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팩션이 아닙니다. 팩션의 모티브가 될 수 있는 넌픽션입니다. 팩션을 본격적으로 연재하기 위한 준비작업입니다.
이 글은 제가 1998년 전국을 돌아다니며 탈옥수 신창원의 행적을 추적한 뒤 쓴 4만여 자의 보고서를 정리한 기사입니다. 신동아에도 게재했던 글을 재정리했습니다. 1주일에 한, 두편 정도씩 연재할 계획입니다.***
1997년 12월30일 새벽 전 씨는 음주운전을 하다 접촉사고를 낸 뒤 사고 수습을 위해 경찰에 연락하면서 신이 평택에 살고 있다고 신고했다. 경찰은 질투심에 사로잡힌 전 씨가 신과 강 씨가 살고 있는 집을 알려줬다고 밝혔다.
이날 오전 11시반경 경찰은 신과 강 씨가 함께 있던 평택시 신장1동 N빌라를 덮쳤으나 신은 칼을 들고 반항하다 옥상을 통해 반대편 계단을 내려가 도주했다.
하지만 전 씨는 질투심 때문이 아니라 신의 부탁으로 신고했다고 주장했다.
“접촉사고를 낸 것은 내가 아니라 친구였어요. 사고처리도 운전자들 사이에 해결을 봤죠.내가 신이 사는 곳을 경찰에 알려준 이유는 강 씨를 질투해서가 아니었어요. 신이 나를 만날 때마다 쫓기며 사는 것이 힘들다고 말했고 여러 차례 호출기에 경찰에 신고하라는 메시지를 남겼기 때문이에요.”
1998년 1월10일 오후 10시경 신은 전 씨에게 전화해 자정에 충남 천안시 광덕면 광덕산 산천장 앞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약속했다.
이날 전 씨는 승용차 뒷좌석에 경찰 2명을 숨긴 채 약속장소로 나갔고 신은 이들과 30여분 간 격투를 벌인 뒤 달아났다.
“당시에는 경찰에 시달리다 지쳐 정말로 신이 잡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지만 지금은 신에게 아무 감정이 없어요.솔직히 신이 영원히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다시 시끄러워지면 저와 저의 가족들만 피곤해져요.”
전 씨는 올 7월초 신을 만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남자와 새로 살림을 차려 살면서 언론과의 접촉을 극히 꺼렸다.
신이 7월 서울 강남구 포이동에 남기고 간 수기에는 당시 전 씨와 강 씨 사이를 오가며 겪은 고민이 여러 페이지에 걸쳐 적혀있다. 특히 신은 강 씨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다. 물론 이도 언론을 의식한 조작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다. 그중 일부를 발췌했다.
“… 그때는 여자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나는 ○○이(전 씨)가 나와의 관계를 청산할려고 하는 줄만 알았고 그녀의 말대로 ○○이(강 씨)를 데리고 갔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어리석었다.… 난 성격이 모질지 못하다.○○이와 ○○이 어느 한쪽을 버렸다면 이렇게 힘든 일이 없었을지 모른다.… ○○이(강 씨)는 정말 순진하고 정이 많은 아이다.착하고 불쌍한 애.… 나에게 경찰이 들이 닥치던 날 하루전 나는 ○○이(강 씨)에게 오늘 떠난다고 말하고 울고 있는 ○○이(강 씨)를 놔두고 집을 나왔다.그날 저녁 내내 ○○이(강씨)가 너무 불쌍해서 너무 괴로와 술을 마셨고 그날 떠났더라면 그녀에게 피해는 없었을텐데 …”
“신은 불쌍한 사람이에요. 환경만 좋은 가정에서 태어났다면 잘 성장했을 사람이죠. 머리도 좋고 성격도 차분하고 착한 성품을 지녔어요. 우리 아들과 비교해 생각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신을 보며 아이들이 자라는 환경의 중요성에 대해 많이 생각했어요.”
10세 아들을 둔 동거녀 심 씨의 신에 대한 평이다. 심 씨는 1997년 이혼했고 아들은 전남편이 키우고 있다.
신의 첫 전과는 15세 되던 해 저지른 닭서리, 새우깡, 카세트테이프레코더 절도.
1982년 2월20일 신은 친구 6명과 함께 전북 김제군 황산면 남양리의 한 양계장에서 닭 6마리를 훔쳤다. 황산면은 신의 고향 금구면 하신리 바로 옆동네.
신과 친구들은 이날 하신리 한 가게에서 새우깡도 한상자 훔쳤다. 또 열흘뒤 금구면 금구리 한 가정집에서 카세트테이프레코더를 1대 훔쳤다. 신은 절도죄로 소년원에 송치됐다.
신의 아버지(74)는 아들의 빗나간 인생이 이때 자기가 고지식하게 행동했기 때문이라고 지금도 자책한다.
“동네 사람들이 창원이를 잡아 왔더라구. 나는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잘못을 저지르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걸 가르쳐야 한다는 생각에 경찰에 알렸지. 그런데 그게 잘못이었어.”
신은 소년원에 들어가 본격적인 범죄에 눈을 떴다. 신의 가족들은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 신을 마땅히 돌봐줄 사람이 없었던 것이 신이 비뚤어지게 된 이유라고 말하고 있다.
어머니 전모 씨는 신이 6세 되던 해 숨졌다. 신의 누나(33)는 어머니가 숨진 뒤 신이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때는 당장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때에요. 무뚝뚝한 성격의 아버지는 자식들을 챙기고 보살피는 성격이 아니었지요. 나도 어리고 어머니도 안 계시니 창원이를 돌봐줄 사람이 없었어요.”
신의 고향 친구 윤모(31) 씨는 “창원이는 머리도 좋고 남자 다워서 어렸을때부터 친구들이 많이 따랐다”며 “하지만 자기 것을 챙길줄 몰라 손해보는 경우가 많았다”고 말했다.
신은 소년원에 가면서 학교를 그만뒀다. 중학교 2학년 중퇴가 그의 학력.
신은 소년원을 나와 서울에서 생활하며 본격적인 절도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1982년 7월 신은 서울 영등포구 양평동 가정집에서 100만 원권 수표와 현금을 훔친 죄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4년 형을 선고받았다.
또 1984년 2월 자정경 영등포구 영등포동에서 자동차를 훔친 혐의로 인천소년원에 기결수로 구속 수감됐다.
당시 신이 주로 활동했던 지역이 서울 영등포구 양천구 금천구 구로구 등 서울의 강서지역. 신이 올 7월 동거녀 박씨를 만났던 곳은 서울 영등포역 근처 사창가. 또 이보다 한달전 금천구 가산동 단란주점에 두차례 금천구 독산동 다방에 세 차례 다녀갔던 행적이 경찰조사결과 확인됐다.
신의 도피 원칙중 하나가 “길을 모르는 곳엔 가지 않는다”이다. 지리를 잘 아는 곳에서 활동하는 것.
신이 남긴 수기에 보면 “김제에 가기로 했다. 집에 갈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곳은 내가 잘 알기에 되도록이면 잘 아는 곳, 지리를 잘 아는 곳이 나을 것 같았다”는 구절이 있다.
1985년부터 신은 활동무대를 용산구 이태원으로 옮겼다. 당시 이태원에서 나이트클럽 웨이터로 일했던 신의 고향 친구 윤모(31) 씨는 “창원이가 절도에 자신감을 가지기 시작했던 때가 85년경”이라며 “한번은 ‘대도 조세형도 나한텐 안될 것’이라고 자신있게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같은 해 7월 신은 이태원 한 가정집에 침입해 양복과 현금 등 230여만 원 상당의 물품과 돈을 훔친 죄로 다시 구속수감됐다.
1988년 출소한 신은 1989년 강도살인죄로 검거되기 전까지 서울 강남구 역삼동 라마다르네상스호텔 주변 유흥가와 송파구 천호동 마천동 일대, 그리고 강북의 장안동과 청량리역 주변에서 주로 활동했다.
당시 신이 가졌던 목표는 술집이나 나이트클럽의 잇권을 가진 조직의 일원, 즉 ‘건달’이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목표는 끝내 이루어지지 않았다.
청송교도소와 부산교도소에서 신과 함께 복역했던 이모(43) 씨는 “싸움과 투지에서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던 창원이는 건달이 되기 위해 기회를 엿봤지만 끌어줄 람을 끝내 만나지 못했다”고 말했다.
교도소에서도 신은 ‘건달’들을 사귀기 위해 무척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는 것이 이씨의 설명.
“창원이는 교도소 안에서 현금처럼 유통되는 담배가 손에 들어오면 대부분을 건달들에게 주면서 친해지려 애썼다. 건달들도 창원이의 의리나 싸움실력을 인정했고 서로 잘 지내긴 했다. 하지만 그건 괜히 창원이와 시비가 붙으면 자기들이 깨질 것을 알았던 ‘건달’들이 편하게 지내기 위한 술수에 불과했다. 그들은 이용가치가 없으면 과감히 버리는 놈들이다. 무기형을 받아 빨라봤자 마흔 살이 넘어 출소할 창원이를 누가 진정으로 인정했겠느냐. 창원이에게도 여러번 말했지만 설득이 안됐다.”
맨몸으로 싸우면 웬만한 ‘어깨’ 5명 정도는 손쉽게 쓰러뜨릴 수 있을 정도로 싸움을 잘한다고 교도소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던 신. ‘능력’은 있는데 아무도 받아주지 않자 신은 도둑질과 ‘퍽치기’(술취한 사람을 때려 정신을 잃게한 뒤 돈을 뺏는 것)에 몰두했다.
당시 천호동 P나이트클럽 웨이터로 일하면서 신을 친형처럼 따랐던 양모(28) 씨는 “형이 당시 얼마나 퍽치기를 많이 했는지 천호동 마천동 일대 유흥업소 업주들 대부분이 장사 망친다고 형이 나타나는 것을 싫어했다”고 말했다.
신이 ‘첫사랑’ 이모(27) 씨를 만난 것은 이때. 당시 신의 나이 21세 였고 이 씨는 신보다 4살이 어렸다. 이씨에 대한 신의 감정은 올 7월 서울 강남구 포이동에서 발견된 수기에서도 잘나타난다.
“… 10여일을 떠돌다 ○○이(동거녀 강 씨)를 알게 됐고 ○○이(강 씨)의 모습이 ○○(이 씨)와 닮은 점이 너무 많았다.그 때문에 정이 갔고 그녀와 동거를 시작했다. …첫사랑 ○○를 잊는데 6,7년이 걸렸다.… 내가 사랑했던 세 여인들(첫사랑 이 씨,동거녀 전 씨, 강 씨를 지칭)을 힘들게 하지 말기 바란다. 만약 이들 중 한명이라도 잘못됐다는 말이 내 귀에 들어오면 그때는 엄청난 결과가 있을 것이다…”
신은 이 씨와 함께 천호동 마천동과 경기 성남시 일대를 주로 돌아다녔고 특히 신의 후배 곽모(27) 씨의 커플과 자주 만났다. 곽씨의 당시 애인은 최모(27) 씨로 이 씨와는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
이들 4명은 신과 곽씨가 강도살인죄로 경찰에 쫓길 때까지 거의 붙어 지내다시피 했다.
당시 신은 직접 조직을 만들어 혼자 힘으로 건달이 되기로 결심하고 그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후배들을 끌어 모아 강도행각을 벌이기 시작했다.
경찰조사 결과 당시 신은 천호동 장안동 영등포동 등 서울 곳곳의 여관에 5, 6개의 아지트를 두고 활동한 것으로 밝혀졌다.
그 와중에 벌어진 일이 1989년 3월28일 서울 성북구 돈암1동 골목길에서 문구도매상 김모(당시 37세) 씨의 돈을 뺏고 김씨의 처남 정모 씨를 칼로 찔러 죽인 사건.
김씨의 돈 3280여만 원도 뺏어 달아났다. 신과 함께 이 범행을 저지른 사람들은 곽씨를 포함해 모두 5명. 이들 중 K(31) 씨는 당시 김 씨가 운영하던 문구점의 종업원으로 있었기 때문에 김 씨가 가방에 돈을 넣고 귀가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처남 정 씨와 함께 귀가하는 김씨의 돈을 뺏던 이들은 반항하는 정씨를 칼로 찌르고 쇠파이프로 때려 숨지게 한 것.
전치 4주의 상처를 입은 김 씨는 K 씨의 얼굴을 기억했기 때문에 경찰의 수사가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다음달 1일 경찰은 신 등 6명이 술을 마시고 있던 경기 구리시 교문동 N스탠드빠를 덮쳤다. 이날 K 씨 등 5명은 붙잡혔지만 신은 경찰과 격투를 벌이다 도망쳤다. 이때부터 신은 경찰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애인 이 씨와 서울 대구 대전 전주 등의 여관을 전전하다 6개월 만에 경찰에 붙잡혔다.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