼 감춰야할 부끄럼,

쉬 역전되지 않는 궁색 같은 골칫거리가 되어 있다

아니다, 얼마만큼 타협하고 물러서는 동안

부러진 한쪽 날개의 희망이라도 꿈꾸는 동안

시간의 빗물은 차라리 모든 것들 속으로 스며들어가

화려했던 한때의 열망들을 부식시키고 있다

- 임동확 시인 <걸레질을 하다가> 중에서


행복을 찾아가는 삶이 아니라 더 이상 불행으로 추락하지 않기 위해 허덕이는 일상들… 이즈음 임동확 시인은 시간의 빗물들이 한 시절의 열망들을 부식시키고 있다고 한탄합니다. 거리에서 마주치는 축 처진 어깨들이 서로 안쓰럽습니다. 희망과 현실사이에서 떨어져 나간 단추 자리만 매만지고 있습니다. 해질녘 번져오는 노을처럼 가슴을 물들이는 그리움이 비루한 삶을 그나마 촉촉하게 적셔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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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말을 뒤채도 소용없는 일이

삶에는 많은 것이겠지요

늦도록 잘 어울리다가 그만 쓸쓸해져 혼자 도망나옵니다

돌아와 꽃병의 물이 줄어든 것을 보고 깜짝 놀랍니다

꽃이 살았으니 당연한데도요

바퀴벌레를 잡으려다 멈춥니다

그냥, 왠지 불교적이 되어갑니다

삶의 보복이 두려워지는 나이일까요

- 김경미 시인 <이기적인 슬픔을 위하여> 중에서


김경미 시인은 우리들의 가엽고 소심한 일상을 잘 표현합니다. 보복은 감히 꿈꾸지 못하고 보복 당함은 절대 피하고 싶은 가녀린 生. 소시민으로 바쁜 길을 걷다가 문득 고개 들어 하늘을 쳐다봅니다. 이제는 멀어지고 말았지만 하늘에 가득히 그리움을 채워본 적이 있었지요. 하늘의 시렁위에 그리움의 보따리들을 하나 둘 얹어둔 적이 언제였던가.


그리움의 보따리들을 풀어봅니다. 그리운 사람, 그리운 풍경, 그리운 시절을 떠올리며 오늘의 비루함을 아득한 그리움으로 다독여봅니다. 시인은 그리움의 흔적들을 어루만져 生의 에너지로 삼습니다. 시인에게 그리움은 언어의 생명력을 건져 올리는 절대적 수원지로 기능합니다. 그리운 대상에 대한 갈구가 언어의 결을 타고 흘러나와 지친 우리를 위무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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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바람이 불고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그 하늘 아래 거리언마는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

바람 센 오늘은 더욱 너 그리워

진종일 헛되이 나의 마음은

공중의 깃발처럼 울고만 있나니

오오 너는 어디메 꽃같이 숨었느뇨

- 유치환 시인 <그리움 1>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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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당신과 내가 날과 씨로 만나서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우리들의 꿈이 만나 한 폭의 비단이 된다면

나는 기다리리, 추운 길목에서

오랜 침묵과 외로움 끝에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손을 주고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의 그윽한 눈을 들여다볼 때

어느 겨울인들 우리들의 사랑을 춥게 하리

외롭고 긴 기다림 끝에

어느 날 당신과 내가 만나

하나의 꿈을 엮을 수만 있다면

- 정희성 시인 <한 그리움이 다른 그리움에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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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 같은 목마름을 안고

모든 사람과 헤어진 다음

모든 사랑이 끝난 다음

비로소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여

이 어쩔 수 없는 그리움이여

- 문병란 시인 <호수> 중에서


유치환 시인에게 그리움은 사라져버린 너를 향한 깃발로 펄럭이고 있습니다. 정희성 시인의 그리움 비단 폭엔 한 슬픔이 다른 슬픔에게 다가가는 한겨울의 순정이 엮여있습니다. 문병란 시인의 그리움에선 이 생애를 아프게 다 살아낸 완료적 아득함이 피어납니다.


우리 모두에게 그리움은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리움을 잊어버리고 물질적 일상에 매몰 된 나날. 시간의 탄광 갱도 언저리에서 물질적 가벼움만 캐다가 귀가할 때의 쓸쓸함은 어찌해야 합니까. 물질로 내달려온 속도가 이제는 그리움의 순정을 찾아서 방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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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감는 저녁 하늘 속에

 

별 하나가 흔들린다

 

사람의 뒷모습엔 온통 그리움뿐인데

 

바람이나 잡고 다시 물어 볼까, 그대

 

왜 사랑은

 

함께한 시간보다

 

돌아서서 그리운 날이 많았는지…

 

- 김기만 시인 <그리움에 대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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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는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으로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 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으로 믿는다

 

- 황동규 시인 <즐거운 편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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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를 기대와 바꾸지 않기 위해서

 

기대 따라 행여 그대를 잃지 않기 위해서

 

내 외롬 짓무른 밤일수록 제 설움 넘치는 밤일수록

 

크고 무거운 돌덩이 하나 가슴 한복판에 매달아 놓습니다

 

-고정희 시인 <사랑법 첫째> 중에서


 

메마른 가슴 강줄기에 그리움의 골을 깊게 파 다시 그리운 사랑이 흐르게 하고 싶습니다. 그대는 사랑으로 다가오고 기다림을 낳습니다. 기다림은 이별을 낳고 이별은 추억을 낳습니다. 추억은 그리움을 남깁니다. 어찌 보면 그리움도 차분히 보살펴줘야 합니다.


 

황동규 시인은 어디선가 반드시 그칠 사랑의 행로를 떠올리고 미리 기다림의 자세까지 헤아려봅니다. 그리움은 기다림의 열매일까. 고정희 시인은 그리운 그대를 잃지 않기 위해 헛된 기대를 누르고 외로운 밤을 돌덩이로 지긋이 눌러줍니다. 높다란 기대는 사랑을 금가게 하는 첫 번째 비수입니다. 그리움의 지극한 제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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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손을 돌려도 닿지 않는 곳이 있다

 

혼자라는 건 이런 것이다

 

그립고 그리운 당신은 이 시간 멀고

 

혼자만의 방식으로 등을 긁는다

 

볼펜을 들이대다 막대기를 들이댄다

 

효자손 또한 애매하게 멀리 있다

 

울긋불긋 그리운 건 밀도 없는 사랑

 

- 최명란 시인 <사각지대> 중에서


 

내 숨결이 닿지 않는 몸의 사각지대는 당신만이 어루만져 줄 수 있는데 지금 당신은 어디에 있나요. 당신 없는 등 가려운 밤. 효자손마저 멀리 있군요. 홀로 된다는 것이 뼈 속 깊이 얼얼합니다. 최명란 시인은 밀도마저 비워버린 아릿한 그리움만 토닥토닥 다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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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이라는 말에서는 낙엽 구르는 냄새가 난다

 

가을 청무우밭 지나서 상수리숲 바스락 소리 지나서

 

추억이라는 말에서는 오소소 흔들리는 억새풀 얘기가 들린다

 

추억이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말

 

그래서 마냥 그립다는 말이다

 

- 이향아 시인 <추억이라는 말에서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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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한쪽이 슬퍼지면 친구도 가슴이 메이고

 

기뻐서 출렁거리면 그 물살은 밝게 빛나서

 

친구의 웃음 소리가 강물의 끝에서도 들린다

 

긴말 전하지 않아도 미리 물살을 알아듣고

 

몇 해쯤 만나지 못해도 밤잠이 어렵지 않은 강,

 

아무려면 큰 강이 아무 의미도 없이 흐르고 있으랴

 

세상에서 사람을 만나 오래 좋아하는 것이

 

죽고 사는 일처럼 쉽고 가벼울 수 있으랴

 

- 마종기 시인 <우화의 강1> 중에서


 

그리움은 추억의 옷을 입고 있습니다. 추억이 피우는 냄새, 바스락거리는 소리까지 절절합니다. 그리움의 싹을 틔우고 나의 그리움을 차지해버린 사람, 그 사람이 남긴 추억이 등대 불빛으로 깜박거립니다. 행복은 그 사람이 지나간 뒤에 다가오는 반추인가. 출렁거리는 추억은 그리움을 마르지 않게 합니다.


 

시인들은 끝없이 갈구합니다. 별 같은 사랑을 찾습니다. 그 별빛으로 길을 비추고 두 눈을 밝혀갑니다. 그 별을 가슴에 달고 삽니다. 민들레 홀씨처럼 둥둥 떠다니는 그리움, 일상의 틈 사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는 그리움, 마음이 흔들릴 때 몸 밖으로 스며 나옵니다. 흔들리는 존재는 그리움과 공존합니다. 그리움을 잃지 않을 때 사람 사이에 물길이 흐릅니다. 옛 사랑의 우화가 흐르는 강줄기를 영원히 잊지 못합니다. 그리움의 물줄기는 힘이 셉니다.


 

ㅡ 해리슨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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