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에게 죽음은 의무인가 권리인가

  

나는 춥고 어두운 흙구덩이로 들어가야 할 일이 무섭다. 그래서 살아있는 동안의 무사한 하루하루에 안도한다. 행복에 대한 내 빈약한 이야기는 그 무사한 그날그날에 대한 추억이다.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 김훈에세이 <바다의 기별>중 ‘무사한 나날들’ 한 부분

 

 

친구가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문병 갔다가 뇌 속을 찍은 MRI 사진을 봤다. 골프공만한 크기의 종양 주변으로 반딧불 같은 새끼 종양들이 점점이 흩어져 있었다. 종양들은 스스로 발생하고 번식하며 영역을 넓혀간다. 뇌 속 종양이 커지면 주변 신경을 압박해 미각, 후각, 시각 중추가 교란된다. 종양의 MRI 사진은 무서웠다. 반딧불 같은 종양의 불빛들이 깜박거렸다. 종양의 나라는 안개가 낀 듯싶었다. 생명 속에는 생명을 부정하고 생명에 반역하는 또 다른 생명이 서식하고 팽창한다. 이 반역은 생명현상이다. 생로병사는 생, 로, 병, 사로 따로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한 덩어리로 포개져서 흘러가는 것임을 알았다. 생로병사는 분리되지 않는다.  

— 김훈에세이 <바다의 기별>중 ‘생명의 개별성’ 한 부분

 

존엄사(尊嚴死)를
인정하는 대법원의 첫 판결이 나왔습니다. 국내에도 존엄사를 인정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됐습니다. 그동안 존엄사 허용여부를 두고 오고갔던
사회적·법률적 논란은 일단락됐으며, 존엄사에 대한 법제화 움직임이
본격적으로 진행될 것으로 보입니다.

 

재판부는
" 죽음을 맞이하려는 환자의 의사결정을 존중해 환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을 보호하는 것이 사회상규에 부합되고 헌법정신에도
어긋나지 않는다”며 “회복불가능한 사망단계에 이른 후에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기초해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는 것으로
인정되는 경우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연명치료의 중단이 허용될 수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존엄사로 불리는 소극적 안락사는 환자를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게 하기 위해 생명연장의 적극적인 수단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이번 판결을 계기로 존엄사에 대한 사회적 논의가 넓고 깊어져야 되겠습니다. 대안없는 외마디 주장만 할 것이 아니라 한국의 법조계 의료계 종교계가 함께 나서서 이야기를 할 때입니다.

 

 

삶과 동전의 양면을 이루는 죽음은 관념이면서 현실입니다. 죽음은 필멸의 과정이면서 고통입니다. 죽음은 갈림길이면서 한낱 재만 남깁니다. 죽음에 대한 절절함은 겪어내야만 체화되듯 죽음에 대한 한 사회의 담론도 그 사회가 겪어내야만 숙성되는 것입니다.

 

한국 사회는 아직 죽음을 ‘저 먼 곳의 낯선 것’으로 격리시키고 있습니다. 정답은 없고 모두가 개별적으로 홀로 치러내야만 하는 죽음. 삶을 껴안듯 ‘삶 너머’를 고민할 때입니다. 존엄사 문제를 다룬 스페인 영화 한편 소개합니다.

 

 

 

 

 

바다가 좋아 선박 수리공이 되어 전 세계를 떠돌던 25살 젊은이가 있습니다. 바다 속으로 다이빙을 하다 목뼈를 다쳐서 목 아래로 전신이 마비됩니다. 겨우 머리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말하거나 입으로 연필을 물고 글씨 쓰는 것만 할 수 있습니다. 전신마비 환자 라몬 삼페드로는 26년째 침대에 누운 채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뒤척이고 있습니다.

 

<씨 인사이드 Sea Inside>(2004년). 페드로 알모도바르 감독 이후 스페인의 대표감독으로 급부상한 신예 알레한드로 아메나바르 (Alejandro Amenabar, 1972년생)의 문제작입니다. 국내 개봉 2007년 3월. 이 젊은 감독은 한국 관객들에게 <오픈 유어 아이즈 Open Your Eyes, 1997> <디 아더스 The Others, 2001>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주인공 라몬에게 바는 암담한 고통을 안겨준 공간이었지만 이제는 백일몽의 환상이 펼쳐지는 공간입니다. 라몬의 육신은 2층 집 좁은 방안에서 한 치도 움직일 수 없는 붙박이 신세지만 그의 영혼은 언제나 시원의 바다를 부유하고 잠수합니다.

 

돌봐주는 주위의 사랑에 항상 감사하고 있지만 침대에 누워만 있는 자신의 삶에서 ‘버티는 것’ 이상의 의미를 찾지 못합니다. 사랑하고픈 여인이 곁에 다가왔지만 반응하지 못하는 사랑. 솟구치는 사랑의 감정에 오히려 괴롭습니다. 아무 것도 하지 못한 채 머리만 살아있는 남자. 사랑하는 조카를 제대로 안아주지 못해 허탈하게 미소 짓지만 속으로는 울고 있습니다.

 

"웃으며 우는 방법”을 익힌 중년 남자는 자신의 불행을 정리하려 합니다. 바로 죽음을 선택해 죽음을 통과한 다음, 내세를 꿈꾸는 듯 합니다. 엄격한 가톨릭 사회인 스페인. 그는 국가를 상대로 ‘존엄하게 죽을 권리’를 요구하며 소송을 제기합니다. 눈물이 고인 커다란 눈망울에 희로애락을 달관한 듯한 표정. 라몬은 죽음을 피할 수 없는 막다른 환경이 아니라 선택의 대상으로 간주합니다. 生을 접을 수 있는 권리를 인정해 달라고 국가와 사회에 대해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수많은 정상인에게 당연한 일상의 삶이 라몬에게는 불가능합니다, 자신을 아들처럼 수 십 년째 돌봐주는 형수의 도움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먹는 것, 배설하는 것, 몸을 씻는 것, 책을 꺼내는 것, 옷을 갈아 입는 것, 음악을 듣는 것… 스스로 혼자서 할 수 있는 것이 없습니다. 라몬에게 삶을 연장한다는 것은, 더구나 외부의 강요에 의해서 원치 않는 삶이 지속되는 것은 끔찍한 일입니다. 라몬의 존엄사 인정 소송은 스페인 사법계 내부논쟁은 물론이요 종교적 논란까지 불러일으킵니다.

 

스페인의 형법은 존엄사안락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혼자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라몬은 스스로 죽을수 도 없습니다. 독극물인 청산가리를 구하기는 커녕 스스로 약물 컵조차 들 수 없는 신세이기 때문입니다. 죽는 결단마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결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라몬은 자신의 죽음에 협조한 친구들이 처벌을 피할 수 있도록 합법적인 죽음을 원하는 것입니다.

 

라몬은 염세주의자나 절망적 비관주의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농담 잘하고 많은 책을 읽어서 지적인 대화를 좋아합니다. 자신을 위로하러 온 사람들을 오히려 위로해주는 넉넉한 사람입니다. 바그너의 선율을 늘 귓전에 가까이 합니다. 틈틈이 詩도 씁니다.

 

라몬은 혼자가 아닙니다. 불구의 동생을 돌보기 위해 어부를 마다하고 농부로 생업을 바꾼 착한 형.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형은 자신의 집에서 동생이 자살하는 것을 결코 용인하지 않으려 합니다. 시동생의 욕창을 예방하기 위해서 3시간에 한 번씩 위치를 바꿔주며 수십 년째 간병을 도맡아하는 형수. 삼촌의 수족이 되어 모든 심부름을 마다않는 귀여운 조카. 죽음을 선택하려는 아들을 가슴 아프게 바라보면서도, 아들의 뜻을 말리지 못하는 늙은 아버지의 젖은 눈빛. 이 애정으로 탄탄한 가족관계 속에서 라몬이 선택하려는 존엄사는 가족의 무관심과 소외 속에서 맞닥뜨리는 절망적 자살과는 차원을 달리 합니다.

 

라몬의 대변인이자 법정 대리인 역할을 하는 여성 사회운동가 제네. 자신도 퇴행성 질환을 앓으면서 라몬을 찾아와 존엄사 소송을 돕는 여변호사 줄리아. 이 두 사람으로 인해 라몬의 문제는 나라 전체의 관심사가 됩니다. 두 아이를 키우는 공장 노동자 싱글맘 로사는 불쑥 찾아와 라몬를 설득하려 하지만 만남이 지속되면서 되레 스스로 삶의 의지를 되살립니다.

 

이 좋은 사람들은 그의 선택을 돕기 위해 애를 씁니다. 그런 와중에도 라몬이 생각을 바꾸길 원합니다. 라몬이 죽기에는 너무 아까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낭랑한 목소리에 지적이고, 유쾌하고, 배려 넘치는 라몬. 그들은 그가 죽기를 바라지 않지만 진심으로 사랑하기에 그의 선택을 존중합니다.

 

"삶이란 본디 처절하니 차라리 죽는 게 낫다"고 강변하는 영화가 아닙니다. 존엄사에 대해 무조건 긍정하는 시선도 아닙니다. 존엄사 인정 요청을 스페인법정으로부터 기각당하고 1998년 자살로 생을 마감한 실존 인물 라몬 삼페드로의
실제 이야기입니다. 

 

 영화는 스스로의 삶을 ‘결정할 수 있는 권리’에 대해 말하고 싶어 합니다. 죽음은 의무인가요, 권리인가요. 죽을 권리를 통해 현재의 生을 묻고 있습니다. 죽을 권리는 라몬에게 주어질 수 있는 마지막 자유였습니다. 라몬의 죽음 결행을 도와줘야 하나요. 사력을 다해 말려야 하나요.

 

존엄사(尊嚴死).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숨지 않고 드러나야 합니다. 한 사회의 집단 지성이 발휘되고 公論場에서 여러 차원의 담론이 백가쟁명하며 다뤄야할 문제입니다. 존엄사
인정 판결을 계기로 죽음에 대한 담론이 풍성해져야 합니다. 존엄사는
생과 사를 분리하는 낯선 담장이 아니라 생과 사를 이어주는 익숙한
울타리로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평균 수명이 80세를 훌쩍 넘어갑니다. 우리 모두가 최후까지 행복하게 살고 행복하게 죽어갈 수 있을까요. 사회는 상상 이상으로 차별적이고 불균등합니다. 심성이 착하다고 행복이 절로 찾아오지 않습니다. 불행은 의도적으로 누군가를 피해 가지 않습니다. 인간답게 죽을 권리. 품위있게 죽을 권리. 바로‘삶의 권리’와 동전의 양면입니다.

 

 아메나바르 감독은 연출 각본 편집 음악까지 도맡은 이 영화로 2004년 베니스영화제 남우주연상과 심사위원 대상, 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습니다. 라몬 역할을 맡은 스페인 톱배우 하비에르 바르뎀(Javier Bardem)의 얼굴 연기는 감동적입니다. 잘 살고 싶지만 그러지 못할 때 잘 죽고 싶은 전신마비 환자의 캐릭터를 이처럼 잘 살려낸 경우는 드문 듯합니다.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서 엽기적 살인마로 등장 , 2008 아카데미 남우조연상을 수상했습니다.

 

 

harri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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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8) 당신에게 죽음은 의무인가 권리인가

  1. a says:

    생각해 보면…
    이혼 숙려제가 생각납니다. 죽는것과 이혼 숙려제… 무슨 관계가 있는걸까요?

    개인의 자유니 표현의 자유니 삶의 권리니 진보니 좌파니 뭐니 하면서 이혼 펑펑 시켜 줬습니다.
    이혼을 얼마나 많이 시켜줬는지 결혼 3쌍하면 이혼 1쌍이라나 뭐라나~ 그런 기사도 있었습니다.
    아!!! 세상이 아름다웠습니다. 개인의 자유를 위해서 이렇게 법이 노력을 하고 있다는 것에 말입니다.
    아!!! 세상이 좋아지는것 같았습니다. 미친 대한민국이 드디어 개인의 자유와 평등을 위해서 돌격하는것 같았습니다.
    아!!! 대한민국이 사랑스러웠고 대한민국이 자랑스러웠고 대한민국 국민이란 신의 축복을 받은것 같았습니다.

    그렇게 이혼을 펑펑 시켜 주다보니… 아!!!
    한가지 생각하지 못한것이 있었 아니!!! 여러가지 생각하지 못한것이 있었습니다.
    아이들부터 시작해서 필수코스가 되버린 이혼에 사회 문제까지…

    이혼 숙려제… 시민들은 법 어기면 과태료에 벌금에 징역 살아야 합니다.
    마음대로 법을 만들고 마음대로 법을 고칠수 있는 사람들은 그런거 없습니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우리들 몫입니다.

    조선일보에서도 품위니 권리니 어쩌니 하면서 존엄사를 무척이나 옹호하는 사설을 실었더군요.
    이혼 숙려제 같은 결말을 전 미리 예견해 봅니다.

    전신마비가 되면 누구나 자신의 권리와 의무를 위해서 당장 죽겠다고 하면 독극물 주입시켜 죽여줘야 하는 세상이 될것인지, 죽을 권리와 의무를 위해서 잘 생각해 보라고 10년간의 숙고할 시간을 줄 것인지… 참 편한 생각의 끝이 어딘지 내심 무척 궁금해 지는군요.

    편협한 생각이란게 별거 아닙니다. 바로 그들이 얘기만을 듣고 그게 맞다고 생각하면 그것이 바로 편협한 생각이지요.

  2. kyoung says:

    우와~~~네이버 블로그 메인에 뜨셨던데요.

  3. harrison says:

    애민하고 쉬쉬했던 것은 이야기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아, 대화하는 기쁨을 우리는 얼마나 모르고 살고 있나요…

  4. 센토 says:

    아, 이사를 오셨네요. 휴지나 비누 뭐 이런 거 사서 들고와야 하건만 빈손으로 불쑥 찾아뵈었습니다. 공간만 다르지 익숙한 분위기여서 맘이 편합니다. 저는 늘 스스로 내 죽음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제가 온전히 제 의지로 살아갈 수 없을 때, 남의 도움을 받아 약물에 의존하지 않고는 도저히 살 수 없을 때, 저는 그렇게 해야지, 하고 생각하고 있지요. 막상 그때가 닥치면 내 맘이 달라지지 않도록 늘 정리를 합니다. 그러나 죽음이라는 커다란 문(혹은 벽) 앞에 서면 그토록 결연하게 실행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요..저는 인간의 삶이 존엄하다면 죽음도 존엄할 권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영화 못 받는데, 꼭 봐야겠어요. 어느새 겨울이네요. 해리슨 님 늘 건필하시고,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5. harrison says:

    즉음에 이르는 길을 우선 잘 걷고 잘 가꿔야겠네요. 의도적으로 죽음에 대한 마인드 트레이닝도 하고, 생각보다 가까이 있음에 익숙케하는 심정도 종종 느껴보고…. 그러자면 마음 비우기, 마음 공부도 …
    센토님, 간만에 반갑습니다. 2008년이 열릴때만해도 한해 세밑이 이렇게 삭막하리라 생각못했는데…
    다들 힘겨운 모습 온통 깔립니다. 힘겹게 하는 뉴스는 천지에 쌓이고,,,
    버티고 견디고 이겨내야 할 겨울이 왔습니다.
    센토님의 칼칼한 겨울을 ….건강하세요….

  6. 이수현 says:

    와~우~ 아주 삼삼하게 됐습니다. 하하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

  7. bambi7010 says:

    이런 영화가 있었군요? 으음… 저라도 품위 있게 죽을 권리를 요구했을 것 같단 생각이 이 글을 읽으며
    가장 간절히 들었던 생각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정말 무늬만 캐톨릭 신자구나! 하면서 반성도 하고,
    좀 심정이 복잡미묘해집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 이걸 원한다면 나는 과연 어떻게 대처할까도 상상해보면서, 또 내가 이런 처지가 안 되길만을 기도하고 싶고, 내 모든 걸 다 걸어서라도 그런 비극만은 막고 싶고, 또
    모든 희생과 어려움 다 감당해도 지금까지의 저의 행위를 선의로 인정하신다면 제 주변에서 이런 일만은 벌어지지 않았음 하는 이기적인 바램을 또 소망해봅니다.
    정말 쉬운 문제는 절대 아닐 것 같아요. 그러니 어쩜 지금 이렇게 건강히 살아있음에 감사하면서 지금 이 시간을 최대한 즐기고, 만끽해야 하지 않을까요? 전 왠지 내일 죽어도 무섭진 않지만 절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들고 슬프게 만드는 건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아요. 휴!~ 처음 블러그를 방문하면서 이렇게 무거운 말씀만 남기는 게 죄송스럽지만 어쩔 수 없네요. 해리슨님께서 무거운 주제를 던져주셨으니 말이죠.ㅠ.ㅠ 그래도 마지막은 웃고 가고 싶어요. 하하하!~ 그리고 블러그 오픈 진정 축하드립니다.^^*

  8. harrison says: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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