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기자가 본 기자-숙직

그 안에 있으면 죽을만큼 힘들어도, 한발짝 떨어져서 보면 치열했던 그 시절이 참으로 그리운 곳.남자들이 그렇게 싫다 싫다 하면서도 모이기만 하면 군대시절 이야기를 하는 심리와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사진이 인상적이어서 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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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라면 누구나 숙직을 한다.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하기 때문에 숙직은 쉽지 않다. 큰 사건은 왕왕 밤에 일어난다. 작년 이맘 때 일어났던 남대문 화재를 취재했던 기자들은 다 숙직 근무 중이었다. 숙직 하는 어떤 날은 죽을 만큼 고생을 하는 가 하면 어떤 날은 별다른 사건이 없이 지나가기도 한다. 숙직을 어느 직위의 기자까지 해야하는 가는 신문사마다 다르다. 대개 차장이상의 간부급 기자들은 숙직을 하지 않지만 부장까지도 하는 회사가 있다. 기자중에 제일 높은 편집국장도 철야 근무에서 예외가 아니다. 9.11테러가 났을 때 편집국장을 비롯한 많은 간부들과 기자들은 밤을 지새며 신문을 제작했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토고전 때도 마찬가지 였다.

 

신문은 사람이 만들기에 기계가 숙직을 대신 할 수 없다. 어느 부서든 철야 근무를 하는 기자가 부장이 퇴근 한 후의 상황을 책임진다. 숙직이라고 해서 뜬 눈으로 지샐수는 없다. 신문사의 윤전기가 멈추는 시간은 새벽2-4시 사이. 강판이 끝나야 눈을 붙일 수 있지만 사건은 바로 그 때 일어나기도 한다. 긴장하면서 잠을 자니 2-3시간을 잤어도 잔 것 같지가 않다.

 

숙직 후 맞는 신새벽에 몸은 물에 젖은 솜과 비슷하다. 필자는 내가 맡은 시간이 무사히 지났다는 것이 숙직 후 느끼는 가장 큰 보람일 정도로 숙직을 버거워했다. 지금은 모든 신문사가 번듯한 숙직실이 있는 편이지만(어떤 회사는 아직도 의자에서 잠을 잔다.) ”기자가 바라본 기자”(전민조 지음.대가)에는 ”옛날 옛적”의 숙직 모습을 기록한 사진 몇 장이 있어 눈길을 끈다. 그 안에는 우리 눈을 의심케 하는 광경도 있다. 숙직의 역사에 꼭 들어가야 할 기록으로도 손색이 없다. 그것을 모아 봤다.

 

사진제공 전민조 선배.

 

겨울밤의 야근기자:겨울의 칼바람이 창가로 스며드는 깊은 밤,조광식(동아일보 체육부)기자가 책상위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전화를 받고 있다. 광화문 구사옥의 편집국 3층 천장에는 쥐떼들이 소란을 피웠다. 기사 쓰고 전화 받고 자장면 시켜먹는 책상에 그대로 이불을 깔고 야근을 해야 하는 곳. 사회부 K기자가 중국집에서 탕수육과 배갈을 시켜 먹고 정신없이 이렇게 자다가 쥐가 입술을 물어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던 장소였다. 1977.1.14 동아일보 편집국

 

  사진 해설에 놀란 만한 사실이 들어있다. ”….쥐가 입술을 물어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던 장소였다” 필자도 책상위에서 잠을 자면서 숙직을 하긴 했지만 나무 책상은 아니였다. 필자가 입사했을 때는 철제 책상이 동아일보 편집국에 있었던 것 같다.

 

장소도 3층이 아니라 4층 이었다. 숙직 할 때 기자들은 부국장 자리에 모여 소주잔을 나누기가 일쑤였다. 술 고래가 있으면 골아 떨어질 만큼 술을 마셨던 기억이 있다. 쥐가 입술을 물었던 기자가 누구였는지는 모르지만 꽤나 마셨기에 안주를 입에 물고 자다가 당했을 것이다. 

 

전화기와 책상은 물론이고 이불도 지금과 다른 모습을 보니 생소하기 이를데 없다.

 

편안한 자세:유영종(한국일보 편집부)부장이 세상에서 가장 편한 자세로 신문을 읽고 있다. 한국일보 기자들은 타사 기자들에게 없는 사풍(社風)이 존재했다. 사장이 책상 옆을 지나쳐도 군인처럼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는 모습이 별로 없었다. 기자가 독자를 사로잡는 좋은 사진과 좋은 기사를 쓰는 것이 목적이지 윗사람의 눈치나 살피는 사원들을 사장이 싫어했기 때문이다. 그런 분위기에 젖어있다가 다른 직장에 놀러가면 반듯하게 앉아이쓴 사원들이 굉장히 어색하게 보일 정도였다. 1972.7.19 한국일보 편집국

 

  지금도 신문사에서 가끔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유부장의 표정에는 ”진을 뺀” 흔적이 있다. 그럴 수 밖에 없는 것이 ”그 날의 승부가 그 날”나는 기자라는 직업을 가졌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겼는지 졌는지를 신문 쟁이들은 당일 날 안다.” 최선을 다했지만 남들이 더 잘했으면 진것이고 상처를 받을 만한 사진이나 기사가 타지에도 없다면 비긴 것이다.

 

매일 이길 수도 없고 매일 질수도 없다. 가끔 이기고 지지만 기자들은 그것을 못 참는다. 한 방이라도 먹으면 매우 아프게 여기기에 사진과 기사, 편집에 있는 힘을 다 쏟아 붓는 것이다. 

 

쓰러진 사진기자:월간지 기자들은 마감 시간이 한 달에 한 번 이지만 일간지 기자들은 매일 온갖 형태의 뉴스를 하루에 마감시켜야한다. 대형 사고라도 일어나면 기자들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몸을 몰아붙여야만 한다. 회사가 사진기자의 인격을 위해서 할애해 주는 시간은 없다. 아무 근거도 없는 보도 원칙에 익숙해서 뛰다 보면 몸은 어김없이 파김치가 된다. 두 명의 사진기자가 암실의 빈 공간에 아무렇게나몸을 눕히고 눈을 감았다. 1974.5.17 한국일보 사진부 암실

 

  사진과 해설에 전민조선배의 사진기자가 홀대를 받는 것에 대한 회한이 배어있다. ”회사가 사진기자의 인격을 위해서 할애해주는 시간은 없다.”라는 문장의 행간에 전선배의 서운함을 읽는다.

 

많은 사진 중에 이 사진을 고른 걸 보면 어려운 시절에 사진기자를 했던 것에 대한 ”억울함”이 있는 게 아닐까. 지금은 많이 나아졌지만 신문사에서 사진과 사진기자에 대한 인식은 높다고 말할 수 없다.

 

이미지의 중요성이 그 어느 때보다 강조되고 있지만 사진기자를 바라보는 신문사 내의 시각은 그렇지 않은 것이다. 선배의 기록은 사진기자의 열정 표출과 사진의 힘이 얼만큼 인지 보여주고자 하는 홀대 받는 젊은 사진가의 오기의 결과물일수도 있다.

 

바닥에 누웠지만:야근기자가 책상 밑의 바닥에 자리를깔고 누웠다. 기자가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한 직업이지만 어둠을 밝히려는 직업이어서 기자들은 바닥에 아무렇게나 누워도 당당했다. 1973.5.10 코리아 타임스 편집국
 

    독특하게 바닥에 이불을 깔았다. 이유는 타자기 때문일 것이다. 책상에는 타자기들이 놓여있는 걸로봐서 기사를 타이프라이터를 이용해 썼던 것 같다. 당시는 한글 타자기가 없었기에 국문 신문들은 다 원고지에 기사를 썼을 때였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누워있는 기자의 팬티다. 삼각도 아니고 사각도 아닌 것이 묘하게 생겼다.

 

더 인상적인 것은 영자지를 보고 있다는 것이다. 하루 종일 영어와 씨름하다 보면 머리가 지끈 거릴만도 한데 다시 영어 신문을 보고 있으니 아무리 영자지 기자이지만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깔끔하게 깎은 머리와 검은테 안경과 마른 체격에서 신문을 보고 있는 기자가 상당히 깔끔한 성격의 소유자처럼 보인다.

 

  사건은 예고 없이 일어난다. 그래서 숙직이 필요하다. 세상이 아무리 발전해도 뉴스를 다루는 직종에 있는 사람들은 숙직을 할 것이다. 위 사진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귀중한 자료가 될 것이다.

 

                                                                                              다음 포스팅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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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과 386은 강호동에게 사죄하라

내가 대학을 입학한 90년대 중반의 분위기란, 운동권이 비주류가 되는 세상이었다. 졸업 후에는 IMF 경제위기의 직격탄을 맞아, 청춘을 바쳐 가까스로 따낸 명문대 졸업장이 별 게 아니라는 걸 처음 알게 된 세대가 아닌가 싶다. 일찍부터 먹고사는 문제를 고민해야 한 탓일까, 운동은 내게 낯설다. 내 앞가림도 못할 처지에 나라 걱정으로 춘투(春鬪)에 나서는 게 내겐 어쩐지 허영같았다.

 

역사의식의 부재, 그게 우리 90년대 학번이 80년대 학번으로부터 줄기차게 들어온 구박이다. 자기들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세대, 이념적으로 나이브(naive)한 세대. 그렇다. 우리는 80년대 학번처럼 역사를 변화시킨 세대가 아니다. 이미 앞선 세대가 피와 땀으로 일궈낸 번영과 성장에 밥숟가락 하나 얹은 세대다. 민주화는 이미 이뤄져있었고 경제도 어느정도 성장된 이후라 우리는 뭘 해야 하나 막막했다.

 

한국전쟁 이후로 풍요롭게 자란 첫 세대지만 내면은 딱히 그렇지가 않다. 앞으로는 세계화인지 뭔지, 무한경쟁의 시대가 온다더라, 그러니 앞으로 정신 똑바로 하고 내 밥그릇을 잘 챙겨야 한다는 ”벼랑끝 정신”으로 무장한 세대다. 서울대만 나오면 만사가 오케이일 줄 알았더니 영어도 잘해야 하고 외국 학위도 하나쯤 있어줘야 한다더라. 그러니 작은 기득권이나마 일단 잡으면 절대 놓지 않으려 하게 되고, 한마디로 보수화되는 성향이 강했다.

 

때아닌 세대차이 타령을 늘어놓는 것은 뜬금없게도 유재석과 강호동 때문이다. 얼마전 강호동이 MBC 연예대상을 차지한 것을 두고 유재석 팬들이 말이 많았다. 처음에는 어차피 짜고치는 고스톱같은 방송사의 연례행사가 뭐 대수라고, 그러나 세상에는 별의별 사람이 많으니 내겐 별 것 아닌 문제도 누군가에겐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겠거니 했다. 그런데 유재석 팬 회원들이 강호동의 대상 반납을 촉구하는 서명운동 카페를 인터넷에 열었다는 대목에서, 정말이지 확 깼다. 그리고는 생각했다. 이건 정말 아니다.

 

한국인에게는 마음에 안들면 무조건 떼부터 쓰고보는 고약한 버릇이 있다. 지난번 최진실씨의 전남편 조성민씨의 친권을 둘러싼 논쟁에서도 전국민이 들고 일어나 인터넷에 카페를 만들고 서명운동을 벌였다. 조성민의 친권회복을 반대한다는 것이었다. 개인적으로 조성민씨의 행동이 비난을 살만한 여지가 있었다고 보지만, 남의 가정사를 두고 제3자가 이래라저래라 서명운동까지 벌이는 건 분명 오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친권에 대한 가족법상의 헛점을 고치자는 운동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도 감히 입밖에 내기 어려워하지만,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이것이 바로 한국사회의 ”운동만능주의”의 병폐라고. 시민권력은 언제나 정치적으로 올바르기 때문에(politically correct), 누구도 쉽게 비판하지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언젠가부터 국가나 정권은 항상 악(惡)이자 가해자로, 시민은 언제나 선(善)이자 피해자로 역할지워 스스로 만들어낸 박해의 망상 속에 성토할 대상을 찾지는 않았을까.

 

얼마전 일제고사를 둘러싸고 폭풍같은 논쟁이 들끓었을 때도, 내 개인적으로는, 교사들이 부당한 것에 대해서는 투쟁하되 제발 아이들에게는 일단 국가가 지시한 바를 따르도록 할 것을 바랐다. 굳이 넬슨 만델라 대통령의 준법투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아직 가치관이 정립되지 않은, 그래서 휘둘리기 쉬운 아이들에게 자기들 주장을 주입하는 것은 어딘가 비겁해보였다. 초등학생들까지 길거리로 나앉아 피켓을 들고 울며불며 참교육 실현을 외치는 사진을 보고, 나는 교사들에게 정말 말하고 싶었다. 이건 정말 아니다.

 

최근 국회의장실을 점거한 민주당의 행태를 보면서도 동일한 절망감을 느꼈다. 민주주의라는 게 무엇인가. 국민의 선거를 통해 권력을 확보한 당이 행정과 입법을 책임지는 것이다. 민주당이 국민의 사랑을 얻지 못해 총선에서 다수 의석을 차지하지 못했다면 어쨌든 4년간은 야당으로써 할 수 있는 최선을 해야 한다. 그게 더럽고 아니꼬우면 절치부심해서 다음 총선때 국민의 다수표를 확보하면 된다. 총선이라는 게 어차피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 민주주의의 룰인데, 상황이 불리하다고 해서 번번이 의사봉 못 두드리게 완력을 사용하거나 의장실을 점거하는 건 반칙이다.

 

대한민국 국회의 이런 행태가 외국언론에 보도되고 그 어이없는 사진까지 실리는 것은, 대한민국 국회의원이 특별히 폭력적이거나 양아치라서, 혹은 서방 세계의 국회의원들이 특별히 점잖고 신사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바로 그 룰, 정권을 차지하면 다수당이 정책을 입안하고 행사하기로 한 바로 그 룰을 너무 쉽게 깨뜨리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소수당의 국회의원들이 주먹을 부르르 떨만큼 분하고 억울해도 룰을 깨뜨릴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이건 이념의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진보진영이 유독 더 그러한 것도 아니고, 보수진영이 소수자가 되면 마찬가지로 동일한 일이 발생할 것이다. 요지는 한국인들은 이념을 떠나 일단 내 맘에 안드는 일이 실제로 발생할 것 같으면 드러눕고 본다는 것이다. 심지어 유재석이 받아야 할 상을 강호동이 받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강호동에게 상을 도로 토해내라고 서명운동까지 받는 나라다. 혹자는 이러한 징후들이 활력있는 시민사회의 모습을 대변한다고 하겠지만, 내 생각엔 이제 건강한 수준을 넘어섰다.

 

나의 이런 발언들은 매우 위헙하다. 앞서 장황하게 90년대 학번의 특징을 운운한 것도, 이러한 나의 의견이 편향된 시각일 수 있음을 고백하기 위함이다. 나는 운동이 익숙하지 않은 세대적 특징을 가지고 있고, 온갖 매체들이 세계화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며 무한경쟁의 으름장을 놓던 시대에 20대를 보낸 사람이다. 그래서 내 이같은 견해는 그런 시대적 배경을 반영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좀 반대를 할 때 하더라도 일단 드러눕고 보는 행태는 그만했으면 좋겠다.

 

나는 이것이 독재정권의 업보요, 민주화운동의 의도치 않은 결과(unintended consequences)라고 생각한다. 너무도 길고 혹독했던 독재정권의 트라우마가 아직도 국가를 절대악으로 위치짓게 만들고, 그래서 국가가 하는 일이라면 일단 반대부터 하고보는 습성을 만든 것은 아닐까. 거기에 민주화 운동을 성공시킨 엑스터시가 가미되어, 도저히 불가능해보였던 폭압적인 독재정권을 타도하고 그 장본인을 법정에까지 세운 경험이, 뭐든지 운동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운동만능주의적 사고를 가중시킨 것은 아닐까.

 

그런 점에서 나는, 졸지에 받은 상을 토해내라는 어이없는 요구에 상을 아니 받은만 못한 찝찝한 경험이 되어버렸을 강호동에게 독재정권과 민주화세대 모두가 빚을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 우리사회에 필요한 것은, 사회운동보다 개념을 챙기는 일이다. 과연 시민권력은 반드시 늘 옳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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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에게 동방신기를 허하라

 

<골든디스크 시상식 2008, 대상을 수상한 동방신기, 사진 속은 최강창민>

 

 

30대에 들어선지도 이제 몇 해가 지나, 새삼 1년이 가고 한 살 더 나이를 먹는다는 것에 한탄을 하는 것도 이제는 쓸데없는 주접처럼 느껴지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혼자 운전을 할 때나 길을 걸을 때, 가끔씩 내 나이를 자각하고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다. 30대 초반도 아닌, 중반의 나이라는 것이, 마치 돌아올 수 없는 레테의 강을 건넌 것 마냥 두렵고 서글플 때가 있다.

 

해묵은 나이 타령을 집어들게 된 것은 물론 한 해가 또 이렇게 저물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실은 고백컨데 요즘 난데없이 동방신기가 좋아진 까닭이다. 아이돌 그룹을 좋아한다는 사실만으로 나이 값 못하는 주책없는 아줌마가 되어버리는 게 바로 삼십대 중반이라는 나이다. 그래서 나는 어디에 말도 못하고 혼자 방구석에서 몰래 그들의 동영상을 찾아보는 것으로 소심한 팬질을 하고 있다.

 

중고등학교를 통틀어 나는 한 번도 연예인에 빠져본 적이 없다. 내 입으로 고백하긴 쑥스럽지만 나는 공부밖에는 모르는 전형적인 모범생으로 EBS 대입수능방송을 제외하곤 일주일 내내 TV 근처에 가본 적도 없었다. 부모가 하지 말라는 걸 몰래 해 본 일은 더더욱 없다. 소위 요즘 인기가 있다는 외국어고등학교 출신으로, 공부 이외의 것에 관심을 갖는 것은 죄악시되는 환경에서 청소년기를 보냈다.

 

그렇게 해서 명문대를 가고 유학을 와 박사과정까지 밟고 있는 이 마당에, 난데 없이 아이돌 그룹이 좋아지는 것은 나의 유예된 사춘기에 대한 한풀이는 아닐까 하고 가끔 생각해보곤 한다. 그 나이에 해야만 정상적으로 간주되는 일들이 있게 마련인데, 나는 하지 못하고 지나온 까닭이다. 그런데 그게 난데없이 삼심대 중반의 나이에 동방신기라는 아이돌 그룹에 대한 사랑으로 찾아온 것이다.

 

어차피 내가 10대 혹은 20대였다 하더라도 동방신기와 내가 알게 될 가능성, 혹은 맺어질 가능성은 사실상 제로이므로 30대가 되었든 40대가 되었든 나이와 팬질은 별 상관이 없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나는 단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그들의 동영상을 볼 때마다 일말의 죄책감 혹은 부끄러움을 느낀다. 잘은 몰라도 사춘기의 남학생이 포르노 비디오를 보며 자위를 할 때 느끼는 감정과 비슷하지 않을까.  

 

그러면서 떠올린 것이 어줍잖게도 "젊음이 재산"이라는 어른들의 말씀이다. 시간의 추를 되돌린대도 그 전쟁같던 20대로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 있었던 건 서른을 갓 넘기던 몇 해 전 이야기로, 그나마 자신감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부릴 수 있었던 호기가 아니었나 싶다. 지금 누군가 내게 20대로 돌아갈 수 있게 해준다면 지금껏 모아둔 내 전재산을 그의 손에 덥석 쥐어주며 당연히 그러마고 말하겠다.

 

젊음은 분명 재산이다. 젊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이 용인될 때가 있다. 팬질도 용인되고, 삽질도 용인이 된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팬질은 노망이고 삽질은 추태가 된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광고 카피처럼 살 수 없다는 걸 어렸을 땐 몰랐다. 내가 설령 그렇게 살 수 있다 해도, 남들은 나를 그렇게 바라보지 않는다. 나는 그저 삼십대 중반의, 마흔을 바라보는, 여성도 남성도 아닌 그냥 아줌마일 뿐이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20대 때 나는 젊음이 재산이라고 생각지 못했다. 열린 가능성보다는 좁혀진 안정성을 갈구했다. 좀처럼 가지 않는 이 상처뿐인 지루한 이십대가 어서 지나가주길 기다렸다. 젊어서 좋겠다는 어른들의 말씀도, 너희가 질풍노도를 아느냐며 반항하고 싶었던 그 때, 나는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게 결정돼 더이상 변할 게 없는 노인이고 싶었다. 모든 게 내 할 바에 달려있는 현실이 못견디게 부담스러웠다.

 

지금은 20대가 얼마나 아름다웠으며, 그 열린 가능성이라는 것이 얼마나 돈 주고도 못살 귀중한 것인지 잘 알지만, 달리 생각하면 10년이 지난 어느날 나는 또 30대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하고 있을 것이다. 그 땐 모든 것이 가능했는데, 하며 노인네 같은 소리를 읊조릴 것이고, 50대가 되면 또 마흔을 회상하며 그 땐 모든 것이 가능했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면 20대에도 30대에도 40대에도, 모든 것이 가능한 시절은 없다.

 

그래서 젊음은 재산이 될 수 없다. 마치 가지고 있을 때는 가치를 모르며 팔아버린 후에야 그 가치를 알게 되는, 모르고 팔아버린 재개발 아파트와 같다. 30대, 그 얼마나 아름다운 나이인가. 그러나 나는 20대에 대한 동경과 회상으로 30대를 낭비할 것이고, 마찬가지로 30대에 대한 회한으로 40대를 낭비할 것이다. 그래서 젊음은 언제나 현재가 될 수 없고 과거에서만 존재하게 된다.

 

동방신기에 대한 마음을 주체할 수 없을 때마다 혼자서 주문처럼 되뇌이는 말은, 그들도 늙는다는 것이다. 지금은 띠동갑 수준의 핏덩이지만, 그래서 그들을 좋아한다는 사실 조차 불경스러워지는 삼십대 중반의 나이이지만, 그들도 언젠가는 삼십대가 되고, 지금의 인기가 사라지고, 슬슬 살도 찌고 배도 나오고, 언젠가는 머리가 벗겨지는 멤버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그 때쯤이 되면, 나같은 팬이 지구상에 존재하는 것조차 모른다는 오늘의 현실이 덜 서럽게 느껴질 것이다. 잘못한 것도 없이 괜히 주눅이 드는 삼십대 중반이라는 나이. 그 언젠가 눈물겹도록 아름다웠던 시절로 기억될 지금을 온전히 즐기며 살아가기가 쉽지 않다. 백만분의 하나 동방신기가 나의 존재를 알게 되더라도, 누나도 아닌 아줌마로 기억될 나이라는 게 못내 분하고 서럽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시간이 지나가 주길 기다린다. 언젠가 동방신기와 내가, 같이 늙어가는 처지가 될 날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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