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다한 이야기]떠나갔던 현대차 예금이 돌아왔지만…

  ‘떠나갔던 예금이 돌아왔다.’ 현대건설 인수와 관련해 한때 대립각을 세웠던 현대자동차와 외환은행이 관계회복에 나섰습니다. 현대차그룹이 현대건설 인수 관련 양해각서(MOU)를 체결한 이후 다시 예금을 예치하고 나선 것이지요. 외환은행 관계자는 “예금이란 것이 유동적인 성격이라 액수를 특정 짓긴 힘들지만 현대차그룹이 수천억 원 가량을 재예치했고 무역금융 등 외국환거래도 정상적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는 이어 “인출해 다른 금융회사에 예치한 자금의 만기도 있고 해서 과거의 액수보다는 다소 줄었지만 예금규모를 떠나 거래가 정상화됐다는 의미가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사실 수십 년 간 주거래은행과 관계기업으로 돈독한 사이를 맺어왔던 현대차그룹과 외환은행의 관계가 삐그덕거린 것은 현대건설의 인수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현대차그룹은 지난해 12월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을 비롯한 채권단이 현대건설 인수 우선협상대상자로 현대그룹을 선정한 것에 문제를 제기하며 주거래은행인 외환은행으로부터 예금을 인출하기 시작했지요. 공식적으로는 그런 일이 없다고 부인했지만 급여모계좌 해지까지 이어졌습니다. 당시 그렇게 현대차그룹에서만 총 1조4000억~1조5000억 원의 예금을 빠져나갔습니다. 외환은행은 “이정도 금액에는 영향을 받지 않는다”라며 짐짓 침착한 반응을 내놓았으나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고요.

 

  이토록 틀어졌던 관계가
현대건설이 다시 현대차로 넘어가면서 회복 무드입니다. 현대차와 채권단 간의 현대건설 인수 우선협상대상자 MOU가 체결된 이후 예금 거래 회복이 이루어진 것이지요. 현대차로서도 현대건설 문제가 마무리됨에 따라 외환은행과도 ‘갈등’을 덮는 조치를 할 필요성이 있다고 판단했고,
기업금융에 장점을 지닌 외환은행으로서도 오랜 주거래기업인 현대차를 놓칠 수는 없었겠지요.

 

  이렇게 해서 2개월여 만에 예금이 돌아오긴 했지만 외환은행은 이번 일을 ‘쉬쉬’하며
별로 드러내고 싶어하지는 않는 분위기입니다. 마치 모양새가 현대건설 인수문제를 두고 현대차의 미움을 샀던 외환은행이 MOU를 체결하고 나서야 그 대가로 예금을 찾아온 것 같은 모양새니까요. 이번 사태를 통해 주 거래은행과 대기업간의 역전된 위상이 여실히 드러났다며 금융권에서도 전반적으로 씁쓸하다는 반응입니다. 유동성이 풍부해진 대기업들이 여차하면 금융기관을 상대로 해 고강도 압박에 나설 수 있다는 점이 증명됐기 때문이지요. 기업들이 주거래은행 눈치를 봐야했던 건 이제 한참 지나간 ‘과거’임을 은행들이 인정해야 할 때가 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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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무너져도 삶은 계속된다, 파당에서 만난 사무엘

10월 8일부터 12일까지 짧다면 짧은 출장을 다녀왔다. 인도네시아의 파당 지진현장으로.

자카르타에서 다시 비행기를 타고 4시간 정도 들어가야 하는 곳이 파당이기에
정작 그곳에서 완전히 머무른 것은 고작 2일 이었다.

 

‘이미 지진이 발생한지 일주일여가 지난 도시에서 2일동안 무엇을 취재해야할까’
비행기 안에서 참 많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막상 현장에 가자 취재계획은 다 헝클어졌다.
‘수백명의 실종자가 발생한만큼 실종본부가 차려져있고 그 안에 가족들이 모여있고,
마을마다 학교에 임시대피소가 있겠지.’ 이건 웬걸, 그곳에 그런 ‘본부’는 없었다.
실종자 가족은 실종자 가족대로, 집이 무너진 사람들은 집이 무너진 대로 그냥 ‘살아내고’
있었다. 뒤틀린 땅위에서 여느때 처럼 삶을 살아내고 있는 사람들, 그곳엔 그런
평범한 가족들의 이야기가 넘쳐나고 있었다.

 


 

 

  파당 유엔본부로부터 동쪽으로 5km가량 떨어진 한 작을 마을. 마을
입구에는 하얀 돌 더미가 산을 이뤘다.  마을의 무너진 집들의 자재를 모아놓은
것. 중간 중간 지진의 피해를 입어 무너진 집들 사이로 반쯤 무너져 더 이상 지낼
수 없는 집을 포크레인으로 처리하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그 한가운데는 사무엘의
집도 있었다. 무너진 외벽 사이로 무심한 햇빛이 쏟아졌다. 간신히 지붕만을 유지하고 있는
집, 그 앞
마당
한 구석에는 지진을 피해 간 램프와 이불 몇 가지만이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이들만 남겨두고 집을 비웠는데 지진이 났다는 소식에 20시간
넘는 거리를 울면서 왔지요” 자신의 집을 바라보며 지진의 기억을 떠올리던 어머니는
네 아이들과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다 다시금 감정이 벅차오르는지 눈물을 훔쳤다.
의젓하게 어머니 옆을 지키던 네 아이의 얼굴에도 그늘이 드리웠다.

  9월 30일 지진 당시 어머니와 아버지는 조금이라도 일 삯이 높은
곳을 찾아 집을 비운 상태였고 집에는 큰 딸, 작은 딸, 셋째 딸, 그리고 막내아들
사무엘 넷뿐이었다. 여느 때처럼 집에서 각자 놀고 있던 때, 갑자기 집이 위아래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것이 지진인지 아닌지를 생각할 여유도 없이 집 밖으로 뛰쳐나왔죠.”
다행히 큰 누나를 따라 네 아이들 모두 무사히 집을 빠져나왔다. 그들이 집을 빠져나오자마자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외벽은 무너져 내렸다. “그땐 제대로 핸드폰도 터지지 않았던
때였는데 기적적으로 큰 딸과 통화가 됐고 지진이 났다는 이야기를 들었죠” 얼마나
황망했는지 몰랐다는 어머니는 “이렇게 한 명도 다치지 않고 무사히 살아 있어준
것에 감사할 따름이지만 앞으로 집은 어떻게 하고, 물과 음식은 당장 어떻게 해야
할지가 막막하다”고 되뇌었다.

  지진이 쓸고 지나간 집안 풍경은 밖에서 바라보는 것 이상이었다.
그나마 지붕은 건사했지만 한쪽 벽은 완전히 무너져 있었다. 가재도구는 모두 쓸려져 망가졌다. 외벽이 무너져 내린데다가 집안 구조가 완전히
흔들린 뒤라 언제 나머지 집도 무너질지 모르는 상태. 실제로 가족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집 외벽에서는 흙 떨어지는 소리가 간간히 들렸다. 가족들은 임시방편으로
집 옆에 슬레이트 지붕을 얹어 임시 방을 만들었다. 사무엘이 안내한 그 임시 방
안에는 가족들이 모두 다 함께 사용하는 침대 하나만이 덩그러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의 공부가 가장 큰 걱정이라고 했다. 지금 큰 아이가
고등학교 1학년, 둘째가 중학교 2학년, 셋째가 중학교 1학년, 막내가 초등학교 4학년으로
다들 한창 열심히 공부해야 할때 인데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하느냐는 것. 아이들의
책과 책상 등도 이번 지진으로 모두 망가져 버렸다. 네 남매가 함께 다니던 학교도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임시 휴교상태인 학교는 다음주부터 텐트에서 수업일 시작하기로
했다. 하지만 제대로 수업이 이루어질지는 미지수. 넉넉지 않은 가정형편에서도 각기
다른 꿈을 꾸며 공부를 해온 네 아이들. 우수한 성적으로 어머니의 자랑인 첫째는
법조인을, 둘째와 셋째는 경제학을, 막내 사무엘은 공무원을 꿈꾸고 있다고 했다.
“공부를 계속 하고 싶었는데 갑자기 이렇게 학교도 무너지고 집도 무너져버리고
나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머니는 아이들의 어깨를 보듬었다. “지진으로 안 그래도 힘든데
우리 건설 일용직이 할 수 있는 일이 더 줄었어요. 지진 난 다음에 누가 집을 지으려고
하겠어요. 그래도 우리 아이들이 공부를 계속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생각이에요.
아이들만은….”

 

 


  말이 통하지 않아도 내가 무얼원하는지 사무엘은 귀신같이 알았다.
내가 집안을 헤매자 손을 잡아끌고는 자신들이 현재 지내고 있는 무너진 집옆 슬레이트
방을 보여줬다. 침대만 덩그러니 놓인 방에는 램프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그 침대에서
6명의 가족이 잠을 청하는 듯 했다. 지금도 사무엘은 그 슬레이트 방에서 벽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으며 잠자리에 들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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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종플루가 앗아간 7살 어린이, 그리고 부모님의 눈물

  아이가 있었던 방에는 아직도 연필깎기, 책가방 등 아이의 흔적들이 가득했다. 그리고
벽에 걸려있는 아이의 유치원 졸업사진. "유치원 졸업사진이 영정이 됐네요."
애써 감정을 억누르던 어머니는 아이의 이불을 방구석으로 치우다 결국 울음을 터트렸다.

                                                                                                                                                   10월
22일, 포천

 

 

  때 아닌 천둥 번개에 강한 바람까지 불어치던 16일 밤. 서울의 한 병원에서 아직 어리기만 한 일곱 살의 어린 생명이 졌다. 폐렴 증세로 28일 입원한 지 딱 19일만이었다. 보건복지가족부 중앙인플루엔자대책본부는 신종플루로 인한 사망이라고 발표했다. 지난달 28일 입원 후 상태가 호전되는 듯 보였고 그날 아침만해도 쥬스를 마시고 ‘닌텐도’ 게임을 하며 시간을 보냈었던 A군. 하나뿐인 자식이 갑자기 숨지자 엄마는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 아빠는 그 옆에서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이틀 뒤인 일요일, 맑게 갠 하늘과 따사로운 가을 햇살을 뒤로 하고 A군은 한줌의 재가 됐다.

  기침과 발열증상을 보인 A군이 포천 집 근처 병원에 처음 갔던 것은 25일 오후였다. 생활에 큰 문제는 없으나 뇌병변6급을 갖고 있는 등 평소 약한 A군이었기에 부모는 A군의 열이 오르자 바로 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감기기운 같지만 열이 오르면 바로 병원으로 올 것을 당부했다. 26일 새벽 아이는 열로 펄펄 끓었고 같은 병원 응급실을 찾아 당직의사로부터 신종플루 간이검사를 받았다. 결과는 음성판정. 의사는 해열제를 처방해주며 “주말이 지나도 증상이 계속되면 오라”고 말했다.

  주말엔 잠깐 상태가 나아지는 듯 했다. 28일 월요일에는 손을 흔들며 학교도 갔다. 하지만 학교에서 오전 11시 전화가 걸려왔다. 아이의 열이 심각하니 데려가라는 것. 부모는 처음 찾았던 병원에 가서 “이미 간이검사에서 음성판정을 받았으나 열이 있고 호흡이 매끄럽지 못하다”는 내용의 소견서를 받아 의정부의 큰 병원에 입원시켰다. 이곳은 정부에서 지정한 거점병원이기도 했다. 병원은 아이에게 다시 한번 신종 플루 간이검사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또 음성판정. 동네 병원에 이어 입원병원에서도 음성판정이 나오니 부모는 안도했다. 신종플루 검사에서 음성판정이 나옴에 따라 입원 초기 3일간은 항바이러스제 투여 등 적극적인 치료는 전혀 이뤄지지 않았다. 아이가 올해 초에도 폐렴을 앓는 등 몸이 약한 편이라 불안하긴 했지만 신종플루가 아니라고 하니 부모는 병원의 조치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아이는 약한데 항바이러스제 그냥 맞춰주면 안되나’라는 생각도 했지만 괜히 불안해하지 말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잡았죠.”

  하지만 아이의 고열은 심상치 않았다. 중환자실과 일반병실을 오가다 결국 10월 1일부터 항바이러스제가 처방됐고 정밀검사(PCR:유전자검사)로 다시 한번 신종플루 검사를 했다. 추석이 지나 10월 5일, 부모는 귀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신종플루 확진판정이 나온 것. 앞선 두 차례 모두 간이검사(신속항원검사)로 오류가 나올 확률이 높다라는 게 뒤늦은 설명이었다. “검사 당시에 그런 설명이 전혀 없어 음성판정에 안심했고 단순폐렴이라 생각했죠. 국민 중 누가 이런 부분까지 알았겠습니까?” 두 차례 검사에서 신종플루가 확인이 안돼 발열이 시작된 지 6일, 입원한 지 3일이 지나서야 약이 처방됐고 입원한지 일주일이 지나서야 확진판정을 받은 A군. 그 뒤 열심히 치료가 이루어졌지만 아이의 상태는 오르락내리락을 반복했다. 16일 상태는 오후들어 급격히 나빠졌다. 마지막 방법으로 서울의 병원으로 옮겨 보기로 했고 119구급차를 타고 서울을 향했다. 하지만 호흡이 점점 더 불안해지던 아이는 서울 도착 후 한 시간 넘게 이루어진 심폐소생술에도 불구하고 16일 부모의 곁을 떠났다.

  아이의 거짓말 같은 죽음 후 부모들에게 또 하나의 충격적인 소식이 찾아왔다. 아이의 초등학교 측은 같은 반 친구가 신종플루 확진판정을 받고 치료를 받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된 것. 지난 9월 중순 4학년 학생에 이어 A군이 입원하기 직전에 같은 반 친구가 신종플루 치료를 받았던 것을 뒤늦게 안 가족들은 왈칵
눈물을 쏟을 수 밖에 없었다. “이를 미리 알았으면 입원시킬 때 그 사실을 의료진에게 알리고 좀더 철저한 치료를 요구했을텐데…..”

  슬픔에 잠겨있는 가족들은 애써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아이를 지켜주지 못해 미안하면서도 우리아이가 운이 나빴다, 허술한 시스템이 아이를 위험에 빠트렸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퉁퉁 부은 비비던 어머니는 말했다. “제발 이런 일이 다른 아이들에게 다시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에요.”


  날씨가
쌀쌀해지면서 신종플루가 점점 더 확산되는 기미다. 22일 자신의 아들과 같은 죽음이
더이상 없었으면 하는 게 이들 부모님이 되풀이해서 밝힌 바람이었는데…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아파트 문앞까지 날 배웅하던 어머님의 모습이 갑자기 떠오른다.  언제나
유가족 취재는 마음이 괴롭지만 어머님이 너무 순수하셔서, 그런 분에게 아들을 떠오르게
하는 질문들로 또 눈물을 잔뜩 빼놔서 이날은 배로 아프고 발길이 배로 무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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